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69권, 성종 15년 8월 2일 丙辰 2/2 기사 /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대구 생원 서감원이 불교 억압·공론 용납을 하라는 봉서를 올리다
국역
경상도 대구(大丘) 사람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이 봉사(封事)618) 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당(唐)·우(虞)619) 의 일을 아름답게 여기고 상(商)620) ·주(周)의 일을 즐겁게 여기어 성색(聲色)621) 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유전(遊畋)622) 을 일삼지 아니하시며, 오직 경적(經籍)과 사전(史傳)을 날마다 앞에 접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갈 때마다 치도(治道)를 자문하시니, 치도의 융성함이 주(周)나라의 융성함과 나란히 달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천재(天災)가 유행(流行)하여 겨울에 천둥하고 여름에 우박이 내리며 가뭄이 잇달아서 기근이 거듭 이르러, 백성이 몸둘 곳을 잃고 아비와 아들이 서로 흩어지고 굶어 죽는 자가 거듭 쌓이며,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분경(奔競)623) 이 풍습을 이루어 간사한 자가 다투어 일어나고 도둑이 흥행(興行)하며, 강직한 신하는 초야에 물러가 있고 소원(疏遠)한 신하는 진용(進用)될 길이 없는데 궁정(弓旌)·옥백(玉帛)의 예(禮)624) 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으니, 무릇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주공(周公)이 임금을 보필할 때에 어진 사람을 만나기에 바빠서 감던 머리를 쥐고 먹던 음식을 뱉고 나가 접대하여 어진 자는 진용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물리쳤으며, 또 무일(無逸)625) 의 경계와 입정(立政)626) 의 글로 은근하게 간절히 아뢰어 성왕(成王)이 받아들였다 하는데, 지금의 재상(宰相)이 과연 주공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알 수 없으나, 위에서 아래에 대하는 것이 과연 성왕이 주공에게 대하는 것과 같으실 수 있겠습니까? 천변(天變)은 큰일이며 본디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함께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진실로 마땅한데, 지금 힘쓰는 것은 비를 빌고 술을 금하는 몇가지 일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국가의 사세(事勢)를 사람마다 다 말하기를, ‘화기(和氣)를 상할 수 있고 재변을 부를 수 있다.’ 하는데, 대신(大臣)이 아뢰지 않고 간관(諫官)이 논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신이 듣건대 《춘추(春秋)》에 한 마굿간을 고치거나 한 대(臺)를 쌓은 것까지도 반드시 썼으니, 그것은 민력(民力)을 과중하게 하여 토목 일에 애쓴 것으로 임금이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목일이 점점 더 일어나므로 따로 영선(營繕)을 맡은 곳을 세워 수리 도감(修理都監)이라 이름하여 나무를 나르고 돌을 옮기느라 외치는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 않고 백성의 집을 헐기까지 하여, 지아비가 그 처자를 보양할 줄 알지만 떠나려 해도 갈 곳이 없는 한탄이 있으니, 매우 불쌍히 여길 바입니다. 경복궁(景福宮)은 선조(先祖)께서 창건하신 것인데,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여기에서 수공(垂拱)627) 하고 여기에서 근정(勤政)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궁궐이 넉넉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원유(園囿)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닌데, 궁실(宮室)을 늘려 짓고 원유를 넓게 차지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신이 듣건대 이단(異端)이 그치지 않으면 오도(吾道)628) 가 밝아지지 않는다 합니다. 지금 중[僧]들이 인과(因果)629) 라는 설(說)로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며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어, 병졸의 액수(額數)를 줄이고 농민의 식량을 축내는데, 장차 어디에 쓸 것이기에 이를 위하여 과시(科試)도 베풀어 예조(禮曹)에서 먼저 뽑고 이조(吏曹)에서 뒤에 벼슬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도첩(度牒)630) 이 있는 중은 환속(還俗)시키지 말게 하고, 고탑(古塔)이 있는 절은 그에 따라 헐지 않으므로, 중들이 점점 번성하여 곳곳이 무수하고, 절이 날로 흥성하여 금벽(金璧)이 서로 빛나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하여 도첩이 있고 없는 것이나 고탑이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축수(祝壽)하는 재(齋)를 폐지하여 삼사(三寺)에서 천공(薦供)하는 물건을 없애고, 또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역대(歷代)의 부처를 배척한 소(疏)를 쓰게 하여, 온나라의 신민이 다 오도(吾道)가 날로 융성하고 이단(異端)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알도록 계도(啓導)하였으므로, 태평한 정치를 바랐습니다.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져서, 대간(臺諫)이 그것을 말하여도 듣지 않고 유사(有司)가 그것을 상소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유생(儒生)이 부처 때문에 갇히고 중 때문에 죄를 받으므로, 저 중들이 득의(得意)하여 기(氣)를 부려 스스로 뽐내고 학궁(學宮)에 함부로 들어가 생도(生徒)를 묶기까지 하니, 마음 아프다 하겠습니다. 