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91권, 선조 38년 9월 10일 辛巳 4/4 기사 /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의금부에서 억울한 옥사로서 윤준제·이대춘·이영춘·백수채·홍운해 등을 보고하다
국역
의금부가 아뢰기를,
"지난 8월 21일 승전(承傳)에 ‘지금의 이 풍재(風災)와 수재(水災)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산이 무너지고 큰 나무가 뽑히고 가옥이 표류하고 인물이 익사하고 곡식이 모두 상하여 추수의 가망이 없음에 따라 기근이 닥쳐 죽음이 가까왔으니, 무엇으로 이 백성을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언(求言)하고 부역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축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도 원통하고 억울한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니 각별히 살피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본부(本府)에 구금된 죄인을 다시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봉재(李鳳在)가 맡았던 병선(兵船) 2척이 둔 곳이 없었는데 사간(事干) 6인이 세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고, 그 병선은 이미 토병(土兵)에게 주어 감사(監司)가 곡식과 어전(魚箭)을 무역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발명하였습니다. 따라서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든 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미 1백 28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한 것 같습니다.
윤준제(尹遵悌)는 관에서 길러놓은 대[竹]를 베어 상인에게 팔아서 쌀 1백 석을 받아 사복을 채웠으니 진실로 경악할 일입니다. 그러나 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조사한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쌀 1백 석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의 입에서 전파되었을 뿐이고 또 관창(官倉)의 물건을 훔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인데 지금 88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한 것 같습니다.
이대춘(李大春)은 방산 만호(方山萬戶)로 있을 때 입방(入防)할 군졸에게 으레 4필의 목면(木綿)을 받았고 또 군기(軍器)가 정미롭지 못함을 가탁하여 준방(準防)한 후에 목면 1정(丁)을 받았으니 발각되는 대로 치죄(治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 후 각 진보(鎭堡)에 입번(入番)하는 군사가 평시와는 다름이 있어 한 차례의 분방(分防)이 큰 진이라도 10명 미만이고 또 군사들이 소지한 군장(軍裝)도 정미롭지 못하면 이를 점검하여 속전(贖錢)을 받아 군물(軍物)과 강변(江邊)을 수치(修治)하는 데 쓰는 것이 규례입니다. 감사가 들은 것이 풍문(風聞)에서 나왔을 뿐만이 아니라 주장(主將)에 그 허물을 돌리려는 군졸의 호소로서 다 믿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이미 72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할 것 같습니다.
이영춘(李領春)은 주장(主將)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물러가 다른 곳에서 유숙하고 군사 9명이 점고에 빠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러나 통제사(統制使)에게서 군사들에게 먹일 주미(酒米)를 이미 받았으므로 지나는 길에 잠깐 하륙(下陸)하여 그 일을 주선하였던 것이고 군사를 먹일 때 하인(下人)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환인(使喚人) 몇 명을 데리고 간 것인데 마침 군관(軍官)이 적간할 때 빠진 것으로 체포되었으니, 이것은 수사(水使)가 원문(轅門)에 잡아다가 편의대로 처벌할 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미 65차의 형을 받았으니 억울할 것 같습니다.
백수채(白受綵)는 피폐한 보(堡)의 권관(權管)이 되어 그 노자(奴子)로 하여금 본진(本鎭)의 여인에게 장가들게 하고 또 연대군(烟臺軍)에게 소 두 마리를 받았으니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자 논문(論文)이 본보(本堡)의 여인에게 장가들고서 영변(寧邊)의 성내에 와서 살고 있으니 이는 수채의 반노(叛奴)입니다. 당초 그 사실을 알았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고 두 마리의 소도 배를 만드는 데 썼다고 합니 다. 그런데 1백 7차의 형을 받았으니 억울한 것 같습니다.
홍운해(洪雲海)는 전에 김포 현령(金浦縣令)으로 있을 때 사복시(司僕寺)의 분양마(分養馬)를 제가 차지할 목적으로 죽었다고 진성(陳省)081) 를 작성하여 본사(本司)에 거짓 보고하고 민간에 값을 받아 아마첩(兒馬帖)을 사서 바쳤으니 그 정상이 극히 해괴합니다. 그러나 쌀을 받아들인 일에 대해서는 고을 하인에게 분배하고 그 사실을 이미 비변사에 해명하였습니다. 그의 공초에 의하면 납마(納馬)는 앞서 있었는데 논핵은 뒤에 있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사이의 진위(眞僞)는 의당 박윤(朴潤)을 추문해야 하겠으나 박윤이 이미 죽어서 증빙할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습니다.
