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49권, 성종 5년 11월 10일 辛酉 2/6 기사 /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예조에서 종정국에게 답한 글
국역
예조(禮曹)에서 종정국(宗貞國)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글을 받아 평안함을 알게 되어 위로됩니다. 바친 예물은 삼가 계달(啓達)하여 잘 수납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에 삼포(三浦)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일로 여러 번 좌우에게 청하여 두 번 허락함을 받았는데, 마침내 재처(裁處)969) 함이 없어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특별히 종인(宗人)을 보내어 혜서(惠書)에 오래고 늦어진 이유를 보이고 또 쇄환(刷還)하게 하여서, 여러 해 동안 의도(意圖)하던 바가 이제 비로소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족하(足下)가 말을 실천하고 신의를 지키며 일을 도모하기에 유종(有終)의 미가 있음을 볼 수 있어서 족하를 위하여 기뻐하고 경사스럽습니다. 다만 오는 사신이 우리 나라의 지휘를 듣고자 하는데 이는 비록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좋은 뜻에서 나왔으나, 삼포 사람은 비록 우리 땅에 살더라도 일찍이 우리 나라에 역속(役屬)970) 되지 아니하여 정구(丁口)971) 의 수(數)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어떤 자가 마땅히 돌아가야 하고 어떤 자가 머물러 살 수 있는지를 어떻게 알아서 감히 그 사이에 지휘하겠습니까? 삼포(三浦)는 비록 귀도(貴島)와 더불어 바다가 격하였으나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여 분주히 일을 하면 어찌 우리의 지휘를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우리 선왕(先王)이 앞서의 도주(島主)와 더불어 이해(利害)를 깊이 생각하여 만세에 길이 보전할 계책을 만들어서, 약 60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쇄환(刷還)하였습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자 불고 늘어서 삼포에서는 거의 용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탈적(脫籍)하여 망명해 온 사람인데, 피차에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혹시 지역에 해가 될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족하에게 번거롭게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종무승을 보내어 족하의 명을 받아 장차 간세(姦細)972) 를 다 찾아서 예전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머무를 만한 자만 골라서 약속대로 남아 있게 하여, 양쪽에 각각 치부(置簿)973) 하여 명목(名目)이 이와 같음을 밝게 알면, 속이는 것이 저절로 없어지고 양쪽에 의심과 막힘이 없을 것이므로, 가히 조선(祖先)을 멀리 이어받들고 가히 국교[邦交]를 길이 튼튼하게 할 것이니, 어찌 족하를 위해 하례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삼가 이 뜻을 가지고 우리 전하께 아뢰었더니, 매우 아름답게 여기시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온 사자(使者)를 관(館)에서 대접함이 예전보다 더함이 있고, 또 본조(本曹)에 명하기를, ‘지금의 도주(島主)가 현명(賢明)하여 번보(藩輔)974) 에 마음을 다하여 무릇 명한 바가 있으면 감히 어기지 아니하고, 그 조처함을 보건대 또 기의(機宜)975) 에 적합하니, 더불어 일할 만한 자이다. 너희 예조에서는 다시 근래의 피차 불편한 사건들을 모두 자세하게 통유(通諭)하여 비위(非違)를 살피게 하라.’고 하므로, 이에 구약(舊約)과 이미 행한 조례(條例)들에 의거하여, 상위(相違)되고 사체(事體)에 방해됨이 있는 것을 상고하여 하나하나 뒤에 기록하니, 살펴서 적당하게 시행하고, 삼포(三浦)의 쇄환(刷還)한 사람과 머물러 사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회시(回示)해 주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종출우(宗出羽)·종정수(宗貞秀)가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빙선(聘船)의 수(數)를 더하기를 청하였는데, 다만 선왕(先王) 때에 정한 것이므로 감히 계달하지 못하다가 이제 족하가 구랑(九郞)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다시 청하여 말뜻이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삼가 이미 품지(稟旨)하여 특별히 4척을 더하였으니, 대저 족하께서 청을 중히 하고 구랑(九郞)을 어질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땅히 곧 구랑에게 전유(轉諭)하여 한 해에 배 5척을 보내도록 하고 삼포에 사는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 편맹(編氓)976) 과 같이 보므로 그 실화(失火)한 사람을 의리상 당연히 구휼하는 것이 본디 별다른 은혜가 아닌데 글을 만들어 사례를 진술하니, 또한 일을 만나 고마움을 아는 족하의 정성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포상(褒賞)을 내리시니 별폭(別幅)에 갖춘대로 영수(領受)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그칩니다.
