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실록9권, 명종 4년 9월 5일 辛未 2/2 기사 / 1549년 명 가정(嘉靖) 28년
석강에서 송세형 등이 윤인서의 일에 대해서 아뢰다
국역
상이 석강에 나아갔다. 특진관 송세형(宋世珩)이 아뢰기를,
"신이 금부 당상으로서 윤인서를 추국하여 결안(結案)하였는데 그때 그의 말이 너무 독살스러웠습니다. 그는 ‘김섬(金銛)·이찬(李澯)은 나와 죄가 같은데도 그들에게는 유 삼천리를 적용하고 유독 나에게만 일죄(一罪)를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였는데, 다음날 다른 당상이 모두 좌기(坐起)한 다음 공사(供辭)를 받아 가지고 죄를 처결하였습니다. 윤인서가 간장(諫長)으로서 무상하고 패려한 일을 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불행입니다. 신은 평소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지난번 사공(私供) 문제로 회의할 때 보니, 윤인서가 ‘각자 자기 집에서 지공(支供)하게 한다면 나같은 사람은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이다.’ 하니, 진복창이 ‘어째서 유생 시절에도 죽지 않았는데 지금 죽는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또 계사(啓辭)에서는 ‘성명(聖明)한 임금 6∼7인이 나오고 경륜을 갖춘 신하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도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가 하면, 또는 구장(舊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우리 임금은 무능하다고 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윤인서의 무상(無狀)은 그야말로 이미 극에 달한 것입니다. 윤인서가 시종·대간을 역임하였으므로 위에서 신임했는데도 지금 이러하므로 신하들은, 상께서 신하는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고 의심하실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 일이 터지기 전에도 친구들간에 ‘윤인서는 김안로(金安老)의 가신(家臣)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간 마음을 고치고 생각도 바꾸리라 생각했었는데 무상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눈에 박힌 못을 빼낸 격이어서 국가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하고, 윤개(尹漑)는 아뢰기를,
"윤인서는 나이가 젊어서 신과는 동성(同姓)이긴 하지만 그를 알지 못하였었습니다. 다만 그 얼굴을 보고 말을 듣고는 쓸 만한 인물이라고 여겼었는데 근래 드러난 일들을 보면 옥중의 상소나 공사(供辭)로는 그 정상을 숨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상께서는 윤인서의 죄를 말감(末減)하셨으니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이 지극하십니다. 제왕이 악에 대하여 가차없이 미워함이 비록 군덕(君德)에 맞는 일이긴 하나 인후(仁厚)를 앞세워 다스리는 것이 어찌 범연한 일이겠습니까? 송(宋)나라가 인후한 정치를 하여 한 사람의 대부(大夫)도 죽이지 않았기에 뒷사람들이 조송(趙宋)092) 의 3백 년에 걸친 충후한 기풍을 아름답다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성종 조에 임사홍(任士洪)이 죄를 입고 쫓겨났다가 폐조(廢朝) 때에 다시 기용되었는데, 폐주는 혼탁했기 때문에 임사홍이 간계를 부릴 수 있었지만 성종 때에야 어떻게 술책을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소인을 쫓아냈더라도 그가 다시 등용되면 국가의 환란이 더욱 크게 되는 것이니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 후에는 상께서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6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 [註 092] 조송(趙宋) : 송 태조(宋太祖)의 이름이 조광윤(趙匡胤)이므로 그 성을 따서 붙인 명칭.
원문
○上御夕講。 特進官宋世珩曰: "臣以禁府堂上, 推鞫尹仁恕結案時, 所言甚毒曰: ‘金銛、李澯, 與我同罪, 而只罪以流三千里, 獨於我以一罪照之, 未便。’ 翼日, 竢他堂上俱坐, 捧供處罪矣。 仁恕爲諫長, 行無狀悖戾之事, 乃朝廷之不幸也。 臣素不相識, 頃以私供事, 會議時見之, 仁恕乃曰: ‘自家供之, 則如我者, 飢死必矣。’ 陳復昌曰: ‘何不死於爲儒之時, 而乃死於今日乎?’ 又於啓辭曰: ‘明聖之君, 六七作, 經綸之臣, 亦非一二, 而猶不能改也。’ 又曰: ‘亂舊章。’ 古人云: ‘吾君不能, 謂之賊。’ 仁恕之無狀已極。 仁恕出入侍從、臺諫, 自上恃之, 而今乃如此, 群臣以爲自上疑其臣子, 皆無足恃也。 自此事未出之前, 朋儕語之曰: ‘仁恕, 金安老之家臣也。’ 以爲改心易慮, 而無狀如此。 拔其眼中釘, 國家之多幸也。" 尹漑曰: "仁恕年少, 臣雖同姓, 曾不識其人也。 但觀其貌聽其言, 則以爲可用之人, 近以顯著之事見之, 獄中上疏及供辭, 難以掩覆其情狀。 蓋仁恕之罪, 自上末減, 好生之德至矣。 帝王嫉惡之嚴, 雖合於君德, 以仁厚爲治, 豈偶然哉? 宋以仁厚爲治, 曾不殺一大夫, 後之人, 以趙宋三百年忠厚之氣, 稱美焉。 成廟朝, 任士洪被罪竄逐, 而復用於廢朝, 廢主昏濁, 故使士洪得行其奸, 成廟之時, 豈行其術哉? 大抵小人, 始雖逐之, 及其還用也, 益爲國家之大患, 去邪之後, 聖心之所當留念者也。"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6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명종 4년 (1549) 9월 5일
