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57권, 중종 21년 5월 12일 甲午 1/5 기사 / 1526년 명 가정(嘉靖) 5년
조강에서 예악의 시행과 성규관의 사유 선발 문제를 논의하다
국역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조방언(趙邦彦)이 아뢰기를,
"예(禮)의 격식과 정성은 어느 한쪽만을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이 더욱 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어(論語)》에 ‘예를 사치스럽게 할 바에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는 것이 낫다.’ 했습니다. 후세의 예악(禮樂)이 진실로 옛날 같을 수는 없지만 악(樂)이 더욱 치우치게 폐기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조빙(朝聘) 온 제후(諸侯)에게 연회를 베푸는 예(禮)에는 반드시 악을 썼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의 덕을 선양하고 아랫사람의 마음을 통달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조종조 적에도 경사(京師)로 가는 사신과 사명(使命)을 띠고 외방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연회를 내릴 때는 반드시 악도 아울러 내려 전별했었습니다. 재변(災變)이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시로 연회를 내리는 것도 해롭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권균(權鈞)은 아뢰기를,
"예악이 어찌 조정에서만 시행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신(一身)의 예악과 일가(一家)의 예악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럽고 형은 우애 있고 아우는 공경하여 일가가 화목한 것은 바로 예악이 일가에 행해진 소치입니다. 이치를 체득하고 화기(和氣)에 통하여 모든 언행(言行)이 절로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예악이 일신에 행해진 소치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먼저 일신의 예악을 닦은 뒤에 향당(鄕黨)과 국가에까지 미쳐가야 합니다. 이렇게 미루어 나가면 천하까지도 모두 교화시킬 수 있고, 따라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공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禮)라고 떠들지만 옥백(玉帛)129)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악(樂)이라고 떠들지만 반드시 종고(鍾鼓)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했습니다. 예악의 근본은 일신에 있는 것으로, 예를 반드시 격식으로만 한다면 화려한 데 빠지고 악을 반드시 악기(樂器)의 숫자로만 한다면 방탕에 빠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악을 흥기시키려면 반드시 그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허굉(許硡) 【이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었다.】 에게 이르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일국의 사표(師表)가 되는 곳이니 사유(師儒)를 가려서 임명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반드시 더 선발해 둠으로써 궐원(闕員)이 없도록 하라."
하매, 허굉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사유에 임명할 만한 사람을 못보았습니다. 전에 초(抄)해 놓은 사유록(師儒錄)을 살펴보니 모두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敎誨)에 합당하지만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기용되었기 때문에 구임(久任)130)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들은 중망(重望)을 우러러 사모만 할 뿐 실제로 교회하는 공효는 없습니다. 신이 성종조(成宗朝) 때 성균관 관원을 살펴보니 반드시 명망이 있지 않았어도 교회의 직임을 맡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할 만한 사람을 못보겠습니다. 설사 경서(經書)를 대략 통달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그 직임에 마음을 다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근래 이겸(李謙)이 경서에 대략 통달했다 해서 사성(司成)에 임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훌륭합니다만 마음을 다하는 데 대한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동지(同知)와 사성(司成)·사예(司藝)가 날마다 사진(仕進)하여 오로지 교회(敎誨)만을 임무로 삼았지만 오히려 미흡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므로 실효(實效)가 많았습니다. 근래 듣기로는 강윤(姜胤)이 경학(經學)에 통달하였고 문장도 잘하므로 교회를 맡길 만하다 해서 전적(典籍)에 임명했습니다만 마침 논박받아 체직되었다고 합니다. 학교(學校)의 폐단은 조정에서도 알고 있는 바이니, 신 또한 어찌 맡길 만한 사람을 가려서 맡기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직 적격자를 못보았기 때문에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131) 방유령(方有寧)은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학업에 근면하지 않는 것이 이미 폐습을 이루었습니다. 근래 《대학(大學)》·《중용(中庸)》을 통독(通讀)했고 지금은 《논어(論語)》를 통독하고 있습니다만, 학업에 근면한 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별시(別試)132) 를 보일 때도 반드시 경서(經書)를 강하게 했었습니다.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을 잘하는 사람은 얻기가 어려웠지만 구두학(句讀學)에 숙달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근래에는 별시를 보일 적에도 자주 경서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구두학에 통달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니 지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신은 병들고 연로(年老)한데다 눈까지 어두우니 신의 직(職)을 갈고 합당한 사람을 임명하소서. 그러면 실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굉은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 이극증(李克增)이 성균관 동지(成均館同知)로 있을 적에는 별시를 보이면서도 반드시 경서를 강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경서에 통한 선비가 많았었습니다. 지금은 구두학마저도 끊어져 버렸으니 매우 걱정됩니다."
