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50권, 성종 14년 1월 25일 戊午 2/3 기사 /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영돈녕 이상 재상에게 도망간 야인을 쇄환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다
국역
영안도 순찰사(永安道巡察使) 어유소(魚有沼)가 아뢴 바 도망간 야인(野人)을 쇄환(刷還)하는 일을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변경 일을 아는 재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당초에 향화인(向化人)이 도망해 간 자가 많은데 이제 유귀동(劉貴同)이 왔다하여 갑자기 모두 돌아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유소가 머물러서 그 형세를 보기 원하니 우선 그 말을 듣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뢴 바 공이 많은 자는 올려 보내어 벼슬로 상을 받게 하겠다는 말은 옳지 못한 듯하나, 다만 이 말이 반드시 저들에게 전파되고 알려져서 발돋움하여 은혜를 바라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유소가 아뢴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상(賞)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아니하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여 도리어 다른 계교를 낼 것이니, 신 등은 쇄환할 기한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 공이 있는 3, 4명을 골라서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이파(李坡)·김언경(金彦庚)·이계동(李季仝)은 의논하기를,
"저들의 거짓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사세(事勢)를 보아 조금이라도 쇄환할 도리가 있거든 우선 어유소를 머물러 있게 하여 천천히 형세를 보게 하고, 만약 저들이 전과 같이 우둔하게 고집하면서 즐겨 돌려보내라는 말을 듣지 않으면, 전의 유서(諭書)에 의하여 어유소가 돌아오는 것을 허락해서 우선 그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들어가 치게 하는 것이 계책에 매우 적당할 것입니다. 만약 말하기를, ‘날이 따뜻하면 모두 포주(蒲州)로 돌아가버려 쇄환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군사를 일으켜서 들어가 공격하여 소굴을 다 소탕해 버린다면, 비록 도망간 사람은 얻지 못하더라도 저들의 지경에서 위엄을 드날리고 또 도망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겁내게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니 또한 이익이 없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저들이 모두 포주(蒲州)로 돌아간다는 말을 다 믿을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군사를 쓰는 도(道)는 빠른 것을 귀중하게 여기니 급히 들어가서 치는 것이 마땅하긴 하나, 듣건대 얼음이 풀린 뒤에는 길이 험하며 강을 건널 때에 비록 여울물의 얕은 곳으로 건넌다하더라도 그 형세가 몹시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유소를 불러 돌아오게 하여 가을을 기다렸다가 들어가 치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그리고 논상(論賞)하는 일은, 저들이 비록 별다른 공(功)은 없으면서 조금이라도 왕래한 수고가 있으면 스스로 그 노고를 자랑하면서 상(賞)이 없음을 호소하는데, 저들은 무지하여 오직 이(利)만 추구하므로 상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 3, 4명을 골라 올려 보내게 하여 상을 주어 뒷날의 효험(効驗)을 권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신이 전일에 의논하기를, ‘불러도 오지 아니하면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제 어유소의 글을 보건대, 장차 쇄환할 형세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사의 일은 멀리서 계책을 줄 수 없고 또한 중간에서 제재할 수 없으니, 우선 어유소가 돌아오는 것을 정지시키고 형세를 보아서 도모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또 쇄환을 위해 왕래한 자는 모두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바라고 있으니 그 공을 논하는 경중(輕重)과 다과(多寡)는 오직 성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허종(許琮)·이철견(李鐵堅)·정난종(鄭蘭宗)·정괄(鄭佸)·하숙부(河叔溥)·홍귀달(洪貴達)·신주(辛柱)·변종인(卞宗仁)·강곤(康袞)은 의논하기를,
