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6권, 성종 1년 6월 3일 庚戌 9/9 기사 /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구치관·조석문·한계미·김길통·어세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역
구치관(具致寬)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겸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석문(曺錫文)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겸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한계미(韓繼美)를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노사신(盧思愼)을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 김길통(金吉通)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어세공(魚世恭)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아성군(牙城君)으로, 홍상(洪常)을 통헌 대부(通憲大夫) 의빈부 승빈(儀賓府承賓)으로, 한의(韓㠖)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선형(宣炯)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경기 관찰사(行京畿觀察使)로, 김관(金瓘)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권양(權良)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진주 목사(行晉州牧使)로, 김순신(金舜臣)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장흥 부사(行長興府使)로 삼았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첨정(僉正) 윤한(尹瀚)과 인의(引儀) 문간(文僴)과 판관(判官) 배지눌(裵止訥)과 목사(牧使) 안치강(安致康) 등이 파직(罷職)되었는데, 모두 대간(臺諫)에서 논(論)한 자들이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구치관은 사람됨이 강의(强毅)하고 청렴하고 곧은 것을 스스로 자랑하며, 굳굳하게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이 청탁을 하지 못하였고, 성질이 또 검약(儉約)하여 집안의 재산을 돌보지 아니하니, 그 때의 의논이 자못 그를 칭찬하였다. 한계미는 겉으로는 공손하였으나, 안으로는 간사하여,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되었을 때 무릇 그가 이끌어 올린 사람들은 족친(族親)이 아니면, 곧 돈으로써 청탁한 자였는데, 종모제(從母弟) 조간(曹幹)을 발탁하여 사간(司諫)을 삼고, 조카 사위 이영희(李永禧)를 훈련 부정(訓鍊副正)으로 삼는 등 그가 사정(私情)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대간(臺諫)에서 제수(除授)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므로, 한계미는 드디어 그 직임(職任)에서 사임하였다. 조석문은 겉으로는 엄하나, 안으로는 부드럽고, 임금의 뜻을 잘 살피었는데, 일찍이 판호조(判戶曹)로서 이재(理財)454) 를 스스로 자랑하면서 조그마한 이익도 다 밝혀냈다. 윤한은 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의 아들이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별할 줄도 몰랐으니, 일찍이 종묘 령(宗廟令)이 되어서 관청에 나아가는 날에 아전이 공좌부(公座簿)455) 를 가지고 나아가서 서명하기를 청하자, 윤한이 손을 흔들면서 굳이 거절하고 말하기를, ‘공안(公案)에 서명하는 것은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부옹(父翁)456) 에게 물어보고 말씀을 들은 다음에야 서명하겠다.’ 하니, 아전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문간은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의 사위였는데, 광망(狂妄)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배지눌은 일찍이 사복 직장(司僕直長)이 되었는데, 일찍이 목장(牧場)의 병든 말을 매매할 때에 권력이 있는 재상으로서 이를 청하는 자가 있으니, 양마(良馬)로 바꾸어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서용(敍用)하지 아니하기로 논하였으나, 배지눌의 집이 상당히 부자이고 아들이 없어서 일찍이 한명회(韓明澮)의 아들 한보(韓堡)를 수양(收養)한다고 칭하고 재산을 기울여서 돈을 주니, 한명회가 힘써 발탁하여 이를 썼는데, 나이가 많게 되자 혼매(昏昧)하여 일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지만, 한명회 때문에 오랫동안 관직에서 쫓겨나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 하였다. 그 때 재상(宰相)으로서 남의 노비(奴婢)나 전택(田宅)을 받은 자가 혹은 수양(收養)이라고 칭하고, 사람을 관리에 보임(補任)할 수가 있었다.
- [註 454] 이재(理財) : 재무를 잘 다스려 관장하는 것.
- [註 455] 공좌부(公座簿) : 관리가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그 이름을 적던 장부. 고공사(考功司)에서 이것을 기준으로 관리의 근태(勤怠)를 평가하였으며, 세종 25년(1443)부터 아일(衙日)에도 이를 설치하였다고 함. 제조(提調)가 날마다 공좌부를 점검하여 이유 없이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는 각각 그 이름 밑에 동그라미[圈]를 쳤음.
- [註 456] 부옹(父翁) : 아버지.
