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96권, 성종 17년 10월 19일 庚寅 5/7 기사 /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한명회 등이 각포에 성보를 쌓는 일의 편부를 의논하다
국역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만호(萬戶)인 수군(水軍)은 물위에 오래 있게 하더라도 군기(軍器)는 물위에 둘 수 없다. 이제 성을 쌓고자 하는데, 전일에 대사헌(大司憲)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성을 쌓는 것은 군기를 간수하기 위한 것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과 의정부(議政府)·대사헌(大司憲)과 전에 그 도를 거친 재상(宰相)을 불러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증(李克增)·이극균(李克均)·이극돈(李克墩)이 의논하기를,
"수영(水營)을 둔 것은 본래 물위에서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기(軍器)와 군량(軍糧) 따위 물건이 매우 많으므로, 다 배 위에 실을 수 없고 또한 갑자기 날라다가 쓸 수도 없습니다. 배 위에서 이롭지 못하면, 장졸(將卒)이 갈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 있는 물건도 한 개의 횃불에 불타서 없어질 것인데, 용맹한 장수와 굳센 군졸과 노련한 사공이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르기를, ‘이제 성을 쌓으면, 만호가 오랫동안 성안에 있게 될 것이니, 만호를 둔 본의에 어그러진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 위에서 이롭지 못하여 한 번에 패하여 없어지는 것이 성에 의거하여 스스로 지키면서 원병(援兵)을 기다리는 것만 못한데, 도둑도 어찌 갑자기 깊이 들어오겠습니까? 또 그 때에 성은 없었으나 만호가 반드시 물위에 오래 있지 않았는데, 감사(監司)·수사(水使)가 알면서도 금하지 못한 것은 그 형세가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각포에 성보를 쌓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신이 전에 의논할 때 다 아뢰었으니, 어찌 감히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성보를 쌓는 것은 군기(軍器)와 육물(陸物)을 간수한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면 반드시 만호가 자고 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 육진(陸鎭)을 두기도 하고 수진(水鎭)을 두기도 하여 수륙(水陸)으로 적과 서로 버티어 태평한 지 1백 년이 되었는데, 한 사람이 건의한 계책 때문에 조종의 성헌(成憲)을 쉽사리 고치니, 신은 참으로 통분합니다."
하고, 정괄(鄭佸)·김겸광(金謙光)·이숭원(李崇元)·박성손(朴星孫)이 의논하기를,
"국가에서 수진·육진을 두어서 방비하되, 육진은 성지(城池)를 축설(築設)하여 굳게 하고, 수영(水營)은 만호가 수군을 거느리고 물위에 오래 있으면서 늘 적이 오는 것처럼 수전(水戰)을 익힙니다. 이제 군기와 육물(陸物)을 간수하려고 성을 쌓는다면, 만호가 성안에 오래 있어 배 위에 있는 기계(器械)는 전혀 수정(修整)되지 않을 것이며, 적이 오더라도 혹 나가서 막지 않고, 나가서 막더라도 조금만 이롭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갑자기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고 힘껏 싸우지 않을 것이므로, 병선(兵船)은 마침내 적에게 불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육물과 병기(兵器)를 지키려다가 병선을 버리는 것입니다. 조종조부터 수진에는 성을 쌓지 않았는데, 어찌 지혜가 미치지 못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대개 수군이 배 위에 오래 있으면서 기회에 따라 변고에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예전대로 두고 쌓지 않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유순(柳洵)·오순(吳純)이 의논하기를,
"당초 각포에 진을 두되 성보를 만들지 않은 것은 왜구(倭寇)가 바야흐로 치성하므로 장졸(將卒)이 병기와 양식을 가지고 늘 물위에 있으면서 왜구가 온 것처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을 다 배 안에 둘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육진에 잠시 초옥(草屋)을 두어서 간수하여야 합니다. 만약에 성보가 없이 방어하다가 혹 적병이 갑자기 육지에 올라와 먼저 군량을 불태워 없앤다면, 이것은 먼저 방비할 도구를 잃는 것이니, 석보(石堡)를 두어 병기와 군량을 간수하는 곳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장졸이 물을 버리고 육지로 나가서 스스로 편안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늘 배를 부려 싸움을 익히도록 법령에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긴요한 곳을 가려서 성을 쌓고 우환에 대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이경동(李瓊仝)이 의논하기를,
