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권,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甲辰 2/2 기사 / 1567년 명 융경(隆慶) 1년
상이 조강에서 《대학》을 강하고 기대승이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다
국역
상이 사정전(思政殿)의 조강(朝講)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하였다. 기대승이 집의로서 입시하였다가 아뢰었다.
"천하의 모든 일은 시비가 없을 수 없는데 시비가 분명한 뒤에라야 인심이 복종하고 정사가 순조롭습니다. 시비는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천지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일시적으로 덮어버리고 베어버리더라도 시비의 본심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중종 대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정성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면서 어진 선비들을 등용하시었고, 이른바 어진 선비들이란 사람들도 등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겨 당우(唐虞)와 삼대(三代)009) 의 지치(至治)를 다시 이룩할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참소하는 말이 한번 들어가 모두다 큰 죄를 받았습니다. 당시 조광조(趙光祖)는 착한 사람으로 사림(士林)에서 큰 기대가 있었고, 위에서도 성심으로 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소인의 무리들이 참소하려고 할 때에 조광조 등이 정국 공신(靖國功臣)이 외람되다는 의논을 내자, 이것을 가지고 ‘조광조가 인심을 수합하여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그 죄를 꾸며서 혹 죽이기도 하고 혹은 쫓아내어 멀리 유배보내기도 했습니다. 중종께서는 즉시 깨닫지 못하셨기 때문에 20여 년 사이에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도 많습니다.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사실을 아시어 기묘년에 죄를 입은 사람 중에는 혹은 은혜를 입어 놓여난 사람도 있고 혹 등용된 사람도 있습니다.
선왕의 초년에는 국가에 일이 많아 그 당시 사람으로서 학식과 덕행이 있는 자들은 도리에 어긋나거나 탐오(貪汚)한 사람을 보면 때때로 탄핵하여 논박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국사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인들이 화를 조성하여 경박한 무리들이라고 하면서 기묘년의 화를 일으켜 처음에는 경박한 죄로 논하고 끝에 가서는 난역(亂逆)의 율(律)을 적용하였습니다. 지금 죽은 자는 복직되고 살아 있는 자는 거두어져 서용되었으나 시비는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는데, 반드시 시비가 분명해진 뒤에라야 인심이 기뻐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근래에 없던 어진 사람으로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고 또한 고서(古書)도 잘 알았는데 이러한 사람이 당시에 죄를 입고 멀리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죽었습니다. 송인수(宋麟壽) 역시 경박하다는 이름을 얻어 마침내는 큰 죄를 받았고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정황(丁熿) 역시 경박하다는 죄를 받았는데, 경박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죄를 씌울 수가 없을 때 쓰는 말입니다. 선왕께서는 어리셨으니 어찌 이것을 알았겠습니까. 그 뒤에 조정에서 어찌 시비를 분명하게 알아 말할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윤원형과 이기가 국권을 잡고 항상 역신(逆臣)을 비호하며 살육을 가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이 오래였습니다. 선왕 말년에 비로소 사실을 아셨으므로 혹 방면하기도 하고 서용하기도 했으며, 혹은 이배(移配)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기묘년부터 남곤과 심정이 중종을 기망(欺罔)하여 엄폐함이 극도에 달했고 을사년 이후에는 다시는 시비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이황에게 하서하여 올라오게 하셨는데,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은 자로 당초에 착한 사람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러간 것입니다. 