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94권, 중종 36년 1월 3일 庚寅 2/3 기사 / 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제주 목사 조사수의 상소를 내리며 제주지역 군사의 문제점을 의논하라 이르다
국역
제주 목사(濟州牧使) 조사수(趙士秀)가 올린 계본(啓本)과 상소(上疏)를 정원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보니 이 사람은 생각이 깊다. 어찌 범연히 헤아려서 이렇게 썼겠는가. 의례적인 일로 계하(啓下)해선 안 되니 정부가 합좌(合坐)하는 날 병조의 당상(堂上)도 같이 불러 의논하라. 목사가 비록 무사(武士)는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개차(改差)할 수는 없다. 고단(孤單)함이 이와 같다면 조장(助將)과 군관(軍官)을 선발하여 보냄이 어떠하겠는가? 그곳의 활이나 화살 역시 그 수량이 적을 것이니 지금 더 보내주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별도로 계책을 세울 일이 있겠는가? 정부 낭관(政府郞官)을 불러 이 뜻으로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라."
하였다. 정원이 조사수의 상소를 등서(謄書)하여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평상시의 소차(疏箚)라면 등서해 아뢰는 것이 통례이나 이 상소는 공사(公事)에 관계된 일이라 등서할 필요가 없으니 계(啓)자를 찍어 내린다."
하였다. 그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禍)란 어둡고 은미한 곳에 숨어 있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깨닫지 못하고, 일은 밝고 환한 곳에 드러나 있기에 어리석은 이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비록 지혜로운 이도 알기 어려운, 어두운 곳의 화에는 감감하지만 간혹 어리석은 자도 알 수가 있는 밝게 드러나 있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주(濟州)는 바로 옛적의 탐라(耽羅)로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은 빈한하며 주거지는 흩어져 있습니다. 세 곳의 조그마한 성(城)은 그 모양이 둥근 활 같은데 장정 하나가 공격하여도 울타리를 철거하기보다 쉽습니다. 평상시 군졸이라 불리는 사람도 수백을 넘지 못하며 더구나 그 가운데 활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열에 두셋도 안 되는 형편입니다. 밖으로는 믿을 만한 세력이 없으며 안으로는 방어할 만한 군대가 없습니다. 우도(牛島) 동편은 육지가 늪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정(大靜) 서쪽은 한수(漢水) 물가처럼 평평합니다. 그래서 왜적(倭賊)들이 침구(侵寇)해 올 경우 1천여 척의 배를 정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구가 침구해 오지 않은 까닭은 저들이 멀리서 지리의 험이(險夷)와 군사의 허실을 측량하기 어려워서였던 것입니다. 지금 표류한 백성을 쇄환(刷還)해 오는 왜인이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듯 바로 노를 저어 들어와 정박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을 관아에 유치(留置)하여 그들에게 이곳의 형세를 엿보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여 땅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 진(晋)나라가 수극(垂棘)에서 나는 구슬과 굴산(屈産)에서 나는 명마(名馬)를 가지고 우(虞)나라로부터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멸하고서는 열흘도 안 되어 우공(虞公)이 진나라의 순식(荀息)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006) 상대방의 달콤한 말과 후한 폐백에 혹하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왜노(倭奴)의 이번 일 또한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 고을을 왕래할 때 도내(道內)의 모든 곳을 가리키며 원근의 형세를 낱낱이 파악하였고 해치려는 자취도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어찌 뒷날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은 제주에 부임한 이래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식음을 폐하고 날을 보내면서 경영하고 계책을 짰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일이겠습니까. 