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慶尙道 / 晉州牧 / 金海都護府
◎ 김해 도호부(金海都護府)
본디 가락국(駕洛國)인데, 후한(後漢) 광무 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18년 임인에 가락(駕洛)의 장(長)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계음(禊飮)213) 하다가 구지봉(龜旨峯)을 바라보니, 이상한 성기(聲氣)가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금합(金榼)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글기가 일륜(日輪)과 같은 금빛 알[金色卵]이 있었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고 신령스럽게 여겨 아도간의 집에 봉치(奉置)하고 이튿날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榼)을 열고 보니, 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 다섯 살 가량 될 만하고, 용모가 매우 잘 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배하(拜賀)의 예(禮)를 다하였다. 아이가 날마다 크고 뛰어나서 10여일이 지나매 신장(身長)이 9척이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서 임금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로 일컫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卽位)한 지 1백 58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죽고, 9대손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양(梁)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국탕(國帑)과 보물(寶物)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구충(仇衝)이 나라를 두기까지 무릇 4백 91년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미 구해(仇亥)의 항복을 받아 객례(客禮)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食邑)으로 삼고, 이름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하였는데,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김해 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김해부(金海府)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서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군(郡)으로 하였고,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금주 안동 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고치고, 현종(顯宗) 3년 임자에 낮추어서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 경오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아 공(功)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금녕 도호부(金寧都護府)로 하고, 인해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都護)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여러 목(牧)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2니, 웅신현(熊神縣)은 본디 웅지현(熊只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 현종 무오년에 금주(金州) 임내로 붙였다. 완포현(莞浦縣)은 본디 고려의 완포향(莞浦鄕)인데, 뒤에 현(縣)으로 고쳤다. 부곡(部曲)이 2이니, 대산(大山)과 천읍(川邑)이다.
분산(盆山)은 부(府) 북쪽에 있고, 【부(府)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 신어산(神魚山)은 부(府) 동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뇌진(磊津)이다. 【낙동강 하류인데, 부(府) 북쪽 지경으로 들어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이름은 해양강(海陽江)이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산(梁山)에 이르기 32리, 서쪽으로 창원(昌原)에 이르기 58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6리, 북쪽으로 밀양(密陽)에 이르기 32리이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1천 2백 90호, 인구가 6천 6백 42명이요, 웅신의 호수는 63호, 인구가 3백 18명이며, 완포의 호수는 37호, 인구가 1백 7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47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20명, 선군(船軍)이 8백 40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정(鄭) 【해주(海州)에서 왔다. 】 ·맹(孟) 【장양(長陽)에서 왔다. 