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3월 5일 丁未 2/5 기사 /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올린 비변책을 병조에 내려 의정부와 의논하게 하다
국역
전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비변책(備邊策)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북방의 일에 있어서 그 큰 것을 거행하고 그 작은 것을 남겨 놓고, 그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그 느즈러진 일을 뒤에 하는 고로, 시행해야 할 일도 상달(上達)할 겨를이 없었사온데, 이제 질병에 걸렸사와 아뢰지 아니하고 죽사오면 신의 죄가 진실로 큼으로, 병을 이기고 억지로 기록하와 뒤에 조목을 갖추오나, 마음이 어둡고 기운이 약하여 섬세한 것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만일 예청(睿聽)을 입사오면 비록 죽사와도 유감이 없겠사와 지극히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1. 회령(會寧)은 북문(北門)의 자물쇠[管鑰]이오라 더욱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사온데, 왕년(往年)의 수재로 그 평지(平地)의 좋은 전지가 많이 손해를 입었사옵고, 또 도망한 자가 여러 진(鎭)에서 제일 많으므로, 이제 신의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사와, 그 폐해를 구(救)할 바를 생각하였사오나 진실로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본부(本府)의 원산보(圓山堡) 서북쪽 고산성(古山城) 아래에 1백 가(家)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묵은 땅이 있사옵고, 녹야령(綠野嶺) 이남 부회환령(釜回還嶺) 사이의 평지와 산기슭에도 역시 1백 가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땅이 있사온데, 경원(慶源)은 지경이 광활하여 경작하고도 남는 땅이 있사오니, 만약 종성(鍾城) 부근의 경원 땅을 떼어 종성으로 붙이고, 다음에 회령 부근의 종성 땅을 회령으로 붙이오면 토지가 더욱 족(足)할 것이옵니다. 정군(正軍)의 도망한 자는 귀신이 아닌 바에야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을 것이온데, 다만 찾기에 힘쓰지 않을 뿐이옵니다. 하물며 처음부터 각 고을에 입거(入居)한 문적(文籍)이 명백한 것이겠습니까. 그 각 고을로 하여금 기한을 정하고 조사해 찾도록 하고, 혹 찾지 못한 자는 그 족친(族親)이나 인리(隣里) 중에서 가풍(家風)이 유실(有實)한 자를 택하여 대신 들어가게 허락하여 원액(元額)을 보충하게 하와, 위 항목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오면 족히 생업을 유지할 수 있어 군액(軍額)이 줄지 않을 것입니다. 또 회령 정군(正軍) 중에 말[馬]이 없는 자가 58인이옵고, 경흥에 말이 없는 자가 25인이온데, 비록 독촉해서 입마(立馬)하게 하였사와도 재산이 부족하여 입마할 방법이 없다 하오니, 청하옵건대, 제주(濟州)의 흠 있는 말[咎馬]과 본도(本道) 각 목장의 말로서 국용(國用)에 불합(不合)한 말을 찾아 내어 분급(分給)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나이다.
1. 신이 동량(東良)에다 진(鎭)을 설치하는 한 가지 일을 자나깨나 잊지 못하와 항상 잘 아는 자와 저 사람들의 왕래하는 자에게 묻자오면, 모두 말하기를, ‘평지로서 경작할 만한 곳은 본래 적은데다가, 왕년에 많은 수해(水害)를 입었고, 옆에는 석산(石山)이 많아 험조(險阻)하므로 경작할 만한 땅이 또한 적다. ’고 하옵니다. 무릇 읍(邑)을 세우고 군(軍)을 두려면 먼저 먹을 것을 넉넉히 할 도리를 강구한 후에야 할 수 있사온데, 진실로 사람들의 말과 같사오면 한갓 저 사람들만을 소요스럽게 할 뿐이고, 실상은 성취하지 못할 것이오니,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감히 경(輕)하게 거행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사람들의 말은 믿기 어렵사오니 모름지기 친히 살피기를 기다려 그 가부를 정할 것이옵니다.
