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실록부록17권, 순종 19년 6월 11일 양력 5/6 기사 / 1926년 일본 대정(大正) 15년
순종 황제의 지문
국역
지문(誌文)에,
"아, 공경하는 우리 순종(純宗) 황제(皇帝)는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척(坧)이다. 자(字)는 군방(君邦)이요 호(號)는 정헌(正軒)이다.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의 적사(適嗣)이며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의 손자(孫子)이다. 어머니는 영의정(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신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閔氏)이다. 갑술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 묘시(卯時)에 제(帝)가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에서 탄생하셨으니 실로 태황제(太皇帝)가 왕위에 오른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서 궁인들이 영변군(寧邊郡)에 있는 묘향산(妙香山)과 연안(延安)에 있는 남대지(南大池)에 경건하게 기원을 드렸다. 여러 차례 기이한 길조가 있었는데, 머지않아 홍저(虹渚)의 경사가 있었다. 다음해 을해년(1875)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제(帝)는 제왕의 표상이 있었고 영웅 위걸의 모습이 준수하고 정연하였다. 이때에 청국 사신이 와서 절하고 우러러 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狠)하게 체구가 크고 한(狠)하게 뛰어나다.’ 이 말은 청(淸)나라의 방언인데 상등(上等)의 용모를 보고 칭찬한 것이다. 대개 체구가 크면 살이 수려하기 어렵고 수려하면 체구가 크기 어려운데, 이미 체구가 크면서도 살이 수려하니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는 어려서부터 지성(至性)이 있어서 태황제가 봉선(奉先)과 사친(事親)에 성효(誠孝)를 능히 다하자 제(帝)는 몸소 실천하는 교화(敎化)에 함육되어 모든 행동거지가 이미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君子) 같았다. 도(道)에 가까운 자질과 천성에 타고난 효(孝)를 행했다. 또한 가정 안의 일상적인 행동에 익숙하였는데 태황제와 태황후는 의방(義方)의 가르침에서 돈독하게 아낀다고 해서 가르침을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이에 덕을 기른 세자로서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임오년(1882)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드디어 관례(冠禮)를 행하고 이내 순명후(純明后)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추증된 영의정(領議政) 여은 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이시다. 명문에서 생장하여 부인의 법도를 모두 갖추었는데 제가 정도(正道)로서 가지런히 하였으며 화합하되 시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뜻을 다해 양전(兩殿)을 봉양(奉養)하였다. 양전은 이를 합당하게 여기고 기뻐하였다. 당시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장수하시고 강녕하시니 궁궐에 3대가 살면서 기뻐하고 흡족해하였다. 덩달아서 풍년(豐年)이 들었고 백성(百姓)은 풍족하며 팔도(八道)가 또한 편안해졌다. 무자년(1888)에 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태황(太皇) 및 태황후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정청(庭請)하였으며, 경인년(1890)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임진년(1892)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갑오년(1894)에 이르러 나라에 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시국이 크게 바뀌었다. 태황제는 광운(廣運)을 크게 헤아리고 치제(治制)를 고쳤다. 임금의 명준한 계책을 여러 신하들이 혹 미치지 못했으나 오직 제만은 은밀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을미년(1895)에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가 돌아가셨다. 제는 참혹한 화란에 해통해 하시며 지극한 한(恨)을 품은 채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황제께 근심을 끼칠 까 두려워서 힘써 억제하고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였다. 그러나 한가하게 홀로 있는 곳에서는 홀연히 즐거운 뜻이 없었다. 정유년(1897)에 태황제의 성덕(盛德)이 날로 융성해 져 백관과 백성들이 황제에 오르기를 청하니 황제에 즉위하시고 제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경자년(1900)와 임인년(1902)에 계속해서 태황제에게 휘호를 올렸다. 갑진년(1904)에 순명후(純明后)가 돌아가셨다. 병오년(1906)에 지금 황태후(皇太后)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이신데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름다운 덕을 닦아서 사녀(士女)의 행동거지에 6궁(宮)이 칭송하였다. 정미년(1907)에 태황제의 명(命)으로 내선(內禪)을 받았는데 고사(固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려운 대업(大業)에 나가서 무겁게 부여 받은 임무를 물려받아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온갖 법도(法度)를 다스렸다. 중요한 일은 태황(太皇)에게 아뢰어 재가(裁可)를 받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정부에 위임하여 결정하게 하니 사해(四海)가 무위(無爲)의 정치를 우러러보았다. 제의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해 종사의 기틀을 견고히 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왕전하(王殿下)이다. 무신년(1908)에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강토를 시찰하고 풍토(風土)를 변별(辨別)하였으며 민생(民生)의 고통을 물어보았으며 농사의 고충을 살폈다. 열흘이 못되어 나라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 의장 행렬이 성대하게 거행되니 환호하니 덕화(德化)의 밝은 아름다움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몇 달후 서쪽을 순수(巡狩)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니 또한 남순(南巡)을 했을 때와 같았다. 