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4권, 고종 33년 10월 19일 양력 3/4 기사 / 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
이용석이 관서 사람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알리기 위해 상소를 올리다
국역
6품 이용석(李容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나라는 매우 어렵고, 인산(因山)은 아직 능(陵) 자리도 잡지 못했으며, 대가(大駕)는 여전히 외국 공사관(公使館)에 계십니다. 신자(臣子)된 자는 애통하고 황송하여 문제를 논의할 겨를도 없어야 하겠지만 절박하여 늦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어찌 감히 성상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나라의 안위(安危)는 적임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데에 달려 있고, 사람의 현부(賢否)는 정도(正道)로 선발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옛 선비는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당대의 인재를 내어 당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타고난 천성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든 차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인재를 쓰는 방법에서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은 관서(關西) 사람입니다. 관서 사람들은 한 나라에서 길러낸 몸으로 여러 차례 열성조(列聖朝)에서 맑은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나 끝내 다른 지방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지가 지금 거의 3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인재를 널리 등용하라는 조서(詔書)를 삼가 받들고는 우리 지방 사람들은 서로 축하하고 손뼉을 치면서, ‘지금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 쌓인 원한을 풀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학술이 있고 재주가 있으며 충성과 신의가 있는 사람들치고 누군들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추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산을 지고 짚신을 신고 먼 길을 떠나 서로 이끌면서 서울에 올라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낮은 품계나 하찮은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팔도(八道)는, 비유하면 한 가정의 여덟 아들과 같습니다. 일곱 아들은 편안히 잘 살지만 한 아들은 병들어 이리저리 구걸을 할 경우, 부모야 불쌍하고 측은히 여기지만, 유독 형제들에게서 동정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해 통곡한다면 어찌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이건만 여러 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똑같은 신민(臣民)이 거주하는 도이건만 여러 도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하니, 비록 하늘까지 통하는 효성과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더는 등용될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사실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어서 조정에서는 관서를 다른 지방과 심하게 차별하는 것입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지역 때문에 사람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기산(岐山)과 풍주(豐州)로 말하면 땅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주(周)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어질고 순후한 교화를 일으킨 반면, 진(秦)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날쌔고 사나운 기운을 일으켰으니,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인도하는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은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등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소서.