1. 농상(農桑)은 생민(生民)의 의식(衣食)의 근원이온데, 본도(本道)는 수전(水田)의 이(利)와 양잠(養蠶)의 공(功)이 다른 도(道)와 다른 것이 없사옵고 비록 연변(沿邊)의 신읍(新邑)이라 하더라도 기후[風氣]가 심히 서로 다를 것이 없사와, 그 이(利)가 역시 그러하오나, 다른 토속(土俗)이 좋지 않을 뿐이옵니다. 그 권과(勸課)의 법(法)도 상례(常例)와 같이할 수 없사오니, 반드시 특별하게 권장하고 상주는 제도를 세운 후에야 흥행(興行)될 것입니다. 한(漢)나라 제도에 힘써 농사짓[力田]는 자는 효제(孝悌)하는 것과 차서를 같이하였삽고, 송(宋)나라 제도에는 매양 밭 1경(頃)을 경작하면 한 등의 벼슬을 주었고, 또 빌려 심으[借種]면 조세를 면하여 주었습니다. 청하옵건대, 길주 이북의 수령으로써 수전(水田) 3백 결(結) 이상을 경작하게 하고 뽕나무 3천 주 이상을 심도록 권장하여, 실적이 있는 자는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인하여 본전(本田)의 조세를 3년 동안 면제하여 주며, 민호(民戶)로서 능히 수전 10결 이상을 경작하고 뽕나무 1백 주 이상을 심은 자는 2년간 복호(復戶)하여 권장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1. 북방의 바람과 기후가 강하고 거세어 풍속 습관이 용맹을 좋아하고 경서(經書)를 배우지 아니하와, 윗사람을 친하게 하고 어른을 섬기는 뜻을 아는 자가 드무오며, 간혹 배우는 데 뜻이 있는 자도 경서를 얻기 어려워, 혹 모사(模寫)하는 자가 있사오나 그 공(功)이 매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여러 도(道)에서 간행한 경서를 많이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옵고, 부지런히 교회(敎誨)하여서 그 경서를 통달한 자가 10인 이상이 있사오면, 그 교관(敎官)을 특별히 한 계급을 올려 주고, 학생으로서 능히 사서(四書)와 일경(一經)을 통한 자는 경직(京職)이나 토관(土官)으로 서용(敍用)하여 권려(勸勵)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1. 각궁(角弓)은 칼에 비하여 그 소용됨이 더욱 요긴하오니 출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本道)의 북청(北靑) 이남에는 활을 만드는 자가 드물고 단천(端川) 이북에는 좀 많으므로, 북청 이북의 군사들은 모두 각궁을 가졌사온데, 불량품이 많지 아니하오나, 홍원(洪原) 이남의 군사가 가진 것은 대개가 불량품이오니, 청하건대, 함흥(咸興)·영흥(永興)·길주(吉州)·경성(鏡城) 네 계수관(界首官)이 소속된 각 고을에 조궁소(造弓所)를 설치하고, 민간에서 사고로 죽은 우마의 뿔과 힘줄을 거두어 견고하고 치밀하게 조작하여, 군사에게만 팔아서 그 가격의 이익을 거두게 하고, 부러진 활을 수리하기 원하는 자도 허락하여, 그 수리한 것의 다소에 따라 역시 이익을 거두어, 모두 활 만드는 소용에 쓰도록 하되, 영구히 항식으로 삼으면 좋은 활이 많게 될 것입니다."
