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6월 4일 壬戌 3/3 기사 / 1654년 청 순치(順治) 11년
북방을 튼튼하게 하는 계책에 대한 호조 정랑 이지형의 상소문
국역
호조 정랑 이지형(李之馨)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오랑캐를 북쪽으로 쫓아내어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으면서 육진(六鎭)을 두었으며 겸하여 3관(關)을 설치하게 하니, 변민(邊民)은 안정되고 국가는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오년013) 이후로 국내에 일이 많아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관계로 여러 대(代)에 걸친 금성 탕지(金城湯池)를 탐관 포리(貪官暴吏)의 손에 통째로 맡긴 결과 세포(細布)·초피(皮貂)·산삼(山蔘)을 정한 기간에 뒤질까봐 걱정하게만 하였으므로 군민(軍民)이 이리저리 흩어졌는데도 소홀히 여긴 채 괘념치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뒤에는 더더욱 형편없이 되어 굶주림과 추위는 날마다 절박해지고 긁어들이는 세금은 날마다 증가하여 천리 봉강(封疆)이 반이나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고(寧古)·후춘(厚春)의 두 오랑캐 종족이 우리의 경계와 서로 마주보는 곳에 거주하면서 대국(大國)의 위엄을 끼고 개시(開市)한다는 핑계로 우리의 변방 백성을 못살게 굴며 우리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사들이는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며 자질구레한 것으로 엄청난 것을 교환해가곤 합니다. 아, 북방 백성들의 재물이 이미 관리의 주구(誅求)로 고갈되고 개시의 폐단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백성의 생활이 극에 달하고 재물이 고갈되며 저들의 무리가 만 명에 차는 날, 전하께서는 북경(北京)의 위세로 저 오랑캐들의 수족(手足)을 붙들어 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지경에 이른 뒤에는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골라 수령을 삼고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뽑아 병사(兵使)를 삼더라도 필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북로 관방(關防)이 중요하며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왕업(王業)의 기초가 되었던 지역을 오랑캐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침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사(兵使)를 신중히 가리되 한결같이 조종조의 옛일을 따라 반드시 문무관(文武官) 중에서 청백(淸白)하고 강명(剛明)하여 진무(鎭撫)할 만한 사람을 차출하여 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열읍을 규검(糾檢)하고 한편으로는 저 오랑캐들에게 시위(示威)하도록 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또 돈을 아끼지 않는 관리를 선발하여 덕화(德化)를 펼치고 피곤한 백성을 잘 기르며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갑병(甲兵)을 수선하여 늠름히 적군과 대치할 마음을 품게 하여야 할 것은 물론, 진보(鎭堡)의 변장(邊將)들도 모쪼록 가려 뽑아서 전일의 일을 본받지 않도록 하면, 토병(土兵)은 휴식할 희망이 있고 변장은 절연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방의 병력이 북관에 부방(赴防)하는 것은 곧 조종조의 구례(舊例)인데, 지난번에는 북방이 무사했던 관계로 부방을 폐지하고 대신 군포(軍布)를 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경에 걱정이 많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방군(防軍)에게 군포 징수하는 규정을 속히 파하고 구례에 따라 나누어 주둔시킴으로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여겨집니다. 신은 또 듣건대 경성(鏡城)의 성곽(城郭)과 재덕성(載德城)·회령성(會寧城)은 성이 두텁고 높아서 굳게 지킬 만하다 하니 이곳이야말로 요해처(要害處)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금 의당 수선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수어(守禦)에 대비하면 필시 후일 위급한 때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또 삼가 보건대 길주(吉州)는 지세가 사방이 평지로서 이름난 산과 큰 내의 막아줌이 없는 반면, 단천(端川)은 마천령(磨天嶺)과 마운령(磨雲嶺) 사이에 끼어 있어 그 험준함을 의지할 만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단천에 