이는 전 성조(聖朝)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성대한 일이었다. 경술년(1910)에 이르러 천운(天運)이 또 한 번 변하였으니, 제는 단지 종묘(宗廟)를 높이고 생령(生靈)을 긍휼히 여겼지만 남면(南面)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존경하고 추대하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정사(丁巳)에 친히 북도(北道)에 행행하며 여러 능(陵)에 나가 전알(展謁)하였다. 행차가 출발하자 비가 왔는데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살고 있는 집의 띠와 울타리의 나무를 뽑아서 진흙길을 포장하여 승여(乘輿)가 다니는 것을 편히하였다. 기뻐하면서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셨다.’라고 하였다. 함흥(咸興)에 행차하였을 때 몸소 전침(殿寢)에 배향하고 신사(紳士)를 위로했으며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종성(宗姓)에게 돈독히 하였다. 북도의 선비들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옛날에 한 번 놀고 한 번 즐거워함이 제후(諸侯)의 법도라고 한 것이 이제 우리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오년(1918)에 태황제가 덕수궁(德壽宮)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제는 을사년(1905), 경술년(1910) 이후 한결같이 애태우며 오직 태황(太皇)만을 봉양(奉養)하며 날을 아까워하는 정성으로 흔연히 천하(天下)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 끝까지 미치는 애통한 일을 만났는데 슬픈 마음으로 이르지 못하고 원통하게 울부짖었다. 애훼가 상도에서 지나쳤다. 이때에 왕가(王家)의 제도가 새 법도와 옛날의 법도가 달랐는데 제가 심신(心神)을 수고롭게 하면서 종척(宗戚)의 원로들과 더불어 신종(愼終)의 예(禮)를 의논하고 반드시 옛날 법식을 썼으니 비로소 마음에 유쾌함이 있었다. 변두(籩豆)의 숫자, 축고(祝告)의 문투, 의장(儀仗)과 상설(象設)의 갖춤에 이르기까지 기일 이전에 갖추어 순서를 따라 행하니 유사(有司)와 집사(執事)는 오직 명을 따를 뿐이었다.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고 크고 작은 제사를 막론하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태황제가 일찍이 즐겨 드시던 것은 매번 상식(上食)을 올릴 때 반드시 별도로 바쳤다. 상복을 벗고도 오히려 근심하는 것은 거상(居喪) 때와 같았다. 갑자년(1924)에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니, 영수 각첩(靈壽閣帖)에 시(詩)를 직접 쓰고 기사(耆社)에 있는 여러 신하를 불러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이것 또한 태황제가 임인년(1902)에 성대한 일을 치른 것을 따른 것이었다. 열성(列聖) 이래 겨우 5번의 경사가 있었다. 이러므로 백성들은 백세(百歲)를 누리기를 서로 간절하게 기원하고 축하하였다. 우연히 근년에 족부에 통증이 자주 일어났다가 얼마 후에 낫기도 하였다. 병인년(1926) 봄에 침수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점차 창비(脹痞)가 생겼다. 마침내 3월 14일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춘추(春秋)가 53세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5월 2일 홍릉(洪陵)의 왼쪽 강(岡) 묘방(卯方)언덕에 장례(葬禮)를 지낼 것이다. 4월 25일 먼저 황후의 시신을 유릉(裕陵)으로 옮겨 합부지(合祔地)로 하였으니 병이 드시기 전에 내린 명령에 따른 것이다. 종척의 원로들이 대행왕(大行王)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순종(純宗)’이라고 하였다.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라고 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종척의 기구(耆舊) 및 유사, 집사들에게 하교하기를, ‘무오년(1918)에 태황제의 상에 대행 황제가 우리나라의 구례(舊禮)를 써서 성효(誠孝)를 다하였으니, 이제 대행 황제의 상에는 마땅히 따라서 하고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바쁘게 달려가 직무를 수행하였다. 사왕 전하께서 또한 윤용구(尹用求)에게 하교하여 말하기를, ‘군(君)은 왕실(王室)의 가까운 인척으로 가까이 출입(出入)하여 70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되었으니 이번의 이 유궁(幽宮)의 지(誌)는 군이 찬하라.’라고 하였다. 윤용구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데 감격해서 감히 노병(老病) 때문에 사양한다는 말을 못하였다. 삼가 대행 황제의 호(號)에 연술(演述)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태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짐(朕)과 동궁(東宮)은 유교(儒敎)를 종통(宗統)으로 천하(天下)에 밝게 선포한다고 하였다. 제는 집안에서 선조의 법도를 익혀서 성인(聖人)을 본받으며 도(道)를 지키고 현인(賢人)을 높이고 인재(人材)를 아꼈다. 총명하게 잘 기억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니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와 백가(百家)의 보계(譜系), 정주(政注)의 격식(格式)과 진신(搢紳)의 이력(履歷) 등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더욱 전례에 익숙하며 예서(禮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끝까지 몸소 행하지 않았다. 이는 성인의 문(文)이었다. 의젓한 위엄이 밖에 드러나고 온화한 순수(純粹)가 마음에 쌓이고 평소에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접하는데 나태한 얼굴을 짓지 않으며 그 사람이 과오가 있어도 바로 위벌(威罰)을 가하지 않고 깨우쳐주어 스스로 바꾸도록 하였다. 향곡(鄕曲)의 문관(文官)이 시종(侍從)으로 등용될 때 반드시 그 고을의 일을 상세히 물어보았다. 무릇 여러 신하(臣下)를 대할 때 반드시 그가 맡은 일과 잘하는 일을 따라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아뢰는 일이 서로 어그러지며 막히는 뜻이 없었으며 그 상주(上奏)하는 바에서 진심을 다 표현하였다. 혹은 주대(奏對)에서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반드시 다른 말을 끌어와서 그 말을 그치게 하여 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의 단점(短點)을 거론하지 않으며 사람이 간혹 서로 알력이 생겼을 때는 또한 서로 화해시켜서 화평(和平)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온화(溫和)이다. 