"이제 쇄환하는 형세를 보건대, 후하게 먹이고 이(利)로써 베풀며 달래어 불러 들이려 하지만 저들이 반드시 이로써 진귀한 보화가 있는 곳으로 여겨 우리를 심하게 우롱할 것입니다. 또 전에 도망간 사람을 잡아 와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은혜와 사랑을 보였으니, 이는 모두 고식(姑息)062) 을 일삼은 것이므로 대체에 매우 방해로움이 있어서 장차 후일의 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오로지 쇄환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말고 위엄을 보여서 저들과 본도(本道)에 사는 귀화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감히 동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이른바 위엄을 보인다는 것은 경계 위에서 군사를 엄하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분명(奔命)063) 하는데 바빠서 농사지을 수 없게 하는 것도 족합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들어가서 공격하자면 이제 강의 얼음이 풀려서 모래벌판의 길이 몹시 험하여 형세가 매우 불편하니, 전의 하유(下諭)에 의하여 어유소에게 올라오도록 명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또 도망간 사람을 붙들어 올 때에 저들 가운데 자기 집에 허접(許接)064) 하고는 스스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잡아 온 자는 죄를 주는 것이 가하며 상(賞)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비록 허접하였다 하더라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인화(仁化)에 회유(懷柔)되어 친히 데리고 오는 자는 성밑에 사는 이로 왕래하면서 가장 공이 있는 자와 함께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으니, 약속에 따라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참으로 그 마음을 얻는 것이니, 이른바 ‘어진 사람은 적(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 안을 다스리는 것과 밖을 다스리는 것이 그 도(道)가 같지 아니하니, 나라 안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예법(禮法)으로 하고 나라 밖의 오랑캐를 대하는 데에는 은혜와 위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도망해 들어간 백성들은 수령의 횡포를 싫어하고 성상(聖上)의 적자(赤子)065) 를 품어 보호하는 마음을 보지 못하여, 이(利)를 따르고 해를 피하여 도망한 것이니, 추장의 죄가 아니라 잘못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저 들어가서 공벌(攻伐)하는 데 있어서 어렵고 쉬운 형세는 신이 그 지역을 밟아보지 않았으므로 감히 망령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망령된 의논으로는, 쇄환(刷還)하는 자는 상을 주고 따라 돌아온 자는 은혜로 회유하며 또 타이르기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였으나 수령이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불법으로 가로채고 침해하였으므로 내가 이미 죄를 주었는데, 너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만일 나를 생각하고 돌아오는 자는 내가 마땅히 후하게 대우하여 살게 하겠다.’고 하여 성상의 뜻을 알게 하면, 저절로 들어서 알고 돌아오는 것이 남보다 뒤질까 두렵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의 조치는 신이 다 알지 못하며 엎드려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고, 이계손(李繼孫)·여자신(呂自新)은 의논하기를,
"쇄환에 공(功)이 있는 자는 상을 주어서 새로운 공을 힘쓰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쇄환할 때에 많은 사람을 써서 위협을 느끼게 하여 저들을 놀라고 동요하게 하면 불러서 위무(慰撫)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 비록 왕래하면서 쇄환하는 데 조그마한 수고를 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올려 보내는 것은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만 면포(綿布)와 음식물로 그 공로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땅히 서울에 올라가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나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올려 보낼 수 없다. 또 지금 쇄환한 사람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잠깐 상주는 규정을 보인 것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제 다시 힘써서 많은 수를 쇄환하면 나라에서 저절로 중한 상이 있을 것이니, 가을을 기다려서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느냐? 너희들은 다시 힘쓰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해 간 사람이 날이 따뜻한 뒤에 포주(蒲州)로 들어가는 일이 혹시 있을 것이니, 만약 급히 군사를 출동시켜 들어가 치면 억지로 돌아오게 할 수는 있으나, 다만 지금 얼음이 풀리고 길이 험하여 농사철을 당한 때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가을을 기다려서 토벌하면 비록 도망해 간 사람은 잡지 못하더라도 역시 죄를 성토(聲討)하고 위엄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곧 어유소로 하여금 쇄환하는 일은 감사(監司)·절도사(節度使)에게 위임하고 오게 하는 것이 편(便)하겠습니다."
