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3권, 세종 1년 3월 9일 癸丑 4/6 기사 /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정이오 등이 《장일통요》를 편집하여 전문과 함께 올리다
국역
찬성(贊成)으로 치사(致事)한 정이오(鄭以吾)·병조 판서 조말생·호조 참판 김자지·내자시(內資寺) 윤(尹) 유순도(庾順道)·검교 사재감 정(檢校司宰監正) 이양달(李陽達)이 《장일통요(葬日通要)》를 편집하여 전문(箋文)과 함께 올렸다. 그 전문에,
"신(臣) 정이오 등은 선지(宣旨)를 받자온 바, ‘선왕(先王)의 제례(制禮)는 천자(天子)·대부(大夫)·사(士)를 막론하고 장사에 대한 기한이 각각 달수로 정해 있는데, 후세의 음양가(陰陽家)들이 많은 금기(禁忌)에 구애되어 시기가 넘어도 장사하지 아니하니, 나는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이를테면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르는 것은 장사(葬師)가 가장 꺼리는 것이나, 나는 일찍이 두 번이나 증험하였는데, 아무런 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종류는 알 수가 없으니, 마땅히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여, 정론(正論)은 취하고, 사설(邪說)은 버리며, 성현의 요지(要旨)를 바탕삼고 속무(俗巫)의 고질을 타파하여, 하나의 글을 집성하여 올리라.’ 하시었으니, 전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산 자를 봉양케 하는 방법이 구비됨에 따라, 죽은 자를 보낼 때의 모든 금기를 염려하여,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시니, 백성으로 하여금 유감이 없게 하자는 뜻이 지극히 깊고 또 절실하시옵니다.
신들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음양의 설이 비록 황제(黃帝)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양한(兩漢) 이래로 다투어 부적(符籍)이나 예언만을 존숭하며, 조화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고 각각 길흉의 설을 세워, 그 분류가 백가(百家)를 헤아리매, 세상을 의혹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일이 너무도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에는 여재(呂才)가 그릇된 점을 삭제하여 바로잡았고, 뒤에는 채성우(蔡成禹) 같은 무리들이 또한 《변망(辨妄: 망령됨을 밝히는 논)》을 저술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용사(庸師) 야부(野夫)들은 얻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에만 치우치고 현실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시속의 괴히 여김을 사고, 현실에만 치우치고 구식에 통하지 못하면, 또한 세상을 속일 뿐이니, 반드시 고금을 참작해야 양자의 폐단을 제거할 것입니다.
이 글은 첫 머리를 《예기(禮記)》·《춘추(春秋)》에 기재된 장기(葬期)의 설로 한 것은 왕제(王制)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힌 것이요, 다음으로 춘추 열국(春秋列國)·한(漢)·당(唐)의 모든 임금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옛적의 장사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여재(呂才)의 《서장(敍葬)》 과 사마군실(司馬君實)의 《장론(葬論)》을 든 것은 세속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청오자(靑烏子)의 논한 바와 왕수(王洙)의 인거(引擧)한 장기(葬記), 주희(朱熹)의 말한 택일(擇日), 호순신(胡舜申)의 취한 제가(諸家)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하나는 시속에 따른다는 뜻을 보인 것이요, 하나는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은 다 장통(葬通)으로 세속의 구기일(拘忌日)이 아니라는 점을 보인 것이며, 또 다음으로 《승흉장법(乘凶葬法)》·채성우(蔡成禹)의 《변망(辨妄)》·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尅擇通書)》를 든 것은 압본명(壓本命)이니, 횡간(橫看)이니, 망운(亡運)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사설(邪說)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혹시 신들의 관견(管見)을 첨부하여, 모두 합치어 《장일통요(葬日通要)》라 칭하고, 전문과 함께 올리오니, 전하께서 특히 한 번 보시고 국내에 반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십전대리일을 앞당기고 뒤지는 일이 없이, 각각 그 어버이를 장사하게 하면, 인심이 안정되고, 왕제(王制)가 다시 밝아질 것이니, 이도 또한 죽은 자를 보내는 도(道)에 있어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장사는 어느 해나 달을 가리지 아니하였다는 증거를 논합니다. 《예기》에, ‘천자는 7월, 제후는 5월, 대부는 3월, 선비[士]는 한 달을 넘겨서 장사한다.’ 하였고, 《춘추전》에, ‘천자는 7월만에 장사하는데, 모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이 다 모이고, 제후는 5월인데, 동맹국(同盟國)만이 모이고, 대부는 3월인데, 동위(同位)만이 모이고, 사(士)는 달을 넘는데, 외인(外姻)이 모인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按察)컨대 춘추 시절에 열국의 제후가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이 지나도 장사하지 않으면, 예(禮)에 태만하다 일렀습니다. 그렇다면 제후도 천자의 예를 참람되게 사용[僭用]할 수 없거든, 하물며 대부가 제후의 예를 참용하며, 사서인(士庶人)이 대부의 예를 참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는 본래 현저한 법령이 없어 위로 대부에서 아래로 사서인까지 상식(常式)을 모르고, 음양가의 금기(禁忌)에만 의혹하여,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하지 못해도 심상히 여기며, 부끄럽게 알지 않는 자가 간혹 있으니, 지금부터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르게 하고, 어기는 자는 유사로 하여금 가차없이 징계하도록 하시옵길 바랍니다.
옛적에는 날 가리는 일이 없었음을 논합니다. 왕수(王洙)의 《신서(新書)》에, ‘혹자의 말이, 옛적에는 날을 점치는 일은 있었어도 날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에 정사일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장사를 못하고 무오일(戊午日)에 장사했고, 기사일(己巳日)에 제(齊)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사일(辛巳日)에 애공(哀公)을 장사했고, 정사일(丁巳日)에 노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성공(成公)을 장사했고, 계해일에 제강(齊姜)을 장사했고, 정해일에 제나라 환공(桓公)을 장사했고, 을해일에 송(宋)나라 문공(文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정사(定姒)를 장사했고, 계해일에 송나라 양공(襄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위(衛)나라 목공(穆公)을 장사했고, 기해일에 제규(齊嬀)를 장사했고, 정사일에 제나라 경공(景公)을 장사하였고, 기해일에 제나라 소공(昭公)을 장사하였다. 그런데 사일(巳日)이나 해일(亥日)은 지금에 와서는 크게 흉한 날이라 하고 있으니, 택일한다는 말은 유래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컨대, 동(東)·서한(西漢)에서 부적이나 예언을 으뜸으로 여기고, 사설(邪說)을 신봉하였으나, 서한 고조(高祖)는 병인일 장릉(長陵)에 장사했고, 혜제(惠帝)는 신축일 안릉(安陵)에 장사했고, 문제(文帝)는 을사일 패릉(覇陵)에 장사했고, 선제(宣帝)는 신축일 두릉(杜陵)에 장사했고, 원제(元帝)는 병술일 위릉(渭陵)에 장사했고, 성제(成帝)는 기묘일 연릉(延陵)에 장사했고, 동한 광무(光武)는 정묘일 원릉(原陵)에 장사했고, 명제(明帝)는 임술일 현릉(顯陵)에 장사했고, 장제(章帝)는 계묘일 경릉(敬陵)에 장사했고, 충제(沖帝)는 기미일 회릉(懷陵)에 장사했고, 질제(質帝)는 을묘일 정릉(靜陵)에 장사했고, 당(唐)나라에 와서도 여재(呂才)가 음양을 산정(刪正)하였는데, 태종(太宗)은 경인일 소릉(昭陵)에 장사했고, 고종(高宗)은 경인일 건릉(乾陵)에 장사했고, 예종(睿宗)은 경오일 교릉(橋陵)에 장사했고, 숙종(肅宗)은 경오일 건릉(建陵)에 장사했고, 송(宋)나라에 와서도 술수(術數)에 정통한 양유덕(揚惟德) 같은 사람들이 조서를 받들어 《만년(萬年)》·《구주(具注)》·《통천(通天)》·《총성(摠聖)》·《집정(集正)》 등의 역서(曆書)를 만들어 반포하고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태조(太祖)는 을묘일 영창릉(永昌陵)에 장사하였으니, 이상의 장일은 다 장통(葬通)의 일(日)이 아닐진대, 택일의 법이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장서(葬書)의 망령됨을 논하옵니다. 《신서(新書)》에 실려 있는 《당서(唐書)》에, ‘태종은 음양에 관한 서적이 근대에 와서 차츰 와전되어 천착(穿鑿)이 너무 심하고, 금기(禁忌)도 너무 많음을 느껴, 드디어 태상 박사(太常博士) 여재(呂才)에게 해명하여, 학자 10여 명과 더불어 함께 정오를 가하여, 그 천박한 습속을 삭제하고, 쓸 수 있는 것만을 남기어 53권의 신서(新書)와 아울러 구서(舊書) 27권을 편성하여 정관(貞觀) 15년에 완성되자,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행세(行世)케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여재가 많이 전고(典故)를 들어 정리(正理)를 질정(質正)하였기 때문에, 비록 술자(術者)가 얕보는 경향이 있으나, 자못 경의(經義)에 합치되는 점이 많습니다. 그의 《장서(葬書)》 서(敍)에 이르기를, ‘《주역(周易)》에, 「옛날의 장사는 섶[薪]으로 덮고 봉분도 아니하며, 나무를 심어서 표하지도 않고 상기(喪期)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후세의 성인(聖人)이 관곽(棺槨)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과괘(大過卦)에서 얻은 것이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장사라는 말은 감춘다는 뜻으로 사람이 다시 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효경(孝經)》에, 「택조(宅兆)를 점쳐서 편안히 모신다.」 하였으니, 이는 복토(復土)하는 일이 끝나면, 길이 감모(感慕)하는 곳이 되며, 둔석(窀穸)의 예를 마치면, 영원한 혼신(魂神)의 집이 마련되는 것이나, 장차 조시(朝市)의 변천도 예측하기 어려우며, 물이 날지, 돌이 깔릴지, 땅속을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생각다 못해 점을 쳐서 거의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니, 신종(愼終)의 예를 갖춘 뿐이요, 길흉의 의(義)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음양의 장법(葬法)을 가하여, 혹은 연월의 편리를 가리고, 혹은 묘전(墓田)의 원근까지 참작하여, 한 가지만 맞지 않아도 화가 미친다, 화가 생긴다 하고, 무자(巫者)는 재화(財貨)를 탐내어 함부로 방해를 가하지 않는 자 없어, 드디어 하나의 장서(葬書)로 하여금 백가(百家)가 각각 길흉에 대한 설명이 있어 구애와 금기가 많았으며, 더구나 천지가 있는 이상, 건곤(乾坤)의 이치는 갖추어 있고, 강유(剛柔)가 있는 이상, 소식(消息)의 의(義)도 분명하며, 혹은 주야(晝夜)의 도(道)에 성숙되고 남녀의 화(化)에 감동되며, 삼광(三光)이 위에서 운행하고, 1기(氣)가 아래로 통하는, 이것이 음양의 대경(大經)이니, 잠깐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이치마저 상사의 길흉에 견강 부회하여, 요망된 말을 하는 것이다.
《춘추전》에, 「왕자는 7월만에 장사하고, 제후는 5월만에 장사하고,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한다.」 하였는데, 이는 귀천(貴賤)이 같지 않은 이상, 예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동맹(同盟) 동궤(同軌)로 하여금, 그 시기에 와서 조상케 하자는 것이니, 인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제정한 것이므로, 드디어 상식이 되었다. 법이 이미 일정하여, 어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을 늦추어 장사하면, 예에 태만하다 이른다 하였으니, 이로써 장사는 일정한 기한이 있고, 연월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1이요,
《춘추》에 또 「정사일에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못하고 다음날 무오일에 장사했다.」 하였는데, 공양(公羊)씨는 잘한 일이라 칭하였고, 《예기》에 장사날을 점칠 때, 하일(遐日)을 먼저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그 달이 다 가는 날을 택하여, 불회(不懷)를 피하자는 것이다. 지금 《장서(葬書)》를 보면, 기해일에 장사하는 것을 가장 흉하게 말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펴보면, 이 날에 장사한 것이 무릇 20여 건에 달하니, 이로써 장사에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2요,
《예기》에 또 「주(周)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하므로, 대사(大事)는 밝은 아침을 이용하고, 상(商)나라는 백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대낮을 이용하고, 하(夏)나라는 흑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저물녘을 이용한다.」 하였고, 그 주석에 「대사는 곧 초상 장사를 말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숭상하는 바를 직접 취한 것뿐이요, 시(時)의 조만(早晩)을 가린 것이 아니며, 《춘추》에 정(鄭)나라 자산(子産) 및 자태숙(子太叔)이 간공(簡公)을 장사하려는데, 때마침 묘소를 맡은 대부(大夫)의 집이 장사 나가는 길에 마주쳤다. 만약 그 집을 무너뜨린다면, 곧 이른 아침에 하관(下棺)할 수 있고, 그 집을 피하기로 한다면, 대낮에 하관하게 되는데, 자산이 그 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대낮을 이용하고자 하니, 자태숙은 말하기를, 「만약 대낮에 하관한다면, 장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인 제후·대부들에게 수고를 끼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산은 박물 군자(博物君子)로 알려졌는데, 자태숙은 제후를 위하여 피하자고 하였으니, 국가의 대사는 초상 장사보다 더한 것이 없겠거늘, 반드시 길흉의 의(義)가 있다면, 그들이 이용하지 아니할 이치가 없는데, 지금 시(時)의 득실에 관계하지 않고 인사(人事)의 가부(可否)만을 논했을 뿐이며, 증자문(曾子問)에, 「장사하다 일식(日食)을 만나면 길 왼쪽에 두었다가 밝아짐을 기다려서 행사하는 것은 비상을 대비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만약 《장서》에 의한다면, 흔히 건(乾)·간(艮)의 시를 이용하는데, 모두 한밤중이니, 이렇다면 글[文]과 예(禮)가 서로 위반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기》나 《춘추전》을 보면, 장사에 시를 가리지 않는 증거가 제3이요,
《장서》에 「부귀 관작이 다 안장(安葬)으로써 이루어지고, 보명연년(保命延年)이 분묘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효경》을 보면, 「몸을 바로 세우고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까지 들추어 부모를 현달케 한다.」고 하였고, 《주역》에 「성인(聖人)의 큰 보배는 곧 지위이다. 무엇으로 지위를 지키느냐. 바로 인(仁)이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나날이 근신하면, 혜택이 한량없이 미치고, 만약 덕이 모자라면, 도움이 있을 리 없다. 이는 장지의 길흉을 들어 복록의 연장을 논한 것이 아니다. 장손(臧孫)이 노(魯)나라에서 자손을 두게 되리라는 말은 길일의 장사와 상관이 없고, 숙오(叔敖)는 초나라에서 절사(絶祀)되리라는 것도 묘지를 잘못 정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장사에 관한 길흉은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제4요,
지금 초상 장사에 대한 길흉이 모두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5성(姓)과 결부하였는데, 옛날의 장지는 다 국도(國都)의 북쪽에 있었으니, 영역(塋域)이 이미 일정되어 있는 이상, 어떻게 성씨를 묘소에 관련시킬 것이며, 조(趙)씨의 장지가 모두 구원(九原)에 있고, 한(漢)나라의 산릉(山陵)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상리(上利)·하리(下利)는 거론할 여지 없는데, 대묘(大墓)·소묘(小墓)의 의(義)는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 자손들이 부귀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혹은 하(夏)·상(商)·주(周) 3대와 더불어 풍교(豐敎)를 같이 했고, 혹은 6국을 나누어 왕이 되었으니, 5성(五姓)의 의는 옛 기록에 전혀 볼 수 없는데, 길흉의 이치는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이 제5요,
또 인신(人臣)의 명망과 지위는 진퇴(進退)가 무상하여 처음에는 천했다가 뒤에는 귀한 수도 있고, 처음에는 통했다가 나중에는 막히는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자문(子文)이 세 번 영윤(令尹)을 지냈고, 전금(展禽)이 세 번 사사(士師)에서 쫓겨났다. 열 번을 장사해도 한 번 정한 날은 다시 변경한 일이 없고, 분묘가 완성되면 고치질 않았는데, 어찌하여 명위(名位)는 잠깐도 편안할 때가 없는가. 그러므로 관작(官爵)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요, 안장(安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6이요,
저속한 무식배들이 모두 장서를 믿고 있기 때문에, 무자(巫者)가 길흉을 사칭하면, 행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드디어 벽용(躄踊)의 즈음에 장지를 택하여 관작이나 바라며, 도독(荼毒)의 궁극에도 장시(葬時)를 가려 재록(財祿)을 꿈꾸고, 혹은 진일(辰日)에 울고 곡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여, 드디어 웃고서 손님의 조상을 받으며, 혹은 친속은 광중(壙中)에 가까이 못하는 살(殺)이 있었다 하여, 집안 장사에 참여하지 않고 평복을 입고 있으니, 성인의 교화가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장서(葬書)가 세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제7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수(王洙)는 위에 말한 여재(呂才)의 논설이 가장 경의(經義)에 합치된다 하였으므로, 지금 몇 대문을 절취하여, 이에 부록하여 후인의 의혹을 제거하자는 바입니다.