옛날 우리나라에는 원래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단군(檀君)이 처음 나오자 예의로 사양하는 풍속이 이루어졌고, 기자(箕子)가 교육을 하자 인자하고 어진 교화가 일어났지만, 일찍이 인재를 빌려서 쓰거나 백성을 바꾸어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관서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모범이 되는 지역으로, 사람 때문에 지역을 폐해서도 안 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폐한단 말입니까? 경남(梗楠)이나 여장(橡樟)과 같은 좋지 않은 재목이라도 장석(匠石)은 그 나무들을 베었고, 기기(騏驥)나 화류(驊騮)와 같은 준마(駿馬)는 기주(冀州)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백락(伯樂)은 알아보았으니, 물건도 그러한데 어찌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아! 양주(涼州)를 버리려고 한 것은 등즐(鄧騭)의 그릇된 논의에 해당되지만, 유독 관서에서 인재를 빌리는 것은 사실 우후(虞詡)의 바른 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열 집 밖에 안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당당한 40여 개 주(州)에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신은 이전의 인재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하늘의 뜻에 응하여 일어나신 분입니다. 태조 대왕께서 의로운 선비를 불러 모으자 스스로 그 휘하에 들어가 마침내 좌명(佐命)의 공훈을 세운 사람은 의주(義州)의 장사길(張士吉)이었습니다. 선묘(宣廟)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평양(平壤)은 이미 적들에게 점령되어 창고의 재물과 곡식이 죄다 적들의 손에 들어간 결과 남녀가 이고 지고 도로에 늘어서서 굶주림을 참고 일하면서도 배반하고 달아난 사람은 끝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랑이처럼 앞장서서 장수를 죽이고 깃발을 뽑아버림으로써 삼군(三軍)의 사기를 열 배나 높여 중흥(中興)의 공을 이룩한 것은 용강(龍岡)의 김경서(金景瑞)였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깊이 들어와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피난할 때 일행 모두가 굶주려서 걷지 못하자, 개천(价川)의 이춘란(李春蘭)은 정미(精米) 300석(石)을 스스로 마련하여 중도에 실어오고 그 길로 대가를 호위하여 도보로 의주(義州)까지 따라갔습니다. 만일 충의(忠義)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갑자년(1624)에 역신(逆臣 :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사직(社稷)이 자못 위태롭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서서 선봉으로 적의 칼날을 맞받아 그 대세를 꺾어놓고 승세를 타서 적을 쓸어버린 사람은 평양의 김태흘(金泰屹)이었습니다. 병자년(1636)과 정묘년(1627)에 오랑캐의 강한 기병(騎兵)이 몰려들어 바람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경내(境內)에 가득 찼을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한 다음 충의를 불러일으켜 여러 차례 적군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를 수없이 벰으로써 서쪽 관문을 지켜낸 사람은 철산(鐵山)의 정봉수(鄭鳳壽)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다짐한 다음 적들을 안주성(安州城)으로 유인하고 화살이 떨어져 죽을 때까지 힘껏 싸운 것은 평양의 김양언(金良彦)입니다. 병자년(1636)에 김화(金化)에서 이긴 것은 전적으로 본 도의 장교와 사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운 결과였는데, 충성을 다하여 애쓴 사람은 안주(安州)의 함응수(咸應秀)였습니다. 그 밖에 의주의 을파소(乙巴素), 평양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강서(江西)의 김반(金泮), 태천(泰川)의 선우협(鮮于浹), 순안(順安)의 한우신(韓禹臣), 영유(永柔)의 김우범(金禹範), 용강(龍岡)의 김정국(金正國) 형제, 선천(宣川)의 차예량(車禮亮) 형제는 모두 세상에 드문 인물들입니다. 더구나 수(隋) 나라 양제(煬帝)의 군사가 물러간 것과 당(唐) 나라 태종(太宗)의 군사가 패배한 사실이 옛날의 역사책에 실려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관서 사람들의 충의를 대체로 짐작할 만합니다.
아! 변란이 있을 때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반면, 평상시에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계신 폐하께서 관서 백성들의 원통한 심정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왕왕 충성과 신의가 있고 재주와 덕망이 있는 선비들이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변별하여 한 고을의 기대를 받고 있더라도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지 못하고 자사(刺史)가 천거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작록(爵祿)이 미치지 않고 명성이 알려지지 못한 채 성대(聖代)의 버림받은 처지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정사와 먼 데 사람이나 가까운 데 사람이나 다 같이 돌보는 의리로 볼 때 과연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이 지역은 바로 3,000년 전의 옛 도읍지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500년 동안 교화를 받은 백성이며, 이 지역은 바로 이 나라의 땅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의 사람들인데, 애당초 무슨 다른 것이 있다고 이처럼 천하고 구차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까? 