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5권, 태조 3년 1월 28일 戊辰 2/2 기사 /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곡산 부사 전이가 곡산 등의 요충지에 병기와 군량을 저장토록 청하니 윤허하다
국역
곡산 부사(谷山府使) 전이(田易)가 도평의사사에 상서(上書)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장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對備)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상전(常典)입니다. 그러나 군사가 험지(險地)를 점거하지 않으면 나의 형체(形體)를 감출 수가 없으며, 곡식을 만약 밖에 쌓아 둔[露積]다면 다만 도적의 도움이 될 뿐이니, 반드시 양식을 견고한 성(城)에 쌓아 두고, 진(鎭)을 요해처(要害處)에 설치한 연후에야, 편안히 있는 아군(我軍)으로써 멀리서 온 피로한 적군을 기다리게 되고, 배부른 아군(我軍)으로써 굶주린 적군을 기다리게 되어, 능히 적군의 생명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매, 연수(延壽)와 혜진(惠眞)007) 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니, 태종(太宗)이 장신(將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연수(延壽)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성(城)을 연(連)하여 보루(堡壘)로 삼고, 험지(險地)에 웅거하여 양식을 먹으면서,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였습니다. 연수와 혜진이 장차 출발하려 하매, 대로(對盧)008) 란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한 이가 있었는데, 연수에게 이르기를, ‘진왕(秦王)009) 은 일세(一世)의 뛰어난 인재(人才)로서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주둔하고 싸우지 아니하며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고, 기병(奇兵)을 나누어 그 양식 운반하는 길을 끊어서, 양식이 이미 다 되면 싸우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며, 돌아가고자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그제야 이길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아니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갔다가 크게 패하여 항복했으니, 대개 대로(對盧)의 꾀는 바로 태종이 이른 바 가장 좋은 계책인 것입니다. 연수로 하여금 그 꾀를 따랐더라면, 태종의 군사 돌이킨 것이 풀이 마르고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구원하는 군사가 비록 밖에서 패전했지마는, 안시(安市) 한 성(城)만이 홀로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은 까닭으로, 태종이 요좌(遼左)010) 에 추위가 일찍 온다는 이유로써 성 아래에서 군대의 위엄을 과시(誇示)하고 돌아갔으니, 대저 태종의 영명(英明) 과단(果斷)함과 이적(李勣)의 용기와 지혜로써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능히 한 성을 공격해 빼앗지 못한 것은, 어찌 성(城)이 험준하고 양식이 많으며, 군사가 용감하여 굳게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국가에서 제도를 창설하고 법을 만들어, 자세한 부분을 다 구비하여 군사를 길러 적군에 대비(對備)하는 방법까지 강구(講究)하기를 더욱 상세히 했는데도, 양식을 저장하는 장소와 군대를 주둔시키는 땅은 대개 모두 그전대로 그냥 있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이 적은 견문(見聞)과 얕은 식견(識見)으로써 수다스럽게 임금의 귀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에 손실(損實)을 답험(踏驗)하는 일로 인하여 곡산(谷山) 고을의 북쪽 마을에 가서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산천이 험준하고 막혔으며, 가운데에 산성(山城)이 있는데, 군량을 저장할 만하고, 병기(兵器)를 간수할 만하며, 동쪽으로는 화령(和寧)과의 거리가 1백 50리이며, 서쪽으로는 성주(成州)와 연(連)하기를 3, 4식(息)의 노정(路程)에 불과하니, 실로 동북면·서북면 양면(兩面)을 왕래하는 요충(要衝)인 것입니다. 