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47권, 광해 10년 8월 18일 甲戌 1/1 기사 /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기준격과 허균을 정국하다. 기준격과 허균의 공초
국역
기준격과 허균 등을 정국하였다. 준격의 공초 내용은 그가 전후로 올린 소의 내용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소의 내용은 위에 보인다. 】 공초 말단에 말하기를,
"허균이 위태로운 짓을 도모한 일은 전날 허균의 편지와 조호(曺浩) 등의 편지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정상이 명약관화하니 조호도 잡아와서 그의 편지 중의 곡절을 신문하면 허균이 난을 도모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허균과 이홍로(李弘老), 김공량(金公亮)의 첩이 한 짓은 조호에게 물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흉모를 알고도 즉시 고변하지 않은 까닭은 그 당시에는 단지 분란을 수습해서 화를 없애 무사하게 할 것만을 생각했었고, 신이 그때 나이가 매우 어린 데다가 당시 신의 집안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했기 때문에 상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진술한 것에 대해 단지 사실의 정확 여부만을 살필 뿐이니 상변에 어찌 빠르고 늦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균의 공초에 이르기를,
"신이 기자헌과 원수가 된 상황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을미년143) 에 홍로가 신의 형인 허성(許筬)의 집안과 혼인을 하자고 하였는데 신이 홍로는 동궁에 죄를 졌으니 혼인을 맺을 수 없다고 말렸습니다. 이 때문에 홍로가 원한을 품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상중에 창기(娼妓)를 끼고 잤다는 말을 지어냈습니다. 신이 조정에 선 지 20년 동안 청현직(淸顯職)을 거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홍로가 한 짓 때문이니 함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데 하물며 이 망측한 흉역의 일을 함께 하겠습니까. 【〈이하 소의 내용과 같은 것은 생략한다.〉 】
임인년144) 10월 홍로가 서울에 왔을 적에 신이 기이한 설을 일으켰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기에 신이 홍로를 찾아가 만나서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홍로는 바야흐로 신현(申睍)·이성(李晟) 등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있어 동네 사람인 조호(曺浩)가 자기 삼촌인 송언신(宋言愼)의 집에 갔다가 이유홍(李惟弘)이 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홍이 ‘홍로가 흉서(兇書)를 지을 때에 허균이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 하니, 언신(言愼)이 말하기를 ‘홍로가 어찌 문장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겠는가.’라고 하였다 했습니다. 이 말을 신이 듣고는 즉시 홍로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인 김희수(金希壽)를 불러서 말해주고, 또 말하기를 ‘신현과 이성 두 사람이 자리에 있었으니 내가 누명을 벗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홍로가 그 말을 듣고는 서둘러 먼저 변명을 했고 이유홍·송언신·조호 그리고 신이 각기 변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는 애당초 상을 범하는 불측한 자취가 없었는데 자헌이 밀봉해서 깊이 간직하여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겉으로 마치 그 속에 부도한 말이 있는 것처럼 하고는 신을 위협하고 대간을 사주하여 신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병오년145) 주 천사(朱天使)가 왔을 때 신과 함께 담화를 나누다가 우리 나라의 저사(儲嗣)에 대해 말이 미쳤는데, 신이 ‘온 나라의 민심이 동궁에게 귀의(歸依)하고 있는데 중국이 허락해주지 않으므로 매우 민망하다.’고 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백관이 정문(呈文)을 하여 청하면 내가 가지고 돌아가 일이 이루어지도록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삼공을 만나서 말하자 유영경은 응하지 않고 자헌과 심희수는 모두 옳다고 하면서 힘써 정문하기를 쟁론하니 영경이 매우 화를 냈는데 얼마 뒤에 두 상공은 모두 면직되었습니다. 신이 세 번이나 탄핵을 받은 것을 사람들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자헌이 처음에는 신을 같이 낭패를 본 사람이라 하여 조금 친하게 대하였고 또 자기 자식과 조카로 하여금 신에게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자헌이 경술년146) 두 번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두루 헐뜯을 때에도 유독 신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그 밀랍으로 봉한 편지가 근거가 없기 때문에 거론하지 못한 것입니다.
계축년147) 의 변란 초기에 신이 당시의 무리들과 함께 비로소 화근을 제거할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대신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자헌은 임금의 복심인 훈구 대신이니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 생각하여, 조용히 자헌을 찾아가 말하기를 ‘《춘추》에서는 두 강(姜)씨를 끊었고, 호인(胡寅)은 장간지(張柬之)가 무후(武后)를 죽이지 않은 것을 폄하(貶下)하였고, 장준(張浚)은 명수 태자(明受太子)를 죽였다. 이 세 가지는 대신의 급선무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헌은 손을 저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나의 외조부가 임백령(林百齡)인데 사람들이 을사년간의 일을 말할 때면 나는 얼굴이 먼저 붉어진다. 주상에게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도 아직 자식이 없으니, 먼 훗날에 을사년간의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처럼 될까 두렵다. 《위료자(尉繚子)》의 말에 「엄한 형벌 아래서는 지사(志士)도 거짓 자복을 한다.」 하였다. 김제남(金悌男)은 어리석고 용렬하여 역모를 꾸밀 수 없는 데다 궁중의 저주에 대한 일도 혹 분명하지 않고, 또 서양갑(徐羊甲) 등의 공초를 또한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실언을 한 것을 후회하여 다른 말로 둘러대고서 물러났습니다. 이로부터 자헌은 신이 이 말을 누설할까 걱정하여 드러나게 입막음하려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갑인년148) 봄에 자헌이 다시 재상이 되었을 때 삼사가 일제히 탄핵했었는데, 그 동생 기윤헌(奇允獻)은 마침 외설스런 일로 혐의를 품고서 자기 형에게 말하기를 ‘삼사가 발론하고 있는데 허균이 전혀 변명해주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헌은 곧 신이 옛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가 의심하여 즉시 신을 물고 늘어지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흉악한 격문이 대궐에 던져지자 공공연하게 신이 한 짓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한보길(韓輔吉)·윤유겸(尹惟謙)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화근을 제거하기를 청하면서 동시에 신에게도 의논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습니다. 자헌은 신이 혼자서 이 의논을 담당한 것인 줄 잘못 헤아리고는 먼저 이의(異議)를 헌의하여 대론을 저해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잘못을 돌려 죽이려는 계획을 꾸몄는데, 종사에 죄를 얻어 먼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동생 윤헌도 관작이 삭탈되었습니다. 성균관의 소에서도 기준격(奇俊格)과 기수발(奇秀發) 등이 양갑(羊甲)·박응서(朴應犀) 등과 교분을 맺어 적의 공초에서 나오기까지 하였다고 거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윤헌이 처가 있는 데도 장가를 들어 그 자식을 분간(分揀)하여 얼서(孽庶)로 만들었다는 설과 경주의 사산(蛇山)이 천년의 왕기를 지닌 땅인데 자헌이 첩을 도장(盜葬)했다는 설 등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집의 부자 형제가 그런 설들이 모두 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모함해 해치려고 갖가지 계획을 다 내어서 이런 고변을 한 것입니다. 의창군(義昌君)은 신의 형 사위이기 때문에 준격이 신을 모함하려고 의창을 세우려 했다고 말하여 그 아비에게 공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전가시키려고 하는 것이니 그 꾀가 참혹합니다.