스스로 엄정한 몸가짐을 갖추니 화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움직이면 반드시 믿음성있게 하니 명령(命令)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졌다. 날마다 신문사보(新聞社報)를 접하고 이웃 나라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면 어려움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가 그 행실을 잃어버린다든지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올라타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는 것에 징치(懲治)할 바를 생각하였다. 홍릉(洪陵)에 감수(監守)하는 자가 능에 있는 나무의 윗가지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고 저녁 상을 물리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니, 이로부터 감수하는 자는 자르는 것을 이 사실을 알고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부지런히 일한 노궁녀(老宮女)가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에 대해 말하였는데, 즉시 엄하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말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인배(宮人輩)들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무(武)였다. 항상 양궁(兩宮)의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잠자고 음식을 먹을 때 위생(衛生)에 장애가 있으면 일절 경계하고 신중하였다. 대단히 춥고 아주 더울 때 여항의 백성들이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며 매우 건조하고 음산한 장마 때는 전가(田家)가 어떻게 생업을 잘 영위하는지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영(寧)이었다.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누이가 있어서 근심과 기쁨을 같이 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가 유학하고 나서 돌아와 뵈니 단란하게 기쁘게 지내니 신하들이 감동을 받았다. 제사와 배향을 드릴 때 의친왕(義親王)이 아헌(亞獻)으로 들어오자 기쁜 기색으로 행례(行禮)의 자리를 반드시 바로잡도록 명령하였다. 덕혜 옹주(德惠翁主)도 지극히 어루만지고 사랑해주었는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주었다. 가까운 종척(宗戚)이 가세(家勢)가 기울게 되면 월름(月廩)을 지급하여 생활을 온전하게 해 주었으며, 선조에서 벼슬을 맡은 사람은 비록 지체가 낮더라도 반드시 우대(優待)하고 후하게 베풀었다. 이것이 성인의 돈독함이었다. 관리로서 근무하는 사람은 작은 허물이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았으며 부득이하게 쫓아내더라도 반드시 재물을 내려주어 봉록(俸祿)을 대신하게 하였다. 잘못을 숨겨주고 허물을 감춰주어 대화합(大和合)을 보합하여 기상(禨祥)을 인도하여 맞이하였다. 세신(世臣)의 부음(訃音)에는 근심하는 기색을 보였으며, 백성이 굶어죽으면 임금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하였다. 무고한 백성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세세한 것에도 생각이 미쳤으니, 이것이 성인의 인(仁)이었다. 태황제는 정미년(1907)부터 덕수궁(德壽宮)에 계셨는데 3시에 일어나서 반드시 전화(電話)로 고하였다. 종묘(宗廟)에 향사(享祀)할 때도 크게 아프지 않으면 섭행(攝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고할 때는, 분각(分刻)도 어긋나지 않았으며 한가지 일에도 마음을 속이지 않았으며, 한마디 말에도 다른 사람을 없이 여기지 않았다. 오직 실천과 내실에 힘썼으니 이것이 성인의 정성(精誠)이었다. 한가하게 있을 때도 일찍이 하늘을 쳐다보며 누워있지 않았다. 정당(正堂)에 태황제의 어진(御眞)을 걸어놓고 휘장으로 가려놓아 그 아래에서 자세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 매번 능(陵)에 오를 때는 비록 비가 쏟아져도 지름길로 돌아서 재전에 가지 않았다. 북쪽에 순행할 때는 문천(文川)을 지나 숙릉(淑陵)의 산기슭이 시야에 들어오자 즉시 의자(椅子)에서 일어서서 두 손을 마주잡았으며 지나간 후에 비로소 앉았다. 묘전(廟殿)에 봉심(奉審)하고 들어가 품(稟)할 때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명을 받았다. 묘전에 들어가 더욱 공경하고 엄숙하여 관직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혹 순서에 어긋나서 의절에 어긋나게 하면 반드시 친히 명령을 내려 고쳐서 의절(儀節)에 맞게 하였다. 옛날에 도덕(道德)과 공훈(功勳)을 세운 업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폈고 근실하고 경계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경(敬)이었다. 재백(財帛)과 성색(聲色)에 대해 담백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일정한 법식과 기관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외설적인 장난과 속된 풍속에 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성학(聖學)을 배우지 않고도 천성적으로 그러한 것이었으니 이는 성인의 순수(純粹)였다. 사단(四端)의 싹과 만선(萬善)의 일어난 것이 모두 성효(誠孝)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어렸을 때 양궁이 병이 있어서 안색에 근심스런 빛이 드러나니 음식도 줄이고 잠도 자지 않았는데 병이 나은 연후에 처음으로 돌아갔다. 비록 심상한 음식물이라도 반드시 먼저 바친 후에 자신이 먹었다. 북원(北苑)에 곡식을 심어 막 익었을 때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북원에 나가 베어 수확하였다. 가까운 신하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주기를 바랬는데, 이미 덕수궁에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중(喪中)에 기거하는 뜰 앞에 꽃이 만개하니, 이를 장막을 쳐서 가렸다. 비슷한 일들은 가히 다 서술할 수 없다. 이것이 대성인의 효성이었다. 대행(大行)에 대명(大名)은 예(禮)에서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 십자(十字)로 드러낸들 어찌 실제 일의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슬프도다. 제의 아름다운 행실과 순수한 덕은 태황제를 따른 것이니 깊은 인(仁)과 두터운 혜택은 신민(臣民)들에게 젖어들었다. 신민에게 무오년(1918)의 애통함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는데, 또다시 오늘에 망극(罔極)한 애통함을 만나니 도성의 사녀가 궐문(闕門)에 다투어 달려가 부모를 잃은 듯이 부르짖으며 애통해 하였다.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외딴 촌락과 궁벽한 골목에서 모두 상복을 입고 천리(千里)를 달려와서 곡(哭)을 하니, 외국 사람들도 보고 감탄하였다. 요(堯)임금이 죽고 순(舜)임금이 제 위에 오를 때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아, 슬프도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닦으며 글을 올립니다."