근일에 중 육청(六淸)이 서울로부터 대구에 이르러 전 부사(府使) 임수창(林壽昌)과 함께 앉아 수작하다가 임수창이 서울의 기이한 일을 물으니, 육청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학조(學祖)를 접대하고 상사(賞賜)를 후하게 하시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하였는데, 신이 이 말을 듣고는 전하께서 부처를 숭상하시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상(喪)을 입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喪禮)이다.’ 하고, ‘부모를 위하여 상을 입는 것은 귀하건 천하건 물론하고 마찬가지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군졸들이 어버이의 상을 만나서 겨우 1백 일을 지내면,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고 화살을 지고 창을 메고서 항오(行伍) 사이에서 분주하므로, 애통한 마음이 이에 따라 적어지니, 어찌 인정(仁政)의 큰 흠결이 아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간(諫)하는 자는 복(福)이 되고 아첨하는 자는 해가 된다.’ 하였습니다. 대저 낯빛을 바루고 조정(朝廷)에 서서 극진히 말하고 숨기지 않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꾀하는 것이 아니라 다 나라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니, 과실을 바로 잡고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애써 용린(龍鱗)을 건드리고 호수(虎鬚)를 만져서 천둥 같은 위엄을 범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성지(聖知)의 임금은 말한 자를 죄주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물흐르듯이 간언(諫言)을 따르고 말이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죄주지 않으셨는데, 근년 이래로는 대간의 말을 흔히 들어주지 않고 말이 알맞지 않은 자도 견책하시며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한 것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기도 하니, 곧은 말을 하는 신하는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교묘하게 말을 잘하는 무리는 때로 진용(進用)될까 신은 염려합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과 함께 다스려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자로는 수령(守令)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합니다. 수령을 마땅한 사람으로 얻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으니, 수령의 직임은 중합니다. 근일 전하께서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셨으니, 우리 백성을 생각하시는 도리가 지극하시나, 전하께서 상주고 벌주신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였으니, 신은 전하께서 먼저 조정을 바루어서 백관(百官)을 바루시기 바랍니다. 백관이 바르면 감사(監司)가 절로 바루어지고 수령이 절로 바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소(疏)에 나를 꾸짖는 말이 많이 있으나 내가 어찌 그것을 노여워하겠는가? 다만 거기에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라고 말한 것은 내가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어느 사람을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또 ‘근일 수령(守令)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서감원(徐坎元)이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서 조정을 멸시하여 그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세에서 묘당(廟堂)631) 에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른바 공론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사람을 말한 것인지를 내가 추국(推鞫)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후세 사람인들 누가 한낱 유생(儒生)의 말을 믿고 조정에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대저 일을 말한 자는 혹 알맞지 못하였더라도 죄주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일을 말하고 파직된 자가 어느 사람이며 상주고 벌준 것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어느 사람인지는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곧 명하여 관찰사(觀察使) 이육(李陸)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도내 대구(大丘) 사람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의 상소에,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았다는 것과 근일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모두 공론에서 나온 것인가? 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나는 조신 중에서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가 누구이며, 올리고 내친 수령 중에서 의논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또 누구인지를 모르겠으니, 서감원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 [註 618] 봉사(封事) : 신하가 밀봉하여 임금에게 바치던 의견서.