신해년149) 신은 유배지에서 서울로 돌아왔는데 윤수겸(尹守謙)이 신의 집을 빌려 들어와 살다가 즉시 나갔습니다. 심광세(沈光世)가 신을 찾아와 말하기를 ‘수겸의 두 아들 중에 누가 나은가? 집을 지키던 종이 반드시 알 것이다.’ 하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사로이 혼자서 생각하기를 ‘대군의 외가는 사대부가 혼인을 맺을 만한 집안이 아니다.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하였는데, 마침 수겸의 친구인 이문란(李文蘭)이 찾아왔고 송구(宋耉)도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문란(文蘭)에게 말릴 것을 극력 권하였더니 문란이 과연 수겸(守謙)에게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수겸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혼인을 요구하더라도 내가 선뜻 따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윤수겸이 심광세의 혼인을 거절한 일이 전적으로 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수겸과 송구만 알 뿐만이 아닙니다. 작년에 문란도 이 일로 사유를 갖추어 소를 진달했었으니 준격의 소는 너무나도 임금을 속인 것입니다. 더구나 광세(光世)와는 의논이 평소에 달랐고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났으므로 비록 한 동네에 살고 있으나 몇 번 찾아가지도 않는 형편이니 그 집안의 일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신이 아무리 경망스럽다고는 하나 어찌 스스로 흉언을 지어서 원수의 집안에 스스로 말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준격이 말한 제남과 이의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은 입으로 차마 말하지 못할 말이며 귀로 차마 듣지 못할 말입니다.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말은 신하로서 입에서 낼 수 있는 말이 아니거늘 이에 글에다 써놓고 두 송장이라는 말 아래에 감히 멋대로 각주를 달아 공공연히 주상과 동궁을 일일이 거론하였으니 그 말의 흉악 참담함은 만고에 없던 바입니다. 그 당시에 준격이 혹시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그때 즉시 고변하지 않고, 자기 집안의 원수가 매우 많았는 데다 반좌율에 걸릴 것이라고 위협하여서 감히 상변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른 말을 핑계댄단 말입니까. 만약 정확한 말의 근거가 있다면 상변한 후에 비록 원수의 집안이 백 명이 되더라도 어찌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실상이 없는 말로서 남을 빠뜨리려고 하다가 제 스스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빠지기에 알맞을 뿐이니 극히 통탄스럽습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산수비기(山水祕記)》는 세상에 떠돌아다닌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참서(讖書)를 집에 보관하는 것은 율문에 죄가 중하므로 신은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뿐입니다. 천도(遷都)의 설은 임자년에 한창 나왔는데 수십 년 전에 신이 어떻게 미리 알아서 첨가하였겠습니까.
소위 심우영(沈友英)이란 자는 죽은 처의 얼삼촌(孼三寸)으로 문장의 재주가 있어 사대부들이 모두 인정하고 대우하였으며 신도 처음에는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정미년150) 겨울에 얼족인 이원형(李元亨)이 와서 말하기를 ‘우영 등이 반드시 큰 화를 일으킬 것이다. 임해군과 사귀고 싶어하면서 나더러 먼저 가서 만나보라고 하기에 내가 큰 소리로 거절해버렸다. 이 무리들은 경망하니 조심해서 서로 교제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우영이 양갑과 함께 여강(麗江)에 소굴을 만들었는데 그 때 이의숭(李義崇)이 우영 등에게 재물을 빌려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재주가 많은 데도 과거를 보려 하지 않고 땅이 있는 데도 경작하려 하지 않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종들을 풀어서 도적질을 한다 하니 부디 상대하지 말라.’ 하였는데, 의숭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임자년에 응서(應犀)·협비(浹祕)·종인(宗仁) 등이 과연 의숭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습니다. 의숭이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응서가 도적질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응서를 잡아 가두고서 국문하면 도적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이르기를 ‘도성에서 사람을 겁탈하였으니 그 끝이 어찌 도적질하는 데만 그칠 뿐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의숭이 마음속으로 옳다고 여겨 즉시 함께 대장 이문전(李文荃)을 만나서 말하였는데 미처 체포하기 전에 문전이 먼저 파직되었습니다. 다음해 조령(鳥嶺)에서 은(銀)을 강탈한 사건이 났을 때 응서가 잡혀서 수감되어 있었지만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의숭이 지난해에 신과 같이 한 말을 기억하고는 즉시 이이첨을 만나 그들이 마땅히 흉악한 역모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이첨은 대장 한희길(韓希吉)을 불러 말해주고 속히 계문할 것을 극력 권하는 바람에 역모가 다 드러나 마침내 대악인들은 복주되었고 종사는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러 신도 공로가 있다고들 하였는데, 준격은 신이 우영 등과 교분을 맺어 바라서는 안될 자리를 몰래 도모했다 하니, 어찌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남쪽 지방에서 올라와 과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옥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고 길에서 선전관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두려워 떨겠습니까.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흉격에 대해서는 여러 역적들의 공초 내용이 한결 같았고 추안에도 실려 있으니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준격은, 신이 스스로 ‘내가 지었다.’고 말하였으며 조카도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격문을 짓는 것이 이 어떠한 흉역의 일인데 자랑하여 내가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다니,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황황한 법궁은 비할 데 없이 신이롭고 아름다워서 상하의 신료들이 모두 이어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준격은 이 무슨 작자이기에 반드시 역적 의를 그곳에 살게 하고자 하여 신이 말하지 않은 일을 공공연히 글에 썼으니 그 임금을 저버리고 역적에게 빌붙은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임자년151) 겨울 원주로 내려갈 때 이이첨의 집에 가서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한찬남(韓纘男)도 마침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이 인하여 ‘화를 즐기고 공을 바라는 무리들이 반드시 대군을 끼고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훈련 도감 당상에 반드시 전하의 가까운 신하를 참여시키고 일절 서인을 등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맞아 다음해 의를 세우고자 하는 자들의 말 중에 과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계축년 가을 겨울 즈음에는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주장한 화근을 제거해야 한다는 설이 몹시 공격을 받았으므로 이 때문에 서로들 경계하며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헌이 마음속으로 서궁에 빌붙은 실정을 제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화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듯 시세를 붙좇아야 한다는 설을 어찌 준격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를 세우고서 수렴 청정하게 한다는 말은 차마 듣고 말할 수 없는 일이거늘 준격이 어찌 감히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태연하게 몇 년이 지난 후에 문답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난신 적자가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비록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조조(曹操)나 환온(桓溫)의 악으로도 난언을 토해 놓는 것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인데 차마 글로 써놓았으니, 준격의 마음에 벽양후(辟陽侯)가 했던 일152) 가 했던 일을 달갑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맺은 원한 때문에 욕이 장차 선왕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가슴을 두드리며 차라리 준격과 한 칼날에 같이 죽고만 싶습니다. 흉역과 괴변이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흉역의 말을 낸 자는 반드시 흉격과 흉서를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근래의 요변(妖變)은 반드시 이러한 무리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자헌이 신의 몸을 죽이고자 하여 안하는 짓이 없는데 신이 함부로 말한 것이 있었다면 자헌이 무엇을 꺼려 즉시 고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이미 낭패하게 되자 짐승이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문다는 말처럼 만의 하나 요행을 바라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심복 대신으로서 만약 난언을 듣고서 고하지 않았다면 이는 심히 역적을 두호하는 자입니다. 준격이 직접 난언을 듣고는 남의 혼인을 막기까지 하였으면서도 그 일을 상변하지 않은 채 책을 끼고 다니며 사사받은 지가 벌써 여러 해라고 한다면, 이런 자는 더욱 심한 역적입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그의 죄는 모두 극악하니 이에 이르러 신의 원통함은 더욱 심합니다.
