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辛亥 12/14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선전관 유대기가 진주성의 함략 경위, 적도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국역
선전관(宣傳官) 유대기(兪大祺)가 치계하였다. 【이달 16일에 진주(晉州)에 있으면서 한 것이다. 】
"신이 진주에 도착하여 성이 함락된 경위와 적도(賊徒)의 거류(去留) 등에 관한 일을 추문(推問)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월 21일 이른 아침에 왜적 1천여 명이 나타났고, 이튿날에는 왜적의 대군(大軍)이 들판에 가득히 들어와서 여러 곳에 진(陣)을 치고 철환(鐵丸)을 많이 발사하였는데, 아군이 왜적 3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이날 밤에 두 차례의 진격이 있었으나 두 차례 다 물리쳤습니다. 23일 여러 차례의 접전(接戰)이 있었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을 쏘아 죽였습니다. 24일 주야로 접전하였는데 피아(彼我)의 사상자(死傷者) 수가 같았습니다. 25일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26일 적이 거북 모양의 궤(樻)를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그것을 등에 지고서 무수히 들어와서 성을 헐기도 하고 땅굴을 파기도 하는 것을 우리 군사가 성 위에서 큰 돌을 던지니 적이 마침내 물러갔습니다.
27일 적이 다섯 군데에 산대(山臺)를 축조(築造)하여 성중을 내려다 보면서 화전(火箭)을 무수히 쏘아대니 성중의 민가(民家)가 다 불탔습니다. 28일 충청 병사 황진(黃進)이 왼쪽 겨드랑이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는데, 성이 함락될 때 피살(被殺)되었습니다. 29일 동문(東門)의 북쪽 옹성(擁城)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이 일시에 돌격해 들어오는 것을 아군이 무너진 곳에 큰 대나무를 쌓고 적을 무수히 쏘아 죽이니 적이 또 물러갔습니다. 조금 뒤에 신북문(新北門) 두 번째 격대(隔臺)로 많은 적이 철갑(鐵甲)을 입고 고함을 치며 돌진하자 그쪽을 지키던 창의군(倡義軍)이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적은 사다리를 놓고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니 제군(諸軍)이 모두 패배(敗北)하여 드디어 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성은 적이 모두 헐어버렸고, 살해되거나 죽은 본주의 인민 남녀와 관군(官軍)·의병(義兵)이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피살된 장관(將官)도 누구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이미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으므로 가족(家族)들이 다만 죽은 사람이 평소에 입던 옷만을 가지고와서 초혼(招魂)해 가고 있습니다. 사졸들의 시체는 현재 수습하여 매장(埋葬)하고 있지만 시체가 산처럼 쌓였기 때문에 마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성을 함락한 뒤에 왜적의 한 무리는 단성(丹城)으로 가서 관사(官舍)와 민가(民家)를 다 불태우고서 곧장 산음(山陰)으로 갔다가 지리산(智異山)으로 옮겨갔고, 한 무리는 곧장 진주 서면(西面)으로 나아갔다가 또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두 무리의 적이 합세(合勢)하여 곧장 호남으로 달려가서 구례(求禮)·광양(光陽)·남원(南原)·순천(順天) 등지의 마을들을 분탕한 뒤에 하동(河東)·곤양(昆陽)·사천(泗川)·고성(固城)·김해(金海) 등지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 한 무리는 사천으로 가서 민가(民家)를 분탕한 뒤에 고성·진해(鎭海) 등지로 돌아왔으며, 또 한 무리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가서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우고서 함양(咸陽)·창원(昌原) 등지로 돌아와서 주둔하고 있으며, 또 한 무리는 소촌(召村)의 길을 따라 곧장 함안으로 갔고, 또 한 무리는 포로가 된 우리 나라의 남녀와 복물(卜物)을 30척(隻)의 배에 싣고서 남강(南江)에서 출발하여 김해로 돌아갔습니다.
