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40권, 선조 26년 7월 14일 丙寅 9/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요동 유학생 방원선이 성지, 화의책 등에 관한 구안장치책요를 올리다
국역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의 유학생(儒學生) 방원선(方元善)이 구안장치책요(久安長治策要)를 올렸는데, 그 글에,
"삼가 생각건대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여 나라를 지킨 것은 예로부터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험(險)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城)과 지(池)입니다. 내가 귀국(貴國)의 전역을 두루 보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우선 내가 지나며 본 곳으로써 말할 것 같으면, 성과 지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끝내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귀국의 성지 제도에 따라 성지를 쌓았고 왕공이 설치한 성지 제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왕공이 성지를 설치하여 유형(有形)의 힘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사방의 들이 평탄하여 높은 산이나 깊은 물이 가깝지 않은 곳에 설치하며, 큰 성인 경우라도 주위가 20∼30리를 넘지 않고 작은 경우에는 8∼9리를 넘지 않으며 심지어는 3∼5리 정도로 작게 쌓은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방수(防守)를 편리하게 하는데 뜻을 둔 것이요, 또한 인심이 더욱 굳게 뭉치게 하는 것으로 무형(無形)의 험을 삼아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게 하였던 것을 몰라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국의 성은 산세(山勢)의 고하에 따라 쌓았는데 주위가 광활하고 성중(城中)에 산림(山林)이 많으며 성이 견고하거나 높지 않아 내외가 서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다가 경급(警急)을 만나게 되면 백성이 지키기에 불편하고 관(官)에서 독려하기에 불편하니, 이는 험이란 이름만 있을 뿐 험의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왕공(王公)이 설치하는 험이며 왕공이 지키는 법이겠습니까.
우리 황상(皇上)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엄을 삼아 여러 차례의 칙유(勅諭)를 내리시어 항복과 납공(納貢)을 허락하였으니, 이 은전(恩典)이 시행되게 되면 귀국에는 영원히 의외의 변란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금년에 적을 살육(殺戮)하여 패망시킨다면 명년에 다시 올 것이고, 이번에는 적을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뒤에 반드시 다시 몰려 올 것이어서 아마도 끝날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의(和議)가 상책(上策)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양명(陽明)하고 평실(平實)한 곳으로서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가깝지 않은 곳을 골라서 높은 성을 쌓고 깊은 지(池)를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변의 경우는 밖으로 강하(江河)를 의지하는 것이 실로 천참(天塹)의 요새가 되고, 안으로 보대(堡臺)를 나열하는 것이 더욱 보장(保障)의 견고함이 되는 것입니다. 장령(將領)들은 항상 조련(操鍊)하고 사졸들은 무술을 익히며, 헐렁한 옷을 철갑(鐵甲)으로 바꾸고 큰 모자를 명회(明盔)261) 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분요(紛擾)하게 지낸 지 7개월입니다. 천신 만고(千辛萬苦)함은 글로써 다 쓸 수가 없고 구사 일생(九死一生)함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보고 들은 바이니 무슨 군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개선(凱旋)하여 주첩(奏捷)하려는 즈음에 먼저 경략 등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와 잠시 평양(平壤)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어 치사(致謝)하는 편에 변변찮은 나의 소견을 기록해 보내어 봉람(奉覽)하시게 하였습니다마는 현왕(賢王)과 각 집사(各執事)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옥음(玉音)을 내리시어 채납(採納)하신다면 이어 자세히 문서로 만들어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부디 서생(書生)의 말이라서 취할 것이 못 되고 한갓 근심만 끼쳐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삼가 이 글을 올려 규간(規諫)하고 아울러 치사합니다."