"전조(前朝)648) 의 말기에 왜란(倭亂)이 극심하였습니다. 하삼도(下三道)만이 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개성(開城)의 황교(黃橋)까지도 널리 도둑의 숲이 되었는데, 고로(古老)가 서로 전하기를, ‘최영(崔瑩)이 오정문(午正門)에서 갑옷을 입고 방어하였다.’ 하니, 그 위태로왔던 것을 알 만합니다. 그러하였던 까닭은 연해(沿海)에 굳은 방어가 없어서 적왜(賊倭)의 출몰이 무상하여도 조정(朝廷)에서 방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몸에 입고 전진(戰陣)에 출입하며 추악한 무리를 섬멸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성대한 공덕(功德)으로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두루 맛보고 환난을 염려함이 깊어 수군을 창설하여서 견고하게 유지하셨으므로, 태평한 1백 년 동안 백성이 병난(兵難)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편안한 데에 익숙하여 장졸이 해이하므로, 바로 확장(擴張)을 책려(策勵)하여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지키되 오히려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의 말에 따라 물위의 군사를 성안의 군사로 만들어 조종의 성헌이 장차 어지럽게 변경되겠으니, 어찌 매우 아깝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성보를 설치하는 것이 병기와 육물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하나,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힘드는 것을 싫어하므로, 장차 만호와 군졸 중에서 권세를 부리는 자는 다 성안에 살면서 약한 군졸을 시켜 배를 지킴을 보게 될 것인데, 엄한 형벌을 세워서 금하더라도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요해지(要害地)를 가려서 성을 쌓더라도 장차 열진(列鎭)에서 어지럽게 진정하여 이 전례에 따라 쌓는 것을 볼 것인데, 누가 능히 홀로 배 위에 있으면서 수전(水戰)의 준비를 하겠습니까? 연해(沿海)의 땅에 백만의 백성이 번성하여 즐비한데, 만호로 하여금 성에 의거하여 스스로 보전하게 한다면, 농민이 장차 어디에 의뢰하여 생업을 하겠습니까? 만호는 배 위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는 하나, 그들로 하여금 수군의 장수라는 것을 알고 수전(水戰)의 준비를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오히려 성을 지키며 스스로 안일한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또 적국(敵國)은 늘 형세를 가지고 승부(勝負)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연해의 요해지에 수군을 두어 서로 버티어 온 1백 년 동안은 패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성을 쌓아 스스로 지키면 어찌 약한 것을 보여서 모욕당하지 않겠습니까? 왜적으로 하여금 육지에 내리게 한다면 만호가 선군(船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안에 있더라도 단연코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약탈하게 한다면 만호가 선군을 거느리더라도 겨우 스스로 보전할 것인데, 어떻게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겠습니까? 지금은 오랑캐가 신하로서 붙좇아 계속하여 조회하러 오므로 신이 말하는 것은 염려스럽지 않으나, 다만 만세(萬世) 뒤에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져서 혹 떨치지 못하게 되는 폐단이 있을 때에 근원이 된 까닭을 추구하여 성을 쌓은 계책이 전하로부터 비롯된 것을 식자(識者)가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성보를 설치하는 것은 군기(軍器)와 육물(陸物)을 간수하기 위한 것이고, 만호가 거처할 곳이 아니다. 처음에 조숙기(曺淑沂)의 말에 의해서 좌의정(左議政)을 보내어 요해지를 살펴서 쌓게 하였을 뿐이고, 모든 포(浦)에 다 쌓게 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예종(睿宗) 때에 신이 남방(南方)에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여러 포소(浦所)를 순행하여서 살폈는데, 배 안에 늘 거처하지 못하고 육지에 거처하였습니다. 왜구가 밤을 타고 몰래 와서 곧바로 포소에 닿으면 군민(軍民)을 남김없이 죽일 것인데, 이제 성을 쌓으면 아마도 이 화(禍)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이미 거행되었으니, 멈출 수 없다. 뒤에 만약에 변고가 있으면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19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51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
- [註 648] 전조(前朝) : 고려(高麗).
