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壬戌 9/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국역
창의사(倡義使)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신이 이달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원문
선조 26년 (1593) 7월 10일
선조실록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壬戌 9/9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국역
창의사(倡義使)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신이 이달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원문
원본
선조 26년 (1593)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