】 이며, 웅신(熊神)의 성이 3이니, 서(徐)·주(州)·유(劉)요, 내성이 1이니, 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 이며, 완포(莞浦)의 성이 1이니, 전(田)이요, 대산(大山)의 성이 1이니, 전(田)이며, 천읍(川邑)의 성이 1이니, 공(公)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7천 8백 9결이다. 【논이 약간 적다. 】 토의(土宜)는 벼·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녹포(鹿脯)·상어[沙魚]·건합(乾蛤)·우무[牛毛]·미역·어교(魚膠)·종이·가는 대[篠]·왕대[簜]·사슴가죽·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는 오징어뼈·백복령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과 【부(府) 동쪽 감물야촌(甘勿也村)에서 난다. 】 은석(銀石) 【부(府) 북쪽 사읍제산(沙邑梯山)에서 나는데, 시험해 보니 쓰기에 맞지 아니하였다. 】 이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부 남쪽에 있고,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 동쪽 감물야촌(甘勿也村)에 있다. 【하품이다. 】
북산 석성(北山石城)은 부 북쪽 3리에 있다. 【둘레가 2백 60보인데, 안에 작은 못 4, 우물 3이 있다. 】 수로왕의 궁전 터[宮殿遺基]는 부내(府內)에 있고, 묘(墓)는 부 서쪽 대기리(大岐里)에 있다. 【부에서 3백 보 거리이다. 】 연자루(燕子樓)는 객사(客舍) 동쪽에 있고, 불훼루(不毁樓)는 금강사(金剛社)에 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거둥하였다가 여기에 머물렀다. 】 초현대(招賢臺)는 부 동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駕洛國) 거등왕(居登王)이 여기에 올라서 칠점산(七點山)에 머물러 사는 참시 선인(旵始仙人)을 부르니, 참시가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서로 놀며 희롱하였으므로, 이름을 초현대라고 하였다." 한다. 】 역(驛)이 7이니, 남역(南驛)·덕산(德山)·금곡(金谷)·성법(省法)·적항(赤項)·대산 신역(大山新驛)·웅신 신역(熊神新驛)이다. 제포(薺浦)는 웅신현에 있다. 【본부(本府)와의 거리가 42리인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 봉화(烽火)가 6곳이니, 가덕도(加德島) 응암(鷹嵓)은 부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성화야산(省火也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웅신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한다. 】 성화야(省火也) 【동쪽으로 평석성(平石城)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부의 산성 타고암(打鼓巖)에 응한다. 】 타고암(打鼓巖) 【북쪽으로 자암산(子巖山)에 응한다. 】 ·자암산(子巖山) 【북쪽으로 밀양 남산(南山)에 응한다. 】 사화랑산(沙火郞山) 【북쪽으로 창원(昌原) 장복산(長卜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완포현 고산(高山)에 응한다. 】 ·고산(高山) 【동쪽으로 웅신현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창원 여포(餘浦)에 응한다. 】 수락(水落)은 천읍(川邑)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물이 갈리어 흐르는데, 전라도가 가물면 동쪽으로 합류(合流)하고, 경상도가 가물면 서쪽으로 합류하고, 두 도가 다 가물지 아니하면 동서로 나누어 흐르니, 지방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오는 해[來歲]의 가물고 물질 것을 점친다. 】 삼분수(三分水) 【고려에서 처음으로 동남해도 도부서사(東南海道都部署使)를 설치하고, 사(司)를 김해(金海)에 두었는데, 그 뒤에 도부서사 한충(韓沖)이, 동남해도가 땅이 넓은 까닭으로써 경상·전라·양광(楊廣) 세 도로 나눌 것을 아뢰어 청하여, 가하다고 보(報)하는 날에 부(府) 동쪽 황산강(黃山江) 물이 50여 리를 세차게 대질러 부딪쳐서, 세 포(浦)로 나누어 바다로 들어가니, 시속에서 세 갈래 물[三叉水]이라고 한다. 】 취량도(鷲梁島)는 부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30여 리이다. 【펀펀한 모래[平沙]의 둘레가 20여 리 가량이다. 그 섬이 오래 가물다가 장차 비가 올려고 하면, 울고, 장차 개이려면 우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으니, 시속에서 명지(鳴旨)라고 이른다. 】 가덕도(加德島)는 부 동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10여 리이다. 【춘추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 마도(馬島)는 부 동남쪽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1백 50여 보(步)다. 【백성들이 내왕(來往)하며 경작(耕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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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213]계음(禊飮) : 음력 3월 3일에 수상(水上)에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구하는 계제(禊祭) 때의 주연(酒宴).
