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84권, 중종 32년 4월 3일 辛亥 2/4 기사 /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전위사 허항이 평양에서 돌아와 복명한 내용
국역
평양에서 전위사(餞慰使) 허항이 와서 복명하니 사정전에서 인견하였다. 허항이 아뢰기를,
"천사들이 3월 26일에 중화(中和)에서 일찍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 누선(樓船)을 타고 협선(挾船)201) 에다 기녀(妓女)들을 싣고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에 이르러 올라가 한참을 조망(眺望)하였는데, 정사(正使)는 이 부벽루를 ‘백상루보다에 비하면 조금 못하다. 그러나 또한 명승지이다.’ 했고, 부사(副使)는 ‘백상루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합니다. 이 때 오직 반송사 정사룡과 본도(本道)의 감사 이귀령 등이 연향에 배석하였고 신은 참여하지 않았었는데, 두 사신이 부벽루에서 모란봉에 이르러 하는 말이 ‘우리들이 천하를 많이 유람하였지만 이와 같은 데가 있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사방을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강이 빙 둘러 있어 이와 같은 절경은 천하에 짝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올라가 한없이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내려왔는데, 정사가 유람한 일을 기록하기를 ‘가정(嘉靖) 3월 일에 흠차(欽差) 정사(正使) 공용경(龔用卿), 부사 오희맹(吳希孟)이 판서 정사룡, 관찰사 이귀령과 함께 유람하였다. 경(卿)은 쓴다.’고 했다 합니다.
신이 이날 밤에 바로 명을 받고 전송하러 온 뜻을 말했더니, 천사의 말이 ‘밤이 이미 깊었으니 내일 아침에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전위연(餞慰宴)을 거행하였는데, 천사가 하는 말이 ‘여러 차례 중신(重臣)을 보내 위로하러오니 국왕의 성의에 감사한다.’ 하였습니다. 잔치가 파했기에 신이 하직하겠다고 하니, 천사가 만류하기를 ‘국왕께서 어찌 우리들이 놀며 잔치하는지 아시겠는가. 하루쯤 더 머물며 우리들과 유람한 다음에 서울로 돌아가더라도 어찌 크게 해로울 것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난색(難色)을 보이니, 천사가 반송사 정사룡 및 감사 이귀령 등을 시켜 신을 만류하게 하기를 ‘이 허 참판 및 판서와 감사는 모두가 제배(儕輩)사이이니 우리들을 위해 머물러 달라.’ 하므로, 신이 부득이하여 머물렀습니다.
이날 천사들이 기자(箕子)의 묘를 참배하고 이어 영귀루(詠歸樓)로 가는데 길가에 있는 정전(井田) 제도를 보고서 말하기를 ‘비록 분명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취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귀루로 올라가 조망(眺望)하다가 술자리가 반쯤 되었을 적에, 모화관에서 영조도(迎詔圖)가 마침 당도하게 되었었는데, 천사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땅히 이 그림을 우리집의 보배로 삼겠다.’ 하므로, 반송사가 말하기를 ‘그림이 졸하여 중국의 잘 그린 것만 못하다.’ 하니, 천사가 ‘그렇지 않다. 중국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잘 그리겠는가.’ 하였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잔치를 파하고 돌아왔다가 이튿날 신이 하직하겠다고 하니 천사가 신과 더불어 식사(食事)하였고, 또한 신에게 위로하기를 ‘멀리 와서 위로해 주느라 매우 수고하였다. 우리들을 위해 전하께 치사해 달라. 영조도(迎詔圖)를 여기까지 뒤쫓아 보내 주신 것은 더욱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하직하고 나왔었는데 다시 신을 부르더니, 어느새 율시(律詩)를 지어 신에게 주고 이어 신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기에 신이 못한다고 사양하니, 천사가 억지로 화답하게 하기에 할 수 없이 화답했습니다. 천사를 보니 기상이 호탕하고 마음도 표리(表裏)가 없어 묻는 말에 모두 답해 주었기에, 신이 반송사와 의논하여 글속의 해득하기 어려운 말을 묻기를 ‘두보(杜甫)를 두이(杜二)라 하고, 이백(李白)을 이십팔(李十八), 한유(韓愈)를 한십팔(韓十八), 남제운(南霽雲)을 남팔(南八)이라 하니 이는 무슨 뜻인가?’ 하니, 천사가 자세히 답하여 주되 거듭 거듭 다시 말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하는 듯하였는데, 역관(譯官)이 모두를 전달해 주지 못하자 천사가 그러함을 알아차리고서는 다시 대개를 들어 말하기를 ‘혹은 형제(兄弟)의 차서, 혹은 마을의 사는 집의 차서를 가지고 이른 것이다.’ 했습니다.