지금 나이 이미 70세이고 또 질병이 많습니다마는 대개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조정에 나와 남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차라리 초야에 물러가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 정사를 하시면서 어진이를 초빙하는 일은 매우 훌륭한 조처입니다. 그러나 어진이를 쓰고자 한다면 부득이 시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한쪽에 치우쳐 있고 풍속 또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으면 화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鄭夢周)는 충효의 큰 절의가 있었고, 정(程) 주(朱)의 학문을 배워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고려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살신 성인(殺身成仁)010) 했습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수하여 익힌 사람은 김종직(金宗直)으로, 학문은 연원이 있고 행실 또한 방정했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성묘(成廟)께서 그가 어진 것을 아시고 판서를 삼았으나 오히려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사화(史禍)011) 가 발생하여 사림이 죄를 받았는데 화가 그의 문도(門徒)012) 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김종직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또 김굉필(金宏弼)이 있는데 바로 김종직의 제자로서 김종직은 대체로 문장을 숭상했으나 김굉필은 힘써 실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묘께서 중하게 여기셔서 좌랑(佐郞)을 삼으셨는데 연산조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로서 화를 당했고, 갑자년013) 에 이르러 끝내 큰 죄를 받았습니다. 중묘(中廟)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어진 것을 애석히 여겨 표창하고 우의정에 증직했습니다. 조광조는 또 김굉필의 제자인데 독실한 공부가 있어 세도(世道)를 만회, 이욕(利欲)의 근원을 막으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분명하게 시비를 밝힐 수는 없으나 부득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이미 사유(赦宥)를 받았는데 비단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행실은 근래에 없던 인물입니다. 지난날 중국 사신이 나왔을 적에 다른 사람은 저술이 없었으나 이언적은 저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져다 보였는데, 배운 것이 정주학(程朱學)이었으므로 그 말이 모두 도리에서 나왔습니다. 또 저술한 것은 바로 소년 시절에 지은 것이었는데 소년 시절의 저술이 이와 같았으니 만년에 성취한 것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그 집에 남긴 유서들을 찾아다가 후진들의 본보기로 삼게 함이 마땅합니다.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하여 추존(追尊)한다면 거의 인심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이기와 윤원형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착한 사람은 죄를 받고 뜻을 얻는 자들은 그들의 앞잡이였기 때문에 탐욕스럽고 더러움이 풍조가 되어 지금은 거의 모든 풍습이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른바 청렴 근실하다고 하는 자들도 조종조의 청렴 근실한 자들과 비교해보면 모두 탐욕스럽고 더러움을 면하지 못합니다. 수령들의 외람됨이 모두가 이와 같아 맹자(孟子)가 이른바 ‘그들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면 이루다 죽일 수가 없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비단 수령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조정에도 탐욕스럽고 더러운 사람이 많이 있으니 반드시 엄하게 근절시킨 뒤에라야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註 009]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
- [註 010] 살신 성인(殺身成仁) : 몸을 바쳐 옳은 도리를 행함.
- [註 011] 사화(史禍) : 무오 사화.
- [註 012] 문도(門徒) : 김일손(金馹孫)을 말함.
- [註 013] 갑자년 : 1504 연산군 10년.
원문
