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66권, 중종 24년 10월 16일 戊寅 5/7 기사 / 1529년 명 가정(嘉靖) 8년
김종직과 유자광의 일을 재론한 이종익의 상소문
국역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듣건대 배우는 자들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끝까지 궁구한 다음에야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으로는 선과 악이 뒤섞이고 밖으로는 비방과 칭송이 어지러워, 소견이 더욱 어두워짐은 물론 화(禍)도 따르게 됩니다. 대개 배우는 자가 정도(正道)를 체득하지 못하면 화에 빠져도 깨닫지 못하고 다스리는 자가 이 중용(中庸)을 체득하지 못하면 과격한 의논을 그치지 않는 것으로 후세의 큰 근심입니다.
옛날 왕안석(王安石)이 녹(祿)만 받아먹자 인종(仁宗)이 ‘안석은 간특한 사람이다.’고 지목했어도 안석은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습니다. 안석이 ‘한 문제(漢文帝)는 취할 것이 없다.’ 한 적이 있습니다. 군부(君父)의 사이에 이렇게 각박(刻薄)하게 말했으니, 사람들은 안석이 모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신은 그것을 못믿겠습니다.
우리 세조조(世祖朝) 적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께서 친히 만나보시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 하였습니다. 이에 종직은 발끈 화를 내고 물러가서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비방했습니다.354) 대개 군신이 만나는 것은 풍운(風雲)의 모임으로, 요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필요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를 어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이런데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355) 가의(賈誼)는 장사(長沙)에게 통곡했으니,356) 또한 망령된 짓이 아닙니까? 하물며 예부터 중흥(中興)한 군주는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요기(妖氣)를 소탕한 뒤에야 선왕의 대업(大業)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 임금이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고서 신하가 갑자기 옛일을 인용하여 역귀(蜮鬼)처럼 헐뜯는다면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해 보니 세조 9년에 종직이 이파(李坡) 등과 십오 학사(十五學士)의 선(選)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세에 진출하기 위해 주선한 지가 오랬습니다. 이미 북면하여 신하의 의(義)를 맺은 사람이 다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전국 시대의 비루한 선비도 하지 않던 것입니다. 먼저 그 임금의 선조를 헐뜯고 다시 그 조정에 벼슬하는 것은, 인정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으니, 이것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그치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이는, 신하로 칭하지도 않고 녹봉도 받지 않으면서 일월(日月) 같은 충의를 지닌 자와 높은 지위로 국사를 맡고 있으면서 털끝만큼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종(成宗)께서는 그의 문장을 아껴서 한 번 군수(郡守)에 제수(除授)했고 다음은 감사에 제수했고 그 다음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했습니다. 그러나 번다한 첩보(牒報)와 소장(訴狀)을 침체시킨 채 처리하지 못했으니,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조께서는 한 번 잠깐 보고는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이러했으니, 역시 우러러 볼만합니다. 그렇건만 지금도 선비들에게 종직에 대한 얘기를 하면 그를 비호하여 발끈 성내거나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심이 옹폐된 지가 이미 오랬으니 사문(斯文)의 화가 어느 때나 그치겠습니까? 심지어 김일손(金馹孫)은 ‘주(周)나라가 쇠할 때 하늘이 공자(孔子)를 내어 70년 동안이나 인심을 배양했으니 안연(顔淵)이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으며, 하늘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재호(齋號)이다.】 를 동방에 태어나게 하여 인심을 배양한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나 역시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종직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공자에게 견줄 수 있고, 안연이 어떤 인물이기에 감히 스스로를 견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일손이 안연이 되고 공자가 종직과 같다면, 천하의 마부 같은 천한 자들까지도 모두 성인의 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무리가 그 스승을 높여 헛된 고생으로 명예를 낚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의 맹랑하고 무식함이 이러했으니, 연산(燕山)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이미 종직을 간인(奸人)이라고 했으니, 다시 유자광(柳子光)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노마(路馬)는 감히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옛 예법(禮法)입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무례한 행동을 보인 자는 마치 매가 새를 쫓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자광은 세조를 섬긴 자로서 목숨은 죽음과 삶이 있지만 의리는 고금이 없는 것이니, 자광이 죽었더라도 보답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일은 옳았으나 그 마음은 그렇지를 못했었습니다. 자광 역시 간사한 사람이라서 종직에게 유감이 있어 비밀리에 제거할 뜻을 품고 있다가 갑자기 큰 보물이라도 얻은 듯이 그 사실을 들추어 내어 드디어는 당시의 임금으로 하여금 살육하게 하는 단서를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직이 거의 동요될 뻔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한 일은 옳았으나 그의 마음은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전하께서는 세조의 신손(神孫)으로 세조께서 계시던 자리에 계시고 세조의 나라에 군림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자광을 원수로 여기고 종직을 허여(許與)하는 것입니까? 아, 이미 종직은 잘못이고, 자광은 옳은 데 가깝다는 것을 안 뒤에야 격물(格物)의 학을 논할 수 있습니다. 신의 말과 견해는 공자의 가르침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부월(鈇鉞)같이 엄정한 춘추(春秋) 필법에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 논의가 한번 나오면 반드시 또 신을 미치광이이며 미혹한 자라고 할 것입니다만, 10년 동안 신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닥쳐올 화가 또 종직보다 더 큰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전하께서는 들어 보시겠습니까?
