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86권, 중종 32년 11월 11일 丙戌 1/2 기사 /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윤은보를 명소하고 전왕의 문제, 홍문관에 내리는 상, 별시의 실시문제, 허경의 일 등에 대해 하교하다
국역
영의정 윤은보 등을 명소(命召)하고 하교하기를,
"전에 의논한 일은 내가 중요하고 어려운 일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세의 대계는 일찍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조종에서 근간에 일이 많아 비록 미처 물어 올 겨를이 없었으나, 다른날 중국측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이 계시느냐고 하며 만나보고자 한다면 난처할 뿐만이 아니고, 당대에 아뢰지 않았다가 나중에 세월이 더욱 오래 된 다음에 만약 전왕(前王)이 어느 해에 왕위를 물렸으냐고 물으면서, 이미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훙(薨)했다고 아뢰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을 리가 있느냐고 힐문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 중국에 가는 행차의 사목(事目)마다 구실을 꾸며대며 대답하고 있으니, 의리에 바르지 못하다. 경들은 ‘그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잘 생각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지만 이것이 은밀한 일이 아닌데, 중국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듣지 못하였겠는가?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로는 성종 때에 덕종(德宗)을 추봉하려고 주문할 적에는 육시(六寺)·칠감(七監)의 장관에게도 모두 의논하였었다. 이것도 중대한 일이니, 의논이 비록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의정부·육조·한성부·중추부·중훈부·대간·시종에게 널리 의논하면 반드시 좋은 의논이 있을 것이다. 오늘 조회 때에는 의논할 수가 없겠는가?
그리고 근래에 조정에서 큰 일을 결정하고서 앞의 대간과 뒤의 대간들을 모두 상주기로 논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처음에는 미처 거론하지 못하였으나 뒤에는 적극적으로 말하였으니, 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태학생(太學生)들도 항론(抗論)하였는데, 그들에게만 위답(慰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경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을 뽑는 것이 전례였다. 금년에는 별시(別試)가 자주 있었으니, 여러 곳에서 사람을 뽑으면 폐단이 많겠기에 예고 없이 태학에 나아가는 절목을 이미 마련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무과의 초시(初試)를 먼저 시험보이고 명륜당에 나아가 유생들과 한산(閑散)510) 조사(朝士)에게 아울러 시험을 보이고, 연대(輦臺)에 나와 무과의 전시(殿試)를 보이고서 즉시 방방(放榜)하면 외방의 유생은 동요되지도 않고 태학에 나아가 사람을 뽑는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허경(許坰)의 일은 대간들이 끝까지 신문하고자 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형추하였는데, 그 모의가 조정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만 모함하려고 하였다고 하니, 이는 이미 승복산 초사(招辭)이다. 만약 형신을 가한다면 목숨이 끊어질까 염려된다. 시종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형벌을 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의논하라."
하였는데, 윤은보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양로왕(養老王)511) 의 일에 대해서 신들이 여러번 성상의 하교를 받았는데 그 만세(萬世)를 위하여 염려하심이 지극히 깊은 것입니다. 다만 신들의 생각으로서는 지금 만약 부고(訃告)하여 시호를 청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제사와 시호를 내려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신료들은 의당 상복을 입어야 하고 성상께서도 변복(變服)을 해야 하며 제사를 내려 줄 때에는 반드시 구위(柩位)가 있어야 하는데, 형편상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태자를 책봉하는 것은 중국의 큰 경사이니, 제사를 내려 주는 사신을 겸행시키지 않고 반드시 따로 보낼 것입니다. 평안도 일대는 일 년 동안에 두 번이나 천사(天使)가 지나갔으므로 피해가 이미 극심합니다. 만약 또 사신이 온다면 지탱할 형편이 못되어 반드시 흩어져 도망하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로왕(養老王)은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 부고하지 않는 것을 어찌 새삼스레 의심하겠습니까? 노산군(魯山君) 때에는 부고하지 않았어도 중국 조정에서 묻지 않았었으니, 그것이 증거입니다. 천사가 올 적에 묻는다고 하더라도 전과 같이 적당한 말로 대답한다면 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왕으로 추봉하고 사당을 세우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홍문관에서 일을 거론한 것은 대간보다 뒤에 하였으니, 대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태학생들은 격앙하고 분발하여 거리낌없이 모두 말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므로 마땅히 위답(慰答)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금년에 과거를 실시하는 데 있어서는, 인재(人材)가 성취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이렇게 심히 추운 때를 당하여 태학(太學)에 가서 사람을 뽑는 것은 아마도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신공계칙문(臣工戒勅文)은 곧 간적(奸賊)이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한 술책이었으니, 쓰지 말라고 하신 하교는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허경은 시종(侍從)으로서 공론을 가탁하여 관중에서 발설하기는 했습니다만 나이도 어리고 출신(出身)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찌 허항의 간모(奸謀)와 비계(祕計)가 그와 같이 지극하였음을 다 알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 차례 가형하면 목숨이 끊어질까 염려되어 신들이 전일(前日)에 아뢰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시종의 반열에 있던 사람이 형장을 맞고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였다.