원문
○傳于承政院曰: "萬戶、水軍雖令長在水上, 然軍器不可置水上也。 今欲築城, 而前日大司憲, 言其不可築城爲藏軍器也, 其召議領敦寧以上、議政府、大司憲、曾經其道宰相。" 韓明澮、沈澮、尹弼商、李克增、李克均、李克墩議: "設水營, 本欲水上防禦也。 然軍器軍糧等物甚多, 不能盡載船上, 亦不能倉卒運用也。 若船上失利, 則非徒將卒無所於歸, 在陸之物, 亦爲一炬所焚蕩, 雖猛將勁卒老手篙師, 亦無如之何矣。 議者謂: ‘今若築城, 則萬戶長在城中, 有乖設萬戶本意。’ 此言似然而實不然。 與其船上失利而一敗塗地, 不如據城自守以待援兵。 賊亦豈遽深入? 且當時雖無城, 萬戶必不長在水上, 監司水使雖知, 亦不能禁者, 以其勢不能也。" 李克培議: "各浦築堡不可。 臣於前議已盡, 豈敢有他說? 議者以謂: ‘築堡不過藏軍器、陸物之所。’ 臣以謂如此則必爲萬戶寢息之所。 祖宗朝, 或置陸鎭, 或置水鎭, 水陸相持, 昇平百年, 以一人建策, 輕改祖宗成憲, 臣實痛憤。" 鄭佸、金謙光、李崇元、朴星孫議: "國家設水陸鎭以備禦, 陸鎭則築設城池以爲固, 水營則萬戶領水軍長在水上, 常若敵至, 以習水戰也。 今欲藏軍器、陸物而築城,則萬戶長在城中, 船上器械專不修整, 雖有敵至, 或不出禦, 雖或出禦, 少有不利, 輒奔入城, 必不力戰, 兵船終爲敵人焚蕩。 是欲守陸物兵器而棄兵船也。 自祖宗朝, 水鎭不築城, 豈智有所不及哉? 蓋欲使水軍長在船上, 應機備變也。 仍舊勿築爲便。" 柳洵、吳純議: "當初各浦設鎭不爲城堡者, 以倭寇方熾, 欲令將卒, 持兵器糧餉常在水上, 以擬其來也。 然兵器軍糧不可盡在船中, 不得已於陸鎭暫設草屋以藏之。 若無城堡以防之, 脫有賊兵飄忽乘陸, 先焚蕩兵糧, 則是先失備禦之具矣。 設爲石堡, 以爲藏兵器軍糧之所爲便。 議者云: ‘如是則將卒將棄水就陸以自便。’ 是大不然。 常時行船習戰, 法令具在, 豈能自便乎? 先擇緊要處築城, 備患何如?" 李瓊仝議: "前朝之季, 倭亂極矣, 非唯下三道受害, 至於開城 黃橋, 漫爲賊藪。 古老相傳, 崔瑩坐甲於午正門而禦之, 其岌岌可知。 其所以然者, 沿海無防戍之固, 而賊倭出沒無常, 朝廷莫得以隄備之也。 我太祖躬擐甲冑, 出入戰陣, 殄殲醜類, 拯救生靈, 功德之盛。 化家爲國, 歷試諸難, 慮患也深。 創置水軍, 維持鞏固, 太平百年, 民不見兵。 今者狃於宴安, 將卒緩弛, 正宜策勵張皇, 以守祖宗之成憲, 猶恐其不至。 乃因議者之言, 以水上之軍爲城裏之兵, 祖宗成憲將至紛更, 豈不甚可惜哉? 今雖曰設堡所以衛兵器及陸物而止耳, 然人情莫不好安而惡(勢)〔勞〕 , 將見萬戶與軍卒之用事者, 皆居城中, 以弱卒守船。 雖立嚴刑以禁之, 勢不得不爾。 今雖擇要害處築城, 將見列鎭紛然陳請, 據此例築之, 誰能獨在船上爲水戰之備乎? 沿海之地百萬生齒, 繁育櫛(此)〔比〕 , 而使萬戶據城自保, 則農民將何倚賴而生業乎? 雖曰萬戶不能長在船上, 然使之知其爲水軍之將, 而不忘水戰之備, 不猶愈於保城而自逸乎? 且敵國常以形勢爲勝負, 國家設水軍於沿海要害之處, 相持百年, 未有敗事。 今遽築城自守, 豈不示弱而見侮乎? 若使倭賊下陸, 則雖萬戶率船軍數百人在城中, 斷不能擐甲而出鬪明矣。 使倭賊分軍而抄略, 則雖萬戶與船軍僅能自保, 何救於萬民之命乎? 今夷獠臣附絡繹來朝, 臣之所言保無可慮。 但恐萬世之後, 紀綱漸弛, 或有不振之弊, 追究源由築城之策, 始自殿下, 安知不爲識者之寒心乎?" 傳曰: "設堡爲藏軍器、陸物, 非萬戶居處之所也。 初以曺淑沂之言, 遣左議政審要害處築之耳, 非盡築諸浦也。" 李克均啓曰: "睿宗朝, 臣爲節度使於南方, 巡審諸浦, 不能常處船中, 居于陸, 倭寇若乘夜潛來, 直抵浦所, 則屠殺軍民無遺。 今若築城, 庶免此禍矣。" 傳曰: "事已擧行, 不可停也。 後若有變, 當別有處置矣。"