만약 변두리 지역이라서 하늘에서 인재를 내려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주(周) 나라의 여상(呂尙), 한(漢) 나라의 구순(寇恂),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은 모두 변두리 출신이며, 만일 사람이 본래 한미(寒微)하니 어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상(商) 나라의 부열(傅說), 당(唐) 나라의 배도(裴度), 송(宋) 나라의 적청(狄靑)은 모두 한미한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 가운데 지역을 제한해서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역은 중요하고 하찮은 차이가 없고 사람은 오랑캐와 중국의 구별이 없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버림받는단 말입니까? 관서 지방의 신민(臣民)은 성인(聖人)의 세상에 태어나 만물과 나란히 서서 한 하늘이 내려 주는 은택을 함께 받건만, 유독 햇빛과 달빛만은 비치지 않고 있습니다. 형체를 부여받은 처음에는 본성이 비록 같지만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그 몸이 천하게 되어 대대손손 영원히 온 나라의 버림을 받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관서에는 등용할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다면 시험 삼아 근래 관서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사(經史)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 나라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고,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도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쇠사슬에 묶여 앞으로 나갈 방도가 없을 뿐입니다. 그중에서 뛰어나 구속되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워 나가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혹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하며, 마음대로 행동하여 구애받지 않는 사람은 슬프고 분해서 죽고 싶은 마음에 대개는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결국 인재가 되지 못하고 마니, 이는 본래 천지가 인재를 낸 뜻이 아니며, 조정에서 인재를 기르는 성과에도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아! 한 사람이라도 제 살길을 얻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한때라도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으면 재변을 불러오는데, 하물며 수만 명의 남자가 살길을 얻지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원망을 품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나가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봉지(封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존경하며 예우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단군의 고향 사람이고 기자의 봉지 사람인데도 도리어 나라 안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심합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땅은 긴 것을 잘라서 짧은 데다 붙이더라도 불과 수천 리에 지나지 않는데, 사방 천여 리나 되는 한 도(道)의 44주(州)를 다 버리는 것 또한 이웃 나라에 소문이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관서의 모든 사람들은 다들 근심하고 울분에 차 있으며 모두들 살고 싶지 않는 듯한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 이후에 더욱더 심해진 것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천지처럼 큰 도량을 가지신 성상께 유감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모든 사물은 불공정하면 우는 것이 그 본성인데, 사람의 경우에는 남이 말하면 공론(公論)이 되고 자기가 말하면 하소연하는 것이 됩니다. 신은 관서 사람으로 관서의 문제를 진술하였으니, 정말 스스로 하소연한 혐의를 면할 수 없지만, 그 실상을 따져 보면 바로 지극히 공명정대한 공론입니다. 