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123권, 세종 31년 2월 9일 庚申 2/3 기사 /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유학 최진현 등이 강릉부 진부현의 강무장 폐단에 대해 상서하다
국역
유학(幼學) 최진현(崔進賢)이 상서(上書)하기를,
"강릉부(江陵府) 진부현(珍富縣)을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음은 신이 갖추 아옵니다. 예전 우리 태종께서 여기에 거둥하신 것은 놀고 사냥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온데, 뒤에 드디어 강무하는 곳으로 만드옴은 우리 태종의 본의가 아니옵니다. 근래에 길이 험하고 멀어서, 만승(萬乘)023) 으로 가서 순행할 땅이 아니므로, 강무하는 곳을 고쳐서 망패(網牌)를 설치하는 장소로 삼아, 새와 짐승의 해를 없애고, 건두(乾豆)의 자료를 준비하게 하여,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사오나, 해마다 망패가 내려가면, 여염(閭閻)을 침해하여 개와 닭이 편히 쉬지 못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대가(大駕)를 공돈(供頓)하는 비용보다 심하옵니다. 더구나, 대관령 서쪽은 거민(居民)이 적어서, 본래 새·짐승이 성하게 자라는 곳이 되었으니, 비록 날마다 사냥을 계속할지라도 오히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온데, 이제 백성들이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여 감히 사사로 사냥하지 못하오니, 그곳에 있는 새·짐승들이 천백 마리나 떼를 지어 지나가게 되면, 벼곡식이 그 자리에서 없어져서, 그 해가 수해와 한해보다 심하오니, 그곳 백성들이 떠나고 옮기는 것이 다른 곳보다 갑절 많은 것도 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경작을 금지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산의 돌밭을 경작하므로, 흙이 말라 힘이 없으니, 한번 심은 땅은 두번 심을 수 없습니다. 지금 평원 광야(平原廣野)가 아득히 눈에 가득하나, 노루·사슴의 사는 곳이 되고, 백성들은 갈아 농사짓지 못하오니, 비록 새·짐승의 해가 없을지라도, 백성들이 무엇을 경작해 먹고 붙어 살겠습니까. 일에 경중(輕重)이 있사오니 마땅히 살펴서 행할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서 철원(鐵原)의 강무하는 곳이 건두(乾豆)의 자료에 부족하다면, 진부(珍富) 등처의 소민(小民)들의 해는 족히 헤아릴 것이 못되오나, 그렇지 아니하오면, 이 땅의 백성들만이 태평한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이 가하옵니까.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시는 마음으로써, 어찌 아시면서 고치지 아니하겠사오리까. 반드시 감히 천총(天聰)에 상달(上達)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은 최치운(崔致雲)의 아들이옵니다. 신의 아비가 성상의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받사와, 전하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이 일은 마땅히 파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낮고 천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천위(天威)를 모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해 주옵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무장의 연고로써 영서(嶺西) 인민들이 태반이 흩어져 옮겼는데, 횡성(橫城)·홍천(洪川)·이천(伊川)·평강(平康)에서 더욱 심하였다.
- [註 023] 만승(萬乘) : 임금.
원문
○幼學崔進賢上書曰:
江陵府 珍富縣爲講武場, 而民受其瘼, 臣備知之矣。 昔我太宗大王之臨幸于此, 非欲爲遊田之所也, 後遂爲講武之所而不革, 非我太宗之本意也。 近以道塗艱遠, 非萬乘往巡之地, 革講武之所, 設網牌之場, 以除禽獸之害, 以備乾豆之資, 欲以便於公私也。 然每歲網牌下歸, 侵耗閭閻, 雞犬不得寧息, 其騷擾之弊, 甚於大駕供頓之費。 加以大嶺以西, 居民鮮少, 本爲禽獸滋育之處, 雖日獵以繼之, 猶且不勝其苦, 今者民畏禁令, 不敢私獵, 其所在禽獸, 千百成群, 所過之田, 禾稼立盡, 其害甚於水旱。 其民之所以流離轉徙, 倍於他處者, 實爲此也。
且有禁耕之弊, 其地山耕石畦, 土疎無力, 一易之田, 不得再易矣。 今者平原廣野, 莽然極目, 爲糜鹿之所, 而民不得耕耨, 假如無禽獸之害, 民何所耕食而土著哉! 事有輕重, 當審而行之。 若國家以鐵原講武之地, 不贍於乾豆之資, 則珍富等處小民之害, 不足計也。 不然, 此地之民, 獨不爲太平之民可乎? 臣竊謂以殿下之樂聞讜言, 豈知而不革哉! 必無人臣敢上達於天聰也。 臣, 致雲之子也。 臣父過蒙上知, 欲報殿下之恩, 而未遂其志, 常言此事, 在所當罷, 故臣不揆卑賤, 輕冒天威, 伏惟裁擇。