하고, 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전일에 유서(諭書)를 내려 이미 어유소를 올라오게 하였으니, 받은 바 변경 일은 일체 절도사에게 위임하고 오게 하는 것일 가합니다. 이제 서장(書狀)의 글을 보니 도망간 백성을 모두 쇄환하게 하는 일도 믿을 수 없으니, 우선 올라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註 062] 고식(姑息) : 임시 편한 것만을 취함.
- [註 063] 분명(奔命) : 명령에 의하여 분주히 돌아다님.
- [註 064] 허접(許接) : 우거(寓居)하게 함.
- [註 065] 적자(赤子) : 백성.
원문
○以永安道巡察使魚有沼所啓逃去野人刷還事, 命領敦寧以上、六曹判書、知邊事宰相議之。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李克培、尹壕議: "當初向化人逃去者多, 今以劉貴同之來, 未可遽謂之盡還, 然魚有沼願留觀其勢, 姑聽之爲便。 其所啓功多者, 上送賞職之言, 似若不可, 但此言必傳聞於彼人, 翹足望恩者必多。 今以有沼所啓爲非, 而行賞之典不擧, 則彼必沮心失望, 反生他計, 臣等恐刷還無期。 令擇其中有功三四人, 上送何如?" 尹弼商、李坡、金彦庚、李季仝議: "彼人變詐難則, 然觀事勢, 稍有刷還之理, 姑留魚有沼, 徐觀形勢。 若彼人執迷如前, 不肯聽還, 則依前諭書, 聽有沼還, 姑安其心, 待秋入攻, 於計甚得。 若曰: ‘日暖則盡歸蒲州, 刷還無由’, 然興師入攻, 盡盪巢穴, 則雖不得逃去之人, 亦足以揚威彼境, 且懾未去人之心, 亦不爲無利, 況彼之盡歸蒲州之說, 亦未可盡信也? 用兵之道, 以速爲貴, 宜急入攻, 然聞氷泮之後, 道路艱險, 渡江之時, 雖從灘水淺處, 其勢甚難。 召還有沼, 待秋入討爲便。 其論賞事, 彼輩雖無別功, 稍有往來之勤, 自誇其勞, 訴以無賞。 此輩無知, 惟利是求, 不可不論賞。 其中擇其有功勞者三四人, 上送行賞, 以勸後效, 何如?" 洪應議: "臣前議, 以招之不來, 則當擧兵討之。 今觀魚有沼之書, 有將有刷還之勢之語。 兵事不可遙授, 亦不可從中制之, 姑停有沼之還, 觀勢圖之, 無乃可乎? 且往來刷還者, 皆望尺寸之報, 其論功輕重、多寡, 惟上裁施行。" 許琮、李鐵堅、鄭蘭宗、鄭佸、河叔溥、洪貴達、辛柱、卞宗仁、康袞議: "今觀刷還之勢, 厚饋與施, 以利誘而致之, 彼必以此爲奇貨所在, 玩我太甚。 又前所捕來逃去之人, 非徒不罪之, 且示以恩寵。 此皆以姑息爲事, 深有妨於大體, 恐將有後來之害。 臣等之意以謂 ‘不專以刷還爲急, 示之以威, 使彼與本道所居向化者, 震懾而不敢動, 可也。’ 所謂示威者, 嚴兵境上, 使彼奔命不暇, 不得耕耘, 亦足矣。 若不得已入攻, 則今江氷已解, 磧路甚險, 勢甚不便, 依前下諭, 命有沼上來爲便。 且逃去人刷來時, 彼人之中, 許接於家, 不自率來, 而我國使人捉來者, 可罪, 而不可賞也。 初雖許接, 而畏威懷仁, 親自率來者與居城底往來, 最有功勞者, 不可不賞, 令從約上送, 何如?" 孫舜孝議: "以力服人, 非心服也, 以德服人, 眞得其心, 所謂仁者無敵也。 且治內治外, 其道不一, 治內民以禮法, 待外夷以恩威。 彼逃入之民, 惡守令橫(浸)〔侵〕 , 不見聖上懷保赤子之心, 所以趨利避害, 而逃也, 非酋長之罪, 失在於我。 若夫入攻難易之勢, 臣未蹈其地, 不敢妄對。 妄議以謂 ‘能刷還者賞之, 隨還者懷之以恩。’ 且諭之曰: ‘吾愛汝如赤子, 而守令不體予意, 橫侵不法, 吾已罪之, 汝何有罪? 如有懷我來還者, 吾當厚之生之。’ 使知聖意, 自然聽聞, 還來恐後。 其中措置, 臣未盡知。 伏惟上裁。" 李繼孫、呂自新議: "刷還有功者, 不可不賞, 以勉新功。 但刷還時, 用衆威㤼, 使彼驚動, 則非招撫之道。 其中雖有往來刷還微勞者, 今方臨農, 上送有弊。 只以綿布、食物, 隨其功勞高下給之, 仍語之曰: ‘汝等當固上京受賞今方臨農, 不得上送耳。 且今刷還人數不多, 故暫示賞格而已。 汝等今更勉力, 多數刷還, 則國家自有重賞, 待秋上京何難? 汝更勉之。’ 其逃移人, 日暖後蒲州入去事, 容或有之, 若亟擧兵入征, 則可得勒還。 但今氷解路險, 臨農之時, 不宜動兵。 待秋征討, 雖不得逃移之人, 亦可以聲罪, 而示威也。 仍令魚有沼, 凡刷還之事, 委諸監司、節度使, 而來爲便。" 魚世恭議: "前日下諭, 已令有沼上來, 則所受邊事, 一委節度使而來, 可也。 今觀書狀之辭, 逃民盡刷之事, 亦未可信, 姑令上來, 何如?"
성종 14년 (1483) 1월 25일