"의논하여 아뢴 뜻은 알았다. 그리고 허경의 일은, 비록 가형하라고 이미 명하였으나, 지난번 조율한 것을 보면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형은 그만두고 지난번에 조율한 것으로 고쳐 판부하라."
- 【태백산사고본】 44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13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원문
○丙戌/命召領議政尹殷輔等敎曰: "前日所議事, 予非不知重難, 然萬世之大計, 不可不早議。 中朝近間多事, 雖未暇問, 若異日天使, 來問前王存否, 而欲見之, 則非徒難處。 當代不奏, 而後來歲月尤久, 若問前王某年間辭位, 已過幾年, 未聞奏薨, 豈有過百年, 而恒存之理哉? 以此詰問, 必有後悔。 近來每行次事目, 飾辭以對, 於義未正。 卿等旣曰此重事, 當商量計之。 此非秘密事, 廷臣豈不聞之? 不可久滯。 予覩成廟朝追封德宗奏聞時, 竝議於六寺、七監長官。 此亦重事, 議雖不一, 當廣議於政府、六曹、漢城、中樞、忠勳府、臺諫、侍從, 則必有至中之論。 今日會朝時, 不可議之乎? 且近者定朝廷大事, 前後臺諫, 皆論賞格。 弘文館初未及論, 而後乃極言, 賞格何如? 大學生等, 亦能抗論, 獨不慰答乎? 況慶事之後取人, 例也。 今年頻有別擧, 廣取則多弊, 不時幸學節目, 已磨鍊矣, 刻日先取武科初試, 幸明倫堂, 儒生及閑散朝士竝試, 出下輦臺, 取武科殿試, 卽放榜, 則外方儒生, 不至騷動, 而幸學取人, 兼全也。" 仍傳曰: "許坰事臺諫欲窮訊, 故累次刑推, 而但其謀, 非干朝廷, 只欲傾陷害己之人。 此已服之辭, 若加刑, 則殞命可慮。 侍從之人, 不可如是。 加刑與否, 竝議。" 尹殷輔等議啓曰: "養老王事, 臣等屢承聖敎, 其爲萬世之慮, 至爲深遠。 但以臣等所料, 今若訃告請諡, 則中朝遣使賜祭賜諡。 我國臣僚, 當用喪服, 上亦變服, 賜祭之時, 必有柩位, 勢所難爲。 太子冊封, 則上國大慶, 賜祭使臣, 必不兼行, 其別遣必矣。 平安一路, 周年之內, 再經天使, 困弊已極, 若又出來, 則勢不可支, 必至流亡, 不可不慮。 養老王年不甚老, 何遽以不訃告爲疑乎? 魯山時, 雖不訃告, 中朝亦不問之, 此其驗也。 天使之來, 雖或問及, 當依前權辭以對, 又何難焉? 封王立廟事, 決不可爲。 弘文館論事, 後於臺諫, 與臺諫有間。 大學生等, 激昻奮發, 盡言不諱, 其志可嘉, 在所慰答, 但今年屢行科擧, 人材無成就之暇, 且當此冱寒, 幸學取人, 似爲未安。 臣工戒勑之文, 乃奸賊(錯)〔鉗〕 制人口之術, 勿用之敎甚當。 許坰以侍從之人, 假托公論, 發於館中, 則有之矣, 然年少之人, 出身未久, 豈能盡知許沆奸謀秘計至此極也? 累次加刑, 殞命可慮, 故臣等前日亦啓之。 曾在侍從之人, 殞於杖下, 何如也?" 答曰: "議啓之意, 知道。 且許坰事, 雖已命加刑, 見其前照, 乃流三千里, 此亦非輕。 除加刑, 以前照改判付。"
- 【태백산사고본】 44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13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중종 32년 (1537) 11월 11일
중종실록86권, 중종 32년 11월 11일 丙戌 1/2 기사 /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윤은보를 명소하고 전왕의 문제, 홍문관에 내리는 상, 별시의 실시문제, 허경의 일 등에 대해 하교하다
국역
영의정 윤은보 등을 명소(命召)하고 하교하기를,
"전에 의논한 일은 내가 중요하고 어려운 일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세의 대계는 일찍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조종에서 근간에 일이 많아 비록 미처 물어 올 겨를이 없었으나, 다른날 중국측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이 계시느냐고 하며 만나보고자 한다면 난처할 뿐만이 아니고, 당대에 아뢰지 않았다가 나중에 세월이 더욱 오래 된 다음에 만약 전왕(前王)이 어느 해에 왕위를 물렸으냐고 물으면서, 이미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훙(薨)했다고 아뢰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을 리가 있느냐고 힐문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 중국에 가는 행차의 사목(事目)마다 구실을 꾸며대며 대답하고 있으니, 의리에 바르지 못하다. 경들은 ‘그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잘 생각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지만 이것이 은밀한 일이 아닌데, 중국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듣지 못하였겠는가?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로는 성종 때에 덕종(德宗)을 추봉하려고 주문할 적에는 육시(六寺)·칠감(七監)의 장관에게도 모두 의논하였었다. 이것도 중대한 일이니, 의논이 비록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의정부·육조·한성부·중추부·중훈부·대간·시종에게 널리 의논하면 반드시 좋은 의논이 있을 것이다. 오늘 조회 때에는 의논할 수가 없겠는가?
