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93권, 세종 23년 8월 11일 乙亥 2/5 기사 /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시호법에 관한 의정부의 상소문
국역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삼가 《당서(唐書)》 백관지(百官志)를 상고하오니, ‘태상 박사(太常博士)가 왕공(王公)과 3품 이상의 공과(功過)·선악(善惡)을 상고하여 그의 시호(諡號)를 한다.’ 하였고, 《당문수(唐文粹)》에는 ‘옛 의식[舊儀]을 상고하여 무릇 죽은 자의 부하[故吏]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상서성(尙書省)에 시호(諡號)를 청할 수 있으나, 행검(行檢)을 상고하여 시호를 결정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다. 한유(韓愈)가 옛 부하로서 동진(董晉)의 행장(行狀)을 지어서 태상(太常)에 공문으로 시호(諡號)할 것을 청하였고, 사관(史官)은 기록에 남길 것을 청하였으며, 유종원(柳宗元)은 종손(從孫)으로서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유혼(柳渾)의 행장을 지어서 상서 고공(尙書考功)에 올리니, 태상(太常)을 내려보내어 시호를 의논하여 정(貞)이라 하고, 칙명(勅命)도 그에 의하라. ’고 하였사온데, 이제 우리 본조(本朝)에서는 무릇 대신(大臣)의 죽음에 친척(親戚)을 시켜 그 행장(行狀)을 찬술(撰述)하게 하여 이조(吏曹)에 올리면, 이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예조에 이문(移文)하여, 봉상시(奉常寺)로 내려보내어 행검(行檢)을 상고하여 시호를 정하고, 또 춘추관(春秋館)에 이문하여 기록에 남기게 하였사온즉, 시호의 법은 모두 고제(古制)를 따른 것이오라 가히 의논할 것이 없사오나, 다만 행장에 간혹 지나치게 아름다운 말이 있어, 시호를 의논할 때에 명실(名實)이 서로 틀리는 폐가 있습니다.
신 등이 또 《논어(論語)》를 상고하오니,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공문자(孔文子)088) 는 어찌하여 문(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문」이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범인(凡人)으로서 성품이 민첩한 자는 대부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지위가 높은 자는 대부분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시호법(諡號法)에,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勤學好問]을 문(文)이라 한다. ’는 것이 있으니, 공어(孔圉)의 시호를 「문」이라고 얻은 것은 이럼으로서일 뿐이다.’ 하였고, 소씨(蘇氏)는 말하기를, ‘공문자가 태숙질(太叔疾)을 시켜서 그 아내를 내보내게 하고 사위를 삼았더니, 질(疾)이 먼저 아내의 아우와 간통하였으므로, 문자(文子)가 노하여 장차 〈군사로〉 치[攻]려 하매, 질(疾)이 송나라로 달아났다. 문자가 질(疾)의 아우 유(遺)를 시켜서 그 아내 공길(孔姞)089) 을 보내 주었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도 시호하기를 문(文)이라 하였음은, 공자(孔子)가 그 선(善)하고 능(能)한 것을 말살하지 아니하고, 이 같으면 역시 문(文)이라고 하기에 족한 것이요, 경천위지(經天緯地)090) 의 문(文)이 아니라고 하였고, 어록(語錄)091) 에 묻기를, 공길(孔姞)의 일이 이와 같지 좋지 아니한데, 곧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였댔자, 무슨 일을 하여 얻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예전에는 시호(諡號)의 법이 매우 관대하여서, 한 가지 은혜만으로 요약시켰다고 이른 바는 단지 한 가지 선(善)한 것만 있어도 취(取)한다고 말함이다. 공문자는 원래 좋지 아니하였지만, 단지 민첩하면서 배우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역시 그의 좋은 점이다.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는 다만 28자(字)가 있는데, 공문자가 문왕(文王)과 일반(一般)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대개 사람에게 선(善)한 것이 많이 있는 자는 그 더욱 선(善)한 것의 한 가지 일을 따서 시호로 하지만, 역시 한 가지의 선한 것만이 있으면 다만 그 한 가지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로 하여서 그 악(惡)을 숨겨 주니, 공문자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의 선(善)한 것도 말할 만한 것이 없고 순전히 악(惡)만 있은 연후에 이름하기를 