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149권, 地理志 忠淸道 淸州牧 文義縣

地理志 / 忠淸道 / 淸州牧 / 文義縣

문의현(文義縣)

본래 백제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신라 때에 연산군(燕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옛 이름을 인습(因襲)하여 청주(淸州) 임내로 삼았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高宗) 말년 무오179) 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의 현령(文義縣令)으로 승격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양성산(壤城山) 【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 형각진(荊角津)주안현(周岸縣)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현의 남쪽을 지나 형각진이 되고, 연기(燕岐) 지경으로 들어간다. 【형각(荊角)을 예전하는 형지(荊指)라 하였다. 】 또는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회인(懷仁)에 이르기 9리, 서쪽으로 연기(燕岐)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회덕(懷德)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가 3백 53호요, 인구가 1천 8백 71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8명이요, 영속군(營屬軍)이 50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24명이요, 선군(船軍)이 26명이다.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조(曺)·박(朴)이요, 덕류역(德留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이(李)·강(姜)이다.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차고 더운 것이 알맞다. 간전(墾田)은 2천 7백 54결(結)이요, 【논이 9분의 3에 좀 모자란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메밀이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종이·느타리·대추·여우가죽[狐皮]·삵괭이가죽[狸皮]·족제비털[黃毛]·잡깃[雜羽]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백출(白朮)이다.

태산 석성(兌山石城)이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둘레가 7백 72보이며, 〈지세가〉 험하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 역(驛)이 1이니, 덕류(德留)요, 봉화(烽火)가 1곳이니, 소이산(所伊山)이다. 【남쪽으로 회덕(懷德) 계족산(鷄足山)에, 북쪽으로 청주(淸州) 것대[巨叱大]에 응한다. 】 누현(漏峴)은 현의 동쪽 회인(懷仁)으로 가는 지로(指路)에 있다.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속칭 용(龍)이 나간 곳이라 한다. 】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27면

文義縣: 本百濟 一牟山郡, 新羅改爲燕山郡, 高麗因舊名, 爲淸州任內。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高宗末年戊午, 以衛社功臣朴希實內鄕, 陞爲文義縣令, 本朝因之。 壤城山 【春秋, 令所在官行祭。】 荊角津, 自周岸縣南, 西流過縣南, 爲荊角津, 入燕歧境 【荊角, 古作荊指。】 又稱利遠津。 四境, 東距懷仁九里, 西距燕歧二十八里, 南距懷德十里, 北距淸州十里。 戶三百五十三, 口一千八百七十一。 軍丁, 侍衛軍十八, 營屬軍五十, 鎭軍一百二十四, 船軍二十六。 土姓三, 德留驛續姓二, 。 厥土塉, 風氣寒暖適中。 墾田二千七百五十四結。 【水田九分之三少】 土宜五穀, 粟、蕎麥。 土貢, 蜂蜜、黃蠟、紙、眞茸、棗、狐皮、狸皮、黃毛、雜羽。 藥材, 人蔘、白朮。 兌山石城在縣西四里。 【周回七百七十二步, 險阻。 內有井一, 冬夏不渴。】 驛一, 德留。 烽火一處, 所伊山 【南準懷德、鷄足山, 北準淸州、巨叱大。】 漏峴在縣東懷仁指路。 【有石穴, 俗傳湧龍之處。】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