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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4월 6일 辛丑 9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

사병(私兵)을 혁파하였다.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함이 있어야 하고,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주장하고 통속함이 없으면, 이것은 태아(太阿)040) 를 거꾸로 쥐고 남에게 자루를 주는 것과 같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각각 도당을 심어서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나뉘어져서, 서로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이루게 됩니다. 동기(同氣) 간에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이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비롯되니, 이것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집에 병기(兵器)를 감추지 않았다.’ 하였으니,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이것이 인군을 협박하는 것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사병(私兵)이 있으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僭濫)하여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남기어 후환(後患)을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던 처음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능히 공신의 병권을 해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였으니, 후세의 규범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노(魯)나라삼가(三家)041)진(晉)나라육경(六卿)042)한(漢)나라 말년에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난 것과 당(唐)나라 말년에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것이 모두 사병을 길러서 난을 꾸민 때문이었으니, 또한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043) 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혁명(革命)하는 초기에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해야 합니다. 훈신(勳臣)·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맡게 하여 창졸(倉卒)의 일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을 다 없애지 못하였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난(亂)을 선동하기를 꾀하여 화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인도하고 도와주어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병을 두는 것을 오히려 전과 같이 하고 인순(因循)하여 해제하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이미 일찍이 글장을 올려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다시 군사를 맡기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소장(蕭墻)의 화가 지친(至親)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亂)만 일으키고 그 이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이제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의 군사를 지금도 역시 파하지 않으니, 장래의 화를 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외방 각도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혹은 시위(侍衛)라 칭하고, 혹은 별패(別牌), 사사 반당(伴儻)이라 칭하여, 번거롭게 번상(番上)하고 소란하게 징발(徵發)해서 그 폐단이 심히 많으며, 배종(陪從)이 많고 전렵(田獵)이 잦아서 그 수고로움이 또한 지극합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비와 눈을 마구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숙직하므로, 군중의 마음이 원망하고 탄식하니, 심히 민망한 일입니다. 지금의 큰 폐단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모조리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공가(公家)의 군사를 삼아서,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을 무겁게 하고, 인심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문(私門)의 숙직은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고, 조회하는 길에도 사사 반당(伴儻)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근수(根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예전의 집에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고, 후일에 서로 의심하여 난을 꾸미는 폐단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저(李佇)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歷史)

  • [註 040]
    태아(太阿) : 옛날 중국의 보검(寶劍)의 하나.
  • [註 041]
    삼가(三家)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권신(權臣)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계손씨(季孫氏).
  • [註 042]
    육경(六卿)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권세를 잡았던 6족(族) 출신의 6경(卿). 곧 6족은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知氏)·조씨(趙氏)·위씨(魏氏)·한씨(韓氏)를 말함.
  • [註 043]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 : 조선조 태조(太祖) 원년에 의흥 친군(義興親軍)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태종(太宗) 3년에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세조(世祖) 12년에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였음.

○罷私兵。 司憲府兼大司憲權近、門下府左散騎金若采等交章上疏曰:

兵權, 國家之大柄, 當有統屬, 不可散主。 散主無統, 是猶太阿倒持, 授人以柄, 難可以制。 故典兵者衆, 各樹徒黨, 其心必異, 其勢必分, 交相猜貳, 以成禍亂。 同氣之相殘, 功臣之不保, 恒由於此, 古今之通患也。 故孔子曰: "古者家不藏甲", 言無私兵也; 《禮記》曰: "兵革藏於私家, 非禮也。 是謂脅君", 言人臣而有私兵, 則必至於强僭, 以脅其君也。 聖人立法垂訓, 以防後患, 可謂至矣。 昔 太祖卽位之初, 從容談笑, 能解功臣兵權, 使得保全, 可謂後世之法矣。 之三家, 之六卿, 末之群雄竝起, 季之藩鎭跋扈, 皆蓄私兵, 以構其亂, 亦可爲後世之戒矣。 惟我太上王, 開國之初, 特置義興三軍府, 專掌兵權, 規模宏遠, 而時議者以爲: "革命之初, 人心未定, 當備不虞之變。 宜令勳親, 各典私兵, 以應倉卒。" 由是私兵未能盡除, 而典兵者反謀扇亂, 禍在不測, 幸賴上天啓佑殿下, 靖亂定社。 式至今日, 私兵之置, 尙復如古, 因循未除。 臺諫已嘗上章請罷, 殿下以宗親勳臣, 可保無他, 使復典之, 未幾, 蕭墻之禍, 發於至親。 由是觀之, 私兵之置, 徒以生亂, 未見其益, 臺諫之言, 今已驗矣。 然私門之兵, 今亦未罷, 將來之禍, 誠不可不慮也。 又況外方各道軍馬, 分屬諸節制使, 或稱侍衛, 或稱別牌及私伴儻, 番上之煩, 徵發之擾, 其弊甚多, 陪從之衆, 田獵之數, 其勞亦極。 人飢馬困, 暴露雨雪, 直宿私門, 衆心怨咨, 甚可憫也。 方今巨弊, 莫甚於此。 願自今, 悉罷各道留京諸節制使, 以京外軍馬, 盡屬三軍府, 以爲公家之兵, 以立體統, 以重國柄, 以攝人心。 除兩殿宿衛外, 私門直宿, 一皆禁斷; 朝路毋令私伴, 持兵根隨, 以應古者家不藏兵之意, 以防後日交猜搆亂之端, 國家幸甚。

疏上, 上與世子議之, 卽令施行。 是日, 放諸節制使所領軍馬, 悉還其家。 李佇獵于平州未還, 三軍府遣人于, 使之速還。 居易父子與失兵權者皆怏怏, 日夜會聚, 多憤怨。


  •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