또 내가 듣건대, 방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훈계에 전하는 바이며, 상시 도적이 이르는 것과 같이 함은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이니, 만일에 안시성(安市城)의 공격당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대로(對盧)의 계책과 같게 해야만 만전(萬全)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평소부터 군량의 저장이 없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는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곡산(谷山) 고을과 이천(伊川)·협계(俠溪)·수안(遂安)·삼등(三登)·성주(成州)·양암(陽巖)·수덕(樹德) 등 8읍(邑)의 전지(田地)는 모두 군량(軍糧)에 속하게 하고서, 해마다 8, 9월에 군자감(軍資監)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와서 수세(收稅)하여, 모두 곡산 고을의 산성(山城)에 들어오게 한다면, 3, 4년이 되지 않아서 수만 명 군사의 수년(數年) 먹을 식량을 저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 군대를 사용[用兵]할 적에는 정병(精兵) 수만 명을 뽑아서 산성(山城) 아래에 감추어 두고, 그 곡식을 먹고 사기(事機)를 기다리게 했다가, 만약 우리 강토에 함부로 침입하는 자가 있으면, 양암(陽巖)·수덕(樹德)에서 길[路]을 취(取)하여 옛날의 맹주(孟州)·덕주(德州)를 경유하여 군사들의 입에다 하무를 물리[銜枚]고 빨리 달려 뜻밖에 나가서, 혹은 그 뒤를 공격하고, 혹은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게 할 것이니, 이것이 용병(用兵)의 한 가지 기계(奇計)이며, 혹은 험지를 웅거하고 양식을 먹으면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誇示)하여 평양(平壤)과 화령(和寧)을 성원(聲援)하는 것도 또한 옳겠습니다."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에게 전해 아뢰니, 임금이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겨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 [註 007] 혜진(惠眞) : 고구려의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
- [註 008] 대로(對盧) : 고구려의 관직 이름인데, 여기서는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를 이른 것임.
- [註 009] 진왕(秦王) : 당 태종(唐太宗).
- [註 010] 요좌(遼左) : 요동(遼東).
원문
○谷山府使田易上書于都評議使司曰:
竊聞鍊兵積穀, 以備不虞, 守國之常典也。 然而兵非據險, 不可以藏我之形, 穀若露積, 適足爲寇之資。 必也積糧於堅城, 置鎭於要害, 然後以逸待勞, 以飽待飢, 而能制敵之命也。 昔唐 太宗攻安市城, 延壽、惠眞帥兵救之。 太宗謂將臣曰: "今爲延壽策, 引兵直前, 連城爲壘, 據險食粟, 坐困吾軍, 上策也。" 延壽、惠眞將發, 有對盧者, 年老習事, 謂之曰: "秦王, 命世之才, 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運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延壽不從, 引兵直前, 大敗而降。 夫對盧之謀, 正太宗所謂上策也。 使延壽從之, 則太宗之班師, 不待草枯氷凍矣。 救兵雖敗於外, 安市一城, 獨堅守不下, 故太宗托以遼左早寒, 耀兵城下而歸。 夫以太宗之英果、李勣之勇智, 擧天下之師, 而不能攻取一城者, 豈非以城險而糧多, 兵精而固守歟! 今我國家創制立法, 纖悉備具, 至於養兵備敵之方, 講之尤詳, 而貯糧之所、鎭戍之地, 大率皆仍其舊。 此愚所以將寡聞淺見, 喋喋然以塵淸聽也。 前年冬, 因踏驗損實, 到州之北村, 觀其形勢, 山川險塞, 中有山城, 可儲資糧, 可藏兵甲。 東距和寧百五十里, 西連成州不過三四息程, 實東西北兩面往來之要衝也。 且吾聞之, 有備無患, 聖訓所傳; 若寇至, 兵家之勝。 萬一有安市之被攻, 當如對盧之策, 然後可以萬全而取勝。 若非畜積之有素, 烏能致此! 愚竊以謂州及伊川、俠溪、遂安、三登、成州、陽巖、樹德等八邑之田, 悉皆屬于軍糧。 每年八九月, 令軍資監員, 親到收稅, 皆入州之山城, 則不三四年而可畜數萬之衆, 數年之食矣。 當其用兵, 選精兵數萬, 藏於山城之下, 仰食其穀, 以待事機, 若有闌入我疆者, 則取路陽巖、樹德, 經由古孟、德州, 銜枚疾趨, 出其不意, 或擊其背, 或絶糧道, 此用兵之一奇也。 其或據險食粟, 以耀兵威, 爲平壤、和寧之聲援, 亦可也。
使司轉聞于上, 上嘉之, 命許施行。
태조 3년 (1394) 1월 28일