1. 귀도(貴島)의 배 한 척이 우리 나라 흥양현(興陽縣) 연해 지방(沿海地方)에 이르렀는데 우리 선군(船軍) 강자련(姜自連) 등 10인이 탄 배와 만나자 의복·양식·집물(什物)을 거의 다 겁탈하니, 변장(邊將)이 곧 군사를 정돈하여 쫓아가 해양(海洋)에 미치자 저들이 자복하지 아니하고 문득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형세가 궁하자 항복하였는데, 3인은 싸우는 중에 화살에 맞아 죽고, 7인은 사로잡혀서 신문하니, 바로 구녀(仇女) 사람으로 족하의 문인(文引)977) 을 받고 온 자입니다. 그 배를 수색해서 검사하니, 병기[兵械]를 드러나게 싣고 그 가운데 의복과 기구가 모두 1백여 가지인데, 다 우리 변경 백성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무뢰배가 고기잡는다고 거짓 칭탁하고 겁탈하여 도둑질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 구약(舊約)에 의거하면 비록 문인이 있을지라도 만호(萬戶)에게 교부하지 아니하였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고, 몰래 병기(兵器)를 가졌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며, 항상 고기잡는 곳을 떠나서 변도(邊島)에 마음대로 돌아다닌 것도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무릇 약속을 어긴 것이 셋인데 도둑질과 약탈을 더하였고 또 항거(抗拒)해 싸움을 더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도적으로 논할 것이나, 변장이 우리 전하의 먼 곳의 사람을 편히 해주는 어진 마음을 본받아서 즉시 베어 죽이지 아니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계달하였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양민(良民)이 혹시 잘못 걸린 것인가를 의심하여 곧 조관(朝官)을 보내어 심문하고, 또 명하여 서울에 송치시켜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복심(覆審)하게 하여 그 실정을 자세히 알았으나, 오히려 즉시 법으로 처치하지 아니하고 족하에게 회부하기를 명하시니, 전하께서 귀도(貴島)에 무휼(撫恤)하는 은혜와 관곡(款曲)하신 뜻은 극진하지 아니한 바가 없습니다. 위의 사로잡힌 7인을 복국(覆鞫)한 문안(文案)과 선척(船隻)·복용(服用)을 갖추 기록하여 돌아가는 사자에게 주니, 족하가 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또 9월 11일에 흥양(興陽)의 선군(船軍) 오영부(吳永夫) 등 3인이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다가 돌아와서 바닷가에 닿자 갑자기 귀도(貴島)의 배 4척이 와서 오영부 등을 겁박하자, 오영부 등이 배를 버리고 육지에 내리니, 4배의 사람도 육지에 내려서 그 2인을 쫓아가 죽이고 의복·양식을 모두 빼앗았으며, 해남(海南)의 선군 고득명(高得明) 등이 광양현(光陽縣)에서 감[柿]을 사서 배에 싣고 돌아와서 흥양현(興陽縣) 땅에 이르자 바로 이날 또 4척의 배에 쫓기어 배를 버리고 도망쳐 숨었는데, 거기에 실은 집물(什物)과 산 감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와 같이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나라 변경 백성이 그 해독을 입을 뿐만 아니라, 장차 귀도에도 누(累)가 있을 것입니다. 족하는 엄하고 밝게 금제(禁制)하여 간특(奸慝)함을 규찰 적발하여 양국의 변경으로 하여금 영구히 편안하고 조용한 데 이르게 하면 다행하겠습니다. 또 간흉(奸兇)한 무리가 어느 나라라고 없으리오마는 다만 다스리는 데에 적당한 방법을 얻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비록 우리 나라 백성이라도 만일 금한 것을 범하고 잘못하는 자가 있거든, 족하가 일일이 와서 보이고 숨기지 아니하면, 마땅히 족하를 위하여 엄격하게 징계하기를 아끼지 아니하겠습니다. 인정으로 좋게 지낸 것이 이미 오래고 돈독하여 한 집안과 같으니, 피아(彼我)의 구별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1. 사인(使人)이 포(浦)에 머무는 날 수와 양식이 모두 정한 약속이 있으나, 역시 금제(禁制)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는 자가 많이 있으니, 모두 간사한 사람이 그 집주인과 더불어 서로 안팎이 되어 사사로운 꾀를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엄하게 방지하지 아니하면, 뒤에 반드시 간사함을 행하여 틈을 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만일 까닭없이 오래 머무는 자가 있으면 그 집주인과 함께 죄를 줄 것입니다.
1. 비축 2주 태수(肥筑二州太守) 국지 위방(菊地爲邦)이 일찍이 경인년978) 에 사자를 보내어 글을 올리기를, ‘무자년979) 에 하사한 도서(圖書)980) 를 돌아오는 사자가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유실하였으니, 다시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므로, 이에 ‘국지위방(菊地爲邦)’의 네 글자로 도서를 만들어서 부송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보내는 사자가 끊이지 아니하여, 금년에 다시 요고야 만로(要古也萬老)와 수예로(愁芮老)·오난쇄모(吾難灑毛) 등을 보내어 왔기에 바야흐로 관대(館待)981) 하고 있습니다. 또 국지 중조(菊地重朝)라는 자가 있어 금년 8월에 수주사(守主師)를 보내어 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버지 국지 위방(菊地爲邦)이 지난 정해년982) 에 사자를 보내어 도서(圖書)를 청하였는데, 사자가 돌아오지 아니하고 무자년983) 2월 28일에 아버지가 병사(病死)하고 나서 얼마 아니되어 청구한 도서가 이르렀습니다. 마침 국왕(國王)의 명이 있어 왕성(王城)에 나아가 머무르다가 금년 4월에 비로소 본토(本土)로 돌아왔습니다. 듣건대 어떤 사람이 아버지 국지 위방의 사자라고 일컫고 거짓으로 꾸며서 다시 도서를 청하였으며 해마다 사자를 보내어 왕래한다고 하니, 이는 간사한 무리가 위조(僞造)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무자년(戊子年)에 받은 도서를 돌려보냈는데, 자세히 고찰하니 과연 전일에 하사한 도서입니다. 또 국지 위방·국지 중조 부자(父子)의 두 사인(使人)이 한 때에 관(館)에 이르렀기에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니, 먼 데 사람의 일을 쉽게 분별할 수는 없고 다만 족하의 문인(文引)에 의거하여 모두 예(例)대로 관대(館待)하나, 한쪽이 참이면 다른 한쪽은 거짓일 것이며, 양쪽이 다 옳을 이치는 없을 것이니,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 있어서 피차를 속여 한때의 이득(利得)을 꾀하는 것인데, 족하가 모두 문인(文引)을 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간사한 사람이 족하의 문인까지 아울러 위조한 것인 듯하니, 모름지기 참과 거짓을 엄격하게 분별하여 불경(不敬)함을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는 사자편에 의하여 자세히 알려 주시오.
1. 대내전(大內殿) 진량(進亮) 다다량 교지(多多良敎之)는 매년 예(例)로 1척의 배를 보내는 자인데, 임진년984) 에 재차 사선(使船)을 보내어 왔기에, 그 뒤에 도착한 내두리(乃豆里)의 문로다유(文老多由)의 배를 계사년985) 의 예선(例船)으로 인계(引計)하여 대접하였습니다. 또 이해에 도소지(都小只)를 보내어서 이미 포소(浦所)에 이르렀으므로 할 수 없이 갑오년986) 의 예선(例船)으로 인대(引待)하였는데, 또 다시 수송 서기(壽松書記)를 보내었으니, 만약 항상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인대(引待)라고 이를지라도 매년 실상은 2척의 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니, 그 꾀가 매우 간교하여 사람을 신의(信義)로 접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식량을 주어 보내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추(諸酋)의 사인(使人)으로 이같은 무리가 많으니, 족하는 모름지기 전후에 왕래한 날짜를 상고하여 문인(文引)을 주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또 족하의 계사년(癸巳年)의 예사(例使)인 제25선(船)이 두 번 제포(薺浦)에 이르렀으니 옛 언약을 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르렀는데 헛되이 돌아가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배를 가지고 금년의 예선(例船)으로 옮겨 대접했습니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 속여서 서계(書契)를 청한 것인데, 족하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만든 것입니다. 무릇 간세(姦細)한 사람은 다만 제 몸의 꾀만 일삼을 뿐으로, 양국의 이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후일의 근심을 헤아리지 아니합니다. 만약 이것이 작은 일이라서 족히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면, 점점 더욱 방자하여 마침내 하늘에 넘치는 화(禍)가 될 것이니, 족하는 모름지기 자세히 살피고 엄하게 단속하여 후래(後來)를 징계하길 바랍니다.
