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6월 1일 甲申 3/17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국역
왜장(倭將)이 군사를 연합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청정·평의지(平義智)가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로 향했는데 30만으로 일컬었다. 송 경략이 심유경에게 서신을 보내 꾸짖기를,
"너는 이미 왜(倭)를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고 왕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자임하였는데 적이 오히려 둔거(屯據)하여 노략질을 마지않고 있다. 너는 적영(賊營)에 도로 들어가서 분명하게 효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장차 병부에 자문을 보내어 너를 중벌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니, 심유경이 두려워하여 도원수에게 통첩하기를,
"일본이 진주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살피건대 전에 진주에서 피살된 자가 매우 많은데다가 선척(船隻)이 모두 훼소(毁燒)되어 【수군의 승리를 가리킴.】 분을 못 이기고 있는 판에 더구나 귀국의 병사(兵使)가 누차 일본의 풀베는 병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왜장들이 이 일을 관백에게 알리자 관백은 ‘너희도 진주에 진공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함으로써 전일의 원한을 풀라.’ 하였답니다. 행장(行長)이 나에게 말하기를 ‘진주 백성들에게 그 예봉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들이 성이 비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곧 철수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심유경이 적영(賊營)으로부터 돌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행장이 청정을 극력 저지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행장은 종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군사는 진주를 공격하고 그만둘 것이니 다른 걱정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이 한효순(韓孝純)과 더불어 심유경을 만나보고 그 군사를 중지시켜 주기를 강력히 청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행장에게 중지하도록 간청하였고 행장의 생각도 중지했으면 하나,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끝내 돌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방책이 없으니 다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잠깐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나 역시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유정(劉綎)이 청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맹약을 어긴 것을 꾸짖고 화복(禍福)의 이치로 타일렀으나 청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은 군사 3백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성에 들어갔고, 충청 병사는 군사 7백을 거느리고,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5백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백을, 부장(副將) 장윤(張潤)은 군사 3백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1백여 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 이잠(李潜)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게 하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강희열(姜希悅)·고득뢰(高得賚)·강희보(姜希輔)·오유웅(吳宥熊) 등도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수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김천일이 항의하며 따르지 않았다. 선거이와 홍계남은 즉시 운봉(雲峯)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한효순(韓孝純)이 곽재우(郭再祐)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함께 지키게 하니, 곽재우가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빈(李薲)이 즉시 곽재우에게 정진(鼎津)을 지키게 하였다. 김천일 등이 성안을 점검해 보니, 창곡(倉穀)이 매우 많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이만하면 함께 지키기에 충분하다.’ 하고 당일로 군사를 나누었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김천일은 의병을 통솔하고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였으며, 황진(黃進)이 순성장(巡城將)이 되었다. 제도(諸道)의 관군과 의병들에게 지역을 할당하여 지키게 하고 엄히 경계하며 변에 대비하였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비장(裨將)을 보내와 수비 상태를 살펴보고 또 밖에서 원조할 것을 유시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믿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원문