태조실록5권, 태조 3년 1월 28일 戊辰 2/2 기사 /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곡산 부사 전이가 곡산 등의 요충지에 병기와 군량을 저장토록 청하니 윤허하다
국역
곡산 부사(谷山府使) 전이(田易)가 도평의사사에 상서(上書)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장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對備)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상전(常典)입니다. 그러나 군사가 험지(險地)를 점거하지 않으면 나의 형체(形體)를 감출 수가 없으며, 곡식을 만약 밖에 쌓아 둔[露積]다면 다만 도적의 도움이 될 뿐이니, 반드시 양식을 견고한 성(城)에 쌓아 두고, 진(鎭)을 요해처(要害處)에 설치한 연후에야, 편안히 있는 아군(我軍)으로써 멀리서 온 피로한 적군을 기다리게 되고, 배부른 아군(我軍)으로써 굶주린 적군을 기다리게 되어, 능히 적군의 생명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매, 연수(延壽)와 혜진(惠眞)007) 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니, 태종(太宗)이 장신(將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연수(延壽)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성(城)을 연(連)하여 보루(堡壘)로 삼고, 험지(險地)에 웅거하여 양식을 먹으면서,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였습니다. 연수와 혜진이 장차 출발하려 하매, 대로(對盧)008) 란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한 이가 있었는데, 연수에게 이르기를, ‘진왕(秦王)009) 은 일세(一世)의 뛰어난 인재(人才)로서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주둔하고 싸우지 아니하며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고, 기병(奇兵)을 나누어 그 양식 운반하는 길을 끊어서, 양식이 이미 다 되면 싸우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며, 돌아가고자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그제야 이길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아니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갔다가 크게 패하여 항복했으니, 대개 대로(對盧)의 꾀는 바로 태종이 이른 바 가장 좋은 계책인 것입니다. 연수로 하여금 그 꾀를 따랐더라면, 태종의 군사 돌이킨 것이 풀이 마르고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구원하는 군사가 비록 밖에서 패전했지마는, 안시(安市) 한 성(城)만이 홀로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은 까닭으로, 태종이 요좌(遼左)010) 에 추위가 일찍 온다는 이유로써 성 아래에서 군대의 위엄을 과시(誇示)하고 돌아갔으니, 대저 태종의 영명(英明) 과단(果斷)함과 이적(李勣)의 용기와 지혜로써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능히 한 성을 공격해 빼앗지 못한 것은, 어찌 성(城)이 험준하고 양식이 많으며, 군사가 용감하여 굳게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국가에서 제도를 창설하고 법을 만들어, 자세한 부분을 다 구비하여 군사를 길러 적군에 대비(對備)하는 방법까지 강구(講究)하기를 더욱 상세히 했는데도, 양식을 저장하는 장소와 군대를 주둔시키는 땅은 대개 모두 그전대로 그냥 있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이 적은 견문(見聞)과 얕은 식견(識見)으로써 수다스럽게 임금의 귀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에 손실(損實)을 답험(踏驗)하는 일로 인하여 곡산(谷山) 고을의 북쪽 마을에 가서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산천이 험준하고 막혔으며, 가운데에 산성(山城)이 있는데, 군량을 저장할 만하고, 병기(兵器)를 간수할 만하며, 동쪽으로는 화령(和寧)과의 거리가 1백 50리이며, 서쪽으로는 성주(成州)와 연(連)하기를 3, 4식(息)의 노정(路程)에 불과하니, 실로 동북면·서북면 양면(兩面)을 왕래하는 요충(要衝)인 것입니다. 