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실록7권, 문종 1년 5월 22일 己未 3/6 기사 /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사헌부에서 혜빈궁의 별실을 짓는 일, 중이 공물을 대납하는 일 등을 상소하다
국역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신 등이 전일에 몇가지 일을 명대하여 아뢰었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또 다시 성상의 총명(聰明)을 어지럽힙니다. 신 등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일찍이 말하기를, ‘전세(前世)의 제왕(帝王)으로서 간언(諫言)을 물리친 이가 흔히 이르기를, 일을 이미 시행하였다 하거나 혹은 일을 이미 허가하였다 하고서 마침내 고치지 않았는데, 그러고서도 위망(危亡)587) 이 없고자 한들 되겠는가?’ 한 것을 가만히 보건대, 그 이미 시행하였다느니 이미 허가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신의(信義)를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대저 해서는 안될 일을 하거나 허가해서는 안될 것을 허가한 것은 이미 큰 신의를 잃은 것인데, 잗달게 작은 신의를 지키려는 것은 또한 말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생각하시기를, 혜빈궁(惠嬪宮)은 재목과 주춧돌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중지할 수 없다고 하시나, 신 등은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면 비록 이미 세웠더라도 마땅히 빨리 헐어야 하고 이미 시행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나무와 돌을 갖추었을 뿐이겠습니까? 대저 궁금(宮禁)은 엄숙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제 여항(閭巷) 사이에 이 궁을 세워서 백성들의 주거와 함께 비늘처럼 겹쳐 섞이면, 실로 천박함이 드러나서 대체(大體)에 어긋납니다. 또 이미 자수궁(慈壽宮)이 있으니 선조(先朝)의 후궁(後宮)은 마땅히 함께 거처하여 한결같이 예전처럼 하여야 옳을 터인데 승하(昇遐)하신 지 얼마 안되어 자기 편한대로 흩어져 가면, 어찌 한 나라의 신민(臣民)으로 차마 보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비록 모후(母后)의 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의리를 가지고 개진(開陳)하여야 하는데도 선조의 후궁이 바라는 바를 일일이 애써 좇는다면, 어찌 제왕(帝王)의 효도이겠습니까? 근일 도하(都下)에서 시끄러이 전하기를, 혜빈(惠嬪)을 위하여 새로 불당(佛堂)을 만든다 하니, 이는 더욱 사람들의 보고 들음에 퍼뜨려서는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바야흐로 국가가 한가하고 재력에 여유가 있을 때라도 오히려 단연코 하여서는 안될 것인데, 더구나 해마다 잇단 흉년으로 민생(民生)이 피곤하고 고달파서 유리(流離)하여 아직 되돌아가지 못하는 데에 더하여 국가에는 일이 많아서 저축은 고갈되고, 영선(營繕)은 잇달아서, 부역(賦役)은 군사[卒伍]에게도 미치니 혹 계속 번(番)을 들기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목공장(木工匠)·석공장(石工匠)이 해마다 이어서 공무에 종사하느라고 제 생업을 돌볼 겨를이 없으니, 이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재목과 초석이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중지할 수 없다 하시니, 이것이 신 등이 실망하는 까닭입니다.
대저 태평무사하면 걱정할 바가 거의 영선에 있으니, 토목(土木)이라는 것은, 임금이 이미 그 태평함을 믿고, 일을 관장(管掌)하는 사람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총애를 얻으려 하므로 스스로 자리(自利)하고 교설(巧說)하는 자가 온갖 방법을 써서 임금에게 한 번 그 맞춘 바가 되면, 또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느니 이는 백성을 고달프게까지는 하지 않는다느니 이는 재물을 손상하게까지는 않는다느니 하여, 그 처음에는 매우 간이(簡易)하게 하나 일이 이미 시작되어서는 점점 늘려서 마침내 반드시 상제(常制)588) 를 지나치게 되고야 맙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여 마지 않는다면, 비록 재물을 다하지 않고 백성을 고달프지 않게 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진 시황(秦始皇)·한무제(漢武帝)가 천하를 피폐하게 한 것은 한갓 몹시 횡포하고 함부로 무력을 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유위(有爲)한 임금은 반드시 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앞세우며 일을 일으키는 데에는 신중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한 문제(漢文帝)는 열 집의 재산을 아껴서 한 누대(樓臺)의 터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짓지 않았고, 당 태종(唐太宗)은 수(隋)나라의 폐단을 거울삼아 한 전각의 재목이 이미 갖추어졌는데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쓰는 것이 이러한 까닭에, 드디어 나라 안의 살림이 넉넉하여 바깥 문을 닫지 않게 되었으니, 역시 위대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먼저 대자사(大慈寺)의 역사를 일으켜서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견줄 데가 없어 지금 사람들로서 그것을 보는 자는 송연(竦然)하지 않는 자가 없어 동방(東方)에는 다시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전하께서도 어찌 이런 극단에 이를 줄이야 아셨겠습니까? 신 등은 이미 지난 일을 뒤미처 허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밖의 일을 알 만합니다. 지금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가 비록 세워졌으나, 그 꾸미는 일과 섬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많으며, 그 예전의 세운 중의 거처도 그대로 수리할 만한데 또 모두 다 새로이 지으려고 하니, 재물의 비용과 공력에 드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일을 관장하는 자의 말을 의심하십니다. 당초에 일을 관장하던 자가 방책을 아뢸 때에는 반드시 ‘이렇게 하면 공재(公材)를 쓰지 않고, 이렇게 하면 민력(民力)을 고달프게 하지 않습니다.’ 하여 그 말이 매우 교묘하였을 터인데, 마침내는 인부에게 식량을 관가에서 주어 먹였어도 아직 준공하지 못하였는데도, 또 더 벌려서 그 일을 넓힙니다.