생각건대, 억울한 것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풀어 주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고,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호소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신은 털어버릴 수 없는 억울함과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목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외람됨을 피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구구한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몸은 기혈(氣血)이 막히면 마지막에는 종기가 나고 혹이 생기는 법인데, 더구나 한 도 사람들의 심정이 울분에 차 있는데도 풀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어 신의 상소를 특별히 정부(政府)에 내려 일체 등용하심으로써 몇 백 년 쌓이고 쌓인 억울함을 통쾌하게 풀어 주어 천 리(千里)에 가득한 고통을 위로해 주신다면, 천지처럼 길러 주는 공이 여기에서 커질 것이며, 귀신과 사람이 화응(和應)하는 상서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원문
六品李容晳疏略:
昊天不弔, 國家孔棘, 因山姑未卜吉, 大駕尙御外館。 爲人臣子者, 固當哀痛惶蹙, 不遑言事, 而勢有所汲汲然難容可緩者存焉, 則豈敢不仰暴於黈䌙之下乎? 竊伏惟國之安危, 繫乎官得其人; 人之賢否, 在于取之以道。 先儒曰: "天地生一也才, 自足了一世事。" 夫秉彝降衷, 豈以古今疆域有異哉? 用人之術, 未盡其道而已。 臣關西人也, 以一國涵泳之物, 屢承列聖朝淸路之許, 而終未見齒於他道之人者, 殆今三百年所。 而頃伏承通用人才之詔命, 一道含生之類, 私相慶抃曰: "此正幾百年伸冤之秋也。" 凡有學術也才諝也忠信也, 孰不手之舞足之蹈乎? 因擔䔲躡屩, 攜手相行, 來留京師者, 尙未得微品末窠, 臣竊惑之。 我國之八路, 譬猶人家之八子, 而七子則安逸好居, 一子則疲癃轉丐, 父母非不矜惻, 而獨不見哀於兄弟, 未免向隅而號泣者, 寧不悲哉? 以同胞弟而不得齒於諸子, 以一體臣民而不得肩於諸路, 雖有通天之孝、經世之才, 無復有將進之望。 臣實不知有何難貸之罪, 而朝家之視西土甚別於他方耶? 臣竊伏念, 地以人賤耶? 人以地賤耶? 岐·豐之地一也, 而周家用之, 以興仁厚之化, 嬴秦用之, 以起勇悍之氣, 惟在君上所導之如何耳。 自古聖主明王, 未有不擇善而用人也。 伏願陛下, 留神澄省焉。 粤昔東方, 初無君長, 檀君首出, 禮讓之風成; 箕聖設敎, 仁賢之化興。 而曾未聞借才而用, 易民而治也。 則西土乃東方首善之地。 地不可以人而廢, 人不可以地而忽者, 審矣。 奈之何地以人賤, 人以地廢乎? 梗楠、橡樟, 雖非衡材, 而匠石焉伐之; 騏驥、驊騮, 不但冀産, 而伯樂焉顧之。 何其物則然而人則異乎? 噫! 欲棄涼州, 係是鄧騭之謬議, 而獨借關西, 寔出虞詡之正論。 則十室之邑, 必有忠信, 堂堂四十餘州, 寧乏可用之材乎? 臣請以前古人材言之。 逮我太祖大王應天而興也, 募聚義士, 自詣麾下, 竟立佐命之勳者, 義州 張士吉也。 其在宣廟壬辰, 大駕西幸, 當此時, 箕鄕城池已爲賊據, 倉庫財粟盡爲敵有, 男負女戴道路相望 忍飢服役, 終無叛散之人。 其中蒙虎先登, 斬將搴旗, 俾三軍勇銳十倍, 能致中興之功者, 龍岡 金景瑞也。 且敵兵深入, 中宮播越, 一行上下饑乏不行, 价川 李春蘭, 自備精米三百石, 載進中路, 因扈駕步隨龍灣。 如非忠義, 焉能若是乎? 其在甲子賊臣稱兵, 社稷幾危, 奮不顧身, 先犯賊鋒, 挫其大勢, 乘勝殲賊者, 平壤 金泰屹也。 其在丁卯彼之鐵騎長驅, 所向風靡, 呼吸之間彌滿境內, 入據龍骨山城, 收散卒激忠義, 累却賊兵, 斬賊無數, 保障西門者, 鐵山 鄭鳳壽也。 思復父讎, 爲國誓死, 誘入安州城。 力戰矢窮, 死而後已者, 平壤 金良彦也。 其在丙子則金化之捷, 全賴本道將校士卒, 殊死力戰, 竭忠效力者, 安州 咸應秀也。 其他義州之乙巴素、平壤之乙支文德、江西之金泮、泰川之鮮于浹、順安之韓禹臣、永柔之金禹範、龍岡之金正國昆季、宣川之車禮亮兄弟, 皆曠世之人物。 而何況隋 煬帝之退兵, 唐 太宗之敗師, 載在古史者乎? 以此觀之, 西土人民之忠義槪可想矣。 嗚呼! 變至則西民之勞苦如此, 時平則西民之見賤如此。 陛下深居九重, 何以知西民冤迫之情, 至於此極乎? 是故往往有忠信才德之士, 讀書窮理, 談天人辨王伯, 菀爲一鄕之重望, 而州郡不能擧, 刺史不能薦。 爵祿不及, 名聲不聞, 甘爲聖代之棄物者多矣。 其在朝廷官人之政, 柔遠能邇之意, 果何如也哉? 然則, 地是三千年故都也, 人是五百年化氓也, 地是此邦之地, 人是此邦之人。 初果有何等分別, 而使之如此賤且窮也? 若謂之地是邊陲, 天不降才云爾, 則周之呂尙、漢之寇恂、晉之祖逖, 皆出於邊陲。 若謂之人本寒微, 焉能需世云爾, 則商之傅說、唐之裵度、宋之狄靑, 皆起於寒微。 天地間萬國中, 未聞畫地而枳人也。 地無要荒之殊, 人無夷夏之卞, 則一何見棄之至於此乎? 西土臣民生於聖人之世, 列於萬物而同涵雨露之澤, 燾於一天, 而獨阻日月之光。 賦形之初秉彝雖同, 落地之後其身已賤, 世世生生, 永爲通國之所棄, 此未知何故耶。 若曰關西無人才可以擢用云爾, 則試以關西之近事言之。 經史略說, 可謂府庫於八域, 而弓馬習技, 又非餘道之可比也。 惟其鐵鎖已錮, 進身沒策。 這中卓犖不羈者, 羞愧而不出, 猶恐聲息之或露, 跅弛不拘者, 悲憤欲死。 類多飮博施浪, 未克成器, 則本非天地生才之意, 而恐有損於朝家作成之效也。 嘻嘻嗟嗟! 匹夫不獲, 猶罔成功, 一時抱冤, 尙能致災, 矧乎幾萬夫之不獲, 而幾百年之抱冤也哉? 假使我東之人, 出而與天下士大夫言之曰: "我是檀君、箕子封之人"云爾, 則天下之人, 必皆敬之禮之。 而今以檀鄕箕封之人, 乃反見侮於國中, 一何甚耶? 且我東之地截長補短, 將不過數千里, 而擧一道四十四州方千餘里之地, 而全棄之者, 此亦不可使聞於隣國也。 目今關西之橫目圓臚者, 莫不憂愁鬱悒, 皆懷如不欲生之心, 甲午以後, 愈有甚焉。 抑恐愚夫愚婦, 不能無憾於天地之大也。 大凡物不得其平則鳴, 物之情也, 然而人言之則爲公論, 己道之則爲自鳴。 臣以關西之人, 陳關西之事, 誠不免自鳴之嫌, 而究其實則乃大中至當之公言也。 第念冤極必伸, 天之理也, 痛極必呼, 人之情也。 臣以不可泐之冤, 不可忍之痛, 聲不能緩, 言不知裁, 不避猥越, 罪合萬死之誅, 區區不能已者。 蓋人之一身, 氣血有所壅滯, 終成癱疽癭疣, 況一道之情, 鬱而不宣, 豈其無病乎? 伏乞聖明, 幸垂矜憐, 將臣疏本特降政府, 一體調用, 快洗屢百年積鬱之冤, 以慰方千里林葱之痛。 則天地位育之功, 於是乎大矣, 神人和應之祥, 於是乎致矣。