하니, 병조에 내려 의정부와 의논하게 하였다. 여럿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종성군(鍾城郡)을 뒤로 물려서 설치하자는 것은 이미 전에 결정한 의논이오나, 다만 백성이 번성하지 못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갑자기 토지를 분할하여 붙이는 것은 옳지 못하오니, 물려 설치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입거(入居)하였다가 도망한 사람으로 찾지 못한 자는 그 친척이나 이웃[隣里]을 골라서 대신 입거하도록 허락하오면, 남도(南道) 각 고을의 향호(鄕戶)가 소요(騷擾)할 폐단이 무궁하오니, 본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입거한 뒤에 도망한 인구의 수효를 갖추 기록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회령과 경흥의 정군(正軍)으로 말이 없는 자는 제주에서 흠 있는 말을 골라 내고, 본도 각 목장의 국용(國用)에 불합(不合)한 말을 모두 골라 내어 분급(分給)하자고 한 일은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동량(東良)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은 모름지기 친히 살핀 뒤에 그 가부를 결정할 일과, 길주 이북의 수령으로써 능히 수전(水田) 3백 결 이상을 경작하게 하고 뽕나무 3천 주 이상을 심도록 권장하여, 그 실적이 있는 자는 특별히 자급(資級)을 더하고 인하여 본전(本田)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하여 주며, 민호(民戶)로서 능히 수전 10결 이상을 경작하고 뽕나무 1백 주 이상을 심은 자는, 2년간 복호(復戶)하여 권장하게 하자고 한 일들은 역시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여러 도(道)에서 간행한 경서(經書)를 많이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는 것은 형편이 어렵사오니, 우선 각도에 있는 책판(冊板) 중에서 집주(集注)나 집석(輯釋)을 물론(勿論)하고 사서(四書)와 시(詩)·서(書)를 각각 1백 80건(件)씩 인쇄하여 예조(禮曹)에 보내게 하여, 예조에서 본도(本道)의 공사(公事)로 올라온 사람편에 부쳐 보내게 하소서. 또 함흥·영흥·길주·경성 네 계수관(界首官)이 조궁소(造弓所)를 설치하게 하자고 한 일도 역시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옵되, 그 미소(微少)한 수리는 공전을 받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농업-권농(勸農) / 출판-서책(書冊)
원문
○初, 咸吉道都節制使金宗瑞上備邊之策曰:
臣於北方之事, 擧其大遺其小, 先其急後其緩, 故所有可行之事, 未遑上達。 今遭疾病, 不啓而死, 則臣罪固大, 力疾强記, 條具于後, 心昏氣弱, 未及纖悉, 儻蒙睿聽, 雖死無憾, 不勝隕越之至。
一, 會寧, 北門管鑰, 尤不可不固。 往年水災, 其平地良田, 多被損毁, 又逋亡者, 獨多於諸鎭。 今臣之憂, 正在於此, 思所以救其弊, 固無他策。 本府圓山堡西北古山城之下, 有百家足耕陳地; 綠野嶺以南、釜回還嶺之間, 平地與山麓, 亦有百家足耕之地。 慶源境壤廣闊, 耕有餘地, 若割鍾城附近慶源之地, 入于鍾城, 次割會寧附近鍾城之地, 入于會寧, 則土地尤足矣。 正軍逃者, 旣非鬼蜮, 則必有所歸, 但推之不固耳。 況初自各官入居文籍明白乎? 其令各官刻期推刷, 或未見推者, 擇其族親隣里中家風有實者, 許令代入, 以充元額, 使之得耕上項土田, 則足以養生, 而軍額不縮矣。 又會寧正軍內無馬者, 五十八人; 慶興無馬者二十五人, 雖督令立馬, 財産不足, 立馬無由。 乞濟州刷出有咎馬及本道各牧場國用不合馬, 幷刷分給何如?
一, 臣於東良設鎭一事, 寤寐不忘, 常常問於熟知者及彼人往來者, 皆曰: "平地可耕處, 本來鮮少, 而往年多被水損, 旁多石山險阻, 可耕之地亦少。 凡建邑置軍, 先講足食之道, 而後可擧。" 誠若人言, 則徒擾彼人, 實不得遂, 何益於我? 是故不敢輕擧, 因循至今。 然人言難信, 須待親審, 定其可否。
一, 農桑, 生民衣食之源。 本道水田之利、養蠶之功, 與他道無異。 雖沿邊新邑, 風氣不甚相殊, 其利亦然, 但土俗不好耳。 其勸課之法, 不可以常例同, 必別立勸賞, 而後可至興行。 漢制, 力田者, 與孝悌同科。 宋制, 每耕田一頃, 與轉一資, 又借種免租。 乞吉州以北守令能勸耕水田三百結以上、植桑三千條以上而有實績者, 特加資級, 仍免本田租稅三年; 民戶能耕水田十結以上、植桑百條以上者, 復戶二年勸勵何如?