장흥(長興)의 이영(移營)에 관한 옥사(獄事)는 모두 송응기(宋應琦)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그의 공초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일전(一錢)도 갖지 않은 것처럼 하다가 뒤에서는 스스로 80여 냥을 점유했다고 공초함으로써 그 말이 황당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연루된 문여(文勵)·채형(蔡衡)·강주(姜籀)·임익신(任翊臣) 등은 아마도 원한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죄인들을 보건대 모두가 용서하지 못할 장죄(贓罪)이다. 쇠세(衰世)의 군신(君臣)은 거개 나약해서 범법자를 주벌하지 못한다. 이것이 간사한 무리가 뜻을 얻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수십년 이래 장죄로 옥에 수금된 자가 전후 잇따랐으나 금부(禁府)에서 한 사람이라도 잡아서 그 죄를 다루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장죄를 범하고 국문을 받는 자가 무슨 빙옥(氷玉)처럼 결백한 무리이기에 매미가 허물을 벗듯 죄의 탈을 벗고 나간단 말인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원인이 있을 것이나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근래 금부가 엄국(嚴鞫)을 엄히 아니한다는 비평이 있고 심지어는 죄인으로 하여금 손수 공초를 초하게 하여 스스로 낭청(郞廳)의 소임을 수행하게 하되 모든 관원은 좌우에 둘러 서서 보기만 하고 감히 한마디도 그 사이 말을 꾸민 것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의가 통하지 않고 문자가 전도되어 군상(君上)도 알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하나의 이서(吏胥)로 하여금 혼자 청상(廳上)에 앉아 죄인의 구초(構草)를 등서하게 한들 무슨 불가능한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따라서 어찌 허다한 인원이 필요하겠는가. 일의 해괴함이 이에서 더 극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근신(近臣)은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언자(言者)들도 그르게 여기지 않으니 세도(世道)가 개탄스럽다. 금부는 왕옥(王獄)임에도 소홀히 여겨 이같이 엄격하지 않은데 다른 것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랴. 앞서는 전례를 핑계로 삼았는데 우리 나라의 유사(有司)는 어떤 조치할 일을 만나면 일의 시비는 따지지 않고 오직 전례라고만 함으로써 책임막음할 구실로만 삼고 있다. 전례라도 옳은 것이라면 그대로 준행할 수 있거니와 그른 일도 따를 수 있겠는가. 그 전례가 행여 주공(周公)에서 나왔다면 실로 따를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사심을 따르는 용렬한 자의 손에서 나왔더라도 따라야겠는가. 이와 같이 한다면 관에 있는 자가 한 명의 노예에게 하나의 등록(謄錄)을 짊어지게 하여 전도(前導)로 삼고 나아가도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심성(心性)을 다스릴 필요도 없고 학문을 전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간이 정절(簡易精切)한 것만이 전례이던가. 이 죄인들은 전지(傳旨)에 의하여 국문하고 율을 적용할 것이며, 또 죄인이 스스로 공초를 꾸미는 것을 전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 [註 081] 진성(陳省) : 진정서.
