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忠淸道 / 公州牧 / 石城縣
◎ 석성현(石城縣)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인데, 신라에서 석산현(石山縣)으로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석성(石城)으로 고치어,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에 붙이었다.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감무를 혁파하여 공민왕(恭愍王) 20년 신해에 부여 감무(扶餘監務)로써 겸임하게 하다가, 공양왕(恭讓王)경오193) 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4년 갑오에 이산(尼山)에 합쳐서 이성(尼城)으로 고쳐 부르다가, 을미194) 에 고다진(古多津)에 왕래하는 요충(要衝)이 되므로 다시 석성 현감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이산(尼山)에 이르기 13리, 서쪽으로 임천(林川)에 이르기 9리, 남쪽으로 은진(恩津)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부여(扶餘)에 이르기 11리이다.
호수가 3백 95호요, 인구가 1천 2백 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1명이요, 수호군이 23명, 선군(船軍)이 1백 50명이다.
토성(土姓)이 2이니, 석(石)·정(鄭)이요, 망성(亡姓)이 3이니, 이(李)·노(盧)·백(白)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박(朴)이다. 【지금 향리(鄕吏)가 되었다. 】
땅은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다. 간전(墾田)이 2천 4백 49결이요, 【논과 밭이 반반이다. 】 토의(土宜)는 기장·피·벼·콩·조·팥·메밀·참깨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대추·잡깃·모시요, 약재(藥材)는 연밥[蓮子]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이다. 【현의 남쪽 삼산리(三山里)에서 나는데, 하품(下品)이다. 】 봉화가 1곳이니, 불암(佛巖)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은진(恩津) 강경포(江京浦)에, 동쪽으로 은진(恩津) 노산(盧山)에 응한다. 】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32면
◎ 石城縣: 本百濟 珍惡山縣, 新羅改名石山縣, 爲扶餘郡領縣, 高麗改名石城。 顯宗戊午, 屬公州任內,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後革監務。 恭愍王二十年辛亥, 以扶餘監務兼任, 恭讓王庚午, 復置監務。 本朝太宗十四年甲午, 合於尼山, 改號尼城。 乙未, 以古多津爲往來要街, 復置石城縣監。 四境, 東距尼山十三里, 西距林川九里, 南距恩津十四里, 北距扶餘十一里。 戶三百九十五, 口一千二百八。 軍丁, 侍衛軍十一, 守護軍二十三, 船軍一百五十。 土姓二, 石、鄭; 亡姓三, 李、盧、白; 續姓一, 朴。 【今爲鄕校】 厥土肥少塉多, 墾田二千四百四十九結。 【旱田水田相半】 土宜, 黍、稷、稻、菽、粟、小豆、蕎麥、芝麻。 土貢, 黃毛、棗、雜羽、苧。 藥材, 蓮子。 土産, 沙鐵。 【産縣南三山里, 下品。】 烽火一處, 佛巖。 【在縣南, 南準恩津、江京浦, 東準恩津、盧山。】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