금기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장론(葬論)》에, ‘사람의 부귀와 빈부, 수요(壽夭)는 하늘에 매이고, 어질고 어리석은 것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며, 절대로 장사와는 관계가 없다. 설사 장사(葬師)의 말과 같다 해도, 사람의 자식된 자가 바야흐로 애통이 극한 처지에 있어, 어찌 차마 그 어버이의 체백(體魄)을 이용하여 스스로 복리를 노리겠는가. 옛날 우리 조상의 장사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관곽도 갖추지 못했다가 태위공(太尉公) 이하로부터 비로소 관곽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금·은·주옥(珠玉)의 물품은 일찍이 한 푼도 관 속에 넣어 본 일이 없었다. 장차 태위공을 장사하려 하는데, 족인(族人)들이 다 말하기를, 「장사는 집안의 대사인데, 어찌하여 음양가에게 문의하지 않는가. 이는 절대로 불가하다.」고 하니, 나의 형 사마백강(司馬伯康)이 어찌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음양가에게 문의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디서 훌륭한 장사(葬師)를 만나 문의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족인들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생(張生)이란 사람은 훌륭한 지사로서, 여러 고을이 다 쓰고 있다.」고 하므로, 형은 곧 장생을 불러서 2만 금을 주겠다고 하니, 장생은 야부(野夫)로서, 대대로 장사가 되어 야인의 장사를 해 왔지만, 소득은 천금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말하기를, 「네가 내 말대로 한다면, 나는 너에게 장사를 맡기겠지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다면, 다른 지사를 구하겠다.」고 하니, 장생은 명령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형은 연·월·일·시 및 광중의 천심 광협(淺深廣狹)과 도로가 어디로 나야 한다는 것들을 자기 의사대로 정하되, 모두 편리를 주로 하여, 장생을 시켜 장서에 결부시켜 「크게 길하다.」고 하게 하여, 족인에게 보여 주니, 모두 다 기뻐하며, 달리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내 형은 나이 79세로 경(卿)의 반열에서 퇴직하였고, 나도 나이는 66세로 시종(侍從)의 자리에 붙어 있고, 족속으로 벼슬길에 오른 자가 23명이니, 장서를 신용하는 사람들의 집안도 별로 내 집보다 낫지 않다. 연전에 내 아내가 죽었을 때, 관이 만들어지자, 염(歛)하고,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행상하고, 광(壙)이 마련되자, 장사하고, 말 한 마디도 음양가에 묻지 아니하였으나, 지금까지 다른 사고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음양가가 간사한 말로써 대중을 의혹케 하여,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미워하였는데, 상가에 있어서는 더욱더 심하다. 그래서 지난번 간관(諫官)으로 있을 적에 천하의 장서를 엄금하도록 주청하였는데, 당시 집권자가 그런 뜻을 갖지 아니하였다. 지금 이 논을 저술하여, 뒷 자손으로 하여금, 장사는 반드시 제때에 행해야 하며, 장구(葬具)를 반드시 후히 하지 않음을 알려면, 내 선조를 보고, 장서가 족히 믿을 것 없음을 알려면, 내 집을 보라. 원풍(元豐) 7년 월 일에 사마광(司馬光)은 서술한다. ’고 하였습니다.
택일·택지에 대하여 논하옵니다. 《성의장력(醒疑葬曆)》에는, ‘청오자(靑烏子)의 좋은 해를 택하는 것이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거하였고, 왕수(王洙)는, ‘좋은 해가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시만 못하고, 좋은 시가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용하였고, 《만력회동(萬曆會同)》도 이와 같은 뜻이며,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도, ‘전기해서 장사할 만한 땅을 택하여 날을 가려 천광(穿壙)하고 토지의 신에게 제사한다.’ 하였고, 《황서절부록(黃瑞節附錄)》에도, ‘옛적에는 장지나 장일은 다 점쳐서 결정했는데, 지금 사람은 점하는 법을 모르니, 시속에 따라 택정하는 것도 가하다. ’고 하였고, 호순신(胡舜申)은 각가(各家)의 장일법(葬日法)을 논하되, 《광제력(廣濟曆)》을 보면, 안장할 수 있는 날이 임신·계유·임오·갑신·을유·병신·정유·임인·병오·기유·경신·신유 등 12일은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을 만들었는데, 《지리신서(地理新書)》도 취했고, 《천통(天通)》·《대명력(大明曆)》 등의 역서도 역시 많이 취했으니, 이 12일은 진실로 이용할 만한 날이다. 그러나 역일(曆日)의 주(注)에, 반드시 장사지내도 좋다는 문구가 붙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안찰(按察)하건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땅이 좋다는 것은 흙빛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것이 그 증거이다. 부조자손(父祖子孫)이 하나의 동기일진대, 저기가 편안하면 여기도 편안하고, 저기가 위태하면 여기도 위태한 것이 역시 이치이다. 그런데 금기에 구애하는 자들이 혹은 땅의 방위를 택하고, 혹은 날의 길흉을 결단하니, 역시 편견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정자의 논평이 가장 근리(近理)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 《광제(廣濟)》·《백기(百忌)》·《총성(摠聖)》 등 역서 및 《삼력회동(三曆會同)》·《금화회동(金華會同)》·《십력회동(十曆會同)》·《삼원정경(三元正經)》·《수금구결(袖金口訣)》·《만력회동(萬曆會同)》·《정의명진론(正義明眞論)》·《성의력(醒疑曆)》·《연길서(涓吉書)》·《지리신서(地理新書)》·《지리변망(地理辨妄)》·《극택전서(克擇全書)》·《극택통서(克擇通書)》·《원귀집(元龜集)》 등 서적을 보면, 다 앞에 말한 12일을 크게 길하다 하였으니, 장사에 있어 인(寅)·오(午)·신(申)·유(酉)일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개 인(寅)·오(午)는 화덕(火德)인 때문에, 금의 광채를 상징하여 금계(金鷄)가 우는 날이라 하고, 신(申)·유(酉)는 금덕(金德)인 때문에, 옥의 윤기를 상징하여, 옥견(玉犬)이 짖는 날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위로 부모도 부르지 못하고, 아래로 자손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음양이 서로 조응하고 흉신(凶神)이 다 잠복한다는 점을 말한 것인즉,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오니, 지금부터 《대명력(大明曆)》의 예에 의하여, 장통일(葬通日)은 반드시 당년의 책력 날짜에 주(註)를 달도록 하시옵기 바랍니다.
승흉장법(乘凶葬法)을 논합니다. 호순신이 말하기를, ‘장사는 길흉이 있으니, 길장은 졸곡(卒哭)을 지낸 장사, 또는 해를 넘은 장사 이외에 연고가 있어 개장(改葬)하는 것을 이른 것이니, 이는 선택한 연·월·일·시가 반드시 다 좋아야 쓸 수 있고, 흉장은 졸곡 전 백일 이내를 이른 것이니, 연·월의 흉악은 묻지 않고, 다만 좋은 일·시 만을 가리며, 일체의 신살(神殺)도 심히 구애하지 아니하되, 만약 연·월·일·시가 다 길하면 더욱 좋다. ’고 하였습니다.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리게 되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채성우(蔡成禹)의 《지리변망(地理辨妄)》에, ‘세상에는 떠드는 자들이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조궁(釣宮)의 설을 만들어 태세 월건(月建)을 중궁(中宮)으로 들게 하여, 순수로 돌려 9궁(宮)으로 가서 상극되면 흉하고, 상생되면 길하다고 하며,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체궁(替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방편을 마련하여 만들어, 소득되는 천간(天干)·지지(地支)로써 순수로 돌리어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개궁(蓋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소득되는 천간·지지로써 9성(星)을 취하여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또 월건을 중궁으로 끌어들여, 순수로 9궁으로 가는 것을 운용해서 신살(神殺)을 띠게 하고, 또 팔괘(八卦)를 갑의 종묘효(宗廟爻)에 들여서 팔궁(八宮)을 가해서 신살(神殺)을 띠게 하였다. 또 신살의 궁위(宮位)를 더하여 태양(太陽)을 만들고, 태음(太陰)을 만들고, 복성(福星)·용덕(龍德)을 만들어 사리(四利)라 이르는 것이다. 무릇 월건이 신살을 띤다면, 세건(歲建)·일건(日建)·시건(時建)은 유독 신살을 띠지 못하란 말인가. 괘(卦)의 종묘효(宗廟爻)가 신살을 띨 수 있다면, 그 초·2·3·4·5효(爻)는 유독 신살을 띨 수 없단 말인가. 그 8괘에 종묘효만이 신살을 띨 수 있다면, 오황재중(五黃在中)은 또 어느 괘에 속하며, 또 어느 것이 종묘효란 말인가. 그들의 이른바 사리성(四利星)이 또 무엇을 의거한 것인가. 그러므로 무릇 3원(元)이 된다는 설도 꿈과 같은 것이요, 조궁(釣宮)·체궁(替宮)·개궁(蓋宮)·사리(四利)라는 것은 또 꿈속에서 꿈을 되풀이하는 격이며, 그네들의 이른바 자(紫)·백(白)·벽(碧)·황(黃)·녹(綠)·흑(黑)이라는 것도 다 근거 없는 설이며, 그 암건적살(暗建的殺)도 다 이러한 종류요, 그 초신접기(超神接氣)라는 것도 둔갑술(遁甲術)과 근사하나, 역시 지붕 위에 지붕을 올린 격이다. 그러한데 세상 사람이 다만 그 운용하는 바가 종횡으로 15의 수(數)라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마치 《하도(河圖)》·《낙서(洛書)》에서 나온 듯이 의심하여, 그릇된 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겉만 보고 존숭 신앙하기 때문에, 말을 아니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하건대, 태세가 본명을 누른다는 설은 대개 장사할 날짜를 중궁에 넣어 순수로 돌려 9궁으로 가되, 본년 태세가 당도하는 궁에 가서 멈추고, 60갑자로 두루 헤아려서, 만약 그 집안에 본명(本命)이 태세의 궁과 같은 자가 있으면, 태세가 본명을 누르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은 마땅히 금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만약 사람이 이것에 범하기로 든다면, 1년 치고 없는 날이 없을 것이므로, 태세가 본명을 누르지 않는 날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옛사람은 장사의 기한이 많아도 7개월을 넘지 않았으며, 또 한나라와 당나라의 여러 임금도 1, 2년 내에 장사를 못한 자는 대개 없었으니, 이 법을 쓰지 아니한 것이 명확하옵니다. 이것이 이른바 조궁의 유법(遺法)이온데, 채성우가 자상히 변명하였습니다.
