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14권, 인조 4년 10월 26일 乙丑 3/3 기사 / 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대사성 김덕함이 성균관의 폐습과 하인배들의 무뢰함을 아뢰다
국역
대사성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 상장(上章)하여 충심으로 해직되기를 빌었는데도 성명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즉시 체척하지 않으시고 지극한 은지(恩旨)를 내리시어 ‘이처럼 사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성상의 은지를 읽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어도 감히 아까울 것이 없으니 신이 어찌 말을 꾸며서 하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직무에 있어서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니, 위로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공사간에 도움됨이 없고 염치(廉恥)가 제자리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삼가 숨김없이 말하여 성상의 윤허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 선비들이 금수(禽獸)가 되어서 공묘(孔廟)에 있는 처지로 국모(國母)의 죄목을 무함하여 따져서 팔도의 향교에다 통문(通文)을 했었으니, 그때 본관(本館)은 수선(首善)이 아닌 수악(首惡)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반정의 초기에 각기 자신이 범한 죄의 경중에 의거하여 벌을 정하였었으나, 몇 년도 채 안 되어 친분있는 사람들을 끌어대어 다투어 죄적(罪籍)에서 풀려났고, 지난해에는 60여 인을 한꺼번에 입계(入啓)해서 그들의 악을 씻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폐모(廢母)를 찬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신은 생도들에게 ‘다른 아문은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본관만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다. 지금의 선비는 비록 추급해서 그 자신을 주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명교(名敎)로써 주벌함이 지극히 엄정해야 하는데 거의가 풀려났으니, 너무나도 명륜당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고 하여 한 해가 다가도록 언급하였지만 선비들의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부자 유친(父子有親)’이 어떠한 일인데 신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인륜을 침식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관(館)에는 장의(掌議)라는 직임이 있는데, 반드시 몸가짐이 엄정하고 말이 조리가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는 것으로, 춘추(春秋)의 석전(釋奠) 이후에 개차(改差)하는 것은 본래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이 직임은 온 관내의 전체 유론(儒論)을 총괄하여 붕우간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조(昏朝)에 들어와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교체하고 하루나 한달 만에 개변하였으니 전도되고 경박스러워 선비의 기상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신은 전의 습속을 통렬히 징치하고, 금년 가을 석전 때에는 지난날 장의를 지낸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또 관의 옛 전례를 물어서 이후로는 석전제를 지낸 뒤에야 개차하여 사론(士論)의 체모를 소중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선비들이 신의 말을 썩은 흙을 버리듯이 팽개쳤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조(聖朝)가 임진년121) 이후로는 선비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방도에도 마음쓸 겨를이 없었으니,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는 의도가 없이 와서 성사(聖師)를 시위(侍衛)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원점(圓點)을 3백 점을 채워야 하는 것은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도 비중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견디면서 관에는 기거하지만 그 이외에 현관(賢關)을 보기를 여관 보듯이 하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원점의 수를 반만 채워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서 선비들을 성균관에 유치할 수 있는 방도로 삼았으니, 선성(先聖)을 