하고, 권균은 아뢰기를,
"성종조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극증이 동지(同知)로 있었고 반우형(潘佑亨)·이문형(李文亨) 등이 성균관 관원으로 있으면서 각각 나누어 유생들을 훈도했으므로 교회하는 방법에 매우 근밀(謹密)했습니다. 때문에 나라에서 시취(試取)할 때도 반드시 경서를 강하게 할 것을 청했었고, 구두(句讀)와 음석(音釋)에 모두 정해 놓은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균관 관원이 시관(試官)이 되어 취사(取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생들이 반드시 성균관에서 강습(講習)하게 되었고 남에게 뒤질세라 노력했습니다. 신도 별시에서 급제(及第)했습니다. 극증(克增)이 ‘사서 삼경(四書三經) 이상을 대략 달통한 자는 전시(殿試)133) 에 나갈 수 있게 하자.’는 아룀에 힘입어 전시에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사람들이 《주역(周易)》을 배우지 않자, 극증이 《주역》에 통한 사람은 점수를 배로 주자고 청했습니다. 이로부터 《주역》을 해득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대저 인재를 배양하는 데는 반드시 사장(師長)이 마음을 다한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 유생들은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經傳) 읽기를 사기(史記) 읽듯 하는가 하면 각각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기 때문에 지리 멸렬해가는 상태가 날로 심해지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성균관 관원을 임명할 때는 반드시 경학에 통달한 사람을 뽑을 것이고,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도 간간이 임명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재를 배양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쪽을 완전히 폐기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5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51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註 129] 옥백(玉帛) : 예물.
- [註 130] 구임(久任) : 문무관은 그 품계나 직책에 따라 일정한 재임 기간이 있다. 그러나 그 직무의 중요도 및 능력을 감안해서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상당한 기간 근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註 131] 특진관(特進官) : 경연(經筵)에 참예하는 임시 벼슬로 성종(成宗) 때 창설되었다. 현직 3품 이상의 문관이나 2품 이상의 문무관과 음관(蔭官)으로 의정부·육조·한성부의 직을 역임한 사람을 임명했다.
- [註 132] 별시(別試)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나 또는 병년(丙年)마다 행하던 문무(文武)의 과거(科擧).
- [註 133] 전시(殿試) : 문과(文科)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33명과 무과(武科) 복시에서 선발된 28명을 궐정(闕庭)에 불러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보이던 시험으로, 이때는 합격자의 등급만 정했다. 문과는 갑과(甲科) 3인,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으로 등급을 정하고, 무과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등급을 정한다.
원문
○甲午/御朝講。 參贊官趙邦彦曰: "禮之文質, 不可偏廢, 而質尤爲重。 故曰: ‘禮, 與其奢也, 寧儉。’ 後世之禮樂, 固不能如古, 而樂尤廢焉。 古者, 宴諸侯朝聘之禮, 必用樂者, 所以宣上德, 而達下情也。 祖宗朝赴京使臣及出使者賜宴, 必竝賜樂, 以餞慰之。 有災之時, 則已矣, 不然則時時賜宴, 不妨。" 領事權鈞曰: "禮樂, 豈獨行於朝廷哉? 有一身之禮樂; 有一家之禮樂, 父慈子孝、兄友弟恭, 一家和睦, 此, 禮樂之行於家者也; 發必中節、體信達順, 此, 禮樂之行於身者也。 人主, 必先修一身之禮樂然後, 至於家國、鄕黨, 推之於天下, 莫不皆然, 而修齊平治之效, 成矣。 故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禮樂之本, 在乎一身, 禮必以文爲則失之於采, 樂必以器數則失之於蕩, 禮樂之興, 必尋其本而已矣。" 上謂許硡曰: " 【硡時爲吏曹判書。】 成均館, 師表之地, 不可不擇差師儒, 亦必加選, 使無闕員可也。" 許硡對曰: "近未見可任師表者。 觀前抄師儒錄, 皆有名望人也。 俱合於敎誨, 而用之於臺諫、侍從, 故不久任。 學者, 徒仰慕重望, 而實無敎誨之功。 臣觀成廟朝館官, 不必有名望, 而以敎誨爲任者多矣, 今則未見其堪爲訓誨者。 設使, 有粗通經書者, 必盡心其任然後, 可也。 近者以李謙爲粗通經書, 而爲司成, 視他人則有優, 但未知盡心與否也。 