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92권, 중종 34년 10월 2일 丙寅 1/1 기사 / 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시강관 이찬이 먼저 모범을 보여 풍속을 일신하고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을 건의하다
국역
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찬(李澯)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임금이 하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즉위한 초년에는 어느 임금이나 다 잘 다스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정무에 힘쓰지 않는 이가 없지만 정사를 본 지가 오래고 연세가 높아지면 점점 처음만 못함은 물론 나태한 마음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태종은 영명(英明)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즉위 초만 못했기 때문에 위징(魏徵)이 십점의 소[十漸之疏]341) 를 올렸던 것입니다.
우리 성묘(成廟)께서는 크게 능력을 발휘하신 임금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신하들 중에,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드물다는 말로 아뢴 이가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신 성묘께서는 ‘그 말이 지당하다. 내 마땅히 침병(枕屛)에 써놓고 스스로를 경계하겠다.’ 하셨다고 합니다.
신은 또 들으니,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특별히 문사(文士)들을 불러 수시로 강경(講經)을 하면서 고금의 일을 논란하였는데 혹은 주연을 베풀면서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때의 신하들은 아뢸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였으므로 성의(誠意)로 서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자와 요속(僚屬)들도 가끔 인견(引見)하여 강론하게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하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마땅히 살펴 유념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풍속이 야박하고 완악해져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는데도, 조정에서 늘 걱정하는 것은 변방을 방어하는 일에만 쏠려 있을 뿐 인륜과 풍속 등의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본말(本末)이 전도된 듯하다."
하니, 찬이 아뢰었다.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상께서 먼저 그 본원(本源)을 바루신다면 그 나머지 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쓸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말이기는 하나 실로 명확한 말입니다. 상께서 풍속을 일신시키려는 데 뜻을 두신다면 또한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 [註 341] 십점의 소[十漸之疏] : 당(唐)나라 현신(賢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끝을 잘 맺지 못할 조짐 열 가지가 있음을 지적하여 올린 상소. 정관(貞觀) 13년(693)에 동지(冬至)에서부터 5월까지 가물자 위징이, 먼 지방에 사자를 보내어 준마(駿馬)와 괴진(怪珍)을 구하는 것, 함부로 백성을 부려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 욕심을 부려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는 것, 얻기 어려운 보화와 완호품(玩好品)을 중지하지 않으며 위에선 사치하면서 아래의 검소만을 바라는 것, 어진 자를 등용하고는 의심하여 일조 일석에 버리는 것, 사냥을 즐기고 정무에 소홀한 것, 신하를 예의(禮義)로 대하지 않고 작은 허물을 따지는 것, 오만을 부려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서 먼 나라를 토벌하는 것, 극심한 요역(徭役)으로 백성을 지치게 하는 것 등 열 가지 폐단을 들어, 즉위한 처음보다 그 마음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지적, 경계한 상소이다. 《신당서(新唐書)》 권97 위징 열전(魏徵列傳).
원문
○丙寅/御夕講。 侍講官李澯臨文曰: "世道所以治所以亂者, 莫非人君之所爲也。 古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人君爲治之心, 卽位之初, 無有不勤者, 至於臨政日久, 春秋已晩, 則漸不如初, 而怠倦繼之。 唐 太宗, 乃英明之主也。 然終不如初, 故魏徵(土)〔上〕 十漸之疏。 我成廟, 大有爲之主也。 群臣有以靡不有初, 鮮克有終之語啓之者, 則成廟曰: ‘此言至當。 予當書諸枕屛而自警’ 云。 臣又聞之, 祖宗時, 特召文士, 不時講經, 論難古今, 而或設酌, 至於夜分乃罷, 故其時群臣, 有懷必達, 誠意交孚。 至於世子及僚屬等, 亦有時引見講論, 訪問治道。 此今時之所當省念也。" 上曰: "今者風俗薄惡, 子殺父, 妻殺夫, 而朝廷之上, 每每軫念者, 在於邊方防禦之事, 而不及於人倫風俗等事。 爲治之道, 恐無本末也。" 澯曰: "上敎至當。 自上先正其本源, 則其餘治具, 無不畢張矣。 古云: ‘草上之風, 必偃。’ 此雖是常談, 實是確論。 自上若有志於移風易俗, 則亦何難哉?"