유(幽)·여(厲)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고, 《당서》 백관지(百官志)에는, 이부(吏部)의 고공랑중(考功郞中)과 원외랑(員外郞) 각 한 사람이 문무 백관의 공과(功過)·선악(善惡)과 그 행장(行狀)을 관장하여, 만약 죽어서 사관(史官)에게 전(傳)하여지고 태상(太常)에서 시호(諡號)하게 되면, 그 행장이 해당한가 아니한가를 질정(質定)하였고, 또 《당문수(唐文粹)》에, 승상(丞相) 여인(呂諲)의 시호(諡號) 의논에 독고급(獨孤及)이 의논해 말하기를, ‘여인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엄숙하고 두름성 있어서, 능히 재주와 지례로 이도(吏道)를 부드럽게 꾸며 나갔으나, 정부[台司]에 있어서는 잗달아서, 비록 비궁(匪躬)092) 의 능력은 없으나, 그 형주(荊州)의 장관이 되어 1년 만에 성과가 있었고, 호령(號令)이 밝고 구비되었으니, 대저(大抵) 위엄과 신용을 주장 삼았으며, 진희묘(陳希昴)를 죽이고 신태지(申太芝)의 간사한 것을 적발하였으므로, 삼초(三楚)093) 의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으니, 시법(諡法)을 상고하면, 위엄과 덕으로 능히 성취시킨 것을 숙(肅)이라 하였는데, 포학한 것을 금지한 것은 위엄이요, 사람을 사랑한 것은 덕이다. 예(禮)를 상고하고 이름[名]을 의논하여서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하기를 청한다. ’고 하여, 엄영(嚴郢)이 논박하기를, ‘고상국(故相國)094) 여인(呂諲)은 예전에 선조(先朝)를 섬겨서 여러 번 큰 임무를 담당하였고, 지덕(至德)095) 초년에 나라 형편이 곤란하였었는데, 공(公)이 앞장서서 가시밭을 헤치고 영무(靈武)까지 〈황제를〉 모시고 가서 자기 몸을 잊고 충성을 다하였으므로, 하루에 세 번씩 〈황제와〉 면대하였는데, 이제 태상(太常)에서 형남(荊南)096) 의 정사(政事)를 논한 것은 자세하나, 정부[台司]에 있어서는 잗달아 비궁(匪躬)의 능력이 없었다고 한 것은, 곧 〈옥(玉)의〉 티를 내세워 아름다운 광채를 말살하는 의논이니, 중도(中道)의 적당한 말은 아니다. 국가의 고사(故事)에 재상[掌臣]의 시호(諡號)는 다 두 글자로 되어 있어서, 그것으로 선(善)한 것을 표창하고 덕(德)을 드러나게 하였다. 무릇 여공(呂公)의 문재(文才)는 능히 해되는 것을 없이하였고, 무략(武略)은 능히 포학한 것을 금지 하였으니, 장한 공(功)과 큰 규모(規模)을 갖추 들[備擧]지는 못하겠으나, 전(傳)에 팔원(八元)097) 의 덕(德)을 충숙 공의(忠肅恭懿)라고 말하였으니, 만약 아름다운 시호로 형용(形容)하자면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독고급이 다시 의논하기를, ‘위(魏)·진(晉) 이래로 가후(賈詡)의 주산(籌算), 가규(賈逵)의 충장(忠壯), 장기(張旣)의 정능(政能), 정욱(程昱)의 지용(智勇), 고옹(顧雍)의 밀중(密重), 왕혼(王渾)의 기량(器量), 유섬(劉剡)의 감재(鑑裁), 유익(庾翼)의 지략(志略)으로도 저들 여덟 군자(君子)가 죽는 날에 모두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하였어도, 당대(當代)에서 폄(貶)098) 하였다 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한 자나 두 자를 가지고 올리고 내리고 하겠는가. 예경(禮經)에 참고하여 그 행한 일을 따져 보아서 전(前)대로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본국의 시법(諡法)은, 행장(行狀)이면 고공(考功)에서 가부(可否)를 의논함이 없삽고, 시호를 의논하는 데는 봉상(奉常)에서 단지 시호와 자의(字義)를 써 가지고 교지(敎旨)를 받을 뿐이며, 그 사람의 실제의 덕(德)과 일을 행한 자취는 조금도 논급(論及)하지 아니하오니,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이조(吏曹)의 고공사(考功司)로 하여금 그 행장을 가지고 당부(當否)를 질정(質定)하여 마감(磨勘)하고 핵실(覈實)하게 한 연후에, 봉상시(奉常寺)에 내리고, 봉상시에서 시호할 것을 의논하게 하여 성인(聖人)의 그 선한 것을 민몰(泯沒)시키지 아니하는 의리를 따르게 하고, 예전 제도를 참고하여 반박하고 다시 의논하는 법을 써서, 그 사람의 행실(行實)을 요약해 취하여, 만약 선(善)한 것이 많은 자라면 그 더욱 선한 것을 따내어 시호로 하옵고, 단히 한 가지의 선한 것만 있다면 그 한 가지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로 하게 하며, 오직, 선한 것이 말할 만한 게 없고 순전히 악(惡)하기만 한 연후에야 악한 시호를 주게 하되, 각기 세 가지 시호 아래에 시호의 행실을 의논한 것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교지(敎旨)를 받아 시행하게 하오면, 거의 옛 제도에 합치되어 이름과 실지가 서로 어긋나는 폐단이 없을까 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註 088] 공문자(孔文子) : 위(衛)나라 정승.