신은 두터운 은혜를 받아 차서를 뛰어넘어 정경(正卿)에까지 이르렀는데, 국세의 위급함과 종사가 전복되려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충성스럽고 곧은 신하들과 협동하여 맹세코 화근을 제거해서 춘추의 대의를 신장시키려고 한 것이 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의 집을 번번이 거스르는 바람에 끝내는 큰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의 대론이 아니었더라면 자헌이 어찌 감히 해칠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신은 오직 성명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였다. 왕이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회계하기를,
"준격이 공초에서 말한 허균의 사상(事狀)은 모두 대역부도에 관계된 것으로 신자로서는 차마 듣고 보지 못할 것들이었습니다. 허균도 말한 것이 애매하여 갖가지 공초한 내용이 모두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었으니 이 사이의 실상과 허위는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결코 누가 미덥다고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공초 중에 지적하여 끌어들인 사람이 적지 않은데 옥사의 체모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을 힐문하여야 그 정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준격의 두 번째 상소 끝에 첨부한 네 통의 서찰 중에 허균의 필적이 분명한 것이 있으니 일에 근거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허균과 준격을 우선 대질시켜서 실상을 캐낸 연후에 엄히 국문하여 법률에 따라 처분해 신인(神人)의 분노를 푸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망난(亡難)은 하인준의 종이고 예길(禮吉)은 한명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인데 곧 그의 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종으로서 주인을 증거하는 것은 옥사의 체모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을 국문한다 해도 절대로 실정을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옥사의 단안은 오직 시간의 조만(早晩)에 달려 있으니 이 한 가지 조항에 대해 인준에게 다시 묻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하인준을 먼저 형추하여 엄히 국문해서 흉서를 쓴 사람 및 붙인 사람과 그간의 곡절에 대해 하나하나 끝까지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9책 635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43] 을미년 : 1595 선조 28년.
- [註 144] 임인년 : 1602 선조 35년.
- [註 145] 병오년 : 1606 선조 39년.
- [註 146] 경술년 : 1610 광해군 2년.
- [註 147] 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
- [註 148] 갑인년 : 1614 광해군 6년.
- [註 149] 신해년 : 1611 광해군 3년.
- [註 150] 정미년 : 1607 선조 40년.
- [註 151] 임자년 : 1612 광해군 4년.
- [註 152] 벽양후(辟陽侯)가 했던 일 : 벽양후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심이기(審食其).
원문
○戊午八月十八日甲戌庭鞫奇俊格、許筠等。 俊格供辭與其前後疏辭, 無增減。 【疏辭見上。】末端云: "筠之謀危之事, 則前日筠之書簡及曺浩等之書簡具在, 渠之情狀, 明若觀火, 曺浩亦爲拿來, 問渠之書簡中曲折, 則筠之謀危之事, 可以現露矣。 筠與弘老、金公諒妾所爲之事, 問於曺浩, 則亦可知之。 知此兇謀, 不卽告變者, 其時只知解紛排亂, 使之銷禍無事, 而臣其時年甚幼騃, 且其時滿朝嫉臣家, 不得上變。 如上所陳, 但觀事之的實而已, 上變, 豈有早晩乎?" 筠供: "臣與奇自獻, 結怨作仇之狀, 通國莫不聞知。 乙未年間, 弘老求婚於臣兄筬家, 臣以弘老得罪東宮, 不可連婚, 止之。 弘老懷嫌構誣, 做出喪中挾娼之說。 臣立朝二十年, 不得歷揚淸顯, 皆弘老所爲, 同作好事, 亦不肯同, 矧此兇逆罔測之事哉? (【此下與疏辭同者略之。】)壬寅十月, 弘老來京, 疑臣唱和奇說, 多有怨言, 臣過見弘老自明, 則弘老方與申晛、李晟等坐話。 未幾, 同里人曺浩適於其三寸宋言愼家, 得聞李惟弘來言: ‘弘老來構兇疏, 許筠參知。’ 言愼曰: ‘弘老豈文短, 借於他人乎?’ 臣聞之, 卽招弘老家出入人金希壽言之, 且言: ‘申、李兩人在坐, 吾可得免。’ 弘老聞之, 遽先發明, 惟弘、言愼、浩及臣各有發明之書。 其中初非有犯上罔測之跡, 而自獻蠟糊深藏, 不示於人, 陽若中有不道之語, 哄脅臣身, 嗾臺官, 劾臣罷職云云。 丙午年, 朱天使來, 與臣談, 及本國儲嗣, 臣以‘一國歸心, 天朝未許, 爲憫迫。’ 云, 則朱使言: ‘爾國百官, 呈文以請, 則俺當持歸贊成。’ 臣卽見三公言之, 永慶不應, 自獻及沈喜壽皆以爲然, 力爭呈文, 永慶甚怒, 未幾, 兩相之去位。 臣之三劾, 人皆謂由此。 自獻始以臣爲同敗之人, 待之稍親, 且令其子姪, 受學。 及庚戌兩, 箚歷詆在朝諸臣, 無一漏落, 而獨不及臣身者, 以其蠟書無據, 不爲擧論也。 癸丑變初, 臣與時儕, 始議去禍根之計, 恐大臣不從, 以爲‘自獻肺腑勳舊, 必當允從’, 從容過自獻言曰: ‘《春秋》絶二姜, 而胡氏貶張柬之不誅武氏, 張浚殺明受太子。 此三者, 爲大臣急務也。’ 自獻 搖手曰: ‘君無爲此言。 我之外祖, 林百齡也, 人言乙巳之事, 則我面先赤。 主上無他子, 東宮尙無嗣息, 百歲之後, 恐如乙巳諸人之見斥於人也。 《尉繚子》言: 「嚴刑之下, 志士亦且誣服。」云。 悌男昏劣, 而宮中咀呪之事, 或不明白, 羊甲等之招, 亦豈可盡信乎?’ 臣悔其失言, 以他辭塞之而退。 自是, 自獻恐臣洩此言, 顯有加密之態, 臣亦不以語於人。 甲寅春, 自獻復相, 三司齊劾, 其弟允獻適以猥褻之事, 懷嫌, 訴於其兄曰: ‘三司發論, 許筠絶不救解矣。’ 自獻便疑臣不忘舊怨, 卽欲肆噬, 終不得其會。 及上年兇檄之投, 公然指爲臣所爲。 及韓輔吉、尹惟謙等相繼陳疏, 請去禍根, 一時謂臣勸起。 自獻錯料臣獨當此議, 先獻異議, 欲沮大論, 歸罪於臣, 將爲厮殺之計, 而得罪宗社, 先遭竄黜, 其弟允獻又削其職。 泮疏, 且擧俊格、秀發等交結羊甲、應犀, 至出賊招云云。 而允獻有妻娶妻, 其子分揀, 作孽之說、與夫慶州 蛇山, 千年王氣之地, 盜葬自獻妾之說, 大行於時。 父子兄弟, 疑皆出於臣, 必欲陷害, 爲計萬端, 爲此告變。 義昌君是臣兄之女壻, 故俊格欲陷臣身, 以欲立義昌爲言, 歸功渠父, 嫁禍他人, 其計慘矣。 (云云。) 辛亥年, 臣自謫所還京, 尹守謙借入臣家, 卽出。 沈光世來見臣言曰: ‘守謙有二子, 孰賢乎? 守家婢, 必知之矣。’ 臣答以不知。 私自語曰: ‘大君外家, 非士大夫結婚之所。 何以止之乎?’ 適守謙有友人李文蘭來訪, 宋耉亦同坐, 臣力勸文蘭, 止之文蘭果語守謙守謙。 