원문
○義禁府啓曰: "去八月二十一日承傳曰: ‘今玆風水之災, 振古所無。 山石皆崩、大木斯拔、廬舍漂流、人物渰死、禾穀盡傷, 西成無望, 飢饉將臻, 大命近止, 不知緣何而可救斯民也。 求言、給復、減租等事, 靡不擧行, 至於犴獄, 亦不無冤枉, 別爲審理。’ 事, 捧承傳矣。 就本府時繫罪人, 更加商覈, 則李鳳在任兵船二隻, 無置處。 事干六人刑訊三次, 發明其船, 已授土兵, 用於監司貿穀、魚箭云, 似非偸竊入己之比。 已受刑一百二十八次, 恐涉冤悶。 尹遵悌以公家培養之竹, 斫賣商賈, 受米百石, 終爲私用, 則誠爲可愕, 而以監司李時發査覈狀啓考之, 則受米百石之說, 只播於人口, 且與官倉之物偸竊者有間, 而已受刑八十八次, 恐涉冤悶。 李大春爲方山萬戶時, 入防軍卒處, 受例捧木四疋, 又托以軍器不精, 準防後收木一丁, 不可不隨現治罪。 而亂離之後, 各鎭堡入番軍士, 與平時有異, 一番分防, 雖巨鎭未滿十數, 且軍士等所持之軍裝不精, 則點考收贖, 用之於軍物修治, 江邊規例也。 監司所聞, 非但出於風聞, 軍卒歸咎主將之訴, 似難盡信, 而已受刑七十二次, 恐涉冤悶。 李領春不有主將之令, 退宿他處, 軍士九名, 至於闕點, 則其罪大矣。 但統制使犒軍酒米, 旣已逢授, 故所經之路, 暫爲下陸, 已幹其事, 而犒軍之時, 不可無下人, 故使喚人若干名, 亦爲率去, 而適於軍官摘奸時, 以闕到被捉, 則此不過水使捉致轅門, 隨便決罰之罪也。 而已受刑六十五次, 似爲冤悶。 白受綵爲殘堡權管, 使其奴子, 交嫁本鎭女人, 又烟臺軍處, 受牛二隻, 則不可不治罪。 而其奴論文, 交嫁本堡女人, 來接於寧邊城內, 則是, 受綵之叛奴也。 當初知情, 不可詳知, 且牛首二隻, 用於造船云。 受刑一百七次, 似爲冤悶。 洪雲海前爲金浦縣令時, 司僕寺分養馬, 生自占之計, 以故失成陳省, 瞞報本司, 捧價民間, 貿兒馬帖而納之, 其情, 極爲駭矣。 但收米之事, 分縣下人, 曾已分疏於備邊。 渠之所供, 納馬在先; 被論在後, 似有可疑, 而其間眞詐, 當推問朴潤, 而朴潤已死, 無憑可考, 臣等不敢擅議。 長興移營獄事, 皆出宋應琦之供招, 而渠之招, 前後反覆。 前則有若不食一錢者然; 後則以自占八十餘兩納招, 其說荒詐, 莫適所從。 其間連累文勵、蔡衡、姜籀、任翊臣等, 或不無冤枉, 而臣等不敢輕議, 伏惟上裁。" 傳曰: "見此罪人, 無非贓罪不貸。 衰世之君臣, 率多柔懦, 犯法不誅此, 所以姦(究)〔宄〕 得志也。 數十年來, 以贓罪繫獄者, 前後相繼, 而未見禁府之斯得一人, 以正厥罪。 犯贓被鞫者, 豈是氷淸玉潔之徒, 而蟬蛻於縲絏之中? 其故何哉? 蓋有之矣, 予未之見也。 近來禁府, 頗有嚴鞫不嚴之譏, 至使罪人, 手草供招, 自爲郞廳之任, 諸官左右環視, 莫敢措一辭於其間。 語意之不通、文字之顚錯, 君上亦不能解見。 若然, 則使一吏胥, 兀坐廳上, 謄書罪人之構草, 何患其不能也, 安用許多人員? 事之駭愕, 莫甚於此。 而近臣不以爲怪, 言者莫以爲非, 世道足歎。 禁府, 王獄也。 慢弛不嚴, 尙且如此, 他何足說哉? 向者以前例爲辭, 我國之有司, 凡遇處事, 不問事之是非、不辨事之曲直, 惟以前例爲取辦塞責之地。 前例而是者, 因可遵依; 非者, 亦可以遵依乎? 使其前例, 幸而出於周公之制作, 則固可以遵依; 不幸而或出於循私闒茸之手, 則亦可以遵依乎? 如此則任職居官者, 使一奴隷, 負一《謄錄》, 前導而行, 天下無難事矣。 心不必治; 學不必傳。 簡易精切, 其惟前例乎? 此罪人等, 姑依傳旨, 鞫問按律, 又莫以罪人自爲構草, 以爲前例也。"
선조실록191권, 선조 38년 9월 10일 辛巳 4/4 기사 /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의금부에서 억울한 옥사로서 윤준제·이대춘·이영춘·백수채·홍운해 등을 보고하다
국역
의금부가 아뢰기를,
"지난 8월 21일 승전(承傳)에 ‘지금의 이 풍재(風災)와 수재(水災)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산이 무너지고 큰 나무가 뽑히고 가옥이 표류하고 인물이 익사하고 곡식이 모두 상하여 추수의 가망이 없음에 따라 기근이 닥쳐 죽음이 가까왔으니, 무엇으로 이 백성을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언(求言)하고 부역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축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도 원통하고 억울한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니 각별히 살피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본부(本府)에 구금된 죄인을 다시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봉재(李鳳在)가 맡았던 병선(兵船) 2척이 둔 곳이 없었는데 사간(事干) 6인이 세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고, 그 병선은 이미 토병(土兵)에게 주어 감사(監司)가 곡식과 어전(魚箭)을 무역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발명하였습니다. 따라서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든 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미 1백 28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한 것 같습니다.