○倭將合兵攻晋州, 倡義使金千鎰等, 入城拒守。 淸正、平義智悉兵向晋州, 號三十萬。 宋經略移書惟敬責之曰:
爾旣以令倭南下, 取歸王子自任, 而賊猶屯據, 搶掠不已。 爾須還入賊營, 分明曉諭。 不然, 我將移咨兵部, 重究不恕。
惟敬懼, 通帖于都元帥曰:
日本攻打晋州之意, 彼因去歲, 於此被殺甚多, 且船隻盡爲毁燒, 【指水軍之勝。】 是以忿狠不平。 況貴國兵使屢殺日本削草之兵, 彼將聞之關白, 關白曰: "爾等亦進攻晋州, 打破城池, 以洩前怨。" 行長謂我言: "晋州民可避其鋒。" 彼見城空人盡, 卽撤東回。" 已而, 惟敬還自賊營亦言: "行長力止淸正, 而終不回聽, 故行長不從軍行。 然此兵止於晋州, 無他憂矣。" 金命元與韓孝純見惟敬, 力請止其兵, 惟敬曰: "吾已力懇行長止之, 行長意亦然, 然而其勢已成, 終不可回, 今無他策。 但令諸將, 空城少避爲得計, 而朝鮮不從吾言, 吾亦奈何?" 劉綎移書淸正, 責其背盟, 諭以禍福, 淸正不答。 於是, 元帥傳令官義兵, 進保晋州, 倡義使金千鎰領兵三百, 先馳入城。 忠淸兵使領兵七百, 慶尙兵使崔慶會領兵五百, 義兵復讐將高從厚領兵四百, 副將張潤領兵三百, 義兵將李繼璉領兵百餘義, 兵將邊士貞遣其副將李潜, 領兵三百, 義兵將閔汝雲領兵二百, 姜希悅、高得賚、姜希輔、吳宥熊等, 皆領兵來會。 巨濟縣令金俊民及金海府使李宗仁等, 先在城中, 與牧使徐禮元方議守備。 全羅兵使宣居怡、永川郡守洪季男領兵隨到以爲: "賊衆我寡, 不如退守內面。" 金千鎰抗言不從, 居怡、季男卽出陣雲峰。 韓孝純使郭再祐往赴共守, 再祐不從曰: "惟權者能用兵, 智者能料敵。 今賊兵盛銳, 有天下莫能當之勢, 三里孤城, 何以保守? 吾寧在外爲援不可入城。" 左巡察使金玏叱之曰: "君不從大將, 奈軍律何?" 再祐曰: "此身死不足惜, 百戰軍卒, 何忍棄之?" 李薲卽令再祐守鼎津。 金千鎰等料撿城中倉穀甚富, 謂諸將曰: "此足以共守矣。" 卽日分軍。 金千鎰、崔慶會爲都節制, 千鎰統義兵, 慶會統官兵, 黃進爲巡城將, 諸道官義兵畫地分守, 戒嚴待變。 天將劉綎遣裨將, 來視守備, 且諭以外援, 城中信之。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선조 26년 (1593) 6월 1일
- 청정이 우리 두 왕자와 재신 황정욱·황혁 등을 돌려보내다
- 일본에 포로로 잡혔던 황정욱과 황혁 등을 하옥시키다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 도원수 김명원을 체직시키고 군중에서 즉시 권율로 대신하게 하다
-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 창의사 김천일의 졸기
- 순성장 황진의 졸기
- 김해 부사 이종인의 졸기
- 거제 현령 김준민의 졸기
- 부장 장윤의 졸기
- 경상 병사 최경회의 졸기
- 의병 복수장 고종후의 졸기
- 공조 좌랑 양산숙의 졸기
- 의병장 강희열의 졸기
- 부장 오유의 졸기
- 문과 정자 오차의 졸기
- 적병이 진주성으로부터 군병을 나누어 곤양·하동·산음 등지를 노략질하다
선조수정실록27권, 선조 26년 6월 1일 甲申 3/17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국역
왜장(倭將)이 군사를 연합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청정·평의지(平義智)가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로 향했는데 30만으로 일컬었다. 송 경략이 심유경에게 서신을 보내 꾸짖기를,
"너는 이미 왜(倭)를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고 왕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자임하였는데 적이 오히려 둔거(屯據)하여 노략질을 마지않고 있다. 너는 적영(賊營)에 도로 들어가서 분명하게 효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장차 병부에 자문을 보내어 너를 중벌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니, 심유경이 두려워하여 도원수에게 통첩하기를,
"일본이 진주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살피건대 전에 진주에서 피살된 자가 매우 많은데다가 선척(船隻)이 모두 훼소(毁燒)되어 【수군의 승리를 가리킴.】 분을 못 이기고 있는 판에 더구나 귀국의 병사(兵使)가 누차 일본의 풀베는 병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왜장들이 이 일을 관백에게 알리자 관백은 ‘너희도 진주에 진공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함으로써 전일의 원한을 풀라.’ 하였답니다. 행장(行長)이 나에게 말하기를 ‘진주 백성들에게 그 예봉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들이 성이 비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곧 철수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심유경이 적영(賊營)으로부터 돌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행장이 청정을 극력 저지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행장은 종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군사는 진주를 공격하고 그만둘 것이니 다른 걱정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이 한효순(韓孝純)과 더불어 심유경을 만나보고 그 군사를 중지시켜 주기를 강력히 청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행장에게 중지하도록 간청하였고 행장의 생각도 중지했으면 하나,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끝내 돌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방책이 없으니 