대저 모든 도(道)의 공물(貢物)은 실지로 토산(土産)의 마땅한 것을 취하고, 혹 수운(水運)의 편리를 따르는 것이 곧 조종(祖宗)께서 공부(貢賦)를 정하여 민생을 후하게 하신 본의인데, 지금 일을 주간하는 중으로 하여금 대납(代納)하고서 모두 미포(米布)로 백성에게서 값을 받게 하니, 백성이 비록 자납(自納)하고자 하여도 모두 다 억지로 대납하고서 값을 거두는 것은 실로 공부를 정한 본의가 아닙니다. 한 가지 일을 빌어서 말하자면, 초둔(草芚)589) 1번(番)에 전조(田租) 1두(斗)를 계제(計除)590) 하는 것인데 지금은 1석(石)을 넘게 값을 받으니, 다른 물건도 이와 같아서 낱낱이 들어 말할 것이 없습니다. 대납을 금하는 법이 법전[令甲]에 뚜렷이 있어 여느 사람이 이를 범하면 죄로 삼아 장오(贓汚)로 논하여 종신토록 서용(敍用)하지 않는데, 다만 중들의 방자한 짓의 꺼림 없는 것을 들어주니, 큰 부상 대고(富商大賈)가 모여들어 찾아오고, 권귀(權貴) 중에 혹 중을 가장하여 중이라 이름하되 태연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법이란 것은 한 나라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인데, 위에서 스스로 무너뜨리면 어떻게 아래를 호령하겠습니까? 기사년(己巳年)591) 에 각도(各道)의 수령(守令)이 죄를 입은 뒤부터, 중들이 활개를 펴고 위세로 협박하니, 군현(郡縣)이 외축(畏縮)되어 다투어 민간에서 호되게 거두어다가 그 요구에 응하며 그 바라는 바대로 따라서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간사승(幹事僧)592) 이 충청도 지경 안의 여러 절을 노략질하니, 여러 절의 중들이 감사(監司)에게 소송(訴訟)하였으나, 감사가 감히 바로 추문(推問)하지 못하고 계청(啓請)하기에 이르렀는데, 감사로서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수령이겠습니까? 인심의 외축을 여기서 더욱 알 만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경상도의 세포(稅布)를 날라 옮기는 값은 당초에 그 길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서 많고 적게 정하여, 세포를 나르는 자로 하여금 그 쌀을 얻어 먹게 하였는데, 지금은 그 반을 갈라서 간사(幹事)에게 주었습니다. 만약에 처음 정한 값이 너무 많아서 주현(州縣)이 이롭게 여겨 요청하여서 혹 시행하였으니, 비록 그 반을 가르더라도 역시 상당하기에 넉넉하여 그 값이 많고 적은 것이 백성에게 관계 없으니, 대납(代納)에 비하면 더욱 폐해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값이 이미 적으면 반드시 응모(應募)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응모하는 자가 이미 없으면 그 나라는 노고가 반드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국가가 만약 과중한 값을 받아 간다는 것을 안다면, 마땅히 적당하게 줄여서 백성에게 주어 그 힘을 펴게 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은 까닭 없이 그 반을 가져가므로, 이미 그 값을 거두고 또 그 힘을 부리는 것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대납(代納)이 비록 매우 백성을 해롭힌다 하나 오히려 그 힘을 쓰는 것인데, 나르는 값을 앉아서 받아 가는 것은 실로 명목없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미 명목이 없는 것을 또 무익한 일에 쓰는데도 오히려 폐해가 없다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무릇 사대부(士大夫)로서 이미 학식이 있고 또 통찰(統察)도 있는 자도 탐오(貪汚)하여 법을 어기는 자가 자주 있는데, 하물며 무식한 중들이겠습니까?
대저 천지에서 재물을 내는 데에는 수가 있고 관(官)에 있지 않으면 민(民)에 있으므로, 생산하는 자는 적고 먹는 자는 많은 것이 고금(古今)의 걱정거리입니다. 지금 간사(幹事)가 제 무리에게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백성에게서 가져가니, 한갓 일하지 않고 먹는 무리일 뿐 아니라, 또한 교묘하게 빼앗아 간 백성의 재물은 그 손에 들어가면 다시는 검핵(檢劾)하지 않으므로, 할 짓을 마음대로 하여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 날로 더하고 달로 느니, 백성이 어찌 곤궁하기에 이르지 않겠으며 백성이 이미 곤궁하면 나라가 누구와 더불어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근자에 혹 후년의 공물(貢物)을 앞당겨서 받아들이게 하기도 하고, 혹 각 고을로 하여금 편의(便宜)함을 따라 폐단 없게 상납(上納)하게 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앞당겨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이듬해에 이르러 그 받아들인 것을 제(除)해 준 적이 없으며, 다만 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앞당겨 받아들여서 한 번 받아 들이기를 앞당기면 계제(計除)할 날이 없으므로, 이름은 앞당겨 받아들인다 하나 실상은 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니, 다만 이름을 교묘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비록 편의에 따라 폐단 없이 한다고는 하나, 물건이 절로 이르지는 않으니, 수령(守令) 또한 어찌 스스로 장만하고 백성에게서는 가져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년에 자주 기황(飢荒)을 당하여 민생의 곤궁이 이미 극진한데도 불시(不時)의 수용(需用)에 응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매우 천한 물건이라도 불시에 구하면 또한 아주 귀해져서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에서 물건의 수를 정하여 몹시 바삐 독촉하면 백성이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이름은 편의에 따라 폐단이 없게 한다 하나 실상은 백성의 걱정이 되니, 다만 말을 교묘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무릇 한 번 거두어 들이는 것에 있어서, 감사(監司)는 반드시 국가가 거두는 수에 갑절이 되고, 수령은 또 반드시 그것에 갑절이 되므로, 국가가 구하는 것은 매우 적다고 하여도 백성이 받는 걱정은 적지 않으니, 이것이 백성이 날로 곤궁하여 가고 진흥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 까닭을 따지면, 실로 국가의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이미 커지고 비용[調用]에 절제가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를 그만두고 비용을 절제하지 않으면서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근원을 쳐 내지 않으면서 그 흐르는 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진상(進上)하는 잡물(雜物)을 진정시키고 또 영선(營繕)을 정지시키시니, 그 재변(災變)을 구제하고 백성을 돌보시기 위한 뜻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 비가 제때에 내리면 반드시 혼잡하게 다시 시작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정성으로 하늘에 보답하는 뜻이겠습니까?