- [註 619] 당(唐)·우(虞) : 요(堯)와 순(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
- [註 620] 상(商) : 뒤에 국호(國號)를 고쳐 은(殷)이라고 함.
- [註 621] 성색(聲色) : 음악과 여색(女色).
- [註 622] 유전(遊畋) : 놀이로 하는 사냥.
- [註 623] 분경(奔競) :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찾아다니며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일. 조선 때에는 이 분경의 금지를 법제화하였음.
- [註 624] 궁정(弓旌)·옥백(玉帛)의 예(禮) : 궁정은 활과 기로서, 모두 임금이 예를 두터이 하여 현명한 사람을 부르는 데 쓰는 것이고, 옥백은 옛날 제후(諸侯)가 조근(朝覲)이나 빙문(聘問)할 때 예물로 쓰던 옥(玉)과 비단임. 곧 임금이 어진 이를 찾고 신하가 예(禮)를 갖추어 임금을 찾아 뵙는 것을 이름.
- [註 625] 무일(無逸) : 《서경》의 편명으로, 안일에 흐르지 않게 경계한 내용임.
- [註 626] 입정(立政) : 《서경》의 편명으로, 현명한 인재를 임용하는 도리를 경계한 내용임.
- [註 627] 수공(垂拱) :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다[垂衣拱手]는 뜻으로, 위정자(爲政者)의 덕(德)에 의하여 백성이 착해져서 정사가 자연히 잘되므로 위정자가 할 일이 없음을 말함.
- [註 628] 오도(吾道) : 유교(儒敎)의 도(道)를 이르는 말.
- [註 629] 인과(因果) : 인연(因緣)과 과보(果報).
- [註 630] 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에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증명서. 양반은 포(布) 1백 필, 평민은 1백 50필, 천인은 2백 필을 받고 발급하였는데, 입적(入寂) 또는 환속(還俗)을 하면 도로 반납함. 도승첩(度僧牒).
- [註 631] 묘당(廟堂) : 의정부(議政府)를 다르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며, 나라의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을 말하기도 함.
원문
○慶尙道 大丘人生員徐坎元上封事。 其略曰:
殿下卽位以來, 嘉唐、虞, 樂商、周, 不邇聲色, 不事遊畋, 惟經籍、史傳, 日接于前, 每御經筵, 諮訪治道, 其宜治道之隆, 竝驅於成 周之盛。 而頃年以來, 天災流行, 冬雷夏雹, 旱乾相仍, 飢饉荐臻, 民失其所, 父子相離, 餓莩相籍, 廉恥道喪, 奔競成風, 姦邪競起, 盜賊興行, 鯁直之臣, 退處於野, 疎遠之臣, 無路得進, 弓旌、玉帛之禮, 不行於世, 凡所以致此者, 何也? 臣聞 ‘周公之爲輔相, 其急於見賢也, 握髮吐哺以待之, 賢者進而用之, 不賢者黜而退之。 又如《無逸》之戒、《立政》之書, 慇懃懇陳, 而成王納焉’。 今之宰相, 果能有周公之心乎? 臣不敢知, 上之於下, 果能如成王之於周公乎? 天變大事, 固不虛發, 則君臣固宜, 相與兢惕, 以答天譴, 而今之所務者, 不過祈雨、禁酒數事而已。 國家之事勢, 人人皆曰: "可以傷和矣, 可以召災矣", 而大臣不以聞, 諫官不以論, 何也? 臣聞 ‘《春秋》於新一廐、築一臺, 必書之’, 所以重民力, 勤土功, 示人君不可病民也。 今也土木之役浸興, 別立營繕之所, 名之曰修理都監, 輸木轉石, 呼耶之聲, 不絶於道路, 至毁撤民家, 夫知保抱厥婦子, 有徂何往之嘆, 可哀之甚者也。 景福宮, 乃先祖之所創, 而欲使聖子神孫, 垂拱於斯, 勤政於斯者也。 宮闕非不足也, 園囿非不廣也, 而增營宮室, 廣占園囿, 是誠何心哉? 臣聞 ‘異端不息, 則吾道不明’。 今僧徒以因果之說, 惑無知之人, 遊手遊食, 減兵卒之額, 賊農民之食, 不知將何所用, 而亦爲之設科, 禮曹選之於前, 吏曹爵之於後乎。 且有慶牒之僧, 勿令還俗, 有古塔之寺, 因而不毁, 故緇流漸繁, 而所在無額, 寺刹日興, 而金璧相輝, 如知其不可, 何拘度牒之有無、古塔之存否歟? 殿下卽位之初, 罷祝壽之齋, 除三寺薦供之物, 又令弘文館, 書歷代闢佛疏, 以啓一國臣庶, 皆知吾道之日盛、異端之日衰, 而想望太平之治也。 近年以來, 漸不如初, 臺諫言焉而不聞, 有司疏焉而不納, 儒生以佛而見囚, 以僧而被罪, 彼僧者流, 揚揚肆氣, 以自矜誇, 至於濫入學宮, 束縛生徒, 可謂痛心。 近日僧六淸, 自京師, 到大丘, 與前府使林壽昌, 共坐酬酢, 壽昌問京中奇事, 六淸言: "殿下待學祖, 厚賞賜無節。" 臣聞之, 以謂 ‘殿下崇佛, 自此始矣。’ 傳曰: "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父母之喪, 無貴賤, 一也。" 今也軍卒之徒, 遭親之喪, 纔經百日, 釋服從吉, 負羽荷戈, 奔走行伍之間, 哀痛之心, 因之以少衰, 豈非仁政之一大累乎? 傳曰: "諫者福也, 諛者賊也。" 夫正色立朝, 極言不諱者, 非爲身謀, 皆爲國計, 若無繩愆責難之心, 何苦批龍鱗, 探虎鬚, 以犯雷霆之威哉? 是故, 聖知之君, 不罪言者。 殿下卽位之初, 從諫如流, 言雖失當, 亦不加罪。 近年以來, 臺諫之言, 多不聽納, 而言之不中者, 亦加譴責, 朝臣或以言事見罷者, 久未復職, 臣恐諤諤之臣, 不能自保, 而喋喋之徒, 有時乎進矣。 臣聞 ‘與人主共理, 以安斯民者, 莫先於守令’。 守令得其人, 則民受其賜, 苟非其人, 則民受其害, 守令之職, 重矣。 近日殿下, 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其所以念吾民者, 至矣。 然未知殿下之賞罰果皆出於公議乎, 左右之言, 豈可盡信。 古人云: "源淸則流淸。" 臣願殿下先正朝廷, 以正百官, 百官正, 則監司自爾正, 守令自爾正矣。