윤준제(尹遵悌)는 관에서 길러놓은 대[竹]를 베어 상인에게 팔아서 쌀 1백 석을 받아 사복을 채웠으니 진실로 경악할 일입니다. 그러나 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조사한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쌀 1백 석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의 입에서 전파되었을 뿐이고 또 관창(官倉)의 물건을 훔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인데 지금 88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한 것 같습니다.
이대춘(李大春)은 방산 만호(方山萬戶)로 있을 때 입방(入防)할 군졸에게 으레 4필의 목면(木綿)을 받았고 또 군기(軍器)가 정미롭지 못함을 가탁하여 준방(準防)한 후에 목면 1정(丁)을 받았으니 발각되는 대로 치죄(治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 후 각 진보(鎭堡)에 입번(入番)하는 군사가 평시와는 다름이 있어 한 차례의 분방(分防)이 큰 진이라도 10명 미만이고 또 군사들이 소지한 군장(軍裝)도 정미롭지 못하면 이를 점검하여 속전(贖錢)을 받아 군물(軍物)과 강변(江邊)을 수치(修治)하는 데 쓰는 것이 규례입니다. 감사가 들은 것이 풍문(風聞)에서 나왔을 뿐만이 아니라 주장(主將)에 그 허물을 돌리려는 군졸의 호소로서 다 믿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이미 72차의 형을 받았으니, 아마도 억울할 것 같습니다.
이영춘(李領春)은 주장(主將)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물러가 다른 곳에서 유숙하고 군사 9명이 점고에 빠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러나 통제사(統制使)에게서 군사들에게 먹일 주미(酒米)를 이미 받았으므로 지나는 길에 잠깐 하륙(下陸)하여 그 일을 주선하였던 것이고 군사를 먹일 때 하인(下人)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환인(使喚人) 몇 명을 데리고 간 것인데 마침 군관(軍官)이 적간할 때 빠진 것으로 체포되었으니, 이것은 수사(水使)가 원문(轅門)에 잡아다가 편의대로 처벌할 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미 65차의 형을 받았으니 억울할 것 같습니다.
백수채(白受綵)는 피폐한 보(堡)의 권관(權管)이 되어 그 노자(奴子)로 하여금 본진(本鎭)의 여인에게 장가들게 하고 또 연대군(烟臺軍)에게 소 두 마리를 받았으니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자 논문(論文)이 본보(本堡)의 여인에게 장가들고서 영변(寧邊)의 성내에 와서 살고 있으니 이는 수채의 반노(叛奴)입니다. 당초 그 사실을 알았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고 두 마리의 소도 배를 만드는 데 썼다고 합니 다. 그런데 1백 7차의 형을 받았으니 억울한 것 같습니다.