하였다. 【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찬(撰)하였다.】
- 【원본】 8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원문
誌文曰: 於戲! 欽惟我純宗文溫武寧敦仁誠孝皇帝, 姓李氏, 諱坧, 字君邦。 號正軒, 高宗太皇帝之適嗣, 文祖翼皇帝之孫。 妣, 明成太皇后閔氏, 贈領議政驪城府院君 純簡公 致祿女也。 以甲戌二月八日辛巳, 帝誕降于昌德宮之觀物軒, 實太皇御極之十一年也。 先是, 宮人虔禱于寧邊郡之妙香山及延安郡之南大池, 屢有異兆, 未幾而有虹渚之慶。 翼年乙亥, 冊爲王世子。 帝日表龍姿, 英偉俊整, 時淸國使者來拜仰瞻。 亟歎曰: "狠胖狠秀。" 此淸人之方言, 見上等容貌而讚稱者。 蓋胖則難秀, 秀則難胖, 胖而秀, 非凡常人也。 帝自幼有至性, 太皇於奉先事親, 克殫誠孝。 帝涵育於身敎之化, 一動靜、一事爲, 已若長德君子。 以近道之資, 有根天之孝, 又習於庭闈之日用常行, 而太皇與太皇后義方之訓, 不以篤愛而少弛。 是以毓德震邸, 令聞日彰。 壬午入學于太學, 遂行冠禮, 仍行嘉禮于純明后。 后, 贈領議政驪恩府院君 忠文公 驪興 閔台鎬女, 生長名門, 閨儀克備。 帝齊之以正, 和而不流, 盡志養于兩殿, 兩殿宜之而嘉悅。 時, 神貞翼皇后壽考康寧, 一堂三世, 怡愉熙洽, 從而歲穰民旺, 八埏又安。 戊子, 帝率百官庭請, 上太皇及太皇后徽號。 庚寅, 如之; 壬辰, 又如之。 至甲午, 寰宇多事, 風雲丕變。 太皇大度廣運, 治具改張, 聖算之明睿, 群下或莫之及, 而惟帝多密贊焉。 乙未, 明成太皇后崩。 帝慟酷禍齎至恨, 若無所歸, 而恐貽太皇之惟憂, 勉自制抑婉, 以容色。 然每燕居獨處, 忽忽無樂意。 丁酉, 太皇盛德日隆, 百辟群黎請進大號, 卽皇帝位, 冊帝爲皇太子。 庚子、壬寅, 連上徽號于太皇。 甲辰, 純明后崩。 丙午, 行嘉禮于今皇太后; 后, 領敦寧司事海豐府院君 海平 尹澤榮女。 夙佩家訓, 克媲令德, 有士女之行, 六宮誦之。 丁未, 帝以太皇命受內禪, 固辭不獲, 履艱大之業, 承付託之重, 總萬機而修百度。 大者稟裁于太皇, 小者委決于政府, 四海仰垂拱之治。 而封帝弟英親王爲皇太子, 以鞏宗祐之基, 卽今王殿下也。 戊申, 巡狩南服, 眎疆場, 辨風土, 詢民生之瘼, 軫稼穡之艱。 不旬日薄海而還, 瞻旄聞籥, 道路相織, 疲癃扶杖, 婦孺擕手, 謳歌懽呼, 夬覩德化之晠美。 數月而西巡至龍灣, 亦如南巡時, 此前聖朝所未遑之盛擧也。 洎乎庚戌, 天運又一變, 帝惟宗廟是尊、生靈是恤, 不以南面爲一己之樂。 而下之所以愛戴者, 愈有甚焉。 丁巳, 親幸北道, 展謁諸陵, 駕發而雨, 北民爭撤其所居屋茅籬柵, 鋪諸泥路, 以便乘輿之行。 而欣欣相告曰: "吾君至矣。" 駕次于咸興也, 躬享于殿寢, 勞紳士, 燕父老, 敦宗姓, 北之士相與語曰: "古之‘一遊一豫, 爲諸侯度’者, 吾君之謂也。" 戊午, 太皇崩于德壽宮。 帝自乙庚以後, 一念憧憧, 惟在奉養太皇, 以愛日之忱, 欣然忘天下矣。 遽遭終天之痛, 銜恤靡至。 冤號皇皇, 哀毁踰常度。 是時, 王家制度, 新舊有異。 帝勉抑心神, 與宗戚耆舊, 議愼終之禮, 必用舊典, 始可以恔於心。 以至籩豆之數、祝告之文、儀仗象設之具, 莫不先期而備、循序而行, 有司執事, 惟命是聽。 三年廬次, 祀無大小, 祼將必躬, 太皇嘗所嗜進者, 每於上食時, 必另供。 制旣闋而猶煢煢, 若在疚日也。 甲子, 寶齡望六, 題御詩于《靈壽閣帖》, 召耆社諸臣而宴之。 亦遵太皇壬寅盛事, 而列聖以來, 僅五有之慶也。 從玆期頣之享, 胥切蘄祝。 偶於年來, 足部有諐, 頻發旋瘳。 丙寅春, 寢膳失度, 漸成脹痞, 竟以三月十四日卯時, 禮于陟昌德宮之大造殿, 春秋五十三。 嗚呼痛哉! 將以五月二日, 葬于洪陵左岡坐卯之原; 以四月二十五日, 先遷裕陵, 爲合祔地, 從治命也。 宗戚耆舊議定大行諡曰‘文溫武寧敦仁誠敬’, 廟號曰‘純宗’, 帝號曰‘孝皇帝’。 嗣王殿下敎宗戚、耆舊及有司、執事曰: "戊午太皇帝喪, 大行皇帝用我家舊禮, 以盡誠孝。 今於大行皇帝之喪, 亦宜遵而無隳。" 群下奔走率職。 嗣王殿下又敎用求曰: "君以王室近戚, 出入邇密, 爲七十年之久。 今此幽宮之誌, 君其撰之。" 用求感激殊渥, 不敢以老病辭。 謹以上大行號者, 演述之。 嗚呼! 昔我太皇帝, 詔以"朕與東宮爲儒敎之宗, 昭布天下。" 帝詩禮之學, 得於庭闈之內, 閑聖衛道, 尊賢愛才, 聰明强記, 超邁凡倫。 國朝故實, 百家譜系, 政注格式, 搢紳履歷, 無有不瞭指而洞悉。 尤雅嫺典禮, 禮所未載, 終身不行: 此聖人之爲‘文’也。 咺赫著外而和粹蘊中, 平居無疾言遽色。 接人不設惰容, 其有過誤, 不亟加威罰, 曉之以啓自新。 鄕曲文官有登侍從, 則必詳詢其鄕之事。 凡對群下, 必隨其所掌與所長而下詢, 故仰達者, 無齟齬阻隔之意, 所奏得盡其情。 或奏對不稱, 則必引他言而止其辭, 欲不露其失。 又不論人短處, 人或有相軋, 亦兩解之, 使歸于和平: 此聖人之爲‘溫’也。 自持以莊, 故不怒而畏; 動必以信, 故不令而行。 日接新聞社報, 見隣國有難, 思所以排解之。 子悖其父, 女失其行, 卑乘尊, 賤陵貴, 思所以懲治之。 聞洪陵監守者芟陵樹之上枝。 郤夕膳而不進, 自是監守者知戢。 老宮女服勞者, 偶談及先朝時國事, 卽下嚴責曰: "汝輩何敢言先朝事?" 自是, 宮人輩不敢復言: 此聖人之爲‘武’也。 恒念兩宮顧復之恩, 節宣自保, 凡寢興飮啖, 有妨於衛生者, 一切戒愼。 祁寒溽暑, 念蔀屋之何以奠居; 亢暵淫霖, 念田家之何以安業: 此聖人之爲‘寧’也。 二弟一妹, 與同憂喜, 嗣王殿下自遊學而歸覲, 則團欒歡慶, 臣隣爲之感動。 禋享時, 義親王以亞獻入來, 則喜動于色, 行禮之席, 必命正之。 德惠翁主, 極加撫愛, 一甘必分。 至於近宗戚家勢旁落, 則給月廩而全之。 先朝任使之人, 雖賤, 必優待之, 厚施之: 此聖人之爲‘敦’也。 服官者, 不以微眚而去之, 有不得已而去之, 必賜之資, 俾以代祿。 藏垢匿瑕, 保合大和, 以導迎禨祥。 世臣訃徹, 玉色愀然; 民有餓莩, 宸心如傷。 不虐無告, 恩及肖蝡: 此聖人之爲‘仁’也。 太皇自丁未御德壽宮, 三時起居, 必以電告。 宗廟享祀, 非大違豫, 不許攝行, 有事告時, 則分刻不違。 無一事欺心, 無一語慢人, 惟懋踐實: 此聖人之爲‘誠’也。 燕居未嘗仰天而臥, 正堂揭太皇御眞, 以帕掩之, 而未嘗偃倚其下。 每上陵, 雖雨注, 不徑還齋殿。 北幸時, 過文川, 淑陵山麓入望, 卽卸椅子, 起立拱手, 過後始坐。 廟殿奉審入稟時, 雖夜中, 必整衣冠, 跽坐而受之。 入廟殿, 尤祗肅, 官卑年少者, 或失次闕儀, 則必親命改之, 俾中儀節。 古之有道德勛業者, 不遽呼其名, 臨事洞屬, 謹獨戒懼: 此聖人之爲‘敬’也。 財帛聲色, 泊然無欲, 畦畛機關, 不設於中。 褻戲俚俗之言, 不接於口, 非待聖學, 而能天成然也: 此聖人之爲‘純’也。 四端之萌, 萬善之發, 皆從誠孝中來。 在沖年, 兩宮有疾, 憂形于色, 減膳廢寢, 翼瘳然後復初。 雖尋常膳需, 必先獻而後自御。 北苑種栗而新熟, 率近臣, 至苑剝收, 而近臣希有頒賜, 聞已盡獻于德壽宮, 莫不感歎。 諒陰中, 所居庭前, 有花盛開, 爲布帳而遮之。 至行類是者, 不可殫述: 此皆大聖人之爲‘孝’也。 大行大名, 禮固當然。 而顧此十字闡颺, 曷足形容乎萬一也? 嗚呼痛哉! 帝之懿行粹德, 動遵太皇, 而深仁厚澤, 淪浹于臣民。 臣民之戊午餘慟, 尙未盡艾, 而又遭今日罔極之冤。 都人士女, 競趨闕門, 如失恃怙, 號呼攀踊。 愚婦穉兒, 荒村窮巷, 一時縞素, 千里奔哭, 以至殊域之人, 亦皆觀感咨嗟。 竊以爲堯殂舜陟之日, 其有是歟? 嗚呼痛哉! 臣拜手稽首, 抆血而獻文。 【前判敦寧院事尹用求撰】
- 【원본】 8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순종 19년 (1926) 6월 11일
순종실록부록17권, 순종 19년 6월 11일 양력 5/6 기사 / 1926년 일본 대정(大正) 15년
순종 황제의 지문
국역
지문(誌文)에,