傳于承政院曰: "疏內多有詈予之言, 然予何怒焉? 但其言曰: ‘言事見罷, 久不復職者’, 予反覆思之, 未知指何人也。 又云: ‘近日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然未知賞罰果皆出於公議。’ 坎元, 草茅賤士, 而蔑視朝廷, 其言至此, 後世以謂: ‘廟堂有人乎?’ 其所謂非公議者何人予欲推鞫, 何如?" 承旨等啓曰: "後之人, 誰信一介儒生之言, 謂: ‘朝廷無人乎?’ 大抵言事者, 雖或失中, 不當加罪, 但言事見罷者何人? 賞罰不公者何人? 此則不可不問也。" 卽命下書觀察使李陸曰:
道內大丘人生員徐坎元上疏云: "朝臣或以言事見罷者, 久不復職, 近日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賞罰果皆出於公議乎? 左右之言, 豈可盡信乎? 予不知朝臣言事見罷久不復職者誰歟、陞黜守令議不公者又誰歟。 其問坎元以啓。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성종 15년 (1484) 8월 2일
성종실록169권, 성종 15년 8월 2일 丙辰 2/2 기사 /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대구 생원 서감원이 불교 억압·공론 용납을 하라는 봉서를 올리다
국역
경상도 대구(大丘) 사람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이 봉사(封事)618) 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당(唐)·우(虞)619) 의 일을 아름답게 여기고 상(商)620) ·주(周)의 일을 즐겁게 여기어 성색(聲色)621) 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유전(遊畋)622) 을 일삼지 아니하시며, 오직 경적(經籍)과 사전(史傳)을 날마다 앞에 접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갈 때마다 치도(治道)를 자문하시니, 치도의 융성함이 주(周)나라의 융성함과 나란히 달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천재(天災)가 유행(流行)하여 겨울에 천둥하고 여름에 우박이 내리며 가뭄이 잇달아서 기근이 거듭 이르러, 백성이 몸둘 곳을 잃고 아비와 아들이 서로 흩어지고 굶어 죽는 자가 거듭 쌓이며,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분경(奔競)623) 이 풍습을 이루어 간사한 자가 다투어 일어나고 도둑이 흥행(興行)하며, 강직한 신하는 초야에 물러가 있고 소원(疏遠)한 신하는 진용(進用)될 길이 없는데 궁정(弓旌)·옥백(玉帛)의 예(禮)624) 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으니, 무릇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주공(周公)이 임금을 보필할 때에 어진 사람을 만나기에 바빠서 감던 머리를 쥐고 먹던 음식을 뱉고 나가 접대하여 어진 자는 진용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물리쳤으며, 또 무일(無逸)625) 의 경계와 입정(立政)626) 의 글로 은근하게 간절히 아뢰어 성왕(成王)이 받아들였다 하는데, 지금의 재상(宰相)이 과연 주공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알 수 없으나, 위에서 아래에 대하는 것이 과연 성왕이 주공에게 대하는 것과 같으실 수 있겠습니까? 천변(天變)은 큰일이며 본디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함께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진실로 마땅한데, 지금 힘쓰는 것은 비를 빌고 술을 금하는 몇가지 일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국가의 사세(事勢)를 사람마다 다 말하기를, ‘화기(和氣)를 상할 수 있고 재변을 부를 수 있다.’ 하는데, 대신(大臣)이 아뢰지 않고 간관(諫官)이 논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신이 듣건대 《춘추(春秋)》에 한 마굿간을 고치거나 한 대(臺)를 쌓은 것까지도 반드시 썼으니, 그것은 민력(民力)을 과중하게 하여 토목 일에 애쓴 것으로 임금이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목일이 점점 더 일어나므로 따로 영선(營繕)을 맡은 곳을 세워 수리 도감(修理都監)이라 이름하여 나무를 나르고 돌을 옮기느라 외치는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 않고 백성의 집을 헐기까지 하여, 지아비가 그 처자를 보양할 줄 알지만 떠나려 해도 갈 곳이 없는 한탄이 있으니, 매우 불쌍히 여길 바입니다. 