명종실록9권, 명종 4년 9월 5일 辛未 2/2 기사 / 1549년 명 가정(嘉靖) 28년
석강에서 송세형 등이 윤인서의 일에 대해서 아뢰다
국역
상이 석강에 나아갔다. 특진관 송세형(宋世珩)이 아뢰기를,
"신이 금부 당상으로서 윤인서를 추국하여 결안(結案)하였는데 그때 그의 말이 너무 독살스러웠습니다. 그는 ‘김섬(金銛)·이찬(李澯)은 나와 죄가 같은데도 그들에게는 유 삼천리를 적용하고 유독 나에게만 일죄(一罪)를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였는데, 다음날 다른 당상이 모두 좌기(坐起)한 다음 공사(供辭)를 받아 가지고 죄를 처결하였습니다. 윤인서가 간장(諫長)으로서 무상하고 패려한 일을 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불행입니다. 신은 평소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지난번 사공(私供) 문제로 회의할 때 보니, 윤인서가 ‘각자 자기 집에서 지공(支供)하게 한다면 나같은 사람은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이다.’ 하니, 진복창이 ‘어째서 유생 시절에도 죽지 않았는데 지금 죽는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또 계사(啓辭)에서는 ‘성명(聖明)한 임금 6∼7인이 나오고 경륜을 갖춘 신하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도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가 하면, 또는 구장(舊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우리 임금은 무능하다고 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윤인서의 무상(無狀)은 그야말로 이미 극에 달한 것입니다. 윤인서가 시종·대간을 역임하였으므로 위에서 신임했는데도 지금 이러하므로 신하들은, 상께서 신하는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고 의심하실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 일이 터지기 전에도 친구들간에 ‘윤인서는 김안로(金安老)의 가신(家臣)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간 마음을 고치고 생각도 바꾸리라 생각했었는데 무상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눈에 박힌 못을 빼낸 격이어서 국가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하고, 윤개(尹漑)는 아뢰기를,
"윤인서는 나이가 젊어서 신과는 동성(同姓)이긴 하지만 그를 알지 못하였었습니다. 다만 그 얼굴을 보고 말을 듣고는 쓸 만한 인물이라고 여겼었는데 근래 드러난 일들을 보면 옥중의 상소나 공사(供辭)로는 그 정상을 숨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상께서는 윤인서의 죄를 말감(末減)하셨으니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이 지극하십니다. 제왕이 악에 대하여 가차없이 미워함이 비록 군덕(君德)에 맞는 일이긴 하나 인후(仁厚)를 앞세워 다스리는 것이 어찌 범연한 일이겠습니까? 송(宋)나라가 인후한 정치를 하여 한 사람의 대부(大夫)도 죽이지 않았기에 뒷사람들이 조송(趙宋)092) 의 3백 년에 걸친 충후한 기풍을 아름답다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성종 조에 임사홍(任士洪)이 죄를 입고 쫓겨났다가 폐조(廢朝) 때에 다시 기용되었는데, 폐주는 혼탁했기 때문에 임사홍이 간계를 부릴 수 있었지만 성종 때에야 어떻게 술책을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소인을 쫓아냈더라도 그가 다시 등용되면 국가의 환란이 더욱 크게 되는 것이니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 후에는 상께서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6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 [註 092] 조송(趙宋) : 송 태조(宋太祖)의 이름이 조광윤(趙匡胤)이므로 그 성을 따서 붙인 명칭.
원문
○上御夕講。 特進官宋世珩曰: "臣以禁府堂上, 推鞫尹仁恕結案時, 所言甚毒曰: ‘金銛、李澯, 與我同罪, 而只罪以流三千里, 獨於我以一罪照之, 未便。’ 翼日, 竢他堂上俱坐, 捧供處罪矣。 仁恕爲諫長, 行無狀悖戾之事, 乃朝廷之不幸也。 臣素不相識, 頃以私供事, 會議時見之, 仁恕乃曰: ‘自家供之, 則如我者, 飢死必矣。’ 陳復昌曰: ‘何不死於爲儒之時, 而乃死於今日乎?’ 又於啓辭曰: ‘明聖之君, 六七作, 經綸之臣, 亦非一二, 而猶不能改也。’ 又曰: ‘亂舊章。’ 古人云: ‘吾君不能, 謂之賊。’ 仁恕之無狀已極。 仁恕出入侍從、臺諫, 自上恃之, 而今乃如此, 群臣以爲自上疑其臣子, 皆無足恃也。 自此事未出之前, 朋儕語之曰: ‘仁恕, 金安老之家臣也。’ 以爲改心易慮, 而無狀如此。 拔其眼中釘, 國家之多幸也。" 尹漑曰: "仁恕年少, 臣雖同姓, 曾不識其人也。 但觀其貌聽其言, 則以爲可用之人, 近以顯著之事見之, 獄中上疏及供辭, 難以掩覆其情狀。 蓋仁恕之罪, 自上末減, 好生之德至矣。 帝王嫉惡之嚴, 雖合於君德, 以仁厚爲治, 豈偶然哉? 宋以仁厚爲治, 曾不殺一大夫, 後之人, 以趙宋三百年忠厚之氣, 稱美焉。 成廟朝, 任士洪被罪竄逐, 而復用於廢朝, 廢主昏濁, 故使士洪得行其奸, 成廟之時, 豈行其術哉? 大抵小人, 始雖逐之, 及其還用也, 益爲國家之大患, 去邪之後, 聖心之所當留念者也。"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6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원본
명종 4년 (1549) 9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