홍운해(洪雲海)는 전에 김포 현령(金浦縣令)으로 있을 때 사복시(司僕寺)의 분양마(分養馬)를 제가 차지할 목적으로 죽었다고 진성(陳省)081) 를 작성하여 본사(本司)에 거짓 보고하고 민간에 값을 받아 아마첩(兒馬帖)을 사서 바쳤으니 그 정상이 극히 해괴합니다. 그러나 쌀을 받아들인 일에 대해서는 고을 하인에게 분배하고 그 사실을 이미 비변사에 해명하였습니다. 그의 공초에 의하면 납마(納馬)는 앞서 있었는데 논핵은 뒤에 있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사이의 진위(眞僞)는 의당 박윤(朴潤)을 추문해야 하겠으나 박윤이 이미 죽어서 증빙할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습니다.
장흥(長興)의 이영(移營)에 관한 옥사(獄事)는 모두 송응기(宋應琦)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그의 공초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일전(一錢)도 갖지 않은 것처럼 하다가 뒤에서는 스스로 80여 냥을 점유했다고 공초함으로써 그 말이 황당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연루된 문여(文勵)·채형(蔡衡)·강주(姜籀)·임익신(任翊臣) 등은 아마도 원한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죄인들을 보건대 모두가 용서하지 못할 장죄(贓罪)이다. 쇠세(衰世)의 군신(君臣)은 거개 나약해서 범법자를 주벌하지 못한다. 이것이 간사한 무리가 뜻을 얻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수십년 이래 장죄로 옥에 수금된 자가 전후 잇따랐으나 금부(禁府)에서 한 사람이라도 잡아서 그 죄를 다루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장죄를 범하고 국문을 받는 자가 무슨 빙옥(氷玉)처럼 결백한 무리이기에 매미가 허물을 벗듯 죄의 탈을 벗고 나간단 말인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원인이 있을 것이나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근래 금부가 엄국(嚴鞫)을 엄히 아니한다는 비평이 있고 심지어는 죄인으로 하여금 손수 공초를 초하게 하여 스스로 낭청(郞廳)의 소임을 수행하게 하되 모든 관원은 좌우에 둘러 서서 보기만 하고 감히 한마디도 그 사이 말을 꾸민 것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의가 통하지 않고 문자가 전도되어 군상(君上)도 알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하나의 이서(吏胥)로 하여금 혼자 청상(廳上)에 앉아 죄인의 구초(構草)를 등서하게 한들 무슨 불가능한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따라서 어찌 허다한 인원이 필요하겠는가. 일의 해괴함이 이에서 더 극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근신(近臣)은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언자(言者)들도 그르게 여기지 않으니 세도(世道)가 개탄스럽다. 금부는 왕옥(王獄)임에도 소홀히 여겨 이같이 엄격하지 않은데 다른 것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랴. 앞서는 전례를 핑계로 삼았는데 우리 나라의 유사(有司)는 어떤 조치할 일을 만나면 일의 시비는 따지지 않고 오직 전례라고만 함으로써 책임막음할 구실로만 삼고 있다. 전례라도 옳은 것이라면 그대로 준행할 수 있거니와 그른 일도 따를 수 있겠는가. 그 전례가 행여 주공(周公)에서 나왔다면 실로 따를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사심을 따르는 용렬한 자의 손에서 나왔더라도 따라야겠는가. 이와 같이 한다면 관에 있는 자가 한 명의 노예에게 하나의 등록(謄錄)을 짊어지게 하여 전도(前導)로 삼고 나아가도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심성(心性)을 다스릴 필요도 없고 학문을 전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간이 정절(簡易精切)한 것만이 전례이던가. 이 죄인들은 전지(傳旨)에 의하여 국문하고 율을 적용할 것이며, 또 죄인이 스스로 공초를 꾸미는 것을 전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 [註 081] 진성(陳省) : 진정서.