경복궁(景福宮)은 선조(先祖)께서 창건하신 것인데,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여기에서 수공(垂拱)627) 하고 여기에서 근정(勤政)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궁궐이 넉넉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원유(園囿)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닌데, 궁실(宮室)을 늘려 짓고 원유를 넓게 차지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신이 듣건대 이단(異端)이 그치지 않으면 오도(吾道)628) 가 밝아지지 않는다 합니다. 지금 중[僧]들이 인과(因果)629) 라는 설(說)로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며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어, 병졸의 액수(額數)를 줄이고 농민의 식량을 축내는데, 장차 어디에 쓸 것이기에 이를 위하여 과시(科試)도 베풀어 예조(禮曹)에서 먼저 뽑고 이조(吏曹)에서 뒤에 벼슬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도첩(度牒)630) 이 있는 중은 환속(還俗)시키지 말게 하고, 고탑(古塔)이 있는 절은 그에 따라 헐지 않으므로, 중들이 점점 번성하여 곳곳이 무수하고, 절이 날로 흥성하여 금벽(金璧)이 서로 빛나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하여 도첩이 있고 없는 것이나 고탑이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축수(祝壽)하는 재(齋)를 폐지하여 삼사(三寺)에서 천공(薦供)하는 물건을 없애고, 또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역대(歷代)의 부처를 배척한 소(疏)를 쓰게 하여, 온나라의 신민이 다 오도(吾道)가 날로 융성하고 이단(異端)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알도록 계도(啓導)하였으므로, 태평한 정치를 바랐습니다.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져서, 대간(臺諫)이 그것을 말하여도 듣지 않고 유사(有司)가 그것을 상소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유생(儒生)이 부처 때문에 갇히고 중 때문에 죄를 받으므로, 저 중들이 득의(得意)하여 기(氣)를 부려 스스로 뽐내고 학궁(學宮)에 함부로 들어가 생도(生徒)를 묶기까지 하니, 마음 아프다 하겠습니다. 근일에 중 육청(六淸)이 서울로부터 대구에 이르러 전 부사(府使) 임수창(林壽昌)과 함께 앉아 수작하다가 임수창이 서울의 기이한 일을 물으니, 육청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학조(學祖)를 접대하고 상사(賞賜)를 후하게 하시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하였는데, 신이 이 말을 듣고는 전하께서 부처를 숭상하시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상(喪)을 입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喪禮)이다.’ 하고, ‘부모를 위하여 상을 입는 것은 귀하건 천하건 물론하고 마찬가지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군졸들이 어버이의 상을 만나서 겨우 1백 일을 지내면,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고 화살을 지고 창을 메고서 항오(行伍) 사이에서 분주하므로, 애통한 마음이 이에 따라 적어지니, 어찌 인정(仁政)의 큰 흠결이 아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간(諫)하는 자는 복(福)이 되고 아첨하는 자는 해가 된다.’ 하였습니다. 