신 등은 일찍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고려(高麗)의 문종(文宗)593) 이 세상을 융성하고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지수(持守)594) 한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지는 데는 반드시 하는 바에 탁연(卓然)함이 있다 하였는데, 시행한 사적(事蹟)을 보면 고요하게 무위(無爲)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명하여 빨리 혜빈궁(惠嬪宮)의 일을 정지시키고, 진관사(津寬寺)의 중들의 거처도 옛것을 그대로 수리하게 하시어, 모든 영선과 따로 과(科)하여 백성에게서 가져가는 것을 모두 다 아주 끊으시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하고 쓸모 없는 비용을 끊으시고서 마음을 맑게 하여 일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부지런히 돌보아서 나라의 명맥을 북돋우셨으면, 더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은 좋다. 그러나 자수궁(慈壽宮)에는 혜빈(惠嬪)이 거처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경산(京山)의 나무로 잠시 한 집을 꾸미는 것이며, 혹 자수궁에 들어가 거처하더라도 반드시 별실(別室)을 지어야 거처할 수 있다. 진관사로 말하면, 오늘 간사승(幹事僧)이 간각(間閣)을 그려 바쳤는데 옛것보다 조금 늘었으므로 옛것에 더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며, 또 헌 재목으로 옛터대로 수즙(修葺)할 뿐이다."
하니, 헌부(憲府)에서 다시 아뢰기를,
"혜빈궁의 별실이 여염(閭閻)에 섞여 있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며, 또 만약 잠시 꾸미는 것이라면 안팎이 천박하게 드러나서 더욱 옳지 못하니, 만약 부득이하다면 이 재목으로 자수궁에 따로 한 집을 세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목을 옮겨 나르는 것은 더욱 폐해가 있다.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다."
하였다.
- [註 587] 위망(危亡) : 위태로와 망할 것 같음.
- [註 588] 상제(常制) : 항상 정해 있는 제도.
- [註 589] 초둔(草芚) : 띠·부들 같은 것의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비가 올 적에 물건을 덮거나 볕을 가리거나 바람을 막는 데 씀.
- [註 590] 계제(計除) : 헤아려 감면함.
- [註 591] 기사년(己巳年) : 1425 세종 7년.
- [註 592] 간사승(幹事僧) : 일을 주관하는 중.
- [註 593] 문종(文宗) : 고려 11대 임금.
- [註 594] 지수(持守) : 어지럽지 않게 본분을 지킴.
원문
○司憲府上疏曰:
臣等前日面陳數事, 竝未蒙允, 反覆思之不能自已, 又瀆上聰。 臣等竊觀, 唐 太宗嘗曰: "前世帝王拒諫者, 多云: ‘業已爲之’, 或云: ‘業已許之’, 終不爲改, 如此而欲無危亡, 得乎?" 其云: ‘已爲、已許’ 者, 蓋以不失信爲辭爾。 夫爲不可爲, 許不可許, 已失大信矣, 而欲守規規小信, 不亦末乎? 今殿下以爲: "惠嬪宮, 材木礎石已備, 不可中止", 臣等竊謂, 苟爲不可, 則雖已立, 當亟撤之, 不當辭以已爲, 況具木石而已乎? 夫宮禁不可不嚴, 今立是宮於閭巷之間, 與人居鱗雜, 實爲淺露, 有乖大體。 且旣有慈壽宮, 則先朝後宮, 當與共處, 一如平昔, 可也, 升遐未幾, 而散就自便, 豈一國臣民所忍覩聞哉? 此雖出於母后之命, 宜以義開陳, 而先朝後宮, 所欲一一勉從, 豈帝王之孝乎? 近日都下喧傳: "爲惠嬪新造佛堂", 此尤非所宜播人見聞也。 方國家閑暇, 財力有餘之時, 猶且斷不可爲, 況連歲不稔, 民生困苦, 流離未復, 加以國家多事, 儲峙罄竭, 而營繕相繼, 役及卒伍, 或至因番不下, 木、石工匠, 連年在公, 不暇顧其生業, 此不可不慮也。 而殿下猶以爲: "木石已具, 不可中止", 此臣等所以缺望者也。 大抵昇平無事, 則所患率在於營繕。 土木者, 人主旣恃其昇平, 掌事之人, 又欲因是以要寵, 自利巧說者百端, 人君一爲所中, 則亦以爲: "此出於不得已也, 此不至勞民也, 此不至傷財也", 其始也甚爲簡易, 事已始矣, 漸而增之, 終必至過制而後已。 苟如是不已, 雖欲財不殫, 民不困, 其可得乎? 秦皇、漢 武之疲弊天下, 不徒苛暴與黷武而已, 故古之有爲之主, 必先勤儉節用, 重於興作。 如漢 文惜十家之産, 一臺之基旣成, 而不築; 唐 太宗鑑隋之弊, 一殿之材已具, 而不營。 其用心如此, 故遂致海內富庶, 外戶不閉, 不亦偉哉? 殿下卽政之初, 首興大慈之役, 侈麗無比, 今人見之者, 莫不竦然, 以爲: "東方所無", 殿下亦安知至於此極乎? 臣等非追咎旣往, 以此推之, 可知其他。 今津寬水陸社, 雖已創立, 其修粧砌級未畢者尙多, 其舊創僧居, 亦可因而葺之, 又欲一皆創新財費工力, 所入無算, 而殿下猶疑掌事者之說。 當初掌事者, 進策, 必曰: "如是則不費公材, 如是則不勞民力", 其說甚巧, 卒至官給糧餉人夫, 而尙未告成, 又鋪張之, 以廣其事。 夫諸道貢物, 實取土産之宜, 或因水運之便, 是祖宗定賦厚民之本意也。 