원문
○以具致寬爲大匡輔國崇祿綾城府院君兼吏曹判書, 曺錫文大匡輔國崇祿昌寧府院君兼戶曹判書, 韓繼美輔國崇祿議政府左贊成, 盧思愼崇祿議政府右贊成, 金吉通正憲漢城府判尹, 魚世恭資憲牙城君, 洪常通憲儀賓府承賓, 韓㠖嘉善工曹參判, 宣炯資憲行京畿觀察使, 金瓘嘉善忠淸道觀察使, 權良通政行晋州牧使, 金舜臣嘉善行長興府使。 是政, 僉正尹瀚、引儀文僴、判官裵止訥、牧使安致康等罷, 皆臺諫所論者也。
【史臣曰: "致寬, 爲人强毅, 以淸直自任, 棘棘不阿, 人不敢干以私。 性又儉約, 不治居第, 時議頗稱之。 繼美, 象恭內黠。 爲執政, 凡所引進, 非親族卽貨謁, 擢從母弟曹幹爲司諫, 弟女壻李永禧爲訓鍊副正, 其行私, 多類此。 臺諫屢言除授不公, 繼美遂辭免。 錫文, 色厲內荏, 善伺候上意。 嘗判戶曹, 以理財自任, 利盡錙銖。 尹瀚, 領議政子雲之子也。 愚癡, 不辨菽麥, 嘗爲宗廟令, 上官日, 吏以公座簿, 進請署, 瀚揮手固拒之曰: ‘署公案, 誠非小事, 當問父翁, 聽訓乃署。’ 吏笑而退。 文僴, 寧城君 崔恒女壻也。 狂妄無知。 止訥, 曾爲司僕直長, 掌市諸牧場病馬, 有權相請之者, 代以良馬, 事覺, 論不敍。 止訥家頗饒, 無子, 嘗稱韓明澮子堡爲收養, 傾産行貨, 明澮力拔用之。 及年老, 昏不治事, 以明澮故, 得久不黜。 時, 宰相受人奴婢、田宅者, 或稱收養得補官。"】
성종 1년 (1470) 6월 3일
성종실록6권, 성종 1년 6월 3일 庚戌 9/9 기사 /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구치관·조석문·한계미·김길통·어세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국역
구치관(具致寬)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겸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석문(曺錫文)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겸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한계미(韓繼美)를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노사신(盧思愼)을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 김길통(金吉通)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어세공(魚世恭)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아성군(牙城君)으로, 홍상(洪常)을 통헌 대부(通憲大夫) 의빈부 승빈(儀賓府承賓)으로, 한의(韓㠖)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선형(宣炯)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경기 관찰사(行京畿觀察使)로, 김관(金瓘)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권양(權良)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진주 목사(行晉州牧使)로, 김순신(金舜臣)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장흥 부사(行長興府使)로 삼았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첨정(僉正) 윤한(尹瀚)과 인의(引儀) 문간(文僴)과 판관(判官) 배지눌(裵止訥)과 목사(牧使) 안치강(安致康) 등이 파직(罷職)되었는데, 모두 대간(臺諫)에서 논(論)한 자들이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구치관은 사람됨이 강의(强毅)하고 청렴하고 곧은 것을 스스로 자랑하며, 굳굳하게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이 청탁을 하지 못하였고, 성질이 또 검약(儉約)하여 집안의 재산을 돌보지 아니하니, 그 때의 의논이 자못 그를 칭찬하였다. 한계미는 겉으로는 공손하였으나, 안으로는 간사하여,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되었을 때 무릇 그가 이끌어 올린 사람들은 족친(族親)이 아니면, 곧 돈으로써 청탁한 자였는데, 종모제(從母弟) 조간(曹幹)을 발탁하여 사간(司諫)을 삼고, 조카 사위 이영희(李永禧)를 훈련 부정(訓鍊副正)으로 삼는 등 그가 사정(私情)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대간(臺諫)에서 제수(除授)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므로, 한계미는 드디어 그 직임(職任)에서 사임하였다. 