1. 처음 약속은 무릇 원근(遠近)의 사선(使船)이 이르면 선척(船隻)을 자로 재고 또 사람의 수(數)를 점검(點檢)하여 요(料)를 받아 주기로 하였는데, 삼포에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자가 이미 많아진 뒤로부터 매양 사선(使船)이 이르면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에게 몰래 청하여 대신 점검을 받고 요를 나누어서 양쪽으로 그 이(利)를 얻으니, 비록 인수(人數)의 점검은 살필지라도 한갓 번거로울 뿐이고 마침내 그 간사함을 방지할 수 없으므로, 근자에 다시 약속하기를 인수(人數)를 점검하지 말고 다만 선체(船體)를 헤아려서 큰 배는 40명, 중간 배는 30명, 작은 배는 20명으로 하여, 비록 수(數)가 차지 아니할지라도 모두 배의 대·중·소에 의하여 전량(全量)의 요(料)를 주게 하였는데, 또 간사한 꾀를 내어 사선(使船)이 작으면 처음 이르러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의 큰 배를 몰래 빌려서 대신 요(料)를 받아 나누며 또 배를 헤아려서 정할 때에 무리를 지어 이르러 항거(抗拒)하여서 공평한 계산을 받지 아니하며, 속이고 꾸밀 뿐만 아니라 간혹 불손(不遜)함이 있으니, 이를 점점 커지게 할 수는 없으므로, 또한 법을 마련하고 엄하게 금하여 그 조짐을 막기를 바랍니다."
하고, 별폭 특사(別幅特賜)는 조미(造米) 1백 석, 황두(黃豆) 1백 석, 면주(綿紬) 30필, 흑마포(黑麻布) 30필, 면포(綿布) 50필, 저주지(楮注紙) 1백 권, 면자(綿子) 5근, 해송자(海松子) 2석, 호피(虎皮) 2장, 표피(豹皮) 2장, 청밀(淸蜜)987) 6두, 토산 정포(正布) 50필, 면포 30필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4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64면
- 【분류】외교-왜(倭)
- [註 969] 재처(裁處) : 재결.
- [註 970] 역속(役屬) : 의무적으로 소속됨.
- [註 971] 정구(丁口) : 인구.
- [註 972] 간세(姦細) : 간사하고 좀스러운 무리.
- [註 973] 치부(置簿) : 장부에 기록함.
- [註 974] 번보(藩輔) : 바깥에서 보좌하는 것.
- [註 975] 기의(機宜) : 기회와 형편.
- [註 976] 편맹(編氓) : 호적에 편입한 백성.
- [註 977] 문인(文引) : 조선조 때 우리 나라에 왕래하던 왜인(倭人)에게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씨(宗氏)가 발행하던 도항(渡航) 증명서.
- [註 978]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979]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980] 도서(圖書) : 조선조 때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의 유력자(有力者)에게 내려 준 동인(銅印). 내조(來朝)하던 사신이 지정된 항구에 배를 대고 들어오면 변장(邊將)은 서계(書契)·노인(路引)과 함께 이 동인을 자세히 검사하고 매년 입국하는 정원을 확인한 후 서울로 보내었음.
- [註 981] 관대(館待) : 관에서 접대함.
- [註 982]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983]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984] 임진년 : 1472 성종 3년.
- [註 985] 계사년 : 1473 성종 4년.
- [註 986]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987] 청밀(淸蜜) : 꿀.
원문
○禮曹答宗貞國書曰:
承書, 得審動履迪吉爲慰, 所獻禮物謹啓收訖。 就中前以三浦人刷還事, 屢瀆左右, 再蒙許可, 而竟無裁處, 未知其故, 乃今特遣宗人, 惠書示以久稽之由, 且令刷還, 積年所圖, 今始得行。 可見足下踐言履信, 圖事有終之美, 爲足下喜慶。 但來使欲聽我國指揮, 是雖不敢自專之善意, 然三浦之人, 雖居我地, 未嘗役屬我國, 丁口之數, 亦所未悉, 安知何者當還, 何者可留, 而乃敢指揮於其間哉? 三浦雖與貴島隔海, 然朝暮往來, 奔走服事, 則三浦之事, 何待於我之指揮? 第念我先王與先島主, 深思利害, 爲萬歲永保之計, 約留六十名, 餘悉刷還。 歲久滋蔓, 三浦殆不能容, 此皆脫籍亡命之人, 非徒無益於彼此, 亦或爲蠱於疆域, 此我所以不得不煩於足下者也。 今特送茂勝, 承足下之命, 將悉搜姦細, 還于舊土, 擇其可留者, 依約留居, 兩各置簿, 明知名目如是, 則欺詐自戢, 兩無疑阻, 可以追繼祖先, 可以永固邦交, 寧不爲足下賀也? 謹將此意以啓, 我殿下甚嘉之, 命有司, 館待來使, 有加於舊。 又命本曹若曰: "今島主賢明, 盡心藩輔, 凡有所命, 罔敢違越, 觀其措置, 又合機宜, 正是可與有爲者也。 爾禮曹更以邇來彼此不便事件, 委悉通諭, 以糾非違。" 迺據舊約及已行條例, 考其相違有妨事體者, 逐一詳錄于後, 曲照量宜施行, 備錄三浦刷還人及留居人名, 一一回示幸甚。 