대저 낯빛을 바루고 조정(朝廷)에 서서 극진히 말하고 숨기지 않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꾀하는 것이 아니라 다 나라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니, 과실을 바로 잡고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애써 용린(龍鱗)을 건드리고 호수(虎鬚)를 만져서 천둥 같은 위엄을 범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성지(聖知)의 임금은 말한 자를 죄주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물흐르듯이 간언(諫言)을 따르고 말이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죄주지 않으셨는데, 근년 이래로는 대간의 말을 흔히 들어주지 않고 말이 알맞지 않은 자도 견책하시며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한 것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기도 하니, 곧은 말을 하는 신하는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교묘하게 말을 잘하는 무리는 때로 진용(進用)될까 신은 염려합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과 함께 다스려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자로는 수령(守令)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합니다. 수령을 마땅한 사람으로 얻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으니, 수령의 직임은 중합니다. 근일 전하께서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셨으니, 우리 백성을 생각하시는 도리가 지극하시나, 전하께서 상주고 벌주신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였으니, 신은 전하께서 먼저 조정을 바루어서 백관(百官)을 바루시기 바랍니다. 백관이 바르면 감사(監司)가 절로 바루어지고 수령이 절로 바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소(疏)에 나를 꾸짖는 말이 많이 있으나 내가 어찌 그것을 노여워하겠는가? 다만 거기에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라고 말한 것은 내가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어느 사람을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또 ‘근일 수령(守令)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다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서감원(徐坎元)이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서 조정을 멸시하여 그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세에서 묘당(廟堂)631) 에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른바 공론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사람을 말한 것인지를 내가 추국(推鞫)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후세 사람인들 누가 한낱 유생(儒生)의 말을 믿고 조정에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대저 일을 말한 자는 혹 알맞지 못하였더라도 죄주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일을 말하고 파직된 자가 어느 사람이며 상주고 벌준 것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어느 사람인지는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곧 명하여 관찰사(觀察使) 이육(李陸)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도내 대구(大丘) 사람 생원(生員) 서감원(徐坎元)의 상소에, ‘조신(朝臣) 중에서 혹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파직된 자가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았다는 것과 근일 수령 중에서 가장 어진 자와 가장 어질지 못한 자를 의정부(議政府)에 물어서 올리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였으나, 상주고 벌준 것이 과연 모두 공론에서 나온 것인가? 좌우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나는 조신 중에서 일을 말하고 파직되어 오래도록 복직되지 않은 자가 누구이며, 올리고 내친 수령 중에서 의논이 공정하지 않았던 자가 또 누구인지를 모르겠으니, 서감원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 [註 618] 봉사(封事) : 신하가 밀봉하여 임금에게 바치던 의견서.