처음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비로소 김정(金淨)·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를 시험하시면서 흔연히 훌륭하게 만들어 보려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조심조심 전하께서 사람을 알아보시는 밝음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성낸 얼굴로 교만을 떨며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몰랐고, 구신(舊臣)들을 배척하고 옛 법도를 변란시켰습니다. 자기들과 뜻이 다른 선비는 배척하고 자기들에게 아부하는 자들만 진출시켜 온 세상의 이목을 돌려 놓았고 오늘의 야박한 풍조를 남겨 놓았습니다. 권위에 조급하여 큰소리만 치는 습속이 드디어 풍속을 이루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왕안석(王安石)·왕비(王伾)·왕연(王衍) 등이나 직하(稷下)의 무리들과 같으나357) 실지는 남몰래 종직(宗直)을 할아비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현명한 군주와 한 시대를 구제할 인물이 없었다면 당시의 국세는 거의 위태한 지경이었습니다. 형벌을 감하여 지나치게 하지 않음은 어찌 다만 땅이 기르고 하늘이 함양해 주는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후일 입에서 젖내나는 무리로서 그 이름만 듣고 그 인물은 보지 못하고 그 먹던 찌꺼기만 보고 그 맛은 보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서로 추숭(追崇)하기를 ‘안연(顔淵)이나 맹가(孟軻)의 무리로서 그 직임을 다 할 수 없었다.’ 하면서 일손이 형륙(刑戮) 당한 것을 전하의 탓으로 돌리고 당시 대신들에게 죄를 씌우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사학(邪學)이 사람들의 마음을 빠뜨리면 들어가기는 쉽고 그 그릇된 것을 깨닫기는 힘든 것입니다. 이러니 광조의 용심(用心)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예를 그릇 배워 그 화가 이렇게 되었으니, 남의 신하된 자들이 또한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신이 이미 이 앞서 말한 몇 사람은 죄를 받아 마땅하나 그 당시 논박받은 자들은 모두 등용할 만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요(堯)임금은 조정에 사흉(四兇)358) 이 있다고 해서 원개(元愷)359) 같은 현인(賢人)을 폐한 것은 아니고, 주(周)나라는 집안에 삼숙(三叔)360) 이 있다고 해서 노(魯)나라나 위(衛)나라 같은 동성 제후를 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몇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온 세상의 인물을 모두 무고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미 저 사람들은 죄를 받아 마땅하고 이 사람들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궁리(窮理)의 학문을 논할 수가 있습니다.
신의 말을 채택하지 않으신다면 그만이거니와 쓰신다면 이 말이 천하에 횡행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혹자는 이들 무리를 너그러이 용서한다면 인심이 동요되어 옛 버릇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 역시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일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인 것이 불충하다는 것을 아는데 지금 무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화를 부르려고 다시 전철(前轍)을 밟겠습니까? 신이 자세하게 시세를 살피고 물정을 상세히 추찰(推察)해 보건대 절대로 이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조정을 두 갈래로 나누어 마치 방휼지세(蚌鷸之勢)를 이루어 후대의 무한한 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모름지기 전하의 성명(聖明)과 재상들의 넓은 식견으로 선처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대개 인정이란, 이쪽을 높이면 저쪽은 억압되고 저쪽이 강하면 이쪽은 약해지는 법입니다. 신이라고 어찌 무편 무당(無偏無黨)한 자만을 얻어내서 그들과 더불어 탕탕(蕩蕩)한 왕도(王道)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격물(格物)과 궁리(窮理)의 학문을 미루어 선악의 근원을 밝히시고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모범을 보여 공평 정대함으로써 더욱 왕자의 도를 여셔서 선비들의 마음을 개혁하고 조정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천심(天心)을 누리소서."
사신(史臣)은 논한다. 상소 중의 말은 자못 광망한 것이 많으나 또한 바로 지적한 것도 있으니 광망하다 하여 직언(直言)까지 버릴 수는 없다. 그런데 단지 기휘(忌諱)하는 데에 저촉되었다고 해서 바른 말도 간특하고 망령된 것으로 돌려버리니 당초 구언한 본의에 크게 어그러졌다. 후일의 언로(言路)에 방해가 될까 두렵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6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註 354]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비방했습니다. :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 의제(楚義帝)가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한 사실에 가탁하여 지은 글인데, 이 글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수록함으로써 사화(史禍)의 빌미가 되었다. 즉 함양군(咸陽郡) 청사(廳舍)의 현판 사건으로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유자광이 연산군 4년에 이 조의제문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찬위(簒位)한 세조(世祖)의 비행을 풍자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자질함으로써,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다. 결과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棺斬屍)되고 그 제자들은 죽거나 귀양갔다. 이종익(李宗翼) 상소의 뜻은 비록 유자광이 간사한 사람이지만 조의제문 문제를 발표한 것은 세조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행위임을 강조한 것이다.