- [註 089] 공길(孔姞) : 공문자의 딸.
- [註 090] 경천위지(經天緯地) : 온 천하를 경륜(經綸)하여 다스림.
- [註 091] 어록(語錄) : 주희(朱熹)의 말한 것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
- [註 092] 비궁(匪躬) :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을 다함.
- [註 093] 삼초(三楚) : 서초(西楚)·동초(東楚)·남초(南楚).
- [註 094] 고상국(故相國) : 죽은 정승.
- [註 095] 지덕(至德) : 당나라 숙종의 연호.
- [註 096] 형남(荊南) : 형주(荊州).
- [註 097] 팔원(八元) :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백호(伯虎)·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임.
- [註 098] 폄(貶) : 깎아 내림.
원문
○議政府啓: "謹按《唐書》 《百官志》: ‘太常博士, 按王公三品以上功過善惡, 爲之諡’。 《唐文粹》: ‘按舊儀, 凡歿者之故吏, 得以行狀, 請諡於尙書省, 而考行定諡, 則有司存。 韓愈以故吏, 撰董晋行狀, 請牒太常, 議所諡牒, 史官請垂編錄。 柳宗元以從孫, 撰右散騎常侍柳渾行狀, 上尙書考功, 下太常諡議曰: 「貞奉勅依。」’ 今我本朝凡大臣之卒, 令親戚述其行狀, 呈于吏曹, 吏曹報議政府, 移文禮曹, 下奉常寺, 考行定諡。 又移文春秋館, 垂諸編錄, 則諡號之法, 悉遵古制, 宜無可議。 但行狀或有溢美之辭, 而議諡之際, 未免名實相浮之弊。 臣等又按《論語》, 子貢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注曰: ‘凡人性敏者, 多不好學; 位高者, 多恥下問, 故諡法有以勤學好問爲文者。 孔圉得諡爲文, 以此而已’。 蘇氏曰: ‘孔文子使太叔疾出其妻而妻之。 疾通於初妻之娣, 文子怒, 將攻之, 疾奔宋。 文子使疾弟遺室孔姞。 其爲人如此, 而諡曰文, 孔子不沒其善, 能如此, 亦足以爲文, 非經天緯地之文也’。 《語錄》問: ‘孔姞事, 如此不好。 便敏學好問, 經得甚事?’ 曰: ‘古諡法甚寬。 所謂節以一惠, 言只有一善, 亦取之。 孔文子固是不好, 只敏學下問, 亦是他好處。 《周禮》, 諡只有二十八字, 不成說。 孔文子與文王一般。 蓋人有善多者, 則摘其尤善者一事, 以爲諡, 亦有只有一善, 則只取其一善以爲諡, 而隱其惡, 如孔文子是也。 惟無一善可稱, 而純於惡, 然後名曰幽、厲耳’。 《唐書》 《百官志》: ‘吏部考二郞中員外郞各一人, 掌文武百官功過善惡及其行狀。 若死而傳於史官, 諡于太常, 則以其行狀, 質其當否’。 又《唐文粹》: ‘丞相呂諲諡議, 獨孤及議曰: 「呂諲聰敏肅給, 能以才智潤飾吏道。 在台司齪齪, 雖無匪躬之能, 然其爲荊州一年有成, 號令明具。 大抵以威信爲主, 戮陳希昴, 按申太芝之奸, 而三楚之人悅服。 按諡法, 威德克就曰肅。 禁暴, 威也; 愛人, 德也。 考禮議名而請諡曰肅。」 嚴郢駁議曰: 「故相國呂諲, 昔事先朝, 累當大任。 