성종실록150권, 성종 14년 1월 25일 戊午 2/3 기사 /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영돈녕 이상 재상에게 도망간 야인을 쇄환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다
국역
영안도 순찰사(永安道巡察使) 어유소(魚有沼)가 아뢴 바 도망간 야인(野人)을 쇄환(刷還)하는 일을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변경 일을 아는 재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당초에 향화인(向化人)이 도망해 간 자가 많은데 이제 유귀동(劉貴同)이 왔다하여 갑자기 모두 돌아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유소가 머물러서 그 형세를 보기 원하니 우선 그 말을 듣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뢴 바 공이 많은 자는 올려 보내어 벼슬로 상을 받게 하겠다는 말은 옳지 못한 듯하나, 다만 이 말이 반드시 저들에게 전파되고 알려져서 발돋움하여 은혜를 바라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유소가 아뢴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상(賞)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아니하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여 도리어 다른 계교를 낼 것이니, 신 등은 쇄환할 기한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 공이 있는 3, 4명을 골라서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이파(李坡)·김언경(金彦庚)·이계동(李季仝)은 의논하기를,
"저들의 거짓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사세(事勢)를 보아 조금이라도 쇄환할 도리가 있거든 우선 어유소를 머물러 있게 하여 천천히 형세를 보게 하고, 만약 저들이 전과 같이 우둔하게 고집하면서 즐겨 돌려보내라는 말을 듣지 않으면, 전의 유서(諭書)에 의하여 어유소가 돌아오는 것을 허락해서 우선 그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들어가 치게 하는 것이 계책에 매우 적당할 것입니다. 만약 말하기를, ‘날이 따뜻하면 모두 포주(蒲州)로 돌아가버려 쇄환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군사를 일으켜서 들어가 공격하여 소굴을 다 소탕해 버린다면, 비록 도망간 사람은 얻지 못하더라도 저들의 지경에서 위엄을 드날리고 또 도망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겁내게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니 또한 이익이 없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저들이 모두 포주(蒲州)로 돌아간다는 말을 다 믿을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군사를 쓰는 도(道)는 빠른 것을 귀중하게 여기니 급히 들어가서 치는 것이 마땅하긴 하나, 듣건대 얼음이 풀린 뒤에는 길이 험하며 강을 건널 때에 비록 여울물의 얕은 곳으로 건넌다하더라도 그 형세가 몹시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유소를 불러 돌아오게 하여 가을을 기다렸다가 들어가 치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그리고 논상(論賞)하는 일은, 저들이 비록 별다른 공(功)은 없으면서 조금이라도 왕래한 수고가 있으면 스스로 그 노고를 자랑하면서 상(賞)이 없음을 호소하는데, 저들은 무지하여 오직 이(利)만 추구하므로 