그리고 근래에 조정에서 큰 일을 결정하고서 앞의 대간과 뒤의 대간들을 모두 상주기로 논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처음에는 미처 거론하지 못하였으나 뒤에는 적극적으로 말하였으니, 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태학생(太學生)들도 항론(抗論)하였는데, 그들에게만 위답(慰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경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을 뽑는 것이 전례였다. 금년에는 별시(別試)가 자주 있었으니, 여러 곳에서 사람을 뽑으면 폐단이 많겠기에 예고 없이 태학에 나아가는 절목을 이미 마련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무과의 초시(初試)를 먼저 시험보이고 명륜당에 나아가 유생들과 한산(閑散)510) 조사(朝士)에게 아울러 시험을 보이고, 연대(輦臺)에 나와 무과의 전시(殿試)를 보이고서 즉시 방방(放榜)하면 외방의 유생은 동요되지도 않고 태학에 나아가 사람을 뽑는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허경(許坰)의 일은 대간들이 끝까지 신문하고자 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형추하였는데, 그 모의가 조정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만 모함하려고 하였다고 하니, 이는 이미 승복산 초사(招辭)이다. 만약 형신을 가한다면 목숨이 끊어질까 염려된다. 시종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형벌을 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의논하라."
하였는데, 윤은보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양로왕(養老王)511) 의 일에 대해서 신들이 여러번 성상의 하교를 받았는데 그 만세(萬世)를 위하여 염려하심이 지극히 깊은 것입니다. 다만 신들의 생각으로서는 지금 만약 부고(訃告)하여 시호를 청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제사와 시호를 내려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신료들은 의당 상복을 입어야 하고 성상께서도 변복(變服)을 해야 하며 제사를 내려 줄 때에는 반드시 구위(柩位)가 있어야 하는데, 형편상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태자를 책봉하는 것은 중국의 큰 경사이니, 제사를 내려 주는 사신을 겸행시키지 않고 반드시 따로 보낼 것입니다. 평안도 일대는 일 년 동안에 두 번이나 천사(天使)가 지나갔으므로 피해가 이미 극심합니다. 만약 또 사신이 온다면 지탱할 형편이 못되어 반드시 흩어져 도망하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로왕(養老王)은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 부고하지 않는 것을 어찌 새삼스레 의심하겠습니까? 노산군(魯山君) 때에는 부고하지 않았어도 중국 조정에서 묻지 않았었으니, 그것이 증거입니다. 천사가 올 적에 묻는다고 하더라도 전과 같이 적당한 말로 대답한다면 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왕으로 추봉하고 사당을 세우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홍문관에서 일을 거론한 것은 대간보다 뒤에 하였으니, 대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태학생들은 격앙하고 분발하여 거리낌없이 모두 말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므로 마땅히 위답(慰答)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금년에 과거를 실시하는 데 있어서는, 인재(人材)가 성취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이렇게 심히 추운 때를 당하여 태학(太學)에 가서 사람을 뽑는 것은 아마도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신공계칙문(臣工戒勅文)은 곧 간적(奸賊)이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한 술책이었으니, 쓰지 말라고 하신 하교는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허경은 시종(侍從)으로서 공론을 가탁하여 관중에서 발설하기는 했습니다만 나이도 어리고 출신(出身)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찌 허항의 간모(奸謀)와 비계(祕計)가 그와 같이 지극하였음을 다 알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 차례 가형하면 목숨이 끊어질까 염려되어 신들이 전일(前日)에 아뢰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시종의 반열에 있던 사람이 형장을 맞고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였다.