一, 北方風氣强勁, 俗習好勇, 不學經書, 罕知親上事長之意。 間有志於學者, 經書難得, 或有模寫者, 其功甚難。 乞諸道所刊經書, 多印廣布, 以勤敎誨。 其有通經書十人以上, 其敎官, 特加一資; 學生能通四書一經者, 京職土官中敍用勸勵何如?
一, 角弓比之於劍, 其用尤緊, 出處不可不慮。 本道北靑以南造弓者鮮少, 端川以北稍多。 是故北靑以北軍士, 皆持角弓, 而不良者不多, 洪原以南軍士所持, 率皆不良。 乞於咸興、永興、吉州、鏡城四界首官, 置造弓所於所屬各官, 例收民間故失牛馬角筋, 堅緻造作, 只賣於軍士, 收其價利。 願修折弓者聽, 隨其所補多少, 亦收功利, 竝資造弓之費, 永爲恒式, 則庶幾良弓多矣。
下兵曹, 與議政府議之。 僉議啓曰: "退設鍾城郡, 已曾定議, 但以民未阜盛未敢耳。 今遽割土地屬之未便, 待退設後更議施行。 入居逃亡人未推者, 擇其親戚隣里, 許令代入, 則南道各官鄕戶騷擾之弊無窮。 令本道監司具其入居後逃亡人口之數啓聞後, 更議施行。 會寧及慶興正軍無馬者, 濟州刷出有咎馬及本道各牧場國用不合馬, 幷刷分給事, 依上言施行。 東良設鎭, 須待親審, 定其可否事及吉州以北守令能勸耕水田三百結以上、植桑三千條以上而有實績者, 特加資級, 仍免本田租稅三年; 民戶能耕水田十結以上、植桑百條以上者, 復戶二年勸勵等事, 亦依上言施行。 諸道所刊經書, 多印廣布勢難, 姑於各道所在冊板中, 勿論集註輯釋, 四書、《詩》、《書》, 各印一百八十件, 送于禮曹, 禮曹因本道因公上來人傳送。 又於咸興、永興、吉州、鏡城四界首官置造弓所等事, 亦依上言施行。 其微少修補, 勿取功利。"
從之。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농업-권농(勸農) / 출판-서책(書冊)
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3월 5일 丁未 2/5 기사 /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올린 비변책을 병조에 내려 의정부와 의논하게 하다
국역
전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비변책(備邊策)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북방의 일에 있어서 그 큰 것을 거행하고 그 작은 것을 남겨 놓고, 그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그 느즈러진 일을 뒤에 하는 고로, 시행해야 할 일도 상달(上達)할 겨를이 없었사온데, 이제 질병에 걸렸사와 아뢰지 아니하고 죽사오면 신의 죄가 진실로 큼으로, 병을 이기고 억지로 기록하와 뒤에 조목을 갖추오나, 마음이 어둡고 기운이 약하여 섬세한 것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만일 예청(睿聽)을 입사오면 비록 죽사와도 유감이 없겠사와 지극히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1. 회령(會寧)은 북문(北門)의 자물쇠[管鑰]이오라 더욱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사온데, 왕년(往年)의 수재로 그 평지(平地)의 좋은 전지가 많이 손해를 입었사옵고, 또 도망한 자가 여러 진(鎭)에서 제일 많으므로, 이제 신의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사와, 그 폐해를 구(救)할 바를 생각하였사오나 진실로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본부(本府)의 원산보(圓山堡) 서북쪽 고산성(古山城) 아래에 1백 가(家)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묵은 땅이 있사옵고, 녹야령(綠野嶺) 이남 부회환령(釜回還嶺) 사이의 평지와 산기슭에도 역시 1백 가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땅이 있사온데, 경원(慶源)은 지경이 광활하여 경작하고도 남는 땅이 있사오니, 만약 종성(鍾城) 부근의 경원 땅을 떼어 종성으로 붙이고, 다음에 회령 부근의 종성 땅을 회령으로 붙이오면 토지가 더욱 족(足)할 것이옵니다. 정군(正軍)의 도망한 자는 귀신이 아닌 바에야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을 것이온데, 다만 찾기에 힘쓰지 않을 뿐이옵니다. 하물며 처음부터 각 고을에 입거(入居)한 문적(文籍)이 명백한 것이겠습니까. 그 각 고을로 하여금 기한을 정하고 조사해 찾도록 하고, 혹 찾지 못한 자는 그 족친(族親)이나 인리(隣里) 중에서 가풍(家風)이 유실(有實)한 자를 택하여 대신 들어가게 허락하여 원액(元額)을 보충하게 하와, 위 항목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오면 족히 생업을 유지할 수 있어 군액(軍額)이 줄지 않을 것입니다. 또 회령 정군(正軍) 중에 말[馬]이 없는 자가 58인이옵고, 경흥에 말이 없는 자가 25인이온데, 비록 독촉해서 입마(立馬)하게 하였사와도 재산이 부족하여 입마할 방법이 없다 하오니, 청하옵건대, 제주(濟州)의 흠 있는 말[咎馬]과 본도(本道) 각 목장의 말로서 국용(國用)에 불합(不合)한 말을 찾아 내어 분급(分給)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나이다.