批曰: "所陳當留念矣。"
고종 33년 (1896) 10월 19일
고종실록34권, 고종 33년 10월 19일 양력 3/4 기사 / 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
이용석이 관서 사람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알리기 위해 상소를 올리다
국역
6품 이용석(李容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나라는 매우 어렵고, 인산(因山)은 아직 능(陵) 자리도 잡지 못했으며, 대가(大駕)는 여전히 외국 공사관(公使館)에 계십니다. 신자(臣子)된 자는 애통하고 황송하여 문제를 논의할 겨를도 없어야 하겠지만 절박하여 늦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어찌 감히 성상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나라의 안위(安危)는 적임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데에 달려 있고, 사람의 현부(賢否)는 정도(正道)로 선발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옛 선비는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당대의 인재를 내어 당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타고난 천성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든 차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인재를 쓰는 방법에서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은 관서(關西) 사람입니다. 관서 사람들은 한 나라에서 길러낸 몸으로 여러 차례 열성조(列聖朝)에서 맑은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나 끝내 다른 지방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지가 지금 거의 3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인재를 널리 등용하라는 조서(詔書)를 삼가 받들고는 우리 지방 사람들은 서로 축하하고 손뼉을 치면서, ‘지금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 쌓인 원한을 풀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학술이 있고 재주가 있으며 충성과 신의가 있는 사람들치고 누군들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추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산을 지고 짚신을 신고 먼 길을 떠나 서로 이끌면서 서울에 올라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낮은 품계나 하찮은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팔도(八道)는, 비유하면 한 가정의 여덟 아들과 같습니다. 일곱 아들은 편안히 잘 살지만 한 아들은 병들어 이리저리 구걸을 할 경우, 부모야 불쌍하고 측은히 여기지만, 유독 형제들에게서 동정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해 통곡한다면 어찌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이건만 여러 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똑같은 신민(臣民)이 거주하는 도이건만 여러 도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하니, 비록 하늘까지 통하는 효성과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더는 등용될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사실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어서 조정에서는 관서를 다른 지방과 심하게 차별하는 것입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지역 때문에 사람을 천시하는 것입니까? 기산(岐山)과 풍주(豐州)로 말하면 땅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주(周)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어질고 순후한 교화를 일으킨 반면, 진(秦) 나라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등용하여 날쌔고 사나운 기운을 일으켰으니,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인도하는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은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등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소서.