"아, 공경하는 우리 순종(純宗) 황제(皇帝)는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척(坧)이다. 자(字)는 군방(君邦)이요 호(號)는 정헌(正軒)이다.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의 적사(適嗣)이며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의 손자(孫子)이다. 어머니는 영의정(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신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 민씨(閔氏)이다. 갑술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 묘시(卯時)에 제(帝)가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에서 탄생하셨으니 실로 태황제(太皇帝)가 왕위에 오른 지 11년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서 궁인들이 영변군(寧邊郡)에 있는 묘향산(妙香山)과 연안(延安)에 있는 남대지(南大池)에 경건하게 기원을 드렸다. 여러 차례 기이한 길조가 있었는데, 머지않아 홍저(虹渚)의 경사가 있었다. 다음해 을해년(1875)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제(帝)는 제왕의 표상이 있었고 영웅 위걸의 모습이 준수하고 정연하였다. 이때에 청국 사신이 와서 절하고 우러러 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狠)하게 체구가 크고 한(狠)하게 뛰어나다.’ 이 말은 청(淸)나라의 방언인데 상등(上等)의 용모를 보고 칭찬한 것이다. 대개 체구가 크면 살이 수려하기 어렵고 수려하면 체구가 크기 어려운데, 이미 체구가 크면서도 살이 수려하니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는 어려서부터 지성(至性)이 있어서 태황제가 봉선(奉先)과 사친(事親)에 성효(誠孝)를 능히 다하자 제(帝)는 몸소 실천하는 교화(敎化)에 함육되어 모든 행동거지가 이미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君子) 같았다. 도(道)에 가까운 자질과 천성에 타고난 효(孝)를 행했다. 또한 가정 안의 일상적인 행동에 익숙하였는데 태황제와 태황후는 의방(義方)의 가르침에서 돈독하게 아낀다고 해서 가르침을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이에 덕을 기른 세자로서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임오년(1882)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드디어 관례(冠禮)를 행하고 이내 순명후(純明后)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추증된 영의정(領議政) 여은 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이시다. 명문에서 생장하여 부인의 법도를 모두 갖추었는데 제가 정도(正道)로서 가지런히 하였으며 화합하되 시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뜻을 다해 양전(兩殿)을 봉양(奉養)하였다. 양전은 이를 합당하게 여기고 기뻐하였다. 당시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장수하시고 강녕하시니 궁궐에 3대가 살면서 기뻐하고 흡족해하였다. 덩달아서 풍년(豐年)이 들었고 백성(百姓)은 풍족하며 팔도(八道)가 또한 편안해졌다. 무자년(1888)에 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태황(太皇) 및 태황후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정청(庭請)하였으며, 경인년(1890)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임진년(1892)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갑오년(1894)에 이르러 나라에 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시국이 크게 바뀌었다. 태황제는 광운(廣運)을 크게 헤아리고 치제(治制)를 고쳤다. 임금의 명준한 계책을 여러 신하들이 혹 미치지 못했으나 오직 제만은 은밀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을미년(1895)에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가 돌아가셨다. 제는 참혹한 화란에 해통해 하시며 지극한 한(恨)을 품은 채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황제께 근심을 끼칠 까 두려워서 힘써 억제하고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였다. 그러나 한가하게 홀로 있는 곳에서는 홀연히 즐거운 뜻이 없었다. 정유년(1897)에 태황제의 성덕(盛德)이 날로 융성해 져 백관과 백성들이 황제에 오르기를 청하니 황제에 즉위하시고 제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경자년(1900)와 임인년(1902)에 계속해서 태황제에게 휘호를 올렸다. 갑진년(1904)에 순명후(純明后)가 돌아가셨다. 병오년(1906)에 지금 황태후(皇太后)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후(后)는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이신데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름다운 덕을 닦아서 사녀(士女)의 행동거지에 6궁(宮)이 칭송하였다. 정미년(1907)에 태황제의 명(命)으로 내선(內禪)을 받았는데 고사(固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려운 대업(大業)에 나가서 무겁게 부여 받은 임무를 물려받아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온갖 법도(法度)를 다스렸다. 중요한 일은 태황(太皇)에게 아뢰어 재가(裁可)를 받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정부에 위임하여 결정하게 하니 사해(四海)가 무위(無爲)의 정치를 우러러보았다. 제의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해 종사의 기틀을 견고히 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왕전하(王殿下)이다. 무신년(1908)에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강토를 시찰하고 풍토(風土)를 변별(辨別)하였으며 민생(民生)의 고통을 물어보았으며 농사의 고충을 살폈다. 열흘이 못되어 나라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 의장 행렬이 성대하게 거행되니 환호하니 덕화(德化)의 밝은 아름다움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몇 달후 서쪽을 순수(巡狩)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니 또한 남순(南巡)을 했을 때와 같았다. 이는 전 성조(聖朝)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성대한 일이었다. 