曰: ‘渠縱求婚, 我肯從之乎?’ 其時, 尹絶沈婚之事, 專出於臣, 不但守謙、宋耉知之。 上年文蘭以此具由陳疏, 俊格之疏, 罔上甚矣。 況光世則議論素異, 年歲相懸, 雖在同里, 不數相從, 渠家之事, 非臣所知。 臣雖輕妄, 豈可自做兇言, 自言於仇家之理乎? (云云。) 俊格所言金悌男、㼁等諸事, 口不忍言, 耳不忍聞。 非嫡之言, 非臣子所可出口, 而乃敢筆之於書, 兩尸之下, 乃敢肆爲注脚, 公然枚擧聖上及儲宮, 其言之兇慘, 萬古所無。 其時俊格或聞此言, 則何不登時卽告, 而諉以他辭, 以爲渠家仇敵甚多, 或有威脅反坐之患, 不敢上變云? 若有的確言根, 則上告之後, 雖仇家百人, 安能威脅乎? 此皆無實之言, 而欲以陷人, 適足以自陷於大逆不道, 尤極痛心。 世傳《山水祕記》, 行於世已久。 讖書藏家, 律文罪重, 故臣看過而已。 遷都之說, 方出於壬子年, 則數十年前, 豈能預知而添入乎? (云云。) 所謂沈友英者, 亡妻孽三寸也, 有才藻, 士大夫皆許待之, 臣初亦相切。 丁未冬, 孽族李元亨來言曰: ‘友英等將必有大禍也。 欲交臨海, 令我先往見之, 我大言折之。 此輩輕妄, 愼勿相交。’ 其後友英與羊甲, 作窟驪江, 其時李義崇將貸財物於友英等。 臣止之曰: ‘此輩多才不肯擧, 有田不肯耕, 行止閃倏, 縱奴爲賊云, 愼勿待之。’ 義崇不從。 壬子年, 應犀 浹祕、宗仁等果入義崇家作賊。 義崇見臣曰: ‘應犀作賊分明。 若囚應犀而鞫之, 諸賊可得。’ 臣曰: ‘輦下劫人, 其終豈止於作賊而已?’ 義崇心然之, 卽俱見大將李文荃言之, 未及勦捕, 而文荃先罷。 明年鳥嶺銀賊之發, 應犀囚而不決, 義崇記得上年與臣相語者, 卽見李爾瞻, 言其當爲兇逆。 爾瞻招大將韓希吉言之, 力勸速啓, 兇謀盡發, 遂致巨慝伏辜, 宗社再安。 人或謂臣亦與有勞焉, 其謂交結友英等, 潛圖非望者, 豈非通天之極冤? (云云。) 癸丑年, 自南方上來, 到果川, 方知獄起, 路不逢宣傳官, 何由恐怖乎? 耕俊所作兇檄, 諸賊一樣, 取招載在推案, 了無可疑。 俊格乃以臣自言‘吾作’, 以爲姪子知之。 作檄, 是何等兇逆, 而誇以爲自作, 千萬無理。 皇皇法宮, 神麗無比, 上下臣工, 咸願移御。 何物俊格, 必欲令逆㼁居之, 臣所不言之事, 公然擧之於書, 其背君附逆之罪, 可勝誅哉? 壬子冬, 下原州之日, 往辭於李爾瞻家, 韓纘男適在坐。 臣因言: ‘樂禍幸功之徒, 必擁大君而爲亂。 訓鍊都監堂上, 必參以殿下親臣, 一切勿用西人可也。’ 臣之言不幸而中, 於明年, 欲立㼁者, 果有是言哉。 癸丑秋冬間, 因爭攻造、訒去禍根之說, 相戒不敢出口。 況自獻心附西宮之情, 旣已詳知, 則矢落立革之說, 豈可向俊格言之? 立㼁垂簾之說, 不忍聞不忍言之事也, 俊格何敢以閑漫說話, 恬然問答於累年之後乎? (云云。) 自古亂臣賊子何限, 雖有莾、卓、操、溫之惡, 其吐亂言, 亦不若是, 而忍筆之於書, 俊格之心, 其甘爲辟陽之事, 亶可知矣。 以臣結怨之故, 辱且及於先王, 扣心搥胸, 寧欲與俊格, 同死於一刃也。 兇逆、怪變, 豈可人人爲之? 出此兇逆之言者, 必能爲兇檄、兇書也。 近來妖變, 未必非此流所爲。 自獻欲殺臣身, 無所不至, 臣有亂言, 則自獻何所忌憚, 不卽發告乎? 及其旣敗, 獸窮則搏, 僥倖萬一, 乃有此擧。 以肺腑大臣, 若聞亂言而不告, 則是護逆之甚者也。 俊格親躬亂言, 至於禁人婚嫁, 而挾冊師受, 已有多年, 此則逆黨之尤者也。 以彼以此, 其罪俱極, 臣之冤痛, 到此尤甚。 臣厚蒙恩寵, 超至正卿, 目見國勢孤危、宗社將顚, 協謀忠貞之臣, 誓去禍根, 以申《春秋》大義, 臣之願也。 乃以積忤於仇家, 終陷大辟。 向非大論, 則自獻 安敢爲相害之計哉? 臣之所恃, 惟在聖明。" 王令議啓, 回啓曰: "俊格供稱許筠事狀, 具係大逆不道, 爲人臣子, 所不忍見, 不忍聞者。 筠亦以爲曖昧, 種種所供, 無非自明之言, 此間實狀與虛僞, 以渠等之言, 決難取以爲信。 渠輩供招中, 指引之人, 不爲不多, 以獄體言之, 則詰問此等人, 可以得其情狀。 而俊格再疏之尾, 粘付四札中, 明有許筠筆跡, 則事有可據。 筠與俊格, 爲先面質, 鉤得實狀然後, 嚴鞫按律, 以洩神人之憤。" 答曰: "依啓。" 又啓曰: "亡難則河仁浚奴子, 禮吉則韓明勗所率之人, 卽同己奴者也。 大槪奴而證主, 有乖按獄之體, 鞫問此兩人, 必無得情之理。 此獄所斷者, 唯在日時之早晩, 惟此一款, 似當更問仁浚。" 答曰: "河仁浚爲先刑推嚴鞫, 兇書所書人及粘付人與其間曲折, 一一窮問得情。"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9책 635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광해 10년 (1618) 8월 18일
광해군일기[중초본]47권, 광해 10년 8월 18일 甲戌 1/1 기사 /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기준격과 허균을 정국하다. 기준격과 허균의 공초
국역
기준격과 허균 등을 정국하였다. 준격의 공초 내용은 그가 전후로 올린 소의 내용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소의 내용은 위에 보인다. 】 공초 말단에 말하기를,
"허균이 위태로운 짓을 도모한 일은 전날 허균의 편지와 조호(曺浩) 등의 편지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정상이 명약관화하니 조호도 잡아와서 그의 편지 중의 곡절을 신문하면 허균이 난을 도모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허균과 이홍로(李弘老), 김공량(金公亮)의 첩이 한 짓은 조호에게 물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흉모를 알고도 즉시 고변하지 않은 까닭은 그 당시에는 단지 분란을 수습해서 화를 없애 무사하게 할 것만을 생각했었고, 신이 그때 나이가 매우 어린 데다가 당시 신의 집안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했기 때문에 상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진술한 것에 대해 단지 사실의 정확 여부만을 살필 뿐이니 상변에 어찌 빠르고 늦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균의 공초에 이르기를,
"신이 기자헌과 원수가 된 상황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을미년143) 에 홍로가 신의 형인 허성(許筬)의 집안과 혼인을 하자고 하였는데 신이 홍로는 동궁에 죄를 졌으니 혼인을 맺을 수 없다고 말렸습니다. 이 때문에 홍로가 원한을 품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상중에 창기(娼妓)를 끼고 잤다는 말을 지어냈습니다. 신이 조정에 선 지 20년 동안 청현직(淸顯職)을 거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홍로가 한 짓 때문이니 함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데 하물며 이 망측한 흉역의 일을 함께 하겠습니까. 【〈이하 소의 내용과 같은 것은 생략한다.〉 】
