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85권, 선조 38년 3월 17일 辛卯 3/3 기사 /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헌부가 원종 공신 정리, 공신 적장자 논상 개정, 소통사 처벌을 청하다
국역
헌부가 전에 아뢴 호성·청난의 원종 공신을 도태시키는 일과 신·구 공신의 적장에게 상주는 것을 개정하는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난(淸難)·선무(宣武) 두 군공(軍功)은, 당초 장수들이 마련하여 장계할 때에 1등 2등 3 등의 구분이 있었으므로 금번 원종 공신을 감정(勘定)할 때에 선무는 1등을 2등으로, 2등을 3등으로 강등시키고, 3등은 삭제시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청난의 원종 공신도 이 준례에 의해 내려야 옳은데, 다만 3 등의 군공은 지난번에 너무 많다는 하교로 인하여 비록 도태시키기는 하였지만 또한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자가 있고 1등과 2등에 있어서도 그대로 두고 강등시키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 여러 해 동안 왜적을 정벌한 사람도 삭제되었는데, 하물며 국내의 적을 열흘도 못 되어 평정한 자이겠습니까. 더구나 청난 공신은 당초 정훈(正勳)에 기록된 자도 원종으로 강등시킨 자가 많은데 어찌 이들만 강등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로가 현저하게 있는 자 이외에는 한결같이 선무의 원종 공신의 예에 의해 강등시키소서.
요즈음 중국 장수의 행차가 잇따라 나와 의주(義州)부터 부산(釜山)까지 일로(一路)의 백성들이 접대하느라 분주하여 겨를이 없는데,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포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은 실로 소통사(小通事)들이 부추긴 것이다. 이들은 의주에 있을 때에는 별도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가 중국 장수가 나오면 그를 수행하고자 온갖 술수를 부리며, 한번 수행하게 되면 의기 양양하여 기탄없이 수령을 욕보이고 백성들을 구타하며 선물을 요구하여 반드시 한없는 욕심을 채우고야 맙니다. 난리가 일어난 이후로 이 자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금번 이참장(李參將)이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에 소통사들이 각기 가정(家丁) 한 사람씩을 데리고 가서 여러 고을을 분담하여 돌아다니면서 침해하고 수탈하였는데 베를 한 치까지 심사하여 징수하는 등 수운하는 것이 전일에 비해 아주 많으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백성들의 아픔이 실로 애처롭습니다. 민심의 울분이 이에 이르러 더욱 극심하니 어찌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참장을 수행했던 소통사들을 참장이 강을 건너간 뒤에 모두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죄 주소서.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중국 장수의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으레 원역관(元譯官)으로 차정(差定)하고,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에게 하유하여 소통사는 일체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녹훈(錄勳)하는 일은 옛날과 규칙을 달리할 수 없다. 구 공신 등은 전례에 비추어 하고 상(喪)중에 있는 자도 구례대로 하며, 중국에 간 사람은 명을 받들고 중국에 조회(朝會)한 것이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청난(淸難)의 원종 공신에 대한 일과 소통사의 일로 하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윤허한다."
하고, 이어서 정원에 전교하기를,
"참장이 떠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되어 이목(耳目)이 두렵고 또 우리 나라 사람이 누설할지도 모르니, 이 계사를 아직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그리고 참장이 강을 건너간 뒤에 처리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니 정원이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원문
○憲府〔啓〕 前啓扈聖、淸難原從功臣汰去事及新舊功臣嫡長賞加改正事, 又啓: "淸難、宣武兩款軍功, 當初將領之官磨鍊狀啓時, 有一等、二等、三等之分, 故今此原從勘定之際, 宣武則一等降爲二等; 二等降爲三等; 三等削而不錄矣。 淸難原從, 亦當依此例遞降, 而只三等軍功, 頃因過多之 敎, 雖或汰去, 而亦有餘存因錄者, 至於一等、二等則仍存不降。 夫積苦兵間, 累歲征倭之人, 尙且見削, 矧此邦內之賊, 不旬日而底定者乎? 況淸難, 當初參錄正勳者, 亦多降爲原從, 何獨於此輩, 而不爲之遞降乎? 請命表表顯有功勞者外, 一依宣武原從, 遞降施行。 近日天朝將官之行, 連絡出來, 自義州至釜山, 一路民生, 奔走於供應之不暇, 而其擾害毒虐之慘, 則實小通事輩, 爲之縱臾耳。 此輩在義州, 別爲一種, 當天將之出來也, 百計作巧, 圖得隨行, 一入其行, 意氣揚揚, 無復顧忌, 折辱守宰, 歐打吏民, 需索人情, 必充其溪壑而後已。 自亂生以後, 此輩之橫恣作挐, 日滋月甚, 至于今日而極矣。 今此李參將之南下也, 小通事各引家丁一人, 分布列邑, 侵漁要索, 極其錙銖, 徵布輸運, 比前最多, 民生剜心之痛, 誠可哀哉。 人心憤鬱, 至此益極, 豈可任其所爲, 而不加懲治乎? 請李參將一行小通事輩, 參將越江後, 一一拿來, 嚴鞫定罪。 自今以後, 天將差備, 例以元譯官差定, 下諭於平安監司及義州府尹, 小通事一切不許隨行。" 答曰: "錄勳之事, 不可今昔異規, 舊功臣等照例, 在喪亦舊例。 赴京人奉命朝京, 竝不允。 淸難原從事、小通事事下書事, 竝允。" 仍傳于政院曰: "參將纔出一日, 耳目恐煩, 且我國人無不漏通, 此啓辭, 姑勿出于朝報。 且待還越江, 臨時處之似便, 政院議而處之。"
선조 38년 (1605) 3월 17일
선조실록185권, 선조 38년 3월 17일 辛卯 3/3 기사 /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헌부가 원종 공신 정리, 공신 적장자 논상 개정, 소통사 처벌을 청하다
국역
헌부가 전에 아뢴 호성·청난의 원종 공신을 도태시키는 일과 신·구 공신의 적장에게 상주는 것을 개정하는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난(淸難)·선무(宣武) 두 군공(軍功)은, 당초 장수들이 마련하여 장계할 때에 1등 2등 3 등의 구분이 있었으므로 금번 원종 공신을 감정(勘定)할 때에 선무는 1등을 2등으로, 2등을 3등으로 강등시키고, 3등은 삭제시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청난의 원종 공신도 이 준례에 의해 내려야 옳은데, 다만 3 등의 군공은 지난번에 너무 많다는 하교로 인하여 비록 도태시키기는 하였지만 또한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자가 있고 1등과 2등에 있어서도 그대로 두고 강등시키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 여러 해 동안 왜적을 정벌한 사람도 삭제되었는데, 하물며 국내의 적을 열흘도 못 되어 평정한 자이겠습니까. 더구나 청난 공신은 당초 정훈(正勳)에 기록된 자도 원종으로 강등시킨 자가 많은데 어찌 이들만 강등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로가 현저하게 있는 자 이외에는 한결같이 선무의 원종 공신의 예에 의해 강등시키소서.