원문
○宣傳官兪大祺 【本月十六日, 在晋州。】 馳啓曰: "臣來到晋州, 陷城節次及賊徒去留等事推問, 則倭賊去六月二十一日早朝, 千餘名現形; 翌日, 大軍彌滿入來, 諸處結陣, 多放鐵丸, 我軍射中三十餘人, 是夜再進再退。 二十三日, 累度接戰, 射中不知其數。 二十四日, 晝夜接戰, 彼我死亡相同。 二十五日亦如是。 二十六日, 賊作龜匣形樻, 裹以生皮, 無數負戴入來, 或毁城子, 或掘地陷, 我軍以大石投之, 賊遂退。 二十七日, 賊造山臺於五處, 俯瞰城中, 鐵丸及火箭, 無數放之, 城內民家, 幾盡燒燬。 二十八日, 忠淸兵使黃進左額逢丸, 不至重傷, 陷城時被殺。 二十九日, 東門北擁城, 因雨頹圮, 賊一時突入。 我軍以大竹積置其處, 無數射中, 賊又退。 俄而新北門第二隔臺, 衆賊着鐵甲, 高噪突進, 倡義軍守其面, 一時齊潰。 賊立梯登城, 揮劍踴躍, 諸軍皆北, 遂至陷城。 城子則賊盡爲撤毁, 殺死本州人民男女、官軍、義兵, 不知幾許。 將官被殺者, 不知某某人。 各人屍體, 已盡腐爛, 未能指的。 各家人, 只持衣服, 招魂以去。 士卒屍體, 時方收瘞, 而積置如山, 恐未易畢。 城陷後, 倭賊一運, 向丹城, 盡焚官舍、民家, 直向山陰, 轉向智異山; 一運直出晋州西面, 又向智異山合勢, 直趨湖南, 焚蕩求禮、光陽、南原、順天閭里, 還向河東、昆陽、泗川、固城、金海等處, 留屯; 又一運向泗川, 焚蕩閭家後, 還向固城、鎭海等處; 又一運向三嘉、宜寧, 盡焚官舍、民家, 還屯咸陽、昌原等處。 又一運從召村之路, 直向咸安; 又一運自南江, 領被擄本州男女及卜物, 載船三十餘隻, 還向金海云云。"
선조 26년 (1593) 8월 30일
- 비변사가 경략에 보낼 자문 내용을 고쳐 아뢰다
-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히다
- 영중추부사 심수경 등이 선위하는 전교를 거두기를 청하다
- 영중추부사 심수경 등이 선위하는 전교를 거두기를 다시 청하다
- 양사가 서울로 떠날 날짜를 속히 정하자고 아뢰다
- 헌부와 간원이 황정욱과 황혁의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
- 세자가 내선의 명을 거두기를 청하다
- 이수광·이덕열·허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영의정 최흥원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적에 대한 조처를 요청하다
- 영의정 최흥원이 서울에 있는 왜적이 서쪽으로 가려 한다고 보고하다
- 왜적 일행을 저지하고 경략에게 자문을 보내 논변하기로 하다
- 선전관 유대기가 진주성의 함략 경위, 적도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 윤근수가 세자를 내려 보낼 수 없음을 경략 진영에 설명했다 보고하다
- 객성이 천창성 동쪽에 있다
선조실록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辛亥 12/14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선전관 유대기가 진주성의 함략 경위, 적도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국역
선전관(宣傳官) 유대기(兪大祺)가 치계하였다. 【이달 16일에 진주(晉州)에 있으면서 한 것이다. 】
"신이 진주에 도착하여 성이 함락된 경위와 적도(賊徒)의 거류(去留) 등에 관한 일을 추문(推問)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월 21일 이른 아침에 왜적 1천여 명이 나타났고, 이튿날에는 왜적의 대군(大軍)이 들판에 가득히 들어와서 여러 곳에 진(陣)을 치고 철환(鐵丸)을 많이 발사하였는데, 아군이 왜적 3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이날 밤에 두 차례의 진격이 있었으나 두 차례 다 물리쳤습니다. 23일 여러 차례의 접전(接戰)이 있었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을 쏘아 죽였습니다. 24일 주야로 접전하였는데 피아(彼我)의 사상자(死傷者) 수가 같았습니다. 25일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26일 적이 거북 모양의 궤(樻)를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그것을 등에 지고서 무수히 들어와서 성을 헐기도 하고 땅굴을 파기도 하는 것을 우리 군사가 성 위에서 큰 돌을 던지니 적이 마침내 물러갔습니다.