장사가 흉일을 범한다는 것과 횡간도(橫看圖) 및 망인(亡人)의 운수·6륜(輪) 등법의 허망됨을 논합니다. 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克擇通書)》에, ‘모든 역서를 살펴보니, 장사날이 천탄(天呑)·천건(天建)·천혁(天嚇)을 범하면, 택장(宅長)에게 좋지 않고, 월탄(月呑)을 범하면, 장자와 장손에게 좋지 않다.’ 했는데, 지금 참고해 보면, 정·4·7·10월은 천덕(天德)이 천탄과 날이 같고, 또 옥약길성(獄鑰吉星)이 천건(天建)과 날이 같고, 또 상일(相日)과 날이 같고, 상일은 천혁과 날이 같고, 월궁(月宮)은 월탄과 날이 같건마는, 모든 역서에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흉일로 만들었으며, 대장일(大葬日)은 선현이 말한 좋은 일진으로 누차 시험하여 탈이 없으므로, 통(通)한 사람은 구애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그에 의혹되겠는가. 증문전(曾文展)이 이르기를, ‘만약 다시 죽은 사람의 운수를 놓고 본다면, 분명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목숨이 이미 없어졌는데, 또 무슨 운수를 본단 말인가. 반드시 청룡(靑龍)·백호(白虎)·천강(天剛)·하괴(河魁)가 총묘(塚墓)에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할 것이니, 이는 다 세상을 속이고 인심을 의혹케 하는 설인즉, 이치에 통달한 군자는 마땅히 다시 밝힐 것이며, 또 옛 역서에 망인의 운을 말한 것이 18조문으로, 모두 길흉을 상세히 추산했으나, 서로 득실이 있어 전용하기는 어려우며, 지금 세상의 장사가, 혹은 오음(五音)이 망인의 운명에 전용된다고 말하는 모양이나, 사람이 죽은 이상, 어찌 운명이 있겠느냐.’ 하였고, 양균송(楊筠松)은 망인의 운명에 대하여, 여러 모로 합당치 않는 것이 있다고 했고, 소수명(蘇粹明)의 《지리지남(地理指南)》에 ‘행년(行年)에 있어서는 6륜(輪)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고, 주(註)에, ‘시속의 장사(葬師)들이 흔히 6륜법의 연월을 사용하는데, 흔히 보면, 대소화(大小火)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길하고, 대소수(大小水)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해를 당하는 예가 많다. 이로 미루어 보면, 6륜도 신빙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것만 고집할 수 있는가.’ 하였으며, 송노진의 《극택통서(克擇通書)》 안에 있는 6륜의 주(註)에, ‘기실은 사람의 생사도 때가 있고, 자손의 부귀도 분복이 있는데, 어찌 택일해서 죽었겠는가. 짐짓 이 설을 남겨 두어 용도에 갖추었을 따름이라. ’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살펴보면, 6륜법은 대화(大火)·소화(小火)·소금(小金)의 설과, 그리고 《용자경(龍子經)》의 혈광(血光)·화거(火車)·사패(死敗)·표천(漂遷) 등의 용세(龍勢)와 《갑지수경(甲地宿經)》의 지흉(地凶)·지패(地敗)·지귀(地鬼)·지화(地禍)·지상(地傷)·지겁(地刼) 등의 성수(星數) 및 여러 역서 내에 있는 혼입묘(魂入墓)·장년월혼입묘(葬年月魂入墓)·망인집인입묘(亡人執印入墓)·사대혼입묘(四大魂入墓)·저두망운(猪頭亡運)·귀곡자망운(鬼谷子亡運)·나흉운(羅凶運) 등의 법이온데, 택년·택월에 대하여는, 다 망인의 세수(歲數)·행년(行年)으로 미루어 보고 있으니,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다시 무슨 운명을 볼 것이며, 사망한 자도 택일을 잘못해서 죽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날을 달로 바꾼다는 말이 성행하였지만, 비록 천자의 귀(貴)로도 서한(西漢)의 고조(高祖)는 5월 병인일에 장사했으니, 5월 인일(寅日)은 횡간도의 역마탄(驛馬呑)·표기탄(驃騎呑)·토금(土禁) 등의 날이요, 혜제(惠帝)는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9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혼(天魂)·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이요,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6월 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바로 소화(小火)·지귀(地鬼)·천이(遷移)에 해당하고, 날은 천탄·지혼을 범했으며, 경제(景帝)는 나이 48세로 2월 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무제(武帝)는 나이 71세로 3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지흉(地凶)을 범했고, 소제(昭帝)는 나이 22세로 6월 임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6월 신일은 횡간도의 천혁·천건·지건 등의 날이요, 선제(宣帝)는 정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重賻)를 범했고, 정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혁·지건·지혁 등의 날이요, 원제(元帝)는 나이 43세로 7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46세로 4월 기묘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동한(東漢)의 광무(光武)는 3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지중(地中)·백호(白虎)·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명제(明帝)는 나이 48세로 8월 임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호를 범했으며, 장제(章帝)는 나이 33세로 3월 계묘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호·천금 등을 범했으며, 순제(順帝)는 나이 30세로 9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小金)·지겁(地刼)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위(魏) 무왕(武王)은 2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천황(天皇)·인황(人皇)·인건(人建)·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문제(文帝)는 나이 40세로 6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겁·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황(地皇)·토금(土禁)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5세로 2월 계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지혁·지혼을 범했으며, 진(晉)나라 명제(明帝)는 나이 27세로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화를 범했고, 날은 천혼·역마탄·표기탄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28세로 7월 병진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지화(地禍)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7월 병인일은 월탄에 해당되며, 목제(穆帝)는 나이 19세로 7월 무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상(地傷)·천이를 범하였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10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천건·팔좌(八座)·지중(地中)·백호·토금을 범했으며, 안제(安帝)는 나이 37세로 익년 정월 경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자(地中雌)·중부를 범했으며, 송(宋)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60세로 7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겁을 범했고, 날은 지탄·천금을 범했으며,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3월 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地皇)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7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4세로 5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역마탄·표기탄·토금을 범했으며, 제(齊)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56세로 4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중상(重喪)을 범했고, 날은 지탄·역마탄·표기탄·천금을 범했으며, 무제(武帝)는 나이 54세로 8월 병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패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건·천혼을 범했으며, 당(唐)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71세로 10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흉(地凶)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을 범했으며, 태종(太宗)은 나이 52세로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大火)·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건·지중자(地中雌)·천혼을 범했으며, 고종(高宗)은 나이 56세로 이듬해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귀·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하였고, 날은 천건·지중자·천혼을 범했으며, 중종(中宗)은 나이 55세로 11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날은 지황·지탄·천혼·8좌를 범했으며, 예종(睿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중자·월탄을 범했고, 현종(玄宗)은 나이 78세로 이듬해 3월 신유일에 장사하였으니, 지탄·지중자·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을 범했으며, 위의 중종·예종·현종은 모두 소화를 범했고, 숙종(肅宗)은 나이 52세로 이듬해 3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대종(代宗)은 나이 54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목종(穆宗)은 나이 30세로 11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상원(上元)·혈광(血光)을 범했고, 송(宋)나라의 진종(眞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신종(神宗)은 나이 38세로 10월 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천탄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년·택월·택일의 설은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도 명확하오며, 그 《6륜(六輪)》·《용자(龍子)》·《갑지수경(甲地宿經)》 등과 《횡간도》의 설도 모두 허망된 것이며, 산두백(山頭白)이 조궁(釣宮)이 된다는 것이나, 주당행년(周堂行年)의 정충(正衝)·순충(旬衝)·연월일·8좌의 법이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하명하였다. 처음에 시속이 풍수의 말만 믿고 자손이 많은 자는 금기가 더욱 심하여, 10년이 되도록 장사를 못한 자가 있으므로, 상왕은 심히 미워하여, 태조 대왕의 상사에 있어서는, 옛제도에 의하여 5월만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정이오들에게 명하여 장설(葬說)의 그릇된 점을 시정함과 동시에 사대부의 상사는 3개월로 단정하고, 장일은 장통일(葬通日)만을 이용하게 하며, 또 중외 유사(攸司)로 하여금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하지 않는 자를 사찰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원문
○贊成致仕鄭以吾、兵曹判書趙末生、戶曹參判金自知、內資寺尹(廋順道)〔庾順道〕 、檢校司宰監正李陽達集《葬日通要》, 隨箋以進。 箋曰:
臣以吾等伏承宣旨, 若曰: "先王制禮, 自天子至大夫士, 葬期各有月數, 後世陰陽家拘於多忌, 踰時不葬, 予甚憫焉。 如太歲壓本命, 葬師最忌, 予嘗驗之再矣, 而大無妨也。 若此之類, 不能悉也, 宜遍閱群書, 取其正論, 去其邪說, 質聖賢之旨要, 破俗巫之膏肓, 集成一書以進。" 恭惟, 殿下使民養生之旣備, 又慮送死之多拘, 念至於此, 使民無憾之意, 至深切矣。
臣等竊謂, 陰陽之說, 雖曰自(皇帝)〔黃帝〕 而有之, 然兩漢以降, 競宗符讖, 不探造化之本, 各立吉凶之說, 其流至於百家, 惑世誣民甚矣。 是以, 前乎呂才刊正削去, 後乎蔡成禹之徒, 亦著《辨妄》, 惜乎庸師野夫之不之考也。 雖然泥於古, 而不通乎今, 必歸於駭俗; 泥乎今而不通乎古, 亦流於誑世。 必也古與今參酌, 而後可以去二者之弊也。 是書首之以《禮記》、《春秋》所載葬期之說者, 明王制不可紊也。 次之以春秋列國、漢、唐諸主葬日者, 見古者葬不擇日也。 次之以呂才 《敍葬》、司馬君實 《葬論》者, 去世俗之惑也。 次之以靑烏子所論及王洙所引葬記、朱熹所言擇日、胡舜申所取諸家葬日者, 一則見從俗之意; 一則見十全大利日, 皆葬通, 而非世俗拘忌也。 又次之以《乘凶葬法》、蔡成禹 《辨妄》、宋魯珍 《剋擇通書》者, 所以破壓本命、橫看、亡運諸邪說也。 間亦竊付臣等管見, 總之曰《葬日通要》, 隨箋以進, 伏望殿下, 特賜一覽, 頒之境內, 使人人知送死之大, 以十全大利日, 不先期、不後期, 各葬其親, 則人心有定, 王制復明, 其於送死之道, 亦庶乎無憾矣。
論古之葬者, 不擇年月。 《禮記》云: "天子七月, 諸侯五月, 大夫三月, 士踰月而葬。" 《春秋傳》曰: "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 諸侯五月, 同盟至; 大夫三月, 同位至; 士踰月, 外姻至。" 臣等謹按, 春秋之時, 列國諸侯先期而葬, 謂之不懷; 後期而不葬, 譏之怠禮。 然則諸侯而不得僭天子之禮, 而況於大夫僭諸侯之禮; 士庶人僭大夫之禮乎? 吾東方素無著令, 上自大夫下至士庶, 未知常式, 惑於陰陽拘忌, 過期不葬, 恬不爲愧者, 庸或有之。 願自今一從禮經, 違者攸司痛懲。