○上御朝講于思政殿, 進講《大學》。 奇大升, 以執義入侍, 進啓曰: "天下之事, 不可無是非, 是非分明, 然後人心服, 而政事順矣。 是非不但出於人心, 而出於天地也。 故一時雖有蒙蔽斬伐, 而其是非之本心, 則終不泯滅也。 中宗大王卽位之初, 勵精求治, 登庸賢士; 其所謂賢士, 亦樂爲之用, 以唐虞三代之治爲可復致, 而不幸讒言一入, 皆被大罪。 當時趙光祖, 善人也, 取重士林, 大有物望, 自上亦推誠信。 小人之徒, 欲爲讒間之際, 趙光祖等有靖國功臣猥濫之論。 以此謂光祖收合人心, 圖爲不軌。 南袞、沈貞搆成其罪, 或致之死, 或黜而遠謫。 中宗不卽覺悟, 二十餘年間, 終于謫所者亦多。 至於晩年, 始知其實, 己卯被罪之人, 或蒙恩宥, 或見收用矣。 先王初年, 國家多事, 其時士林有學識行實者, 見其悖妄貪汚之人, 則時或彈論, 無非爲國事也。 而小人媒孽以爲浮薄之徒, 倡起己卯之禍, 初論浮薄之罪, 終置亂逆之律。 今則死者復職, 生者收敍, 而是非猶不分明, 必是非分明, 然後人心悅服矣。 李彦迪, 近古所無之賢者也。 行己有方, 且知古書, 如此之人, 得罪當時, 遠謫江界而死。 宋麟壽亦得浮薄之名, 竟受大罪。 如盧守愼、柳希春、丁熿, 亦受浮薄之罪, 浮薄云者, 不能加他罪, 而爲之辭也。 先王於幼沖之年, 豈能知之乎? 後日朝廷之閒, 豈無明知是非, 而能言之者乎? 以尹元衡、李芑當國, 而每以庇護逆臣, 殺戮加焉, 故心語而不敢開口者久矣。 先王末年, 始能知之, 故或放或敍, 而或爲移配矣。 大抵自己卯年, 南袞、沈貞, 欺罔中宗, 蒙蔽已極, 乙巳年以後, 更無有言是非者。 是非不明, 則雖有好善之心, 何益之有? 頃日下書于李滉, 使之上來, 其人自少讀書, 當初見善人受罪, 故退去。 今則年已七十, 且多疾病, 大槪則見其是非不明, 而恥其隨行逐隊, 寧欲退處草野。 新政招賢, 甚善擧也。 然欲用賢人, 則不得已使是非分明也。 我國偏邦風氣, 亦不渾全, 故少有知識, 無不被禍。 高麗末, 鄭夢周有忠孝大節, 以程ㆍ朱之學爲學, 爲東方理學之祖, 不幸値高麗將亡之際, 殺身成仁。 入我朝, 而傳習鄭夢周者, 金宗直也。 學有淵源, 行又端方, 誨諭後學, 用其至誠。 成廟知其賢, 以爲判書, 而猶不能與世偕合。 至於燕山朝, 其時有史禍, 士林被罪, 而禍出於其門徒, 故宗直及焉。 又有金宏弼, 是宗直弟子也。 宗直則大抵尙文章, 而宏弼則力行之人也。 成廟重之, 以爲佐郞。 至燕山朝, 以宗直門徒被禍, 甲子終受大罪。 中廟卽位, 惜其賢而表章之, 贈職爲右議政。 趙光祖, 又金宏弼弟子也。 有篤學工夫, 欲挽回世道, 防其利欲之源, 而不得而死。 至今朝廷之上, 不能明知是非, 不得已是其是, 而非其非, 然後人心悅服矣。 李彦迪, 旣蒙赦矣。 但非徒無罪, 且其學行, 近代無之。 頃日天使來時, 他人則無著述, 而李彦迪有所著述, 故取來以示之。 所學程、朱, 故其言皆出於道理。 且見其爲書, 則乃少年所著也。 少時所著如此, 則晩年所得, 其可量乎? 遺書之在其家者, 宜令搜訪, 使後學矜式。 而趙光祖、李彦迪, 若表章而追尊之, 則庶乎其興起人心矣。 頃者李芑、尹元衡當國, 善人受罪, 而得志者所其鷹犬, 故貪汚成風, 今則擧俗皆然。 今之所謂廉謹者, 以祖宗朝廉謹者比之, 則皆未免貪汚者也。 守令泛濫, 滔滔皆是, 如孟子所謂誅之, 則可不勝誅也。 非但守令, 朝廷之間, 亦多有之, 貪汚之人, 必爲痛絶, 然後可以變化風俗矣。"
선조 즉위년 (1567) 10월 23일
선조실록1권,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甲辰 2/2 기사 / 1567년 명 융경(隆慶) 1년
상이 조강에서 《대학》을 강하고 기대승이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다
국역
상이 사정전(思政殿)의 조강(朝講)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하였다. 기대승이 집의로서 입시하였다가 아뢰었다.
"천하의 모든 일은 시비가 없을 수 없는데 시비가 분명한 뒤에라야 인심이 복종하고 정사가 순조롭습니다. 시비는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천지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일시적으로 덮어버리고 베어버리더라도 시비의 본심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중종 대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정성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면서 어진 선비들을 등용하시었고, 이른바 어진 선비들이란 사람들도 등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겨 당우(唐虞)와 삼대(三代)009) 의 지치(至治)를 다시 이룩할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참소하는 말이 한번 들어가 모두다 큰 죄를 받았습니다. 당시 조광조(趙光祖)는 착한 사람으로 사림(士林)에서 큰 기대가 있었고, 위에서도 성심으로 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소인의 무리들이 참소하려고 할 때에 조광조 등이 정국 공신(靖國功臣)이 외람되다는 의논을 내자, 이것을 가지고 ‘조광조가 인심을 수합하여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그 죄를 꾸며서 혹 죽이기도 하고 혹은 쫓아내어 멀리 유배보내기도 했습니다. 중종께서는 즉시 깨닫지 못하셨기 때문에 20여 년 사이에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도 많습니다.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사실을 아시어 기묘년에 죄를 입은 사람 중에는 혹은 은혜를 입어 놓여난 사람도 있고 혹 등용된 사람도 있습니다.