신이 또 묻기를 ‘서호(西湖)의 너비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천사가 ‘너비가 거의 20리나 된다.’ 하였고, 신이 ‘사이에는 많이 소나무도 심고 꽃도 심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고 했으며, 신이 ‘황하(黃河)와 대강(大江)은 그 너비가 얼마쯤이나 되고 물의 성질은 어떠한가?’ 하니, 천사가 ‘황하는 천하에 나쁜 강인데 물결이 출렁이며 넘치므로 그 1백여 리 사이가 모두 피해를 받아 경작할 수 없고, 대강은 그 근원이 하늘에서 나오고 너비가 거의 80∼90리나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대강의 물은 영강군(永康軍) 민산(岷山)에서 나오고, 한수(漢水)는 흥원부(興元府) 파총산(嶓冡山)에서 나와 이 두 물이 합하여 대하(大河)가 되는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나온다고 하는가? 두보(杜甫)의 시(詩)에 「깊은 밤 양주의 불빛이 보이네.」라고 했는데, 어찌 그 너비가 80∼90리나 되겠는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 과연 근원이 하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 너비도 더러는 18∼19리가 되며 더러는 14∼15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반송사가 ‘팔진도(八陣圖)의 남은 자취가 아직도 있어 비록 물이 넘치고 있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 신공(神功)의 유적(遺蹟)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사가 돌아갈 적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있었는가?"
하니, 허항이 아뢰었다.
"기뻐하는 기색이 많았고 실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또 신을 접대할 때에도 감사하고 기쁘게 여기는 뜻이 말에 나타남이 매우 많았고, 시를 지어 신에게 주기까지 했습니다. 또 하는 말이 ‘같은 사문(斯文)으로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태자를 책봉한 뒤 조서를 반포할 때에 만일 우리들이 다시 오게 된다면 다시 서로 만나보게 될 것이지마는, 혹 우리들이 다시 오게 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중조(中朝)에 오게 된다면 서로 찾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기에, 신이 ‘외국 사람이 중조에 들어가서 어찌 감히 찾아 뵙겠는가.’ 하니, 천사가 ‘어찌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겠는가. 참판(參判)은 소견이 너무 좁다.’ 하였습니다.
천사가 당도한 곳에 액자(額字)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는데 있는 것도 역시 좋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릇 누각(樓閣)이나 관우(館宇)에 반드시 액자를 써서 걸었고, 영귀정(詠歸亭)에 이르러서는 액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 액자는 매우 잘 썼으니 마땅히 써 준 것과 아울러 걸라.’고 했습니다.
역관(譯官)들이 말 전달을 잘하지 못하자, 반송사가 농담으로 천사에게 말하기를 ‘역관들이 중국 말에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나 상국(上國)에 조빙(朝聘) 갔을 적에 모두 말을 통하여 정을 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역관들로 하여금 요동(遼東) 등의 곳에서 말을 배우도록 하고 싶은데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천사가 ‘한갓 요동에서만이 아니라 국자감(國子監)에 입학(入學)하기를 청한다 하더라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 각로(閣老) 이시상(李時常)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은 예의의 나라다.」 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과연 그러하여 단지 어음(語音)이 같지 않을 뿐이고 그 나머지 예모(禮貌) 및 문물 제도 등은 모두가 중국과 같았다. 안남(安南)이나 유구(琉球)같은 나라들은 비록 글은 해득한다 하지만 예악(禮樂)이나 법도야 어찌 여기와 방불이나 하겠는가. 이러므로 조정에서 크게 아끼고 중히 여겨 무릇 주청(奏請)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역관을 보내어 말을 배우는 일 등은 주청하기만 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하였습니다. 반송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난번 서책(書冊) 등의 물건도 역시 금하여 무역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사람을 보내어 입학하는 것이겠는가.’ 하니, 천사가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의 문자도 같은데 어찌 꼭 넓지 못한 것 보이기를 그토록이나 하였겠는가.’ 하므로, 반송사가 ‘이는 손존(孫存)이 낭중(郞中)으로 있을 때 새로 세운 법이다’ 하니, 천사가 ‘손 낭중은 좁은 짓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외방으로 나가 지부(知府)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7면
- 【분류】외교-명(明)
- [註 201] 협선(挾船) : 딸린 작은 배.