- [註 355]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 : 굴원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박문 강기(博聞强記)하고 치란(治亂)에 밝아 삼려 대부(三閭大夫)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참소를 받아 결국 강남(江南)에 유배, 결국 자기의 말이 채용되지 않는 것을 한탄,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 [註 356] 가의(賈誼)는 장사(長沙)에게 통곡했으니, : 가의는 시서(詩書)에 뛰어난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博士)가 되고, 이어 태중 대부(太中大夫)에 초천(超遷)되었다.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시기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밀려날 때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굴원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어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자책을 느끼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註 357] 왕안석(王安石)·왕비(王伾)·왕연(王衍) 등이나 직하(稷下)의 무리들과 같으나 : 왕안석은 북송(北宋) 강서(江西) 사람. 신종(神宗)의 신임을 받아 소위 신법(新法)을 채택, 부국 강병을 꾀함으로써 요(遼)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사마광(司馬光) 등 보수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뒷날 주자학파(朱子學派)들로부터 소인이란 지목을 받았다. 왕비는 당 순종(唐順宗) 때 사람으로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에 올랐으나 성품이 비루하고 뇌물을 좋아한다는 평을 들었다. 왕연은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총명이 당세를 울렸으나 노장학(老莊學)을 좋아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 직하의 무리들이란, 제 선왕(齊宣王)이 선비들을 우대하여 직하관(稷下館)을 지어 머물게 하자 수백 명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제 선왕은 이들에게 상대부(上大夫)의 후한 녹을 주면서 직무는 맡기지 않고 국사를 논하게 하였으므로, 후일 실행은 없으면서 말만 앞세우는 자들을 직하 선생(稷下先生)이라 하였다.
- [註 358] 사흉(四兇) : 요임금 때의 네 명의 악인으로 공공(共工)·환두(驩兜)·삼묘(三苗)·곤(鯀).
- [註 359] 원개(元愷) : 원(元)은 선하다는 뜻이고, 개(愷)는 화(和)하다는 뜻. 즉 팔원 팔개(八元八愷)의 준말. 옛날 고양씨(高陽氏)의 제자 가운데 여덟 사람의 선량한 사람이 있었고, 고신씨(高辛氏)의 제자 가운데 여덟 사람의 온화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연유된 말이다.
- [註 360] 삼숙(三叔) : 주 무왕(周武王)의 세 동생인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 무왕은 은(殷)나라를 멸한 뒤 그 고토(故土)에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봉하여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관숙 등으로 이를 감독케 하였던 바,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한 뒤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자 곽숙 등은 무경과 함께 반란을 꾀했다가 복주(伏誅) 또는 유배되었다. 《서경(書經)》 금등(金縢).
원문
○李宗翼上疏, 略曰:
臣聞爲學者, 當格物以致其知, 窮理以盡其性, 然後於君, 知當盡其忠, 於父, 知當盡其孝。 不然則善惡混於內, 毁譽亂其外, 所見愈暗, 而禍亦隨之。 大抵學之者, 不得其道, 則陷禍而不悟; 治之者, 不得其中, 則激論而不已。 此後世之大患也。 昔王安石食釣餌盡, 仁宗目之曰: "安石詐人也。" 安石不敢斥。 嘗曰: "漢 文帝不足取也。" 君父之際, 刻削如此。 人言安石不叛, 臣不信也。 我世祖朝有一大臣, 薦金宗直。 世祖親見曰: "腐儒不可用也。" 宗直悻悻退, 而著《義帝文》以非之。 夫君臣之際、風雲之會, 不可僥倖。 雖其相須, 而不得相遇者, 何可勝數? 而屈原枉死於汨羅, 賈誼痛哭於長沙, 不亦妄乎? 況自古中興之主, 必戡定禍亂, 蕩掃妖氛, 然後能紹復先王之業。 使時君一有違拂, 臣子遽擬古吟詠而詆之, 如鬼(域)〔蜮〕 之爲, 則爲爾君者, 不亦難乎? 臣考之《國朝寶鑑》, 世祖九年, 宗直與李坡, 與十五學士之選。 然則干進當世, 周旋其間, 蓋已久矣。 夫旣北面稱臣, 而更懷二心, 此戰國鄙陋之士, 所不爲也。 先毁其想考, 而更立人本朝, 此人情之所以不近, 而亂臣賊子之所以不止也。 其與不稱臣、不受祿, 而忠肝、義膽, 爭明皎日者, 與夫顯執國事, 不撓絲毫者, 爲有間矣。 成廟惜其文辭, 一授郡守, 再爲監司, 二爲刑曹判書, 牒訴倥惚, 冗不見治, 非腐儒而何? 世祖一擧眼之頃, 而洞人之心骨如此, 吁其亦可仰也。 夫至今有言宗直於士人之中, 則怫然或怒, 而且不悅焉。 人心蒙蔽已久, 斯文之禍, 何時而息乎? 甚者金馹孫以爲: "天生夫子於衰周, 長養七十年, 顔淵安得壽? 天生佔畢齋 【金宗直齋號。】 於東方, 長養已久, 余亦安得壽?" 夫宗直何如人, 敢擬之夫子, 顔淵何人, 敢以之自擬乎? 馹孫爲顔淵, 夫子下同宗直, 則天下執鞭者, 皆可爲聖人之儔矣。 是不過釋徒之尊其師, 以取空苦之名耳。 其孟浪無識如此, 雖微燕山, 其能免乎? 臣旣以宗直爲奸人, 則復以柳子光爲優乎? 臣聞路馬不敢齒, 古之禮也。 人臣見無禮於君者, 若鷹鸇之逐鳥雀。 子光, 臣事世祖者也。 身無存歿, 義無古今, 則子光雖以死執之可也, 惜乎! 其事則是, 而其心則不然也。 子光亦以奸邪人, 有憾於宗直, 陰懷誅鋤之志, 遽訐其事, 如獲大寶, 遂使世主, 大啓殺伐之端, 社稷幾搖。 臣以此知其事則是, 而心則不然也。 雖然殿下, 世祖之神孫也。 居世祖之位, 莅世祖之國, 則爲殿下, 安可終讎子光, 而與宗直乎? 嗚呼! 旣知宗直之全非, 又知子光之近是, 然後始可與論格物之擧矣。 臣言見正於夫子, 當無愧於《春秋》鈇鉞之筆矣。 斯論一出, 必且以臣爲狂爲惑矣。 然十年胸中, 往來自信, 爲如何哉? 臣以爲方來之禍, 又有大於宗直者, 殿下欲聞之乎? 始殿下因大臣之謬, 始試金淨、金湜、趙光祖, 欣然有玉汝之望矣。 不相與鞠身盡瘁, 慄慄危懼, 以成殿下知人之明, 而顧悻悻而驕, 知進而不知退, 排逐舊臣, 變亂舊章, 斥異己之士, 進附己之人, 回一世之視聽, 貽今日之衰薄, 睢(吁)〔盱〕 誕闊, 遂成風流。 此王安石、王伾、王衍, 與夫稷下之徒也, 而其實, 潛祖乎宗直者也。 不有明見之主、救時之相, 當時國勢, 幾乎殆矣。 而其所以省刑不濫, 則又豈特地育而天涵哉? 後日乳臭之輩, 聞其名, 而不見其人, 得其餘, 而不得其味者, 必相與追崇曰: "顔淵、孟軻之徒, 而不終其任。" 以此歸咎於殿下, 歸罪於時相, 以受馹孫之大戮。 此臣之所大憂恐者也。 邪學之溺人心術, 易入而難悟也如此。 且光祖用心, 元不如是, 誤學俎豆, 其禍乃爾。 爲人臣亦可鑑哉! 臣旣以前數人爲當罪, 而復以其時所被論者, 皆可用, 抑有說乎? 臣聞堯不以朝有四凶, 而不廢元、凱之賢, 周不以家有三叔, 而不廢魯、衛之親。 安可以數人之詿誤, 盡誣一世之人物哉? 吁! 旣知彼人之當罪, 又知斯人之不可棄, 然後始可與論窮理之學矣。 臣言不用則已, 用之則雖橫行天下可也。 或者以爲若寬斯輩, 則人心搖動, 舊習復作。 此言亦大有理, 然前日譸張, 已爲不忠, 今欲操戈入室, 更蹈前轍乎? 臣詳覽時勢, 細推物情, 必無是理。 然不可使今日之朝廷, 岐而爲二, 如蚌鷸之勢, 以貽百年之患。 須及殿下之明聖, 宰相之博大, 而善處之如何耳。 大抵人情, 尊此則抑彼, 彼强則此弱。 臣安得無偏無黨者, 與之論王道之蕩蕩也哉? 伏願殿下, 推格物窮理之學, 明善惡之大源, 嚴民庶以表率, 公平正大, 益開王者之道, 以革士心, 以和朝廷, 克享天心。
【史臣曰: "疏中所言, 頗多狂妄, 然亦有直斥之事, 不可以狂妄, 幷棄其直言。 只以觸諱, 歸諸邪妄, 大乖當初求言之意, 恐妨後日之言路也。"】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6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중종실록66권, 중종 24년 10월 16일 戊寅 5/7 기사 / 1529년 명 가정(嘉靖) 8년
김종직과 유자광의 일을 재론한 이종익의 상소문
국역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듣건대 배우는 자들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끝까지 궁구한 다음에야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으로는 선과 악이 뒤섞이고 밖으로는 비방과 칭송이 어지러워, 소견이 더욱 어두워짐은 물론 화(禍)도 따르게 됩니다. 대개 배우는 자가 정도(正道)를 체득하지 못하면 화에 빠져도 깨닫지 못하고 다스리는 자가 이 중용(中庸)을 체득하지 못하면 과격한 의논을 그치지 않는 것으로 후세의 큰 근심입니다.
