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忠淸道 / 公州牧 / 扶餘縣
◎ 부여현(扶餘縣)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扶里郡)인데 26대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1백 20년을 지나 31대 의자왕(義慈王) 때에 이르러, 당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과 더불어 이를 쳐서 차지했는데, 【곧 현경(顯慶) 5년이다. 】 당나라 군사가 돌아가매, 신라에서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무왕(武王) 12년 임신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부여군(扶餘郡)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그대로 따르다가,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에 붙이었고,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대천(大川)은 고성진(古省津)이다. 【웅진(熊津)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임천(林川)에 이른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17리요, 서쪽으로 홍산(鴻山)에 이르기 12리요, 남쪽으로 임천(林川)에 이르기 7리요, 북쪽으로 정산(定山)에 이르기 4리이다.
호수가 3백 82호요, 인구가 1천 3백 3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7명, 수호군이 29명이요, 선군이 2백 28명이다.
토성(土姓)이 8이니, 심(沈)·이(李)·서(徐)·전(全)·형(邢)·조(曺)·고(高)·표(表)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3천 7백 62결이요, 【논이 3분의 1에 좀 넘는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모시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삵괭이가죽·잉어·웅어·잡깃[雜羽]·자리·종이·칠(漆)·족제비털[黃毛]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다. 【현의 서쪽 유현동(杻峴洞)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
청산 석성(靑山石城)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지세가〉 험하고, 둘레가 3백 3보이며, 안에 샘 3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또〉 군창(軍倉)이 있다. 】 역(驛)이 2이니, 은산(恩山)과 용전(龍田)이다. 【태종 원년 신사에 비로소 두었다. 】 대난보(大難洑) 【현의 서쪽 및 홍산(鴻山) 동쪽 복판에 있는데, 뚝의 길이가 2백 17척이며, 국둔전(國屯田) 74결에 물을 댄다. 】 천정대(天政臺) 【현의 북쪽 절벽 봉우리 위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대(臺)가 있고, 아래에는 긴 강이 있으며, 강가에는 흰 모래톱이 있는데, 민간에 전하기를, "백제 때 매양 사람을 씀에 있어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재계하고, 〈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 대 위에 두고 모래톱에 둘러서서, 천제(天帝)가 금자(金字)로 낙점(落點)하기를 기다려, 임금이 벼슬을 주었으므로, ‘천정대’라 하였다." 한다. 아래에 호암사(虎巖寺)가 있는데, 돌 위에 지었다. 돌에 범의 흔적이 있으므로, 이름을 삼았다 한다. 호암사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면, 산에 한 괴상한 바위가 있어 강가에 걸터 앉아 있는데, 바위 위에 용을 낚던 흔적이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 비·바람이 갑자기 닥쳐서, 흰말[白馬]로써 〈미끼를 삼아〉 용을 낚은 후 쳐 이겼으므로, 강을 백마(白馬),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하였다." 한다. 대 서쪽에 또 1백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데, 민간에 전하기를, "의자왕(義慈王)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매,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落花臺)라 하였다." 한다. 낙화대로부터 강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한 괴상한 바위가 물가에 걸터앉아 있는데, 10여 사람이 넉넉히 앉을 만하다. 민간에 전하기를, "예전 백제의 왕이 이 바위에서 노는데, 바위가 저절로 더워졌으므로, 자온대(自溫臺)라 하였다." 한다. 현의 북쪽 산 언덕에 큰 비가 하나 있는데, 글자가 깎여 없어져서 사실을 상고하기가 어렵다. 】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2면
◎ 扶餘縣: 本百濟 所扶里郡, 二十六世聖王自熊川來都之, 號南扶餘。 歷一百二十年, 至三十一世義慈王時, 唐 高宗遣蘇定方, 與新羅 金庾信伐取之。 【卽顯慶五年也】 唐師旣去, 新羅盡得百濟舊地。 武王十二年壬申, 置摠管, 景德王改爲扶餘郡, 高麗因之。 顯宗戌午, 屬公州任內,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縣監。 大川, 古省津, 【自熊津西流, 達于林川。】 四境, 東距公州十七里, 〔西〕 距鴻山十二里, 南距林川七里, 北距定山四里。 戶三百八十二, 口一千三百三十七。 軍丁, 侍衛軍十七, 守護軍二十九, 船軍二百二十八。 土姓八, 沈、李、徐、全、邢、曺、高、表。 厥土肥塉相半, 墾田三千七百六十二結。 【水田三分之一强】 土宜五穀, 桑、苧。 土貢, 狐皮、狸皮、鯉魚、雄魚、雜羽、席、紙、漆、黃毛。 磁器所一。 【在縣西狃峴洞, 下品。】 靑山石城。 【在縣東一里, 險阻, 周回三百三步。 內有泉三, 冬夏不渴, 有軍倉。】 驛二, 恩山、龍田。 【太宗元年辛巳, 始置。】 大難洑、 【在縣西及鴻山東中央, 堤長二百十七尺, 灌漑國屯田七十四結。】 天政臺。 【縣北有絶巚, 巚上有臺, 下有長江, 江渚有白沙汀。 諺傳昔百濟時每用人, 君臣齊戒, 錄人名, 置臺上, 環拱白沙汀, 以侍天帝, 金字落點, 然後王乃爵人, 故謂之天政臺。 下有虎巖寺, 營于石上。 石有虎跡, 故以爲名。 自虎巖順流而南, 至于扶蘇山, 山有一怪巖, 跨于江渚。 巖上有釣龍跡, 諺傳蘇定邦伐百濟時, 雲雨暴作, 以白馬釣龍, 而後克伐之, 故江曰白馬, 巖曰釣龍臺。 臺西又有百丈危巖, 諺傳義慈王爲新羅所敗, 宮女奔于是巖, 自沈于江, 故曰落花臺。 自落花臺順流而西, 有一怪巖, 跨于水渚, 可坐十餘人, 諺傳昔百濟王遊于此巖, 則巖自溫, 故名曰自溫臺。 縣北山阿有一大碑, 頹殘字缺, 事實難考。】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