상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 3, 4명을 골라 올려 보내게 하여 상을 주어 뒷날의 효험(効驗)을 권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신이 전일에 의논하기를, ‘불러도 오지 아니하면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제 어유소의 글을 보건대, 장차 쇄환할 형세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사의 일은 멀리서 계책을 줄 수 없고 또한 중간에서 제재할 수 없으니, 우선 어유소가 돌아오는 것을 정지시키고 형세를 보아서 도모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또 쇄환을 위해 왕래한 자는 모두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바라고 있으니 그 공을 논하는 경중(輕重)과 다과(多寡)는 오직 성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허종(許琮)·이철견(李鐵堅)·정난종(鄭蘭宗)·정괄(鄭佸)·하숙부(河叔溥)·홍귀달(洪貴達)·신주(辛柱)·변종인(卞宗仁)·강곤(康袞)은 의논하기를,
"이제 쇄환하는 형세를 보건대, 후하게 먹이고 이(利)로써 베풀며 달래어 불러 들이려 하지만 저들이 반드시 이로써 진귀한 보화가 있는 곳으로 여겨 우리를 심하게 우롱할 것입니다. 또 전에 도망간 사람을 잡아 와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은혜와 사랑을 보였으니, 이는 모두 고식(姑息)062) 을 일삼은 것이므로 대체에 매우 방해로움이 있어서 장차 후일의 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오로지 쇄환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말고 위엄을 보여서 저들과 본도(本道)에 사는 귀화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감히 동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이른바 위엄을 보인다는 것은 경계 위에서 군사를 엄하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분명(奔命)063) 하는데 바빠서 농사지을 수 없게 하는 것도 족합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들어가서 공격하자면 이제 강의 얼음이 풀려서 모래벌판의 길이 몹시 험하여 형세가 매우 불편하니, 전의 하유(下諭)에 의하여 어유소에게 올라오도록 명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또 도망간 사람을 붙들어 올 때에 저들 가운데 자기 집에 허접(許接)064) 하고는 스스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잡아 온 자는 죄를 주는 것이 가하며 상(賞)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비록 허접하였다 하더라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인화(仁化)에 회유(懷柔)되어 친히 데리고 오는 자는 성밑에 사는 이로 왕래하면서 가장 공이 있는 자와 함께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으니, 약속에 따라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며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참으로 그 마음을 얻는 것이니, 이른바 ‘어진 사람은 적(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 안을 다스리는 것과 밖을 다스리는 것이 그 도(道)가 같지 아니하니, 나라 안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예법(禮法)으로 