至德之初, 天步艱難, 公首披荊榛, 扈蹕靈武, 忘軀盡忠, 一日三接。 今太常議荊南之政詳矣, 而在台司齪齪, 無匪躬之能者, 乃扶瑕掩瑜之論, 非中適之言也。 國家故事, 掌臣之諡, 皆有二字, 以彰善旌德焉。 夫以呂公, 文能無害, 武能禁暴, 盛烈弘規, 不可備擧。 《傳》敍八元之德曰忠肅恭懿。 若以美諡擬於形容, 請諡曰忠肅。」 獨孤及重議曰: 「魏、晋以來, 以賈詡之籌算、賈逵之忠壯、張旣之政能、程昱之智勇、顧雍之密重、 王渾之器量、劉剡之鑑裁、庚翼之志略。 彼八君子者, 死之日, 竝諡曰肅, 當代不以爲貶, 何嘗徵一字二字爲之升降乎? 參之禮經而求其行事, 請依前諡曰肅。」’ 今我本朝諡法行狀則考功無可否之論, 議諡則奉常只書諡號字義, 取旨而已, 至其人實德行事之迹, 則略無及之, 誠爲未便。 乞自今令吏曹考功司以其行狀, 質其當否, 磨勘覈實, 然後下奉常寺。 奉常議所諡, 使遵聖人不沒其善之義, 參用古制駁議重議之法, 節取其人之行實, 若善多者, 則摘其尤善者以爲諡, 只有二善, 則只取其二善以爲諡。 惟無善可稱, 而純於惡, 然後加惡諡。 各於三諡之下, 竝錄諡議行實, 依前取旨施行, 則庶有合於古制而無名實相浮之弊。"
從之。
국역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삼가 《당서(唐書)》 백관지(百官志)를 상고하오니, ‘태상 박사(太常博士)가 왕공(王公)과 3품 이상의 공과(功過)·선악(善惡)을 상고하여 그의 시호(諡號)를 한다.’ 하였고, 《당문수(唐文粹)》에는 ‘옛 의식[舊儀]을 상고하여 무릇 죽은 자의 부하[故吏]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상서성(尙書省)에 시호(諡號)를 청할 수 있으나, 행검(行檢)을 상고하여 시호를 결정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다. 한유(韓愈)가 옛 부하로서 동진(董晉)의 행장(行狀)을 지어서 태상(太常)에 공문으로 시호(諡號)할 것을 청하였고, 사관(史官)은 기록에 남길 것을 청하였으며, 유종원(柳宗元)은 종손(從孫)으로서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유혼(柳渾)의 행장을 지어서 상서 고공(尙書考功)에 올리니, 태상(太常)을 내려보내어 시호를 의논하여 정(貞)이라 하고, 칙명(勅命)도 그에 의하라. ’고 하였사온데, 이제 우리 본조(本朝)에서는 무릇 대신(大臣)의 죽음에 친척(親戚)을 시켜 그 행장(行狀)을 찬술(撰述)하게 하여 이조(吏曹)에 올리면, 이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예조에 이문(移文)하여, 봉상시(奉常寺)로 내려보내어 행검(行檢)을 상고하여 시호를 정하고, 또 춘추관(春秋館)에 이문하여 기록에 남기게 하였사온즉, 시호의 법은 모두 고제(古制)를 따른 것이오라 가히 의논할 것이 없사오나, 다만 행장에 간혹 지나치게 아름다운 말이 있어, 시호를 의논할 때에 명실(名實)이 서로 틀리는 폐가 있습니다.