또 내가 듣건대, 방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훈계에 전하는 바이며, 상시 도적이 이르는 것과 같이 함은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이니, 만일에 안시성(安市城)의 공격당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대로(對盧)의 계책과 같게 해야만 만전(萬全)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평소부터 군량의 저장이 없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는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곡산(谷山) 고을과 이천(伊川)·협계(俠溪)·수안(遂安)·삼등(三登)·성주(成州)·양암(陽巖)·수덕(樹德) 등 8읍(邑)의 전지(田地)는 모두 군량(軍糧)에 속하게 하고서, 해마다 8, 9월에 군자감(軍資監)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와서 수세(收稅)하여, 모두 곡산 고을의 산성(山城)에 들어오게 한다면, 3, 4년이 되지 않아서 수만 명 군사의 수년(數年) 먹을 식량을 저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 군대를 사용[用兵]할 적에는 정병(精兵) 수만 명을 뽑아서 산성(山城) 아래에 감추어 두고, 그 곡식을 먹고 사기(事機)를 기다리게 했다가, 만약 우리 강토에 함부로 침입하는 자가 있으면, 양암(陽巖)·수덕(樹德)에서 길[路]을 취(取)하여 옛날의 맹주(孟州)·덕주(德州)를 경유하여 군사들의 입에다 하무를 물리[銜枚]고 빨리 달려 뜻밖에 나가서, 혹은 그 뒤를 공격하고, 혹은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게 할 것이니, 이것이 용병(用兵)의 한 가지 기계(奇計)이며, 혹은 험지를 웅거하고 양식을 먹으면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誇示)하여 평양(平壤)과 화령(和寧)을 성원(聲援)하는 것도 또한 옳겠습니다."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에게 전해 아뢰니, 임금이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겨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 [註 007] 혜진(惠眞) : 고구려의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
- [註 008] 대로(對盧) : 고구려의 관직 이름인데, 여기서는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를 이른 것임.
- [註 009] 진왕(秦王) : 당 태종(唐太宗).
- [註 010] 요좌(遼左) : 요동(遼東).
원문
○谷山府使田易上書于都評議使司曰:
竊聞鍊兵積穀, 以備不虞, 守國之常典也。 然而兵非據險, 不可以藏我之形, 穀若露積, 適足爲寇之資。 必也積糧於堅城, 置鎭於要害, 然後以逸待勞, 以飽待飢, 而能制敵之命也。 昔唐 太宗攻安市城, 延壽、惠眞帥兵救之。 太宗謂將臣曰: "今爲延壽策, 引兵直前, 連城爲壘, 據險食粟, 坐困吾軍, 上策也。" 延壽、惠眞將發, 有對盧者, 年老習事, 謂之曰: "秦王, 命世之才, 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運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延壽不從, 引兵直前, 大敗而降。 夫對盧之謀, 正太宗所謂上策也。 使延壽從之, 則太宗之班師, 不待草枯氷凍矣。 救兵雖敗於外, 安市一城, 獨堅守不下, 故太宗托以遼左早寒, 耀兵城下而歸。 夫以太宗之英果、李勣之勇智, 擧天下之師, 而不能攻取一城者, 豈非以城險而糧多, 兵精而固守歟! 今我國家創制立法, 纖悉備具, 至於養兵備敵之方, 講之尤詳, 而貯糧之所、鎭戍之地, 大率皆仍其舊。 此愚所以將寡聞淺見, 喋喋然以塵淸聽也。 前年冬, 因踏驗損實, 到州之北村, 觀其形勢, 山川險塞, 中有山城, 可儲資糧, 可藏兵甲。 東距和寧百五十里, 西連成州不過三四息程, 實東西北兩面往來之要衝也。 且吾聞之, 有備無患, 聖訓所傳; 若寇至, 兵家之勝。 萬一有安市之被攻, 當如對盧之策, 然後可以萬全而取勝。 若非畜積之有素, 烏能致此! 愚竊以謂州及伊川、俠溪、遂安、三登、成州、陽巖、樹德等八邑之田, 悉皆屬于軍糧。 每年八九月, 令軍資監員, 親到收稅, 皆入州之山城, 則不三四年而可畜數萬之衆, 數年之食矣。 當其用兵, 選精兵數萬, 藏於山城之下, 仰食其穀, 以待事機, 若有闌入我疆者, 則取路陽巖、樹德, 經由古孟、德州, 銜枚疾趨, 出其不意, 或擊其背, 或絶糧道, 此用兵之一奇也。 其或據險食粟, 以耀兵威, 爲平壤、和寧之聲援, 亦可也。
使司轉聞于上, 上嘉之, 命許施行。
원본
태조 3년 (1394) 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