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理志 / 京畿 / 富平都護府 / 仁川郡
◎ 인천군(仁川郡)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또는 미추홀(彌趨忽), 또는 경원매소(慶原買召)라 한다. 】 신라에서 소성(邵城)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147)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무오148) 에 수주(樹州)149)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황비(皇妣) 인예 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仁宗) 때 황비(皇妣) 순덕 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으로써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승격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옛이름 인주(仁州)로 복구하였다가, 태종(太宗)계사150) 에 예(例)에 의하여 인천군(仁川郡)으로 고쳤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주몽(朱蒙)의 두 아들, 큰 아들 비류(沸流)와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북부여(北扶餘)로부터 10인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는데, 백성들이 많이 좇았다. 드디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바라보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니, 열 신하가 간(諫)하기를, ‘오직 이 한남(漢南)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땅이 열리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혀서, 천험(天險)의 지리(地理)로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갈라 가지고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열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오랜 만에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지 못하고 돌아와서,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인민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서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 부곡(部曲)이 1이니, 이포(梨浦)이다. 【안산(安山) 지경을 지나서 남양(南陽) 지경에 있는데, 오직 4호(戶)가 있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산(安山)에 이르기를 45리, 서쪽과 남쪽은 바다인데, 모두 7리요, 북쪽으로 부평(富平)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가 3백 57호요, 【이포의 4호도 합한 수이다. 】 인구가 1천 4백 1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명, 선군(船軍)이 1백 72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박(朴)이며, 【당성(唐城). 】 없어진 내성[亡來姓]은 최(崔)이다. 【정주(貞州).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기후가 바다에 가까와서 일찍 따뜻해진다. 간전(墾田)이 2천 6백 1결(結)이다. 【논이 7분의 3이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기장·콩·보리·팥·메밀·참깨·뽕나무·삼[麻]이요, 약재(藥材)는 사자발쑥·삿갓나물[皂休]·흰바곳[白附子]이다. 어량(魚梁)이 19곳이요, 【주로 참치가 나며, 또는 오징어·농어·갈치·홍어·넙치[廣魚]·설치[舌大魚]·밴댕이[蘇魚]·조기·망어(亡魚)·상어[沙魚]·숭어[首魚]·민어·가오리[加火魚]·도미·큰새우·대합조개[生蛤]·모시조개[黃蛤]·낙지·소라가 난다. 】 염소(鹽所)가 6곳이다.
남산 석성(南山石城) 【군(郡) 남쪽 2리에 있다. 둘레가 1백 60보이며, 사면(四面)이 높고 험하다. 안에 작은 샘이 있다. 】 역(驛)이 2이니, 중림(重林)·경신(慶新)이요, 봉화가 1곳이니, 성산(城山)으로, 군(郡)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안산(安山) 옷애[五叱哀]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富平) 싸리곶이[杻串]에 응한다. 】 큰 방죽[大池堤] 【군(郡)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2천 6백 척(尺)이며, 물대는 논이 1백 10결이다. 】 제물량(濟物梁) 【군(郡) 서쪽 15리에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어서 수어(守禦)한다. 】 자연도(紫燕島) 【제물량 서쪽 수로(水路) 3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인데, 나라의 말 3백 58필을 놓아 먹이며, 수군(水軍)·목자(牧子)·염부(鹽夫)가 있는데, 모두 30여 호이다. 】 삼목도(三木島) 【자연도 옆에 있다. 둘레가 45리인데, 수군·목자·염부 30여 호가 살고 있다. 매양 조수가 물러가면 자연도의 말[馬]이 서로 왕래한다. 】 용류도(龍流島) 【삼목도(三木島) 서쪽 수로(水路) 5리에 있다. 둘레가 23리인데, 나라의 말 59필을 놓아 먹이며, 수군·목자·염부 20여 호가 살고 있다. 】 사탄도(沙呑島) 【용류도와 서로 연하였는데, 둘레가 15리이다. 목자·염부 5, 6호가 살고 있는데, 함께 소금 굽는 것으로 살아간다. 】 무의도(無衣島) 【서쪽 수로(水路) 1리에 있다. 둘레가 25리인데, 나라의 말 92필을 놓아 먹이며, 밭과 소금이 없어서 사람이 살지 못하고, 삼목도의 목자가 내왕(來往)하면서 말을 기른다. 】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22면
- [註 147]율진군(栗津郡) : 과천.
- [註 148]
◎ 仁川郡: 本高句麗 買召忽縣, 【一云彌趨忽, 一云慶原買召。】 新羅改名邵城, 爲栗津郡領縣。 高麗 顯宗戊午, 屬樹州任內。 至肅宗時, 以皇妣仁睿王后 李氏內鄕, 陞爲慶源郡。 仁宗時, 以皇妣順德王后 李氏內鄕, 陞爲知仁州事。 恭讓王三年辛未, 陞爲慶源府, 本朝太祖元年壬申, 復舊號爲仁州, 太宗癸巳, 例改爲仁川郡。 【三國史云: "朱蒙二子長沸流, 次溫祚。 自北扶餘率十臣南行, 百姓多從之。 遂登漢山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海濱, 十臣諫曰: ‘唯北漢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嶽, 南望沃澤, 西阻大海, 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此,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趨忽; 溫祚率十臣都慰禮成。 久之, 沸流以彌趨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晁定, 人民帖安, 遂慙愧而死。 其臣民, 皆歸於慰禮都。】 部曲一, 梨浦。 【越安山境在南陽界, 只有四戶。】 四境, 東距安山四十五里, 西南大海, 皆七里, 北距富平十里。 戶三百五十七, 【梨浦四戶倂計。】 口一千四百一十二。 軍丁, 侍衛軍一, 船軍一百七十二。 土姓六, 李、貢、河、蔡、全、門; 來姓朴; 【唐城】 ; 亡來姓崔。 【貞州】 厥土肥塉相半, 風氣近海早暖。 墾田二千六百一結。 【水田居七分之三】 土宜五穀, 粟、黍、菽、麥、小豆、蕎麥、胡麻、桑、麻。 藥材, 獅子足艾、皂休、白附子。 魚梁十九所。 【主産眞魚, 又産烏賊魚、鱸魚、刀魚、洪魚、廣魚、舌大魚、蘇魚、石首魚、亡魚、沙魚、首魚、民魚、加火魚、到美魚、大蝦、生蛤、黃蛤、落地、小螺。】 鹽所六。 南山石城 【在郡南二里, 周回一百六十步, 四面高險, 內有小泉。】 驛, 二, 重林、慶新。 烽火一處, 城山在郡南。 【南準安山五叱哀, 北準富平杻串。】 大池堤、 【在郡北, 周回二千六百尺, 假田一百一十結。】 濟物梁、 【在郡西十五里, 城倉浦有水軍萬戶守禦。】 紫燕島、 【在濟物梁西, 水路三里, 周回二十五里, 放國馬三百五十八匹。 有水軍牧子鹽夫, 共三十餘戶。】 三木島、 【在紫燕島之傍, 周回四十五里, 水軍牧子鹽夫共三十餘戶居之。 每潮退, 紫燕島馬自相往來。】 龍流島、 【在三木島之西, 水路五里, 周回二十三里, 放國馬五十九匹。 有水軍牧子鹽夫二千餘戶。】 沙呑島 【與龍流島相連, 周回十五里。 有牧子鹽夫五六戶, 俱以煮鹽爲生】 無衣島。 【在西水路一里, 周回二十五里, 放國馬九十二匹。 無田無鹽, 人不得居, 三木島牧子來往看養。】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22면
- [註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