경술년(1910)에 이르러 천운(天運)이 또 한 번 변하였으니, 제는 단지 종묘(宗廟)를 높이고 생령(生靈)을 긍휼히 여겼지만 남면(南面)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존경하고 추대하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정사(丁巳)에 친히 북도(北道)에 행행하며 여러 능(陵)에 나가 전알(展謁)하였다. 행차가 출발하자 비가 왔는데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살고 있는 집의 띠와 울타리의 나무를 뽑아서 진흙길을 포장하여 승여(乘輿)가 다니는 것을 편히하였다. 기뻐하면서 서로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셨다.’라고 하였다. 함흥(咸興)에 행차하였을 때 몸소 전침(殿寢)에 배향하고 신사(紳士)를 위로했으며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종성(宗姓)에게 돈독히 하였다. 북도의 선비들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옛날에 한 번 놀고 한 번 즐거워함이 제후(諸侯)의 법도라고 한 것이 이제 우리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오년(1918)에 태황제가 덕수궁(德壽宮)에서 붕어(崩御)하셨다. 제는 을사년(1905), 경술년(1910) 이후 한결같이 애태우며 오직 태황(太皇)만을 봉양(奉養)하며 날을 아까워하는 정성으로 흔연히 천하(天下)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 끝까지 미치는 애통한 일을 만났는데 슬픈 마음으로 이르지 못하고 원통하게 울부짖었다. 애훼가 상도에서 지나쳤다. 이때에 왕가(王家)의 제도가 새 법도와 옛날의 법도가 달랐는데 제가 심신(心神)을 수고롭게 하면서 종척(宗戚)의 원로들과 더불어 신종(愼終)의 예(禮)를 의논하고 반드시 옛날 법식을 썼으니 비로소 마음에 유쾌함이 있었다. 변두(籩豆)의 숫자, 축고(祝告)의 문투, 의장(儀仗)과 상설(象設)의 갖춤에 이르기까지 기일 이전에 갖추어 순서를 따라 행하니 유사(有司)와 집사(執事)는 오직 명을 따를 뿐이었다.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고 크고 작은 제사를 막론하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태황제가 일찍이 즐겨 드시던 것은 매번 상식(上食)을 올릴 때 반드시 별도로 바쳤다. 상복을 벗고도 오히려 근심하는 것은 거상(居喪) 때와 같았다. 갑자년(1924)에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니, 영수 각첩(靈壽閣帖)에 시(詩)를 직접 쓰고 기사(耆社)에 있는 여러 신하를 불러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이것 또한 태황제가 임인년(1902)에 성대한 일을 치른 것을 따른 것이었다. 열성(列聖) 이래 겨우 5번의 경사가 있었다. 이러므로 백성들은 백세(百歲)를 누리기를 서로 간절하게 기원하고 축하하였다. 우연히 근년에 족부에 통증이 자주 일어났다가 얼마 후에 낫기도 하였다. 병인년(1926) 봄에 침수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점차 창비(脹痞)가 생겼다. 마침내 3월 14일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춘추(春秋)가 53세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5월 2일 홍릉(洪陵)의 왼쪽 강(岡) 묘방(卯方)언덕에 장례(葬禮)를 지낼 것이다. 4월 25일 먼저 황후의 시신을 유릉(裕陵)으로 옮겨 합부지(合祔地)로 하였으니 병이 드시기 전에 내린 명령에 따른 것이다. 종척의 원로들이 대행왕(大行王)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문온 무녕 돈인 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순종(純宗)’이라고 하였다.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라고 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종척의 기구(耆舊) 및 유사, 집사들에게 하교하기를, ‘무오년(1918)에 태황제의 상에 대행 황제가 우리나라의 구례(舊禮)를 써서 성효(誠孝)를 다하였으니, 이제 대행 황제의 상에는 마땅히 따라서 하고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가 바쁘게 달려가 직무를 수행하였다. 사왕 전하께서 또한 윤용구(尹用求)에게 하교하여 말하기를, ‘군(君)은 왕실(王室)의 가까운 인척으로 가까이 출입(出入)하여 70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되었으니 이번의 이 유궁(幽宮)의 지(誌)는 군이 찬하라.’라고 하였다. 윤용구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데 감격해서 감히 노병(老病) 때문에 사양한다는 말을 못하였다. 삼가 대행 황제의 호(號)에 연술(演述)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태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짐(朕)과 동궁(東宮)은 유교(儒敎)를 종통(宗統)으로 천하(天下)에 밝게 선포한다고 하였다. 제는 집안에서 선조의 법도를 익혀서 성인(聖人)을 본받으며 도(道)를 지키고 현인(賢人)을 높이고 인재(人材)를 아꼈다. 총명하게 잘 기억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니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와 백가(百家)의 보계(譜系), 정주(政注)의 격식(格式)과 진신(搢紳)의 이력(履歷) 등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더욱 전례에 익숙하며 예서(禮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끝까지 몸소 행하지 않았다. 이는 성인의 문(文)이었다. 의젓한 위엄이 밖에 드러나고 온화한 순수(純粹)가 마음에 쌓이고 평소에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접하는데 나태한 얼굴을 짓지 않으며 그 사람이 과오가 있어도 바로 위벌(威罰)을 가하지 않고 깨우쳐주어 스스로 바꾸도록 하였다. 향곡(鄕曲)의 문관(文官)이 시종(侍從)으로 등용될 때 반드시 그 고을의 일을 상세히 물어보았다. 무릇 여러 신하(臣下)를 대할 때 반드시 그가 맡은 일과 잘하는 일을 따라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아뢰는 일이 서로 어그러지며 막히는 뜻이 없었으며 그 상주(上奏)하는 바에서 진심을 다 표현하였다. 혹은 주대(奏對)에서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반드시 다른 말을 끌어와서 그 말을 그치게 하여 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의 단점(短點)을 거론하지 않으며 사람이 간혹 서로 알력이 생겼을 때는 또한 서로 화해시켜서 화평(和平)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온화(溫和)이다. 