시위하는 도리가 그토록 쇠퇴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폐조(廢朝) 때에 와서는 선비들이 허위를 숭상하여, 과거 때가 되면 원점을 반을 채웠다는 공문(公文)을 아무런 부끄러운 빛도 없이 얻고자 도모하였고, 그렇게 하고는 진실한 선비처럼 행세하면서 떳떳이 고개를 들고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선비들의 기강이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은 처음 본직에 제수되자 즉시 예조에 첩정하여 법번(法典)을 분명히 밝혀 널리 고유(告諭)하게 하고,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그리고 과장(科場)이나 시소(試所)에도 방을 붙여 알리고, 과장에 임해서는 원점을 계산하여 절반의 수효를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허위의 공문을 하나도 성첩(成貼)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인재(人材)가 팔리지 않고 물색(物色)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크게는 폐모론을 성균관에서 물리치지 못하였고, 작게는 장의(掌議)와 원점(圓點)에 관한 것을 아직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부끄러운 면목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마 차지하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2백 년 이래로 열조(列祖)와 열종(列宗)이 선비를 배양하는 규범은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도 구차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 전해오면서 무너져서 선비를 배양하는 의리가 전혀 어두워져서 전결(田結)과 노비(奴婢)·어소(魚蔬) 등의 항목이 모두 아래 것들에게로 들어가 천례(賤隷)들은 현능(賢能)한 이들을 기르는 것으로 생활을 누리고, 선비들은 시정(市井)에서 구차히 마련한 것으로 식사를 합니다. 그간의 실정과 작태는 너무 비루하여 다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닭의 소리나 내고 개구멍으로 도둑질이나 하는 선비를 기르던 맹상군(孟嘗君)도 읍에서 받아들인 정세(正稅)를 가지고 먹였지 부정한 짓으로 마련한 것으로는 대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의의 나라에서 태학(太學)에다 국자(國子)를 모아놓고 주공(周公)·공자(孔子)의 경서를 읽고 주자(朱子)·정자(程子)를 본받도록 하면서 강포한 종들이 시정에서 이리저리 빼앗아온 것으로 먹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은 그 근본을 추궁하고 간 곳을 조사해서 긴중(緊重)한 4∼5건으로 억지로 등록(謄錄)을 만들어서 선비를 기르는 것으로 길러서 조종조의 아름다운 뜻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음흉하고 완악한 전복(典僕)들이 조신(朝臣)을 선동하고 항간에 소문을 퍼뜨려 참소하여 신을 내쫓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이 관문(館門)을 나올 때를 이용하여 비복(婢僕)들을 모아다가 곡(哭)을 하여 전송하도록 하여 상여를 보내듯이 하였으니, 이는 신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수법입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학궁(學宮)의 노복이 옛날에는 이러하지 않았는데, 이괄의 변란 때에는 대사성(大司成) 집을 때려부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하니 신에게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이러한 처지에 이르렀으니 생각을 바꾸어 남을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병까지 위중합니다. 죽기 전에 이 직에서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감고 싶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이러한 실정을 살피시고, 신의 이러한 실제의 병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을 갈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그대가 직무를 잘 보았음을 충분히 알겠다. 본래 관원이 되는 것은 원망을 맡는 것이다. 그대는 굳이 사직하지 말고 더욱 교훈을 더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사성 김덕함의 상소를 보니 본관(本館)의 하인들 소행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중 주동자를 유사로 하여금 색출하여 가두고 다스리게 하여 악습을 엄히 개혁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재판(裁判)
- [註 121]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원문
○大司成金德諴上疏曰:
臣疾劇年衰, 未能供職, 上章乞解, 瀝盡肝血, 而聖明哀憐, 不卽斥去, 至勤恩旨曰: "宜勿如是辭之。" 臣伏讀聖旨, 驚惶罔措, 死不敢恤, 臣豈飾辭? 第念臣於此職, 試而有愧者四。 旣愧而仍冒, 則上不效驅策之勞, 下不任群聚之笑, 公私無裨, 廉恥失所。 有臣如此, 將何用之? 臣請無隱, 以動聖聽焉。 頃在昏朝, 儒爲禽獸, 身居孔廟, 誣數國母罪目, 通文八道鄕校。 此時則本館非首善之地, 反爲首惡之地, 而改紀之初, 各據自犯之輕重, 而定其罰矣。 曾未數年, 挐親引交, 競解罪籍, 至於去年, 則六十餘人, 一時入啓, 洗盡其惡, 俱是左袒廢母者也。 臣對諸生言之曰: ‘他衙門則不須云, 本館則所以明人倫也。 今之爲士者, 雖未能追誅其身, 以名敎誅之, 所當至嚴、至正, 而救解殆盡, 殊非明倫堂所宜爲。’ 終年言及, 而不回士聽。 父子有親, 是何等事, 而緣臣無狀, 還蝕人理? 臣之試而有愧者, 一也。 館中有所謂掌議之任, 必擇持身不妄, 出言有倫者而定之, 春秋釋奠後改差者, 其來有素。 蓋領一館之儒論, 規朋友之爲非者也。 入昏朝以來, 朝換暮替, 日改月變, 顚倒輕薄, 氣象非儒, 故臣痛懲前習, 今年秋釋奠時, 廣詢於平世爲掌議之人, 且問館中古例, 自今必經一丁祀, 然後乃改, 以重士論體貌, 則士棄臣言, 如棄糞土。 臣之試而有愧者, 二也。 聖朝自壬辰以後, 其於皷舞多士之方, 有所未遑, 士子之無所爲, 而來侍聖師者, 有幾人哉? 三百點, 非士之所樂, 而所重在此, 故耐苦居館, 其餘則視賢關如傳舍。 國家慮此, 而設半圓點赴試之規, 以爲韋布留泮之地, 所以衛先聖也。 陵夷至廢朝, 人心失性, 儒脚踏虛, 臨科則半圓點公文, 無愧色而圖得, 自同眞儒, 抗顔應擧, 士也罔極, 其是之謂也。 臣初忝本職, 卽牒禮曹, 申明法典, 告諭備至, 館學及科場、試所, 掛榜知委, 而臨場計點, 有未準於半, 則虛套公文, 一不成貼。 因此而生、進之不得赴試者甚多, 人材不售, 物色不好。 臣之試而有愧者, 三也。 大則不闢無母之論於國庠, 小則掌議、圓點, 猶未復規。 臣非木石, 面目有靦, 忍占非據, 何事可成乎? 抑又有一事焉, 二百年來, 列祖列宗養賢規畫, 盡出至誠, 一不苟且, 而法守久壞, 頣義專晦, 田結、奴婢、魚蔬等項, 沒入下輩, 賤隷則專享賢能之養, 多士則日食市井之攘, 其間情態, 陋不盡陳。 昔者孟嘗君養雞鳴狗盜之士, 猶以邑入之正, 而不以攫挐而啗之。 安有禮義之邦, 會國子於太學, 使之誦周ㆍ孔、法朱ㆍ程, 而任豪奴、悍僕, 左右攫而饋之乎? 臣窮其本根, 査出去處, 緊重四五事, 勒成謄錄, 欲以士之養而養之, 復回祖宗朝美意, 而兇頑典僕, 簸動朝端, 浸潤巷議, 猶恐未祛臣身, 乘臣之出館門, 聚會婢僕而哭送, 如送喪車, 此顯彰臣過之術也。 臣之試而有愧者, 四也。 學宮之僕, 古不如是, 而适賊之變, 至打大司成家。 以此而待臣, 何所不至乎? 臣旣到此地頭, 不可易絃循人, 而病且殆, 未死之前, 冀聞鐫改而瞑。 伏願聖慈, 察臣實情, 憐臣實病, 亟遞臣職。
答曰: "觀爾疏辭, 足見爾能擧職事, 爲官任怨也。 爾其勿爲固辭, 更加敎訓, 期正士習。" 仍下敎曰: "觀大司成金德諴上疏, 則本館下人等所爲, 極可驚愕。 其中首倡人, 令攸司捉囚嚴治, 痛革惡習。"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재판(裁判)
인조 4년 (1626) 10월 26일
인조실록14권, 인조 4년 10월 26일 乙丑 3/3 기사 / 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대사성 김덕함이 성균관의 폐습과 하인배들의 무뢰함을 아뢰다
국역
대사성 김덕함(金德諴)이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 상장(上章)하여 충심으로 해직되기를 빌었는데도 성명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즉시 체척하지 않으시고 지극한 은지(恩旨)를 내리시어 ‘이처럼 사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성상의 은지를 읽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어도 감히 아까울 것이 없으니 신이 어찌 말을 꾸며서 하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직무에 있어서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니, 위로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비웃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공사간에 도움됨이 없고 염치(廉恥)가 제자리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삼가 숨김없이 말하여 성상의 윤허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 선비들이 금수(禽獸)가 되어서 공묘(孔廟)에 있는 처지로 국모(國母)의 죄목을 무함하여 따져서 팔도의 향교에다 통문(通文)을 했었으니, 그때 본관(本館)은 수선(首善)이 아닌 수악(首惡)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반정의 초기에 각기 자신이 범한 죄의 경중에 의거하여 벌을 정하였었으나, 몇 년도 채 안 되어 친분있는 사람들을 끌어대어 다투어 죄적(罪籍)에서 풀려났고, 지난해에는 60여 인을 한꺼번에 입계(入啓)해서 그들의 악을 씻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폐모(廢母)를 찬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신은 생도들에게 ‘다른 아문은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본관만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다. 