옛날 왕안석(王安石)이 녹(祿)만 받아먹자 인종(仁宗)이 ‘안석은 간특한 사람이다.’고 지목했어도 안석은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습니다. 안석이 ‘한 문제(漢文帝)는 취할 것이 없다.’ 한 적이 있습니다. 군부(君父)의 사이에 이렇게 각박(刻薄)하게 말했으니, 사람들은 안석이 모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신은 그것을 못믿겠습니다.
우리 세조조(世祖朝) 적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께서 친히 만나보시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 하였습니다. 이에 종직은 발끈 화를 내고 물러가서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비방했습니다.354) 대개 군신이 만나는 것은 풍운(風雲)의 모임으로, 요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필요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를 어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이런데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355) 가의(賈誼)는 장사(長沙)에게 통곡했으니,356) 또한 망령된 짓이 아닙니까? 하물며 예부터 중흥(中興)한 군주는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요기(妖氣)를 소탕한 뒤에야 선왕의 대업(大業)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 임금이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고서 신하가 갑자기 옛일을 인용하여 역귀(蜮鬼)처럼 헐뜯는다면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해 보니 세조 9년에 종직이 이파(李坡) 등과 십오 학사(十五學士)의 선(選)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세에 진출하기 위해 주선한 지가 오랬습니다. 이미 북면하여 신하의 의(義)를 맺은 사람이 다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전국 시대의 비루한 선비도 하지 않던 것입니다. 먼저 그 임금의 선조를 헐뜯고 다시 그 조정에 벼슬하는 것은, 인정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으니, 이것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그치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이는, 신하로 칭하지도 않고 녹봉도 받지 않으면서 일월(日月) 같은 충의를 지닌 자와 높은 지위로 국사를 맡고 있으면서 털끝만큼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종(成宗)께서는 그의 문장을 아껴서 한 번 군수(郡守)에 제수(除授)했고 다음은 감사에 제수했고 그 다음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했습니다. 그러나 번다한 첩보(牒報)와 소장(訴狀)을 침체시킨 채 처리하지 못했으니,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조께서는 한 번 잠깐 보고는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이러했으니, 역시 우러러 볼만합니다. 그렇건만 지금도 선비들에게 종직에 대한 얘기를 하면 그를 비호하여 발끈 성내거나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심이 옹폐된 지가 이미 오랬으니 사문(斯文)의 화가 어느 때나 그치겠습니까? 심지어 김일손(金馹孫)은 ‘주(周)나라가 쇠할 때 하늘이 공자(孔子)를 내어 70년 동안이나 인심을 배양했으니 안연(顔淵)이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으며, 하늘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재호(齋號)이다.】 를 동방에 태어나게 하여 인심을 배양한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나 역시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종직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공자에게 견줄 수 있고, 안연이 어떤 인물이기에 감히 스스로를 견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일손이 안연이 되고 공자가 종직과 같다면, 천하의 마부 같은 천한 자들까지도 모두 성인의 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무리가 그 스승을 높여 헛된 고생으로 명예를 낚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의 맹랑하고 무식함이 이러했으니, 연산(燕山)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이미 종직을 간인(奸人)이라고 했으니, 다시 유자광(柳子光)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노마(路馬)는 감히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옛 예법(禮法)입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무례한 행동을 보인 자는 마치 매가 새를 쫓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자광은 세조를 섬긴 자로서 목숨은 죽음과 삶이 있지만 의리는 고금이 없는 것이니, 자광이 죽었더라도 보답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일은 옳았으나 그 마음은 그렇지를 못했었습니다. 자광 역시 간사한 사람이라서 종직에게 유감이 있어 비밀리에 제거할 뜻을 품고 있다가 갑자기 큰 보물이라도 얻은 듯이 그 사실을 들추어 내어 드디어는 당시의 임금으로 하여금 살육하게 하는 단서를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직이 거의 동요될 뻔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한 일은 옳았으나 그의 마음은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전하께서는 세조의 신손(神孫)으로 세조께서 계시던 자리에 계시고 세조의 나라에 군림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자광을 원수로 여기고 종직을 허여(許與)하는 것입니까? 아, 이미 종직은 잘못이고, 자광은 옳은 데 가깝다는 것을 안 뒤에야 격물(格物)의 학을 논할 수 있습니다. 신의 말과 견해는 공자의 가르침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부월(鈇鉞)같이 엄정한 춘추(春秋) 필법에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 논의가 한번 나오면 반드시 또 신을 미치광이이며 미혹한 자라고 할 것입니다만, 10년 동안 신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닥쳐올 화가 또 종직보다 더 큰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전하께서는 들어 보시겠습니까?