중진(重鎭)을 이설(移設)하여 북방을 눌러 지키면 군마(軍馬)가 필시 넘어서 멋대로 달릴 마음을 감히 내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로써 자강 응변(自强應變)하는 도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읽고는 가상하게 여겨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해 시행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형의 사람됨이 필시 용렬하지 않을 것이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탁용(擢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 [註 013]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원문
○戶曹正郞李之馨上疏曰:
北路形勢, 非南方列邑之比。 阻山濱海, 形如長蛇, 直走二千餘里。 前朝尹瓘興師數十萬, 百戰之後, 僅拓舊疆, 定界建標, 北至先春嶺, 南限蘇下江。 逮我世宗朝, 使金宗瑞北逐胡羯, 以豆滿爲限, 仍置六鎭, 兼設三關, 邊民奠枕, 國家無虞。 自戊午以後, 國內多事, 未遑北顧, 使累代金湯之城, 全付於貪官暴吏之手, 細布、貂、蔘, 惟恐後時, 軍民流散, 漫不掛念。 丙子亂後, 尤甚無形, 飢寒日切, 聚斂日增, 千里封疆, 半爲荒原。 寧古、厚春兩種, 居我界相望之地, 挾大國之威, 倚開市之名, 凌暴我邊氓, 劫買我民財, 以小易大、以細換鉅。 嗚呼! 北方民財, 已竭於官吏之誅求, 開市之弊, 又至於此, 民窮財盡, 彼衆滿萬之日, 殿下以爲, 北京威勢, 可以縶彼虜之手足耶? 到此地頭然後, 雖擇龔、黃爲守令, 頗、牧爲兵使, 必無及矣。 殿下若以爲, 北路關防之重, 係國安危, 而王跡肇基之地, 不可淪沒於氈裘之域, 則臣愚以爲, 愼擇兵使, 一依祖宗朝舊事, 必以文武中, 淸白剛明, 可以鎭撫者差遣, 一以糾檢乎列邑, 一以示威於彼虜。 又選不愛錢之吏, 使之宣德化、牧疲氓, 修城池、繕甲兵, 澟然懷臨敵之心, 鎭堡邊將等, 亦須掄擇, 勿效前日, 則土兵有息肩之望, 而邊鎭有截然之勢矣。 南方之赴防於北關, 乃祖宗朝舊例, 而頃緣北方之無事, 廢防徵布, 而今則邊圉多虞, 臣愚以爲, 速罷防軍徵布之規, 依舊例分屯, 以備不虞, 似或得宜矣。 臣又聞, 鏡城城及載德城、會寧城, 厚而且高, 可以堅守, 是誠要害不可忽之處。 今宜修繕峙糧, 以爲守禦之備, 則未必無補於他日危急之時矣。 臣又伏見, 吉州則地勢四平, 而無名山大川之限, 端川介于磨天、磨雲兩嶺之間, 其險可據。 臣之愚計, 若移設重鎭於端川, 控扼北方, 則戎馬必不敢生踰佚之心矣。 伏願殿下, 以此數事, 爲自强應變之具焉。
上覽而嘉之, 令備局議行之, 仍下敎曰: "之馨爲人, 必非庸下, 令銓曹擢用。"
효종 5년 (1654) 6월 4일
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6월 4일 壬戌 3/3 기사 / 1654년 청 순치(順治) 11년
북방을 튼튼하게 하는 계책에 대한 호조 정랑 이지형의 상소문
국역
호조 정랑 이지형(李之馨)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오랑캐를 북쪽으로 쫓아내어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으면서 육진(六鎭)을 두었으며 겸하여 3관(關)을 설치하게 하니, 변민(邊民)은 안정되고 국가는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오년013) 이후로 국내에 일이 많아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관계로 여러 대(代)에 걸친 금성 탕지(金城湯池)를 탐관 포리(貪官暴吏)의 손에 통째로 맡긴 결과 세포(細布)·초피(皮貂)·산삼(山蔘)을 정한 기간에 뒤질까봐 걱정하게만 하였으므로 군민(軍民)이 이리저리 흩어졌는데도 소홀히 여긴 채 괘념치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뒤에는 더더욱 형편없이 되어 굶주림과 추위는 날마다 절박해지고 긁어들이는 세금은 날마다 증가하여 천리 봉강(封疆)이 반이나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고(寧古)·후춘(厚春)의 두 오랑캐 종족이 우리의 경계와 서로 마주보는 곳에 거주하면서 대국(大國)의 위엄을 끼고 개시(開市)한다는 핑계로 우리의 변방 백성을 못살게 굴며 우리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사들이는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며 자질구레한 것으로 엄청난 것을 교환해가곤 합니다. 아, 북방 백성들의 재물이 이미 관리의 주구(誅求)로 고갈되고 개시의 폐단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백성의 생활이 극에 달하고 재물이 고갈되며 저들의 무리가 만 명에 차는 날, 전하께서는 북경(北京)의 위세로 저 오랑캐들의 수족(手足)을 붙들어 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지경에 이른 뒤에는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골라 수령을 삼고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뽑아 병사(兵使)를 삼더라도 필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북로 관방(關防)이 