하였는데, 회첩(回帖)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철령위의 학생으로서 도검(韜鈐)262) 을 여사(餘事)로 여기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문필(文筆)을 버리시고 정벌군(征伐軍)을 따라 누지(陋地)에 왕림하여, 우리 나라의 성곽(城郭)이 모두 물과 산을 가까이하고 있어 왕공(王公)의 설험(設險)하는 뜻에 어긋났으므로 사시(蛇豕)263) 의 화(禍)를 입게 된 것이라고 여겨서 평지(平地)에 있으면서 외모(外侮)를 막으라 하고, 또 이어 조비(操備)의 법과 의관의 제도까지 말씀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오늘의 병통에 적중한 말씀이고 아울러 기의(機宜)에도 맞는 말씀입니다. 이 고명한 견해와 원대한 계려(計慮)는 진실로 용렬한 자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바입니다. 주신 글을 재삼 되풀이해 읽어 보니 감명이 더욱 깊어집니다. 당직(當職)은 악독한 화에 걸려 보장(保障)마저 잃었으니 재앙이 절박하여 어디에서 죽게 될는지조차 알 수 없으므로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고 온갖 애간장이 다 끊어졌습니다. 오직 믿는 바는 성황(聖皇)의 은혜로운 위무(慰撫)와 제현(諸賢)들의 극진한 도움뿐입니다. 그러나 친병(親兵)264) 이 돌아가지 못해 준마(駿馬)의 뼈를 구렁에 묻는 것이 모두 당직 때문이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선패(仙旆)265) 가 서둘러 떠나시어 한 번 만나볼 길이 끝내 막혔으니 사모하는 생각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土産物)은 별폭(別幅)에 그 품목(品目)을 갖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이만 줄이며 양찰(諒察)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註 261] 명회(明盔) : 투구.
- [註 262] 도검(韜鈐) : 무사(武事).
- [註 263] 사시(蛇豕) : 뱀과 돼지처럼 탐악(貪惡)한 왜적을 지칭함.
- [註 264] 친병(親兵) : 명군(明軍).
- [註 265] 선패(仙旆) : 상대의 행차를 높여 부르는 말.
원문
○遼東 鐵嶺衛儒學生方元善, 上久安長治策要。 其文曰:
竊惟, 王公設險以守國, 自古記之矣。 然險非他, 卽城與池也。 吾于貴國幅員, 雖未嘗遍觀盡識, 姑自其所經歷者言之, 非無城也, 非無池也, 而卒不能守者, 豈險其所險, 非王公所設之險乎? 不知王公建立城池, 以爲有形之險, 必四野平坦, 不近高山, 不臨深河, 周圍大不過三、二十里, 小不過八、九餘里, 甚有三、五里者, 意在便于防守。 尤固結人心, 以爲無形之險, 萬無一失耳。 今貴國城, 俱隨山高下, 周圍曠野, 中多山林, 城不堅高, 內外相望。 一遇有警, 民不便于守, 官不便于督也。 是有險之名, 而無險之實。 豈王公所設之險乎, 又豈王公所守之法乎? 我皇上以不殺爲威, 屢行勑諭, 準降納貢, 此恩旣施, 國可永保無虞。 不然, 今年殺敗, 明年復來; 今則殺絶, 後必復聚, 將不知其所終矣。 所以議和爲上策也。 今之計, 急擇陽明平實之地, 勿近高山、深河之區, 築以高城, 鑿以深池。 更于治邊, 外藉江漢, 實爲天塹之險; 內列堡臺, 尤爲保障之固。 將領常于操練; 士卒習爾干戈, 易寬袍以鐵甲, 更大帽以明盔。 吾擾玆地, 方七月矣。 萬苦千辛, 誠非筆墨所能述, 九死一生, 諒有耳目以習聞, 何庸吾贅? 但今凱旋奏捷之際, 先赴經略等處, 回復暫駐平壤, 專人致謝, 草以膚見, 附投奉覽, 不識賢王與各執事, 以爲何如? 幸賜玉音, 倘見採擇, 仍細開款另上。 愼勿曰書生之見不足取。 徒自貽伊戚, 莫可救也。 謹此獻且規焉, 謝竝辭焉云。
回帖曰:
惟大人, 龍翔衛序, 餘事韜鈐, 投筆隨征, 榮臨陋地, 以爲弊邦城郭, 悉傍河山, 乖王公設險之義, 被蛇豕憑陵之禍, 俾居平地, 以禦外侮。 仍言操備之法及以冠衣之制。 俱中今病, 竝合機宜。 高明之見, 宏遠之慮, 委非譾劣所可髣髴。 圭復來牋, 銘感彌深。 職, 重罹毒禍, 保障又失, 災將及膚, 死已無所, 仰天搥胸, 百哀摧心。 所賴聖皇恩撫, 諸賢曲庇耳。 親兵未歸, 駿骨捐溝, 緣職之故, 慙惋如何? 仙旆遄歸, 淸覿竟阻, 瞻想之懷, 只增依依。 不腆土宜, 具在別幅。 不宣惟諒。
선조 26년 (1593) 7월 14일
선조실록40권, 선조 26년 7월 14일 丙寅 9/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요동 유학생 방원선이 성지, 화의책 등에 관한 구안장치책요를 올리다
국역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의 유학생(儒學生) 방원선(方元善)이 구안장치책요(久安長治策要)를 올렸는데, 그 글에,