- 【태백산사고본】 30책 19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51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
성종실록196권, 성종 17년 10월 19일 庚寅 5/7 기사 /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한명회 등이 각포에 성보를 쌓는 일의 편부를 의논하다
국역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만호(萬戶)인 수군(水軍)은 물위에 오래 있게 하더라도 군기(軍器)는 물위에 둘 수 없다. 이제 성을 쌓고자 하는데, 전일에 대사헌(大司憲)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성을 쌓는 것은 군기를 간수하기 위한 것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과 의정부(議政府)·대사헌(大司憲)과 전에 그 도를 거친 재상(宰相)을 불러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증(李克增)·이극균(李克均)·이극돈(李克墩)이 의논하기를,
"수영(水營)을 둔 것은 본래 물위에서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기(軍器)와 군량(軍糧) 따위 물건이 매우 많으므로, 다 배 위에 실을 수 없고 또한 갑자기 날라다가 쓸 수도 없습니다. 배 위에서 이롭지 못하면, 장졸(將卒)이 갈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 있는 물건도 한 개의 횃불에 불타서 없어질 것인데, 용맹한 장수와 굳센 군졸과 노련한 사공이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르기를, ‘이제 성을 쌓으면, 만호가 오랫동안 성안에 있게 될 것이니, 만호를 둔 본의에 어그러진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 위에서 이롭지 못하여 한 번에 패하여 없어지는 것이 성에 의거하여 스스로 지키면서 원병(援兵)을 기다리는 것만 못한데, 도둑도 어찌 갑자기 깊이 들어오겠습니까? 또 그 때에 성은 없었으나 만호가 반드시 물위에 오래 있지 않았는데, 감사(監司)·수사(水使)가 알면서도 금하지 못한 것은 그 형세가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각포에 성보를 쌓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신이 전에 의논할 때 다 아뢰었으니, 어찌 감히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성보를 쌓는 것은 군기(軍器)와 육물(陸物)을 간수한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면 반드시 만호가 자고 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 육진(陸鎭)을 두기도 하고 수진(水鎭)을 두기도 하여 수륙(水陸)으로 적과 서로 버티어 태평한 지 1백 년이 되었는데, 한 사람이 건의한 계책 때문에 조종의 성헌(成憲)을 쉽사리 고치니, 신은 참으로 통분합니다."