論古無擇日。 王洙 《新書》云: "或曰古者有卜日而無擇日, 故春秋之時, 丁巳葬魯 定公, 雨, 不克葬, 戊午乃葬。 己巳葬齊 僖公, 辛巳葬哀公, 丁巳葬魯 僖公, 辛亥葬成公, 癸亥葬齊姜, 丁亥葬齊 桓公, 乙亥葬宋 文公, 辛亥葬定姒, 癸亥葬宋 襄公, 辛亥葬衛 穆公, 己亥葬齊嬀, 丁巳葬齊 景公, 己亥葬齊 昭公。 巳與亥日, 今爲大凶之說, 則擇日之說, 無傳焉。" 臣等謹按, 兩漢競宗讖記, 崇信邪說。 西漢 高祖, 丙寅葬長陵, 惠帝, 辛丑葬安陵, 文帝, 乙巳葬覇陵, 宣帝, 辛丑葬杜陵, 元帝, 丙戌葬渭陵, 成帝, 己卯葬延陵, 東漢 光武, 丁卯葬原陵, 明帝, 壬戌葬顯陵, 章帝, 癸卯葬敬陵, 冲帝, 己未葬懷陵, 質帝, 乙卯葬靜陵。 至於唐, 呂才刪定陰陽, 而太宗, 庚寅葬昭陵, 高宗, 庚寅葬乾陵, 睿宗, 庚午葬橋陵, 肅宗, 庚午葬建陵。 乃至大宋, 精於術數, 如揚惟德等奉詔撰《萬年》、《具注》、《通天》、《摠聖》、《集正》等曆, 頒布遵用, 而太祖, 乙卯葬永昌陵。 已上葬日, 皆不是葬通之日, 則擇日之法, 蓋出於巫史明矣。
論葬書之妄。 《新書》載《唐書》曰: "太宗以陰陽書, 近代以來, 漸致訛僞, 穿鑿旣甚, 拘忌亦多。 遂命太常博士呂才與學者十餘人, 共加刊正, 削其淺俗, 存其可用者, 勒成五十三卷, 幷舊書二十七卷。 貞觀十五年書成, 詔頒行之。" 才多以典故質正, 理雖爲術者所短, 然頗合經義。
其《敍葬》書曰: "《易》云: ‘古之葬者, 衣之以薪, 不封不樹, 喪期無數。 後世聖人易之以棺槨, 蓋取諸大過。’ 《禮》云: ‘葬者, 藏也, 欲使人不復見之。’ 然《孝經》云: ‘卜其宅兆而安厝之。’ 以其復土事畢, 長爲感慕之所; 窀穸禮終, 永作魂神之宅。 朝市遷變, 不能預測於將來; 泉石交侵, 不可先知於地下。 是以, 謀及龜筮, 庶無後艱, 乃備愼終之禮, 曾無吉凶之義。 曁乎近代以來, 加之陰陽葬法, 或選年月便利, 或量墓田遐近, 一事失所, 則云禍及禍生, 巫者利其貨財, 莫不擅加妨害, 遂使葬書一術, 乃有百家各說吉凶, 拘而多忌。 且天覆地載, 乾坤之理備焉; 一剛一柔, 消息之義詳矣。 或成於晝夜之道, 感於男女之化, 三光運於上, 一氣通於下, 斯乃陰陽之大經, 不可失於斯須也。 至於喪庭之吉凶, 乃附此爲妖妄。 《傳》云: ‘王者七月而葬, 諸侯五月而葬, 士庶人逾月而葬。’ 此則貴賤不同, 禮亦異數。 欲使同盟、同軌赴弔及期, 量事制宜, 遂成常式。 法旣一定, 不可違之, 故先期而葬, 謂之不懷; 後期而葬, 譏之怠禮, 此則葬有定期, 不擇年月, 一也。
《春秋》又云: ‘丁巳葬定公, 雨, 不克葬, 於戊午用事, 《公羊》善之。’ 《禮記》云: ‘卜葬先遐日者善, 選月終之日也, 所以避不懷也。’ 今檢葬書, 以己亥之日, 用葬最凶。 謹按, 春秋之際, 此日葬者, 凡有二十餘件, 此則葬不擇日, 二也。
《禮記》又云: ‘周尙赤, 大事用平朝; 商尙白, 大事用日中; 夏尙黑, 大事用昏時。’ 註云: ‘大事卽喪葬也。’ 此則直取當代所尙, 不擇時之早晩。 《春秋》云: ‘鄭 子産及子太叔葬簡公, 於時司墓大夫室當葬路, 若壞其室, 卽平朝而堋, 避其室, 則日中而堋。 子産不欲壞其室, 欲得日中, 子太叔云: 「若至日午時堋, 恐久勞諸侯、大夫來會葬者。」’ 然子産旣云博物君子, 太叔乃爲諸侯之避, 國之大事, 無過喪葬, 必是義有吉凶, 此等豈得不用, 今乃不問時之得失, 唯論人事可否。 《曾子問》云: ‘葬逢日食, 舍於路左, 待明而行。’ 所以備非常也。 若依葬書, 多用乾艮二時, 竝是近半夜, 此則文與禮違。 今檢禮傳, 葬不擇時, 三也。
葬書云: ‘富貴官品, 皆由安葬所致; 年命延保, 亦由墳壠所招。’ 今按, 《孝經》云: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易》曰: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 是以, 日愼一日, 則澤及於無疆, 若德不逮, 則又必無援。 此則非由安葬吉凶, 而論福祚延保。 臧孫有後於魯, 不關葬得吉日; 叔敖絶祀於荊, 不由遷厝失所, 則安葬吉凶, 不可信用, 其義四也。
今之喪葬吉凶, 皆依五姓便利。 古之葬者, 皆在國都之北, 兆域旣有常所, 何取姓墓之義? 趙氏之葬, 竝在九原; 漢之山陵, 散在諸處, 上利下利, 蔑爾不論, 大墓小墓, 其義安在? 及其子孫, 富貴不絶, 或與三代同風, 或分六國而王, 則五姓之義, 大無稽古。 吉凶之理, 何從而生? 其義五也。
且人臣名位, 進退何常, 亦有初賤而後貴, 亦有始泰而終否。 是以, 子文三已令尹; 展禽三黜士師。 卜葬一定, 更不回改; 塚墓旣成, 曾不改易, 則何因名位, 無時暫安, 故知官爵爲之在人, 不由安葬所致, 其義六也。
野俗無識, 皆信葬書。 巫者詐其吉凶, 因而徼幸, 遂使擗踊之際, 擇葬地而希官品; 荼毒之秋, 選葬時而規財祿。 或云辰日不宜哭泣, 遂(菀)〔莞〕 爾而對賓受弔; 或云同屬忌於臨壙, 乃吉服不送其親。 聖人設敎, 豈其然乎? 葬書敗俗, 一至於此, 其義七也。"
王洙云: "右呂才論說, 最合經義。" 今略取一篇, 附于此, 以祛後人之惑者。
論不拘禁忌。 司馬溫公 《葬論》云: "人之貴賤、貧富、壽夭係於天, 賢愚係於人, 固無關預於葬。 就使皆如葬師之言, 爲人子者, 方當哀窮之際, 何忍不顧其親之暴露, 乃欲自營福利耶? 昔者吾諸祖之葬也, 家甚貧, 不能具棺槨, 自太尉公而下, 始有棺槨。 然金銀珠玉之物, 未嘗以錙銖入於壙中。 將葬太尉公, 族人皆曰: ‘葬者, 家之大事。 奈何不詢陰陽? 此必不可。’ 吾兄《伯康》無如何, 乃曰: ‘詢於陰陽則可矣, 安得良葬師而詢之?’ 族人曰: ‘近村有張生者, 良師也。 數縣皆用之。’ 兄乃召張生, 許以錢二萬, 張生, 野夫也, 世爲葬師, 爲野人葬, 所得不過千錢, 聞之大喜。 兄曰: ‘汝亦能用吾言, 吾俾爾葬, 不用吾言, 將求他師。’ 張生曰: ‘惟命是聽。’ 於是, 兄自以己意, 處歲月日時及壙之淺深、廣狹, 道路所從出, 皆取便於事者, 使張生以葬書緣飾之曰大吉, 以示族人, 皆悅無違異者。 今吾兄年七十九, 以列卿致仕, 吾年六十六, 忝備侍從, 宗族之從仕者, 二十有三人。 視他人之謹用葬書, 未必勝吾家也。 前年吾妻死, 棺成而斂, 裝辦而行, 壙成而葬, 未嘗以一言詢陰陽家, 迄今亦無他故。 吾嘗疾陰陽家立邪說惑衆爲世患, 於喪家尤甚。 頃爲諫官, 嘗奏乞禁天下葬書, 當時執政, 莫以爲意, 今著玆論, 庶俾後之子孫葬必以時, 欲知葬具之不必厚, 視吾祖; 欲知葬書之不足信, 視吾家。 元豊七年月日, 司馬光述。"
論擇日擇地。 《醒疑葬曆》引靑烏子云: "若擇良年, 不及吉月, 吉月不如好日, 好日不如好地。" 王洙引葬書云: "歲之善, 不如月之善, 月之善, 不如日之善, 日之善, 不如時之善, 時之善, 不如地之善。" 《萬曆會同》, 亦同此意。 《文公家禮》云: "前期擇地之可葬者, 擇日開塋域, 祀后土。" 黃瑞節附錄云: "古者葬地葬日, 皆決於卜筮。 今人不曉占法, 且從俗擇之可也。" 胡舜申論諸家葬日法曰: "《廣濟曆》可安葬者, 如壬申、癸酉、壬午、甲申、乙酉、丙申、丁酉、壬寅、丙午、己酉、庚申、辛酉十二日, 是十全大利之日, 《地理新書》亦取之, 《天通》、《大明》等曆亦多取之, 則十二日誠可用矣。 然必曆日注宜葬, 然後用之可也。" 臣等謹按, 程子曰: "地之利者, 土色之光潤、草木之茂盛, 乃其驗也。 父祖子孫同氣, 彼安則此安, 彼危則此危, 亦其理也, 而拘忌者, 或以擇地之方位, 決日之吉凶, 不亦泥乎?" 程氏之論, 最爲近理, 不可不遵。 又按《廣濟》、《百忌》、《摠聖》等曆及《三曆會同》、《金華會同》、《十曆會同》、《三元正經》、《袖金口訣》、《萬曆會同》、《正義明眞論》、《醒疑曆》、《涓吉書》、《地理新書》、《地理辨妄》、《克擇全書》、《克擇通書》、《元龜集》等書, 皆以前論十二日爲大吉, 其意謂葬止用寅午申酉日者, 蓋以寅午, 火之德, 象金之光耀, 而謂之金雞鳴; 申酉, 金之德, 象玉之光潤, 而謂之玉犬吠。 此等日, 上不呼父母, 下不呼子孫, 言其陰陽相應, 凶神悉伏, 亦可遵用。 願自今依《大明曆》例, 葬通之日幷注于每歲冊曆。
論(承)〔乘〕 凶葬法。 胡舜申云: "葬有吉凶, 吉葬謂卒哭踰年之外及有故改葬者, 此擇年月日時, 必須皆得吉, 然後可從事; 凶葬謂未卒哭百日之內, 卽不問凶年惡月, 但擇日時之吉, 一切神殺, 不甚避忌, 如年月(一)〔日〕 時, 亦皆得吉尤良。"
論不用太歲壓本命。 蔡成禹 《地理辨妄》云: "世之爲說者, 以吉凶之無準, 遂爲釣宮之說, 用太歲月建, 入中宮順飛行九宮, 以相克爲凶, 相生爲吉。 又以其吉凶之無準, 遂爲替宮之說, 再以作方所得之支干, 順行九宮。 又以其吉凶之無準, 遂爲蓋宮之說, 再以所得之支干, 取九星以行九宮。 又以其吉凶之無準, 又用月建, 入中宮順行九宮者, 而帶神殺焉。 又以八卦納甲之宗廟爻, 加八宮而帶神殺焉。 又增神殺之宮位, 爲太陽、爲太陰, 福星、龍德, 謂之四利焉。 夫月建帶神殺, 則歲建、日建、時建, 獨不可帶神殺耶? 卦之宗廟爻, 可以帶神殺, 則其初二三四五, 獨不可以帶神殺耶? 其八卦有宗廟爻, 可以帶神殺, 則五黃在中, 又屬何卦, 又何者宗廟爻耶? 彼其所謂四利星, 又何所據耶? 故凡爲三元之說者, 夢也。 釣宮、替宮、蓋宮四利者, 又夢中說夢者也。 其所謂紫白碧黃綠黑者, 皆無說之說也。 其暗建的殺, 皆是類也。 其超神接氣者, 又遁甲之近似, 然亦屋上架屋者也。 然則世人但見所用者, 縱橫十五數, 疑其爲《河圖》、《洛書》之遺文, 未知其謬, 望風而尊信之, 故不得無言。" 臣等謹按, 太歲壓本命之說, 蓋以所葬之日, 入中宮順飛行九宮, 取本年太歲所到之宮住, 却以六十甲子偏數之, 如其家有本命與太歲同宮者, 爲太歲壓本命, 其人宜避之。 臣等竊謂, 若有人儻犯此, 則一歲之內, 無日無之, 故擇太歲之不壓本命者難矣。 古之人, 葬期多不過七月, 且漢、唐諸君, 未有一二年未葬者, 不用此法明矣。 此乃釣宮之遺法, 蔡成禹辨之詳矣。
論葬犯凶日、橫看圖及亡人運、六輪等法之妄。 宋魯珍 《克擇通書》云: "按諸曆書, 以葬日犯天呑、天建、天嚇, 損宅長, 月呑, 損長子、長孫。’ 今參證正、四、七、十月, 天德與天呑同日, 又獄鑰吉星, 與天建同日, 又與相日同, 相日與天嚇同, 月宮與月呑同。 諸曆書云大吉, 何例作凶日乎? 大葬日乃前賢所說吉辰, 屢試無虞。 惟通人不拘, 豈可爲其惑焉?" 曾文展云: "若更看亡人命時, 却是不曾死也。 人命旣亡, 又看何命? 亦不必靑龍、白虎、天剛、河魁, 入塚不入塚, 此皆誑惑之說, 達理君子宜更詳之。 又古曆亡運, 共有一十八條, 推詳吉凶, 互有得失, 難於全用。 今世葬師, 或論五音, 全於亡命, 然人死安有命也?" 楊筠松云: "亡人命運, 有多般不合也。" 蘇粹明 《地理指南》云: "不用行年泥六輪。" 注云: "時師多依六輪年月使用, 多見人遇大小火年月葬者, 反獲其吉; 主大小水年月葬者, 反遇其害。 以此推之, 則六輪之不足憑也如此, 豈可獨泥哉?" 宋魯珍 《克擇通書》內六輪注云: "其實人之生死有時, 子孫之富貴有分, 豈容擇日而死? 姑存此例以備用耳。" 臣等謹按, 六輪法大火、小火、小金之說, 與夫《龍子經》血光、火車、死敗、漂蓬等龍, 《甲地宿經》地凶、地敗、地鬼、地禍、地傷、地刦等星及諸曆內魂入墓、葬年月魂入墓、亡人執印入墓、四大魂入墓, 猪頭亡運、鬼谷子亡運、羅凶運等法, 擇年擇月, 皆以亡人歲數行年推之, 則人旣死也, 更看何命? 死亡者, 未聞擇日而死也。 自漢以來, 以日易月之說興, 而雖以天子之貴, 西漢 高祖, 五月丙寅葬, 五月寅日, 乃橫看圖之驛馬呑、驃騎呑、土禁等日也。 惠帝, 九月辛丑葬, 九月丑日, 乃橫看圖之天魂、驛馬呑、驃騎呑等日也。 文帝年至四十六, 六月乙巳葬, 年是小火、地鬼、遷移, 日犯天呑、地魂也。 景帝年四十八, 二月癸酉葬, 月犯重遷。 武帝年七十一, 三月甲申葬, 年犯重喪, 月犯重遷地凶。 昭帝年二十二, 六月壬申葬, 年犯小火、遷移, 月犯重遷, 六月之申日, 乃橫看圖之天嚇、天建、地建等日也。 宣帝, 正月辛丑葬, 月犯重賻, 正月之丑日, 乃橫看圖之天嚇、地建、地嚇等日也。 元帝年四十三, 七月葬, 年犯大火、遷移, 月犯重遷也。 成帝年四十六, 四月己卯葬, 年犯小火、地鬼,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東漢 光武, 三月丁卯葬, 爲犯地中、白虎、天禁等日也。 明帝年四十八, 八月壬戌葬, 月犯重遷, 日犯地中、白虎也。 章帝年三十三, 三月癸卯葬, 月犯重遷, 日犯地中、白虎、天禁等日也。 順帝年三十, 九月丙午葬, 年犯小金、地刦, 月犯重賻也。 魏 武王, 二月丁卯葬, 爲犯天皇、人皇、人建、天禁等日也。 文帝年四十, 六月戊寅葬, 年犯小火、地刦、遷移, 月犯重遷, 日犯地皇、土禁也。 明帝年三十五, 二月癸丑葬, 年犯重喪, 月犯重賻, 日犯天嚇、地嚇、地魂也。 晋 明帝年二十七, 九月辛丑葬, 年犯小金、地禍, 日犯天魂、驛馬呑、驃騎呑也。 成帝年二十八, 七月丙辰葬, 年犯小火、遷移、地禍, 月犯重賻, 七月丙寅, 乃爲月呑。 穆帝年十九, 七月戊午葬, 年犯小火、地傷、遷移,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孝武帝年三十五, 十月甲申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天建、八座、地中、白虎、土禁也。 安帝年三十七, 明年正月庚申葬, 年犯地火、遷移, 月犯重遷, 日犯地中雌、重賻也。 宋 武帝年六十, 七月己酉葬, 年犯地刦, 日犯地呑、天禁也。 文帝年四十六, 三月癸巳葬, 年犯小火、地鬼、遷移, 日犯天嚇、天呑、地皇也。 孝武帝年三十五, 七月丙午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地鬼、月呑也。 明帝年三十四, 五月戊寅葬, 年犯大火、地敗, 月犯重遷, 日犯驛馬呑、驃騎呑、土禁也。 齊 高祖年五十六, 四月丙午葬, 年犯小火、地鬼、重喪, 日犯地呑、驛馬呑、驃騎呑、天禁也。 武帝年五十四, 八月丙寅葬, 年犯小金、地敗, 月犯重賻, 日犯天建、天魂也。 唐 高祖年七十一, 十月庚寅葬, 年犯地凶, 月犯重賻, 日犯天嚇、天呑也。 太宗年五十二, 八月庚寅葬, 年犯大火、遷移, 日犯天建、地中雌、天魂也。 高宗年五十六, 次年八月庚寅葬, 年犯地鬼、重喪, 月犯重賻, 日犯天建、地中雌、天魂也。 中宗年五十五, 十一月己酉葬, 年犯遷移, 日犯地皇、地呑、天魂、八座。 睿宗年五十五, 十月庚午葬, 年犯遷移, 月犯重賻, 日犯地中雌、月呑也。 玄宗年七十八, 次年三月辛酉葬, 犯地呑、地中雌、驛馬呑、驃騎呑等日也。 右中、睿、玄三宗, 俱犯小火也。 肅宗年五十二, 次年三月庚午葬, 月犯重賻。 代宗年五十四, 十月己酉葬, 年犯地敗,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穆宗年三十, 十一月葬, 年犯上元、血光也。 大宋 眞宗年五十五, 十月己酉葬, 年犯小火、遷移, 月犯重賻, 日犯地魂也。 神宗年三十八, 十月乙酉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地魂、天呑也。 然則擇年、擇月、擇日之說, 蓋出於巫史亦明矣, 其《六輪》、《龍子》、《地甲宿經》等橫看圖之說皆妄也。 至若山頭白之爲釣宮, 周堂行年正衝、同旬衝、年月日、八座之法, 皆不可信也類如此。
上命模印頒行。 初, 時俗信用葬師之說, 子孫多者, 避忌尤甚, 至有十年未葬。 上王甚惡之, 太祖之喪, 依古制五月而葬, 命以吾等辨葬說之謬, 士大夫之葬, 斷用三月, 葬日只用葬通日, 又令中外攸司, 察過期不葬者。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국역
찬성(贊成)으로 치사(致事)한 정이오(鄭以吾)·병조 판서 조말생·호조 참판 김자지·내자시(內資寺) 윤(尹) 유순도(庾順道)·검교 사재감 정(檢校司宰監正) 이양달(李陽達)이 《장일통요(葬日通要)》를 편집하여 전문(箋文)과 함께 올렸다. 그 전문에,
"신(臣) 정이오 등은 선지(宣旨)를 받자온 바, ‘선왕(先王)의 제례(制禮)는 천자(天子)·대부(大夫)·사(士)를 막론하고 장사에 대한 기한이 각각 달수로 정해 있는데, 후세의 음양가(陰陽家)들이 많은 금기(禁忌)에 구애되어 시기가 넘어도 장사하지 아니하니, 나는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이를테면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르는 것은 장사(葬師)가 가장 꺼리는 것이나, 나는 일찍이 두 번이나 증험하였는데, 아무런 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종류는 알 수가 없으니, 마땅히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여, 정론(正論)은 취하고, 사설(邪說)은 버리며, 성현의 요지(要旨)를 바탕삼고 속무(俗巫)의 고질을 타파하여, 하나의 글을 집성하여 올리라.’ 하시었으니, 전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산 자를 봉양케 하는 방법이 구비됨에 따라, 죽은 자를 보낼 때의 모든 금기를 염려하여,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시니, 백성으로 하여금 유감이 없게 하자는 뜻이 지극히 깊고 또 절실하시옵니다.