선왕의 초년에는 국가에 일이 많아 그 당시 사람으로서 학식과 덕행이 있는 자들은 도리에 어긋나거나 탐오(貪汚)한 사람을 보면 때때로 탄핵하여 논박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국사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인들이 화를 조성하여 경박한 무리들이라고 하면서 기묘년의 화를 일으켜 처음에는 경박한 죄로 논하고 끝에 가서는 난역(亂逆)의 율(律)을 적용하였습니다. 지금 죽은 자는 복직되고 살아 있는 자는 거두어져 서용되었으나 시비는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는데, 반드시 시비가 분명해진 뒤에라야 인심이 기뻐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근래에 없던 어진 사람으로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고 또한 고서(古書)도 잘 알았는데 이러한 사람이 당시에 죄를 입고 멀리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죽었습니다. 송인수(宋麟壽) 역시 경박하다는 이름을 얻어 마침내는 큰 죄를 받았고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정황(丁熿) 역시 경박하다는 죄를 받았는데, 경박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죄를 씌울 수가 없을 때 쓰는 말입니다. 선왕께서는 어리셨으니 어찌 이것을 알았겠습니까. 그 뒤에 조정에서 어찌 시비를 분명하게 알아 말할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윤원형과 이기가 국권을 잡고 항상 역신(逆臣)을 비호하며 살육을 가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이 오래였습니다. 선왕 말년에 비로소 사실을 아셨으므로 혹 방면하기도 하고 서용하기도 했으며, 혹은 이배(移配)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기묘년부터 남곤과 심정이 중종을 기망(欺罔)하여 엄폐함이 극도에 달했고 을사년 이후에는 다시는 시비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이황에게 하서하여 올라오게 하셨는데,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은 자로 당초에 착한 사람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러간 것입니다. 지금 나이 이미 70세이고 또 질병이 많습니다마는 대개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조정에 나와 남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차라리 초야에 물러가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 정사를 하시면서 어진이를 초빙하는 일은 매우 훌륭한 조처입니다. 그러나 어진이를 쓰고자 한다면 부득이 시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한쪽에 치우쳐 있고 풍속 또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으면 화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鄭夢周)는 충효의 큰 절의가 있었고, 정(程) 주(朱)의 학문을 배워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고려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살신 성인(殺身成仁)010) 했습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수하여 익힌 사람은 김종직(金宗直)으로, 학문은 연원이 있고 행실 또한 방정했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성묘(成廟)께서 그가 어진 것을 아시고 판서를 삼았으나 오히려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사화(史禍)011) 가 발생하여 사림이 죄를 받았는데 화가 그의 문도(門徒)012) 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김종직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또 김굉필(金宏弼)이 있는데 바로 김종직의 제자로서 김종직은 대체로 문장을 숭상했으나 김굉필은 힘써 실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묘께서 중하게 여기셔서 좌랑(佐郞)을 삼으셨는데 연산조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로서 화를 당했고, 갑자년013) 에 이르러 끝내 큰 죄를 받았습니다. 중묘(中廟)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어진 것을 애석히 여겨 표창하고 우의정에 증직했습니다. 조광조는 또 김굉필의 제자인데 독실한 공부가 있어 세도(世道)를 만회, 이욕(利欲)의 근원을 막으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분명하게 시비를 밝힐 수는 없으나 부득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이미 사유(赦宥)를 받았는데 비단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행실은 근래에 없던 인물입니다. 지난날 중국 사신이 나왔을 적에 다른 사람은 저술이 없었으나 이언적은 저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져다 보였는데, 배운 것이 정주학(程朱學)이었으므로 그 말이 모두 도리에서 나왔습니다. 또 저술한 것은 바로 소년 시절에 지은 것이었는데 소년 시절의 저술이 이와 같았으니 만년에 성취한 것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그 집에 남긴 유서들을 찾아다가 후진들의 본보기로 삼게 함이 마땅합니다.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하여 추존(追尊)한다면 거의 인심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이기와 윤원형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착한 사람은 죄를 받고 뜻을 얻는 자들은 그들의 앞잡이였기 때문에 탐욕스럽고 더러움이 풍조가 되어 지금은 거의 모든 풍습이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른바 청렴 근실하다고 하는 자들도 조종조의 청렴 근실한 자들과 비교해보면 모두 탐욕스럽고 더러움을 면하지 못합니다. 수령들의 외람됨이 모두가 이와 같아 맹자(孟子)가 이른바 ‘그들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면 이루다 죽일 수가 없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비단 수령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조정에도 탐욕스럽고 더러운 사람이 많이 있으니 반드시 엄하게 근절시킨 뒤에라야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註 009] 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
- [註 010] 살신 성인(殺身成仁) : 몸을 바쳐 옳은 도리를 행함.
- [註 011] 사화(史禍) : 무오 사화.
- [註 012] 문도(門徒) : 김일손(金馹孫)을 말함.
- [註 013] 갑자년 : 1504 연산군 10년.