"의논하여 아뢴 뜻은 알았다. 그리고 허경의 일은, 비록 가형하라고 이미 명하였으나, 지난번 조율한 것을 보면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형은 그만두고 지난번에 조율한 것으로 고쳐 판부하라."
- 【태백산사고본】 44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13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원문
○丙戌/命召領議政尹殷輔等敎曰: "前日所議事, 予非不知重難, 然萬世之大計, 不可不早議。 中朝近間多事, 雖未暇問, 若異日天使, 來問前王存否, 而欲見之, 則非徒難處。 當代不奏, 而後來歲月尤久, 若問前王某年間辭位, 已過幾年, 未聞奏薨, 豈有過百年, 而恒存之理哉? 以此詰問, 必有後悔。 近來每行次事目, 飾辭以對, 於義未正。 卿等旣曰此重事, 當商量計之。 此非秘密事, 廷臣豈不聞之? 不可久滯。 予覩成廟朝追封德宗奏聞時, 竝議於六寺、七監長官。 此亦重事, 議雖不一, 當廣議於政府、六曹、漢城、中樞、忠勳府、臺諫、侍從, 則必有至中之論。 今日會朝時, 不可議之乎? 且近者定朝廷大事, 前後臺諫, 皆論賞格。 弘文館初未及論, 而後乃極言, 賞格何如? 大學生等, 亦能抗論, 獨不慰答乎? 況慶事之後取人, 例也。 今年頻有別擧, 廣取則多弊, 不時幸學節目, 已磨鍊矣, 刻日先取武科初試, 幸明倫堂, 儒生及閑散朝士竝試, 出下輦臺, 取武科殿試, 卽放榜, 則外方儒生, 不至騷動, 而幸學取人, 兼全也。" 仍傳曰: "許坰事臺諫欲窮訊, 故累次刑推, 而但其謀, 非干朝廷, 只欲傾陷害己之人。 此已服之辭, 若加刑, 則殞命可慮。 侍從之人, 不可如是。 加刑與否, 竝議。" 尹殷輔等議啓曰: "養老王事, 臣等屢承聖敎, 其爲萬世之慮, 至爲深遠。 但以臣等所料, 今若訃告請諡, 則中朝遣使賜祭賜諡。 我國臣僚, 當用喪服, 上亦變服, 賜祭之時, 必有柩位, 勢所難爲。 太子冊封, 則上國大慶, 賜祭使臣, 必不兼行, 其別遣必矣。 平安一路, 周年之內, 再經天使, 困弊已極, 若又出來, 則勢不可支, 必至流亡, 不可不慮。 養老王年不甚老, 何遽以不訃告爲疑乎? 魯山時, 雖不訃告, 中朝亦不問之, 此其驗也。 天使之來, 雖或問及, 當依前權辭以對, 又何難焉? 封王立廟事, 決不可爲。 弘文館論事, 後於臺諫, 與臺諫有間。 大學生等, 激昻奮發, 盡言不諱, 其志可嘉, 在所慰答, 但今年屢行科擧, 人材無成就之暇, 且當此冱寒, 幸學取人, 似爲未安。 臣工戒勑之文, 乃奸賊(錯)〔鉗〕 制人口之術, 勿用之敎甚當。 許坰以侍從之人, 假托公論, 發於館中, 則有之矣, 然年少之人, 出身未久, 豈能盡知許沆奸謀秘計至此極也? 累次加刑, 殞命可慮, 故臣等前日亦啓之。 曾在侍從之人, 殞於杖下, 何如也?" 答曰: "議啓之意, 知道。 且許坰事, 雖已命加刑, 見其前照, 乃流三千里, 此亦非輕。 除加刑, 以前照改判付。"
- 【태백산사고본】 44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13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원본
중종 32년 (1537)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