처음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비로소 김정(金淨)·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를 시험하시면서 흔연히 훌륭하게 만들어 보려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조심조심 전하께서 사람을 알아보시는 밝음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성낸 얼굴로 교만을 떨며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몰랐고, 구신(舊臣)들을 배척하고 옛 법도를 변란시켰습니다. 자기들과 뜻이 다른 선비는 배척하고 자기들에게 아부하는 자들만 진출시켜 온 세상의 이목을 돌려 놓았고 오늘의 야박한 풍조를 남겨 놓았습니다. 권위에 조급하여 큰소리만 치는 습속이 드디어 풍속을 이루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왕안석(王安石)·왕비(王伾)·왕연(王衍) 등이나 직하(稷下)의 무리들과 같으나357) 실지는 남몰래 종직(宗直)을 할아비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현명한 군주와 한 시대를 구제할 인물이 없었다면 당시의 국세는 거의 위태한 지경이었습니다. 형벌을 감하여 지나치게 하지 않음은 어찌 다만 땅이 기르고 하늘이 함양해 주는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후일 입에서 젖내나는 무리로서 그 이름만 듣고 그 인물은 보지 못하고 그 먹던 찌꺼기만 보고 그 맛은 보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서로 추숭(追崇)하기를 ‘안연(顔淵)이나 맹가(孟軻)의 무리로서 그 직임을 다 할 수 없었다.’ 하면서 일손이 형륙(刑戮) 당한 것을 전하의 탓으로 돌리고 당시 대신들에게 죄를 씌우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사학(邪學)이 사람들의 마음을 빠뜨리면 들어가기는 쉽고 그 그릇된 것을 깨닫기는 힘든 것입니다. 이러니 광조의 용심(用心)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예를 그릇 배워 그 화가 이렇게 되었으니, 남의 신하된 자들이 또한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신이 이미 이 앞서 말한 몇 사람은 죄를 받아 마땅하나 그 당시 논박받은 자들은 모두 등용할 만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요(堯)임금은 조정에 사흉(四兇)358) 이 있다고 해서 원개(元愷)359) 같은 현인(賢人)을 폐한 것은 아니고, 주(周)나라는 집안에 삼숙(三叔)360) 이 있다고 해서 노(魯)나라나 위(衛)나라 같은 동성 제후를 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몇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온 세상의 인물을 모두 무고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미 저 사람들은 죄를 받아 마땅하고 이 사람들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궁리(窮理)의 학문을 논할 수가 있습니다.
신의 말을 채택하지 않으신다면 그만이거니와 쓰신다면 이 말이 천하에 횡행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혹자는 이들 무리를 너그러이 용서한다면 인심이 동요되어 옛 버릇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 역시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일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인 것이 불충하다는 것을 아는데 지금 무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화를 부르려고 다시 전철(前轍)을 밟겠습니까? 신이 자세하게 시세를 살피고 물정을 상세히 추찰(推察)해 보건대 절대로 이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조정을 두 갈래로 나누어 마치 방휼지세(蚌鷸之勢)를 이루어 후대의 무한한 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모름지기 전하의 성명(聖明)과 재상들의 넓은 식견으로 선처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대개 인정이란, 이쪽을 높이면 저쪽은 억압되고 저쪽이 강하면 이쪽은 약해지는 법입니다. 신이라고 어찌 무편 무당(無偏無黨)한 자만을 얻어내서 그들과 더불어 탕탕(蕩蕩)한 왕도(王道)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격물(格物)과 궁리(窮理)의 학문을 미루어 선악의 근원을 밝히시고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모범을 보여 공평 정대함으로써 더욱 왕자의 도를 여셔서 선비들의 마음을 개혁하고 조정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천심(天心)을 누리소서."
사신(史臣)은 논한다. 상소 중의 말은 자못 광망한 것이 많으나 또한 바로 지적한 것도 있으니 광망하다 하여 직언(直言)까지 버릴 수는 없다. 그런데 단지 기휘(忌諱)하는 데에 저촉되었다고 해서 바른 말도 간특하고 망령된 것으로 돌려버리니 당초 구언한 본의에 크게 어그러졌다. 후일의 언로(言路)에 방해가 될까 두렵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6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註 354]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비방했습니다. :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 의제(楚義帝)가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한 사실에 가탁하여 지은 글인데, 이 글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수록함으로써 사화(史禍)의 빌미가 되었다. 즉 함양군(咸陽郡) 청사(廳舍)의 현판 사건으로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유자광이 연산군 4년에 이 조의제문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찬위(簒位)한 세조(世祖)의 비행을 풍자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자질함으로써,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다. 결과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棺斬屍)되고 그 제자들은 죽거나 귀양갔다. 이종익(李宗翼) 상소의 뜻은 비록 유자광이 간사한 사람이지만 조의제문 문제를 발표한 것은 세조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행위임을 강조한 것이다.