古者, 同知及司成、司藝, 逐日仕進, 專以敎誨爲任, 猶恐不及故多有實效。 近聞, 姜胤通於經學, 且識字, 可任敎誨, 而爲典籍, 適被論見遞。 學校之弊, 朝廷所知。 臣亦豈不欲, 擇可任者任之哉? 時未聞其人, 故未能耳。" 特進官方有寧曰: "儒者不勤於業, 弊習已成。 近者, 通讀《大學》、《中庸》, 今至於《論語》, 其勤學與否, 未可知也。 古者雖別試, 必講經, 故性理之學, 雖不易得, 而句讀之學, 多有通熟者。 近者別試, 屢不講經, 故句讀, 亦未能通曉, 至爲憂慮。 臣有病且年老、眼暗, 請遞臣職, 而以可當者差之, 庶見實效矣。" 許硡曰: "成廟朝李克增爲成均館同知, 雖別試, 必講經, 故多有通經之士。 今則雖句讀之學, 亦絶, 深可慮也。" 權鈞曰: "成廟朝, 臣以生員居館。 其時李克增爲同知; 潘佑亨、李文亨等爲館官, 各分授訓下, 敎誨之方甚爲勤密。 國家試取, 必請講經, 句讀、音釋, 皆有定規。 館官必爲試官, 而取舍之, 故儒者講習, 必於學宮, 猶恐不及, 臣亦爲別試及第。 因克增啓 ‘以粗通四書三經以上者, 許赴殿試。’ 且其時人不學《易傳》, 克增啓請通《易傳》者倍畫, 而自此, 多有解《易》者, 大抵, 作成人才, 必師長盡心然後, 方可收效。 近來, 儒者多不務經學, 讀經傳如覽《史記》, 各執己見, 滅裂日甚, 至爲可慮。 委任館官, 必擇通經學, 或善詞章者, 間任之, 使之培養, 不至偏廢甚當。"
- 【태백산사고본】 29책 5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51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중종실록57권, 중종 21년 5월 12일 甲午 1/5 기사 / 1526년 명 가정(嘉靖) 5년
조강에서 예악의 시행과 성규관의 사유 선발 문제를 논의하다
국역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조방언(趙邦彦)이 아뢰기를,
"예(禮)의 격식과 정성은 어느 한쪽만을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이 더욱 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어(論語)》에 ‘예를 사치스럽게 할 바에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는 것이 낫다.’ 했습니다. 후세의 예악(禮樂)이 진실로 옛날 같을 수는 없지만 악(樂)이 더욱 치우치게 폐기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조빙(朝聘) 온 제후(諸侯)에게 연회를 베푸는 예(禮)에는 반드시 악을 썼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의 덕을 선양하고 아랫사람의 마음을 통달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조종조 적에도 경사(京師)로 가는 사신과 사명(使命)을 띠고 외방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연회를 내릴 때는 반드시 악도 아울러 내려 전별했었습니다. 재변(災變)이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시로 연회를 내리는 것도 해롭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권균(權鈞)은 아뢰기를,
"예악이 어찌 조정에서만 시행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신(一身)의 예악과 일가(一家)의 예악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럽고 형은 우애 있고 아우는 공경하여 일가가 화목한 것은 바로 예악이 일가에 행해진 소치입니다. 이치를 체득하고 화기(和氣)에 통하여 모든 언행(言行)이 절로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예악이 일신에 행해진 소치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먼저 일신의 예악을 닦은 뒤에 향당(鄕黨)과 국가에까지 미쳐가야 합니다. 이렇게 미루어 나가면 천하까지도 모두 교화시킬 수 있고, 따라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공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禮)라고 떠들지만 옥백(玉帛)129)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악(樂)이라고 떠들지만 반드시 종고(鍾鼓)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했습니다. 예악의 근본은 일신에 있는 것으로, 예를 반드시 격식으로만 한다면 화려한 데 빠지고 악을 반드시 악기(樂器)의 숫자로만 한다면 방탕에 빠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악을 흥기시키려면 반드시 그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허굉(許硡) 【이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었다.】 에게 이르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일국의 사표(師表)가 되는 곳이니 사유(師儒)를 가려서 임명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반드시 더 선발해 둠으로써 궐원(闕員)이 없도록 하라."