- [註 619] 당(唐)·우(虞) : 요(堯)와 순(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
- [註 620] 상(商) : 뒤에 국호(國號)를 고쳐 은(殷)이라고 함.
- [註 621] 성색(聲色) : 음악과 여색(女色).
- [註 622] 유전(遊畋) : 놀이로 하는 사냥.
- [註 623] 분경(奔競) :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찾아다니며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일. 조선 때에는 이 분경의 금지를 법제화하였음.
- [註 624] 궁정(弓旌)·옥백(玉帛)의 예(禮) : 궁정은 활과 기로서, 모두 임금이 예를 두터이 하여 현명한 사람을 부르는 데 쓰는 것이고, 옥백은 옛날 제후(諸侯)가 조근(朝覲)이나 빙문(聘問)할 때 예물로 쓰던 옥(玉)과 비단임. 곧 임금이 어진 이를 찾고 신하가 예(禮)를 갖추어 임금을 찾아 뵙는 것을 이름.
- [註 625] 무일(無逸) : 《서경》의 편명으로, 안일에 흐르지 않게 경계한 내용임.
- [註 626] 입정(立政) : 《서경》의 편명으로, 현명한 인재를 임용하는 도리를 경계한 내용임.
- [註 627] 수공(垂拱) :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다[垂衣拱手]는 뜻으로, 위정자(爲政者)의 덕(德)에 의하여 백성이 착해져서 정사가 자연히 잘되므로 위정자가 할 일이 없음을 말함.
- [註 628] 오도(吾道) : 유교(儒敎)의 도(道)를 이르는 말.
- [註 629] 인과(因果) : 인연(因緣)과 과보(果報).
- [註 630] 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에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증명서. 양반은 포(布) 1백 필, 평민은 1백 50필, 천인은 2백 필을 받고 발급하였는데, 입적(入寂) 또는 환속(還俗)을 하면 도로 반납함. 도승첩(度僧牒).
- [註 631] 묘당(廟堂) : 의정부(議政府)를 다르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며, 나라의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을 말하기도 함.
원문
○慶尙道 大丘人生員徐坎元上封事。 其略曰:
殿下卽位以來, 嘉唐、虞, 樂商、周, 不邇聲色, 不事遊畋, 惟經籍、史傳, 日接于前, 每御經筵, 諮訪治道, 其宜治道之隆, 竝驅於成 周之盛。 而頃年以來, 天災流行, 冬雷夏雹, 旱乾相仍, 飢饉荐臻, 民失其所, 父子相離, 餓莩相籍, 廉恥道喪, 奔競成風, 姦邪競起, 盜賊興行, 鯁直之臣, 退處於野, 疎遠之臣, 無路得進, 弓旌、玉帛之禮, 不行於世, 凡所以致此者, 何也? 臣聞 ‘周公之爲輔相, 其急於見賢也, 握髮吐哺以待之, 賢者進而用之, 不賢者黜而退之。 又如《無逸》之戒、《立政》之書, 慇懃懇陳, 而成王納焉’。 今之宰相, 果能有周公之心乎? 臣不敢知, 上之於下, 果能如成王之於周公乎? 天變大事, 固不虛發, 則君臣固宜, 相與兢惕, 以答天譴, 而今之所務者, 不過祈雨、禁酒數事而已。 國家之事勢, 人人皆曰: "可以傷和矣, 可以召災矣", 而大臣不以聞, 諫官不以論, 何也? 臣聞 ‘《春秋》於新一廐、築一臺, 必書之’, 所以重民力, 勤土功, 示人君不可病民也。 