신들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음양의 설이 비록 황제(黃帝)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양한(兩漢) 이래로 다투어 부적(符籍)이나 예언만을 존숭하며, 조화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고 각각 길흉의 설을 세워, 그 분류가 백가(百家)를 헤아리매, 세상을 의혹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일이 너무도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에는 여재(呂才)가 그릇된 점을 삭제하여 바로잡았고, 뒤에는 채성우(蔡成禹) 같은 무리들이 또한 《변망(辨妄: 망령됨을 밝히는 논)》을 저술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용사(庸師) 야부(野夫)들은 얻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에만 치우치고 현실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시속의 괴히 여김을 사고, 현실에만 치우치고 구식에 통하지 못하면, 또한 세상을 속일 뿐이니, 반드시 고금을 참작해야 양자의 폐단을 제거할 것입니다.
이 글은 첫 머리를 《예기(禮記)》·《춘추(春秋)》에 기재된 장기(葬期)의 설로 한 것은 왕제(王制)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힌 것이요, 다음으로 춘추 열국(春秋列國)·한(漢)·당(唐)의 모든 임금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옛적의 장사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여재(呂才)의 《서장(敍葬)》 과 사마군실(司馬君實)의 《장론(葬論)》을 든 것은 세속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 청오자(靑烏子)의 논한 바와 왕수(王洙)의 인거(引擧)한 장기(葬記), 주희(朱熹)의 말한 택일(擇日), 호순신(胡舜申)의 취한 제가(諸家)의 장일(葬日)을 든 것은, 하나는 시속에 따른다는 뜻을 보인 것이요, 하나는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은 다 장통(葬通)으로 세속의 구기일(拘忌日)이 아니라는 점을 보인 것이며, 또 다음으로 《승흉장법(乘凶葬法)》·채성우(蔡成禹)의 《변망(辨妄)》·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尅擇通書)》를 든 것은 압본명(壓本命)이니, 횡간(橫看)이니, 망운(亡運)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사설(邪說)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혹시 신들의 관견(管見)을 첨부하여, 모두 합치어 《장일통요(葬日通要)》라 칭하고, 전문과 함께 올리오니, 전하께서 특히 한 번 보시고 국내에 반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십전대리일을 앞당기고 뒤지는 일이 없이, 각각 그 어버이를 장사하게 하면, 인심이 안정되고, 왕제(王制)가 다시 밝아질 것이니, 이도 또한 죽은 자를 보내는 도(道)에 있어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장사는 어느 해나 달을 가리지 아니하였다는 증거를 논합니다. 《예기》에, ‘천자는 7월, 제후는 5월, 대부는 3월, 선비[士]는 한 달을 넘겨서 장사한다.’ 하였고, 《춘추전》에, ‘천자는 7월만에 장사하는데, 모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이 다 모이고, 제후는 5월인데, 동맹국(同盟國)만이 모이고, 대부는 3월인데, 동위(同位)만이 모이고, 사(士)는 달을 넘는데, 외인(外姻)이 모인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按察)컨대 춘추 시절에 열국의 제후가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이 지나도 장사하지 않으면, 예(禮)에 태만하다 일렀습니다. 그렇다면 제후도 천자의 예를 참람되게 사용[僭用]할 수 없거든, 하물며 대부가 제후의 예를 참용하며, 사서인(士庶人)이 대부의 예를 참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는 본래 현저한 법령이 없어 위로 대부에서 아래로 사서인까지 상식(常式)을 모르고, 음양가의 금기(禁忌)에만 의혹하여,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하지 못해도 심상히 여기며, 부끄럽게 알지 않는 자가 간혹 있으니, 지금부터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따르게 하고, 어기는 자는 유사로 하여금 가차없이 징계하도록 하시옵길 바랍니다.
옛적에는 날 가리는 일이 없었음을 논합니다. 왕수(王洙)의 《신서(新書)》에, ‘혹자의 말이, 옛적에는 날을 점치는 일은 있었어도 날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에 정사일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장사를 못하고 무오일(戊午日)에 장사했고, 기사일(己巳日)에 제(齊)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사일(辛巳日)에 애공(哀公)을 장사했고, 정사일(丁巳日)에 노나라 희공(僖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성공(成公)을 장사했고, 계해일에 제강(齊姜)을 장사했고, 정해일에 제나라 환공(桓公)을 장사했고, 을해일에 송(宋)나라 문공(文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정사(定姒)를 장사했고, 계해일에 송나라 양공(襄公)을 장사했고, 신해일에 위(衛)나라 목공(穆公)을 장사했고, 기해일에 제규(齊嬀)를 장사했고, 정사일에 제나라 경공(景公)을 장사하였고, 기해일에 제나라 소공(昭公)을 장사하였다. 그런데 사일(巳日)이나 해일(亥日)은 지금에 와서는 크게 흉한 날이라 하고 있으니, 택일한다는 말은 유래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컨대, 동(東)·서한(西漢)에서 부적이나 예언을 으뜸으로 여기고, 사설(邪說)을 신봉하였으나, 서한 고조(高祖)는 병인일 장릉(長陵)에 장사했고, 혜제(惠帝)는 신축일 안릉(安陵)에 장사했고, 문제(文帝)는 을사일 패릉(覇陵)에 장사했고, 선제(宣帝)는 신축일 두릉(杜陵)에 장사했고, 원제(元帝)는 병술일 위릉(渭陵)에 장사했고, 성제(成帝)는 기묘일 연릉(延陵)에 장사했고, 동한 광무(光武)는 정묘일 원릉(原陵)에 장사했고, 명제(明帝)는 임술일 현릉(顯陵)에 장사했고, 장제(章帝)는 계묘일 경릉(敬陵)에 장사했고, 충제(沖帝)는 기미일 회릉(懷陵)에 장사했고, 질제(質帝)는 을묘일 정릉(靜陵)에 장사했고, 당(唐)나라에 와서도 여재(呂才)가 음양을 산정(刪正)하였는데, 태종(太宗)은 경인일 소릉(昭陵)에 장사했고, 고종(高宗)은 경인일 건릉(乾陵)에 장사했고, 예종(睿宗)은 경오일 교릉(橋陵)에 장사했고, 숙종(肅宗)은 경오일 건릉(建陵)에 장사했고, 송(宋)나라에 와서도 술수(術數)에 정통한 양유덕(揚惟德) 같은 사람들이 조서를 받들어 《만년(萬年)》·《구주(具注)》·《통천(通天)》·《총성(摠聖)》·《집정(集正)》 등의 역서(曆書)를 만들어 반포하고 그것을 사용하였는데, 태조(太祖)는 을묘일 영창릉(永昌陵)에 장사하였으니, 이상의 장일은 다 장통(葬通)의 일(日)이 아닐진대, 택일의 법이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장서(葬書)의 망령됨을 논하옵니다. 《신서(新書)》에 실려 있는 《당서(唐書)》에, ‘태종은 음양에 관한 서적이 근대에 와서 차츰 와전되어 천착(穿鑿)이 너무 심하고, 금기(禁忌)도 너무 많음을 느껴, 드디어 태상 박사(太常博士) 여재(呂才)에게 해명하여, 학자 10여 명과 더불어 함께 정오를 가하여, 그 천박한 습속을 삭제하고, 쓸 수 있는 것만을 남기어 53권의 신서(新書)와 아울러 구서(舊書) 27권을 편성하여 정관(貞觀) 15년에 완성되자,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행세(行世)케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여재가 많이 전고(典故)를 들어 정리(正理)를 질정(質正)하였기 때문에, 비록 술자(術者)가 얕보는 경향이 있으나, 자못 경의(經義)에 합치되는 점이 많습니다. 그의 《장서(葬書)》 서(敍)에 이르기를, ‘《주역(周易)》에, 「옛날의 장사는 섶[薪]으로 덮고 봉분도 아니하며, 나무를 심어서 표하지도 않고 상기(喪期)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후세의 성인(聖人)이 관곽(棺槨)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과괘(大過卦)에서 얻은 것이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장사라는 말은 감춘다는 뜻으로 사람이 다시 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효경(孝經)》에, 「택조(宅兆)를 점쳐서 편안히 모신다.」 하였으니, 이는 복토(復土)하는 일이 끝나면, 길이 감모(感慕)하는 곳이 되며, 둔석(窀穸)의 예를 마치면, 영원한 혼신(魂神)의 집이 마련되는 것이나, 장차 조시(朝市)의 변천도 예측하기 어려우며, 물이 날지, 돌이 깔릴지, 땅속을 미리 알 수 없으므로, 생각다 못해 점을 쳐서 거의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니, 신종(愼終)의 예를 갖춘 뿐이요, 길흉의 의(義)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음양의 장법(葬法)을 가하여, 혹은 연월의 편리를 가리고, 혹은 묘전(墓田)의 원근까지 참작하여, 한 가지만 맞지 않아도 화가 미친다, 화가 생긴다 하고, 무자(巫者)는 재화(財貨)를 탐내어 함부로 방해를 가하지 않는 자 없어, 드디어 하나의 장서(葬書)로 하여금 백가(百家)가 각각 길흉에 대한 설명이 있어 구애와 금기가 많았으며, 더구나 천지가 있는 이상, 건곤(乾坤)의 이치는 갖추어 있고, 강유(剛柔)가 있는 이상, 소식(消息)의 의(義)도 분명하며, 혹은 주야(晝夜)의 도(道)에 성숙되고 남녀의 화(化)에 감동되며, 삼광(三光)이 위에서 운행하고, 1기(氣)가 아래로 통하는, 이것이 음양의 대경(大經)이니, 잠깐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이치마저 상사의 길흉에 견강 부회하여, 요망된 말을 하는 것이다.
《춘추전》에, 「왕자는 7월만에 장사하고, 제후는 5월만에 장사하고,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한다.」 하였는데, 이는 귀천(貴賤)이 같지 않은 이상, 예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동맹(同盟) 동궤(同軌)로 하여금, 그 시기에 와서 조상케 하자는 것이니, 인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제정한 것이므로, 드디어 상식이 되었다. 법이 이미 일정하여, 어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한을 앞당겨 장사하면, 불회(不懷)라 이르고, 기한을 늦추어 장사하면, 예에 태만하다 이른다 하였으니, 이로써 장사는 일정한 기한이 있고, 연월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1이요,
《춘추》에 또 「정사일에 정공(定公)을 장사하다가 비가 와서 못하고 다음날 무오일에 장사했다.」 하였는데, 공양(公羊)씨는 잘한 일이라 칭하였고, 《예기》에 장사날을 점칠 때, 하일(遐日)을 먼저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그 달이 다 가는 날을 택하여, 불회(不懷)를 피하자는 것이다. 지금 《장서(葬書)》를 보면, 기해일에 장사하는 것을 가장 흉하게 말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펴보면, 이 날에 장사한 것이 무릇 20여 건에 달하니, 이로써 장사에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2요,
《예기》에 또 「주(周)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하므로, 대사(大事)는 밝은 아침을 이용하고, 상(商)나라는 백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대낮을 이용하고, 하(夏)나라는 흑색을 숭상하므로, 대사는 저물녘을 이용한다.」 하였고, 그 주석에 「대사는 곧 초상 장사를 말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숭상하는 바를 직접 취한 것뿐이요, 시(時)의 조만(早晩)을 가린 것이 아니며, 《춘추》에 정(鄭)나라 자산(子産) 및 자태숙(子太叔)이 간공(簡公)을 장사하려는데, 때마침 묘소를 맡은 대부(大夫)의 집이 장사 나가는 길에 마주쳤다. 만약 그 집을 무너뜨린다면, 곧 이른 아침에 하관(下棺)할 수 있고, 그 집을 피하기로 한다면, 대낮에 하관하게 되는데, 자산이 그 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대낮을 이용하고자 하니, 자태숙은 말하기를, 「만약 대낮에 하관한다면, 장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인 제후·대부들에게 수고를 끼칠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산은 박물 군자(博物君子)로 알려졌는데, 자태숙은 제후를 위하여 피하자고 하였으니, 국가의 대사는 초상 장사보다 더한 것이 없겠거늘, 반드시 길흉의 의(義)가 있다면, 그들이 이용하지 아니할 이치가 없는데, 지금 시(時)의 득실에 관계하지 않고 인사(人事)의 가부(可否)만을 논했을 뿐이며, 증자문(曾子問)에, 「장사하다 일식(日食)을 만나면 길 왼쪽에 두었다가 밝아짐을 기다려서 행사하는 것은 비상을 대비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만약 《장서》에 의한다면, 흔히 건(乾)·간(艮)의 시를 이용하는데, 모두 한밤중이니, 이렇다면 글[文]과 예(禮)가 서로 위반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기》나 《춘추전》을 보면, 장사에 시를 가리지 않는 증거가 제3이요,
《장서》에 「부귀 관작이 다 안장(安葬)으로써 이루어지고, 보명연년(保命延年)이 분묘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효경》을 보면, 「몸을 바로 세우고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까지 들추어 부모를 현달케 한다.」고 하였고, 《주역》에 「성인(聖人)의 큰 보배는 곧 지위이다. 무엇으로 지위를 지키느냐. 바로 인(仁)이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나날이 근신하면, 혜택이 한량없이 미치고, 만약 덕이 모자라면, 도움이 있을 리 없다. 이는 장지의 길흉을 들어 복록의 연장을 논한 것이 아니다. 장손(臧孫)이 노(魯)나라에서 자손을 두게 되리라는 말은 길일의 장사와 상관이 없고, 숙오(叔敖)는 초나라에서 절사(絶祀)되리라는 것도 묘지를 잘못 정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장사에 관한 길흉은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제4요,
지금 초상 장사에 대한 길흉이 모두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5성(姓)과 결부하였는데, 옛날의 장지는 다 국도(國都)의 북쪽에 있었으니, 영역(塋域)이 이미 일정되어 있는 이상, 어떻게 성씨를 묘소에 관련시킬 것이며, 조(趙)씨의 장지가 모두 구원(九原)에 있고, 한(漢)나라의 산릉(山陵)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상리(上利)·하리(下利)는 거론할 여지 없는데, 대묘(大墓)·소묘(小墓)의 의(義)는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 자손들이 부귀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혹은 하(夏)·상(商)·주(周) 3대와 더불어 풍교(豐敎)를 같이 했고, 혹은 6국을 나누어 왕이 되었으니, 5성(五姓)의 의는 옛 기록에 전혀 볼 수 없는데, 길흉의 이치는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이 제5요,
또 인신(人臣)의 명망과 지위는 진퇴(進退)가 무상하여 처음에는 천했다가 뒤에는 귀한 수도 있고, 처음에는 통했다가 나중에는 막히는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자문(子文)이 세 번 영윤(令尹)을 지냈고, 전금(展禽)이 세 번 사사(士師)에서 쫓겨났다. 열 번을 장사해도 한 번 정한 날은 다시 변경한 일이 없고, 분묘가 완성되면 고치질 않았는데, 어찌하여 명위(名位)는 잠깐도 편안할 때가 없는가. 그러므로 관작(官爵)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요, 안장(安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6이요,
저속한 무식배들이 모두 장서를 믿고 있기 때문에, 무자(巫者)가 길흉을 사칭하면, 행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드디어 벽용(躄踊)의 즈음에 장지를 택하여 관작이나 바라며, 도독(荼毒)의 궁극에도 장시(葬時)를 가려 재록(財祿)을 꿈꾸고, 혹은 진일(辰日)에 울고 곡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여, 드디어 웃고서 손님의 조상을 받으며, 혹은 친속은 광중(壙中)에 가까이 못하는 살(殺)이 있었다 하여, 집안 장사에 참여하지 않고 평복을 입고 있으니, 성인의 교화가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장서(葬書)가 세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제7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수(王洙)는 위에 말한 여재(呂才)의 논설이 가장 경의(經義)에 합치된다 하였으므로, 지금 몇 대문을 절취하여, 이에 부록하여 후인의 의혹을 제거하자는 바입니다.