중요하며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왕업(王業)의 기초가 되었던 지역을 오랑캐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침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사(兵使)를 신중히 가리되 한결같이 조종조의 옛일을 따라 반드시 문무관(文武官) 중에서 청백(淸白)하고 강명(剛明)하여 진무(鎭撫)할 만한 사람을 차출하여 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열읍을 규검(糾檢)하고 한편으로는 저 오랑캐들에게 시위(示威)하도록 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또 돈을 아끼지 않는 관리를 선발하여 덕화(德化)를 펼치고 피곤한 백성을 잘 기르며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갑병(甲兵)을 수선하여 늠름히 적군과 대치할 마음을 품게 하여야 할 것은 물론, 진보(鎭堡)의 변장(邊將)들도 모쪼록 가려 뽑아서 전일의 일을 본받지 않도록 하면, 토병(土兵)은 휴식할 희망이 있고 변장은 절연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방의 병력이 북관에 부방(赴防)하는 것은 곧 조종조의 구례(舊例)인데, 지난번에는 북방이 무사했던 관계로 부방을 폐지하고 대신 군포(軍布)를 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경에 걱정이 많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방군(防軍)에게 군포 징수하는 규정을 속히 파하고 구례에 따라 나누어 주둔시킴으로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여겨집니다. 신은 또 듣건대 경성(鏡城)의 성곽(城郭)과 재덕성(載德城)·회령성(會寧城)은 성이 두텁고 높아서 굳게 지킬 만하다 하니 이곳이야말로 요해처(要害處)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금 의당 수선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수어(守禦)에 대비하면 필시 후일 위급한 때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또 삼가 보건대 길주(吉州)는 지세가 사방이 평지로서 이름난 산과 큰 내의 막아줌이 없는 반면, 단천(端川)은 마천령(磨天嶺)과 마운령(磨雲嶺) 사이에 끼어 있어 그 험준함을 의지할 만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단천에 중진(重鎭)을 이설(移設)하여 북방을 눌러 지키면 군마(軍馬)가 필시 넘어서 멋대로 달릴 마음을 감히 내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로써 자강 응변(自强應變)하는 도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읽고는 가상하게 여겨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해 시행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형의 사람됨이 필시 용렬하지 않을 것이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탁용(擢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 [註 013]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원문
○戶曹正郞李之馨上疏曰:
北路形勢, 非南方列邑之比。 阻山濱海, 形如長蛇, 直走二千餘里。 前朝尹瓘興師數十萬, 百戰之後, 僅拓舊疆, 定界建標, 北至先春嶺, 南限蘇下江。 逮我世宗朝, 使金宗瑞北逐胡羯, 以豆滿爲限, 仍置六鎭, 兼設三關, 邊民奠枕, 國家無虞。 自戊午以後, 國內多事, 未遑北顧, 使累代金湯之城, 全付於貪官暴吏之手, 細布、貂、蔘, 惟恐後時, 軍民流散, 漫不掛念。 丙子亂後, 尤甚無形, 飢寒日切, 聚斂日增, 千里封疆, 半爲荒原。 寧古、厚春兩種, 居我界相望之地, 挾大國之威, 倚開市之名, 凌暴我邊氓, 劫買我民財, 以小易大、以細換鉅。 嗚呼! 北方民財, 已竭於官吏之誅求, 開市之弊, 又至於此, 民窮財盡, 彼衆滿萬之日, 殿下以爲, 北京威勢, 可以縶彼虜之手足耶? 到此地頭然後, 雖擇龔、黃爲守令, 頗、牧爲兵使, 必無及矣。 殿下若以爲, 北路關防之重, 係國安危, 而王跡肇基之地, 不可淪沒於氈裘之域, 則臣愚以爲, 愼擇兵使, 一依祖宗朝舊事, 必以文武中, 淸白剛明, 可以鎭撫者差遣, 一以糾檢乎列邑, 一以示威於彼虜。 又選不愛錢之吏, 使之宣德化、牧疲氓, 修城池、繕甲兵, 澟然懷臨敵之心, 鎭堡邊將等, 亦須掄擇, 勿效前日, 則土兵有息肩之望, 而邊鎭有截然之勢矣。 南方之赴防於北關, 乃祖宗朝舊例, 而頃緣北方之無事, 廢防徵布, 而今則邊圉多虞, 臣愚以爲, 速罷防軍徵布之規, 依舊例分屯, 以備不虞, 似或得宜矣。 臣又聞, 鏡城城及載德城、會寧城, 厚而且高, 可以堅守, 是誠要害不可忽之處。 今宜修繕峙糧, 以爲守禦之備, 則未必無補於他日危急之時矣。 臣又伏見, 吉州則地勢四平, 而無名山大川之限, 端川介于磨天、磨雲兩嶺之間, 其險可據。 臣之愚計, 若移設重鎭於端川, 控扼北方, 則戎馬必不敢生踰佚之心矣。 伏願殿下, 以此數事, 爲自强應變之具焉。
上覽而嘉之, 令備局議行之, 仍下敎曰: "之馨爲人, 必非庸下, 令銓曹擢用。"
원본
효종 5년 (1654)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