1. 신이 동량(東良)에다 진(鎭)을 설치하는 한 가지 일을 자나깨나 잊지 못하와 항상 잘 아는 자와 저 사람들의 왕래하는 자에게 묻자오면, 모두 말하기를, ‘평지로서 경작할 만한 곳은 본래 적은데다가, 왕년에 많은 수해(水害)를 입었고, 옆에는 석산(石山)이 많아 험조(險阻)하므로 경작할 만한 땅이 또한 적다. ’고 하옵니다. 무릇 읍(邑)을 세우고 군(軍)을 두려면 먼저 먹을 것을 넉넉히 할 도리를 강구한 후에야 할 수 있사온데, 진실로 사람들의 말과 같사오면 한갓 저 사람들만을 소요스럽게 할 뿐이고, 실상은 성취하지 못할 것이오니,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감히 경(輕)하게 거행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사람들의 말은 믿기 어렵사오니 모름지기 친히 살피기를 기다려 그 가부를 정할 것이옵니다.
1. 농상(農桑)은 생민(生民)의 의식(衣食)의 근원이온데, 본도(本道)는 수전(水田)의 이(利)와 양잠(養蠶)의 공(功)이 다른 도(道)와 다른 것이 없사옵고 비록 연변(沿邊)의 신읍(新邑)이라 하더라도 기후[風氣]가 심히 서로 다를 것이 없사와, 그 이(利)가 역시 그러하오나, 다른 토속(土俗)이 좋지 않을 뿐이옵니다. 그 권과(勸課)의 법(法)도 상례(常例)와 같이할 수 없사오니, 반드시 특별하게 권장하고 상주는 제도를 세운 후에야 흥행(興行)될 것입니다. 한(漢)나라 제도에 힘써 농사짓[力田]는 자는 효제(孝悌)하는 것과 차서를 같이하였삽고, 송(宋)나라 제도에는 매양 밭 1경(頃)을 경작하면 한 등의 벼슬을 주었고, 또 빌려 심으[借種]면 조세를 면하여 주었습니다. 청하옵건대, 길주 이북의 수령으로써 수전(水田) 3백 결(結) 이상을 경작하게 하고 뽕나무 3천 주 이상을 심도록 권장하여, 실적이 있는 자는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인하여 본전(本田)의 조세를 3년 동안 면제하여 주며, 민호(民戶)로서 능히 수전 10결 이상을 경작하고 뽕나무 1백 주 이상을 심은 자는 2년간 복호(復戶)하여 권장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1. 북방의 바람과 기후가 강하고 거세어 풍속 습관이 용맹을 좋아하고 경서(經書)를 배우지 아니하와, 윗사람을 친하게 하고 어른을 섬기는 뜻을 아는 자가 드무오며, 간혹 배우는 데 뜻이 있는 자도 경서를 얻기 어려워, 혹 모사(模寫)하는 자가 있사오나 그 공(功)이 매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여러 도(道)에서 간행한 경서를 많이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옵고, 부지런히 교회(敎誨)하여서 그 경서를 통달한 자가 10인 이상이 있사오면, 그 교관(敎官)을 특별히 한 계급을 올려 주고, 학생으로서 능히 사서(四書)와 일경(一經)을 통한 자는 경직(京職)이나 토관(土官)으로 서용(敍用)하여 권려(勸勵)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1. 각궁(角弓)은 칼에 비하여 그 소용됨이 더욱 요긴하오니 출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本道)의 북청(北靑) 이남에는 활을 만드는 자가 드물고 단천(端川) 이북에는 좀 많으므로, 북청 이북의 군사들은 모두 각궁을 가졌사온데, 불량품이 많지 아니하오나, 홍원(洪原) 이남의 군사가 가진 것은 대개가 불량품이오니, 청하건대, 함흥(咸興)·영흥(永興)·길주(吉州)·경성(鏡城) 네 계수관(界首官)이 소속된 각 고을에 조궁소(造弓所)를 설치하고, 민간에서 사고로 죽은 우마의 뿔과 힘줄을 거두어 견고하고 치밀하게 조작하여, 군사에게만 팔아서 그 가격의 이익을 거두게 하고, 부러진 활을 수리하기 원하는 자도 허락하여, 그 수리한 것의 다소에 따라 역시 이익을 거두어, 모두 활 만드는 소용에 쓰도록 하되, 영구히 항식으로 삼으면 좋은 활이 많게 될 것입니다."