원문
○平壤餞慰使許沆來復命, 引見于思政殿。 許沆曰: "天使於三月二十六日, 自中和早到大同江, 乘樓船, 挾船載妓, 泝流而上, 至浮碧樓, 登眺良久, 正使曰: ‘此樓, 比之百祥樓則稍劣矣, 然亦勝地也。’ 副使曰: ‘勝於百祥樓遠矣。’ 云。 其時唯伴送使鄭士龍, 本道監司李龜齡等陪宴, 而臣則不與焉。 兩使自浮碧樓, 至牧丹峰曰: ‘俺等於天下, 游觀多矣, 未見有如此之地也。 四望無際, 水勢縈回。 如此絶景, 天下無雙。’ 云。 登臨極歡, 至暮而下。 正使因記其遊觀之事曰: ‘嘉靖三月日, 欽差正使龔用卿、副使吳希孟、同鄭判書士龍、李觀察使龜齡, 遊于此。 卿誌。’ 云。 臣於其夜, 卽告承命來餞之意, 天使曰: ‘今已暮夜, 明朝相見可也。’ 翌日乃行餞慰宴, 天使曰: ‘屢遣重臣來慰, 多謝國王誠意。’ 宴罷, 臣告辭, 天使留臣曰: ‘國王豈知俺等之遊宴乎? 宰相雖少留一日, 與俺等遊觀後還京, 豈有大害乎?’ 臣有難色, 天使使伴送使 【鄭士龍。】 及監司 【李龜齡。】 等, 留臣曰: ‘此許參判與判書、監司, 皆是儕輩, 爲俺等挽之’, 臣不得已留焉。 是日, 天使謁箕子墓, 仍往泳歸樓, 見路傍井田之制曰: ‘雖不分明, 猶有遺迹也。’ 登樓觀望, 酒半, 慕華館迎詔圖, 適至。 天使深喜曰: ‘當以此圖, 永爲家寶也。’ 伴送使曰: ‘畫拙矣, 不如中原之工也。’ 天使曰: ‘不然。 雖中原之畫, 豈得工於此乎?’ 夜深宴罷而還。 翌日臣告辭, 天使與臣對飯, 且慰臣曰: ‘遠來致慰, 勞動勞動, 爲俺等致謝殿下。 迎詔圖追送及此, 尤謝不已。’ 臣旣辭出, 而更招臣, 還作律詩贈臣, 因令臣和之。 臣辭以不能, 天使强使和之, 不獲已和之。 臣見天使, 氣象豪宕, 心無表裏, 問言則答, 故臣與伴送使議之, 以文字間難解之語, 問曰: ‘杜甫謂之杜二, 李白謂之李十八, 韓愈謂之韓十八, 南霽雲謂之南八, 此何意耶?’ 天使答之詳悉, 重言復語, 似甚明辨, 而譯官皆不能傳, 天使知其然也。 更以大槪言之曰: ‘或兄弟之次, 或以閭里家居之次。’ 云矣。 臣又問曰: ‘西湖之廣幾何?’ 天使曰: ‘其廣幾二十里。’ 臣曰: ‘其間多植松植花云, 果然乎?’ 天使曰: ‘然。’ 臣曰: ‘黃河、大江, 其廣幾許? 水性何如?’ 天使曰: ‘黃河爲天下惡水, 波浪鼓蕩, 其邊百里之間, 皆爲所害, 不得耕種也。 大江則其源從天上而出, 其廣幾八九十里。’ 臣曰: ‘江水出永康軍 岷山, 漢水出興元府 嶓冢山, 合流爲大河, 何謂出天上也? 《杜詩》云: 「夜深燈火見楊州」, 其廣豈至於八九十里乎?’ 天使曰: ‘然。 其源果非出於天, 而其廣或十八九里, 或十四五里。’ 伴送使曰: ‘八陣圖遺迹尙在, 雖水漲之中, 亦不變云。 果然乎?’ 天使曰: ‘然。 神功遺址, 至今尙在也。’" 上曰: "天使歸時, 有喜色乎?" 許沆曰: "多有喜色, 而無缺望之容。 且與臣接待之時, 其感喜之意, 發見於言語者甚多, 至於製詩以遺臣。 且曰: ‘同是斯文, 相遇於此, 豈偶然乎? 封太子後頒詔時, 俺等若得再來, 則更與相見也。 俺等縱不得再來, 宰相到中朝, 則不可不相訪也。’ 臣曰: ‘外國人入中朝, 豈敢尋謁?’ 天使曰: ‘何以不相見乎? 參判之言狹矣。’ 天使見到處額字, 或無或有, 而有者亦不好, 故凡樓閣館宇, 必書額而掛之。 至詠歸樓, 見額字曰: ‘此額字甚善書。 當與所書竝掛之。’ 云。 譯官等不能傳言, 伴送使戲言於天使曰: ‘譯官等不精於華語, 故接待華使, 朝聘上國, 皆不得通言表情, 是可恨也。 欲令譯官, 學言於遼東等處, 則可得乎?’ 天使曰: ‘非徒遼東, 雖請入學於國子監, 豈不從乎? 李閣老 時常曰: 「東國, 禮義之邦云」, 今觀之, 果然。 但語音不同而已, 其餘禮貌及文物制度等事, 皆與中原一矣。 如安南、琉球等國, 雖曰解文, 其禮樂法度, 豈得彷彿於此乎? 是以朝廷大愛重之, 凡有奏請, 無不聽從也。 遣譯學語等事, 若奏請, 必從之矣?’ 伴送使曰: ‘不然。 前者書冊等物, 亦禁不貿買。 況遣人入學乎?’ 天使曰: ‘車同軌, 書同文, 何必示不廣至此耶?’ 伴送使曰: ‘此孫存郞中時, 創立之法也。’ 天使曰: ‘孫郞中, 其狹隘如此, 故不容於朝廷, 出外爲知府矣。’ 云。"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7면