임인년144) 10월 홍로가 서울에 왔을 적에 신이 기이한 설을 일으켰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기에 신이 홍로를 찾아가 만나서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홍로는 바야흐로 신현(申睍)·이성(李晟) 등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있어 동네 사람인 조호(曺浩)가 자기 삼촌인 송언신(宋言愼)의 집에 갔다가 이유홍(李惟弘)이 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홍이 ‘홍로가 흉서(兇書)를 지을 때에 허균이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 하니, 언신(言愼)이 말하기를 ‘홍로가 어찌 문장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겠는가.’라고 하였다 했습니다. 이 말을 신이 듣고는 즉시 홍로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인 김희수(金希壽)를 불러서 말해주고, 또 말하기를 ‘신현과 이성 두 사람이 자리에 있었으니 내가 누명을 벗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홍로가 그 말을 듣고는 서둘러 먼저 변명을 했고 이유홍·송언신·조호 그리고 신이 각기 변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는 애당초 상을 범하는 불측한 자취가 없었는데 자헌이 밀봉해서 깊이 간직하여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겉으로 마치 그 속에 부도한 말이 있는 것처럼 하고는 신을 위협하고 대간을 사주하여 신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병오년145) 주 천사(朱天使)가 왔을 때 신과 함께 담화를 나누다가 우리 나라의 저사(儲嗣)에 대해 말이 미쳤는데, 신이 ‘온 나라의 민심이 동궁에게 귀의(歸依)하고 있는데 중국이 허락해주지 않으므로 매우 민망하다.’고 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백관이 정문(呈文)을 하여 청하면 내가 가지고 돌아가 일이 이루어지도록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삼공을 만나서 말하자 유영경은 응하지 않고 자헌과 심희수는 모두 옳다고 하면서 힘써 정문하기를 쟁론하니 영경이 매우 화를 냈는데 얼마 뒤에 두 상공은 모두 면직되었습니다. 신이 세 번이나 탄핵을 받은 것을 사람들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자헌이 처음에는 신을 같이 낭패를 본 사람이라 하여 조금 친하게 대하였고 또 자기 자식과 조카로 하여금 신에게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자헌이 경술년146) 두 번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두루 헐뜯을 때에도 유독 신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그 밀랍으로 봉한 편지가 근거가 없기 때문에 거론하지 못한 것입니다.
계축년147) 의 변란 초기에 신이 당시의 무리들과 함께 비로소 화근을 제거할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대신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자헌은 임금의 복심인 훈구 대신이니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 생각하여, 조용히 자헌을 찾아가 말하기를 ‘《춘추》에서는 두 강(姜)씨를 끊었고, 호인(胡寅)은 장간지(張柬之)가 무후(武后)를 죽이지 않은 것을 폄하(貶下)하였고, 장준(張浚)은 명수 태자(明受太子)를 죽였다. 이 세 가지는 대신의 급선무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헌은 손을 저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나의 외조부가 임백령(林百齡)인데 사람들이 을사년간의 일을 말할 때면 나는 얼굴이 먼저 붉어진다. 주상에게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도 아직 자식이 없으니, 먼 훗날에 을사년간의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처럼 될까 두렵다. 《위료자(尉繚子)》의 말에 「엄한 형벌 아래서는 지사(志士)도 거짓 자복을 한다.」 하였다. 김제남(金悌男)은 어리석고 용렬하여 역모를 꾸밀 수 없는 데다 궁중의 저주에 대한 일도 혹 분명하지 않고, 또 서양갑(徐羊甲) 등의 공초를 또한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실언을 한 것을 후회하여 다른 말로 둘러대고서 물러났습니다. 이로부터 자헌은 신이 이 말을 누설할까 걱정하여 드러나게 입막음하려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갑인년148) 봄에 자헌이 다시 재상이 되었을 때 삼사가 일제히 탄핵했었는데, 그 동생 기윤헌(奇允獻)은 마침 외설스런 일로 혐의를 품고서 자기 형에게 말하기를 ‘삼사가 발론하고 있는데 허균이 전혀 변명해주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헌은 곧 신이 옛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가 의심하여 즉시 신을 물고 늘어지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흉악한 격문이 대궐에 던져지자 공공연하게 신이 한 짓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한보길(韓輔吉)·윤유겸(尹惟謙)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화근을 제거하기를 청하면서 동시에 신에게도 의논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습니다. 자헌은 신이 혼자서 이 의논을 담당한 것인 줄 잘못 헤아리고는 먼저 이의(異議)를 헌의하여 대론을 저해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잘못을 돌려 죽이려는 계획을 꾸몄는데, 종사에 죄를 얻어 먼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동생 윤헌도 관작이 삭탈되었습니다. 성균관의 소에서도 기준격(奇俊格)과 기수발(奇秀發) 등이 양갑(羊甲)·박응서(朴應犀) 등과 교분을 맺어 적의 공초에서 나오기까지 하였다고 거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윤헌이 처가 있는 데도 장가를 들어 그 자식을 분간(分揀)하여 얼서(孽庶)로 만들었다는 설과 경주의 사산(蛇山)이 천년의 왕기를 지닌 땅인데 자헌이 첩을 도장(盜葬)했다는 설 등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집의 부자 형제가 그런 설들이 모두 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모함해 해치려고 갖가지 계획을 다 내어서 이런 고변을 한 것입니다. 의창군(義昌君)은 신의 형 사위이기 때문에 준격이 신을 모함하려고 의창을 세우려 했다고 말하여 그 아비에게 공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전가시키려고 하는 것이니 그 꾀가 참혹합니다.