今令幹事僧代納, 而悉以米布取償於其民, 民雖欲自納, 竝皆抑代而徵償, 實違定賦之本意矣。 借以一事論之, 草芚一番, 計除田租一斗, 而今取償過一石, 他物類此, 不必枚擧。 代納之禁, 著在令甲, 平人犯之, 置之於罪, 論以贓汚, 終身不敍, 獨聽僧徒恣行無忌, 富商大賈, 輻湊聘奸, 以至權貴, 或有借僧爲名, 而恬不爲怪。 法者, 所與一國共之, 而上自毁之, 何以令下? 自己巳年各道守令被罪之後, 僧徒鴟張, 脅以威勢, 郡縣畏縮, 競爲苛刻, 掊克閭閻, 以應其求, 惟其所欲, 而不敢違。 日者幹事僧侵優〔侵擾〕 忠淸境內諸寺, 諸寺僧徒訴于監司, 監司不敢直問, 以至啓請, 監司而如此, 況守令乎? 人心之畏縮, 於此益可見矣。 非特此也, 慶尙道稅布輸轉之價, 厥初量其道里遠近, 以定多寡, 使輸布者, 得食其米, 今割其半, 以與幹事。 若曰: "初定價數過優, 州、縣利之干請或行, 雖割其半, 亦足相當, 而其價之多寡, 不與於民, 比之代納, 尤爲無弊", 是大不然。 其價旣寡, 則必無應募者, 應募者旣無, 則其轉輸之勞, 必歸於民矣。 國家若知取價之過重, 宜量減以與民, 以抒其力, 今乃無故, 而取其半, 旣徵其價, 又役其力, 是何理耶? 代納雖甚害民, 猶用其力, 坐取輸價, 實爲無名取之。 旣以無名, 又用之於無益之事, 而猶云: "無弊", 可乎? 凡士大夫旣有學識, 且有統察, 而貪汚不法者, 比比有之, 況以無識僧徒乎? 夫天地生財有數, 不在官則在民, 故生寡食衆, 古今所患。 今幹事非取於其徒, 乃取於民, 非徒坐食之衆, 又巧取之, 侵剝民財, 一入其手, 無復檢劾, 恣其所爲, 干請國家, 日益月增, 民安得不至於困民? 旣困則國誰與不困哉? 近者或令引納後年貢物, 或令各官, 隨宜無弊上納, 此誠出於不得已也。 然雖曰: "引納", 至明年, 未嘗除其所納, 非特不除, 又引納之, 一引其納, 無計除之日, 名爲引納, 實爲倍徵, 特巧其名耳。 雖曰: "隨宜無弊", 物不自至, 守令亦安能自辦, 而不取之於民哉? 頃歲頻遭飢荒, 民生之困旣極, 而以應不時之需, 可乎? 雖甚賤物, 又求之不時, 亦至貴而難得。 於是官定物數, 督之嚴急, 民不能堪, 名爲隨宜無弊, 實爲民患, 特巧爲之辭爾。 凡一徵納, 監司必倍國家所徵之數, 守令又必倍之, 國家所求甚少, 而民之受患不貲, 此民之所以日就困窮而不振者也。 原其所以, 實由國家興作旣廣, 調用無節, 以至於此爾。 苟不斷興作, 不節調用, 而欲救此弊, 正猶不濬其源, 而求其流之淸矣。 今殿下命停進上雜物, 又命停罷營繕, 其所以救災恤民之意, 可謂: "至矣。" 然一雨時至, 則將必雜然復興矣, 是豈戒懼修省, 以誠答天之意乎? 臣等嘗以漢之文帝、高麗 文宗致世殷富, 號爲: "持守之賢君", 必有所爲卓然, 及觀行事之蹟, 不過恬靜無爲而已。 伏望殿下特命, 亟罷惠嬪宮之役, 津寬僧居, 亦令仍修其舊, 凡諸營繕與別科取民, 一皆永斷, 停不急之務, 絶無用之費, 淸心省事, 勤恤民隱, 以培國脈, 不勝幸甚。
上曰: "爾等之言, 善矣。 然於慈壽宮, 無惠嬪可處之所, 故不得已以京山林木, 暫構一室, 倘入處慈壽宮, 必營別室, 然後可居。 若津寬寺, 則今日幹事僧, 圖進間閣, 稍增於舊, 故命勿加於舊, 且以舊材, 仍舊基修葺耳。" 憲府更啓曰: "惠嬪宮別室, 混處閭閻, 甚爲不可, 若又暫構, 則內外淺露, 尤爲不可。 如不得已, 則以此材木, 別建一室于慈壽宮, 可也。" 上曰: "轉輸材木, 尤爲有弊, 予更商量。"
문종실록7권, 문종 1년 5월 22일 己未 3/6 기사 /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사헌부에서 혜빈궁의 별실을 짓는 일, 중이 공물을 대납하는 일 등을 상소하다
국역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신 등이 전일에 몇가지 일을 명대하여 아뢰었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또 다시 성상의 총명(聰明)을 어지럽힙니다. 신 등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일찍이 말하기를, ‘전세(前世)의 제왕(帝王)으로서 간언(諫言)을 물리친 이가 흔히 이르기를, 일을 이미 시행하였다 하거나 혹은 일을 이미 허가하였다 하고서 마침내 고치지 않았는데, 그러고서도 위망(危亡)587) 이 없고자 한들 되겠는가?’ 한 것을 가만히 보건대, 그 이미 시행하였다느니 이미 허가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신의(信義)를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대저 해서는 안될 일을 하거나 허가해서는 안될 것을 허가한 것은 이미 큰 신의를 잃은 것인데, 잗달게 작은 신의를 지키려는 것은 또한 말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생각하시기를, 혜빈궁(惠嬪宮)은 재목과 주춧돌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중지할 수 없다고 하시나, 신 등은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면 비록 이미 세웠더라도 마땅히 빨리 헐어야 하고 이미 시행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나무와 돌을 갖추었을 뿐이겠습니까? 대저 궁금(宮禁)은 엄숙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제 여항(閭巷) 사이에 이 궁을 세워서 백성들의 주거와 함께 비늘처럼 겹쳐 섞이면, 실로 천박함이 드러나서 대체(大體)에 어긋납니다. 