하니, 병조에 내려 의정부와 의논하게 하였다. 여럿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종성군(鍾城郡)을 뒤로 물려서 설치하자는 것은 이미 전에 결정한 의논이오나, 다만 백성이 번성하지 못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갑자기 토지를 분할하여 붙이는 것은 옳지 못하오니, 물려 설치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입거(入居)하였다가 도망한 사람으로 찾지 못한 자는 그 친척이나 이웃[隣里]을 골라서 대신 입거하도록 허락하오면, 남도(南道) 각 고을의 향호(鄕戶)가 소요(騷擾)할 폐단이 무궁하오니, 본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입거한 뒤에 도망한 인구의 수효를 갖추 기록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회령과 경흥의 정군(正軍)으로 말이 없는 자는 제주에서 흠 있는 말을 골라 내고, 본도 각 목장의 국용(國用)에 불합(不合)한 말을 모두 골라 내어 분급(分給)하자고 한 일은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동량(東良)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은 모름지기 친히 살핀 뒤에 그 가부를 결정할 일과, 길주 이북의 수령으로써 능히 수전(水田) 3백 결 이상을 경작하게 하고 뽕나무 3천 주 이상을 심도록 권장하여, 그 실적이 있는 자는 특별히 자급(資級)을 더하고 인하여 본전(本田)의 조세를 3년간 면제하여 주며, 민호(民戶)로서 능히 수전 10결 이상을 경작하고 뽕나무 1백 주 이상을 심은 자는, 2년간 복호(復戶)하여 권장하게 하자고 한 일들은 역시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여러 도(道)에서 간행한 경서(經書)를 많이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는 것은 형편이 어렵사오니, 우선 각도에 있는 책판(冊板) 중에서 집주(集注)나 집석(輯釋)을 물론(勿論)하고 사서(四書)와 시(詩)·서(書)를 각각 1백 80건(件)씩 인쇄하여 예조(禮曹)에 보내게 하여, 예조에서 본도(本道)의 공사(公事)로 올라온 사람편에 부쳐 보내게 하소서. 또 함흥·영흥·길주·경성 네 계수관(界首官)이 조궁소(造弓所)를 설치하게 하자고 한 일도 역시 상언(上言)에 의하여 시행하옵되, 그 미소(微少)한 수리는 공전을 받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농업-권농(勸農) / 출판-서책(書冊)
원문
○初, 咸吉道都節制使金宗瑞上備邊之策曰:
臣於北方之事, 擧其大遺其小, 先其急後其緩, 故所有可行之事, 未遑上達。 今遭疾病, 不啓而死, 則臣罪固大, 力疾强記, 條具于後, 心昏氣弱, 未及纖悉, 儻蒙睿聽, 雖死無憾, 不勝隕越之至。
一, 會寧, 北門管鑰, 尤不可不固。 往年水災, 其平地良田, 多被損毁, 又逋亡者, 獨多於諸鎭。 今臣之憂, 正在於此, 思所以救其弊, 固無他策。 本府圓山堡西北古山城之下, 有百家足耕陳地; 綠野嶺以南、釜回還嶺之間, 平地與山麓, 亦有百家足耕之地。 慶源境壤廣闊, 耕有餘地, 若割鍾城附近慶源之地, 入于鍾城, 次割會寧附近鍾城之地, 入于會寧, 則土地尤足矣。 正軍逃者, 旣非鬼蜮, 則必有所歸, 但推之不固耳。 況初自各官入居文籍明白乎? 其令各官刻期推刷, 或未見推者, 擇其族親隣里中家風有實者, 許令代入, 以充元額, 使之得耕上項土田, 則足以養生, 而軍額不縮矣。 又會寧正軍內無馬者, 五十八人; 慶興無馬者二十五人, 雖督令立馬, 財産不足, 立馬無由。 乞濟州刷出有咎馬及本道各牧場國用不合馬, 幷刷分給何如?