신해년149) 신은 유배지에서 서울로 돌아왔는데 윤수겸(尹守謙)이 신의 집을 빌려 들어와 살다가 즉시 나갔습니다. 심광세(沈光世)가 신을 찾아와 말하기를 ‘수겸의 두 아들 중에 누가 나은가? 집을 지키던 종이 반드시 알 것이다.’ 하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사로이 혼자서 생각하기를 ‘대군의 외가는 사대부가 혼인을 맺을 만한 집안이 아니다.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하였는데, 마침 수겸의 친구인 이문란(李文蘭)이 찾아왔고 송구(宋耉)도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문란(文蘭)에게 말릴 것을 극력 권하였더니 문란이 과연 수겸(守謙)에게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수겸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혼인을 요구하더라도 내가 선뜻 따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윤수겸이 심광세의 혼인을 거절한 일이 전적으로 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수겸과 송구만 알 뿐만이 아닙니다. 작년에 문란도 이 일로 사유를 갖추어 소를 진달했었으니 준격의 소는 너무나도 임금을 속인 것입니다. 더구나 광세(光世)와는 의논이 평소에 달랐고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났으므로 비록 한 동네에 살고 있으나 몇 번 찾아가지도 않는 형편이니 그 집안의 일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신이 아무리 경망스럽다고는 하나 어찌 스스로 흉언을 지어서 원수의 집안에 스스로 말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준격이 말한 제남과 이의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은 입으로 차마 말하지 못할 말이며 귀로 차마 듣지 못할 말입니다.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말은 신하로서 입에서 낼 수 있는 말이 아니거늘 이에 글에다 써놓고 두 송장이라는 말 아래에 감히 멋대로 각주를 달아 공공연히 주상과 동궁을 일일이 거론하였으니 그 말의 흉악 참담함은 만고에 없던 바입니다. 그 당시에 준격이 혹시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그때 즉시 고변하지 않고, 자기 집안의 원수가 매우 많았는 데다 반좌율에 걸릴 것이라고 위협하여서 감히 상변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른 말을 핑계댄단 말입니까. 만약 정확한 말의 근거가 있다면 상변한 후에 비록 원수의 집안이 백 명이 되더라도 어찌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실상이 없는 말로서 남을 빠뜨리려고 하다가 제 스스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빠지기에 알맞을 뿐이니 극히 통탄스럽습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산수비기(山水祕記)》는 세상에 떠돌아다닌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참서(讖書)를 집에 보관하는 것은 율문에 죄가 중하므로 신은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뿐입니다. 천도(遷都)의 설은 임자년에 한창 나왔는데 수십 년 전에 신이 어떻게 미리 알아서 첨가하였겠습니까.
소위 심우영(沈友英)이란 자는 죽은 처의 얼삼촌(孼三寸)으로 문장의 재주가 있어 사대부들이 모두 인정하고 대우하였으며 신도 처음에는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정미년150) 겨울에 얼족인 이원형(李元亨)이 와서 말하기를 ‘우영 등이 반드시 큰 화를 일으킬 것이다. 임해군과 사귀고 싶어하면서 나더러 먼저 가서 만나보라고 하기에 내가 큰 소리로 거절해버렸다. 이 무리들은 경망하니 조심해서 서로 교제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우영이 양갑과 함께 여강(麗江)에 소굴을 만들었는데 그 때 이의숭(李義崇)이 우영 등에게 재물을 빌려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재주가 많은 데도 과거를 보려 하지 않고 땅이 있는 데도 경작하려 하지 않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종들을 풀어서 도적질을 한다 하니 부디 상대하지 말라.’ 하였는데, 의숭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임자년에 응서(應犀)·협비(浹祕)·종인(宗仁) 등이 과연 의숭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습니다. 의숭이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응서가 도적질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응서를 잡아 가두고서 국문하면 도적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이르기를 ‘도성에서 사람을 겁탈하였으니 그 끝이 어찌 도적질하는 데만 그칠 뿐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의숭이 마음속으로 옳다고 여겨 즉시 함께 대장 이문전(李文荃)을 만나서 말하였는데 미처 체포하기 전에 문전이 먼저 파직되었습니다. 다음해 조령(鳥嶺)에서 은(銀)을 강탈한 사건이 났을 때 응서가 잡혀서 수감되어 있었지만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의숭이 지난해에 신과 같이 한 말을 기억하고는 즉시 이이첨을 만나 그들이 마땅히 흉악한 역모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이첨은 대장 한희길(韓希吉)을 불러 말해주고 속히 계문할 것을 극력 권하는 바람에 역모가 다 드러나 마침내 대악인들은 복주되었고 종사는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러 신도 공로가 있다고들 하였는데, 준격은 신이 우영 등과 교분을 맺어 바라서는 안될 자리를 몰래 도모했다 하니, 어찌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남쪽 지방에서 올라와 과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옥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고 길에서 선전관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두려워 떨겠습니까.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흉격에 대해서는 여러 역적들의 공초 내용이 한결 같았고 추안에도 실려 있으니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준격은, 신이 스스로 ‘내가 지었다.’고 말하였으며 조카도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격문을 짓는 것이 이 어떠한 흉역의 일인데 자랑하여 내가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다니,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황황한 법궁은 비할 데 없이 신이롭고 아름다워서 상하의 신료들이 모두 이어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준격은 이 무슨 작자이기에 반드시 역적 의를 그곳에 살게 하고자 하여 신이 말하지 않은 일을 공공연히 글에 썼으니 그 임금을 저버리고 역적에게 빌붙은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임자년151) 겨울 원주로 내려갈 때 이이첨의 집에 가서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한찬남(韓纘男)도 마침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이 인하여 ‘화를 즐기고 공을 바라는 무리들이 반드시 대군을 끼고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훈련 도감 당상에 반드시 전하의 가까운 신하를 참여시키고 일절 서인을 등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맞아 다음해 의를 세우고자 하는 자들의 말 중에 과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계축년 가을 겨울 즈음에는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주장한 화근을 제거해야 한다는 설이 몹시 공격을 받았으므로 이 때문에 서로들 경계하며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헌이 마음속으로 서궁에 빌붙은 실정을 제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화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듯 시세를 붙좇아야 한다는 설을 어찌 준격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를 세우고서 수렴 청정하게 한다는 말은 차마 듣고 말할 수 없는 일이거늘 준격이 어찌 감히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태연하게 몇 년이 지난 후에 문답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난신 적자가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비록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조조(曹操)나 환온(桓溫)의 악으로도 난언을 토해 놓는 것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인데 차마 글로 써놓았으니, 준격의 마음에 벽양후(辟陽侯)가 했던 일152) 가 했던 일을 달갑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맺은 원한 때문에 욕이 장차 선왕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가슴을 두드리며 차라리 준격과 한 칼날에 같이 죽고만 싶습니다. 흉역과 괴변이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흉역의 말을 낸 자는 반드시 흉격과 흉서를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근래의 요변(妖變)은 반드시 이러한 무리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자헌이 신의 몸을 죽이고자 하여 안하는 짓이 없는데 신이 함부로 말한 것이 있었다면 자헌이 무엇을 꺼려 즉시 고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이미 낭패하게 되자 짐승이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문다는 말처럼 만의 하나 요행을 바라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심복 대신으로서 만약 난언을 듣고서 고하지 않았다면 이는 심히 역적을 두호하는 자입니다. 준격이 직접 난언을 듣고는 남의 혼인을 막기까지 하였으면서도 그 일을 상변하지 않은 채 책을 끼고 다니며 사사받은 지가 벌써 여러 해라고 한다면, 이런 자는 더욱 심한 역적입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그의 죄는 모두 극악하니 이에 이르러 신의 원통함은 더욱 심합니다.