- 【분류】외교-명(明)
중종 32년 (1537) 4월 3일
중종실록84권, 중종 32년 4월 3일 辛亥 2/4 기사 /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전위사 허항이 평양에서 돌아와 복명한 내용
국역
평양에서 전위사(餞慰使) 허항이 와서 복명하니 사정전에서 인견하였다. 허항이 아뢰기를,
"천사들이 3월 26일에 중화(中和)에서 일찍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 누선(樓船)을 타고 협선(挾船)201) 에다 기녀(妓女)들을 싣고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벽루에 이르러 올라가 한참을 조망(眺望)하였는데, 정사(正使)는 이 부벽루를 ‘백상루보다에 비하면 조금 못하다. 그러나 또한 명승지이다.’ 했고, 부사(副使)는 ‘백상루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합니다. 이 때 오직 반송사 정사룡과 본도(本道)의 감사 이귀령 등이 연향에 배석하였고 신은 참여하지 않았었는데, 두 사신이 부벽루에서 모란봉에 이르러 하는 말이 ‘우리들이 천하를 많이 유람하였지만 이와 같은 데가 있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사방을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강이 빙 둘러 있어 이와 같은 절경은 천하에 짝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올라가 한없이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내려왔는데, 정사가 유람한 일을 기록하기를 ‘가정(嘉靖) 3월 일에 흠차(欽差) 정사(正使) 공용경(龔用卿), 부사 오희맹(吳希孟)이 판서 정사룡, 관찰사 이귀령과 함께 유람하였다. 경(卿)은 쓴다.’고 했다 합니다.
신이 이날 밤에 바로 명을 받고 전송하러 온 뜻을 말했더니, 천사의 말이 ‘밤이 이미 깊었으니 내일 아침에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전위연(餞慰宴)을 거행하였는데, 천사가 하는 말이 ‘여러 차례 중신(重臣)을 보내 위로하러오니 국왕의 성의에 감사한다.’ 하였습니다. 잔치가 파했기에 신이 하직하겠다고 하니, 천사가 만류하기를 ‘국왕께서 어찌 우리들이 놀며 잔치하는지 아시겠는가. 하루쯤 더 머물며 우리들과 유람한 다음에 서울로 돌아가더라도 어찌 크게 해로울 것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난색(難色)을 보이니, 천사가 반송사 정사룡 및 감사 이귀령 등을 시켜 신을 만류하게 하기를 ‘이 허 참판 및 판서와 감사는 모두가 제배(儕輩)사이이니 우리들을 위해 머물러 달라.’ 하므로, 신이 부득이하여 머물렀습니다.