중종 34년 (1539) 10월 2일
중종실록92권, 중종 34년 10월 2일 丙寅 1/1 기사 / 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시강관 이찬이 먼저 모범을 보여 풍속을 일신하고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을 건의하다
국역
석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찬(李澯)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임금이 하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즉위한 초년에는 어느 임금이나 다 잘 다스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정무에 힘쓰지 않는 이가 없지만 정사를 본 지가 오래고 연세가 높아지면 점점 처음만 못함은 물론 나태한 마음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태종은 영명(英明)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즉위 초만 못했기 때문에 위징(魏徵)이 십점의 소[十漸之疏]341) 를 올렸던 것입니다.
우리 성묘(成廟)께서는 크게 능력을 발휘하신 임금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신하들 중에,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드물다는 말로 아뢴 이가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신 성묘께서는 ‘그 말이 지당하다. 내 마땅히 침병(枕屛)에 써놓고 스스로를 경계하겠다.’ 하셨다고 합니다.
신은 또 들으니,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특별히 문사(文士)들을 불러 수시로 강경(講經)을 하면서 고금의 일을 논란하였는데 혹은 주연을 베풀면서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때의 신하들은 아뢸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였으므로 성의(誠意)로 서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자와 요속(僚屬)들도 가끔 인견(引見)하여 강론하게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하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마땅히 살펴 유념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풍속이 야박하고 완악해져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는데도, 조정에서 늘 걱정하는 것은 변방을 방어하는 일에만 쏠려 있을 뿐 인륜과 풍속 등의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본말(本末)이 전도된 듯하다."
하니, 찬이 아뢰었다.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상께서 먼저 그 본원(本源)을 바루신다면 그 나머지 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쓸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말이기는 하나 실로 명확한 말입니다. 상께서 풍속을 일신시키려는 데 뜻을 두신다면 또한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 [註 341] 십점의 소[十漸之疏] : 당(唐)나라 현신(賢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끝을 잘 맺지 못할 조짐 열 가지가 있음을 지적하여 올린 상소. 정관(貞觀) 13년(693)에 동지(冬至)에서부터 5월까지 가물자 위징이, 먼 지방에 사자를 보내어 준마(駿馬)와 괴진(怪珍)을 구하는 것, 함부로 백성을 부려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 욕심을 부려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는 것, 얻기 어려운 보화와 완호품(玩好品)을 중지하지 않으며 위에선 사치하면서 아래의 검소만을 바라는 것, 어진 자를 등용하고는 의심하여 일조 일석에 버리는 것, 사냥을 즐기고 정무에 소홀한 것, 신하를 예의(禮義)로 대하지 않고 작은 허물을 따지는 것, 오만을 부려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서 먼 나라를 토벌하는 것, 극심한 요역(徭役)으로 백성을 지치게 하는 것 등 열 가지 폐단을 들어, 즉위한 처음보다 그 마음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지적, 경계한 상소이다. 《신당서(新唐書)》 권97 위징 열전(魏徵列傳).
원문
○丙寅/御夕講。 侍講官李澯臨文曰: "世道所以治所以亂者, 莫非人君之所爲也。 古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人君爲治之心, 卽位之初, 無有不勤者, 至於臨政日久, 春秋已晩, 則漸不如初, 而怠倦繼之。 唐 太宗, 乃英明之主也。 然終不如初, 故魏徵(土)〔上〕 十漸之疏。 我成廟, 大有爲之主也。 群臣有以靡不有初, 鮮克有終之語啓之者, 則成廟曰: ‘此言至當。 予當書諸枕屛而自警’ 云。 臣又聞之, 祖宗時, 特召文士, 不時講經, 論難古今, 而或設酌, 至於夜分乃罷, 故其時群臣, 有懷必達, 誠意交孚。 至於世子及僚屬等, 亦有時引見講論, 訪問治道。 此今時之所當省念也。" 上曰: "今者風俗薄惡, 子殺父, 妻殺夫, 而朝廷之上, 每每軫念者, 在於邊方防禦之事, 而不及於人倫風俗等事。 爲治之道, 恐無本末也。" 澯曰: "上敎至當。 自上先正其本源, 則其餘治具, 無不畢張矣。 古云: ‘草上之風, 必偃。’ 此雖是常談, 實是確論。 自上若有志於移風易俗, 則亦何難哉?"
원본
중종 34년 (1539)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