27일 적이 다섯 군데에 산대(山臺)를 축조(築造)하여 성중을 내려다 보면서 화전(火箭)을 무수히 쏘아대니 성중의 민가(民家)가 다 불탔습니다. 28일 충청 병사 황진(黃進)이 왼쪽 겨드랑이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는데, 성이 함락될 때 피살(被殺)되었습니다. 29일 동문(東門)의 북쪽 옹성(擁城)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이 일시에 돌격해 들어오는 것을 아군이 무너진 곳에 큰 대나무를 쌓고 적을 무수히 쏘아 죽이니 적이 또 물러갔습니다. 조금 뒤에 신북문(新北門) 두 번째 격대(隔臺)로 많은 적이 철갑(鐵甲)을 입고 고함을 치며 돌진하자 그쪽을 지키던 창의군(倡義軍)이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적은 사다리를 놓고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니 제군(諸軍)이 모두 패배(敗北)하여 드디어 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성은 적이 모두 헐어버렸고, 살해되거나 죽은 본주의 인민 남녀와 관군(官軍)·의병(義兵)이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피살된 장관(將官)도 누구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이미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으므로 가족(家族)들이 다만 죽은 사람이 평소에 입던 옷만을 가지고와서 초혼(招魂)해 가고 있습니다. 사졸들의 시체는 현재 수습하여 매장(埋葬)하고 있지만 시체가 산처럼 쌓였기 때문에 마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성을 함락한 뒤에 왜적의 한 무리는 단성(丹城)으로 가서 관사(官舍)와 민가(民家)를 다 불태우고서 곧장 산음(山陰)으로 갔다가 지리산(智異山)으로 옮겨갔고, 한 무리는 곧장 진주 서면(西面)으로 나아갔다가 또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두 무리의 적이 합세(合勢)하여 곧장 호남으로 달려가서 구례(求禮)·광양(光陽)·남원(南原)·순천(順天) 등지의 마을들을 분탕한 뒤에 하동(河東)·곤양(昆陽)·사천(泗川)·고성(固城)·김해(金海) 등지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 한 무리는 사천으로 가서 민가(民家)를 분탕한 뒤에 고성·진해(鎭海) 등지로 돌아왔으며, 또 한 무리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가서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우고서 함양(咸陽)·창원(昌原) 등지로 돌아와서 주둔하고 있으며, 또 한 무리는 소촌(召村)의 길을 따라 곧장 함안으로 갔고, 또 한 무리는 포로가 된 우리 나라의 남녀와 복물(卜物)을 30척(隻)의 배에 싣고서 남강(南江)에서 출발하여 김해로 돌아갔습니다.
원문
○宣傳官兪大祺 【本月十六日, 在晋州。】 馳啓曰: "臣來到晋州, 陷城節次及賊徒去留等事推問, 則倭賊去六月二十一日早朝, 千餘名現形; 翌日, 大軍彌滿入來, 諸處結陣, 多放鐵丸, 我軍射中三十餘人, 是夜再進再退。 二十三日, 累度接戰, 射中不知其數。 二十四日, 晝夜接戰, 彼我死亡相同。 二十五日亦如是。 二十六日, 賊作龜匣形樻, 裹以生皮, 無數負戴入來, 或毁城子, 或掘地陷, 我軍以大石投之, 賊遂退。 二十七日, 賊造山臺於五處, 俯瞰城中, 鐵丸及火箭, 無數放之, 城內民家, 幾盡燒燬。 二十八日, 忠淸兵使黃進左額逢丸, 不至重傷, 陷城時被殺。 二十九日, 東門北擁城, 因雨頹圮, 賊一時突入。 我軍以大竹積置其處, 無數射中, 賊又退。 俄而新北門第二隔臺, 衆賊着鐵甲, 高噪突進, 倡義軍守其面, 一時齊潰。 賊立梯登城, 揮劍踴躍, 諸軍皆北, 遂至陷城。 城子則賊盡爲撤毁, 殺死本州人民男女、官軍、義兵, 不知幾許。 將官被殺者, 不知某某人。 各人屍體, 已盡腐爛, 未能指的。 各家人, 只持衣服, 招魂以去。 士卒屍體, 時方收瘞, 而積置如山, 恐未易畢。 城陷後, 倭賊一運, 向丹城, 盡焚官舍、民家, 直向山陰, 轉向智異山; 一運直出晋州西面, 又向智異山合勢, 直趨湖南, 焚蕩求禮、光陽、南原、順天閭里, 還向河東、昆陽、泗川、固城、金海等處, 留屯; 又一運向泗川, 焚蕩閭家後, 還向固城、鎭海等處; 又一運向三嘉、宜寧, 盡焚官舍、民家, 還屯咸陽、昌原等處。 又一運從召村之路, 直向咸安; 又一運自南江, 領被擄本州男女及卜物, 載船三十餘隻, 還向金海云云。"
원본
선조 26년 (1593) 8월 30일
- 비변사가 경략에 보낼 자문 내용을 고쳐 아뢰다
-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히다
- 영중추부사 심수경 등이 선위하는 전교를 거두기를 청하다
- 영중추부사 심수경 등이 선위하는 전교를 거두기를 다시 청하다
- 양사가 서울로 떠날 날짜를 속히 정하자고 아뢰다
- 헌부와 간원이 황정욱과 황혁의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
- 세자가 내선의 명을 거두기를 청하다
- 이수광·이덕열·허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영의정 최흥원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적에 대한 조처를 요청하다
- 영의정 최흥원이 서울에 있는 왜적이 서쪽으로 가려 한다고 보고하다
- 왜적 일행을 저지하고 경략에게 자문을 보내 논변하기로 하다
- 선전관 유대기가 진주성의 함략 경위, 적도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 윤근수가 세자를 내려 보낼 수 없음을 경략 진영에 설명했다 보고하다
- 객성이 천창성 동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