다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잠깐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나 역시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유정(劉綎)이 청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맹약을 어긴 것을 꾸짖고 화복(禍福)의 이치로 타일렀으나 청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은 군사 3백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성에 들어갔고, 충청 병사는 군사 7백을 거느리고,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5백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백을, 부장(副將) 장윤(張潤)은 군사 3백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1백여 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 이잠(李潜)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게 하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강희열(姜希悅)·고득뢰(高得賚)·강희보(姜希輔)·오유웅(吳宥熊) 등도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수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김천일이 항의하며 따르지 않았다. 선거이와 홍계남은 즉시 운봉(雲峯)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한효순(韓孝純)이 곽재우(郭再祐)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함께 지키게 하니, 곽재우가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빈(李薲)이 즉시 곽재우에게 정진(鼎津)을 지키게 하였다. 김천일 등이 성안을 점검해 보니, 창곡(倉穀)이 매우 많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이만하면 함께 지키기에 충분하다.’ 하고 당일로 군사를 나누었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김천일은 의병을 통솔하고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였으며, 황진(黃進)이 순성장(巡城將)이 되었다. 제도(諸道)의 관군과 의병들에게 지역을 할당하여 지키게 하고 엄히 경계하며 변에 대비하였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비장(裨將)을 보내와 수비 상태를 살펴보고 또 밖에서 원조할 것을 유시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믿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원문
○倭將合兵攻晋州, 倡義使金千鎰等, 入城拒守。 淸正、平義智悉兵向晋州, 號三十萬。 宋經略移書惟敬責之曰:
爾旣以令倭南下, 取歸王子自任, 而賊猶屯據, 搶掠不已。 爾須還入賊營, 分明曉諭。 不然, 我將移咨兵部, 重究不恕。
惟敬懼, 通帖于都元帥曰:
日本攻打晋州之意, 彼因去歲, 於此被殺甚多, 且船隻盡爲毁燒, 【指水軍之勝。】 是以忿狠不平。 況貴國兵使屢殺日本削草之兵, 彼將聞之關白, 關白曰: "爾等亦進攻晋州, 打破城池, 以洩前怨。" 行長謂我言: "晋州民可避其鋒。" 彼見城空人盡, 卽撤東回。" 已而, 惟敬還自賊營亦言: "行長力止淸正, 而終不回聽, 故行長不從軍行。 然此兵止於晋州, 無他憂矣。" 金命元與韓孝純見惟敬, 力請止其兵, 惟敬曰: "吾已力懇行長止之, 行長意亦然, 然而其勢已成, 終不可回, 今無他策。 但令諸將, 空城少避爲得計, 而朝鮮不從吾言, 吾亦奈何?" 劉綎移書淸正, 責其背盟, 諭以禍福, 淸正不答。 於是, 元帥傳令官義兵, 進保晋州, 倡義使金千鎰領兵三百, 先馳入城。 忠淸兵使領兵七百, 慶尙兵使崔慶會領兵五百, 義兵復讐將高從厚領兵四百, 副將張潤領兵三百, 義兵將李繼璉領兵百餘義, 兵將邊士貞遣其副將李潜, 領兵三百, 義兵將閔汝雲領兵二百, 姜希悅、高得賚、姜希輔、吳宥熊等, 皆領兵來會。 巨濟縣令金俊民及金海府使李宗仁等, 先在城中, 與牧使徐禮元方議守備。 全羅兵使宣居怡、永川郡守洪季男領兵隨到以爲: "賊衆我寡, 不如退守內面。" 金千鎰抗言不從, 居怡、季男卽出陣雲峰。 韓孝純使郭再祐往赴共守, 再祐不從曰: "惟權者能用兵, 智者能料敵。 今賊兵盛銳, 有天下莫能當之勢, 三里孤城, 何以保守? 吾寧在外爲援不可入城。" 左巡察使金玏叱之曰: "君不從大將, 奈軍律何?" 再祐曰: "此身死不足惜, 百戰軍卒, 何忍棄之?" 李薲卽令再祐守鼎津。 金千鎰等料撿城中倉穀甚富, 謂諸將曰: "此足以共守矣。" 卽日分軍。 金千鎰、崔慶會爲都節制, 千鎰統義兵, 慶會統官兵, 黃進爲巡城將, 諸道官義兵畫地分守, 戒嚴待變。 天將劉綎遣裨將, 來視守備, 且諭以外援, 城中信之。
- 【태백산사고본】 7책 2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64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원본
선조 26년 (1593) 6월 1일
- 청정이 우리 두 왕자와 재신 황정욱·황혁 등을 돌려보내다
- 일본에 포로로 잡혔던 황정욱과 황혁 등을 하옥시키다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 도원수 김명원을 체직시키고 군중에서 즉시 권율로 대신하게 하다
-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 창의사 김천일의 졸기
- 순성장 황진의 졸기
- 김해 부사 이종인의 졸기
- 거제 현령 김준민의 졸기
- 부장 장윤의 졸기
- 경상 병사 최경회의 졸기
- 의병 복수장 고종후의 졸기
- 공조 좌랑 양산숙의 졸기
- 의병장 강희열의 졸기
- 부장 오유의 졸기
- 문과 정자 오차의 졸기
- 적병이 진주성으로부터 군병을 나누어 곤양·하동·산음 등지를 노략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