지금의 선비는 비록 추급해서 그 자신을 주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명교(名敎)로써 주벌함이 지극히 엄정해야 하는데 거의가 풀려났으니, 너무나도 명륜당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고 하여 한 해가 다가도록 언급하였지만 선비들의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부자 유친(父子有親)’이 어떠한 일인데 신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인륜을 침식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관(館)에는 장의(掌議)라는 직임이 있는데, 반드시 몸가짐이 엄정하고 말이 조리가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는 것으로, 춘추(春秋)의 석전(釋奠) 이후에 개차(改差)하는 것은 본래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이 직임은 온 관내의 전체 유론(儒論)을 총괄하여 붕우간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조(昏朝)에 들어와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교체하고 하루나 한달 만에 개변하였으니 전도되고 경박스러워 선비의 기상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신은 전의 습속을 통렬히 징치하고, 금년 가을 석전 때에는 지난날 장의를 지낸 사람들에게 널리 묻고, 또 관의 옛 전례를 물어서 이후로는 석전제를 지낸 뒤에야 개차하여 사론(士論)의 체모를 소중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선비들이 신의 말을 썩은 흙을 버리듯이 팽개쳤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조(聖朝)가 임진년121) 이후로는 선비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방도에도 마음쓸 겨를이 없었으니,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는 의도가 없이 와서 성사(聖師)를 시위(侍衛)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원점(圓點)을 3백 점을 채워야 하는 것은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도 비중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견디면서 관에는 기거하지만 그 이외에 현관(賢關)을 보기를 여관 보듯이 하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원점의 수를 반만 채워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서 선비들을 성균관에 유치할 수 있는 방도로 삼았으니, 선성(先聖)을 시위하는 도리가 그토록 쇠퇴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폐조(廢朝) 때에 와서는 선비들이 허위를 숭상하여, 과거 때가 되면 원점을 반을 채웠다는 공문(公文)을 아무런 부끄러운 빛도 없이 얻고자 도모하였고, 그렇게 하고는 진실한 선비처럼 행세하면서 떳떳이 고개를 들고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선비들의 기강이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신은 처음 본직에 제수되자 즉시 예조에 첩정하여 법번(法典)을 분명히 밝혀 널리 고유(告諭)하게 하고,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그리고 과장(科場)이나 시소(試所)에도 방을 붙여 알리고, 과장에 임해서는 원점을 계산하여 절반의 수효를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허위의 공문을 하나도 성첩(成貼)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이 응시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인재(人材)가 팔리지 않고 물색(物色)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크게는 폐모론을 성균관에서 물리치지 못하였고, 작게는 장의(掌議)와 원점(圓點)에 관한 것을 아직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부끄러운 면목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마 차지하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내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2백 년 이래로 열조(列祖)와 열종(列宗)이 선비를 배양하는 규범은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도 구차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법이 오래 전해오면서 무너져서 선비를 배양하는 의리가 전혀 어두워져서 전결(田結)과 노비(奴婢)·어소(魚蔬) 등의 항목이 모두 아래 것들에게로 들어가 천례(賤隷)들은 현능(賢能)한 이들을 기르는 것으로 생활을 누리고, 선비들은 시정(市井)에서 구차히 마련한 것으로 식사를 합니다. 