하고, 정괄(鄭佸)·김겸광(金謙光)·이숭원(李崇元)·박성손(朴星孫)이 의논하기를,
"국가에서 수진·육진을 두어서 방비하되, 육진은 성지(城池)를 축설(築設)하여 굳게 하고, 수영(水營)은 만호가 수군을 거느리고 물위에 오래 있으면서 늘 적이 오는 것처럼 수전(水戰)을 익힙니다. 이제 군기와 육물(陸物)을 간수하려고 성을 쌓는다면, 만호가 성안에 오래 있어 배 위에 있는 기계(器械)는 전혀 수정(修整)되지 않을 것이며, 적이 오더라도 혹 나가서 막지 않고, 나가서 막더라도 조금만 이롭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갑자기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고 힘껏 싸우지 않을 것이므로, 병선(兵船)은 마침내 적에게 불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육물과 병기(兵器)를 지키려다가 병선을 버리는 것입니다. 조종조부터 수진에는 성을 쌓지 않았는데, 어찌 지혜가 미치지 못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대개 수군이 배 위에 오래 있으면서 기회에 따라 변고에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예전대로 두고 쌓지 않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유순(柳洵)·오순(吳純)이 의논하기를,
"당초 각포에 진을 두되 성보를 만들지 않은 것은 왜구(倭寇)가 바야흐로 치성하므로 장졸(將卒)이 병기와 양식을 가지고 늘 물위에 있으면서 왜구가 온 것처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을 다 배 안에 둘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육진에 잠시 초옥(草屋)을 두어서 간수하여야 합니다. 만약에 성보가 없이 방어하다가 혹 적병이 갑자기 육지에 올라와 먼저 군량을 불태워 없앤다면, 이것은 먼저 방비할 도구를 잃는 것이니, 석보(石堡)를 두어 병기와 군량을 간수하는 곳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장졸이 물을 버리고 육지로 나가서 스스로 편안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늘 배를 부려 싸움을 익히도록 법령에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긴요한 곳을 가려서 성을 쌓고 우환에 대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이경동(李瓊仝)이 의논하기를,
"전조(前朝)648) 의 말기에 왜란(倭亂)이 극심하였습니다. 하삼도(下三道)만이 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개성(開城)의 황교(黃橋)까지도 널리 도둑의 숲이 되었는데, 고로(古老)가 서로 전하기를, ‘최영(崔瑩)이 오정문(午正門)에서 갑옷을 입고 방어하였다.’ 하니, 그 위태로왔던 것을 알 만합니다. 그러하였던 까닭은 연해(沿海)에 굳은 방어가 없어서 적왜(賊倭)의 출몰이 무상하여도 조정(朝廷)에서 방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몸에 입고 전진(戰陣)에 출입하며 추악한 무리를 섬멸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성대한 공덕(功德)으로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두루 맛보고 환난을 염려함이 깊어 수군을 창설하여서 견고하게 유지하셨으므로, 태평한 1백 년 동안 백성이 병난(兵難)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편안한 데에 익숙하여 장졸이 해이하므로, 바로 확장(擴張)을 