스스로 엄정한 몸가짐을 갖추니 화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움직이면 반드시 믿음성있게 하니 명령(命令)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졌다. 날마다 신문사보(新聞社報)를 접하고 이웃 나라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면 어려움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가 그 행실을 잃어버린다든지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올라타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는 것에 징치(懲治)할 바를 생각하였다. 홍릉(洪陵)에 감수(監守)하는 자가 능에 있는 나무의 윗가지를 잘라냈다는 말을 듣고 저녁 상을 물리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니, 이로부터 감수하는 자는 자르는 것을 이 사실을 알고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부지런히 일한 노궁녀(老宮女)가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에 대해 말하였는데, 즉시 엄하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말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인배(宮人輩)들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무(武)였다. 항상 양궁(兩宮)의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잠자고 음식을 먹을 때 위생(衛生)에 장애가 있으면 일절 경계하고 신중하였다. 대단히 춥고 아주 더울 때 여항의 백성들이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를 생각했으며 매우 건조하고 음산한 장마 때는 전가(田家)가 어떻게 생업을 잘 영위하는지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영(寧)이었다.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누이가 있어서 근심과 기쁨을 같이 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가 유학하고 나서 돌아와 뵈니 단란하게 기쁘게 지내니 신하들이 감동을 받았다. 제사와 배향을 드릴 때 의친왕(義親王)이 아헌(亞獻)으로 들어오자 기쁜 기색으로 행례(行禮)의 자리를 반드시 바로잡도록 명령하였다. 덕혜 옹주(德惠翁主)도 지극히 어루만지고 사랑해주었는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주었다. 가까운 종척(宗戚)이 가세(家勢)가 기울게 되면 월름(月廩)을 지급하여 생활을 온전하게 해 주었으며, 선조에서 벼슬을 맡은 사람은 비록 지체가 낮더라도 반드시 우대(優待)하고 후하게 베풀었다. 이것이 성인의 돈독함이었다. 관리로서 근무하는 사람은 작은 허물이 있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았으며 부득이하게 쫓아내더라도 반드시 재물을 내려주어 봉록(俸祿)을 대신하게 하였다. 잘못을 숨겨주고 허물을 감춰주어 대화합(大和合)을 보합하여 기상(禨祥)을 인도하여 맞이하였다. 세신(世臣)의 부음(訃音)에는 근심하는 기색을 보였으며, 백성이 굶어죽으면 임금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하였다. 무고한 백성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세세한 것에도 생각이 미쳤으니, 이것이 성인의 인(仁)이었다. 태황제는 정미년(1907)부터 덕수궁(德壽宮)에 계셨는데 3시에 일어나서 반드시 전화(電話)로 고하였다. 종묘(宗廟)에 향사(享祀)할 때도 크게 아프지 않으면 섭행(攝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고할 때는, 분각(分刻)도 어긋나지 않았으며 한가지 일에도 마음을 속이지 않았으며, 한마디 말에도 다른 사람을 없이 여기지 않았다. 오직 실천과 내실에 힘썼으니 이것이 성인의 정성(精誠)이었다. 한가하게 있을 때도 일찍이 하늘을 쳐다보며 누워있지 않았다. 정당(正堂)에 태황제의 어진(御眞)을 걸어놓고 휘장으로 가려놓아 그 아래에서 자세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 매번 능(陵)에 오를 때는 비록 비가 쏟아져도 지름길로 돌아서 재전에 가지 않았다. 북쪽에 순행할 때는 문천(文川)을 지나 숙릉(淑陵)의 산기슭이 시야에 들어오자 즉시 의자(椅子)에서 일어서서 두 손을 마주잡았으며 지나간 후에 비로소 앉았다. 묘전(廟殿)에 봉심(奉審)하고 들어가 품(稟)할 때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명을 받았다. 묘전에 들어가 더욱 공경하고 엄숙하여 관직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혹 순서에 어긋나서 의절에 어긋나게 하면 반드시 친히 명령을 내려 고쳐서 의절(儀節)에 맞게 하였다. 옛날에 도덕(道德)과 공훈(功勳)을 세운 업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 자세히 살폈고 근실하고 경계하였다. 이것이 성인의 경(敬)이었다. 재백(財帛)과 성색(聲色)에 대해 담백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일정한 법식과 기관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외설적인 장난과 속된 풍속에 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성학(聖學)을 배우지 않고도 천성적으로 그러한 것이었으니 이는 성인의 순수(純粹)였다. 사단(四端)의 싹과 만선(萬善)의 일어난 것이 모두 성효(誠孝)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어렸을 때 양궁이 병이 있어서 안색에 근심스런 빛이 드러나니 음식도 줄이고 잠도 자지 않았는데 병이 나은 연후에 처음으로 돌아갔다. 비록 심상한 음식물이라도 반드시 먼저 바친 후에 자신이 먹었다. 북원(北苑)에 곡식을 심어 막 익었을 때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북원에 나가 베어 수확하였다. 가까운 신하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주기를 바랬는데, 이미 덕수궁에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중(喪中)에 기거하는 뜰 앞에 꽃이 만개하니, 이를 장막을 쳐서 가렸다. 비슷한 일들은 가히 다 서술할 수 없다. 이것이 대성인의 효성이었다. 대행(大行)에 대명(大名)은 예(禮)에서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 십자(十字)로 드러낸들 어찌 실제 일의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오호라. 슬프도다. 제의 아름다운 행실과 순수한 덕은 태황제를 따른 것이니 깊은 인(仁)과 두터운 혜택은 신민(臣民)들에게 젖어들었다. 신민에게 무오년(1918)의 애통함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는데, 또다시 오늘에 망극(罔極)한 애통함을 만나니 도성의 사녀가 궐문(闕門)에 다투어 달려가 부모를 잃은 듯이 부르짖으며 애통해 하였다.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외딴 촌락과 궁벽한 골목에서 모두 상복을 입고 천리(千里)를 달려와서 곡(哭)을 하니, 외국 사람들도 보고 감탄하였다. 요(堯)임금이 죽고 순(舜)임금이 제 위에 오를 때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아, 슬프도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닦으며 글을 올립니다."