또 이미 자수궁(慈壽宮)이 있으니 선조(先朝)의 후궁(後宮)은 마땅히 함께 거처하여 한결같이 예전처럼 하여야 옳을 터인데 승하(昇遐)하신 지 얼마 안되어 자기 편한대로 흩어져 가면, 어찌 한 나라의 신민(臣民)으로 차마 보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비록 모후(母后)의 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의리를 가지고 개진(開陳)하여야 하는데도 선조의 후궁이 바라는 바를 일일이 애써 좇는다면, 어찌 제왕(帝王)의 효도이겠습니까? 근일 도하(都下)에서 시끄러이 전하기를, 혜빈(惠嬪)을 위하여 새로 불당(佛堂)을 만든다 하니, 이는 더욱 사람들의 보고 들음에 퍼뜨려서는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바야흐로 국가가 한가하고 재력에 여유가 있을 때라도 오히려 단연코 하여서는 안될 것인데, 더구나 해마다 잇단 흉년으로 민생(民生)이 피곤하고 고달파서 유리(流離)하여 아직 되돌아가지 못하는 데에 더하여 국가에는 일이 많아서 저축은 고갈되고, 영선(營繕)은 잇달아서, 부역(賦役)은 군사[卒伍]에게도 미치니 혹 계속 번(番)을 들기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목공장(木工匠)·석공장(石工匠)이 해마다 이어서 공무에 종사하느라고 제 생업을 돌볼 겨를이 없으니, 이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재목과 초석이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중지할 수 없다 하시니, 이것이 신 등이 실망하는 까닭입니다.
대저 태평무사하면 걱정할 바가 거의 영선에 있으니, 토목(土木)이라는 것은, 임금이 이미 그 태평함을 믿고, 일을 관장(管掌)하는 사람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총애를 얻으려 하므로 스스로 자리(自利)하고 교설(巧說)하는 자가 온갖 방법을 써서 임금에게 한 번 그 맞춘 바가 되면, 또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느니 이는 백성을 고달프게까지는 하지 않는다느니 이는 재물을 손상하게까지는 않는다느니 하여, 그 처음에는 매우 간이(簡易)하게 하나 일이 이미 시작되어서는 점점 늘려서 마침내 반드시 상제(常制)588) 를 지나치게 되고야 맙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여 마지 않는다면, 비록 재물을 다하지 않고 백성을 고달프지 않게 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진 시황(秦始皇)·한무제(漢武帝)가 천하를 피폐하게 한 것은 한갓 몹시 횡포하고 함부로 무력을 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유위(有爲)한 임금은 반드시 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앞세우며 일을 일으키는 데에는 신중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한 문제(漢文帝)는 열 집의 재산을 아껴서 한 누대(樓臺)의 터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짓지 않았고, 당 태종(唐太宗)은 수(隋)나라의 폐단을 거울삼아 한 전각의 재목이 이미 갖추어졌는데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쓰는 것이 이러한 까닭에, 드디어 나라 안의 살림이 넉넉하여 바깥 문을 닫지 않게 되었으니, 역시 위대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먼저 대자사(大慈寺)의 역사를 일으켜서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견줄 데가 없어 지금 사람들로서 그것을 보는 자는 송연(竦然)하지 않는 자가 없어 동방(東方)에는 다시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전하께서도 어찌 이런 극단에 이를 줄이야 아셨겠습니까? 신 등은 이미 지난 일을 뒤미처 허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밖의 일을 알 만합니다. 지금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가 비록 세워졌으나, 그 꾸미는 일과 섬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많으며, 그 예전의 세운 중의 거처도 그대로 수리할 만한데 또 모두 다 새로이 지으려고 하니, 재물의 비용과 공력에 드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일을 관장하는 자의 말을 의심하십니다. 당초에 일을 관장하던 자가 방책을 아뢸 때에는 반드시 ‘이렇게 하면 공재(公材)를 쓰지 않고, 이렇게 하면 민력(民力)을 고달프게 하지 않습니다.’ 하여 그 말이 매우 교묘하였을 터인데, 마침내는 인부에게 식량을 관가에서 주어 먹였어도 아직 준공하지 못하였는데도, 또 더 벌려서 그 일을 넓힙니다.