신은 두터운 은혜를 받아 차서를 뛰어넘어 정경(正卿)에까지 이르렀는데, 국세의 위급함과 종사가 전복되려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충성스럽고 곧은 신하들과 협동하여 맹세코 화근을 제거해서 춘추의 대의를 신장시키려고 한 것이 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의 집을 번번이 거스르는 바람에 끝내는 큰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의 대론이 아니었더라면 자헌이 어찌 감히 해칠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신은 오직 성명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였다. 왕이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회계하기를,
"준격이 공초에서 말한 허균의 사상(事狀)은 모두 대역부도에 관계된 것으로 신자로서는 차마 듣고 보지 못할 것들이었습니다. 허균도 말한 것이 애매하여 갖가지 공초한 내용이 모두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었으니 이 사이의 실상과 허위는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결코 누가 미덥다고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공초 중에 지적하여 끌어들인 사람이 적지 않은데 옥사의 체모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을 힐문하여야 그 정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준격의 두 번째 상소 끝에 첨부한 네 통의 서찰 중에 허균의 필적이 분명한 것이 있으니 일에 근거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허균과 준격을 우선 대질시켜서 실상을 캐낸 연후에 엄히 국문하여 법률에 따라 처분해 신인(神人)의 분노를 푸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망난(亡難)은 하인준의 종이고 예길(禮吉)은 한명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인데 곧 그의 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종으로서 주인을 증거하는 것은 옥사의 체모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을 국문한다 해도 절대로 실정을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옥사의 단안은 오직 시간의 조만(早晩)에 달려 있으니 이 한 가지 조항에 대해 인준에게 다시 묻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하인준을 먼저 형추하여 엄히 국문해서 흉서를 쓴 사람 및 붙인 사람과 그간의 곡절에 대해 하나하나 끝까지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9책 635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143] 을미년 : 1595 선조 28년.
- [註 144] 임인년 : 1602 선조 35년.
- [註 145] 병오년 : 1606 선조 39년.
- [註 146] 경술년 : 1610 광해군 2년.
- [註 147] 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
- [註 148] 갑인년 : 1614 광해군 6년.
- [註 149] 신해년 : 1611 광해군 3년.
- [註 150] 정미년 : 1607 선조 40년.
- [註 151] 임자년 : 1612 광해군 4년.
- [註 152] 벽양후(辟陽侯)가 했던 일 : 벽양후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심이기(審食其).
원문
○戊午八月十八日甲戌庭鞫奇俊格、許筠等。 俊格供辭與其前後疏辭, 無增減。 【疏辭見上。】末端云: "筠之謀危之事, 則前日筠之書簡及曺浩等之書簡具在, 渠之情狀, 明若觀火, 曺浩亦爲拿來, 問渠之書簡中曲折, 則筠之謀危之事, 可以現露矣。 筠與弘老、金公諒妾所爲之事, 問於曺浩, 則亦可知之。 知此兇謀, 不卽告變者, 其時只知解紛排亂, 使之銷禍無事, 而臣其時年甚幼騃, 且其時滿朝嫉臣家, 不得上變。 如上所陳, 但觀事之的實而已, 上變, 豈有早晩乎?" 筠供: "臣與奇自獻, 結怨作仇之狀, 通國莫不聞知。 乙未年間, 弘老求婚於臣兄筬家, 臣以弘老得罪東宮, 不可連婚, 止之。 弘老懷嫌構誣, 做出喪中挾娼之說。 臣立朝二十年, 不得歷揚淸顯, 皆弘老所爲, 同作好事, 亦不肯同, 矧此兇逆罔測之事哉? (【此下與疏辭同者略之。】)壬寅十月, 弘老來京, 疑臣唱和奇說, 多有怨言, 臣過見弘老自明, 則弘老方與申晛、李晟等坐話。 未幾, 同里人曺浩適於其三寸宋言愼家, 得聞李惟弘來言: ‘弘老來構兇疏, 許筠參知。’ 言愼曰: ‘弘老豈文短, 借於他人乎?’ 臣聞之, 卽招弘老家出入人金希壽言之, 且言: ‘申、李兩人在坐, 吾可得免。’ 弘老聞之, 遽先發明, 惟弘、言愼、浩及臣各有發明之書。 其中初非有犯上罔測之跡, 而自獻蠟糊深藏, 不示於人, 陽若中有不道之語, 哄脅臣身, 嗾臺官, 劾臣罷職云云。 丙午年, 朱天使來, 與臣談, 及本國儲嗣, 臣以‘一國歸心, 天朝未許, 爲憫迫。’ 云, 則朱使言: ‘爾國百官, 呈文以請, 則俺當持歸贊成。’ 臣卽見三公言之, 永慶不應, 自獻及沈喜壽皆以爲然, 力爭呈文, 永慶甚怒, 未幾, 兩相之去位。 臣之三劾, 人皆謂由此。 自獻始以臣爲同敗之人, 待之稍親, 且令其子姪, 受學。 及庚戌兩, 箚歷詆在朝諸臣, 無一漏落, 而獨不及臣身者, 以其蠟書無據, 不爲擧論也。 