하고 나라 밖의 오랑캐를 대하는 데에는 은혜와 위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도망해 들어간 백성들은 수령의 횡포를 싫어하고 성상(聖上)의 적자(赤子)065) 를 품어 보호하는 마음을 보지 못하여, 이(利)를 따르고 해를 피하여 도망한 것이니, 추장의 죄가 아니라 잘못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저 들어가서 공벌(攻伐)하는 데 있어서 어렵고 쉬운 형세는 신이 그 지역을 밟아보지 않았으므로 감히 망령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망령된 의논으로는, 쇄환(刷還)하는 자는 상을 주고 따라 돌아온 자는 은혜로 회유하며 또 타이르기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였으나 수령이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불법으로 가로채고 침해하였으므로 내가 이미 죄를 주었는데, 너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만일 나를 생각하고 돌아오는 자는 내가 마땅히 후하게 대우하여 살게 하겠다.’고 하여 성상의 뜻을 알게 하면, 저절로 들어서 알고 돌아오는 것이 남보다 뒤질까 두렵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의 조치는 신이 다 알지 못하며 엎드려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고, 이계손(李繼孫)·여자신(呂自新)은 의논하기를,
"쇄환에 공(功)이 있는 자는 상을 주어서 새로운 공을 힘쓰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쇄환할 때에 많은 사람을 써서 위협을 느끼게 하여 저들을 놀라고 동요하게 하면 불러서 위무(慰撫)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 비록 왕래하면서 쇄환하는 데 조그마한 수고를 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올려 보내는 것은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만 면포(綿布)와 음식물로 그 공로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땅히 서울에 올라가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나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올려 보낼 수 없다. 또 지금 쇄환한 사람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잠깐 상주는 규정을 보인 것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제 다시 힘써서 많은 수를 쇄환하면 나라에서 저절로 중한 상이 있을 것이니, 가을을 기다려서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느냐? 너희들은 다시 힘쓰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해 간 사람이 날이 따뜻한 뒤에 포주(蒲州)로 들어가는 일이 혹시 있을 것이니, 만약 급히 군사를 출동시켜 들어가 치면 억지로 돌아오게 할 수는 있으나, 다만 지금 얼음이 풀리고 길이 험하여 농사철을 당한 때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가을을 기다려서 토벌하면 비록 도망해 간 사람은 잡지 못하더라도 역시 죄를 성토(聲討)하고 위엄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곧 어유소로 하여금 쇄환하는 일은 감사(監司)·절도사(節度使)에게 위임하고 오게 하는 것이 편(便)하겠습니다."