대저 모든 도(道)의 공물(貢物)은 실지로 토산(土産)의 마땅한 것을 취하고, 혹 수운(水運)의 편리를 따르는 것이 곧 조종(祖宗)께서 공부(貢賦)를 정하여 민생을 후하게 하신 본의인데, 지금 일을 주간하는 중으로 하여금 대납(代納)하고서 모두 미포(米布)로 백성에게서 값을 받게 하니, 백성이 비록 자납(自納)하고자 하여도 모두 다 억지로 대납하고서 값을 거두는 것은 실로 공부를 정한 본의가 아닙니다. 한 가지 일을 빌어서 말하자면, 초둔(草芚)589) 1번(番)에 전조(田租) 1두(斗)를 계제(計除)590) 하는 것인데 지금은 1석(石)을 넘게 값을 받으니, 다른 물건도 이와 같아서 낱낱이 들어 말할 것이 없습니다. 대납을 금하는 법이 법전[令甲]에 뚜렷이 있어 여느 사람이 이를 범하면 죄로 삼아 장오(贓汚)로 논하여 종신토록 서용(敍用)하지 않는데, 다만 중들의 방자한 짓의 꺼림 없는 것을 들어주니, 큰 부상 대고(富商大賈)가 모여들어 찾아오고, 권귀(權貴) 중에 혹 중을 가장하여 중이라 이름하되 태연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법이란 것은 한 나라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인데, 위에서 스스로 무너뜨리면 어떻게 아래를 호령하겠습니까? 기사년(己巳年)591) 에 각도(各道)의 수령(守令)이 죄를 입은 뒤부터, 중들이 활개를 펴고 위세로 협박하니, 군현(郡縣)이 외축(畏縮)되어 다투어 민간에서 호되게 거두어다가 그 요구에 응하며 그 바라는 바대로 따라서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간사승(幹事僧)592) 이 충청도 지경 안의 여러 절을 노략질하니, 여러 절의 중들이 감사(監司)에게 소송(訴訟)하였으나, 감사가 감히 바로 추문(推問)하지 못하고 계청(啓請)하기에 이르렀는데, 감사로서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수령이겠습니까? 인심의 외축을 여기서 더욱 알 만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경상도의 세포(稅布)를 날라 옮기는 값은 당초에 그 길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서 많고 적게 정하여, 세포를 나르는 자로 하여금 그 쌀을 얻어 먹게 하였는데, 지금은 그 반을 갈라서 간사(幹事)에게 주었습니다. 만약에 처음 정한 값이 너무 많아서 주현(州縣)이 이롭게 여겨 요청하여서 혹 시행하였으니, 비록 그 반을 가르더라도 역시 상당하기에 넉넉하여 그 값이 많고 적은 것이 백성에게 관계 없으니, 대납(代納)에 비하면 더욱 폐해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값이 이미 적으면 반드시 응모(應募)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응모하는 자가 이미 없으면 그 나라는 노고가 반드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국가가 만약 과중한 값을 받아 간다는 것을 안다면, 마땅히 적당하게 줄여서 백성에게 주어 그 힘을 펴게 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은 까닭 없이 그 반을 가져가므로, 이미 그 값을 거두고 또 그 힘을 부리는 것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대납(代納)이 비록 매우 백성을 해롭힌다 하나 오히려 그 힘을 쓰는 것인데, 나르는 값을 앉아서 받아 가는 것은 실로 명목없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미 명목이 없는 것을 또 무익한 일에 쓰는데도 오히려 폐해가 없다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무릇 사대부(士大夫)로서 이미 학식이 있고 또 통찰(統察)도 있는 자도 탐오(貪汚)하여 법을 어기는 자가 자주 있는데, 하물며 무식한 중들이겠습니까?
대저 천지에서 재물을 내는 데에는 수가 있고 관(官)에 있지 않으면 민(民)에 있으므로, 생산하는 자는 적고 먹는 자는 많은 것이 고금(古今)의 걱정거리입니다. 지금 간사(幹事)가 제 무리에게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백성에게서 가져가니, 한갓 일하지 않고 먹는 무리일 뿐 아니라, 또한 교묘하게 빼앗아 간 백성의 재물은 그 손에 들어가면 다시는 검핵(檢劾)하지 않으므로, 할 짓을 마음대로 하여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 날로 더하고 달로 느니, 백성이 어찌 곤궁하기에 이르지 않겠으며 백성이 이미 곤궁하면 나라가 누구와 더불어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근자에 혹 후년의 공물(貢物)을 앞당겨서 받아들이게 하기도 하고, 혹 각 고을로 하여금 편의(便宜)함을 따라 폐단 없게 상납(上納)하게 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앞당겨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이듬해에 이르러 그 받아들인 것을 제(除)해 준 적이 없으며, 다만 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앞당겨 받아들여서 한 번 받아 들이기를 앞당기면 계제(計除)할 날이 없으므로, 이름은 앞당겨 받아들인다 하나 실상은 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니, 다만 이름을 교묘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비록 편의에 따라 폐단 없이 한다고는 하나, 물건이 절로 이르지는 않으니, 수령(守令) 또한 어찌 스스로 장만하고 백성에게서는 가져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년에 자주 기황(飢荒)을 당하여 민생의 곤궁이 이미 극진한데도 불시(不時)의 수용(需用)에 응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매우 천한 물건이라도 불시에 구하면 또한 아주 귀해져서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에서 물건의 수를 정하여 몹시 바삐 독촉하면 백성이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이름은 편의에 따라 폐단이 없게 한다 하나 실상은 백성의 걱정이 되니, 다만 말을 교묘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무릇 한 번 거두어 들이는 것에 있어서, 감사(監司)는 반드시 국가가 거두는 수에 갑절이 되고, 수령은 또 반드시 그것에 갑절이 되므로, 국가가 구하는 것은 매우 적다고 하여도 백성이 받는 걱정은 적지 않으니, 이것이 백성이 날로 곤궁하여 가고 진흥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 까닭을 따지면, 실로 국가의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이미 커지고 비용[調用]에 절제가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를 그만두고 비용을 절제하지 않으면서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근원을 쳐 내지 않으면서 그 흐르는 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진상(進上)하는 잡물(雜物)을 진정시키고 또 영선(營繕)을 정지시키시니, 그 재변(災變)을 구제하고 백성을 돌보시기 위한 뜻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 비가 제때에 내리면 반드시 혼잡하게 다시 시작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정성으로 하늘에 보답하는 뜻이겠습니까?