宗出羽守貞秀嘗遣人請加聘船之數, 但以先王時所定, 未敢啓達, 今足下委政於九郞, 而復爲之請, 辭意懇至, 謹已稟旨, 特加四艘, 蓋重足下之請而賢九郞耳。 宜卽轉諭九郞, 令歲遣五船, 三浦居人, 我國視同編氓, 其失火之人, 義所當恤, 固非異恩, 而裁書陳謝, 亦可見足下遇事知感之誠, 故我殿下特賜褒賞, 具在別幅, 惟冀領納。 不宣。 一, 貴島船一艘, 至我國興陽縣沿海地方, 遇我船軍姜自連等十人所乘二船, 刦掠衣糧什物殆盡, 邊將卽整兵, 追及海洋, 彼不輸情, 遽與我軍戰, 勢窮乃降, 三人方戰中矢而死, 七人見擒訊之, 則乃仇女之人, 受足下文引而來者也。 搜檢其船, 現載兵械, 其中衣服器用凡一百餘件, 皆搶奪我國邊民而得之者也。 由此觀之, 無賴之徒, 假托釣魚而行刦爲盜無疑矣。 若據舊約, 則雖有文引而不付萬戶, 違約也, 潛持兵器, 違約也, 離釣魚常處, 而橫行邊島, 亦違約也。 凡違約者三, 而加之盜掠, 又加之以拒戰, 固當以賊論, 然邊將體殿下綏遠之仁, 不卽誅殺, 具由以啓, 殿下尙慮良民或罹詿誤, 卽遣朝官審問, 又命致之京都, 使大臣審覆, 悉得其情, 然猶不卽置法, 乃命付之足下, 殿下之於貴島撫恤之恩, 款曲之意, 無所不盡也。 上項被擒七人覆鞫文案ㆍ船隻ㆍ服用具錄, 以授回使, 足下見之, 可知其情矣。 此後又於九月十一日, 興陽船軍吳永夫等三人入海釣魚, 還泊海澨, 忽有貴國船四艘來刦永夫等, 永夫等棄船下陸, 四艘之人亦下陸, 追殺其二人, 盡奪衣糧, 海南縣船軍高得明等買柿子于光陽縣, 載船還到興陽縣地, 卽於是日, 又爲四艘所迫逐, 棄船逃竄, 其所載什物所買柿子, 皆見搶奪。 若此不已, 非唯我國邊民被其毒, 亦將有累於貴島矣。 足下嚴明禁制, 糾摘姦慝, 使兩國邊圉永底晏淸爲幸。 且姦兇之人, 何國蔑有, 但有治之得其道耳。 雖我國之民, 苟有犯禁爲非者, 足下一一來示, 勿以爲諱, 當爲足下痛懲不惜。 情妤旣久且篤, 似同一家, 勿以彼我區別, 不亦可乎? 一, 使人留浦日糧, 皆有定約, 然亦不畏禁制, 故爲稽留者, 頗多有之, 皆姦人與其所主, 相爲表裏, 欲遂私計耳。 若不嚴加防制, 則後必有騁詐生釁者矣。 自今如有無故稽留者, 幷其主人科罪。 一, 肥、筑二州太守菊地爲邦曾於庚寅歲, 遣使致書曰: "戊子所賜圖書, 還使過海, 値風墜失, 仍請改給。" 廼作菊地爲邦四字圖書付回。 自後遣使不絶, 今年復遣要古也萬老及愁芮老、吾難灑毛等, 方來館待。 又有菊地重朝者, 今年八月, 遣守主師來, 其書曰: "父爲邦, 去丁亥年, 遣使請圖書, 使者未還, 而戊子二月二十八日, 父病死, 未幾所請圖書乃到。 于時適有國王命, 赴王城被留, 今年四月, 始還本土。 聞有人稱父爲邦使者, 飾詐更乞圖書, 每歲遣使往來, 此是姦徒僞造之事。" 仍將戊子所受圖書送還, 諦驗之則果前日所賜圖書。 且爲邦、重朝父子兩使人, 竝時到館, 問之則俱曰: "彼之所言詐也", 遠人之事, 未易究辨, 只據足下文引, 皆依例館待, 然彼實則此虛, 固無兩是之理, 必有姦人, 欺罔彼此, 以規一時之利者, 而足下竝給文引何哉? 恐姦人竝足下文引而僞作也, 須痛辨眞僞, 以懲不恪, 因來使詳示。 一, 大內進亮多多良敎之每歲例送一船者也, 乃於壬辰年, 再遣使來, 故其後到乃豆里 文老多由船, 以癸巳年例船引計待之。 又於是年, 遣都小只已到浦所, 故不獲已以令甲午年例船引待, 而復遣壽松書記, 若常如此, 則雖云引待, 每年實遣兩船, 其計甚巧, 非與人以信之義也, 故給糧送還。 不特是耳, 諸酋使人多如此類, 足下須考前後往來日月, 勿給文引爲可。 且足下癸巳年例使第二十五船, 兩至薺浦, 似違舊約。 然亦已到, 不可空還, 故將一船以今年例船移待之。 此必姦人冒爲書契, 而足下未及致察耳, 不然則僞爲者也。 夫姦細之人, 但爲身謀, 不顧兩國利害, 不計後日之患。 若以爲此乃小事, 不足深慮, 置而不問, 則轉益縱肆, 終必滔天, 足下須檢究痛繩, 以懲後來。 一, 初約, 凡遠近使船之來, 尺量船隻, 又點人數以給料, 自三浦恒居者旣多, 每使船之至, 潛請恒居人, 代點受料而分之, 兩得其利, 雖審點數, 徒爲煩瑣耳, 終不能防其姦, 近者更約, 不點人數, 只量船體, 大船則四十人, 中船則三十人, 小船則二十人, 雖不滿於數, 悉依船之大中小, 全數給料, 又生姦計, 使船小, 則於其初至, 潛借恒居人大船, 代量受料而分之, 又於量船之時, 群至抗拒, 不受平量, 非徒飾詐, 或有不遜, 漸不可長, 亦宜設法痛禁, 以杜其漸。
別幅特賜造米一百碩、黃豆一百碩、綿紬三十匹、黑麻布三十匹、綿布五十匹、楮注紙一百卷、綿子五斤、海松子二碩、虎皮二張、豹皮二張、淸蜜六斗、土宜正布五十匹、綿布三十匹。
- 【태백산사고본】 7책 4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64면
- 【분류】외교-왜(倭)
성종실록49권, 성종 5년 11월 10일 辛酉 2/6 기사 /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예조에서 종정국에게 답한 글
국역