요즈음 중국 장수의 행차가 잇따라 나와 의주(義州)부터 부산(釜山)까지 일로(一路)의 백성들이 접대하느라 분주하여 겨를이 없는데,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포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은 실로 소통사(小通事)들이 부추긴 것이다. 이들은 의주에 있을 때에는 별도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가 중국 장수가 나오면 그를 수행하고자 온갖 술수를 부리며, 한번 수행하게 되면 의기 양양하여 기탄없이 수령을 욕보이고 백성들을 구타하며 선물을 요구하여 반드시 한없는 욕심을 채우고야 맙니다. 난리가 일어난 이후로 이 자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금번 이참장(李參將)이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에 소통사들이 각기 가정(家丁) 한 사람씩을 데리고 가서 여러 고을을 분담하여 돌아다니면서 침해하고 수탈하였는데 베를 한 치까지 심사하여 징수하는 등 수운하는 것이 전일에 비해 아주 많으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백성들의 아픔이 실로 애처롭습니다. 민심의 울분이 이에 이르러 더욱 극심하니 어찌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참장을 수행했던 소통사들을 참장이 강을 건너간 뒤에 모두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죄 주소서.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중국 장수의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으레 원역관(元譯官)으로 차정(差定)하고,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에게 하유하여 소통사는 일체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녹훈(錄勳)하는 일은 옛날과 규칙을 달리할 수 없다. 구 공신 등은 전례에 비추어 하고 상(喪)중에 있는 자도 구례대로 하며, 중국에 간 사람은 명을 받들고 중국에 조회(朝會)한 것이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청난(淸難)의 원종 공신에 대한 일과 소통사의 일로 하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윤허한다."
하고, 이어서 정원에 전교하기를,
"참장이 떠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되어 이목(耳目)이 두렵고 또 우리 나라 사람이 누설할지도 모르니, 이 계사를 아직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그리고 참장이 강을 건너간 뒤에 처리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니 정원이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원문
○憲府〔啓〕 前啓扈聖、淸難原從功臣汰去事及新舊功臣嫡長賞加改正事, 又啓: "淸難、宣武兩款軍功, 當初將領之官磨鍊狀啓時, 有一等、二等、三等之分, 故今此原從勘定之際, 宣武則一等降爲二等; 二等降爲三等; 三等削而不錄矣。 淸難原從, 亦當依此例遞降, 而只三等軍功, 頃因過多之 敎, 雖或汰去, 而亦有餘存因錄者, 至於一等、二等則仍存不降。 夫積苦兵間, 累歲征倭之人, 尙且見削, 矧此邦內之賊, 不旬日而底定者乎? 況淸難, 當初參錄正勳者, 亦多降爲原從, 何獨於此輩, 而不爲之遞降乎? 請命表表顯有功勞者外, 一依宣武原從, 遞降施行。 近日天朝將官之行, 連絡出來, 自義州至釜山, 一路民生, 奔走於供應之不暇, 而其擾害毒虐之慘, 則實小通事輩, 爲之縱臾耳。 此輩在義州, 別爲一種, 當天將之出來也, 百計作巧, 圖得隨行, 一入其行, 意氣揚揚, 無復顧忌, 折辱守宰, 歐打吏民, 需索人情, 必充其溪壑而後已。 自亂生以後, 此輩之橫恣作挐, 日滋月甚, 至于今日而極矣。 今此李參將之南下也, 小通事各引家丁一人, 分布列邑, 侵漁要索, 極其錙銖, 徵布輸運, 比前最多, 民生剜心之痛, 誠可哀哉。 人心憤鬱, 至此益極, 豈可任其所爲, 而不加懲治乎? 請李參將一行小通事輩, 參將越江後, 一一拿來, 嚴鞫定罪。 自今以後, 天將差備, 例以元譯官差定, 下諭於平安監司及義州府尹, 小通事一切不許隨行。" 答曰: "錄勳之事, 不可今昔異規, 舊功臣等照例, 在喪亦舊例。 赴京人奉命朝京, 竝不允。 淸難原從事、小通事事下書事, 竝允。" 仍傳于政院曰: "參將纔出一日, 耳目恐煩, 且我國人無不漏通, 此啓辭, 姑勿出于朝報。 且待還越江, 臨時處之似便, 政院議而處之。"
원본
선조 38년 (1605)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