신 등은 일찍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고려(高麗)의 문종(文宗)593) 이 세상을 융성하고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지수(持守)594) 한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지는 데는 반드시 하는 바에 탁연(卓然)함이 있다 하였는데, 시행한 사적(事蹟)을 보면 고요하게 무위(無爲)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명하여 빨리 혜빈궁(惠嬪宮)의 일을 정지시키고, 진관사(津寬寺)의 중들의 거처도 옛것을 그대로 수리하게 하시어, 모든 영선과 따로 과(科)하여 백성에게서 가져가는 것을 모두 다 아주 끊으시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하고 쓸모 없는 비용을 끊으시고서 마음을 맑게 하여 일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부지런히 돌보아서 나라의 명맥을 북돋우셨으면, 더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은 좋다. 그러나 자수궁(慈壽宮)에는 혜빈(惠嬪)이 거처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경산(京山)의 나무로 잠시 한 집을 꾸미는 것이며, 혹 자수궁에 들어가 거처하더라도 반드시 별실(別室)을 지어야 거처할 수 있다. 진관사로 말하면, 오늘 간사승(幹事僧)이 간각(間閣)을 그려 바쳤는데 옛것보다 조금 늘었으므로 옛것에 더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며, 또 헌 재목으로 옛터대로 수즙(修葺)할 뿐이다."
하니, 헌부(憲府)에서 다시 아뢰기를,
"혜빈궁의 별실이 여염(閭閻)에 섞여 있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며, 또 만약 잠시 꾸미는 것이라면 안팎이 천박하게 드러나서 더욱 옳지 못하니, 만약 부득이하다면 이 재목으로 자수궁에 따로 한 집을 세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목을 옮겨 나르는 것은 더욱 폐해가 있다.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다."
하였다.
- [註 587] 위망(危亡) : 위태로와 망할 것 같음.
- [註 588] 상제(常制) : 항상 정해 있는 제도.
- [註 589] 초둔(草芚) : 띠·부들 같은 것의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비가 올 적에 물건을 덮거나 볕을 가리거나 바람을 막는 데 씀.
- [註 590] 계제(計除) : 헤아려 감면함.
- [註 591] 기사년(己巳年) : 1425 세종 7년.
- [註 592] 간사승(幹事僧) : 일을 주관하는 중.
- [註 593] 문종(文宗) : 고려 11대 임금.
- [註 594] 지수(持守) : 어지럽지 않게 본분을 지킴.
원문
○司憲府上疏曰:
臣等前日面陳數事, 竝未蒙允, 反覆思之不能自已, 又瀆上聰。 臣等竊觀, 唐 太宗嘗曰: "前世帝王拒諫者, 多云: ‘業已爲之’, 或云: ‘業已許之’, 終不爲改, 如此而欲無危亡, 得乎?" 其云: ‘已爲、已許’ 者, 蓋以不失信爲辭爾。 夫爲不可爲, 許不可許, 已失大信矣, 而欲守規規小信, 不亦末乎? 今殿下以爲: "惠嬪宮, 材木礎石已備, 不可中止", 臣等竊謂, 苟爲不可, 則雖已立, 當亟撤之, 不當辭以已爲, 況具木石而已乎? 夫宮禁不可不嚴, 今立是宮於閭巷之間, 與人居鱗雜, 實爲淺露, 有乖大體。 且旣有慈壽宮, 則先朝後宮, 當與共處, 一如平昔, 可也, 升遐未幾, 而散就自便, 豈一國臣民所忍覩聞哉? 此雖出於母后之命, 宜以義開陳, 而先朝後宮, 所欲一一勉從, 豈帝王之孝乎? 近日都下喧傳: "爲惠嬪新造佛堂", 此尤非所宜播人見聞也。 方國家閑暇, 財力有餘之時, 猶且斷不可爲, 況連歲不稔, 民生困苦, 流離未復, 加以國家多事, 儲峙罄竭, 而營繕相繼, 役及卒伍, 或至因番不下, 木、石工匠, 連年在公, 不暇顧其生業, 此不可不慮也。 而殿下猶以爲: "木石已具, 不可中止", 此臣等所以缺望者也。 