"삼가 생각건대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여 나라를 지킨 것은 예로부터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험(險)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城)과 지(池)입니다. 내가 귀국(貴國)의 전역을 두루 보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우선 내가 지나며 본 곳으로써 말할 것 같으면, 성과 지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끝내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귀국의 성지 제도에 따라 성지를 쌓았고 왕공이 설치한 성지 제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왕공이 성지를 설치하여 유형(有形)의 힘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사방의 들이 평탄하여 높은 산이나 깊은 물이 가깝지 않은 곳에 설치하며, 큰 성인 경우라도 주위가 20∼30리를 넘지 않고 작은 경우에는 8∼9리를 넘지 않으며 심지어는 3∼5리 정도로 작게 쌓은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방수(防守)를 편리하게 하는데 뜻을 둔 것이요, 또한 인심이 더욱 굳게 뭉치게 하는 것으로 무형(無形)의 험을 삼아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게 하였던 것을 몰라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국의 성은 산세(山勢)의 고하에 따라 쌓았는데 주위가 광활하고 성중(城中)에 산림(山林)이 많으며 성이 견고하거나 높지 않아 내외가 서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다가 경급(警急)을 만나게 되면 백성이 지키기에 불편하고 관(官)에서 독려하기에 불편하니, 이는 험이란 이름만 있을 뿐 험의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왕공(王公)이 설치하는 험이며 왕공이 지키는 법이겠습니까.
우리 황상(皇上)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엄을 삼아 여러 차례의 칙유(勅諭)를 내리시어 항복과 납공(納貢)을 허락하였으니, 이 은전(恩典)이 시행되게 되면 귀국에는 영원히 의외의 변란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금년에 적을 살육(殺戮)하여 패망시킨다면 명년에 다시 올 것이고, 이번에는 적을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뒤에 반드시 다시 몰려 올 것이어서 아마도 끝날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의(和議)가 상책(上策)입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양명(陽明)하고 평실(平實)한 곳으로서 높은 산이나 깊은 물에 가깝지 않은 곳을 골라서 높은 성을 쌓고 깊은 지(池)를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변의 경우는 밖으로 강하(江河)를 의지하는 것이 실로 천참(天塹)의 요새가 되고, 안으로 보대(堡臺)를 나열하는 것이 더욱 보장(保障)의 견고함이 되는 것입니다. 장령(將領)들은 항상 조련(操鍊)하고 사졸들은 무술을 익히며, 헐렁한 옷을 철갑(鐵甲)으로 바꾸고 큰 모자를 명회(明盔)261) 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분요(紛擾)하게 지낸 지 7개월입니다. 천신 만고(千辛萬苦)함은 글로써 다 쓸 수가 없고 구사 일생(九死一生)함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보고 들은 바이니 무슨 군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개선(凱旋)하여 주첩(奏捷)하려는 즈음에 먼저 경략 등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와 잠시 평양(平壤)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어 치사(致謝)하는 편에 변변찮은 나의 소견을 기록해 보내어 봉람(奉覽)하시게 하였습니다마는 현왕(賢王)과 각 집사(各執事)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옥음(玉音)을 내리시어 채납(採納)하신다면 이어 자세히 문서로 만들어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부디 서생(書生)의 말이라서 취할 것이 못 되고 한갓 근심만 끼쳐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삼가 이 글을 올려 규간(規諫)하고 아울러 치사합니다."