이날 천사들이 기자(箕子)의 묘를 참배하고 이어 영귀루(詠歸樓)로 가는데 길가에 있는 정전(井田) 제도를 보고서 말하기를 ‘비록 분명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취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귀루로 올라가 조망(眺望)하다가 술자리가 반쯤 되었을 적에, 모화관에서 영조도(迎詔圖)가 마침 당도하게 되었었는데, 천사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땅히 이 그림을 우리집의 보배로 삼겠다.’ 하므로, 반송사가 말하기를 ‘그림이 졸하여 중국의 잘 그린 것만 못하다.’ 하니, 천사가 ‘그렇지 않다. 중국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잘 그리겠는가.’ 하였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잔치를 파하고 돌아왔다가 이튿날 신이 하직하겠다고 하니 천사가 신과 더불어 식사(食事)하였고, 또한 신에게 위로하기를 ‘멀리 와서 위로해 주느라 매우 수고하였다. 우리들을 위해 전하께 치사해 달라. 영조도(迎詔圖)를 여기까지 뒤쫓아 보내 주신 것은 더욱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하직하고 나왔었는데 다시 신을 부르더니, 어느새 율시(律詩)를 지어 신에게 주고 이어 신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기에 신이 못한다고 사양하니, 천사가 억지로 화답하게 하기에 할 수 없이 화답했습니다. 천사를 보니 기상이 호탕하고 마음도 표리(表裏)가 없어 묻는 말에 모두 답해 주었기에, 신이 반송사와 의논하여 글속의 해득하기 어려운 말을 묻기를 ‘두보(杜甫)를 두이(杜二)라 하고, 이백(李白)을 이십팔(李十八), 한유(韓愈)를 한십팔(韓十八), 남제운(南霽雲)을 남팔(南八)이라 하니 이는 무슨 뜻인가?’ 하니, 천사가 자세히 답하여 주되 거듭 거듭 다시 말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하는 듯하였는데, 역관(譯官)이 모두를 전달해 주지 못하자 천사가 그러함을 알아차리고서는 다시 대개를 들어 말하기를 ‘혹은 형제(兄弟)의 차서, 혹은 마을의 사는 집의 차서를 가지고 이른 것이다.’ 했습니다.
신이 또 묻기를 ‘서호(西湖)의 너비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천사가 ‘너비가 거의 20리나 된다.’ 하였고, 신이 ‘사이에는 많이 소나무도 심고 꽃도 심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고 했으며, 신이 ‘황하(黃河)와 대강(大江)은 그 너비가 얼마쯤이나 되고 물의 성질은 어떠한가?’ 하니, 천사가 ‘황하는 천하에 나쁜 강인데 물결이 출렁이며 넘치므로 그 1백여 리 사이가 모두 피해를 받아 경작할 수 없고, 대강은 그 근원이 하늘에서 나오고 너비가 거의 80∼90리나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대강의 물은 영강군(永康軍) 민산(岷山)에서 나오고, 한수(漢水)는 흥원부(興元府) 파총산(嶓冡山)에서 나와 이 두 물이 합하여 대하(大河)가 되는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나온다고 하는가? 두보(杜甫)의 시(詩)에 「깊은 밤 양주의 불빛이 보이네.」라고 했는데, 어찌 그 너비가 80∼90리나 되겠는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 과연 근원이 하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 너비도 더러는 18∼19리가 되며 더러는 14∼15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반송사가 ‘팔진도(八陣圖)의 남은 자취가 아직도 있어 비록 물이 넘치고 있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천사가 ‘그렇다. 신공(神功)의 유적(遺蹟)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사가 돌아갈 적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있었는가?"
하니, 허항이 아뢰었다.