다만 사정에 어두운 서생으로 성품도 굳세고 용맹스럽지 못한 데다 군사에 관계된 일에는 사실 익숙하지 못해서 만일 사변(事變)이 창졸간에 발생한다면 한갓 빈 주먹을 휘두를 뿐이니 어찌 위엄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우국하는 신의 외로운 충절은 하늘이 밝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기사년007) 에 지모 있는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온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경오년의 변이 생겼으니008) 누가 앞일을 미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난이 일어났을 적에 한 도의 힘을 다 모았어도 두 고을이 섬멸당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겠습니까? 탄환(彈丸)보다 작은 이곳에서 소리치며 사람을 부르고 애쓴다 한들 사방에 성원해 줄 이가 없으니 힘이 떨어지고 기운이 다하여 앉은 채로 어육이 될 터인데, 이 또한 반드시 닥칠 사세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목전에 밝게 보이는 것은 처리하기 쉽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은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은 느슨해지기 쉽고 느슨해진다면 사람들이 소홀히 하기 십상이니 소홀히 하는데도 사변이 일어나지 않은 적은 고금을 통해 있지 않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발탁되어 무거운 임무를 맡은 이래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친 바라 걱정스러운 마음 가눌 수 없으며 백성들은 화가 닥칠 것 같아 불안을 떨고 있습니다. 멀리서 외로운 성(城)을 지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제주는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고 수령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펴 3고을의 백성들은 그 곤경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수(士秀)는 번거로운 것을 덜고 간교한 짓을 금지하면서 백성을 자식처럼 어루만졌다. 그리고 몸가짐을 매우 간소하게 하여 추호도 침범하지 않으니 모든 백성들이 생기를 되찾아 그를 부모와 같이 여겼다. 사수의 청렴한 덕에 사림들이 탄복한 지는 오래되었다. 북경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스스로 명사(名士)라고 자부하는 이들도 이욕(利慾)을 채우려다 일로(一路)에 폐해를 끼치고 중국 조정에서 비웃음을 산 사람이 많았지만, 사수는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도중에서 선사하는 물건은 받아도 괜찮은데 일체 받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고 시(詩)를 읊조리면서 담담히 홀로 거처하였는데, 진기로운 물건들이 모여들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중국 조정의 사람들도 그가 청렴한 선비인 것을 알았다. 그가 병이 나자 예부 낭관(禮部郞官)이 직접 찾아와 문병을 하였고 의원과 약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사수는 습증(濕症)이 더욱 심해지면서 걸음을 걷기가 매우 어려워지자 백철(白鐵)로 된 요강을 사들여 먼 길의 깊은 밤 급할 때 쓰려고 준비해 두었다가 압록강 가에 당도하자 그 요강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왔다. 그의 청렴한 행실은 탐욕스런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태한 자를 흥기시켰으니 세상에 어찌 도움됨이 적다고 하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 [註 006] 우공(虞公)이 진나라의 순식(荀息)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 진나라 순식(荀息)이 굴읍(屈邑)에서 나는 명마(名馬)와 수극(垂棘)에서 나는 구슬을 우공(虞公)에게 주어 길을 빌린 뒤 괵(虢)을 멸하였다. 그 뒤 우공은 순식에게 사로잡혔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2년.
- [註 007] 기사년 : 1509 중종 4년.