그간의 실정과 작태는 너무 비루하여 다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닭의 소리나 내고 개구멍으로 도둑질이나 하는 선비를 기르던 맹상군(孟嘗君)도 읍에서 받아들인 정세(正稅)를 가지고 먹였지 부정한 짓으로 마련한 것으로는 대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의의 나라에서 태학(太學)에다 국자(國子)를 모아놓고 주공(周公)·공자(孔子)의 경서를 읽고 주자(朱子)·정자(程子)를 본받도록 하면서 강포한 종들이 시정에서 이리저리 빼앗아온 것으로 먹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은 그 근본을 추궁하고 간 곳을 조사해서 긴중(緊重)한 4∼5건으로 억지로 등록(謄錄)을 만들어서 선비를 기르는 것으로 길러서 조종조의 아름다운 뜻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음흉하고 완악한 전복(典僕)들이 조신(朝臣)을 선동하고 항간에 소문을 퍼뜨려 참소하여 신을 내쫓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이 관문(館門)을 나올 때를 이용하여 비복(婢僕)들을 모아다가 곡(哭)을 하여 전송하도록 하여 상여를 보내듯이 하였으니, 이는 신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수법입니다. 이것이 신이 시험해 보아 부끄럽게 여기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학궁(學宮)의 노복이 옛날에는 이러하지 않았는데, 이괄의 변란 때에는 대사성(大司成) 집을 때려부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하니 신에게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이러한 처지에 이르렀으니 생각을 바꾸어 남을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병까지 위중합니다. 죽기 전에 이 직에서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감고 싶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이러한 실정을 살피시고, 신의 이러한 실제의 병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을 갈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그대가 직무를 잘 보았음을 충분히 알겠다. 본래 관원이 되는 것은 원망을 맡는 것이다. 그대는 굳이 사직하지 말고 더욱 교훈을 더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사성 김덕함의 상소를 보니 본관(本館)의 하인들 소행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중 주동자를 유사로 하여금 색출하여 가두고 다스리게 하여 악습을 엄히 개혁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재판(裁判)
- [註 121]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원문
○大司成金德諴上疏曰:
臣疾劇年衰, 未能供職, 上章乞解, 瀝盡肝血, 而聖明哀憐, 不卽斥去, 至勤恩旨曰: "宜勿如是辭之。" 臣伏讀聖旨, 驚惶罔措, 死不敢恤, 臣豈飾辭? 第念臣於此職, 試而有愧者四。 旣愧而仍冒, 則上不效驅策之勞, 下不任群聚之笑, 公私無裨, 廉恥失所。 有臣如此, 將何用之? 臣請無隱, 以動聖聽焉。 頃在昏朝, 儒爲禽獸, 身居孔廟, 誣數國母罪目, 通文八道鄕校。 此時則本館非首善之地, 反爲首惡之地, 而改紀之初, 各據自犯之輕重, 而定其罰矣。 曾未數年, 挐親引交, 競解罪籍, 至於去年, 則六十餘人, 一時入啓, 洗盡其惡, 俱是左袒廢母者也。 臣對諸生言之曰: ‘他衙門則不須云, 本館則所以明人倫也。 今之爲士者, 雖未能追誅其身, 以名敎誅之, 所當至嚴、至正, 而救解殆盡, 殊非明倫堂所宜爲。’ 終年言及, 而不回士聽。 父子有親, 是何等事, 而緣臣無狀, 還蝕人理? 臣之試而有愧者, 一也。 館中有所謂掌議之任, 必擇持身不妄, 出言有倫者而定之, 春秋釋奠後改差者, 其來有素。 蓋領一館之儒論, 規朋友之爲非者也。 入昏朝以來, 朝換暮替, 日改月變, 顚倒輕薄, 氣象非儒, 故臣痛懲前習, 今年秋釋奠時, 廣詢於平世爲掌議之人, 且問館中古例, 自今必經一丁祀, 然後乃改, 以重士論體貌, 則士棄臣言, 如棄糞土。 臣之試而有愧者, 二也。 聖朝自壬辰以後, 其於皷舞多士之方, 有所未遑, 士子之無所爲, 而來侍聖師者, 有幾人哉? 三百點, 非士之所樂, 而所重在此, 故耐苦居館, 其餘則視賢關如傳舍。 國家慮此, 而設半圓點赴試之規, 以爲韋布留泮之地, 所以衛先聖也。 陵夷至廢朝, 人心失性, 儒脚踏虛, 臨科則半圓點公文, 無愧色而圖得, 自同眞儒, 抗顔應擧, 士也罔極, 其是之謂也。 臣初忝本職, 卽牒禮曹, 申明法典, 告諭備至, 館學及科場、試所, 掛榜知委, 而臨場計點, 有未準於半, 則虛套公文, 一不成貼。 因此而生、進之不得赴試者甚多, 人材不售, 物色不好。 臣之試而有愧者, 三也。 大則不闢無母之論於國庠, 小則掌議、圓點, 猶未復規。 臣非木石, 面目有靦, 忍占非據, 何事可成乎? 抑又有一事焉, 二百年來, 列祖列宗養賢規畫, 盡出至誠, 一不苟且, 而法守久壞, 頣義專晦, 田結、奴婢、魚蔬等項, 沒入下輩, 賤隷則專享賢能之養, 多士則日食市井之攘, 其間情態, 陋不盡陳。 昔者孟嘗君養雞鳴狗盜之士, 猶以邑入之正, 而不以攫挐而啗之。 安有禮義之邦, 會國子於太學, 使之誦周ㆍ孔、法朱ㆍ程, 而任豪奴、悍僕, 左右攫而饋之乎? 臣窮其本根, 査出去處, 緊重四五事, 勒成謄錄, 欲以士之養而養之, 復回祖宗朝美意, 而兇頑典僕, 簸動朝端, 浸潤巷議, 猶恐未祛臣身, 乘臣之出館門, 聚會婢僕而哭送, 如送喪車, 此顯彰臣過之術也。 臣之試而有愧者, 四也。 學宮之僕, 古不如是, 而适賊之變, 至打大司成家。 以此而待臣, 何所不至乎? 臣旣到此地頭, 不可易絃循人, 而病且殆, 未死之前, 冀聞鐫改而瞑。 伏願聖慈, 察臣實情, 憐臣實病, 亟遞臣職。
答曰: "觀爾疏辭, 足見爾能擧職事, 爲官任怨也。 爾其勿爲固辭, 更加敎訓, 期正士習。" 仍下敎曰: "觀大司成金德諴上疏, 則本館下人等所爲, 極可驚愕。 其中首倡人, 令攸司捉囚嚴治, 痛革惡習。"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재판(裁判)
원본
인조 4년 (1626)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