예조(禮曹)에서 종정국(宗貞國)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글을 받아 평안함을 알게 되어 위로됩니다. 바친 예물은 삼가 계달(啓達)하여 잘 수납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에 삼포(三浦)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일로 여러 번 좌우에게 청하여 두 번 허락함을 받았는데, 마침내 재처(裁處)969) 함이 없어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특별히 종인(宗人)을 보내어 혜서(惠書)에 오래고 늦어진 이유를 보이고 또 쇄환(刷還)하게 하여서, 여러 해 동안 의도(意圖)하던 바가 이제 비로소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족하(足下)가 말을 실천하고 신의를 지키며 일을 도모하기에 유종(有終)의 미가 있음을 볼 수 있어서 족하를 위하여 기뻐하고 경사스럽습니다. 다만 오는 사신이 우리 나라의 지휘를 듣고자 하는데 이는 비록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좋은 뜻에서 나왔으나, 삼포 사람은 비록 우리 땅에 살더라도 일찍이 우리 나라에 역속(役屬)970) 되지 아니하여 정구(丁口)971) 의 수(數)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어떤 자가 마땅히 돌아가야 하고 어떤 자가 머물러 살 수 있는지를 어떻게 알아서 감히 그 사이에 지휘하겠습니까? 삼포(三浦)는 비록 귀도(貴島)와 더불어 바다가 격하였으나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여 분주히 일을 하면 어찌 우리의 지휘를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우리 선왕(先王)이 앞서의 도주(島主)와 더불어 이해(利害)를 깊이 생각하여 만세에 길이 보전할 계책을 만들어서, 약 60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쇄환(刷還)하였습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자 불고 늘어서 삼포에서는 거의 용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탈적(脫籍)하여 망명해 온 사람인데, 피차에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혹시 지역에 해가 될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가 족하에게 번거롭게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종무승을 보내어 족하의 명을 받아 장차 간세(姦細)972) 를 다 찾아서 예전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머무를 만한 자만 골라서 약속대로 남아 있게 하여, 양쪽에 각각 치부(置簿)973) 하여 명목(名目)이 이와 같음을 밝게 알면, 속이는 것이 저절로 없어지고 양쪽에 의심과 막힘이 없을 것이므로, 가히 조선(祖先)을 멀리 이어받들고 가히 국교[邦交]를 길이 튼튼하게 할 것이니, 어찌 족하를 위해 하례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삼가 이 뜻을 가지고 우리 전하께 아뢰었더니, 매우 아름답게 여기시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온 사자(使者)를 관(館)에서 대접함이 예전보다 더함이 있고, 또 본조(本曹)에 명하기를, ‘지금의 도주(島主)가 현명(賢明)하여 번보(藩輔)974) 에 마음을 다하여 무릇 명한 바가 있으면 감히 어기지 아니하고, 그 조처함을 보건대 또 기의(機宜)975) 에 적합하니, 더불어 일할 만한 자이다. 너희 예조에서는 다시 근래의 피차 불편한 사건들을 모두 자세하게 통유(通諭)하여 비위(非違)를 살피게 하라.’고 하므로, 이에 구약(舊約)과 이미 행한 조례(條例)들에 의거하여, 상위(相違)되고 사체(事體)에 방해됨이 있는 것을 상고하여 하나하나 뒤에 기록하니, 살펴서 적당하게 시행하고, 삼포(三浦)의 쇄환(刷還)한 사람과 머물러 사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회시(回示)해 주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종출우(宗出羽)·종정수(宗貞秀)가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빙선(聘船)의 수(數)를 더하기를 청하였는데, 다만 선왕(先王) 때에 정한 것이므로 감히 계달하지 못하다가 이제 족하가 구랑(九郞)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다시 청하여 말뜻이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삼가 이미 품지(稟旨)하여 특별히 4척을 더하였으니, 대저 족하께서 청을 중히 하고 구랑(九郞)을 어질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땅히 곧 구랑에게 전유(轉諭)하여 한 해에 배 5척을 보내도록 하고 삼포에 사는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 편맹(編氓)976) 과 같이 보므로 그 실화(失火)한 사람을 의리상 당연히 구휼하는 것이 본디 별다른 은혜가 아닌데 글을 만들어 사례를 진술하니, 또한 일을 만나 고마움을 아는 족하의 정성을 가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포상(褒賞)을 내리시니 별폭(別幅)에 갖춘대로 영수(領受)하기를 바랍니다. 이만 그칩니다.