- [註 008] 경오년의 변이 생겼으니 : 중종 5년(1510) 삼포(三浦)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삼포 왜란(三浦倭亂)이라고 한다. 삼포를 개항한 이래 이곳에 거주하는 왜인과 우리 나라 사람간에 충돌이 잦아지자 조정에서는 대마 도주에게 왜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통제를 가했다. 이때 대마 도주 휘하의 군사로부터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제포(薺浦)와 부산포(釜山浦) 그리고 염포(鹽浦)를 함락시켰다. 조정에서는 방어사로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파견, 이들을 물리치고 삼포 거주 왜인을 추방하였다. 그뒤 임신 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고서 제포만을 다시 개항했다.
원문
○以濟州牧使趙士秀啓本及上疏, 下于政院曰: "見此上疏, 是乃知慮之人, 豈偶然計料而如是乎? 不可以依例啓下也。 議政府合坐日, 兵曹堂上竝招議之。 牧使雖非武士, 今不可改差也。 孤單如此, 則助將及軍官, 擇送何如? 彼處弓箭, 亦必數少, 今當加送可也。 無乃別有設策之事乎? 招政府郞官, 以此意議于大臣。" 政院以趙士秀上疏, 謄書入啓, 傳曰: "常時疏箚, 謄書以啓, 例也, 此疏則涉於公事, 不須謄書, 故打啓字以下。" 其疏曰:
禍伏冥冥, 智者莫覺; 事在昭昭, 愚者亦得。 臣雖昧於智者之冥冥, 亦或見於愚者之昭昭。 今玆濟州, 卽古耽羅, 地瘠民貧, 邑居散逸, 蕞爾三城, 如弓之圓, 一夫攻之, 易於撤籬。 常時號爲軍卒者, 不過數百, 而其中操弓者, 十無二三, 外無可恃之勢, 中無可禦之兵。 牛島之東, 陸地成渚, 大靜以西, 平如漢濱, 倭賊之來, 可泊千艘。 如此而寇常不至者, 以地之險夷, 兵之虛實, 彼難遙度也。 今者流民刷還之倭, 直棹來泊, 如入其家, 留置州司, 俾盡窺覘。 是所謂開門引賊, 以地與賊者也。 晋人以垂棘、屈産之寶, 假途而滅虢, 曾未浹旬, 虞公見執。 言甘幣重, 古今之通患也。 倭奴此事, 亦豈異是? 且於往來之際, 指點其諸道, 遠近形勢, 歷歷知之。 作賊之跡, 且有明徵。 此後之事, 顧不危哉? 臣到州而來, 不寐終宵, 廢食度日, 經營規畫, 何敢少緩? 第迂(漏)〔闊〕 書生, 性非悍勇, 其於武事, 實所未講。 脫有事變, 起於倉卒, 徒張空拳, 何足示威? 耿耿孤忠, 天實照臨。 往在己巳, 謀臣盈庭, 海內塵淸。 當此之時, 變生庚午, 誰得前知? 及其亂作, 合一道之力, 不足救二邑之殲。 何況絶海孤島, 小於彈丸, 叫呼招勤, 四無聲援, 力窮勢竭, 坐爲魚肉, 此亦必至之勢也。 天下之事, 明在目前者易, 藏諸意外者難。 難則似緩, 緩則人皆忽之。 忽而不生變者, 古今未之有也。 臣受國厚恩, 擢蒙重寄, 目擊身履, 憂心沖沖, 百姓澟澟, 若將禍及, 邈守孤城, 不知所爲。
【史臣曰: "濟州, 絶島也。 王化不及, 守令無忌, 三邑之民, 困不能堪。 士秀蠲煩禁奸, 撫之如子, 持身甚約, 不犯秋毫, 民皆蘇息, 視之如父母。 秀之淸德, 士林服之久矣。 赴京之人, 前後相望, 雖自許爲名士者, 或未免陷於利域, 貽弊於一路, 取笑於中朝者, 多矣。 士秀特立不撓, 一路所遺之物, 處之無跡, 不接於己。 至京師, 哦詩閉戶, 淡然孤居, 珍玩來萃, 不近於目, 中朝人, 亦知爲廉士。 及其病也, 禮部郞官, 親臨問之, 醫藥不絶。 秀濕証彌重, 行步甚艱, 貿得白鐵溺器, 爲遠道深夜備急之用。 行到鴨綠江, 以其溺器, 沈江而來。 其廉貪起懶, 豈云少補?"】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중종 36년 (1541) 1월 3일
중종실록94권, 중종 36년 1월 3일 庚寅 2/3 기사 / 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제주 목사 조사수의 상소를 내리며 제주지역 군사의 문제점을 의논하라 이르다
국역
제주 목사(濟州牧使) 조사수(趙士秀)가 올린 계본(啓本)과 상소(上疏)를 정원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보니 이 사람은 생각이 깊다. 어찌 범연히 헤아려서 이렇게 썼겠는가. 의례적인 일로 계하(啓下)해선 안 되니 정부가 합좌(合坐)하는 날 병조의 당상(堂上)도 같이 불러 의논하라. 목사가 비록 무사(武士)는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개차(改差)할 수는 없다. 고단(孤單)함이 이와 같다면 조장(助將)과 군관(軍官)을 선발하여 보냄이 어떠하겠는가? 그곳의 활이나 화살 역시 그 수량이 적을 것이니 지금 더 보내주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별도로 계책을 세울 일이 있겠는가? 정부 낭관(政府郞官)을 불러 이 뜻으로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라."
하였다. 정원이 조사수의 상소를 등서(謄書)하여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평상시의 소차(疏箚)라면 등서해 아뢰는 것이 통례이나 이 상소는 공사(公事)에 관계된 일이라 등서할 필요가 없으니 계(啓)자를 찍어 내린다."