하였는데, 회첩(回帖)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철령위의 학생으로서 도검(韜鈐)262) 을 여사(餘事)로 여기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문필(文筆)을 버리시고 정벌군(征伐軍)을 따라 누지(陋地)에 왕림하여, 우리 나라의 성곽(城郭)이 모두 물과 산을 가까이하고 있어 왕공(王公)의 설험(設險)하는 뜻에 어긋났으므로 사시(蛇豕)263) 의 화(禍)를 입게 된 것이라고 여겨서 평지(平地)에 있으면서 외모(外侮)를 막으라 하고, 또 이어 조비(操備)의 법과 의관의 제도까지 말씀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오늘의 병통에 적중한 말씀이고 아울러 기의(機宜)에도 맞는 말씀입니다. 이 고명한 견해와 원대한 계려(計慮)는 진실로 용렬한 자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바입니다. 주신 글을 재삼 되풀이해 읽어 보니 감명이 더욱 깊어집니다. 당직(當職)은 악독한 화에 걸려 보장(保障)마저 잃었으니 재앙이 절박하여 어디에서 죽게 될는지조차 알 수 없으므로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고 온갖 애간장이 다 끊어졌습니다. 오직 믿는 바는 성황(聖皇)의 은혜로운 위무(慰撫)와 제현(諸賢)들의 극진한 도움뿐입니다. 그러나 친병(親兵)264) 이 돌아가지 못해 준마(駿馬)의 뼈를 구렁에 묻는 것이 모두 당직 때문이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선패(仙旆)265) 가 서둘러 떠나시어 한 번 만나볼 길이 끝내 막혔으니 사모하는 생각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土産物)은 별폭(別幅)에 그 품목(品目)을 갖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이만 줄이며 양찰(諒察)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註 261] 명회(明盔) : 투구.
- [註 262] 도검(韜鈐) : 무사(武事).
- [註 263] 사시(蛇豕) : 뱀과 돼지처럼 탐악(貪惡)한 왜적을 지칭함.
- [註 264] 친병(親兵) : 명군(明軍).
- [註 265] 선패(仙旆) : 상대의 행차를 높여 부르는 말.
원문
○遼東 鐵嶺衛儒學生方元善, 上久安長治策要。 其文曰:
竊惟, 王公設險以守國, 自古記之矣。 然險非他, 卽城與池也。 吾于貴國幅員, 雖未嘗遍觀盡識, 姑自其所經歷者言之, 非無城也, 非無池也, 而卒不能守者, 豈險其所險, 非王公所設之險乎? 不知王公建立城池, 以爲有形之險, 必四野平坦, 不近高山, 不臨深河, 周圍大不過三、二十里, 小不過八、九餘里, 甚有三、五里者, 意在便于防守。 尤固結人心, 以爲無形之險, 萬無一失耳。 今貴國城, 俱隨山高下, 周圍曠野, 中多山林, 城不堅高, 內外相望。 一遇有警, 民不便于守, 官不便于督也。 是有險之名, 而無險之實。 豈王公所設之險乎, 又豈王公所守之法乎? 我皇上以不殺爲威, 屢行勑諭, 準降納貢, 此恩旣施, 國可永保無虞。 不然, 今年殺敗, 明年復來; 今則殺絶, 後必復聚, 將不知其所終矣。 所以議和爲上策也。 今之計, 急擇陽明平實之地, 勿近高山、深河之區, 築以高城, 鑿以深池。 更于治邊, 外藉江漢, 實爲天塹之險; 內列堡臺, 尤爲保障之固。 將領常于操練; 士卒習爾干戈, 易寬袍以鐵甲, 更大帽以明盔。 吾擾玆地, 方七月矣。 萬苦千辛, 誠非筆墨所能述, 九死一生, 諒有耳目以習聞, 何庸吾贅? 但今凱旋奏捷之際, 先赴經略等處, 回復暫駐平壤, 專人致謝, 草以膚見, 附投奉覽, 不識賢王與各執事, 以爲何如? 幸賜玉音, 倘見採擇, 仍細開款另上。 愼勿曰書生之見不足取。 徒自貽伊戚, 莫可救也。 謹此獻且規焉, 謝竝辭焉云。
回帖曰:
惟大人, 龍翔衛序, 餘事韜鈐, 投筆隨征, 榮臨陋地, 以爲弊邦城郭, 悉傍河山, 乖王公設險之義, 被蛇豕憑陵之禍, 俾居平地, 以禦外侮。 仍言操備之法及以冠衣之制。 俱中今病, 竝合機宜。 高明之見, 宏遠之慮, 委非譾劣所可髣髴。 圭復來牋, 銘感彌深。 職, 重罹毒禍, 保障又失, 災將及膚, 死已無所, 仰天搥胸, 百哀摧心。 所賴聖皇恩撫, 諸賢曲庇耳。 親兵未歸, 駿骨捐溝, 緣職之故, 慙惋如何? 仙旆遄歸, 淸覿竟阻, 瞻想之懷, 只增依依。 不腆土宜, 具在別幅。 不宣惟諒。
원본
선조 26년 (1593) 7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