1. 귀도(貴島)의 배 한 척이 우리 나라 흥양현(興陽縣) 연해 지방(沿海地方)에 이르렀는데 우리 선군(船軍) 강자련(姜自連) 등 10인이 탄 배와 만나자 의복·양식·집물(什物)을 거의 다 겁탈하니, 변장(邊將)이 곧 군사를 정돈하여 쫓아가 해양(海洋)에 미치자 저들이 자복하지 아니하고 문득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형세가 궁하자 항복하였는데, 3인은 싸우는 중에 화살에 맞아 죽고, 7인은 사로잡혀서 신문하니, 바로 구녀(仇女) 사람으로 족하의 문인(文引)977) 을 받고 온 자입니다. 그 배를 수색해서 검사하니, 병기[兵械]를 드러나게 싣고 그 가운데 의복과 기구가 모두 1백여 가지인데, 다 우리 변경 백성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무뢰배가 고기잡는다고 거짓 칭탁하고 겁탈하여 도둑질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 구약(舊約)에 의거하면 비록 문인이 있을지라도 만호(萬戶)에게 교부하지 아니하였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고, 몰래 병기(兵器)를 가졌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며, 항상 고기잡는 곳을 떠나서 변도(邊島)에 마음대로 돌아다닌 것도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무릇 약속을 어긴 것이 셋인데 도둑질과 약탈을 더하였고 또 항거(抗拒)해 싸움을 더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도적으로 논할 것이나, 변장이 우리 전하의 먼 곳의 사람을 편히 해주는 어진 마음을 본받아서 즉시 베어 죽이지 아니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계달하였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양민(良民)이 혹시 잘못 걸린 것인가를 의심하여 곧 조관(朝官)을 보내어 심문하고, 또 명하여 서울에 송치시켜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복심(覆審)하게 하여 그 실정을 자세히 알았으나, 오히려 즉시 법으로 처치하지 아니하고 족하에게 회부하기를 명하시니, 전하께서 귀도(貴島)에 무휼(撫恤)하는 은혜와 관곡(款曲)하신 뜻은 극진하지 아니한 바가 없습니다. 위의 사로잡힌 7인을 복국(覆鞫)한 문안(文案)과 선척(船隻)·복용(服用)을 갖추 기록하여 돌아가는 사자에게 주니, 족하가 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또 9월 11일에 흥양(興陽)의 선군(船軍) 오영부(吳永夫) 등 3인이 바다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다가 돌아와서 바닷가에 닿자 갑자기 귀도(貴島)의 배 4척이 와서 오영부 등을 겁박하자, 오영부 등이 배를 버리고 육지에 내리니, 4배의 사람도 육지에 내려서 그 2인을 쫓아가 죽이고 의복·양식을 모두 빼앗았으며, 해남(海南)의 선군 고득명(高得明) 등이 광양현(光陽縣)에서 감[柿]을 사서 배에 싣고 돌아와서 흥양현(興陽縣) 땅에 이르자 바로 이날 또 4척의 배에 쫓기어 배를 버리고 도망쳐 숨었는데, 거기에 실은 집물(什物)과 산 감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와 같이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나라 변경 백성이 그 해독을 입을 뿐만 아니라, 장차 귀도에도 누(累)가 있을 것입니다. 족하는 엄하고 밝게 금제(禁制)하여 간특(奸慝)함을 규찰 적발하여 양국의 변경으로 하여금 영구히 편안하고 조용한 데 이르게 하면 다행하겠습니다. 또 간흉(奸兇)한 무리가 어느 나라라고 없으리오마는 다만 다스리는 데에 적당한 방법을 얻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비록 우리 나라 백성이라도 만일 금한 것을 범하고 잘못하는 자가 있거든, 족하가 일일이 와서 보이고 숨기지 아니하면, 마땅히 족하를 위하여 엄격하게 징계하기를 아끼지 아니하겠습니다. 인정으로 좋게 지낸 것이 이미 오래고 돈독하여 한 집안과 같으니, 피아(彼我)의 구별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1. 사인(使人)이 포(浦)에 머무는 날 수와 양식이 모두 정한 약속이 있으나, 역시 금제(禁制)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는 자가 많이 있으니, 모두 간사한 사람이 그 집주인과 더불어 서로 안팎이 되어 사사로운 꾀를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엄하게 방지하지 아니하면, 뒤에 반드시 간사함을 행하여 틈을 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만일 까닭없이 오래 머무는 자가 있으면 그 집주인과 함께 죄를 줄 것입니다.
1. 비축 2주 태수(肥筑二州太守) 국지 위방(菊地爲邦)이 일찍이 경인년978) 에 사자를 보내어 글을 올리기를, ‘무자년979) 에 하사한 도서(圖書)980) 를 돌아오는 사자가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유실하였으니, 다시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므로, 이에 ‘국지위방(菊地爲邦)’의 네 글자로 도서를 만들어서 부송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보내는 사자가 끊이지 아니하여, 금년에 다시 요고야 만로(要古也萬老)와 수예로(愁芮老)·오난쇄모(吾難灑毛) 등을 보내어 왔기에 바야흐로 관대(館待)981) 하고 있습니다. 또 국지 중조(菊地重朝)라는 자가 있어 금년 8월에 수주사(守主師)를 보내어 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버지 국지 위방(菊地爲邦)이 지난 정해년982) 에 사자를 보내어 도서(圖書)를 청하였는데, 사자가 돌아오지 아니하고 무자년983) 2월 28일에 아버지가 병사(病死)하고 나서 얼마 아니되어 청구한 도서가 이르렀습니다. 마침 국왕(國王)의 명이 있어 왕성(王城)에 나아가 머무르다가 금년 4월에 비로소 본토(本土)로 돌아왔습니다. 듣건대 어떤 사람이 아버지 국지 위방의 사자라고 일컫고 거짓으로 꾸며서 다시 도서를 청하였으며 해마다 사자를 보내어 왕래한다고 하니, 이는 간사한 무리가 위조(僞造)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무자년(戊子年)에 받은 도서를 돌려보냈는데, 자세히 고찰하니 과연 전일에 하사한 도서입니다. 또 국지 위방·국지 중조 부자(父子)의 두 사인(使人)이 한 때에 관(館)에 이르렀기에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니, 먼 데 사람의 일을 쉽게 분별할 수는 없고 다만 족하의 문인(文引)에 의거하여 모두 예(例)대로 관대(館待)하나, 한쪽이 참이면 다른 한쪽은 거짓일 것이며, 양쪽이 다 옳을 이치는 없을 것이니,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 있어서 피차를 속여 한때의 이득(利得)을 꾀하는 것인데, 족하가 모두 문인(文引)을 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간사한 사람이 족하의 문인까지 아울러 위조한 것인 듯하니, 모름지기 참과 거짓을 엄격하게 분별하여 불경(不敬)함을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는 사자편에 의하여 자세히 알려 주시오.
1. 대내전(大內殿) 진량(進亮) 다다량 교지(多多良敎之)는 매년 예(例)로 1척의 배를 보내는 자인데, 임진년984) 에 재차 사선(使船)을 보내어 왔기에, 그 뒤에 도착한 내두리(乃豆里)의 문로다유(文老多由)의 배를 계사년985) 의 예선(例船)으로 인계(引計)하여 대접하였습니다. 또 이해에 도소지(都小只)를 보내어서 이미 포소(浦所)에 이르렀으므로 할 수 없이 갑오년986) 의 예선(例船)으로 인대(引待)하였는데, 또 다시 수송 서기(壽松書記)를 보내었으니, 만약 항상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인대(引待)라고 이를지라도 매년 실상은 2척의 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니, 그 꾀가 매우 간교하여 사람을 신의(信義)로 접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식량을 주어 보내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추(諸酋)의 사인(使人)으로 이같은 무리가 많으니, 족하는 모름지기 전후에 왕래한 날짜를 상고하여 문인(文引)을 주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또 족하의 계사년(癸巳年)의 예사(例使)인 제25선(船)이 두 번 제포(薺浦)에 이르렀으니 옛 언약을 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르렀는데 헛되이 돌아가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배를 가지고 금년의 예선(例船)으로 옮겨 대접했습니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 속여서 서계(書契)를 청한 것인데, 족하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만든 것입니다. 무릇 간세(姦細)한 사람은 다만 제 몸의 꾀만 일삼을 뿐으로, 양국의 이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후일의 근심을 헤아리지 아니합니다. 만약 이것이 작은 일이라서 족히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면, 점점 더욱 방자하여 마침내 하늘에 넘치는 화(禍)가 될 것이니, 족하는 모름지기 자세히 살피고 엄하게 단속하여 후래(後來)를 징계하길 바랍니다.