신 등이 또 《논어(論語)》를 상고하오니,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공문자(孔文子)088) 는 어찌하여 문(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문」이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범인(凡人)으로서 성품이 민첩한 자는 대부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지위가 높은 자는 대부분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시호법(諡號法)에,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勤學好問]을 문(文)이라 한다. ’는 것이 있으니, 공어(孔圉)의 시호를 「문」이라고 얻은 것은 이럼으로서일 뿐이다.’ 하였고, 소씨(蘇氏)는 말하기를, ‘공문자가 태숙질(太叔疾)을 시켜서 그 아내를 내보내게 하고 사위를 삼았더니, 질(疾)이 먼저 아내의 아우와 간통하였으므로, 문자(文子)가 노하여 장차 〈군사로〉 치[攻]려 하매, 질(疾)이 송나라로 달아났다. 문자가 질(疾)의 아우 유(遺)를 시켜서 그 아내 공길(孔姞)089) 을 보내 주었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도 시호하기를 문(文)이라 하였음은, 공자(孔子)가 그 선(善)하고 능(能)한 것을 말살하지 아니하고, 이 같으면 역시 문(文)이라고 하기에 족한 것이요, 경천위지(經天緯地)090) 의 문(文)이 아니라고 하였고, 어록(語錄)091) 에 묻기를, 공길(孔姞)의 일이 이와 같지 좋지 아니한데, 곧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였댔자, 무슨 일을 하여 얻었습니까.’ 하니, 이르기를, ‘예전에는 시호(諡號)의 법이 매우 관대하여서, 한 가지 은혜만으로 요약시켰다고 이른 바는 단지 한 가지 선(善)한 것만 있어도 취(取)한다고 말함이다. 공문자는 원래 좋지 아니하였지만, 단지 민첩하면서 배우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역시 그의 좋은 점이다.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는 다만 28자(字)가 있는데, 공문자가 문왕(文王)과 일반(一般)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대개 사람에게 선(善)한 것이 많이 있는 자는 그 더욱 선(善)한 것의 한 가지 일을 따서 시호로 하지만, 역시 한 가지의 선한 것만이 있으면 다만 그 한 가지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로 하여서 그 악(惡)을 숨겨 주니, 공문자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의 선(善)한 것도 말할 만한 것이 없고 순전히 악(惡)만 있은 연후에 이름하기를 유(幽)·여(厲)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고, 《당서》 백관지(百官志)에는, 이부(吏部)의 고공랑중(考功郞中)과 원외랑(員外郞) 각 한 사람이 문무 백관의 공과(功過)·선악(善惡)과 그 행장(行狀)을 관장하여, 만약 죽어서 사관(史官)에게 전(傳)하여지고 태상(太常)에서 시호(諡號)하게 되면, 그 행장이 해당한가 아니한가를 질정(質定)하였고, 또 《당문수(唐文粹)》에, 승상(丞相) 여인(呂諲)의 시호(諡號) 의논에 독고급(獨孤及)이 의논해 말하기를, ‘여인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엄숙하고 두름성 있어서, 능히 재주와 지례로 이도(吏道)를 부드럽게 꾸며 나갔으나, 정부[台司]에 있어서는 잗달아서, 비록 비궁(匪躬)092) 의 능력은 없으나, 그 형주(荊州)의 장관이 되어 1년 만에 성과가 있었고, 호령(號令)이 밝고 구비되었으니, 대저(大抵) 위엄과 신용을 주장 삼았으며, 진희묘(陳希昴)를 죽이고 신태지(申太芝)의 간사한 것을 적발하였으므로, 삼초(三楚)093) 의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으니, 시법(諡法)을 상고하면, 위엄과 덕으로 능히 성취시킨 것을 숙(肅)이라 하였는데, 포학한 것을 금지한 것은 위엄이요, 사람을 사랑한 것은 덕이다. 