하매, 허굉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사유에 임명할 만한 사람을 못보았습니다. 전에 초(抄)해 놓은 사유록(師儒錄)을 살펴보니 모두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敎誨)에 합당하지만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기용되었기 때문에 구임(久任)130)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들은 중망(重望)을 우러러 사모만 할 뿐 실제로 교회하는 공효는 없습니다. 신이 성종조(成宗朝) 때 성균관 관원을 살펴보니 반드시 명망이 있지 않았어도 교회의 직임을 맡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할 만한 사람을 못보겠습니다. 설사 경서(經書)를 대략 통달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그 직임에 마음을 다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근래 이겸(李謙)이 경서에 대략 통달했다 해서 사성(司成)에 임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훌륭합니다만 마음을 다하는 데 대한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동지(同知)와 사성(司成)·사예(司藝)가 날마다 사진(仕進)하여 오로지 교회(敎誨)만을 임무로 삼았지만 오히려 미흡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므로 실효(實效)가 많았습니다. 근래 듣기로는 강윤(姜胤)이 경학(經學)에 통달하였고 문장도 잘하므로 교회를 맡길 만하다 해서 전적(典籍)에 임명했습니다만 마침 논박받아 체직되었다고 합니다. 학교(學校)의 폐단은 조정에서도 알고 있는 바이니, 신 또한 어찌 맡길 만한 사람을 가려서 맡기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직 적격자를 못보았기 때문에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131) 방유령(方有寧)은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학업에 근면하지 않는 것이 이미 폐습을 이루었습니다. 근래 《대학(大學)》·《중용(中庸)》을 통독(通讀)했고 지금은 《논어(論語)》를 통독하고 있습니다만, 학업에 근면한 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별시(別試)132) 를 보일 때도 반드시 경서(經書)를 강하게 했었습니다.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을 잘하는 사람은 얻기가 어려웠지만 구두학(句讀學)에 숙달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근래에는 별시를 보일 적에도 자주 경서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구두학에 통달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니 지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신은 병들고 연로(年老)한데다 눈까지 어두우니 신의 직(職)을 갈고 합당한 사람을 임명하소서. 그러면 실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굉은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 이극증(李克增)이 성균관 동지(成均館同知)로 있을 적에는 별시를 보이면서도 반드시 경서를 강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경서에 통한 선비가 많았었습니다. 지금은 구두학마저도 끊어져 버렸으니 매우 걱정됩니다."
하고, 권균은 아뢰기를,
"성종조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극증이 동지(同知)로 있었고 반우형(潘佑亨)·이문형(李文亨) 등이 성균관 관원으로 있으면서 각각 나누어 유생들을 훈도했으므로 교회하는 방법에 매우 근밀(謹密)했습니다. 때문에 나라에서 시취(試取)할 때도 반드시 경서를 강하게 할 것을 청했었고, 구두(句讀)와 음석(音釋)에 모두 정해 놓은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균관 관원이 시관(試官)이 되어 취사(取捨)했습니다. 그러므로 유생들이 반드시 성균관에서 강습(講習)하게 되었고 남에게 뒤질세라 노력했습니다. 신도 별시에서 급제(及第)했습니다. 극증(克增)이 ‘사서 삼경(四書三經) 이상을 대략 달통한 자는 전시(殿試)133) 에 나갈 수 있게 하자.’는 아룀에 힘입어 전시에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사람들이 《주역(周易)》을 배우지 않자, 극증이 《주역》에 통한 사람은 점수를 배로 주자고 청했습니다. 이로부터 《주역》을 해득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대저 인재를 배양하는 데는 반드시 사장(師長)이 마음을 다한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 유생들은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經傳) 읽기를 사기(史記) 읽듯 하는가 하면 각각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기 때문에 지리 멸렬해가는 상태가 날로 심해지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성균관 관원을 임명할 때는 반드시 경학에 통달한 사람을 뽑을 것이고,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도 간간이 임명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재를 배양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쪽을 완전히 폐기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5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51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註 129] 옥백(玉帛) : 예물.
- [註 130] 구임(久任) : 문무관은 그 품계나 직책에 따라 일정한 재임 기간이 있다. 그러나 그 직무의 중요도 및 능력을 감안해서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상당한 기간 근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註 131] 특진관(特進官) : 경연(經筵)에 참예하는 임시 벼슬로 성종(成宗) 때 창설되었다. 현직 3품 이상의 문관이나 2품 이상의 문무관과 음관(蔭官)으로 의정부·육조·한성부의 직을 역임한 사람을 임명했다.