癸丑變初, 臣與時儕, 始議去禍根之計, 恐大臣不從, 以爲‘自獻肺腑勳舊, 必當允從’, 從容過自獻言曰: ‘《春秋》絶二姜, 而胡氏貶張柬之不誅武氏, 張浚殺明受太子。 此三者, 爲大臣急務也。’ 自獻 搖手曰: ‘君無爲此言。 我之外祖, 林百齡也, 人言乙巳之事, 則我面先赤。 主上無他子, 東宮尙無嗣息, 百歲之後, 恐如乙巳諸人之見斥於人也。 《尉繚子》言: 「嚴刑之下, 志士亦且誣服。」云。 悌男昏劣, 而宮中咀呪之事, 或不明白, 羊甲等之招, 亦豈可盡信乎?’ 臣悔其失言, 以他辭塞之而退。 自是, 自獻恐臣洩此言, 顯有加密之態, 臣亦不以語於人。 甲寅春, 自獻復相, 三司齊劾, 其弟允獻適以猥褻之事, 懷嫌, 訴於其兄曰: ‘三司發論, 許筠絶不救解矣。’ 自獻便疑臣不忘舊怨, 卽欲肆噬, 終不得其會。 及上年兇檄之投, 公然指爲臣所爲。 及韓輔吉、尹惟謙等相繼陳疏, 請去禍根, 一時謂臣勸起。 自獻錯料臣獨當此議, 先獻異議, 欲沮大論, 歸罪於臣, 將爲厮殺之計, 而得罪宗社, 先遭竄黜, 其弟允獻又削其職。 泮疏, 且擧俊格、秀發等交結羊甲、應犀, 至出賊招云云。 而允獻有妻娶妻, 其子分揀, 作孽之說、與夫慶州 蛇山, 千年王氣之地, 盜葬自獻妾之說, 大行於時。 父子兄弟, 疑皆出於臣, 必欲陷害, 爲計萬端, 爲此告變。 義昌君是臣兄之女壻, 故俊格欲陷臣身, 以欲立義昌爲言, 歸功渠父, 嫁禍他人, 其計慘矣。 (云云。) 辛亥年, 臣自謫所還京, 尹守謙借入臣家, 卽出。 沈光世來見臣言曰: ‘守謙有二子, 孰賢乎? 守家婢, 必知之矣。’ 臣答以不知。 私自語曰: ‘大君外家, 非士大夫結婚之所。 何以止之乎?’ 適守謙有友人李文蘭來訪, 宋耉亦同坐, 臣力勸文蘭, 止之文蘭果語守謙守謙。 曰: ‘渠縱求婚, 我肯從之乎?’ 其時, 尹絶沈婚之事, 專出於臣, 不但守謙、宋耉知之。 上年文蘭以此具由陳疏, 俊格之疏, 罔上甚矣。 況光世則議論素異, 年歲相懸, 雖在同里, 不數相從, 渠家之事, 非臣所知。 臣雖輕妄, 豈可自做兇言, 自言於仇家之理乎? (云云。) 俊格所言金悌男、㼁等諸事, 口不忍言, 耳不忍聞。 非嫡之言, 非臣子所可出口, 而乃敢筆之於書, 兩尸之下, 乃敢肆爲注脚, 公然枚擧聖上及儲宮, 其言之兇慘, 萬古所無。 其時俊格或聞此言, 則何不登時卽告, 而諉以他辭, 以爲渠家仇敵甚多, 或有威脅反坐之患, 不敢上變云? 若有的確言根, 則上告之後, 雖仇家百人, 安能威脅乎? 此皆無實之言, 而欲以陷人, 適足以自陷於大逆不道, 尤極痛心。 世傳《山水祕記》, 行於世已久。 讖書藏家, 律文罪重, 故臣看過而已。 遷都之說, 方出於壬子年, 則數十年前, 豈能預知而添入乎? (云云。) 所謂沈友英者, 亡妻孽三寸也, 有才藻, 士大夫皆許待之, 臣初亦相切。 丁未冬, 孽族李元亨來言曰: ‘友英等將必有大禍也。 欲交臨海, 令我先往見之, 我大言折之。 此輩輕妄, 愼勿相交。’ 其後友英與羊甲, 作窟驪江, 其時李義崇將貸財物於友英等。 臣止之曰: ‘此輩多才不肯擧, 有田不肯耕, 行止閃倏, 縱奴爲賊云, 愼勿待之。’ 義崇不從。 壬子年, 應犀 浹祕、宗仁等果入義崇家作賊。 義崇見臣曰: ‘應犀作賊分明。 若囚應犀而鞫之, 諸賊可得。’ 臣曰: ‘輦下劫人, 其終豈止於作賊而已?’ 義崇心然之, 卽俱見大將李文荃言之, 未及勦捕, 而文荃先罷。 明年鳥嶺銀賊之發, 應犀囚而不決, 義崇記得上年與臣相語者, 卽見李爾瞻, 言其當爲兇逆。 爾瞻招大將韓希吉言之, 力勸速啓, 兇謀盡發, 遂致巨慝伏辜, 宗社再安。 人或謂臣亦與有勞焉, 其謂交結友英等, 潛圖非望者, 豈非通天之極冤? (云云。) 癸丑年, 自南方上來, 到果川, 方知獄起, 路不逢宣傳官, 何由恐怖乎? 耕俊所作兇檄, 諸賊一樣, 取招載在推案, 了無可疑。 俊格乃以臣自言‘吾作’, 以爲姪子知之。 作檄, 是何等兇逆, 而誇以爲自作, 千萬無理。 皇皇法宮, 神麗無比, 上下臣工, 咸願移御。 何物俊格, 必欲令逆㼁居之, 臣所不言之事, 公然擧之於書, 其背君附逆之罪, 可勝誅哉? 壬子冬, 下原州之日, 往辭於李爾瞻家, 韓纘男適在坐。 臣因言: ‘樂禍幸功之徒, 必擁大君而爲亂。 訓鍊都監堂上, 必參以殿下親臣, 一切勿用西人可也。’ 臣之言不幸而中, 於明年, 欲立㼁者, 果有是言哉。 癸丑秋冬間, 因爭攻造、訒去禍根之說, 相戒不敢出口。 況自獻心附西宮之情, 旣已詳知, 則矢落立革之說, 豈可向俊格言之? 立㼁垂簾之說, 不忍聞不忍言之事也, 俊格何敢以閑漫說話, 恬然問答於累年之後乎? (云云。) 自古亂臣賊子何限, 雖有莾、卓、操、溫之惡, 其吐亂言, 亦不若是, 而忍筆之於書, 俊格之心, 其甘爲辟陽之事, 亶可知矣。 以臣結怨之故, 辱且及於先王, 扣心搥胸, 寧欲與俊格, 同死於一刃也。 兇逆、怪變, 豈可人人爲之? 出此兇逆之言者, 必能爲兇檄、兇書也。 近來妖變, 未必非此流所爲。 自獻欲殺臣身, 無所不至, 臣有亂言, 則自獻何所忌憚, 不卽發告乎? 及其旣敗, 獸窮則搏, 僥倖萬一, 乃有此擧。 以肺腑大臣, 若聞亂言而不告, 則是護逆之甚者也。 俊格親躬亂言, 至於禁人婚嫁, 而挾冊師受, 已有多年, 此則逆黨之尤者也。 以彼以此, 其罪俱極, 臣之冤痛, 到此尤甚。 臣厚蒙恩寵, 超至正卿, 目見國勢孤危、宗社將顚, 協謀忠貞之臣, 誓去禍根, 以申《春秋》大義, 臣之願也。 乃以積忤於仇家, 終陷大辟。 向非大論, 則自獻 安敢爲相害之計哉? 臣之所恃, 惟在聖明。" 王令議啓, 回啓曰: "俊格供稱許筠事狀, 具係大逆不道, 爲人臣子, 所不忍見, 不忍聞者。 筠亦以爲曖昧, 種種所供, 無非自明之言, 此間實狀與虛僞, 以渠等之言, 決難取以爲信。 渠輩供招中, 指引之人, 不爲不多, 以獄體言之, 則詰問此等人, 可以得其情狀。 而俊格再疏之尾, 粘付四札中, 明有許筠筆跡, 則事有可據。 筠與俊格, 爲先面質, 鉤得實狀然後, 嚴鞫按律, 以洩神人之憤。" 答曰: "依啓。" 又啓曰: "亡難則河仁浚奴子, 禮吉則韓明勗所率之人, 卽同己奴者也。 大槪奴而證主, 有乖按獄之體, 鞫問此兩人, 必無得情之理。 此獄所斷者, 唯在日時之早晩, 惟此一款, 似當更問仁浚。" 答曰: "河仁浚爲先刑推嚴鞫, 兇書所書人及粘付人與其間曲折, 一一窮問得情。"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9책 635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원본
광해 10년 (1618)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