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31권, 태종 16년 4월 2일 甲子 1/2 기사 /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문성부원군 유양의 졸기
국역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이 졸(卒)하였다. 유양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문화(文化) 사람이었다. 밀직사(密直使) 유계조(柳繼祖)의 아들로서 그 선대에 유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호(號)를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내렸다. 자손이 대대로 달관(達官)이 되었고, 유양도 젊어서부터 탁락(卓犖)132) 하여 뭇사람과 달랐으므로 제배(儕輩)들이 꺼리었다.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에 나이 28세로서 호군(護軍)을 사직하고, 부시(赴試)하여 제1등으로 급제하고, 여러 번 옮겨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겨울에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을 따라서 연경(燕京)으로 갔다가 때마침 참소하는 사람이 말을 만들어 중국에 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유양이 일에 따라서 변명하여 밝혔었다. 국초에는 상의 중추(商議中樞)로 승진하였으니, 태조(太祖)가 유양을 오랫동안 잠저(潛邸)에 모셨다고 하여 원종 공신(元從功臣)에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병자년(丙子年)에 나가서 계림(鷄林)의 윤(尹)이 되고, 정축년(丁丑年)에 왜구(倭寇)가 크게 떨치니, 태조(太祖)가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보내어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왜구(倭寇)가 마침 이르매 유양이 변장(邊將)과 함께 공격하니, 왜적의 형세가 궁해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변장(邊將)이 허락하였으나 적은 아직 허실(虛實)을 엿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유양이 궁시(弓矢)를 풀어 놓고 적의 진중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니, 적이 이를 믿고 악수(握手)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좋은 칼을 주었다. 유양이 즉시 항복한 왜인의 사자(使者) 10인을 데리고 김사형(金士衡)의 막사(幕舍)로 가니, 김사형이 왜선(倭船)을 울산포(蔚山浦)에 머물러 두고, 바로 왜사(倭使)를 조정에 보내었다. 명하여 양미(糧米)를 후하게 주어 그들을 위로하여 회유하게 하고, 비밀히 변장(邊將)을 시켜 그들을 섬멸하게 하였는데, 병선(兵船)을 징발하여 아직 모으지도 아니하여, 적이 비어(飛語)133) 를 듣고 마침내 울산 군사(蔚山郡事) 이은(李殷)과 아전[使] 1명, 기생 1명을 붙잡아서 갔다. 정권을 잡은 자가 유양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핵문(劾問)하게 하니, 태조가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명하여 합산(合山)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정권을 잡은 자가 분을 풀 길이 없어 다시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옥(獄)에 갇힌 지 여러 달 동안에 고문이 갖추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그가 굴복당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틈을 타서 태조에게 극언(極言)하니, 감오(感悟)하여 놓아 주고 나주(羅州)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무인년(戊寅年)에 기용하여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삼았는데, 백성이 모두 그를 생각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임금이 즉위하자,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를 제수하고, 신사년(辛巳年)에 추충익대 좌명공신(推忠翼戴佐命功臣)이라 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두루 요질(要秩)134) 을 거쳐, 을미년(乙未年)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얼마 아니 되어 병으로 사직하니,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공신(功臣)의 호(號)에다 동덕(同德)이란 두 글자를 더하고 집으로 물러나갔다. 이 때에 이르러 등창[疽]을 앓다가 졸(卒)하니, 나이 62세였다.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대언(代言) 이종선(李種善)을 보내어 집에 제사를 내리고, 치부(致賻)하기를 더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돌보았다. 유양의 천성은 고항(高亢)135) 하고 강조(剛躁)136) 하여, 정사를 보는 데 대체(大體)에 힘써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에 궤변(詭辯)을 쓰거나 남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했다. 아들은 5명인데, 유좌(柳佐)·유근(柳謹)·유경생(柳京生)·유강생(柳江生)·유한생(柳漢生)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1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132] 탁락(卓犖) : 남보다 훨씬 뛰어남.
- [註 133] 비어(飛語) : 뜬소문.
- [註 134] 요질(要秩) : 높은 관직.
- [註 135] 고항(高亢) : 뜻이 높음.
- [註 136] 강조(剛躁) : 굳세고 조급함.