금기에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장론(葬論)》에, ‘사람의 부귀와 빈부, 수요(壽夭)는 하늘에 매이고, 어질고 어리석은 것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며, 절대로 장사와는 관계가 없다. 설사 장사(葬師)의 말과 같다 해도, 사람의 자식된 자가 바야흐로 애통이 극한 처지에 있어, 어찌 차마 그 어버이의 체백(體魄)을 이용하여 스스로 복리를 노리겠는가. 옛날 우리 조상의 장사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관곽도 갖추지 못했다가 태위공(太尉公) 이하로부터 비로소 관곽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금·은·주옥(珠玉)의 물품은 일찍이 한 푼도 관 속에 넣어 본 일이 없었다. 장차 태위공을 장사하려 하는데, 족인(族人)들이 다 말하기를, 「장사는 집안의 대사인데, 어찌하여 음양가에게 문의하지 않는가. 이는 절대로 불가하다.」고 하니, 나의 형 사마백강(司馬伯康)이 어찌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음양가에게 문의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디서 훌륭한 장사(葬師)를 만나 문의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족인들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생(張生)이란 사람은 훌륭한 지사로서, 여러 고을이 다 쓰고 있다.」고 하므로, 형은 곧 장생을 불러서 2만 금을 주겠다고 하니, 장생은 야부(野夫)로서, 대대로 장사가 되어 야인의 장사를 해 왔지만, 소득은 천금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말하기를, 「네가 내 말대로 한다면, 나는 너에게 장사를 맡기겠지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다면, 다른 지사를 구하겠다.」고 하니, 장생은 명령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형은 연·월·일·시 및 광중의 천심 광협(淺深廣狹)과 도로가 어디로 나야 한다는 것들을 자기 의사대로 정하되, 모두 편리를 주로 하여, 장생을 시켜 장서에 결부시켜 「크게 길하다.」고 하게 하여, 족인에게 보여 주니, 모두 다 기뻐하며, 달리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내 형은 나이 79세로 경(卿)의 반열에서 퇴직하였고, 나도 나이는 66세로 시종(侍從)의 자리에 붙어 있고, 족속으로 벼슬길에 오른 자가 23명이니, 장서를 신용하는 사람들의 집안도 별로 내 집보다 낫지 않다. 연전에 내 아내가 죽었을 때, 관이 만들어지자, 염(歛)하고,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행상하고, 광(壙)이 마련되자, 장사하고, 말 한 마디도 음양가에 묻지 아니하였으나, 지금까지 다른 사고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음양가가 간사한 말로써 대중을 의혹케 하여,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미워하였는데, 상가에 있어서는 더욱더 심하다. 그래서 지난번 간관(諫官)으로 있을 적에 천하의 장서를 엄금하도록 주청하였는데, 당시 집권자가 그런 뜻을 갖지 아니하였다. 지금 이 논을 저술하여, 뒷 자손으로 하여금, 장사는 반드시 제때에 행해야 하며, 장구(葬具)를 반드시 후히 하지 않음을 알려면, 내 선조를 보고, 장서가 족히 믿을 것 없음을 알려면, 내 집을 보라. 원풍(元豐) 7년 월 일에 사마광(司馬光)은 서술한다. ’고 하였습니다.
택일·택지에 대하여 논하옵니다. 《성의장력(醒疑葬曆)》에는, ‘청오자(靑烏子)의 좋은 해를 택하는 것이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거하였고, 왕수(王洙)는, ‘좋은 해가 좋은 달만 못하고, 좋은 달이 좋은 날만 못하고, 좋은 날이 좋은 시만 못하고, 좋은 시가 좋은 땅만 못하다. ’는 것을 인용하였고, 《만력회동(萬曆會同)》도 이와 같은 뜻이며,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도, ‘전기해서 장사할 만한 땅을 택하여 날을 가려 천광(穿壙)하고 토지의 신에게 제사한다.’ 하였고, 《황서절부록(黃瑞節附錄)》에도, ‘옛적에는 장지나 장일은 다 점쳐서 결정했는데, 지금 사람은 점하는 법을 모르니, 시속에 따라 택정하는 것도 가하다. ’고 하였고, 호순신(胡舜申)은 각가(各家)의 장일법(葬日法)을 논하되, 《광제력(廣濟曆)》을 보면, 안장할 수 있는 날이 임신·계유·임오·갑신·을유·병신·정유·임인·병오·기유·경신·신유 등 12일은 십전대리일(十全大利日)을 만들었는데, 《지리신서(地理新書)》도 취했고, 《천통(天通)》·《대명력(大明曆)》 등의 역서도 역시 많이 취했으니, 이 12일은 진실로 이용할 만한 날이다. 그러나 역일(曆日)의 주(注)에, 반드시 장사지내도 좋다는 문구가 붙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안찰(按察)하건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땅이 좋다는 것은 흙빛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것이 그 증거이다. 부조자손(父祖子孫)이 하나의 동기일진대, 저기가 편안하면 여기도 편안하고, 저기가 위태하면 여기도 위태한 것이 역시 이치이다. 그런데 금기에 구애하는 자들이 혹은 땅의 방위를 택하고, 혹은 날의 길흉을 결단하니, 역시 편견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정자의 논평이 가장 근리(近理)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 《광제(廣濟)》·《백기(百忌)》·《총성(摠聖)》 등 역서 및 《삼력회동(三曆會同)》·《금화회동(金華會同)》·《십력회동(十曆會同)》·《삼원정경(三元正經)》·《수금구결(袖金口訣)》·《만력회동(萬曆會同)》·《정의명진론(正義明眞論)》·《성의력(醒疑曆)》·《연길서(涓吉書)》·《지리신서(地理新書)》·《지리변망(地理辨妄)》·《극택전서(克擇全書)》·《극택통서(克擇通書)》·《원귀집(元龜集)》 등 서적을 보면, 다 앞에 말한 12일을 크게 길하다 하였으니, 장사에 있어 인(寅)·오(午)·신(申)·유(酉)일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개 인(寅)·오(午)는 화덕(火德)인 때문에, 금의 광채를 상징하여 금계(金鷄)가 우는 날이라 하고, 신(申)·유(酉)는 금덕(金德)인 때문에, 옥의 윤기를 상징하여, 옥견(玉犬)이 짖는 날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위로 부모도 부르지 못하고, 아래로 자손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음양이 서로 조응하고 흉신(凶神)이 다 잠복한다는 점을 말한 것인즉,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오니, 지금부터 《대명력(大明曆)》의 예에 의하여, 장통일(葬通日)은 반드시 당년의 책력 날짜에 주(註)를 달도록 하시옵기 바랍니다.
승흉장법(乘凶葬法)을 논합니다. 호순신이 말하기를, ‘장사는 길흉이 있으니, 길장은 졸곡(卒哭)을 지낸 장사, 또는 해를 넘은 장사 이외에 연고가 있어 개장(改葬)하는 것을 이른 것이니, 이는 선택한 연·월·일·시가 반드시 다 좋아야 쓸 수 있고, 흉장은 졸곡 전 백일 이내를 이른 것이니, 연·월의 흉악은 묻지 않고, 다만 좋은 일·시 만을 가리며, 일체의 신살(神殺)도 심히 구애하지 아니하되, 만약 연·월·일·시가 다 길하면 더욱 좋다. ’고 하였습니다.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누리게 되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논합니다. 채성우(蔡成禹)의 《지리변망(地理辨妄)》에, ‘세상에는 떠드는 자들이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조궁(釣宮)의 설을 만들어 태세 월건(月建)을 중궁(中宮)으로 들게 하여, 순수로 돌려 9궁(宮)으로 가서 상극되면 흉하고, 상생되면 길하다고 하며,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체궁(替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방편을 마련하여 만들어, 소득되는 천간(天干)·지지(地支)로써 순수로 돌리어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드디어 개궁(蓋宮)의 설을 만들어, 두 번째 소득되는 천간·지지로써 9성(星)을 취하여 9궁으로 가고, 또 그 길흉의 표준이 없음으로써 또 월건을 중궁으로 끌어들여, 순수로 9궁으로 가는 것을 운용해서 신살(神殺)을 띠게 하고, 또 팔괘(八卦)를 갑의 종묘효(宗廟爻)에 들여서 팔궁(八宮)을 가해서 신살(神殺)을 띠게 하였다. 또 신살의 궁위(宮位)를 더하여 태양(太陽)을 만들고, 태음(太陰)을 만들고, 복성(福星)·용덕(龍德)을 만들어 사리(四利)라 이르는 것이다. 무릇 월건이 신살을 띤다면, 세건(歲建)·일건(日建)·시건(時建)은 유독 신살을 띠지 못하란 말인가. 괘(卦)의 종묘효(宗廟爻)가 신살을 띨 수 있다면, 그 초·2·3·4·5효(爻)는 유독 신살을 띨 수 없단 말인가. 그 8괘에 종묘효만이 신살을 띨 수 있다면, 오황재중(五黃在中)은 또 어느 괘에 속하며, 또 어느 것이 종묘효란 말인가. 그들의 이른바 사리성(四利星)이 또 무엇을 의거한 것인가. 그러므로 무릇 3원(元)이 된다는 설도 꿈과 같은 것이요, 조궁(釣宮)·체궁(替宮)·개궁(蓋宮)·사리(四利)라는 것은 또 꿈속에서 꿈을 되풀이하는 격이며, 그네들의 이른바 자(紫)·백(白)·벽(碧)·황(黃)·녹(綠)·흑(黑)이라는 것도 다 근거 없는 설이며, 그 암건적살(暗建的殺)도 다 이러한 종류요, 그 초신접기(超神接氣)라는 것도 둔갑술(遁甲術)과 근사하나, 역시 지붕 위에 지붕을 올린 격이다. 그러한데 세상 사람이 다만 그 운용하는 바가 종횡으로 15의 수(數)라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마치 《하도(河圖)》·《낙서(洛書)》에서 나온 듯이 의심하여, 그릇된 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겉만 보고 존숭 신앙하기 때문에, 말을 아니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안찰하건대, 태세가 본명을 누른다는 설은 대개 장사할 날짜를 중궁에 넣어 순수로 돌려 9궁으로 가되, 본년 태세가 당도하는 궁에 가서 멈추고, 60갑자로 두루 헤아려서, 만약 그 집안에 본명(本命)이 태세의 궁과 같은 자가 있으면, 태세가 본명을 누르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은 마땅히 금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만약 사람이 이것에 범하기로 든다면, 1년 치고 없는 날이 없을 것이므로, 태세가 본명을 누르지 않는 날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옛사람은 장사의 기한이 많아도 7개월을 넘지 않았으며, 또 한나라와 당나라의 여러 임금도 1, 2년 내에 장사를 못한 자는 대개 없었으니, 이 법을 쓰지 아니한 것이 명확하옵니다. 이것이 이른바 조궁의 유법(遺法)이온데, 채성우가 자상히 변명하였습니다.