今也土木之役浸興, 別立營繕之所, 名之曰修理都監, 輸木轉石, 呼耶之聲, 不絶於道路, 至毁撤民家, 夫知保抱厥婦子, 有徂何往之嘆, 可哀之甚者也。 景福宮, 乃先祖之所創, 而欲使聖子神孫, 垂拱於斯, 勤政於斯者也。 宮闕非不足也, 園囿非不廣也, 而增營宮室, 廣占園囿, 是誠何心哉? 臣聞 ‘異端不息, 則吾道不明’。 今僧徒以因果之說, 惑無知之人, 遊手遊食, 減兵卒之額, 賊農民之食, 不知將何所用, 而亦爲之設科, 禮曹選之於前, 吏曹爵之於後乎。 且有慶牒之僧, 勿令還俗, 有古塔之寺, 因而不毁, 故緇流漸繁, 而所在無額, 寺刹日興, 而金璧相輝, 如知其不可, 何拘度牒之有無、古塔之存否歟? 殿下卽位之初, 罷祝壽之齋, 除三寺薦供之物, 又令弘文館, 書歷代闢佛疏, 以啓一國臣庶, 皆知吾道之日盛、異端之日衰, 而想望太平之治也。 近年以來, 漸不如初, 臺諫言焉而不聞, 有司疏焉而不納, 儒生以佛而見囚, 以僧而被罪, 彼僧者流, 揚揚肆氣, 以自矜誇, 至於濫入學宮, 束縛生徒, 可謂痛心。 近日僧六淸, 自京師, 到大丘, 與前府使林壽昌, 共坐酬酢, 壽昌問京中奇事, 六淸言: "殿下待學祖, 厚賞賜無節。" 臣聞之, 以謂 ‘殿下崇佛, 自此始矣。’ 傳曰: "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父母之喪, 無貴賤, 一也。" 今也軍卒之徒, 遭親之喪, 纔經百日, 釋服從吉, 負羽荷戈, 奔走行伍之間, 哀痛之心, 因之以少衰, 豈非仁政之一大累乎? 傳曰: "諫者福也, 諛者賊也。" 夫正色立朝, 極言不諱者, 非爲身謀, 皆爲國計, 若無繩愆責難之心, 何苦批龍鱗, 探虎鬚, 以犯雷霆之威哉? 是故, 聖知之君, 不罪言者。 殿下卽位之初, 從諫如流, 言雖失當, 亦不加罪。 近年以來, 臺諫之言, 多不聽納, 而言之不中者, 亦加譴責, 朝臣或以言事見罷者, 久未復職, 臣恐諤諤之臣, 不能自保, 而喋喋之徒, 有時乎進矣。 臣聞 ‘與人主共理, 以安斯民者, 莫先於守令’。 守令得其人, 則民受其賜, 苟非其人, 則民受其害, 守令之職, 重矣。 近日殿下, 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其所以念吾民者, 至矣。 然未知殿下之賞罰果皆出於公議乎, 左右之言, 豈可盡信。 古人云: "源淸則流淸。" 臣願殿下先正朝廷, 以正百官, 百官正, 則監司自爾正, 守令自爾正矣。
傳于承政院曰: "疏內多有詈予之言, 然予何怒焉? 但其言曰: ‘言事見罷, 久不復職者’, 予反覆思之, 未知指何人也。 又云: ‘近日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然未知賞罰果皆出於公議。’ 坎元, 草茅賤士, 而蔑視朝廷, 其言至此, 後世以謂: ‘廟堂有人乎?’ 其所謂非公議者何人予欲推鞫, 何如?" 承旨等啓曰: "後之人, 誰信一介儒生之言, 謂: ‘朝廷無人乎?’ 大抵言事者, 雖或失中, 不當加罪, 但言事見罷者何人? 賞罰不公者何人? 此則不可不問也。" 卽命下書觀察使李陸曰:
道內大丘人生員徐坎元上疏云: "朝臣或以言事見罷者, 久不復職, 近日以守令之最賢、最不賢者, 問於政府, 或陞或黜, 賞罰果皆出於公議乎? 左右之言, 豈可盡信乎? 予不知朝臣言事見罷久不復職者誰歟、陞黜守令議不公者又誰歟。 其問坎元以啓。
- 【태백산사고본】 25책 16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6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원본
성종 15년 (1484)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