예(禮)를 상고하고 이름[名]을 의논하여서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하기를 청한다. ’고 하여, 엄영(嚴郢)이 논박하기를, ‘고상국(故相國)094) 여인(呂諲)은 예전에 선조(先朝)를 섬겨서 여러 번 큰 임무를 담당하였고, 지덕(至德)095) 초년에 나라 형편이 곤란하였었는데, 공(公)이 앞장서서 가시밭을 헤치고 영무(靈武)까지 〈황제를〉 모시고 가서 자기 몸을 잊고 충성을 다하였으므로, 하루에 세 번씩 〈황제와〉 면대하였는데, 이제 태상(太常)에서 형남(荊南)096) 의 정사(政事)를 논한 것은 자세하나, 정부[台司]에 있어서는 잗달아 비궁(匪躬)의 능력이 없었다고 한 것은, 곧 〈옥(玉)의〉 티를 내세워 아름다운 광채를 말살하는 의논이니, 중도(中道)의 적당한 말은 아니다. 국가의 고사(故事)에 재상[掌臣]의 시호(諡號)는 다 두 글자로 되어 있어서, 그것으로 선(善)한 것을 표창하고 덕(德)을 드러나게 하였다. 무릇 여공(呂公)의 문재(文才)는 능히 해되는 것을 없이하였고, 무략(武略)은 능히 포학한 것을 금지 하였으니, 장한 공(功)과 큰 규모(規模)을 갖추 들[備擧]지는 못하겠으나, 전(傳)에 팔원(八元)097) 의 덕(德)을 충숙 공의(忠肅恭懿)라고 말하였으니, 만약 아름다운 시호로 형용(形容)하자면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독고급이 다시 의논하기를, ‘위(魏)·진(晉) 이래로 가후(賈詡)의 주산(籌算), 가규(賈逵)의 충장(忠壯), 장기(張旣)의 정능(政能), 정욱(程昱)의 지용(智勇), 고옹(顧雍)의 밀중(密重), 왕혼(王渾)의 기량(器量), 유섬(劉剡)의 감재(鑑裁), 유익(庾翼)의 지략(志略)으로도 저들 여덟 군자(君子)가 죽는 날에 모두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하였어도, 당대(當代)에서 폄(貶)098) 하였다 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한 자나 두 자를 가지고 올리고 내리고 하겠는가. 예경(禮經)에 참고하여 그 행한 일을 따져 보아서 전(前)대로 시호하기를 숙(肅)이라 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본국의 시법(諡法)은, 행장(行狀)이면 고공(考功)에서 가부(可否)를 의논함이 없삽고, 시호를 의논하는 데는 봉상(奉常)에서 단지 시호와 자의(字義)를 써 가지고 교지(敎旨)를 받을 뿐이며, 그 사람의 실제의 덕(德)과 일을 행한 자취는 조금도 논급(論及)하지 아니하오니,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이조(吏曹)의 고공사(考功司)로 하여금 그 행장을 가지고 당부(當否)를 질정(質定)하여 마감(磨勘)하고 핵실(覈實)하게 한 연후에, 봉상시(奉常寺)에 내리고, 봉상시에서 시호할 것을 의논하게 하여 성인(聖人)의 그 선한 것을 민몰(泯沒)시키지 아니하는 의리를 따르게 하고, 예전 제도를 참고하여 반박하고 다시 의논하는 법을 써서, 그 사람의 행실(行實)을 요약해 취하여, 만약 선(善)한 것이 많은 자라면 그 더욱 선한 것을 따내어 시호로 하옵고, 단히 한 가지의 선한 것만 있다면 그 한 가지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로 하게 하며, 오직, 선한 것이 말할 만한 게 없고 순전히 악(惡)하기만 한 연후에야 악한 시호를 주게 하되, 각기 세 가지 시호 아래에 시호의 행실을 의논한 것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교지(敎旨)를 받아 시행하게 하오면, 거의 옛 제도에 합치되어 이름과 실지가 서로 어긋나는 폐단이 없을까 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註 088] 공문자(孔文子) : 위(衛)나라 정승.
- [註 089] 공길(孔姞) : 공문자의 딸.
- [註 090] 경천위지(經天緯地) : 온 천하를 경륜(經綸)하여 다스림.
- [註 091] 어록(語錄) : 주희(朱熹)의 말한 것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
- [註 092] 비궁(匪躬) :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을 다함.
- [註 093] 삼초(三楚) : 서초(西楚)·동초(東楚)·남초(南楚).
- [註 094] 고상국(故相國) : 죽은 정승.
- [註 095] 지덕(至德) : 당나라 숙종의 연호.
- [註 096] 형남(荊南) : 형주(荊州).
- [註 097] 팔원(八元) :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백호(伯虎)·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임.
- [註 098] 폄(貶) : 깎아 내림.