장사가 흉일을 범한다는 것과 횡간도(橫看圖) 및 망인(亡人)의 운수·6륜(輪) 등법의 허망됨을 논합니다. 송노진(宋魯珍)의 《극택통서(克擇通書)》에, ‘모든 역서를 살펴보니, 장사날이 천탄(天呑)·천건(天建)·천혁(天嚇)을 범하면, 택장(宅長)에게 좋지 않고, 월탄(月呑)을 범하면, 장자와 장손에게 좋지 않다.’ 했는데, 지금 참고해 보면, 정·4·7·10월은 천덕(天德)이 천탄과 날이 같고, 또 옥약길성(獄鑰吉星)이 천건(天建)과 날이 같고, 또 상일(相日)과 날이 같고, 상일은 천혁과 날이 같고, 월궁(月宮)은 월탄과 날이 같건마는, 모든 역서에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무슨 근거로 흉일로 만들었으며, 대장일(大葬日)은 선현이 말한 좋은 일진으로 누차 시험하여 탈이 없으므로, 통(通)한 사람은 구애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그에 의혹되겠는가. 증문전(曾文展)이 이르기를, ‘만약 다시 죽은 사람의 운수를 놓고 본다면, 분명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목숨이 이미 없어졌는데, 또 무슨 운수를 본단 말인가. 반드시 청룡(靑龍)·백호(白虎)·천강(天剛)·하괴(河魁)가 총묘(塚墓)에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할 것이니, 이는 다 세상을 속이고 인심을 의혹케 하는 설인즉, 이치에 통달한 군자는 마땅히 다시 밝힐 것이며, 또 옛 역서에 망인의 운을 말한 것이 18조문으로, 모두 길흉을 상세히 추산했으나, 서로 득실이 있어 전용하기는 어려우며, 지금 세상의 장사가, 혹은 오음(五音)이 망인의 운명에 전용된다고 말하는 모양이나, 사람이 죽은 이상, 어찌 운명이 있겠느냐.’ 하였고, 양균송(楊筠松)은 망인의 운명에 대하여, 여러 모로 합당치 않는 것이 있다고 했고, 소수명(蘇粹明)의 《지리지남(地理指南)》에 ‘행년(行年)에 있어서는 6륜(輪)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고, 주(註)에, ‘시속의 장사(葬師)들이 흔히 6륜법의 연월을 사용하는데, 흔히 보면, 대소화(大小火)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길하고, 대소수(大小水)의 연월에 장사한 자는 도리어 해를 당하는 예가 많다. 이로 미루어 보면, 6륜도 신빙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것만 고집할 수 있는가.’ 하였으며, 송노진의 《극택통서(克擇通書)》 안에 있는 6륜의 주(註)에, ‘기실은 사람의 생사도 때가 있고, 자손의 부귀도 분복이 있는데, 어찌 택일해서 죽었겠는가. 짐짓 이 설을 남겨 두어 용도에 갖추었을 따름이라. ’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살펴보면, 6륜법은 대화(大火)·소화(小火)·소금(小金)의 설과, 그리고 《용자경(龍子經)》의 혈광(血光)·화거(火車)·사패(死敗)·표천(漂遷) 등의 용세(龍勢)와 《갑지수경(甲地宿經)》의 지흉(地凶)·지패(地敗)·지귀(地鬼)·지화(地禍)·지상(地傷)·지겁(地刼) 등의 성수(星數) 및 여러 역서 내에 있는 혼입묘(魂入墓)·장년월혼입묘(葬年月魂入墓)·망인집인입묘(亡人執印入墓)·사대혼입묘(四大魂入墓)·저두망운(猪頭亡運)·귀곡자망운(鬼谷子亡運)·나흉운(羅凶運) 등의 법이온데, 택년·택월에 대하여는, 다 망인의 세수(歲數)·행년(行年)으로 미루어 보고 있으니,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다시 무슨 운명을 볼 것이며, 사망한 자도 택일을 잘못해서 죽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날을 달로 바꾼다는 말이 성행하였지만, 비록 천자의 귀(貴)로도 서한(西漢)의 고조(高祖)는 5월 병인일에 장사했으니, 5월 인일(寅日)은 횡간도의 역마탄(驛馬呑)·표기탄(驃騎呑)·토금(土禁) 등의 날이요, 혜제(惠帝)는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9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혼(天魂)·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이요,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6월 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바로 소화(小火)·지귀(地鬼)·천이(遷移)에 해당하고, 날은 천탄·지혼을 범했으며, 경제(景帝)는 나이 48세로 2월 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무제(武帝)는 나이 71세로 3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지흉(地凶)을 범했고, 소제(昭帝)는 나이 22세로 6월 임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6월 신일은 횡간도의 천혁·천건·지건 등의 날이요, 선제(宣帝)는 정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重賻)를 범했고, 정월 축일은 횡간도의 천혁·지건·지혁 등의 날이요, 원제(元帝)는 나이 43세로 7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46세로 4월 기묘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동한(東漢)의 광무(光武)는 3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지중(地中)·백호(白虎)·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명제(明帝)는 나이 48세로 8월 임술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호를 범했으며, 장제(章帝)는 나이 33세로 3월 계묘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백호·천금 등을 범했으며, 순제(順帝)는 나이 30세로 9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小金)·지겁(地刼)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위(魏) 무왕(武王)은 2월 정묘일에 장사하였으니, 천황(天皇)·인황(人皇)·인건(人建)·천금(天禁) 등의 날을 범했고, 문제(文帝)는 나이 40세로 6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겁·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황(地皇)·토금(土禁)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5세로 2월 계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지혁·지혼을 범했으며, 진(晉)나라 명제(明帝)는 나이 27세로 9월 신축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화를 범했고, 날은 천혼·역마탄·표기탄을 범했으며, 성제(成帝)는 나이 28세로 7월 병진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지화(地禍)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7월 병인일은 월탄에 해당되며, 목제(穆帝)는 나이 19세로 7월 무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상(地傷)·천이를 범하였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10월 갑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重喪)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천건·팔좌(八座)·지중(地中)·백호·토금을 범했으며, 안제(安帝)는 나이 37세로 익년 정월 경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중자(地中雌)·중부를 범했으며, 송(宋)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60세로 7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겁을 범했고, 날은 지탄·천금을 범했으며, 문제(文帝)는 나이 46세로 3월 계사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地皇)을 범했으며, 효무제(孝武帝)는 나이 35세로 7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지황을 범했으며, 명제(明帝)는 나이 34세로 5월 무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역마탄·표기탄·토금을 범했으며, 제(齊)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56세로 4월 병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지귀·중상(重喪)을 범했고, 날은 지탄·역마탄·표기탄·천금을 범했으며, 무제(武帝)는 나이 54세로 8월 병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금·지패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건·천혼을 범했으며, 당(唐)나라 고조(高祖)는 나이 71세로 10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흉(地凶)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천혁·천탄을 범했으며, 태종(太宗)은 나이 52세로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대화(大火)·천이를 범했고, 날은 천건·지중자(地中雌)·천혼을 범했으며, 고종(高宗)은 나이 56세로 이듬해 8월 경인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귀·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하였고, 날은 천건·지중자·천혼을 범했으며, 중종(中宗)은 나이 55세로 11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날은 지황·지탄·천혼·8좌를 범했으며, 예종(睿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중자·월탄을 범했고, 현종(玄宗)은 나이 78세로 이듬해 3월 신유일에 장사하였으니, 지탄·지중자·역마탄·표기탄 등의 날을 범했으며, 위의 중종·예종·현종은 모두 소화를 범했고, 숙종(肅宗)은 나이 52세로 이듬해 3월 경오일에 장사하였으니, 달은 중부를 범했으며, 대종(代宗)은 나이 54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지패(地敗)를 범했고, 달은 중천(重遷)을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목종(穆宗)은 나이 30세로 11월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상원(上元)·혈광(血光)을 범했고, 송(宋)나라의 진종(眞宗)은 나이 55세로 10월 기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소화·천이를 범했고, 달은 중부를 범했고, 날은 지혼을 범했으며, 신종(神宗)은 나이 38세로 10월 을유일에 장사하였으니, 해는 중상을 범했고, 달은 중천을 범했고, 날은 지혼·천탄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년·택월·택일의 설은 무사(巫史)에서 나왔다는 것도 명확하오며, 그 《6륜(六輪)》·《용자(龍子)》·《갑지수경(甲地宿經)》 등과 《횡간도》의 설도 모두 허망된 것이며, 산두백(山頭白)이 조궁(釣宮)이 된다는 것이나, 주당행년(周堂行年)의 정충(正衝)·순충(旬衝)·연월일·8좌의 법이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하명하였다. 처음에 시속이 풍수의 말만 믿고 자손이 많은 자는 금기가 더욱 심하여, 10년이 되도록 장사를 못한 자가 있으므로, 상왕은 심히 미워하여, 태조 대왕의 상사에 있어서는, 옛제도에 의하여 5월만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정이오들에게 명하여 장설(葬說)의 그릇된 점을 시정함과 동시에 사대부의 상사는 3개월로 단정하고, 장일은 장통일(葬通日)만을 이용하게 하며, 또 중외 유사(攸司)로 하여금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하지 않는 자를 사찰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원문
○贊成致仕鄭以吾、兵曹判書趙末生、戶曹參判金自知、內資寺尹(廋順道)〔庾順道〕 、檢校司宰監正李陽達集《葬日通要》, 隨箋以進。 箋曰:
臣以吾等伏承宣旨, 若曰: "先王制禮, 自天子至大夫士, 葬期各有月數, 後世陰陽家拘於多忌, 踰時不葬, 予甚憫焉。 如太歲壓本命, 葬師最忌, 予嘗驗之再矣, 而大無妨也。 若此之類, 不能悉也, 宜遍閱群書, 取其正論, 去其邪說, 質聖賢之旨要, 破俗巫之膏肓, 集成一書以進。" 恭惟, 殿下使民養生之旣備, 又慮送死之多拘, 念至於此, 使民無憾之意, 至深切矣。
臣等竊謂, 陰陽之說, 雖曰自(皇帝)〔黃帝〕 而有之, 然兩漢以降, 競宗符讖, 不探造化之本, 各立吉凶之說, 其流至於百家, 惑世誣民甚矣。 是以, 前乎呂才刊正削去, 後乎蔡成禹之徒, 亦著《辨妄》, 惜乎庸師野夫之不之考也。 雖然泥於古, 而不通乎今, 必歸於駭俗; 泥乎今而不通乎古, 亦流於誑世。 必也古與今參酌, 而後可以去二者之弊也。 是書首之以《禮記》、《春秋》所載葬期之說者, 明王制不可紊也。 次之以春秋列國、漢、唐諸主葬日者, 見古者葬不擇日也。 次之以呂才 《敍葬》、司馬君實 《葬論》者, 去世俗之惑也。 次之以靑烏子所論及王洙所引葬記、朱熹所言擇日、胡舜申所取諸家葬日者, 一則見從俗之意; 一則見十全大利日, 皆葬通, 而非世俗拘忌也。 又次之以《乘凶葬法》、蔡成禹 《辨妄》、宋魯珍 《剋擇通書》者, 所以破壓本命、橫看、亡運諸邪說也。 間亦竊付臣等管見, 總之曰《葬日通要》, 隨箋以進, 伏望殿下, 特賜一覽, 頒之境內, 使人人知送死之大, 以十全大利日, 不先期、不後期, 各葬其親, 則人心有定, 王制復明, 其於送死之道, 亦庶乎無憾矣。