하였다. 그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禍)란 어둡고 은미한 곳에 숨어 있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깨닫지 못하고, 일은 밝고 환한 곳에 드러나 있기에 어리석은 이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비록 지혜로운 이도 알기 어려운, 어두운 곳의 화에는 감감하지만 간혹 어리석은 자도 알 수가 있는 밝게 드러나 있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주(濟州)는 바로 옛적의 탐라(耽羅)로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은 빈한하며 주거지는 흩어져 있습니다. 세 곳의 조그마한 성(城)은 그 모양이 둥근 활 같은데 장정 하나가 공격하여도 울타리를 철거하기보다 쉽습니다. 평상시 군졸이라 불리는 사람도 수백을 넘지 못하며 더구나 그 가운데 활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열에 두셋도 안 되는 형편입니다. 밖으로는 믿을 만한 세력이 없으며 안으로는 방어할 만한 군대가 없습니다. 우도(牛島) 동편은 육지가 늪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정(大靜) 서쪽은 한수(漢水) 물가처럼 평평합니다. 그래서 왜적(倭賊)들이 침구(侵寇)해 올 경우 1천여 척의 배를 정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구가 침구해 오지 않은 까닭은 저들이 멀리서 지리의 험이(險夷)와 군사의 허실을 측량하기 어려워서였던 것입니다. 지금 표류한 백성을 쇄환(刷還)해 오는 왜인이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듯 바로 노를 저어 들어와 정박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을 관아에 유치(留置)하여 그들에게 이곳의 형세를 엿보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여 땅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 진(晋)나라가 수극(垂棘)에서 나는 구슬과 굴산(屈産)에서 나는 명마(名馬)를 가지고 우(虞)나라로부터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멸하고서는 열흘도 안 되어 우공(虞公)이 진나라의 순식(荀息)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006) 상대방의 달콤한 말과 후한 폐백에 혹하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왜노(倭奴)의 이번 일 또한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 고을을 왕래할 때 도내(道內)의 모든 곳을 가리키며 원근의 형세를 낱낱이 파악하였고 해치려는 자취도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어찌 뒷날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은 제주에 부임한 이래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식음을 폐하고 날을 보내면서 경영하고 계책을 짰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일이겠습니까. 다만 사정에 어두운 서생으로 성품도 굳세고 용맹스럽지 못한 데다 군사에 관계된 일에는 사실 익숙하지 못해서 만일 사변(事變)이 창졸간에 발생한다면 한갓 빈 주먹을 휘두를 뿐이니 어찌 위엄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우국하는 신의 외로운 충절은 하늘이 밝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기사년007) 에 지모 있는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온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경오년의 변이 생겼으니008) 누가 앞일을 미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난이 일어났을 적에 한 도의 힘을 다 모았어도 두 고을이 섬멸당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겠습니까? 탄환(彈丸)보다 작은 이곳에서 소리치며 사람을 부르고 애쓴다 한들 사방에 성원해 줄 이가 없으니 힘이 떨어지고 기운이 다하여 앉은 채로 어육이 될 터인데, 이 또한 반드시 닥칠 사세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목전에 밝게 보이는 것은 처리하기 쉽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은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은 느슨해지기 쉽고 느슨해진다면 사람들이 소홀히 하기 십상이니 소홀히 하는데도 사변이 일어나지 않은 적은 고금을 통해 있지 않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발탁되어 무거운 임무를 맡은 이래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친 바라 걱정스러운 마음 가눌 수 없으며 백성들은 화가 닥칠 것 같아 불안을 떨고 있습니다. 멀리서 외로운 성(城)을 지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제주는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고 수령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펴 3고을의 백성들은 그 곤경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수(士秀)는 번거로운 것을 덜고 간교한 짓을 금지하면서 백성을 자식처럼 어루만졌다. 그리고 몸가짐을 매우 간소하게 하여 추호도 침범하지 않으니 모든 백성들이 생기를 되찾아 그를 부모와 같이 여겼다. 사수의 청렴한 덕에 사림들이 탄복한 지는 오래되었다. 북경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스스로 명사(名士)라고 자부하는 이들도 이욕(利慾)을 채우려다 일로(一路)에 폐해를 끼치고 중국 조정에서 비웃음을 산 사람이 많았지만, 사수는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도중에서 선사하는 물건은 받아도 괜찮은데 일체 받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고 시(詩)를 읊조리면서 담담히 홀로 거처하였는데, 진기로운 물건들이 모여들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중국 조정의 사람들도 그가 청렴한 선비인 것을 알았다. 그가 병이 나자 예부 낭관(禮部郞官)이 직접 찾아와 문병을 하였고 의원과 약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사수는 습증(濕症)이 더욱 심해지면서 걸음을 걷기가 매우 어려워지자 백철(白鐵)로 된 요강을 사들여 먼 길의 깊은 밤 급할 때 쓰려고 준비해 두었다가 압록강 가에 당도하자 그 요강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왔다. 그의 청렴한 행실은 탐욕스런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태한 자를 흥기시켰으니 세상에 어찌 도움됨이 적다고 하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 [註 006] 우공(虞公)이 진나라의 순식(荀息)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 진나라 순식(荀息)이 굴읍(屈邑)에서 나는 명마(名馬)와 수극(垂棘)에서 나는 구슬을 우공(虞公)에게 주어 길을 빌린 뒤 괵(虢)을 멸하였다. 그 뒤 우공은 순식에게 사로잡혔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2년.
- [註 007] 기사년 : 1509 중종 4년.