책려(策勵)하여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지키되 오히려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의 말에 따라 물위의 군사를 성안의 군사로 만들어 조종의 성헌이 장차 어지럽게 변경되겠으니, 어찌 매우 아깝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성보를 설치하는 것이 병기와 육물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하나,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힘드는 것을 싫어하므로, 장차 만호와 군졸 중에서 권세를 부리는 자는 다 성안에 살면서 약한 군졸을 시켜 배를 지킴을 보게 될 것인데, 엄한 형벌을 세워서 금하더라도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요해지(要害地)를 가려서 성을 쌓더라도 장차 열진(列鎭)에서 어지럽게 진정하여 이 전례에 따라 쌓는 것을 볼 것인데, 누가 능히 홀로 배 위에 있으면서 수전(水戰)의 준비를 하겠습니까? 연해(沿海)의 땅에 백만의 백성이 번성하여 즐비한데, 만호로 하여금 성에 의거하여 스스로 보전하게 한다면, 농민이 장차 어디에 의뢰하여 생업을 하겠습니까? 만호는 배 위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는 하나, 그들로 하여금 수군의 장수라는 것을 알고 수전(水戰)의 준비를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오히려 성을 지키며 스스로 안일한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또 적국(敵國)은 늘 형세를 가지고 승부(勝負)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연해의 요해지에 수군을 두어 서로 버티어 온 1백 년 동안은 패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성을 쌓아 스스로 지키면 어찌 약한 것을 보여서 모욕당하지 않겠습니까? 왜적으로 하여금 육지에 내리게 한다면 만호가 선군(船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안에 있더라도 단연코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약탈하게 한다면 만호가 선군을 거느리더라도 겨우 스스로 보전할 것인데, 어떻게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겠습니까? 지금은 오랑캐가 신하로서 붙좇아 계속하여 조회하러 오므로 신이 말하는 것은 염려스럽지 않으나, 다만 만세(萬世) 뒤에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져서 혹 떨치지 못하게 되는 폐단이 있을 때에 근원이 된 까닭을 추구하여 성을 쌓은 계책이 전하로부터 비롯된 것을 식자(識者)가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성보를 설치하는 것은 군기(軍器)와 육물(陸物)을 간수하기 위한 것이고, 만호가 거처할 곳이 아니다. 처음에 조숙기(曺淑沂)의 말에 의해서 좌의정(左議政)을 보내어 요해지를 살펴서 쌓게 하였을 뿐이고, 모든 포(浦)에 다 쌓게 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예종(睿宗) 때에 신이 남방(南方)에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여러 포소(浦所)를 순행하여서 살폈는데, 배 안에 늘 거처하지 못하고 육지에 거처하였습니다. 왜구가 밤을 타고 몰래 와서 곧바로 포소에 닿으면 군민(軍民)을 남김없이 죽일 것인데, 이제 성을 쌓으면 아마도 이 화(禍)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이미 거행되었으니, 멈출 수 없다. 뒤에 만약에 변고가 있으면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19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51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