"기뻐하는 기색이 많았고 실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또 신을 접대할 때에도 감사하고 기쁘게 여기는 뜻이 말에 나타남이 매우 많았고, 시를 지어 신에게 주기까지 했습니다. 또 하는 말이 ‘같은 사문(斯文)으로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태자를 책봉한 뒤 조서를 반포할 때에 만일 우리들이 다시 오게 된다면 다시 서로 만나보게 될 것이지마는, 혹 우리들이 다시 오게 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중조(中朝)에 오게 된다면 서로 찾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기에, 신이 ‘외국 사람이 중조에 들어가서 어찌 감히 찾아 뵙겠는가.’ 하니, 천사가 ‘어찌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겠는가. 참판(參判)은 소견이 너무 좁다.’ 하였습니다.
천사가 당도한 곳에 액자(額字)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는데 있는 것도 역시 좋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릇 누각(樓閣)이나 관우(館宇)에 반드시 액자를 써서 걸었고, 영귀정(詠歸亭)에 이르러서는 액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 액자는 매우 잘 썼으니 마땅히 써 준 것과 아울러 걸라.’고 했습니다.
역관(譯官)들이 말 전달을 잘하지 못하자, 반송사가 농담으로 천사에게 말하기를 ‘역관들이 중국 말에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나 상국(上國)에 조빙(朝聘) 갔을 적에 모두 말을 통하여 정을 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역관들로 하여금 요동(遼東) 등의 곳에서 말을 배우도록 하고 싶은데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천사가 ‘한갓 요동에서만이 아니라 국자감(國子監)에 입학(入學)하기를 청한다 하더라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 각로(閣老) 이시상(李時常)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은 예의의 나라다.」 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과연 그러하여 단지 어음(語音)이 같지 않을 뿐이고 그 나머지 예모(禮貌) 및 문물 제도 등은 모두가 중국과 같았다. 안남(安南)이나 유구(琉球)같은 나라들은 비록 글은 해득한다 하지만 예악(禮樂)이나 법도야 어찌 여기와 방불이나 하겠는가. 이러므로 조정에서 크게 아끼고 중히 여겨 무릇 주청(奏請)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역관을 보내어 말을 배우는 일 등은 주청하기만 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하였습니다. 반송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난번 서책(書冊) 등의 물건도 역시 금하여 무역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사람을 보내어 입학하는 것이겠는가.’ 하니, 천사가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의 문자도 같은데 어찌 꼭 넓지 못한 것 보이기를 그토록이나 하였겠는가.’ 하므로, 반송사가 ‘이는 손존(孫存)이 낭중(郞中)으로 있을 때 새로 세운 법이다’ 하니, 천사가 ‘손 낭중은 좁은 짓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외방으로 나가 지부(知府)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7면