- [註 008] 경오년의 변이 생겼으니 : 중종 5년(1510) 삼포(三浦)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삼포 왜란(三浦倭亂)이라고 한다. 삼포를 개항한 이래 이곳에 거주하는 왜인과 우리 나라 사람간에 충돌이 잦아지자 조정에서는 대마 도주에게 왜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통제를 가했다. 이때 대마 도주 휘하의 군사로부터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제포(薺浦)와 부산포(釜山浦) 그리고 염포(鹽浦)를 함락시켰다. 조정에서는 방어사로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파견, 이들을 물리치고 삼포 거주 왜인을 추방하였다. 그뒤 임신 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고서 제포만을 다시 개항했다.
원문
○以濟州牧使趙士秀啓本及上疏, 下于政院曰: "見此上疏, 是乃知慮之人, 豈偶然計料而如是乎? 不可以依例啓下也。 議政府合坐日, 兵曹堂上竝招議之。 牧使雖非武士, 今不可改差也。 孤單如此, 則助將及軍官, 擇送何如? 彼處弓箭, 亦必數少, 今當加送可也。 無乃別有設策之事乎? 招政府郞官, 以此意議于大臣。" 政院以趙士秀上疏, 謄書入啓, 傳曰: "常時疏箚, 謄書以啓, 例也, 此疏則涉於公事, 不須謄書, 故打啓字以下。" 其疏曰:
禍伏冥冥, 智者莫覺; 事在昭昭, 愚者亦得。 臣雖昧於智者之冥冥, 亦或見於愚者之昭昭。 今玆濟州, 卽古耽羅, 地瘠民貧, 邑居散逸, 蕞爾三城, 如弓之圓, 一夫攻之, 易於撤籬。 常時號爲軍卒者, 不過數百, 而其中操弓者, 十無二三, 外無可恃之勢, 中無可禦之兵。 牛島之東, 陸地成渚, 大靜以西, 平如漢濱, 倭賊之來, 可泊千艘。 如此而寇常不至者, 以地之險夷, 兵之虛實, 彼難遙度也。 今者流民刷還之倭, 直棹來泊, 如入其家, 留置州司, 俾盡窺覘。 是所謂開門引賊, 以地與賊者也。 晋人以垂棘、屈産之寶, 假途而滅虢, 曾未浹旬, 虞公見執。 言甘幣重, 古今之通患也。 倭奴此事, 亦豈異是? 且於往來之際, 指點其諸道, 遠近形勢, 歷歷知之。 作賊之跡, 且有明徵。 此後之事, 顧不危哉? 臣到州而來, 不寐終宵, 廢食度日, 經營規畫, 何敢少緩? 第迂(漏)〔闊〕 書生, 性非悍勇, 其於武事, 實所未講。 脫有事變, 起於倉卒, 徒張空拳, 何足示威? 耿耿孤忠, 天實照臨。 往在己巳, 謀臣盈庭, 海內塵淸。 當此之時, 變生庚午, 誰得前知? 及其亂作, 合一道之力, 不足救二邑之殲。 何況絶海孤島, 小於彈丸, 叫呼招勤, 四無聲援, 力窮勢竭, 坐爲魚肉, 此亦必至之勢也。 天下之事, 明在目前者易, 藏諸意外者難。 難則似緩, 緩則人皆忽之。 忽而不生變者, 古今未之有也。 臣受國厚恩, 擢蒙重寄, 目擊身履, 憂心沖沖, 百姓澟澟, 若將禍及, 邈守孤城, 不知所爲。
【史臣曰: "濟州, 絶島也。 王化不及, 守令無忌, 三邑之民, 困不能堪。 士秀蠲煩禁奸, 撫之如子, 持身甚約, 不犯秋毫, 民皆蘇息, 視之如父母。 秀之淸德, 士林服之久矣。 赴京之人, 前後相望, 雖自許爲名士者, 或未免陷於利域, 貽弊於一路, 取笑於中朝者, 多矣。 士秀特立不撓, 一路所遺之物, 處之無跡, 不接於己。 至京師, 哦詩閉戶, 淡然孤居, 珍玩來萃, 不近於目, 中朝人, 亦知爲廉士。 及其病也, 禮部郞官, 親臨問之, 醫藥不絶。 秀濕証彌重, 行步甚艱, 貿得白鐵溺器, 爲遠道深夜備急之用。 行到鴨綠江, 以其溺器, 沈江而來。 其廉貪起懶, 豈云少補?"】
- 【태백산사고본】 48책 9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4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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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6년 (1541) 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