원문
○上御朝講于思政殿, 進講《大學》。 奇大升, 以執義入侍, 進啓曰: "天下之事, 不可無是非, 是非分明, 然後人心服, 而政事順矣。 是非不但出於人心, 而出於天地也。 故一時雖有蒙蔽斬伐, 而其是非之本心, 則終不泯滅也。 中宗大王卽位之初, 勵精求治, 登庸賢士; 其所謂賢士, 亦樂爲之用, 以唐虞三代之治爲可復致, 而不幸讒言一入, 皆被大罪。 當時趙光祖, 善人也, 取重士林, 大有物望, 自上亦推誠信。 小人之徒, 欲爲讒間之際, 趙光祖等有靖國功臣猥濫之論。 以此謂光祖收合人心, 圖爲不軌。 南袞、沈貞搆成其罪, 或致之死, 或黜而遠謫。 中宗不卽覺悟, 二十餘年間, 終于謫所者亦多。 至於晩年, 始知其實, 己卯被罪之人, 或蒙恩宥, 或見收用矣。 先王初年, 國家多事, 其時士林有學識行實者, 見其悖妄貪汚之人, 則時或彈論, 無非爲國事也。 而小人媒孽以爲浮薄之徒, 倡起己卯之禍, 初論浮薄之罪, 終置亂逆之律。 今則死者復職, 生者收敍, 而是非猶不分明, 必是非分明, 然後人心悅服矣。 李彦迪, 近古所無之賢者也。 行己有方, 且知古書, 如此之人, 得罪當時, 遠謫江界而死。 宋麟壽亦得浮薄之名, 竟受大罪。 如盧守愼、柳希春、丁熿, 亦受浮薄之罪, 浮薄云者, 不能加他罪, 而爲之辭也。 先王於幼沖之年, 豈能知之乎? 後日朝廷之閒, 豈無明知是非, 而能言之者乎? 以尹元衡、李芑當國, 而每以庇護逆臣, 殺戮加焉, 故心語而不敢開口者久矣。 先王末年, 始能知之, 故或放或敍, 而或爲移配矣。 大抵自己卯年, 南袞、沈貞, 欺罔中宗, 蒙蔽已極, 乙巳年以後, 更無有言是非者。 是非不明, 則雖有好善之心, 何益之有? 頃日下書于李滉, 使之上來, 其人自少讀書, 當初見善人受罪, 故退去。 今則年已七十, 且多疾病, 大槪則見其是非不明, 而恥其隨行逐隊, 寧欲退處草野。 新政招賢, 甚善擧也。 然欲用賢人, 則不得已使是非分明也。 我國偏邦風氣, 亦不渾全, 故少有知識, 無不被禍。 高麗末, 鄭夢周有忠孝大節, 以程ㆍ朱之學爲學, 爲東方理學之祖, 不幸値高麗將亡之際, 殺身成仁。 入我朝, 而傳習鄭夢周者, 金宗直也。 學有淵源, 行又端方, 誨諭後學, 用其至誠。 成廟知其賢, 以爲判書, 而猶不能與世偕合。 至於燕山朝, 其時有史禍, 士林被罪, 而禍出於其門徒, 故宗直及焉。 又有金宏弼, 是宗直弟子也。 宗直則大抵尙文章, 而宏弼則力行之人也。 成廟重之, 以爲佐郞。 至燕山朝, 以宗直門徒被禍, 甲子終受大罪。 中廟卽位, 惜其賢而表章之, 贈職爲右議政。 趙光祖, 又金宏弼弟子也。 有篤學工夫, 欲挽回世道, 防其利欲之源, 而不得而死。 至今朝廷之上, 不能明知是非, 不得已是其是, 而非其非, 然後人心悅服矣。 李彦迪, 旣蒙赦矣。 但非徒無罪, 且其學行, 近代無之。 頃日天使來時, 他人則無著述, 而李彦迪有所著述, 故取來以示之。 所學程、朱, 故其言皆出於道理。 且見其爲書, 則乃少年所著也。 少時所著如此, 則晩年所得, 其可量乎? 遺書之在其家者, 宜令搜訪, 使後學矜式。 而趙光祖、李彦迪, 若表章而追尊之, 則庶乎其興起人心矣。 頃者李芑、尹元衡當國, 善人受罪, 而得志者所其鷹犬, 故貪汚成風, 今則擧俗皆然。 今之所謂廉謹者, 以祖宗朝廉謹者比之, 則皆未免貪汚者也。 守令泛濫, 滔滔皆是, 如孟子所謂誅之, 則可不勝誅也。 非但守令, 朝廷之間, 亦多有之, 貪汚之人, 必爲痛絶, 然後可以變化風俗矣。"
원본
선조 즉위년 (1567)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