옛날 우리나라에는 원래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단군(檀君)이 처음 나오자 예의로 사양하는 풍속이 이루어졌고, 기자(箕子)가 교육을 하자 인자하고 어진 교화가 일어났지만, 일찍이 인재를 빌려서 쓰거나 백성을 바꾸어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관서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모범이 되는 지역으로, 사람 때문에 지역을 폐해서도 안 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 때문에 지역을 천시하고, 지역 때문에 사람을 폐한단 말입니까? 경남(梗楠)이나 여장(橡樟)과 같은 좋지 않은 재목이라도 장석(匠石)은 그 나무들을 베었고, 기기(騏驥)나 화류(驊騮)와 같은 준마(駿馬)는 기주(冀州)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백락(伯樂)은 알아보았으니, 물건도 그러한데 어찌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아! 양주(涼州)를 버리려고 한 것은 등즐(鄧騭)의 그릇된 논의에 해당되지만, 유독 관서에서 인재를 빌리는 것은 사실 우후(虞詡)의 바른 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열 집 밖에 안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당당한 40여 개 주(州)에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신은 이전의 인재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하늘의 뜻에 응하여 일어나신 분입니다. 태조 대왕께서 의로운 선비를 불러 모으자 스스로 그 휘하에 들어가 마침내 좌명(佐命)의 공훈을 세운 사람은 의주(義州)의 장사길(張士吉)이었습니다. 선묘(宣廟)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평양(平壤)은 이미 적들에게 점령되어 창고의 재물과 곡식이 죄다 적들의 손에 들어간 결과 남녀가 이고 지고 도로에 늘어서서 굶주림을 참고 일하면서도 배반하고 달아난 사람은 끝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랑이처럼 앞장서서 장수를 죽이고 깃발을 뽑아버림으로써 삼군(三軍)의 사기를 열 배나 높여 중흥(中興)의 공을 이룩한 것은 용강(龍岡)의 김경서(金景瑞)였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깊이 들어와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피난할 때 일행 모두가 굶주려서 걷지 못하자, 개천(价川)의 이춘란(李春蘭)은 정미(精米) 300석(石)을 스스로 마련하여 중도에 실어오고 그 길로 대가를 호위하여 도보로 의주(義州)까지 따라갔습니다. 만일 충의(忠義)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갑자년(1624)에 역신(逆臣 :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사직(社稷)이 자못 위태롭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서서 선봉으로 적의 칼날을 맞받아 그 대세를 꺾어놓고 승세를 타서 적을 쓸어버린 사람은 평양의 김태흘(金泰屹)이었습니다. 병자년(1636)과 정묘년(1627)에 오랑캐의 강한 기병(騎兵)이 몰려들어 바람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경내(境內)에 가득 찼을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한 다음 충의를 불러일으켜 여러 차례 적군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를 수없이 벰으로써 서쪽 관문을 지켜낸 사람은 철산(鐵山)의 정봉수(鄭鳳壽)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다짐한 다음 적들을 안주성(安州城)으로 유인하고 화살이 떨어져 죽을 때까지 힘껏 싸운 것은 평양의 김양언(金良彦)입니다. 병자년(1636)에 김화(金化)에서 이긴 것은 전적으로 본 도의 장교와 사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운 결과였는데, 충성을 다하여 애쓴 사람은 안주(安州)의 함응수(咸應秀)였습니다. 그 밖에 의주의 을파소(乙巴素), 평양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강서(江西)의 김반(金泮), 태천(泰川)의 선우협(鮮于浹), 순안(順安)의 한우신(韓禹臣), 영유(永柔)의 김우범(金禹範), 용강(龍岡)의 김정국(金正國) 형제, 선천(宣川)의 차예량(車禮亮) 형제는 모두 세상에 드문 인물들입니다. 더구나 수(隋) 나라 양제(煬帝)의 군사가 물러간 것과 당(唐) 나라 태종(太宗)의 군사가 패배한 사실이 옛날의 역사책에 실려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관서 사람들의 충의를 대체로 짐작할 만합니다.
아! 변란이 있을 때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반면, 평상시에는 관서 사람들이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계신 폐하께서 관서 백성들의 원통한 심정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왕왕 충성과 신의가 있고 재주와 덕망이 있는 선비들이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변별하여 한 고을의 기대를 받고 있더라도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지 못하고 자사(刺史)가 천거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작록(爵祿)이 미치지 않고 명성이 알려지지 못한 채 성대(聖代)의 버림받은 처지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정사와 먼 데 사람이나 가까운 데 사람이나 다 같이 돌보는 의리로 볼 때 과연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이 지역은 바로 3,000년 전의 옛 도읍지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500년 동안 교화를 받은 백성이며, 이 지역은 바로 이 나라의 땅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의 사람들인데, 애당초 무슨 다른 것이 있다고 이처럼 천하고 구차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까? 