論古之葬者, 不擇年月。 《禮記》云: "天子七月, 諸侯五月, 大夫三月, 士踰月而葬。" 《春秋傳》曰: "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 諸侯五月, 同盟至; 大夫三月, 同位至; 士踰月, 外姻至。" 臣等謹按, 春秋之時, 列國諸侯先期而葬, 謂之不懷; 後期而不葬, 譏之怠禮。 然則諸侯而不得僭天子之禮, 而況於大夫僭諸侯之禮; 士庶人僭大夫之禮乎? 吾東方素無著令, 上自大夫下至士庶, 未知常式, 惑於陰陽拘忌, 過期不葬, 恬不爲愧者, 庸或有之。 願自今一從禮經, 違者攸司痛懲。
論古無擇日。 王洙 《新書》云: "或曰古者有卜日而無擇日, 故春秋之時, 丁巳葬魯 定公, 雨, 不克葬, 戊午乃葬。 己巳葬齊 僖公, 辛巳葬哀公, 丁巳葬魯 僖公, 辛亥葬成公, 癸亥葬齊姜, 丁亥葬齊 桓公, 乙亥葬宋 文公, 辛亥葬定姒, 癸亥葬宋 襄公, 辛亥葬衛 穆公, 己亥葬齊嬀, 丁巳葬齊 景公, 己亥葬齊 昭公。 巳與亥日, 今爲大凶之說, 則擇日之說, 無傳焉。" 臣等謹按, 兩漢競宗讖記, 崇信邪說。 西漢 高祖, 丙寅葬長陵, 惠帝, 辛丑葬安陵, 文帝, 乙巳葬覇陵, 宣帝, 辛丑葬杜陵, 元帝, 丙戌葬渭陵, 成帝, 己卯葬延陵, 東漢 光武, 丁卯葬原陵, 明帝, 壬戌葬顯陵, 章帝, 癸卯葬敬陵, 冲帝, 己未葬懷陵, 質帝, 乙卯葬靜陵。 至於唐, 呂才刪定陰陽, 而太宗, 庚寅葬昭陵, 高宗, 庚寅葬乾陵, 睿宗, 庚午葬橋陵, 肅宗, 庚午葬建陵。 乃至大宋, 精於術數, 如揚惟德等奉詔撰《萬年》、《具注》、《通天》、《摠聖》、《集正》等曆, 頒布遵用, 而太祖, 乙卯葬永昌陵。 已上葬日, 皆不是葬通之日, 則擇日之法, 蓋出於巫史明矣。
論葬書之妄。 《新書》載《唐書》曰: "太宗以陰陽書, 近代以來, 漸致訛僞, 穿鑿旣甚, 拘忌亦多。 遂命太常博士呂才與學者十餘人, 共加刊正, 削其淺俗, 存其可用者, 勒成五十三卷, 幷舊書二十七卷。 貞觀十五年書成, 詔頒行之。" 才多以典故質正, 理雖爲術者所短, 然頗合經義。
其《敍葬》書曰: "《易》云: ‘古之葬者, 衣之以薪, 不封不樹, 喪期無數。 後世聖人易之以棺槨, 蓋取諸大過。’ 《禮》云: ‘葬者, 藏也, 欲使人不復見之。’ 然《孝經》云: ‘卜其宅兆而安厝之。’ 以其復土事畢, 長爲感慕之所; 窀穸禮終, 永作魂神之宅。 朝市遷變, 不能預測於將來; 泉石交侵, 不可先知於地下。 是以, 謀及龜筮, 庶無後艱, 乃備愼終之禮, 曾無吉凶之義。 曁乎近代以來, 加之陰陽葬法, 或選年月便利, 或量墓田遐近, 一事失所, 則云禍及禍生, 巫者利其貨財, 莫不擅加妨害, 遂使葬書一術, 乃有百家各說吉凶, 拘而多忌。 且天覆地載, 乾坤之理備焉; 一剛一柔, 消息之義詳矣。 或成於晝夜之道, 感於男女之化, 三光運於上, 一氣通於下, 斯乃陰陽之大經, 不可失於斯須也。 至於喪庭之吉凶, 乃附此爲妖妄。 《傳》云: ‘王者七月而葬, 諸侯五月而葬, 士庶人逾月而葬。’ 此則貴賤不同, 禮亦異數。 欲使同盟、同軌赴弔及期, 量事制宜, 遂成常式。 法旣一定, 不可違之, 故先期而葬, 謂之不懷; 後期而葬, 譏之怠禮, 此則葬有定期, 不擇年月, 一也。
《春秋》又云: ‘丁巳葬定公, 雨, 不克葬, 於戊午用事, 《公羊》善之。’ 《禮記》云: ‘卜葬先遐日者善, 選月終之日也, 所以避不懷也。’ 今檢葬書, 以己亥之日, 用葬最凶。 謹按, 春秋之際, 此日葬者, 凡有二十餘件, 此則葬不擇日, 二也。
《禮記》又云: ‘周尙赤, 大事用平朝; 商尙白, 大事用日中; 夏尙黑, 大事用昏時。’ 註云: ‘大事卽喪葬也。’ 此則直取當代所尙, 不擇時之早晩。 《春秋》云: ‘鄭 子産及子太叔葬簡公, 於時司墓大夫室當葬路, 若壞其室, 卽平朝而堋, 避其室, 則日中而堋。 子産不欲壞其室, 欲得日中, 子太叔云: 「若至日午時堋, 恐久勞諸侯、大夫來會葬者。」’ 然子産旣云博物君子, 太叔乃爲諸侯之避, 國之大事, 無過喪葬, 必是義有吉凶, 此等豈得不用, 今乃不問時之得失, 唯論人事可否。 《曾子問》云: ‘葬逢日食, 舍於路左, 待明而行。’ 所以備非常也。 若依葬書, 多用乾艮二時, 竝是近半夜, 此則文與禮違。 今檢禮傳, 葬不擇時, 三也。
葬書云: ‘富貴官品, 皆由安葬所致; 年命延保, 亦由墳壠所招。’ 今按, 《孝經》云: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易》曰: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 是以, 日愼一日, 則澤及於無疆, 若德不逮, 則又必無援。 此則非由安葬吉凶, 而論福祚延保。 臧孫有後於魯, 不關葬得吉日; 叔敖絶祀於荊, 不由遷厝失所, 則安葬吉凶, 不可信用, 其義四也。
今之喪葬吉凶, 皆依五姓便利。 古之葬者, 皆在國都之北, 兆域旣有常所, 何取姓墓之義? 趙氏之葬, 竝在九原; 漢之山陵, 散在諸處, 上利下利, 蔑爾不論, 大墓小墓, 其義安在? 及其子孫, 富貴不絶, 或與三代同風, 或分六國而王, 則五姓之義, 大無稽古。 吉凶之理, 何從而生? 其義五也。
且人臣名位, 進退何常, 亦有初賤而後貴, 亦有始泰而終否。 是以, 子文三已令尹; 展禽三黜士師。 卜葬一定, 更不回改; 塚墓旣成, 曾不改易, 則何因名位, 無時暫安, 故知官爵爲之在人, 不由安葬所致, 其義六也。
野俗無識, 皆信葬書。 巫者詐其吉凶, 因而徼幸, 遂使擗踊之際, 擇葬地而希官品; 荼毒之秋, 選葬時而規財祿。 或云辰日不宜哭泣, 遂(菀)〔莞〕 爾而對賓受弔; 或云同屬忌於臨壙, 乃吉服不送其親。 聖人設敎, 豈其然乎? 葬書敗俗, 一至於此, 其義七也。"
王洙云: "右呂才論說, 最合經義。" 今略取一篇, 附于此, 以祛後人之惑者。
論不拘禁忌。 司馬溫公 《葬論》云: "人之貴賤、貧富、壽夭係於天, 賢愚係於人, 固無關預於葬。 就使皆如葬師之言, 爲人子者, 方當哀窮之際, 何忍不顧其親之暴露, 乃欲自營福利耶? 昔者吾諸祖之葬也, 家甚貧, 不能具棺槨, 自太尉公而下, 始有棺槨。 然金銀珠玉之物, 未嘗以錙銖入於壙中。 將葬太尉公, 族人皆曰: ‘葬者, 家之大事。 奈何不詢陰陽? 此必不可。’ 吾兄《伯康》無如何, 乃曰: ‘詢於陰陽則可矣, 安得良葬師而詢之?’ 族人曰: ‘近村有張生者, 良師也。 數縣皆用之。’ 兄乃召張生, 許以錢二萬, 張生, 野夫也, 世爲葬師, 爲野人葬, 所得不過千錢, 聞之大喜。 兄曰: ‘汝亦能用吾言, 吾俾爾葬, 不用吾言, 將求他師。’ 張生曰: ‘惟命是聽。’ 於是, 兄自以己意, 處歲月日時及壙之淺深、廣狹, 道路所從出, 皆取便於事者, 使張生以葬書緣飾之曰大吉, 以示族人, 皆悅無違異者。 今吾兄年七十九, 以列卿致仕, 吾年六十六, 忝備侍從, 宗族之從仕者, 二十有三人。 視他人之謹用葬書, 未必勝吾家也。 前年吾妻死, 棺成而斂, 裝辦而行, 壙成而葬, 未嘗以一言詢陰陽家, 迄今亦無他故。 吾嘗疾陰陽家立邪說惑衆爲世患, 於喪家尤甚。 頃爲諫官, 嘗奏乞禁天下葬書, 當時執政, 莫以爲意, 今著玆論, 庶俾後之子孫葬必以時, 欲知葬具之不必厚, 視吾祖; 欲知葬書之不足信, 視吾家。 元豊七年月日, 司馬光述。"
論擇日擇地。 《醒疑葬曆》引靑烏子云: "若擇良年, 不及吉月, 吉月不如好日, 好日不如好地。" 王洙引葬書云: "歲之善, 不如月之善, 月之善, 不如日之善, 日之善, 不如時之善, 時之善, 不如地之善。" 《萬曆會同》, 亦同此意。 《文公家禮》云: "前期擇地之可葬者, 擇日開塋域, 祀后土。" 黃瑞節附錄云: "古者葬地葬日, 皆決於卜筮。 今人不曉占法, 且從俗擇之可也。" 胡舜申論諸家葬日法曰: "《廣濟曆》可安葬者, 如壬申、癸酉、壬午、甲申、乙酉、丙申、丁酉、壬寅、丙午、己酉、庚申、辛酉十二日, 是十全大利之日, 《地理新書》亦取之, 《天通》、《大明》等曆亦多取之, 則十二日誠可用矣。 然必曆日注宜葬, 然後用之可也。" 臣等謹按, 程子曰: "地之利者, 土色之光潤、草木之茂盛, 乃其驗也。 父祖子孫同氣, 彼安則此安, 彼危則此危, 亦其理也, 而拘忌者, 或以擇地之方位, 決日之吉凶, 不亦泥乎?" 程氏之論, 最爲近理, 不可不遵。 又按《廣濟》、《百忌》、《摠聖》等曆及《三曆會同》、《金華會同》、《十曆會同》、《三元正經》、《袖金口訣》、《萬曆會同》、《正義明眞論》、《醒疑曆》、《涓吉書》、《地理新書》、《地理辨妄》、《克擇全書》、《克擇通書》、《元龜集》等書, 皆以前論十二日爲大吉, 其意謂葬止用寅午申酉日者, 蓋以寅午, 火之德, 象金之光耀, 而謂之金雞鳴; 申酉, 金之德, 象玉之光潤, 而謂之玉犬吠。 此等日, 上不呼父母, 下不呼子孫, 言其陰陽相應, 凶神悉伏, 亦可遵用。 願自今依《大明曆》例, 葬通之日幷注于每歲冊曆。
論(承)〔乘〕 凶葬法。 胡舜申云: "葬有吉凶, 吉葬謂卒哭踰年之外及有故改葬者, 此擇年月日時, 必須皆得吉, 然後可從事; 凶葬謂未卒哭百日之內, 卽不問凶年惡月, 但擇日時之吉, 一切神殺, 不甚避忌, 如年月(一)〔日〕 時, 亦皆得吉尤良。"
論不用太歲壓本命。 蔡成禹 《地理辨妄》云: "世之爲說者, 以吉凶之無準, 遂爲釣宮之說, 用太歲月建, 入中宮順飛行九宮, 以相克爲凶, 相生爲吉。 又以其吉凶之無準, 遂爲替宮之說, 再以作方所得之支干, 順行九宮。 又以其吉凶之無準, 遂爲蓋宮之說, 再以所得之支干, 取九星以行九宮。 又以其吉凶之無準, 又用月建, 入中宮順行九宮者, 而帶神殺焉。 又以八卦納甲之宗廟爻, 加八宮而帶神殺焉。 又增神殺之宮位, 爲太陽、爲太陰, 福星、龍德, 謂之四利焉。 夫月建帶神殺, 則歲建、日建、時建, 獨不可帶神殺耶? 卦之宗廟爻, 可以帶神殺, 則其初二三四五, 獨不可以帶神殺耶? 其八卦有宗廟爻, 可以帶神殺, 則五黃在中, 又屬何卦, 又何者宗廟爻耶? 彼其所謂四利星, 又何所據耶? 故凡爲三元之說者, 夢也。 釣宮、替宮、蓋宮四利者, 又夢中說夢者也。 其所謂紫白碧黃綠黑者, 皆無說之說也。 其暗建的殺, 皆是類也。 其超神接氣者, 又遁甲之近似, 然亦屋上架屋者也。 然則世人但見所用者, 縱橫十五數, 疑其爲《河圖》、《洛書》之遺文, 未知其謬, 望風而尊信之, 故不得無言。" 臣等謹按, 太歲壓本命之說, 蓋以所葬之日, 入中宮順飛行九宮, 取本年太歲所到之宮住, 却以六十甲子偏數之, 如其家有本命與太歲同宮者, 爲太歲壓本命, 其人宜避之。 臣等竊謂, 若有人儻犯此, 則一歲之內, 無日無之, 故擇太歲之不壓本命者難矣。 古之人, 葬期多不過七月, 且漢、唐諸君, 未有一二年未葬者, 不用此法明矣。 此乃釣宮之遺法, 蔡成禹辨之詳矣。
論葬犯凶日、橫看圖及亡人運、六輪等法之妄。 宋魯珍 《克擇通書》云: "按諸曆書, 以葬日犯天呑、天建、天嚇, 損宅長, 月呑, 損長子、長孫。’ 今參證正、四、七、十月, 天德與天呑同日, 又獄鑰吉星, 與天建同日, 又與相日同, 相日與天嚇同, 月宮與月呑同。 諸曆書云大吉, 何例作凶日乎? 大葬日乃前賢所說吉辰, 屢試無虞。 惟通人不拘, 豈可爲其惑焉?" 曾文展云: "若更看亡人命時, 却是不曾死也。 人命旣亡, 又看何命? 亦不必靑龍、白虎、天剛、河魁, 入塚不入塚, 此皆誑惑之說, 達理君子宜更詳之。 又古曆亡運, 共有一十八條, 推詳吉凶, 互有得失, 難於全用。 今世葬師, 或論五音, 全於亡命, 然人死安有命也?" 楊筠松云: "亡人命運, 有多般不合也。" 蘇粹明 《地理指南》云: "不用行年泥六輪。" 注云: "時師多依六輪年月使用, 多見人遇大小火年月葬者, 反獲其吉; 主大小水年月葬者, 反遇其害。 以此推之, 則六輪之不足憑也如此, 豈可獨泥哉?" 宋魯珍 《克擇通書》內六輪注云: "其實人之生死有時, 子孫之富貴有分, 豈容擇日而死? 姑存此例以備用耳。" 臣等謹按, 六輪法大火、小火、小金之說, 與夫《龍子經》血光、火車、死敗、漂蓬等龍, 《甲地宿經》地凶、地敗、地鬼、地禍、地傷、地刦等星及諸曆內魂入墓、葬年月魂入墓、亡人執印入墓、四大魂入墓, 猪頭亡運、鬼谷子亡運、羅凶運等法, 擇年擇月, 皆以亡人歲數行年推之, 則人旣死也, 更看何命? 死亡者, 未聞擇日而死也。 自漢以來, 以日易月之說興, 而雖以天子之貴, 西漢 高祖, 五月丙寅葬, 五月寅日, 乃橫看圖之驛馬呑、驃騎呑、土禁等日也。 惠帝, 九月辛丑葬, 九月丑日, 乃橫看圖之天魂、驛馬呑、驃騎呑等日也。 文帝年至四十六, 六月乙巳葬, 年是小火、地鬼、遷移, 日犯天呑、地魂也。 景帝年四十八, 二月癸酉葬, 月犯重遷。 武帝年七十一, 三月甲申葬, 年犯重喪, 月犯重遷地凶。 昭帝年二十二, 六月壬申葬, 年犯小火、遷移, 月犯重遷, 六月之申日, 乃橫看圖之天嚇、天建、地建等日也。 宣帝, 正月辛丑葬, 月犯重賻, 正月之丑日, 乃橫看圖之天嚇、地建、地嚇等日也。 元帝年四十三, 七月葬, 年犯大火、遷移, 月犯重遷也。 成帝年四十六, 四月己卯葬, 年犯小火、地鬼,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東漢 光武, 三月丁卯葬, 爲犯地中、白虎、天禁等日也。 明帝年四十八, 八月壬戌葬, 月犯重遷, 日犯地中、白虎也。 章帝年三十三, 三月癸卯葬, 月犯重遷, 日犯地中、白虎、天禁等日也。 順帝年三十, 九月丙午葬, 年犯小金、地刦, 月犯重賻也。 魏 武王, 二月丁卯葬, 爲犯天皇、人皇、人建、天禁等日也。 文帝年四十, 六月戊寅葬, 年犯小火、地刦、遷移, 月犯重遷, 日犯地皇、土禁也。 明帝年三十五, 二月癸丑葬, 年犯重喪, 月犯重賻, 日犯天嚇、地嚇、地魂也。 晋 明帝年二十七, 九月辛丑葬, 年犯小金、地禍, 日犯天魂、驛馬呑、驃騎呑也。 成帝年二十八, 七月丙辰葬, 年犯小火、遷移、地禍, 月犯重賻, 七月丙寅, 乃爲月呑。 穆帝年十九, 七月戊午葬, 年犯小火、地傷、遷移,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孝武帝年三十五, 十月甲申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天建、八座、地中、白虎、土禁也。 安帝年三十七, 明年正月庚申葬, 年犯地火、遷移, 月犯重遷, 日犯地中雌、重賻也。 宋 武帝年六十, 七月己酉葬, 年犯地刦, 日犯地呑、天禁也。 文帝年四十六, 三月癸巳葬, 年犯小火、地鬼、遷移, 日犯天嚇、天呑、地皇也。 孝武帝年三十五, 七月丙午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地鬼、月呑也。 明帝年三十四, 五月戊寅葬, 年犯大火、地敗, 月犯重遷, 日犯驛馬呑、驃騎呑、土禁也。 齊 高祖年五十六, 四月丙午葬, 年犯小火、地鬼、重喪, 日犯地呑、驛馬呑、驃騎呑、天禁也。 武帝年五十四, 八月丙寅葬, 年犯小金、地敗, 月犯重賻, 日犯天建、天魂也。 唐 高祖年七十一, 十月庚寅葬, 年犯地凶, 月犯重賻, 日犯天嚇、天呑也。 太宗年五十二, 八月庚寅葬, 年犯大火、遷移, 日犯天建、地中雌、天魂也。 高宗年五十六, 次年八月庚寅葬, 年犯地鬼、重喪, 月犯重賻, 日犯天建、地中雌、天魂也。 中宗年五十五, 十一月己酉葬, 年犯遷移, 日犯地皇、地呑、天魂、八座。 睿宗年五十五, 十月庚午葬, 年犯遷移, 月犯重賻, 日犯地中雌、月呑也。 玄宗年七十八, 次年三月辛酉葬, 犯地呑、地中雌、驛馬呑、驃騎呑等日也。 右中、睿、玄三宗, 俱犯小火也。 肅宗年五十二, 次年三月庚午葬, 月犯重賻。 代宗年五十四, 十月己酉葬, 年犯地敗, 月犯重遷, 日犯地魂也。 穆宗年三十, 十一月葬, 年犯上元、血光也。 大宋 眞宗年五十五, 十月己酉葬, 年犯小火、遷移, 月犯重賻, 日犯地魂也。 神宗年三十八, 十月乙酉葬, 年犯重喪, 月犯重遷, 日犯地魂、天呑也。 然則擇年、擇月、擇日之說, 蓋出於巫史亦明矣, 其《六輪》、《龍子》、《地甲宿經》等橫看圖之說皆妄也。 至若山頭白之爲釣宮, 周堂行年正衝、同旬衝、年月日、八座之法, 皆不可信也類如此。
上命模印頒行。 初, 時俗信用葬師之說, 子孫多者, 避忌尤甚, 至有十年未葬。 上王甚惡之, 太祖之喪, 依古制五月而葬, 命以吾等辨葬說之謬, 士大夫之葬, 斷用三月, 葬日只用葬通日, 又令中外攸司, 察過期不葬者。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