조석문은 겉으로는 엄하나, 안으로는 부드럽고, 임금의 뜻을 잘 살피었는데, 일찍이 판호조(判戶曹)로서 이재(理財)454) 를 스스로 자랑하면서 조그마한 이익도 다 밝혀냈다. 윤한은 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의 아들이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별할 줄도 몰랐으니, 일찍이 종묘 령(宗廟令)이 되어서 관청에 나아가는 날에 아전이 공좌부(公座簿)455) 를 가지고 나아가서 서명하기를 청하자, 윤한이 손을 흔들면서 굳이 거절하고 말하기를, ‘공안(公案)에 서명하는 것은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부옹(父翁)456) 에게 물어보고 말씀을 들은 다음에야 서명하겠다.’ 하니, 아전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문간은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의 사위였는데, 광망(狂妄)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 배지눌은 일찍이 사복 직장(司僕直長)이 되었는데, 일찍이 목장(牧場)의 병든 말을 매매할 때에 권력이 있는 재상으로서 이를 청하는 자가 있으니, 양마(良馬)로 바꾸어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서용(敍用)하지 아니하기로 논하였으나, 배지눌의 집이 상당히 부자이고 아들이 없어서 일찍이 한명회(韓明澮)의 아들 한보(韓堡)를 수양(收養)한다고 칭하고 재산을 기울여서 돈을 주니, 한명회가 힘써 발탁하여 이를 썼는데, 나이가 많게 되자 혼매(昏昧)하여 일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지만, 한명회 때문에 오랫동안 관직에서 쫓겨나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 하였다. 그 때 재상(宰相)으로서 남의 노비(奴婢)나 전택(田宅)을 받은 자가 혹은 수양(收養)이라고 칭하고, 사람을 관리에 보임(補任)할 수가 있었다.
- [註 454] 이재(理財) : 재무를 잘 다스려 관장하는 것.
- [註 455] 공좌부(公座簿) : 관리가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그 이름을 적던 장부. 고공사(考功司)에서 이것을 기준으로 관리의 근태(勤怠)를 평가하였으며, 세종 25년(1443)부터 아일(衙日)에도 이를 설치하였다고 함. 제조(提調)가 날마다 공좌부를 점검하여 이유 없이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는 각각 그 이름 밑에 동그라미[圈]를 쳤음.
- [註 456] 부옹(父翁) : 아버지.
원문
○以具致寬爲大匡輔國崇祿綾城府院君兼吏曹判書, 曺錫文大匡輔國崇祿昌寧府院君兼戶曹判書, 韓繼美輔國崇祿議政府左贊成, 盧思愼崇祿議政府右贊成, 金吉通正憲漢城府判尹, 魚世恭資憲牙城君, 洪常通憲儀賓府承賓, 韓㠖嘉善工曹參判, 宣炯資憲行京畿觀察使, 金瓘嘉善忠淸道觀察使, 權良通政行晋州牧使, 金舜臣嘉善行長興府使。 是政, 僉正尹瀚、引儀文僴、判官裵止訥、牧使安致康等罷, 皆臺諫所論者也。
【史臣曰: "致寬, 爲人强毅, 以淸直自任, 棘棘不阿, 人不敢干以私。 性又儉約, 不治居第, 時議頗稱之。 繼美, 象恭內黠。 爲執政, 凡所引進, 非親族卽貨謁, 擢從母弟曹幹爲司諫, 弟女壻李永禧爲訓鍊副正, 其行私, 多類此。 臺諫屢言除授不公, 繼美遂辭免。 錫文, 色厲內荏, 善伺候上意。 嘗判戶曹, 以理財自任, 利盡錙銖。 尹瀚, 領議政子雲之子也。 愚癡, 不辨菽麥, 嘗爲宗廟令, 上官日, 吏以公座簿, 進請署, 瀚揮手固拒之曰: ‘署公案, 誠非小事, 當問父翁, 聽訓乃署。’ 吏笑而退。 文僴, 寧城君 崔恒女壻也。 狂妄無知。 止訥, 曾爲司僕直長, 掌市諸牧場病馬, 有權相請之者, 代以良馬, 事覺, 論不敍。 止訥家頗饒, 無子, 嘗稱韓明澮子堡爲收養, 傾産行貨, 明澮力拔用之。 及年老, 昏不治事, 以明澮故, 得久不黜。 時, 宰相受人奴婢、田宅者, 或稱收養得補官。"】
원본
성종 1년 (1470)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