만약 변두리 지역이라서 하늘에서 인재를 내려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주(周) 나라의 여상(呂尙), 한(漢) 나라의 구순(寇恂),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은 모두 변두리 출신이며, 만일 사람이 본래 한미(寒微)하니 어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상(商) 나라의 부열(傅說), 당(唐) 나라의 배도(裴度), 송(宋) 나라의 적청(狄靑)은 모두 한미한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 가운데 지역을 제한해서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역은 중요하고 하찮은 차이가 없고 사람은 오랑캐와 중국의 구별이 없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버림받는단 말입니까? 관서 지방의 신민(臣民)은 성인(聖人)의 세상에 태어나 만물과 나란히 서서 한 하늘이 내려 주는 은택을 함께 받건만, 유독 햇빛과 달빛만은 비치지 않고 있습니다. 형체를 부여받은 처음에는 본성이 비록 같지만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그 몸이 천하게 되어 대대손손 영원히 온 나라의 버림을 받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관서에는 등용할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다면 시험 삼아 근래 관서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사(經史)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하는 것은 온 나라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고,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도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쇠사슬에 묶여 앞으로 나갈 방도가 없을 뿐입니다. 그중에서 뛰어나 구속되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워 나가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혹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하며, 마음대로 행동하여 구애받지 않는 사람은 슬프고 분해서 죽고 싶은 마음에 대개는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결국 인재가 되지 못하고 마니, 이는 본래 천지가 인재를 낸 뜻이 아니며, 조정에서 인재를 기르는 성과에도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아! 한 사람이라도 제 살길을 얻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한때라도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으면 재변을 불러오는데, 하물며 수만 명의 남자가 살길을 얻지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원망을 품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나가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봉지(封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존경하며 예우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단군의 고향 사람이고 기자의 봉지 사람인데도 도리어 나라 안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심합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땅은 긴 것을 잘라서 짧은 데다 붙이더라도 불과 수천 리에 지나지 않는데, 사방 천여 리나 되는 한 도(道)의 44주(州)를 다 버리는 것 또한 이웃 나라에 소문이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관서의 모든 사람들은 다들 근심하고 울분에 차 있으며 모두들 살고 싶지 않는 듯한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 이후에 더욱더 심해진 것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천지처럼 큰 도량을 가지신 성상께 유감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모든 사물은 불공정하면 우는 것이 그 본성인데, 사람의 경우에는 남이 말하면 공론(公論)이 되고 자기가 말하면 하소연하는 것이 됩니다. 신은 관서 사람으로 관서의 문제를 진술하였으니, 정말 스스로 하소연한 혐의를 면할 수 없지만, 그 실상을 따져 보면 바로 지극히 공명정대한 공론입니다. 