不報。 時以講武場之故, 嶺西人民, 流移太半, 橫城、洪川、伊川、平康尤甚。
국역
유학(幼學) 최진현(崔進賢)이 상서(上書)하기를,
"강릉부(江陵府) 진부현(珍富縣)을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음은 신이 갖추 아옵니다. 예전 우리 태종께서 여기에 거둥하신 것은 놀고 사냥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온데, 뒤에 드디어 강무하는 곳으로 만드옴은 우리 태종의 본의가 아니옵니다. 근래에 길이 험하고 멀어서, 만승(萬乘)023) 으로 가서 순행할 땅이 아니므로, 강무하는 곳을 고쳐서 망패(網牌)를 설치하는 장소로 삼아, 새와 짐승의 해를 없애고, 건두(乾豆)의 자료를 준비하게 하여,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사오나, 해마다 망패가 내려가면, 여염(閭閻)을 침해하여 개와 닭이 편히 쉬지 못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대가(大駕)를 공돈(供頓)하는 비용보다 심하옵니다. 더구나, 대관령 서쪽은 거민(居民)이 적어서, 본래 새·짐승이 성하게 자라는 곳이 되었으니, 비록 날마다 사냥을 계속할지라도 오히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온데, 이제 백성들이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여 감히 사사로 사냥하지 못하오니, 그곳에 있는 새·짐승들이 천백 마리나 떼를 지어 지나가게 되면, 벼곡식이 그 자리에서 없어져서, 그 해가 수해와 한해보다 심하오니, 그곳 백성들이 떠나고 옮기는 것이 다른 곳보다 갑절 많은 것도 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경작을 금지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산의 돌밭을 경작하므로, 흙이 말라 힘이 없으니, 한번 심은 땅은 두번 심을 수 없습니다. 지금 평원 광야(平原廣野)가 아득히 눈에 가득하나, 노루·사슴의 사는 곳이 되고, 백성들은 갈아 농사짓지 못하오니, 비록 새·짐승의 해가 없을지라도, 백성들이 무엇을 경작해 먹고 붙어 살겠습니까. 일에 경중(輕重)이 있사오니 마땅히 살펴서 행할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서 철원(鐵原)의 강무하는 곳이 건두(乾豆)의 자료에 부족하다면, 진부(珍富) 등처의 소민(小民)들의 해는 족히 헤아릴 것이 못되오나, 그렇지 아니하오면, 이 땅의 백성들만이 태평한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이 가하옵니까.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시는 마음으로써, 어찌 아시면서 고치지 아니하겠사오리까. 반드시 감히 천총(天聰)에 상달(上達)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은 최치운(崔致雲)의 아들이옵니다. 신의 아비가 성상의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받사와, 전하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이 일은 마땅히 파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낮고 천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천위(天威)를 모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해 주옵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무장의 연고로써 영서(嶺西) 인민들이 태반이 흩어져 옮겼는데, 횡성(橫城)·홍천(洪川)·이천(伊川)·평강(平康)에서 더욱 심하였다.
- [註 023] 만승(萬乘) : 임금.
원문
○幼學崔進賢上書曰:
江陵府 珍富縣爲講武場, 而民受其瘼, 臣備知之矣。 昔我太宗大王之臨幸于此, 非欲爲遊田之所也, 後遂爲講武之所而不革, 非我太宗之本意也。 近以道塗艱遠, 非萬乘往巡之地, 革講武之所, 設網牌之場, 以除禽獸之害, 以備乾豆之資, 欲以便於公私也。 然每歲網牌下歸, 侵耗閭閻, 雞犬不得寧息, 其騷擾之弊, 甚於大駕供頓之費。 加以大嶺以西, 居民鮮少, 本爲禽獸滋育之處, 雖日獵以繼之, 猶且不勝其苦, 今者民畏禁令, 不敢私獵, 其所在禽獸, 千百成群, 所過之田, 禾稼立盡, 其害甚於水旱。 其民之所以流離轉徙, 倍於他處者, 實爲此也。
且有禁耕之弊, 其地山耕石畦, 土疎無力, 一易之田, 不得再易矣。 今者平原廣野, 莽然極目, 爲糜鹿之所, 而民不得耕耨, 假如無禽獸之害, 民何所耕食而土著哉! 事有輕重, 當審而行之。 若國家以鐵原講武之地, 不贍於乾豆之資, 則珍富等處小民之害, 不足計也。 不然, 此地之民, 獨不爲太平之民可乎? 臣竊謂以殿下之樂聞讜言, 豈知而不革哉! 必無人臣敢上達於天聰也。 臣, 致雲之子也。 臣父過蒙上知, 欲報殿下之恩, 而未遂其志, 常言此事, 在所當罷, 故臣不揆卑賤, 輕冒天威, 伏惟裁擇。
不報。 時以講武場之故, 嶺西人民, 流移太半, 橫城、洪川、伊川、平康尤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