- [註 355]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 : 굴원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박문 강기(博聞强記)하고 치란(治亂)에 밝아 삼려 대부(三閭大夫)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참소를 받아 결국 강남(江南)에 유배, 결국 자기의 말이 채용되지 않는 것을 한탄,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 [註 356] 가의(賈誼)는 장사(長沙)에게 통곡했으니, : 가의는 시서(詩書)에 뛰어난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博士)가 되고, 이어 태중 대부(太中大夫)에 초천(超遷)되었다.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시기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밀려날 때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굴원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어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자책을 느끼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註 357] 왕안석(王安石)·왕비(王伾)·왕연(王衍) 등이나 직하(稷下)의 무리들과 같으나 : 왕안석은 북송(北宋) 강서(江西) 사람. 신종(神宗)의 신임을 받아 소위 신법(新法)을 채택, 부국 강병을 꾀함으로써 요(遼)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사마광(司馬光) 등 보수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뒷날 주자학파(朱子學派)들로부터 소인이란 지목을 받았다. 왕비는 당 순종(唐順宗) 때 사람으로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에 올랐으나 성품이 비루하고 뇌물을 좋아한다는 평을 들었다. 왕연은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총명이 당세를 울렸으나 노장학(老莊學)을 좋아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 직하의 무리들이란, 제 선왕(齊宣王)이 선비들을 우대하여 직하관(稷下館)을 지어 머물게 하자 수백 명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제 선왕은 이들에게 상대부(上大夫)의 후한 녹을 주면서 직무는 맡기지 않고 국사를 논하게 하였으므로, 후일 실행은 없으면서 말만 앞세우는 자들을 직하 선생(稷下先生)이라 하였다.
- [註 358] 사흉(四兇) : 요임금 때의 네 명의 악인으로 공공(共工)·환두(驩兜)·삼묘(三苗)·곤(鯀).
- [註 359] 원개(元愷) : 원(元)은 선하다는 뜻이고, 개(愷)는 화(和)하다는 뜻. 즉 팔원 팔개(八元八愷)의 준말. 옛날 고양씨(高陽氏)의 제자 가운데 여덟 사람의 선량한 사람이 있었고, 고신씨(高辛氏)의 제자 가운데 여덟 사람의 온화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연유된 말이다.
- [註 360] 삼숙(三叔) : 주 무왕(周武王)의 세 동생인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 무왕은 은(殷)나라를 멸한 뒤 그 고토(故土)에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봉하여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관숙 등으로 이를 감독케 하였던 바,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한 뒤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자 곽숙 등은 무경과 함께 반란을 꾀했다가 복주(伏誅) 또는 유배되었다. 《서경(書經)》 금등(金縢).