大抵昇平無事, 則所患率在於營繕。 土木者, 人主旣恃其昇平, 掌事之人, 又欲因是以要寵, 自利巧說者百端, 人君一爲所中, 則亦以爲: "此出於不得已也, 此不至勞民也, 此不至傷財也", 其始也甚爲簡易, 事已始矣, 漸而增之, 終必至過制而後已。 苟如是不已, 雖欲財不殫, 民不困, 其可得乎? 秦皇、漢 武之疲弊天下, 不徒苛暴與黷武而已, 故古之有爲之主, 必先勤儉節用, 重於興作。 如漢 文惜十家之産, 一臺之基旣成, 而不築; 唐 太宗鑑隋之弊, 一殿之材已具, 而不營。 其用心如此, 故遂致海內富庶, 外戶不閉, 不亦偉哉? 殿下卽政之初, 首興大慈之役, 侈麗無比, 今人見之者, 莫不竦然, 以爲: "東方所無", 殿下亦安知至於此極乎? 臣等非追咎旣往, 以此推之, 可知其他。 今津寬水陸社, 雖已創立, 其修粧砌級未畢者尙多, 其舊創僧居, 亦可因而葺之, 又欲一皆創新財費工力, 所入無算, 而殿下猶疑掌事者之說。 當初掌事者, 進策, 必曰: "如是則不費公材, 如是則不勞民力", 其說甚巧, 卒至官給糧餉人夫, 而尙未告成, 又鋪張之, 以廣其事。 夫諸道貢物, 實取土産之宜, 或因水運之便, 是祖宗定賦厚民之本意也。 今令幹事僧代納, 而悉以米布取償於其民, 民雖欲自納, 竝皆抑代而徵償, 實違定賦之本意矣。 借以一事論之, 草芚一番, 計除田租一斗, 而今取償過一石, 他物類此, 不必枚擧。 代納之禁, 著在令甲, 平人犯之, 置之於罪, 論以贓汚, 終身不敍, 獨聽僧徒恣行無忌, 富商大賈, 輻湊聘奸, 以至權貴, 或有借僧爲名, 而恬不爲怪。 法者, 所與一國共之, 而上自毁之, 何以令下? 自己巳年各道守令被罪之後, 僧徒鴟張, 脅以威勢, 郡縣畏縮, 競爲苛刻, 掊克閭閻, 以應其求, 惟其所欲, 而不敢違。 日者幹事僧侵優〔侵擾〕 忠淸境內諸寺, 諸寺僧徒訴于監司, 監司不敢直問, 以至啓請, 監司而如此, 況守令乎? 人心之畏縮, 於此益可見矣。 非特此也, 慶尙道稅布輸轉之價, 厥初量其道里遠近, 以定多寡, 使輸布者, 得食其米, 今割其半, 以與幹事。 若曰: "初定價數過優, 州、縣利之干請或行, 雖割其半, 亦足相當, 而其價之多寡, 不與於民, 比之代納, 尤爲無弊", 是大不然。 其價旣寡, 則必無應募者, 應募者旣無, 則其轉輸之勞, 必歸於民矣。 國家若知取價之過重, 宜量減以與民, 以抒其力, 今乃無故, 而取其半, 旣徵其價, 又役其力, 是何理耶? 代納雖甚害民, 猶用其力, 坐取輸價, 實爲無名取之。 旣以無名, 又用之於無益之事, 而猶云: "無弊", 可乎? 凡士大夫旣有學識, 且有統察, 而貪汚不法者, 比比有之, 況以無識僧徒乎? 夫天地生財有數, 不在官則在民, 故生寡食衆, 古今所患。 今幹事非取於其徒, 乃取於民, 非徒坐食之衆, 又巧取之, 侵剝民財, 一入其手, 無復檢劾, 恣其所爲, 干請國家, 日益月增, 民安得不至於困民? 旣困則國誰與不困哉? 近者或令引納後年貢物, 或令各官, 隨宜無弊上納, 此誠出於不得已也。 然雖曰: "引納", 至明年, 未嘗除其所納, 非特不除, 又引納之, 一引其納, 無計除之日, 名爲引納, 實爲倍徵, 特巧其名耳。 雖曰: "隨宜無弊", 物不自至, 守令亦安能自辦, 而不取之於民哉? 頃歲頻遭飢荒, 民生之困旣極, 而以應不時之需, 可乎? 雖甚賤物, 又求之不時, 亦至貴而難得。 於是官定物數, 督之嚴急, 民不能堪, 名爲隨宜無弊, 實爲民患, 特巧爲之辭爾。 凡一徵納, 監司必倍國家所徵之數, 守令又必倍之, 國家所求甚少, 而民之受患不貲, 此民之所以日就困窮而不振者也。 原其所以, 實由國家興作旣廣, 調用無節, 以至於此爾。 苟不斷興作, 不節調用, 而欲救此弊, 正猶不濬其源, 而求其流之淸矣。 今殿下命停進上雜物, 又命停罷營繕, 其所以救災恤民之意, 可謂: "至矣。" 然一雨時至, 則將必雜然復興矣, 是豈戒懼修省, 以誠答天之意乎? 臣等嘗以漢之文帝、高麗 文宗致世殷富, 號爲: "持守之賢君", 必有所爲卓然, 及觀行事之蹟, 不過恬靜無爲而已。 伏望殿下特命, 亟罷惠嬪宮之役, 津寬僧居, 亦令仍修其舊, 凡諸營繕與別科取民, 一皆永斷, 停不急之務, 絶無用之費, 淸心省事, 勤恤民隱, 以培國脈, 不勝幸甚。
上曰: "爾等之言, 善矣。 然於慈壽宮, 無惠嬪可處之所, 故不得已以京山林木, 暫構一室, 倘入處慈壽宮, 必營別室, 然後可居。 若津寬寺, 則今日幹事僧, 圖進間閣, 稍增於舊, 故命勿加於舊, 且以舊材, 仍舊基修葺耳。" 憲府更啓曰: "惠嬪宮別室, 混處閭閻, 甚爲不可, 若又暫構, 則內外淺露, 尤爲不可。 如不得已, 則以此材木, 別建一室于慈壽宮, 可也。" 上曰: "轉輸材木, 尤爲有弊, 予更商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