◎ 金海: 都護府, 本駕洛國後。 漢 光武皇帝 建武十八年壬寅, 駕洛之長我刀干、汝刀干、彼刀干等九人率其民禊飮, 望見龜旨峯, 有非常聲氣, 就視之, 有金榼自天而降, 中有金色卵, 圓如日輪。 九人拜而神之, 奉置我刀干家。 翼日, 九人咸會, 開榼而視, 有一童子剖殼而生, 年可十五, 容貌甚偉, 衆皆拜賀盡禮。 童子日日岐嶷, 歷十餘日, 身長九尺。 是月望, 九人遂奉以爲主, 卽首露王也。 國號駕洛, 又稱伽倻, 後改爲金官國。 其國東至黃山江, 東北至伽倻山, 西南際大海, 西北界智異山。 卽位一百五十八年, 以獻帝 建安四年己卯薨。 至九代孫仇亥王以梁 武帝 中大通四年壬子, 齎國帑寶物, 降于新羅。 自首露至仇衝有國, 凡四百九十一年。 新羅 法興王旣受仇亥降, 待以客禮, 以其國爲食邑, 號金官郡。 文武王始置金官小京, 景德王改爲金海小京。 高麗 太祖二十三年庚子, 改爲金海府, 後降爲臨海縣, 又陞爲郡。 成宗十四年乙未, 改爲金州、安東都護府。 顯宗三年壬子, 降爲金州防禦使, 元宗十一年庚午, 以防禦使金喧平密城之亂, 又拒三別抄有功, 陞爲金寧都護府, 仍擢喧爲都護以鎭之。 忠烈王三十四年戊申, 陞爲金州牧, 忠宣王二年庚戌, 汰諸牧, 復爲金海府,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都護府。 屬縣二。 熊神, 本熊只縣, 景德王改今名, 爲義安郡領縣。 顯宗戊午, 屬 金州任內。 莞浦縣, 本高麗 莞浦鄕, 後改爲縣。 部曲二, 大山、川邑。 盆山在府北, 【府人以爲鎭山。】 神魚山在部東。 大川, 磊津。 【洛東之下流也。 入府北境, 東南入于海, 今名海陽江。】 四境, 東距梁山三十二里, 西距昌原五十八里, 南距海六里, 北距密陽三十二里。 本府戶一千二百九十, 口六千六百四十二。 熊神戶六十三, 口三百十八。 莞浦戶三十七, 口一千七十九。 軍丁, 侍衛軍四十七, 營鎭軍一百二十, 船軍八百四十。 本府土姓六, 金、許、裵、孫、宋、庾; 來姓二, 鄭、 【海州來。】 孟。 【長陽來。】 熊神姓三, 徐、州、劉; 來姓一, 金。 【金州來。】 莞浦姓一, 田。 大山姓一, 田。 川邑姓一, 公。 厥土肥, 風氣暖, 墾田七千八百九結。 【水田差少。】 土宜, 稻、粟、菽、麥、蕎麥、桑、麻。 土貢, 蜂蜜、黃蠟、鹿脯、沙魚、乾蛤、牛毛、藿、魚膠、紙、篠簜、鹿皮、狐皮、狸皮、獐皮、水獺皮。 藥材, 烏魚骨、白茯苓。 土産, 沙鐵、 【産府東甘勿也村。】 銀石。 【産府北沙邑 梯山, 試驗不中用。】 鹽所二, 皆在府南。 磁器所一, 在部東甘勿也村。 【下品。】 北山石城在府北三里。 【周回二百六十步, 內有小池四井三。】 首露王宮殿遺基在府內, 墓在府西大歧里。 【距府三百步。】 燕子樓在客舍東, 不毁樓在金剛社, 【忠烈王幸合浦, 駐輦于此。】 招賢臺在府東五里。 【世傳駕洛國 居登王登此, 招七點山棲止旵始仙人, 旵始乘舟抱琴而來, 相與遊戲, 因名招賢臺。】 驛七, 南驛、德山、金谷、省法、赤項、大山新驛、熊神新驛。 薺浦在熊神縣。 【距本府四十二里, 水軍萬戶守禦。】 烽火六處, 加德島 鷹嵓在府南, 【南準省火也山, 西準熊神 沙火郞山。】 省火也、 【東準平石城, 北準本府山城打鼓巖。】 打鼓巖、 【北準子巖山。】 子巖山、 【北準密陽南山】 沙火郞山、 【北準昌原 長卜山, 西準莞浦 高山。】 高山。 【東準熊神 沙火郞山, 南準昌原 餘浦。】 水落在川邑。 【岐流東西, 全羅道將旱則合流于東, 慶尙道將旱則合流于西, 兩道俱不旱, 則分流東西, 土人以此占來歲水旱。】 三分水。 【高麗初, 置東南海道都部署使, 置司金海。 厥後都部署使韓沖以東南海道地廣, 奏請分爲慶尙、全羅、楊廣三道, 報可之。 日府東黃山江水衝激五十餘里, 分三浦入海, 俗呼爲三乂水。】 鷲梁島在府南海中, 水路三十餘里, 【平沙周回二十里許。 其島, 久旱將雨則鳴, 將晴則鳴, 其聲如雷, 俗謂之鳴旨。】 加德島在府東, 水路十餘里, 【春秋, 令所在官行祭。】 馬島在府東南, 水路一百五十餘步。 【人民來往耕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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