원문
○李宗翼上疏, 略曰:
臣聞爲學者, 當格物以致其知, 窮理以盡其性, 然後於君, 知當盡其忠, 於父, 知當盡其孝。 不然則善惡混於內, 毁譽亂其外, 所見愈暗, 而禍亦隨之。 大抵學之者, 不得其道, 則陷禍而不悟; 治之者, 不得其中, 則激論而不已。 此後世之大患也。 昔王安石食釣餌盡, 仁宗目之曰: "安石詐人也。" 安石不敢斥。 嘗曰: "漢 文帝不足取也。" 君父之際, 刻削如此。 人言安石不叛, 臣不信也。 我世祖朝有一大臣, 薦金宗直。 世祖親見曰: "腐儒不可用也。" 宗直悻悻退, 而著《義帝文》以非之。 夫君臣之際、風雲之會, 不可僥倖。 雖其相須, 而不得相遇者, 何可勝數? 而屈原枉死於汨羅, 賈誼痛哭於長沙, 不亦妄乎? 況自古中興之主, 必戡定禍亂, 蕩掃妖氛, 然後能紹復先王之業。 使時君一有違拂, 臣子遽擬古吟詠而詆之, 如鬼(域)〔蜮〕 之爲, 則爲爾君者, 不亦難乎? 臣考之《國朝寶鑑》, 世祖九年, 宗直與李坡, 與十五學士之選。 然則干進當世, 周旋其間, 蓋已久矣。 夫旣北面稱臣, 而更懷二心, 此戰國鄙陋之士, 所不爲也。 先毁其想考, 而更立人本朝, 此人情之所以不近, 而亂臣賊子之所以不止也。 其與不稱臣、不受祿, 而忠肝、義膽, 爭明皎日者, 與夫顯執國事, 不撓絲毫者, 爲有間矣。 成廟惜其文辭, 一授郡守, 再爲監司, 二爲刑曹判書, 牒訴倥惚, 冗不見治, 非腐儒而何? 世祖一擧眼之頃, 而洞人之心骨如此, 吁其亦可仰也。 夫至今有言宗直於士人之中, 則怫然或怒, 而且不悅焉。 人心蒙蔽已久, 斯文之禍, 何時而息乎? 甚者金馹孫以爲: "天生夫子於衰周, 長養七十年, 顔淵安得壽? 天生佔畢齋 【金宗直齋號。】 於東方, 長養已久, 余亦安得壽?" 夫宗直何如人, 敢擬之夫子, 顔淵何人, 敢以之自擬乎? 馹孫爲顔淵, 夫子下同宗直, 則天下執鞭者, 皆可爲聖人之儔矣。 是不過釋徒之尊其師, 以取空苦之名耳。 其孟浪無識如此, 雖微燕山, 其能免乎? 臣旣以宗直爲奸人, 則復以柳子光爲優乎? 臣聞路馬不敢齒, 古之禮也。 人臣見無禮於君者, 若鷹鸇之逐鳥雀。 子光, 臣事世祖者也。 身無存歿, 義無古今, 則子光雖以死執之可也, 惜乎! 其事則是, 而其心則不然也。 子光亦以奸邪人, 有憾於宗直, 陰懷誅鋤之志, 遽訐其事, 如獲大寶, 遂使世主, 大啓殺伐之端, 社稷幾搖。 臣以此知其事則是, 而心則不然也。 雖然殿下, 世祖之神孫也。 居世祖之位, 莅世祖之國, 則爲殿下, 安可終讎子光, 而與宗直乎? 嗚呼! 旣知宗直之全非, 又知子光之近是, 然後始可與論格物之擧矣。 臣言見正於夫子, 當無愧於《春秋》鈇鉞之筆矣。 斯論一出, 必且以臣爲狂爲惑矣。 然十年胸中, 往來自信, 爲如何哉? 臣以爲方來之禍, 又有大於宗直者, 殿下欲聞之乎? 始殿下因大臣之謬, 始試金淨、金湜、趙光祖, 欣然有玉汝之望矣。 不相與鞠身盡瘁, 慄慄危懼, 以成殿下知人之明, 而顧悻悻而驕, 知進而不知退, 排逐舊臣, 變亂舊章, 斥異己之士, 進附己之人, 回一世之視聽, 貽今日之衰薄, 睢(吁)〔盱〕 誕闊, 遂成風流。 此王安石、王伾、王衍, 與夫稷下之徒也, 而其實, 潛祖乎宗直者也。 不有明見之主、救時之相, 當時國勢, 幾乎殆矣。 而其所以省刑不濫, 則又豈特地育而天涵哉? 後日乳臭之輩, 聞其名, 而不見其人, 得其餘, 而不得其味者, 必相與追崇曰: "顔淵、孟軻之徒, 而不終其任。" 以此歸咎於殿下, 歸罪於時相, 以受馹孫之大戮。 此臣之所大憂恐者也。 邪學之溺人心術, 易入而難悟也如此。 且光祖用心, 元不如是, 誤學俎豆, 其禍乃爾。 爲人臣亦可鑑哉! 臣旣以前數人爲當罪, 而復以其時所被論者, 皆可用, 抑有說乎? 臣聞堯不以朝有四凶, 而不廢元、凱之賢, 周不以家有三叔, 而不廢魯、衛之親。 安可以數人之詿誤, 盡誣一世之人物哉? 吁! 旣知彼人之當罪, 又知斯人之不可棄, 然後始可與論窮理之學矣。 臣言不用則已, 用之則雖橫行天下可也。 或者以爲若寬斯輩, 則人心搖動, 舊習復作。 此言亦大有理, 然前日譸張, 已爲不忠, 今欲操戈入室, 更蹈前轍乎? 臣詳覽時勢, 細推物情, 必無是理。 然不可使今日之朝廷, 岐而爲二, 如蚌鷸之勢, 以貽百年之患。 須及殿下之明聖, 宰相之博大, 而善處之如何耳。 大抵人情, 尊此則抑彼, 彼强則此弱。 臣安得無偏無黨者, 與之論王道之蕩蕩也哉? 伏願殿下, 推格物窮理之學, 明善惡之大源, 嚴民庶以表率, 公平正大, 益開王者之道, 以革士心, 以和朝廷, 克享天心。
【史臣曰: "疏中所言, 頗多狂妄, 然亦有直斥之事, 不可以狂妄, 幷棄其直言。 只以觸諱, 歸諸邪妄, 大乖當初求言之意, 恐妨後日之言路也。"】
- 【태백산사고본】 33책 66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16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