1. 처음 약속은 무릇 원근(遠近)의 사선(使船)이 이르면 선척(船隻)을 자로 재고 또 사람의 수(數)를 점검(點檢)하여 요(料)를 받아 주기로 하였는데, 삼포에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자가 이미 많아진 뒤로부터 매양 사선(使船)이 이르면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에게 몰래 청하여 대신 점검을 받고 요를 나누어서 양쪽으로 그 이(利)를 얻으니, 비록 인수(人數)의 점검은 살필지라도 한갓 번거로울 뿐이고 마침내 그 간사함을 방지할 수 없으므로, 근자에 다시 약속하기를 인수(人數)를 점검하지 말고 다만 선체(船體)를 헤아려서 큰 배는 40명, 중간 배는 30명, 작은 배는 20명으로 하여, 비록 수(數)가 차지 아니할지라도 모두 배의 대·중·소에 의하여 전량(全量)의 요(料)를 주게 하였는데, 또 간사한 꾀를 내어 사선(使船)이 작으면 처음 이르러 항구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의 큰 배를 몰래 빌려서 대신 요(料)를 받아 나누며 또 배를 헤아려서 정할 때에 무리를 지어 이르러 항거(抗拒)하여서 공평한 계산을 받지 아니하며, 속이고 꾸밀 뿐만 아니라 간혹 불손(不遜)함이 있으니, 이를 점점 커지게 할 수는 없으므로, 또한 법을 마련하고 엄하게 금하여 그 조짐을 막기를 바랍니다."
하고, 별폭 특사(別幅特賜)는 조미(造米) 1백 석, 황두(黃豆) 1백 석, 면주(綿紬) 30필, 흑마포(黑麻布) 30필, 면포(綿布) 50필, 저주지(楮注紙) 1백 권, 면자(綿子) 5근, 해송자(海松子) 2석, 호피(虎皮) 2장, 표피(豹皮) 2장, 청밀(淸蜜)987) 6두, 토산 정포(正布) 50필, 면포 30필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4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64면
- 【분류】외교-왜(倭)
- [註 969] 재처(裁處) : 재결.
- [註 970] 역속(役屬) : 의무적으로 소속됨.
- [註 971] 정구(丁口) : 인구.
- [註 972] 간세(姦細) : 간사하고 좀스러운 무리.
- [註 973] 치부(置簿) : 장부에 기록함.
- [註 974] 번보(藩輔) : 바깥에서 보좌하는 것.
- [註 975] 기의(機宜) : 기회와 형편.
- [註 976] 편맹(編氓) : 호적에 편입한 백성.
- [註 977] 문인(文引) : 조선조 때 우리 나라에 왕래하던 왜인(倭人)에게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씨(宗氏)가 발행하던 도항(渡航) 증명서.
- [註 978]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979]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980] 도서(圖書) : 조선조 때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의 유력자(有力者)에게 내려 준 동인(銅印). 내조(來朝)하던 사신이 지정된 항구에 배를 대고 들어오면 변장(邊將)은 서계(書契)·노인(路引)과 함께 이 동인을 자세히 검사하고 매년 입국하는 정원을 확인한 후 서울로 보내었음.
- [註 981] 관대(館待) : 관에서 접대함.
- [註 982]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983]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984] 임진년 : 1472 성종 3년.
- [註 985] 계사년 : 1473 성종 4년.
- [註 986]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987] 청밀(淸蜜) : 꿀.
원문
○禮曹答宗貞國書曰:
承書, 得審動履迪吉爲慰, 所獻禮物謹啓收訖。 就中前以三浦人刷還事, 屢瀆左右, 再蒙許可, 而竟無裁處, 未知其故, 乃今特遣宗人, 惠書示以久稽之由, 且令刷還, 積年所圖, 今始得行。 可見足下踐言履信, 圖事有終之美, 爲足下喜慶。 但來使欲聽我國指揮, 是雖不敢自專之善意, 然三浦之人, 雖居我地, 未嘗役屬我國, 丁口之數, 亦所未悉, 安知何者當還, 何者可留, 而乃敢指揮於其間哉? 三浦雖與貴島隔海, 然朝暮往來, 奔走服事, 則三浦之事, 何待於我之指揮? 第念我先王與先島主, 深思利害, 爲萬歲永保之計, 約留六十名, 餘悉刷還。 歲久滋蔓, 三浦殆不能容, 此皆脫籍亡命之人, 非徒無益於彼此, 亦或爲蠱於疆域, 此我所以不得不煩於足下者也。 今特送茂勝, 承足下之命, 將悉搜姦細, 還于舊土, 擇其可留者, 依約留居, 兩各置簿, 明知名目如是, 則欺詐自戢, 兩無疑阻, 可以追繼祖先, 可以永固邦交, 寧不爲足下賀也? 