- [註 648] 전조(前朝) : 고려(高麗).
원문
○傳于承政院曰: "萬戶、水軍雖令長在水上, 然軍器不可置水上也。 今欲築城, 而前日大司憲, 言其不可築城爲藏軍器也, 其召議領敦寧以上、議政府、大司憲、曾經其道宰相。" 韓明澮、沈澮、尹弼商、李克增、李克均、李克墩議: "設水營, 本欲水上防禦也。 然軍器軍糧等物甚多, 不能盡載船上, 亦不能倉卒運用也。 若船上失利, 則非徒將卒無所於歸, 在陸之物, 亦爲一炬所焚蕩, 雖猛將勁卒老手篙師, 亦無如之何矣。 議者謂: ‘今若築城, 則萬戶長在城中, 有乖設萬戶本意。’ 此言似然而實不然。 與其船上失利而一敗塗地, 不如據城自守以待援兵。 賊亦豈遽深入? 且當時雖無城, 萬戶必不長在水上, 監司水使雖知, 亦不能禁者, 以其勢不能也。" 李克培議: "各浦築堡不可。 臣於前議已盡, 豈敢有他說? 議者以謂: ‘築堡不過藏軍器、陸物之所。’ 臣以謂如此則必爲萬戶寢息之所。 祖宗朝, 或置陸鎭, 或置水鎭, 水陸相持, 昇平百年, 以一人建策, 輕改祖宗成憲, 臣實痛憤。" 鄭佸、金謙光、李崇元、朴星孫議: "國家設水陸鎭以備禦, 陸鎭則築設城池以爲固, 水營則萬戶領水軍長在水上, 常若敵至, 以習水戰也。 今欲藏軍器、陸物而築城,則萬戶長在城中, 船上器械專不修整, 雖有敵至, 或不出禦, 雖或出禦, 少有不利, 輒奔入城, 必不力戰, 兵船終爲敵人焚蕩。 是欲守陸物兵器而棄兵船也。 自祖宗朝, 水鎭不築城, 豈智有所不及哉? 蓋欲使水軍長在船上, 應機備變也。 仍舊勿築爲便。" 柳洵、吳純議: "當初各浦設鎭不爲城堡者, 以倭寇方熾, 欲令將卒, 持兵器糧餉常在水上, 以擬其來也。 然兵器軍糧不可盡在船中, 不得已於陸鎭暫設草屋以藏之。 若無城堡以防之, 脫有賊兵飄忽乘陸, 先焚蕩兵糧, 則是先失備禦之具矣。 設爲石堡, 以爲藏兵器軍糧之所爲便。 議者云: ‘如是則將卒將棄水就陸以自便。’ 是大不然。 常時行船習戰, 法令具在, 豈能自便乎? 先擇緊要處築城, 備患何如?" 李瓊仝議: "前朝之季, 倭亂極矣, 非唯下三道受害, 至於開城 黃橋, 漫爲賊藪。 古老相傳, 崔瑩坐甲於午正門而禦之, 其岌岌可知。 其所以然者, 沿海無防戍之固, 而賊倭出沒無常, 朝廷莫得以隄備之也。 我太祖躬擐甲冑, 出入戰陣, 殄殲醜類, 拯救生靈, 功德之盛。 化家爲國, 歷試諸難, 慮患也深。 創置水軍, 維持鞏固, 太平百年, 民不見兵。 今者狃於宴安, 將卒緩弛, 正宜策勵張皇, 以守祖宗之成憲, 猶恐其不至。 乃因議者之言, 以水上之軍爲城裏之兵, 祖宗成憲將至紛更, 豈不甚可惜哉? 今雖曰設堡所以衛兵器及陸物而止耳, 然人情莫不好安而惡(勢)〔勞〕 , 將見萬戶與軍卒之用事者, 皆居城中, 以弱卒守船。 雖立嚴刑以禁之, 勢不得不爾。 今雖擇要害處築城, 將見列鎭紛然陳請, 據此例築之, 誰能獨在船上爲水戰之備乎? 沿海之地百萬生齒, 繁育櫛(此)〔比〕 , 而使萬戶據城自保, 則農民將何倚賴而生業乎? 雖曰萬戶不能長在船上, 然使之知其爲水軍之將, 而不忘水戰之備, 不猶愈於保城而自逸乎? 且敵國常以形勢爲勝負, 國家設水軍於沿海要害之處, 相持百年, 未有敗事。 今遽築城自守, 豈不示弱而見侮乎? 若使倭賊下陸, 則雖萬戶率船軍數百人在城中, 斷不能擐甲而出鬪明矣。 使倭賊分軍而抄略, 則雖萬戶與船軍僅能自保, 何救於萬民之命乎? 今夷獠臣附絡繹來朝, 臣之所言保無可慮。 但恐萬世之後, 紀綱漸弛, 或有不振之弊, 追究源由築城之策, 始自殿下, 安知不爲識者之寒心乎?" 傳曰: "設堡爲藏軍器、陸物, 非萬戶居處之所也。 初以曺淑沂之言, 遣左議政審要害處築之耳, 非盡築諸浦也。" 李克均啓曰: "睿宗朝, 臣爲節度使於南方, 巡審諸浦, 不能常處船中, 居于陸, 倭寇若乘夜潛來, 直抵浦所, 則屠殺軍民無遺。 今若築城, 庶免此禍矣。" 傳曰: "事已擧行, 不可停也。 後若有變, 當別有處置矣。"
- 【태백산사고본】 30책 19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151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