원문
○議政府啓: "謹按《唐書》 《百官志》: ‘太常博士, 按王公三品以上功過善惡, 爲之諡’。 《唐文粹》: ‘按舊儀, 凡歿者之故吏, 得以行狀, 請諡於尙書省, 而考行定諡, 則有司存。 韓愈以故吏, 撰董晋行狀, 請牒太常, 議所諡牒, 史官請垂編錄。 柳宗元以從孫, 撰右散騎常侍柳渾行狀, 上尙書考功, 下太常諡議曰: 「貞奉勅依。」’ 今我本朝凡大臣之卒, 令親戚述其行狀, 呈于吏曹, 吏曹報議政府, 移文禮曹, 下奉常寺, 考行定諡。 又移文春秋館, 垂諸編錄, 則諡號之法, 悉遵古制, 宜無可議。 但行狀或有溢美之辭, 而議諡之際, 未免名實相浮之弊。 臣等又按《論語》, 子貢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注曰: ‘凡人性敏者, 多不好學; 位高者, 多恥下問, 故諡法有以勤學好問爲文者。 孔圉得諡爲文, 以此而已’。 蘇氏曰: ‘孔文子使太叔疾出其妻而妻之。 疾通於初妻之娣, 文子怒, 將攻之, 疾奔宋。 文子使疾弟遺室孔姞。 其爲人如此, 而諡曰文, 孔子不沒其善, 能如此, 亦足以爲文, 非經天緯地之文也’。 《語錄》問: ‘孔姞事, 如此不好。 便敏學好問, 經得甚事?’ 曰: ‘古諡法甚寬。 所謂節以一惠, 言只有一善, 亦取之。 孔文子固是不好, 只敏學下問, 亦是他好處。 《周禮》, 諡只有二十八字, 不成說。 孔文子與文王一般。 蓋人有善多者, 則摘其尤善者一事, 以爲諡, 亦有只有一善, 則只取其一善以爲諡, 而隱其惡, 如孔文子是也。 惟無一善可稱, 而純於惡, 然後名曰幽、厲耳’。 《唐書》 《百官志》: ‘吏部考二郞中員外郞各一人, 掌文武百官功過善惡及其行狀。 若死而傳於史官, 諡于太常, 則以其行狀, 質其當否’。 又《唐文粹》: ‘丞相呂諲諡議, 獨孤及議曰: 「呂諲聰敏肅給, 能以才智潤飾吏道。 在台司齪齪, 雖無匪躬之能, 然其爲荊州一年有成, 號令明具。 大抵以威信爲主, 戮陳希昴, 按申太芝之奸, 而三楚之人悅服。 按諡法, 威德克就曰肅。 禁暴, 威也; 愛人, 德也。 考禮議名而請諡曰肅。」 嚴郢駁議曰: 「故相國呂諲, 昔事先朝, 累當大任。 至德之初, 天步艱難, 公首披荊榛, 扈蹕靈武, 忘軀盡忠, 一日三接。 今太常議荊南之政詳矣, 而在台司齪齪, 無匪躬之能者, 乃扶瑕掩瑜之論, 非中適之言也。 國家故事, 掌臣之諡, 皆有二字, 以彰善旌德焉。 夫以呂公, 文能無害, 武能禁暴, 盛烈弘規, 不可備擧。 《傳》敍八元之德曰忠肅恭懿。 若以美諡擬於形容, 請諡曰忠肅。」 獨孤及重議曰: 「魏、晋以來, 以賈詡之籌算、賈逵之忠壯、張旣之政能、程昱之智勇、顧雍之密重、 王渾之器量、劉剡之鑑裁、庚翼之志略。 彼八君子者, 死之日, 竝諡曰肅, 當代不以爲貶, 何嘗徵一字二字爲之升降乎? 參之禮經而求其行事, 請依前諡曰肅。」’ 今我本朝諡法行狀則考功無可否之論, 議諡則奉常只書諡號字義, 取旨而已, 至其人實德行事之迹, 則略無及之, 誠爲未便。 乞自今令吏曹考功司以其行狀, 質其當否, 磨勘覈實, 然後下奉常寺。 奉常議所諡, 使遵聖人不沒其善之義, 參用古制駁議重議之法, 節取其人之行實, 若善多者, 則摘其尤善者以爲諡, 只有二善, 則只取其二善以爲諡。 惟無善可稱, 而純於惡, 然後加惡諡。 各於三諡之下, 竝錄諡議行實, 依前取旨施行, 則庶有合於古制而無名實相浮之弊。"
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