하였다. 【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윤용구(尹用求)가 찬(撰)하였다.】
- 【원본】 8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원문
誌文曰: 於戲! 欽惟我純宗文溫武寧敦仁誠孝皇帝, 姓李氏, 諱坧, 字君邦。 號正軒, 高宗太皇帝之適嗣, 文祖翼皇帝之孫。 妣, 明成太皇后閔氏, 贈領議政驪城府院君 純簡公 致祿女也。 以甲戌二月八日辛巳, 帝誕降于昌德宮之觀物軒, 實太皇御極之十一年也。 先是, 宮人虔禱于寧邊郡之妙香山及延安郡之南大池, 屢有異兆, 未幾而有虹渚之慶。 翼年乙亥, 冊爲王世子。 帝日表龍姿, 英偉俊整, 時淸國使者來拜仰瞻。 亟歎曰: "狠胖狠秀。" 此淸人之方言, 見上等容貌而讚稱者。 蓋胖則難秀, 秀則難胖, 胖而秀, 非凡常人也。 帝自幼有至性, 太皇於奉先事親, 克殫誠孝。 帝涵育於身敎之化, 一動靜、一事爲, 已若長德君子。 以近道之資, 有根天之孝, 又習於庭闈之日用常行, 而太皇與太皇后義方之訓, 不以篤愛而少弛。 是以毓德震邸, 令聞日彰。 壬午入學于太學, 遂行冠禮, 仍行嘉禮于純明后。 后, 贈領議政驪恩府院君 忠文公 驪興 閔台鎬女, 生長名門, 閨儀克備。 帝齊之以正, 和而不流, 盡志養于兩殿, 兩殿宜之而嘉悅。 時, 神貞翼皇后壽考康寧, 一堂三世, 怡愉熙洽, 從而歲穰民旺, 八埏又安。 戊子, 帝率百官庭請, 上太皇及太皇后徽號。 庚寅, 如之; 壬辰, 又如之。 至甲午, 寰宇多事, 風雲丕變。 太皇大度廣運, 治具改張, 聖算之明睿, 群下或莫之及, 而惟帝多密贊焉。 乙未, 明成太皇后崩。 帝慟酷禍齎至恨, 若無所歸, 而恐貽太皇之惟憂, 勉自制抑婉, 以容色。 然每燕居獨處, 忽忽無樂意。 丁酉, 太皇盛德日隆, 百辟群黎請進大號, 卽皇帝位, 冊帝爲皇太子。 庚子、壬寅, 連上徽號于太皇。 甲辰, 純明后崩。 丙午, 行嘉禮于今皇太后; 后, 領敦寧司事海豐府院君 海平 尹澤榮女。 夙佩家訓, 克媲令德, 有士女之行, 六宮誦之。 丁未, 帝以太皇命受內禪, 固辭不獲, 履艱大之業, 承付託之重, 總萬機而修百度。 大者稟裁于太皇, 小者委決于政府, 四海仰垂拱之治。 而封帝弟英親王爲皇太子, 以鞏宗祐之基, 卽今王殿下也。 戊申, 巡狩南服, 眎疆場, 辨風土, 詢民生之瘼, 軫稼穡之艱。 不旬日薄海而還, 瞻旄聞籥, 道路相織, 疲癃扶杖, 婦孺擕手, 謳歌懽呼, 夬覩德化之晠美。 數月而西巡至龍灣, 亦如南巡時, 此前聖朝所未遑之盛擧也。 洎乎庚戌, 天運又一變, 帝惟宗廟是尊、生靈是恤, 不以南面爲一己之樂。 而下之所以愛戴者, 愈有甚焉。 丁巳, 親幸北道, 展謁諸陵, 駕發而雨, 北民爭撤其所居屋茅籬柵, 鋪諸泥路, 以便乘輿之行。 而欣欣相告曰: "吾君至矣。" 駕次于咸興也, 躬享于殿寢, 勞紳士, 燕父老, 敦宗姓, 北之士相與語曰: "古之‘一遊一豫, 爲諸侯度’者, 吾君之謂也。" 戊午, 太皇崩于德壽宮。 帝自乙庚以後, 一念憧憧, 惟在奉養太皇, 以愛日之忱, 欣然忘天下矣。 遽遭終天之痛, 銜恤靡至。 冤號皇皇, 哀毁踰常度。 是時, 王家制度, 新舊有異。 帝勉抑心神, 與宗戚耆舊, 議愼終之禮, 必用舊典, 始可以恔於心。 以至籩豆之數、祝告之文、儀仗象設之具, 莫不先期而備、循序而行, 有司執事, 惟命是聽。 三年廬次, 祀無大小, 祼將必躬, 太皇嘗所嗜進者, 每於上食時, 必另供。 制旣闋而猶煢煢, 若在疚日也。 甲子, 寶齡望六, 題御詩于《靈壽閣帖》, 召耆社諸臣而宴之。 亦遵太皇壬寅盛事, 而列聖以來, 僅五有之慶也。 從玆期頣之享, 胥切蘄祝。 偶於年來, 足部有諐, 頻發旋瘳。 丙寅春, 寢膳失度, 漸成脹痞, 竟以三月十四日卯時, 禮于陟昌德宮之大造殿, 春秋五十三。 嗚呼痛哉! 將以五月二日, 葬于洪陵左岡坐卯之原; 以四月二十五日, 先遷裕陵, 爲合祔地, 從治命也。 宗戚耆舊議定大行諡曰‘文溫武寧敦仁誠敬’, 廟號曰‘純宗’, 帝號曰‘孝皇帝’。 嗣王殿下敎宗戚、耆舊及有司、執事曰: "戊午太皇帝喪, 大行皇帝用我家舊禮, 以盡誠孝。 今於大行皇帝之喪, 亦宜遵而無隳。" 群下奔走率職。 嗣王殿下又敎用求曰: "君以王室近戚, 出入邇密, 爲七十年之久。 今此幽宮之誌, 君其撰之。" 用求感激殊渥, 不敢以老病辭。 謹以上大行號者, 演述之。 嗚呼! 昔我太皇帝, 詔以"朕與東宮爲儒敎之宗, 昭布天下。" 帝詩禮之學, 得於庭闈之內, 閑聖衛道, 尊賢愛才, 聰明强記, 超邁凡倫。 國朝故實, 百家譜系, 政注格式, 搢紳履歷, 無有不瞭指而洞悉。 尤雅嫺典禮, 禮所未載, 終身不行: 此聖人之爲‘文’也。 咺赫著外而和粹蘊中, 平居無疾言遽色。 接人不設惰容, 其有過誤, 不亟加威罰, 曉之以啓自新。 鄕曲文官有登侍從, 則必詳詢其鄕之事。 凡對群下, 必隨其所掌與所長而下詢, 故仰達者, 無齟齬阻隔之意, 所奏得盡其情。 或奏對不稱, 則必引他言而止其辭, 欲不露其失。 又不論人短處, 人或有相軋, 亦兩解之, 使歸于和平: 此聖人之爲‘溫’也。 自持以莊, 故不怒而畏; 動必以信, 故不令而行。 日接新聞社報, 見隣國有難, 思所以排解之。 子悖其父, 女失其行, 卑乘尊, 賤陵貴, 思所以懲治之。 聞洪陵監守者芟陵樹之上枝。 郤夕膳而不進, 自是監守者知戢。 老宮女服勞者, 偶談及先朝時國事, 卽下嚴責曰: "汝輩何敢言先朝事?" 自是, 宮人輩不敢復言: 此聖人之爲‘武’也。 恒念兩宮顧復之恩, 節宣自保, 凡寢興飮啖, 有妨於衛生者, 一切戒愼。 祁寒溽暑, 念蔀屋之何以奠居; 亢暵淫霖, 念田家之何以安業: 此聖人之爲‘寧’也。 二弟一妹, 與同憂喜, 嗣王殿下自遊學而歸覲, 則團欒歡慶, 臣隣爲之感動。 禋享時, 義親王以亞獻入來, 則喜動于色, 行禮之席, 必命正之。 德惠翁主, 極加撫愛, 一甘必分。 至於近宗戚家勢旁落, 則給月廩而全之。 先朝任使之人, 雖賤, 必優待之, 厚施之: 此聖人之爲‘敦’也。 服官者, 不以微眚而去之, 有不得已而去之, 必賜之資, 俾以代祿。 藏垢匿瑕, 保合大和, 以導迎禨祥。 世臣訃徹, 玉色愀然; 民有餓莩, 宸心如傷。 不虐無告, 恩及肖蝡: 此聖人之爲‘仁’也。 太皇自丁未御德壽宮, 三時起居, 必以電告。 宗廟享祀, 非大違豫, 不許攝行, 有事告時, 則分刻不違。 無一事欺心, 無一語慢人, 惟懋踐實: 此聖人之爲‘誠’也。 燕居未嘗仰天而臥, 正堂揭太皇御眞, 以帕掩之, 而未嘗偃倚其下。 每上陵, 雖雨注, 不徑還齋殿。 北幸時, 過文川, 淑陵山麓入望, 卽卸椅子, 起立拱手, 過後始坐。 廟殿奉審入稟時, 雖夜中, 必整衣冠, 跽坐而受之。 入廟殿, 尤祗肅, 官卑年少者, 或失次闕儀, 則必親命改之, 俾中儀節。 古之有道德勛業者, 不遽呼其名, 臨事洞屬, 謹獨戒懼: 此聖人之爲‘敬’也。 財帛聲色, 泊然無欲, 畦畛機關, 不設於中。 褻戲俚俗之言, 不接於口, 非待聖學, 而能天成然也: 此聖人之爲‘純’也。 四端之萌, 萬善之發, 皆從誠孝中來。 在沖年, 兩宮有疾, 憂形于色, 減膳廢寢, 翼瘳然後復初。 雖尋常膳需, 必先獻而後自御。 北苑種栗而新熟, 率近臣, 至苑剝收, 而近臣希有頒賜, 聞已盡獻于德壽宮, 莫不感歎。 諒陰中, 所居庭前, 有花盛開, 爲布帳而遮之。 至行類是者, 不可殫述: 此皆大聖人之爲‘孝’也。 大行大名, 禮固當然。 而顧此十字闡颺, 曷足形容乎萬一也? 嗚呼痛哉! 帝之懿行粹德, 動遵太皇, 而深仁厚澤, 淪浹于臣民。 臣民之戊午餘慟, 尙未盡艾, 而又遭今日罔極之冤。 都人士女, 競趨闕門, 如失恃怙, 號呼攀踊。 愚婦穉兒, 荒村窮巷, 一時縞素, 千里奔哭, 以至殊域之人, 亦皆觀感咨嗟。 竊以爲堯殂舜陟之日, 其有是歟? 嗚呼痛哉! 臣拜手稽首, 抆血而獻文。 【前判敦寧院事尹用求撰】
- 【원본】 8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8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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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19년 (1926)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