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31권, 중종 13년 1월 12일 壬子 2/4 기사 /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검토관 기준이 친경하는 일을 폐지할 수 없음을 아뢰다
국역
석강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대저 후비(后妃)가 친잠(親蠶)을 하고 천자(天子)가 친경(親耕)을 하는 것은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농상(農桑)이 근본이 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유년002) 이후로는 다시 친경을 하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본업(本業)을 버리고 말업(末業)을 따릅니다. 만일 위에서 몸소 솔선하신다면 아래에서 혹 감화(感化)될 것입니다. 사직(社稷)에 친제(親祭)하겠다는 분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친경하는 일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근래 백성들이 대부분 게을러서 본업을 힘쓰는 자가 적은데 상께서 몸소 친경을 행하여 백성에게 솔선을 보이시고자 하니 그 뜻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백성에게 솔선을 보이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태평(太平)을 가송(歌頌)하는 도구로만 여기니, 이는 태평을 지나치게 꾸미는 것인 듯합니다. 사민(四民)003) 가운데 농민이 가장 괴롭습니다. 그들은 1년 내내 부지런히 노동해도 끝내 먹을 것이 없지만 말업(末業)을 좇는 자들은 하는 일이 그리 고되지 않고서도 의식이 넉넉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말업을 따르기를 좋아합니다. 대저 왕자(王者)가 도읍을 정할 때는 조정을 앞에 세우고 저자는 뒤에 설치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옛날의 제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제도로 본다면 종루(鐘樓)에서 종묘(宗廟)에 이르기까지를 시전(市廛)으로 했는데 지금은 방방곡곡이 모두 저자 아닌 곳이 없으므로 이 때문에 물가가 치솟으니, 말업을 따르는 풍조를 금하여 본업을 힘쓰게 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먹을 것이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바이니 농사일이 가장 중대하지만, 말업을 따르는 사람을 일체 금한다면 곤궁한 백성이 생활할 길이 없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원문
○御夕講。 檢討官奇遵曰: "大抵后妃親蠶, 天子親耕, 上爲孝祀, 下以示民, 以農桑爲本之意也。 自癸酉以後, 不復親耕, 民皆捨本而逐末矣。 若能以身先之, 則下或感化矣。 親祭社稷之命, 此誠美事也, 然親耕事, 亦不可廢也。" 南袞曰: "近來民多惰游, 務本者少。 欲上躬行以率下, 此意美矣, 但下人不知身先率下之義, 但以爲歌頌太平之具, 則似乎賁飾太平。 四民之中, 惟農最苦, 終歲勤動, 而終無所食。 若逐末者, 則其爲事也, 不至困苦, 而衣食亦足, 故人皆樂於趨末也。 夫王者定都, 前朝後市, 乃古制也。 以我國之制見之, 則自鍾樓至宗廟, 爲市廛, 而今則坊坊曲曲無不出市之地。 以此而物價踴貴。 須禁抑逐末, 以示務本之意也。" 上曰: "食爲民天, 農事爲大, 逐末之人, 若一切禁之, 則窮民恐不得資生也。"
중종실록31권, 중종 13년 1월 12일 壬子 2/4 기사 /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검토관 기준이 친경하는 일을 폐지할 수 없음을 아뢰다
국역
석강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대저 후비(后妃)가 친잠(親蠶)을 하고 천자(天子)가 친경(親耕)을 하는 것은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농상(農桑)이 근본이 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유년002) 이후로는 다시 친경을 하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본업(本業)을 버리고 말업(末業)을 따릅니다. 만일 위에서 몸소 솔선하신다면 아래에서 혹 감화(感化)될 것입니다. 사직(社稷)에 친제(親祭)하겠다는 분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친경하는 일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근래 백성들이 대부분 게을러서 본업을 힘쓰는 자가 적은데 상께서 몸소 친경을 행하여 백성에게 솔선을 보이시고자 하니 그 뜻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백성에게 솔선을 보이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태평(太平)을 가송(歌頌)하는 도구로만 여기니, 이는 태평을 지나치게 꾸미는 것인 듯합니다. 사민(四民)003) 가운데 농민이 가장 괴롭습니다. 그들은 1년 내내 부지런히 노동해도 끝내 먹을 것이 없지만 말업(末業)을 좇는 자들은 하는 일이 그리 고되지 않고서도 의식이 넉넉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말업을 따르기를 좋아합니다. 대저 왕자(王者)가 도읍을 정할 때는 조정을 앞에 세우고 저자는 뒤에 설치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옛날의 제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제도로 본다면 종루(鐘樓)에서 종묘(宗廟)에 이르기까지를 시전(市廛)으로 했는데 지금은 방방곡곡이 모두 저자 아닌 곳이 없으므로 이 때문에 물가가 치솟으니, 말업을 따르는 풍조를 금하여 본업을 힘쓰게 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먹을 것이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바이니 농사일이 가장 중대하지만, 말업을 따르는 사람을 일체 금한다면 곤궁한 백성이 생활할 길이 없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원문
○御夕講。 檢討官奇遵曰: "大抵后妃親蠶, 天子親耕, 上爲孝祀, 下以示民, 以農桑爲本之意也。 自癸酉以後, 不復親耕, 民皆捨本而逐末矣。 若能以身先之, 則下或感化矣。 親祭社稷之命, 此誠美事也, 然親耕事, 亦不可廢也。" 南袞曰: "近來民多惰游, 務本者少。 欲上躬行以率下, 此意美矣, 但下人不知身先率下之義, 但以爲歌頌太平之具, 則似乎賁飾太平。 四民之中, 惟農最苦, 終歲勤動, 而終無所食。 若逐末者, 則其爲事也, 不至困苦, 而衣食亦足, 故人皆樂於趨末也。 夫王者定都, 前朝後市, 乃古制也。 以我國之制見之, 則自鍾樓至宗廟, 爲市廛, 而今則坊坊曲曲無不出市之地。 以此而物價踴貴。 須禁抑逐末, 以示務本之意也。" 上曰: "食爲民天, 農事爲大, 逐末之人, 若一切禁之, 則窮民恐不得資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