謹將此意以啓, 我殿下甚嘉之, 命有司, 館待來使, 有加於舊。 又命本曹若曰: "今島主賢明, 盡心藩輔, 凡有所命, 罔敢違越, 觀其措置, 又合機宜, 正是可與有爲者也。 爾禮曹更以邇來彼此不便事件, 委悉通諭, 以糾非違。" 迺據舊約及已行條例, 考其相違有妨事體者, 逐一詳錄于後, 曲照量宜施行, 備錄三浦刷還人及留居人名, 一一回示幸甚。 宗出羽守貞秀嘗遣人請加聘船之數, 但以先王時所定, 未敢啓達, 今足下委政於九郞, 而復爲之請, 辭意懇至, 謹已稟旨, 特加四艘, 蓋重足下之請而賢九郞耳。 宜卽轉諭九郞, 令歲遣五船, 三浦居人, 我國視同編氓, 其失火之人, 義所當恤, 固非異恩, 而裁書陳謝, 亦可見足下遇事知感之誠, 故我殿下特賜褒賞, 具在別幅, 惟冀領納。 不宣。 一, 貴島船一艘, 至我國興陽縣沿海地方, 遇我船軍姜自連等十人所乘二船, 刦掠衣糧什物殆盡, 邊將卽整兵, 追及海洋, 彼不輸情, 遽與我軍戰, 勢窮乃降, 三人方戰中矢而死, 七人見擒訊之, 則乃仇女之人, 受足下文引而來者也。 搜檢其船, 現載兵械, 其中衣服器用凡一百餘件, 皆搶奪我國邊民而得之者也。 由此觀之, 無賴之徒, 假托釣魚而行刦爲盜無疑矣。 若據舊約, 則雖有文引而不付萬戶, 違約也, 潛持兵器, 違約也, 離釣魚常處, 而橫行邊島, 亦違約也。 凡違約者三, 而加之盜掠, 又加之以拒戰, 固當以賊論, 然邊將體殿下綏遠之仁, 不卽誅殺, 具由以啓, 殿下尙慮良民或罹詿誤, 卽遣朝官審問, 又命致之京都, 使大臣審覆, 悉得其情, 然猶不卽置法, 乃命付之足下, 殿下之於貴島撫恤之恩, 款曲之意, 無所不盡也。 上項被擒七人覆鞫文案ㆍ船隻ㆍ服用具錄, 以授回使, 足下見之, 可知其情矣。 此後又於九月十一日, 興陽船軍吳永夫等三人入海釣魚, 還泊海澨, 忽有貴國船四艘來刦永夫等, 永夫等棄船下陸, 四艘之人亦下陸, 追殺其二人, 盡奪衣糧, 海南縣船軍高得明等買柿子于光陽縣, 載船還到興陽縣地, 卽於是日, 又爲四艘所迫逐, 棄船逃竄, 其所載什物所買柿子, 皆見搶奪。 若此不已, 非唯我國邊民被其毒, 亦將有累於貴島矣。 足下嚴明禁制, 糾摘姦慝, 使兩國邊圉永底晏淸爲幸。 且姦兇之人, 何國蔑有, 但有治之得其道耳。 雖我國之民, 苟有犯禁爲非者, 足下一一來示, 勿以爲諱, 當爲足下痛懲不惜。 情妤旣久且篤, 似同一家, 勿以彼我區別, 不亦可乎? 一, 使人留浦日糧, 皆有定約, 然亦不畏禁制, 故爲稽留者, 頗多有之, 皆姦人與其所主, 相爲表裏, 欲遂私計耳。 若不嚴加防制, 則後必有騁詐生釁者矣。 自今如有無故稽留者, 幷其主人科罪。 一, 肥、筑二州太守菊地爲邦曾於庚寅歲, 遣使致書曰: "戊子所賜圖書, 還使過海, 値風墜失, 仍請改給。" 廼作菊地爲邦四字圖書付回。 自後遣使不絶, 今年復遣要古也萬老及愁芮老、吾難灑毛等, 方來館待。 又有菊地重朝者, 今年八月, 遣守主師來, 其書曰: "父爲邦, 去丁亥年, 遣使請圖書, 使者未還, 而戊子二月二十八日, 父病死, 未幾所請圖書乃到。 于時適有國王命, 赴王城被留, 今年四月, 始還本土。 聞有人稱父爲邦使者, 飾詐更乞圖書, 每歲遣使往來, 此是姦徒僞造之事。" 仍將戊子所受圖書送還, 諦驗之則果前日所賜圖書。 且爲邦、重朝父子兩使人, 竝時到館, 問之則俱曰: "彼之所言詐也", 遠人之事, 未易究辨, 只據足下文引, 皆依例館待, 然彼實則此虛, 固無兩是之理, 必有姦人, 欺罔彼此, 以規一時之利者, 而足下竝給文引何哉? 恐姦人竝足下文引而僞作也, 須痛辨眞僞, 以懲不恪, 因來使詳示。 一, 大內進亮多多良敎之每歲例送一船者也, 乃於壬辰年, 再遣使來, 故其後到乃豆里 文老多由船, 以癸巳年例船引計待之。 又於是年, 遣都小只已到浦所, 故不獲已以令甲午年例船引待, 而復遣壽松書記, 若常如此, 則雖云引待, 每年實遣兩船, 其計甚巧, 非與人以信之義也, 故給糧送還。 不特是耳, 諸酋使人多如此類, 足下須考前後往來日月, 勿給文引爲可。 且足下癸巳年例使第二十五船, 兩至薺浦, 似違舊約。 然亦已到, 不可空還, 故將一船以今年例船移待之。 此必姦人冒爲書契, 而足下未及致察耳, 不然則僞爲者也。 夫姦細之人, 但爲身謀, 不顧兩國利害, 不計後日之患。 若以爲此乃小事, 不足深慮, 置而不問, 則轉益縱肆, 終必滔天, 足下須檢究痛繩, 以懲後來。 一, 初約, 凡遠近使船之來, 尺量船隻, 又點人數以給料, 自三浦恒居者旣多, 每使船之至, 潛請恒居人, 代點受料而分之, 兩得其利, 雖審點數, 徒爲煩瑣耳, 終不能防其姦, 近者更約, 不點人數, 只量船體, 大船則四十人, 中船則三十人, 小船則二十人, 雖不滿於數, 悉依船之大中小, 全數給料, 又生姦計, 使船小, 則於其初至, 潛借恒居人大船, 代量受料而分之, 又於量船之時, 群至抗拒, 不受平量, 非徒飾詐, 或有不遜, 漸不可長, 亦宜設法痛禁, 以杜其漸。
別幅特賜造米一百碩、黃豆一百碩、綿紬三十匹、黑麻布三十匹、綿布五十匹、楮注紙一百卷、綿子五斤、海松子二碩、虎皮二張、豹皮二張、淸蜜六斗、土宜正布五十匹、綿布三十匹。
- 【태백산사고본】 7책 4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64면
- 【분류】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