원문
○甲子/文城府院君 柳亮卒。 亮字明仲, 文化人也, 密直使繼祖之子。 其先有車達者, 有功於麗祖統合之時, 賜號三韓功臣, 子孫世爲達官。 亮少卓犖不群, 爲儕輩所憚。 洪武壬戌, 年二十八, 以護軍辭職赴試, 中第一, 累遷判宗簿寺事。 己巳冬, 隨順安君 王昉赴京, 會有讒人造言, 交構於上國者, 亮隨事辨析。 國初, (陛)〔陞〕 商議中樞, 太祖以亮久侍潛邸, 命參元從功臣。 丙子出尹雞林。 丁丑倭虜大熾, 太祖遣右政丞金士衡往討之。 會倭寇適至, 亮與邊將共擊, 賊勢窘欲降, 邊將許之, 賊尙覘虛實, 逡巡不決。 亮解弓矢, 馳入賊中, 以示無他, 賊信之, 握手開懷, 贈之良劍。 亮卽率降倭使者十人, 赴士衡幕, 士衡留置倭船于蔚山浦, 乃送倭使于朝, 命厚贈糧米慰諭之, 密使邊將殲之。 徵兵船未集, 賊聞飛語, 遂執蔚山郡事李殷吏一妓一以去。 柄用者謂亮嗾之, 使憲司劾問, 太祖命勿治, 止配合山。 柄用者憤無所洩, 復請逮問, 繫獄數月, 拷掠備至。 我殿下愍其見屈, 乘間極言, 太祖感悟得釋, 命於羅州安置。 戊寅起爲江陵大都護府使, 民皆懷之, 爲立生祠。 上卽位, 授參知三軍府事。 辛巳賜號推忠翼戴佐命功臣, 自是歷遷要秩。 乙未, 拜右議政, 未幾以疾辭。 以文城府院君, 加功臣號同德二字就第。 至是病疽卒, 年六十二。 訃聞, 上甚悼, 輟朝三日, 遣代言李種善, 賜祭于第, 致賻有加, 官庀葬事。 亮性高亢剛躁, 爲政務大體, 不喜變更, 是是非非, 不爲詭隨。 諡曰忠景。 子五人, 佐、謹、京生、江生、漢生。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1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태종 16년 (1416) 4월 2일
국역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이 졸(卒)하였다. 유양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문화(文化) 사람이었다. 밀직사(密直使) 유계조(柳繼祖)의 아들로서 그 선대에 유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호(號)를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내렸다. 자손이 대대로 달관(達官)이 되었고, 유양도 젊어서부터 탁락(卓犖)132) 하여 뭇사람과 달랐으므로 제배(儕輩)들이 꺼리었다.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에 나이 28세로서 호군(護軍)을 사직하고, 부시(赴試)하여 제1등으로 급제하고, 여러 번 옮겨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겨울에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을 따라서 연경(燕京)으로 갔다가 때마침 참소하는 사람이 말을 만들어 중국에 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유양이 일에 따라서 변명하여 밝혔었다. 국초에는 상의 중추(商議中樞)로 승진하였으니, 태조(太祖)가 유양을 오랫동안 잠저(潛邸)에 모셨다고 하여 원종 공신(元從功臣)에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병자년(丙子年)에 나가서 계림(鷄林)의 윤(尹)이 되고, 정축년(丁丑年)에 왜구(倭寇)가 크게 떨치니, 태조(太祖)가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보내어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왜구(倭寇)가 마침 이르매 유양이 변장(邊將)과 함께 공격하니, 왜적의 형세가 궁해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변장(邊將)이 허락하였으나 적은 아직 허실(虛實)을 엿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유양이 궁시(弓矢)를 풀어 놓고 적의 진중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니, 적이 이를 믿고 악수(握手)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좋은 칼을 주었다. 유양이 즉시 항복한 왜인의 사자(使者) 10인을 데리고 김사형(金士衡)의 막사(幕舍)로 가니, 김사형이 왜선(倭船)을 울산포(蔚山浦)에 머물러 두고, 바로 왜사(倭使)를 조정에 보내었다. 명하여 양미(糧米)를 후하게 주어 그들을 위로하여 회유하게 하고, 비밀히 변장(邊將)을 시켜 그들을 섬멸하게 하였는데, 병선(兵船)을 징발하여 아직 모으지도 아니하여, 적이 비어(飛語)133) 를 듣고 마침내 울산 군사(蔚山郡事) 이은(李殷)과 아전[使] 1명, 기생 1명을 붙잡아서 갔다. 