하고, 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전일에 유서(諭書)를 내려 이미 어유소를 올라오게 하였으니, 받은 바 변경 일은 일체 절도사에게 위임하고 오게 하는 것일 가합니다. 이제 서장(書狀)의 글을 보니 도망간 백성을 모두 쇄환하게 하는 일도 믿을 수 없으니, 우선 올라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註 062] 고식(姑息) : 임시 편한 것만을 취함.
- [註 063] 분명(奔命) : 명령에 의하여 분주히 돌아다님.
- [註 064] 허접(許接) : 우거(寓居)하게 함.
- [註 065] 적자(赤子) : 백성.
원문
○以永安道巡察使魚有沼所啓逃去野人刷還事, 命領敦寧以上、六曹判書、知邊事宰相議之。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李克培、尹壕議: "當初向化人逃去者多, 今以劉貴同之來, 未可遽謂之盡還, 然魚有沼願留觀其勢, 姑聽之爲便。 其所啓功多者, 上送賞職之言, 似若不可, 但此言必傳聞於彼人, 翹足望恩者必多。 今以有沼所啓爲非, 而行賞之典不擧, 則彼必沮心失望, 反生他計, 臣等恐刷還無期。 令擇其中有功三四人, 上送何如?" 尹弼商、李坡、金彦庚、李季仝議: "彼人變詐難則, 然觀事勢, 稍有刷還之理, 姑留魚有沼, 徐觀形勢。 若彼人執迷如前, 不肯聽還, 則依前諭書, 聽有沼還, 姑安其心, 待秋入攻, 於計甚得。 若曰: ‘日暖則盡歸蒲州, 刷還無由’, 然興師入攻, 盡盪巢穴, 則雖不得逃去之人, 亦足以揚威彼境, 且懾未去人之心, 亦不爲無利, 況彼之盡歸蒲州之說, 亦未可盡信也? 用兵之道, 以速爲貴, 宜急入攻, 然聞氷泮之後, 道路艱險, 渡江之時, 雖從灘水淺處, 其勢甚難。 召還有沼, 待秋入討爲便。 其論賞事, 彼輩雖無別功, 稍有往來之勤, 自誇其勞, 訴以無賞。 此輩無知, 惟利是求, 不可不論賞。 其中擇其有功勞者三四人, 上送行賞, 以勸後效, 何如?" 洪應議: "臣前議, 以招之不來, 則當擧兵討之。 今觀魚有沼之書, 有將有刷還之勢之語。 兵事不可遙授, 亦不可從中制之, 姑停有沼之還, 觀勢圖之, 無乃可乎? 且往來刷還者, 皆望尺寸之報, 其論功輕重、多寡, 惟上裁施行。" 許琮、李鐵堅、鄭蘭宗、鄭佸、河叔溥、洪貴達、辛柱、卞宗仁、康袞議: "今觀刷還之勢, 厚饋與施, 以利誘而致之, 彼必以此爲奇貨所在, 玩我太甚。 又前所捕來逃去之人, 非徒不罪之, 且示以恩寵。 此皆以姑息爲事, 深有妨於大體, 恐將有後來之害。 臣等之意以謂 ‘不專以刷還爲急, 示之以威, 使彼與本道所居向化者, 震懾而不敢動, 可也。’ 所謂示威者, 嚴兵境上, 使彼奔命不暇, 不得耕耘, 亦足矣。 若不得已入攻, 則今江氷已解, 磧路甚險, 勢甚不便, 依前下諭, 命有沼上來爲便。 且逃去人刷來時, 彼人之中, 許接於家, 不自率來, 而我國使人捉來者, 可罪, 而不可賞也。 初雖許接, 而畏威懷仁, 親自率來者與居城底往來, 最有功勞者, 不可不賞, 令從約上送, 何如?" 孫舜孝議: "以力服人, 非心服也, 以德服人, 眞得其心, 所謂仁者無敵也。 且治內治外, 其道不一, 治內民以禮法, 待外夷以恩威。 彼逃入之民, 惡守令橫(浸)〔侵〕 , 不見聖上懷保赤子之心, 所以趨利避害, 而逃也, 非酋長之罪, 失在於我。 若夫入攻難易之勢, 臣未蹈其地, 不敢妄對。 妄議以謂 ‘能刷還者賞之, 隨還者懷之以恩。’ 且諭之曰: ‘吾愛汝如赤子, 而守令不體予意, 橫侵不法, 吾已罪之, 汝何有罪? 如有懷我來還者, 吾當厚之生之。’ 使知聖意, 自然聽聞, 還來恐後。 其中措置, 臣未盡知。 伏惟上裁。" 李繼孫、呂自新議: "刷還有功者, 不可不賞, 以勉新功。 但刷還時, 用衆威㤼, 使彼驚動, 則非招撫之道。 其中雖有往來刷還微勞者, 今方臨農, 上送有弊。 只以綿布、食物, 隨其功勞高下給之, 仍語之曰: ‘汝等當固上京受賞今方臨農, 不得上送耳。 且今刷還人數不多, 故暫示賞格而已。 汝等今更勉力, 多數刷還, 則國家自有重賞, 待秋上京何難? 汝更勉之。’ 其逃移人, 日暖後蒲州入去事, 容或有之, 若亟擧兵入征, 則可得勒還。 但今氷解路險, 臨農之時, 不宜動兵。 待秋征討, 雖不得逃移之人, 亦可以聲罪, 而示威也。 仍令魚有沼, 凡刷還之事, 委諸監司、節度使, 而來爲便。" 魚世恭議: "前日下諭, 已令有沼上來, 則所受邊事, 一委節度使而來, 可也。 今觀書狀之辭, 逃民盡刷之事, 亦未可信, 姑令上來, 何如?"
원본
성종 14년 (1483)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