원문
○義禁府啓曰: "去八月二十一日承傳曰: ‘今玆風水之災, 振古所無。 山石皆崩、大木斯拔、廬舍漂流、人物渰死、禾穀盡傷, 西成無望, 飢饉將臻, 大命近止, 不知緣何而可救斯民也。 求言、給復、減租等事, 靡不擧行, 至於犴獄, 亦不無冤枉, 別爲審理。’ 事, 捧承傳矣。 就本府時繫罪人, 更加商覈, 則李鳳在任兵船二隻, 無置處。 事干六人刑訊三次, 發明其船, 已授土兵, 用於監司貿穀、魚箭云, 似非偸竊入己之比。 已受刑一百二十八次, 恐涉冤悶。 尹遵悌以公家培養之竹, 斫賣商賈, 受米百石, 終爲私用, 則誠爲可愕, 而以監司李時發査覈狀啓考之, 則受米百石之說, 只播於人口, 且與官倉之物偸竊者有間, 而已受刑八十八次, 恐涉冤悶。 李大春爲方山萬戶時, 入防軍卒處, 受例捧木四疋, 又托以軍器不精, 準防後收木一丁, 不可不隨現治罪。 而亂離之後, 各鎭堡入番軍士, 與平時有異, 一番分防, 雖巨鎭未滿十數, 且軍士等所持之軍裝不精, 則點考收贖, 用之於軍物修治, 江邊規例也。 監司所聞, 非但出於風聞, 軍卒歸咎主將之訴, 似難盡信, 而已受刑七十二次, 恐涉冤悶。 李領春不有主將之令, 退宿他處, 軍士九名, 至於闕點, 則其罪大矣。 但統制使犒軍酒米, 旣已逢授, 故所經之路, 暫爲下陸, 已幹其事, 而犒軍之時, 不可無下人, 故使喚人若干名, 亦爲率去, 而適於軍官摘奸時, 以闕到被捉, 則此不過水使捉致轅門, 隨便決罰之罪也。 而已受刑六十五次, 似爲冤悶。 白受綵爲殘堡權管, 使其奴子, 交嫁本鎭女人, 又烟臺軍處, 受牛二隻, 則不可不治罪。 而其奴論文, 交嫁本堡女人, 來接於寧邊城內, 則是, 受綵之叛奴也。 當初知情, 不可詳知, 且牛首二隻, 用於造船云。 受刑一百七次, 似爲冤悶。 洪雲海前爲金浦縣令時, 司僕寺分養馬, 生自占之計, 以故失成陳省, 瞞報本司, 捧價民間, 貿兒馬帖而納之, 其情, 極爲駭矣。 但收米之事, 分縣下人, 曾已分疏於備邊。 渠之所供, 納馬在先; 被論在後, 似有可疑, 而其間眞詐, 當推問朴潤, 而朴潤已死, 無憑可考, 臣等不敢擅議。 長興移營獄事, 皆出宋應琦之供招, 而渠之招, 前後反覆。 前則有若不食一錢者然; 後則以自占八十餘兩納招, 其說荒詐, 莫適所從。 其間連累文勵、蔡衡、姜籀、任翊臣等, 或不無冤枉, 而臣等不敢輕議, 伏惟上裁。" 傳曰: "見此罪人, 無非贓罪不貸。 衰世之君臣, 率多柔懦, 犯法不誅此, 所以姦(究)〔宄〕 得志也。 數十年來, 以贓罪繫獄者, 前後相繼, 而未見禁府之斯得一人, 以正厥罪。 犯贓被鞫者, 豈是氷淸玉潔之徒, 而蟬蛻於縲絏之中? 其故何哉? 蓋有之矣, 予未之見也。 近來禁府, 頗有嚴鞫不嚴之譏, 至使罪人, 手草供招, 自爲郞廳之任, 諸官左右環視, 莫敢措一辭於其間。 語意之不通、文字之顚錯, 君上亦不能解見。 若然, 則使一吏胥, 兀坐廳上, 謄書罪人之構草, 何患其不能也, 安用許多人員? 事之駭愕, 莫甚於此。 而近臣不以爲怪, 言者莫以爲非, 世道足歎。 禁府, 王獄也。 慢弛不嚴, 尙且如此, 他何足說哉? 向者以前例爲辭, 我國之有司, 凡遇處事, 不問事之是非、不辨事之曲直, 惟以前例爲取辦塞責之地。 前例而是者, 因可遵依; 非者, 亦可以遵依乎? 使其前例, 幸而出於周公之制作, 則固可以遵依; 不幸而或出於循私闒茸之手, 則亦可以遵依乎? 如此則任職居官者, 使一奴隷, 負一《謄錄》, 前導而行, 天下無難事矣。 心不必治; 學不必傳。 簡易精切, 其惟前例乎? 此罪人等, 姑依傳旨, 鞫問按律, 又莫以罪人自爲構草, 以爲前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