- [註 132] 별시(別試)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나 또는 병년(丙年)마다 행하던 문무(文武)의 과거(科擧).
- [註 133] 전시(殿試) : 문과(文科)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33명과 무과(武科) 복시에서 선발된 28명을 궐정(闕庭)에 불러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보이던 시험으로, 이때는 합격자의 등급만 정했다. 문과는 갑과(甲科) 3인,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으로 등급을 정하고, 무과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등급을 정한다.
원문
○甲午/御朝講。 參贊官趙邦彦曰: "禮之文質, 不可偏廢, 而質尤爲重。 故曰: ‘禮, 與其奢也, 寧儉。’ 後世之禮樂, 固不能如古, 而樂尤廢焉。 古者, 宴諸侯朝聘之禮, 必用樂者, 所以宣上德, 而達下情也。 祖宗朝赴京使臣及出使者賜宴, 必竝賜樂, 以餞慰之。 有災之時, 則已矣, 不然則時時賜宴, 不妨。" 領事權鈞曰: "禮樂, 豈獨行於朝廷哉? 有一身之禮樂; 有一家之禮樂, 父慈子孝、兄友弟恭, 一家和睦, 此, 禮樂之行於家者也; 發必中節、體信達順, 此, 禮樂之行於身者也。 人主, 必先修一身之禮樂然後, 至於家國、鄕黨, 推之於天下, 莫不皆然, 而修齊平治之效, 成矣。 故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禮樂之本, 在乎一身, 禮必以文爲則失之於采, 樂必以器數則失之於蕩, 禮樂之興, 必尋其本而已矣。" 上謂許硡曰: " 【硡時爲吏曹判書。】 成均館, 師表之地, 不可不擇差師儒, 亦必加選, 使無闕員可也。" 許硡對曰: "近未見可任師表者。 觀前抄師儒錄, 皆有名望人也。 俱合於敎誨, 而用之於臺諫、侍從, 故不久任。 學者, 徒仰慕重望, 而實無敎誨之功。 臣觀成廟朝館官, 不必有名望, 而以敎誨爲任者多矣, 今則未見其堪爲訓誨者。 設使, 有粗通經書者, 必盡心其任然後, 可也。 近者以李謙爲粗通經書, 而爲司成, 視他人則有優, 但未知盡心與否也。 古者, 同知及司成、司藝, 逐日仕進, 專以敎誨爲任, 猶恐不及故多有實效。 近聞, 姜胤通於經學, 且識字, 可任敎誨, 而爲典籍, 適被論見遞。 學校之弊, 朝廷所知。 臣亦豈不欲, 擇可任者任之哉? 時未聞其人, 故未能耳。" 特進官方有寧曰: "儒者不勤於業, 弊習已成。 近者, 通讀《大學》、《中庸》, 今至於《論語》, 其勤學與否, 未可知也。 古者雖別試, 必講經, 故性理之學, 雖不易得, 而句讀之學, 多有通熟者。 近者別試, 屢不講經, 故句讀, 亦未能通曉, 至爲憂慮。 臣有病且年老、眼暗, 請遞臣職, 而以可當者差之, 庶見實效矣。" 許硡曰: "成廟朝李克增爲成均館同知, 雖別試, 必講經, 故多有通經之士。 今則雖句讀之學, 亦絶, 深可慮也。" 權鈞曰: "成廟朝, 臣以生員居館。 其時李克增爲同知; 潘佑亨、李文亨等爲館官, 各分授訓下, 敎誨之方甚爲勤密。 國家試取, 必請講經, 句讀、音釋, 皆有定規。 館官必爲試官, 而取舍之, 故儒者講習, 必於學宮, 猶恐不及, 臣亦爲別試及第。 因克增啓 ‘以粗通四書三經以上者, 許赴殿試。’ 且其時人不學《易傳》, 克增啓請通《易傳》者倍畫, 而自此, 多有解《易》者, 大抵, 作成人才, 必師長盡心然後, 方可收效。 近來, 儒者多不務經學, 讀經傳如覽《史記》, 各執己見, 滅裂日甚, 至爲可慮。 委任館官, 必擇通經學, 或善詞章者, 間任之, 使之培養, 不至偏廢甚當。"
- 【태백산사고본】 29책 5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6책 51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