一, 臣於東良設鎭一事, 寤寐不忘, 常常問於熟知者及彼人往來者, 皆曰: "平地可耕處, 本來鮮少, 而往年多被水損, 旁多石山險阻, 可耕之地亦少。 凡建邑置軍, 先講足食之道, 而後可擧。" 誠若人言, 則徒擾彼人, 實不得遂, 何益於我? 是故不敢輕擧, 因循至今。 然人言難信, 須待親審, 定其可否。
一, 農桑, 生民衣食之源。 本道水田之利、養蠶之功, 與他道無異。 雖沿邊新邑, 風氣不甚相殊, 其利亦然, 但土俗不好耳。 其勸課之法, 不可以常例同, 必別立勸賞, 而後可至興行。 漢制, 力田者, 與孝悌同科。 宋制, 每耕田一頃, 與轉一資, 又借種免租。 乞吉州以北守令能勸耕水田三百結以上、植桑三千條以上而有實績者, 特加資級, 仍免本田租稅三年; 民戶能耕水田十結以上、植桑百條以上者, 復戶二年勸勵何如?
一, 北方風氣强勁, 俗習好勇, 不學經書, 罕知親上事長之意。 間有志於學者, 經書難得, 或有模寫者, 其功甚難。 乞諸道所刊經書, 多印廣布, 以勤敎誨。 其有通經書十人以上, 其敎官, 特加一資; 學生能通四書一經者, 京職土官中敍用勸勵何如?
一, 角弓比之於劍, 其用尤緊, 出處不可不慮。 本道北靑以南造弓者鮮少, 端川以北稍多。 是故北靑以北軍士, 皆持角弓, 而不良者不多, 洪原以南軍士所持, 率皆不良。 乞於咸興、永興、吉州、鏡城四界首官, 置造弓所於所屬各官, 例收民間故失牛馬角筋, 堅緻造作, 只賣於軍士, 收其價利。 願修折弓者聽, 隨其所補多少, 亦收功利, 竝資造弓之費, 永爲恒式, 則庶幾良弓多矣。
下兵曹, 與議政府議之。 僉議啓曰: "退設鍾城郡, 已曾定議, 但以民未阜盛未敢耳。 今遽割土地屬之未便, 待退設後更議施行。 入居逃亡人未推者, 擇其親戚隣里, 許令代入, 則南道各官鄕戶騷擾之弊無窮。 令本道監司具其入居後逃亡人口之數啓聞後, 更議施行。 會寧及慶興正軍無馬者, 濟州刷出有咎馬及本道各牧場國用不合馬, 幷刷分給事, 依上言施行。 東良設鎭, 須待親審, 定其可否事及吉州以北守令能勸耕水田三百結以上、植桑三千條以上而有實績者, 特加資級, 仍免本田租稅三年; 民戶能耕水田十結以上、植桑百條以上者, 復戶二年勸勵等事, 亦依上言施行。 諸道所刊經書, 多印廣布勢難, 姑於各道所在冊板中, 勿論集註輯釋, 四書、《詩》、《書》, 各印一百八十件, 送于禮曹, 禮曹因本道因公上來人傳送。 又於咸興、永興、吉州、鏡城四界首官置造弓所等事, 亦依上言施行。 其微少修補, 勿取功利。"
從之。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농업-권농(勸農)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