정권을 잡은 자가 유양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핵문(劾問)하게 하니, 태조가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명하여 합산(合山)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정권을 잡은 자가 분을 풀 길이 없어 다시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옥(獄)에 갇힌 지 여러 달 동안에 고문이 갖추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그가 굴복당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틈을 타서 태조에게 극언(極言)하니, 감오(感悟)하여 놓아 주고 나주(羅州)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무인년(戊寅年)에 기용하여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삼았는데, 백성이 모두 그를 생각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임금이 즉위하자,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를 제수하고, 신사년(辛巳年)에 추충익대 좌명공신(推忠翼戴佐命功臣)이라 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두루 요질(要秩)134) 을 거쳐, 을미년(乙未年)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얼마 아니 되어 병으로 사직하니,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공신(功臣)의 호(號)에다 동덕(同德)이란 두 글자를 더하고 집으로 물러나갔다. 이 때에 이르러 등창[疽]을 앓다가 졸(卒)하니, 나이 62세였다.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대언(代言) 이종선(李種善)을 보내어 집에 제사를 내리고, 치부(致賻)하기를 더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돌보았다. 유양의 천성은 고항(高亢)135) 하고 강조(剛躁)136) 하여, 정사를 보는 데 대체(大體)에 힘써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에 궤변(詭辯)을 쓰거나 남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했다. 아들은 5명인데, 유좌(柳佐)·유근(柳謹)·유경생(柳京生)·유강생(柳江生)·유한생(柳漢生)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1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132] 탁락(卓犖) : 남보다 훨씬 뛰어남.
- [註 133] 비어(飛語) : 뜬소문.
- [註 134] 요질(要秩) : 높은 관직.
- [註 135] 고항(高亢) : 뜻이 높음.
- [註 136] 강조(剛躁) : 굳세고 조급함.
원문
○甲子/文城府院君 柳亮卒。 亮字明仲, 文化人也, 密直使繼祖之子。 其先有車達者, 有功於麗祖統合之時, 賜號三韓功臣, 子孫世爲達官。 亮少卓犖不群, 爲儕輩所憚。 洪武壬戌, 年二十八, 以護軍辭職赴試, 中第一, 累遷判宗簿寺事。 己巳冬, 隨順安君 王昉赴京, 會有讒人造言, 交構於上國者, 亮隨事辨析。 國初, (陛)〔陞〕 商議中樞, 太祖以亮久侍潛邸, 命參元從功臣。 丙子出尹雞林。 丁丑倭虜大熾, 太祖遣右政丞金士衡往討之。 會倭寇適至, 亮與邊將共擊, 賊勢窘欲降, 邊將許之, 賊尙覘虛實, 逡巡不決。 亮解弓矢, 馳入賊中, 以示無他, 賊信之, 握手開懷, 贈之良劍。 亮卽率降倭使者十人, 赴士衡幕, 士衡留置倭船于蔚山浦, 乃送倭使于朝, 命厚贈糧米慰諭之, 密使邊將殲之。 徵兵船未集, 賊聞飛語, 遂執蔚山郡事李殷吏一妓一以去。 柄用者謂亮嗾之, 使憲司劾問, 太祖命勿治, 止配合山。 柄用者憤無所洩, 復請逮問, 繫獄數月, 拷掠備至。 我殿下愍其見屈, 乘間極言, 太祖感悟得釋, 命於羅州安置。 戊寅起爲江陵大都護府使, 民皆懷之, 爲立生祠。 上卽位, 授參知三軍府事。 辛巳賜號推忠翼戴佐命功臣, 自是歷遷要秩。 乙未, 拜右議政, 未幾以疾辭。 以文城府院君, 加功臣號同德二字就第。 至是病疽卒, 年六十二。 訃聞, 上甚悼, 輟朝三日, 遣代言李種善, 賜祭于第, 致賻有加, 官庀葬事。 亮性高亢剛躁, 爲政務大體, 不喜變更, 是是非非, 不爲詭隨。 諡曰忠景。 子五人, 佐、謹、京生、江生、漢生。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1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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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6년 (1416)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