- 【분류】외교-명(明)
- [註 201] 협선(挾船) : 딸린 작은 배.
원문
○平壤餞慰使許沆來復命, 引見于思政殿。 許沆曰: "天使於三月二十六日, 自中和早到大同江, 乘樓船, 挾船載妓, 泝流而上, 至浮碧樓, 登眺良久, 正使曰: ‘此樓, 比之百祥樓則稍劣矣, 然亦勝地也。’ 副使曰: ‘勝於百祥樓遠矣。’ 云。 其時唯伴送使鄭士龍, 本道監司李龜齡等陪宴, 而臣則不與焉。 兩使自浮碧樓, 至牧丹峰曰: ‘俺等於天下, 游觀多矣, 未見有如此之地也。 四望無際, 水勢縈回。 如此絶景, 天下無雙。’ 云。 登臨極歡, 至暮而下。 正使因記其遊觀之事曰: ‘嘉靖三月日, 欽差正使龔用卿、副使吳希孟、同鄭判書士龍、李觀察使龜齡, 遊于此。 卿誌。’ 云。 臣於其夜, 卽告承命來餞之意, 天使曰: ‘今已暮夜, 明朝相見可也。’ 翌日乃行餞慰宴, 天使曰: ‘屢遣重臣來慰, 多謝國王誠意。’ 宴罷, 臣告辭, 天使留臣曰: ‘國王豈知俺等之遊宴乎? 宰相雖少留一日, 與俺等遊觀後還京, 豈有大害乎?’ 臣有難色, 天使使伴送使 【鄭士龍。】 及監司 【李龜齡。】 等, 留臣曰: ‘此許參判與判書、監司, 皆是儕輩, 爲俺等挽之’, 臣不得已留焉。 是日, 天使謁箕子墓, 仍往泳歸樓, 見路傍井田之制曰: ‘雖不分明, 猶有遺迹也。’ 登樓觀望, 酒半, 慕華館迎詔圖, 適至。 天使深喜曰: ‘當以此圖, 永爲家寶也。’ 伴送使曰: ‘畫拙矣, 不如中原之工也。’ 天使曰: ‘不然。 雖中原之畫, 豈得工於此乎?’ 夜深宴罷而還。 翌日臣告辭, 天使與臣對飯, 且慰臣曰: ‘遠來致慰, 勞動勞動, 爲俺等致謝殿下。 迎詔圖追送及此, 尤謝不已。’ 臣旣辭出, 而更招臣, 還作律詩贈臣, 因令臣和之。 臣辭以不能, 天使强使和之, 不獲已和之。 臣見天使, 氣象豪宕, 心無表裏, 問言則答, 故臣與伴送使議之, 以文字間難解之語, 問曰: ‘杜甫謂之杜二, 李白謂之李十八, 韓愈謂之韓十八, 南霽雲謂之南八, 此何意耶?’ 天使答之詳悉, 重言復語, 似甚明辨, 而譯官皆不能傳, 天使知其然也。 更以大槪言之曰: ‘或兄弟之次, 或以閭里家居之次。’ 云矣。 臣又問曰: ‘西湖之廣幾何?’ 天使曰: ‘其廣幾二十里。’ 臣曰: ‘其間多植松植花云, 果然乎?’ 天使曰: ‘然。’ 臣曰: ‘黃河、大江, 其廣幾許? 水性何如?’ 天使曰: ‘黃河爲天下惡水, 波浪鼓蕩, 其邊百里之間, 皆爲所害, 不得耕種也。 大江則其源從天上而出, 其廣幾八九十里。’ 臣曰: ‘江水出永康軍 岷山, 漢水出興元府 嶓冢山, 合流爲大河, 何謂出天上也? 《杜詩》云: 「夜深燈火見楊州」, 其廣豈至於八九十里乎?’ 天使曰: ‘然。 其源果非出於天, 而其廣或十八九里, 或十四五里。’ 伴送使曰: ‘八陣圖遺迹尙在, 雖水漲之中, 亦不變云。 果然乎?’ 天使曰: ‘然。 神功遺址, 至今尙在也。’" 上曰: "天使歸時, 有喜色乎?" 許沆曰: "多有喜色, 而無缺望之容。 且與臣接待之時, 其感喜之意, 發見於言語者甚多, 至於製詩以遺臣。 且曰: ‘同是斯文, 相遇於此, 豈偶然乎? 封太子後頒詔時, 俺等若得再來, 則更與相見也。 俺等縱不得再來, 宰相到中朝, 則不可不相訪也。’ 臣曰: ‘外國人入中朝, 豈敢尋謁?’ 天使曰: ‘何以不相見乎? 參判之言狹矣。’ 天使見到處額字, 或無或有, 而有者亦不好, 故凡樓閣館宇, 必書額而掛之。 至詠歸樓, 見額字曰: ‘此額字甚善書。 當與所書竝掛之。’ 云。 譯官等不能傳言, 伴送使戲言於天使曰: ‘譯官等不精於華語, 故接待華使, 朝聘上國, 皆不得通言表情, 是可恨也。 欲令譯官, 學言於遼東等處, 則可得乎?’ 天使曰: ‘非徒遼東, 雖請入學於國子監, 豈不從乎? 李閣老 時常曰: 「東國, 禮義之邦云」, 今觀之, 果然。 但語音不同而已, 其餘禮貌及文物制度等事, 皆與中原一矣。 如安南、琉球等國, 雖曰解文, 其禮樂法度, 豈得彷彿於此乎? 是以朝廷大愛重之, 凡有奏請, 無不聽從也。 遣譯學語等事, 若奏請, 必從之矣?’ 伴送使曰: ‘不然。 前者書冊等物, 亦禁不貿買。 況遣人入學乎?’ 天使曰: ‘車同軌, 書同文, 何必示不廣至此耶?’ 伴送使曰: ‘此孫存郞中時, 創立之法也。’ 天使曰: ‘孫郞中, 其狹隘如此, 故不容於朝廷, 出外爲知府矣。’ 云。"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18책 57면
- 【분류】외교-명(明)
원본
중종 32년 (1537)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