생각건대, 억울한 것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풀어 주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고,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호소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신은 털어버릴 수 없는 억울함과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목소리를 억제하지 못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외람됨을 피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구구한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몸은 기혈(氣血)이 막히면 마지막에는 종기가 나고 혹이 생기는 법인데, 더구나 한 도 사람들의 심정이 울분에 차 있는데도 풀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어 신의 상소를 특별히 정부(政府)에 내려 일체 등용하심으로써 몇 백 년 쌓이고 쌓인 억울함을 통쾌하게 풀어 주어 천 리(千里)에 가득한 고통을 위로해 주신다면, 천지처럼 길러 주는 공이 여기에서 커질 것이며, 귀신과 사람이 화응(和應)하는 상서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원문
六品李容晳疏略:
昊天不弔, 國家孔棘, 因山姑未卜吉, 大駕尙御外館。 爲人臣子者, 固當哀痛惶蹙, 不遑言事, 而勢有所汲汲然難容可緩者存焉, 則豈敢不仰暴於黈䌙之下乎? 竊伏惟國之安危, 繫乎官得其人; 人之賢否, 在于取之以道。 先儒曰: "天地生一也才, 自足了一世事。" 夫秉彝降衷, 豈以古今疆域有異哉? 用人之術, 未盡其道而已。 臣關西人也, 以一國涵泳之物, 屢承列聖朝淸路之許, 而終未見齒於他道之人者, 殆今三百年所。 而頃伏承通用人才之詔命, 一道含生之類, 私相慶抃曰: "此正幾百年伸冤之秋也。" 凡有學術也才諝也忠信也, 孰不手之舞足之蹈乎? 因擔䔲躡屩, 攜手相行, 來留京師者, 尙未得微品末窠, 臣竊惑之。 我國之八路, 譬猶人家之八子, 而七子則安逸好居, 一子則疲癃轉丐, 父母非不矜惻, 而獨不見哀於兄弟, 未免向隅而號泣者, 寧不悲哉? 以同胞弟而不得齒於諸子, 以一體臣民而不得肩於諸路, 雖有通天之孝、經世之才, 無復有將進之望。 臣實不知有何難貸之罪, 而朝家之視西土甚別於他方耶? 臣竊伏念, 地以人賤耶? 人以地賤耶? 岐·豐之地一也, 而周家用之, 以興仁厚之化, 嬴秦用之, 以起勇悍之氣, 惟在君上所導之如何耳。 自古聖主明王, 未有不擇善而用人也。 伏願陛下, 留神澄省焉。 粤昔東方, 初無君長, 檀君首出, 禮讓之風成; 箕聖設敎, 仁賢之化興。 而曾未聞借才而用, 易民而治也。 則西土乃東方首善之地。 地不可以人而廢, 人不可以地而忽者, 審矣。 奈之何地以人賤, 人以地廢乎? 梗楠、橡樟, 雖非衡材, 而匠石焉伐之; 騏驥、驊騮, 不但冀産, 而伯樂焉顧之。 何其物則然而人則異乎? 噫! 欲棄涼州, 係是鄧騭之謬議, 而獨借關西, 寔出虞詡之正論。 則十室之邑, 必有忠信, 堂堂四十餘州, 寧乏可用之材乎? 臣請以前古人材言之。 逮我太祖大王應天而興也, 募聚義士, 自詣麾下, 竟立佐命之勳者, 義州 張士吉也。 其在宣廟壬辰, 大駕西幸, 當此時, 箕鄕城池已爲賊據, 倉庫財粟盡爲敵有, 男負女戴道路相望 忍飢服役, 終無叛散之人。 其中蒙虎先登, 斬將搴旗, 俾三軍勇銳十倍, 能致中興之功者, 龍岡 金景瑞也。 且敵兵深入, 中宮播越, 一行上下饑乏不行, 价川 李春蘭, 自備精米三百石, 載進中路, 因扈駕步隨龍灣。 如非忠義, 焉能若是乎? 其在甲子賊臣稱兵, 社稷幾危, 奮不顧身, 先犯賊鋒, 挫其大勢, 乘勝殲賊者, 平壤 金泰屹也。 其在丁卯彼之鐵騎長驅, 所向風靡, 呼吸之間彌滿境內, 入據龍骨山城, 收散卒激忠義, 累却賊兵, 斬賊無數, 保障西門者, 鐵山 鄭鳳壽也。 思復父讎, 爲國誓死, 誘入安州城。 力戰矢窮, 死而後已者, 平壤 金良彦也。 其在丙子則金化之捷, 全賴本道將校士卒, 殊死力戰, 竭忠效力者, 安州 咸應秀也。 其他義州之乙巴素、平壤之乙支文德、江西之金泮、泰川之鮮于浹、順安之韓禹臣、永柔之金禹範、龍岡之金正國昆季、宣川之車禮亮兄弟, 皆曠世之人物。 而何況隋 煬帝之退兵, 唐 太宗之敗師, 載在古史者乎? 以此觀之, 西土人民之忠義槪可想矣。 嗚呼! 變至則西民之勞苦如此, 時平則西民之見賤如此。 陛下深居九重, 何以知西民冤迫之情, 至於此極乎? 是故往往有忠信才德之士, 讀書窮理, 談天人辨王伯, 菀爲一鄕之重望, 而州郡不能擧, 刺史不能薦。 爵祿不及, 名聲不聞, 甘爲聖代之棄物者多矣。 其在朝廷官人之政, 柔遠能邇之意, 果何如也哉? 然則, 地是三千年故都也, 人是五百年化氓也, 地是此邦之地, 人是此邦之人。 初果有何等分別, 而使之如此賤且窮也? 若謂之地是邊陲, 天不降才云爾, 則周之呂尙、漢之寇恂、晉之祖逖, 皆出於邊陲。 若謂之人本寒微, 焉能需世云爾, 則商之傅說、唐之裵度、宋之狄靑, 皆起於寒微。 天地間萬國中, 未聞畫地而枳人也。 地無要荒之殊, 人無夷夏之卞, 則一何見棄之至於此乎? 西土臣民生於聖人之世, 列於萬物而同涵雨露之澤, 燾於一天, 而獨阻日月之光。 賦形之初秉彝雖同, 落地之後其身已賤, 世世生生, 永爲通國之所棄, 此未知何故耶。 若曰關西無人才可以擢用云爾, 則試以關西之近事言之。 經史略說, 可謂府庫於八域, 而弓馬習技, 又非餘道之可比也。 惟其鐵鎖已錮, 進身沒策。 這中卓犖不羈者, 羞愧而不出, 猶恐聲息之或露, 跅弛不拘者, 悲憤欲死。 類多飮博施浪, 未克成器, 則本非天地生才之意, 而恐有損於朝家作成之效也。 嘻嘻嗟嗟! 匹夫不獲, 猶罔成功, 一時抱冤, 尙能致災, 矧乎幾萬夫之不獲, 而幾百年之抱冤也哉? 假使我東之人, 出而與天下士大夫言之曰: "我是檀君、箕子封之人"云爾, 則天下之人, 必皆敬之禮之。 而今以檀鄕箕封之人, 乃反見侮於國中, 一何甚耶? 且我東之地截長補短, 將不過數千里, 而擧一道四十四州方千餘里之地, 而全棄之者, 此亦不可使聞於隣國也。 目今關西之橫目圓臚者, 莫不憂愁鬱悒, 皆懷如不欲生之心, 甲午以後, 愈有甚焉。 抑恐愚夫愚婦, 不能無憾於天地之大也。 大凡物不得其平則鳴, 物之情也, 然而人言之則爲公論, 己道之則爲自鳴。 臣以關西之人, 陳關西之事, 誠不免自鳴之嫌, 而究其實則乃大中至當之公言也。 第念冤極必伸, 天之理也, 痛極必呼, 人之情也。 臣以不可泐之冤, 不可忍之痛, 聲不能緩, 言不知裁, 不避猥越, 罪合萬死之誅, 區區不能已者。 蓋人之一身, 氣血有所壅滯, 終成癱疽癭疣, 況一道之情, 鬱而不宣, 豈其無病乎? 伏乞聖明, 幸垂矜憐, 將臣疏本特降政府, 一體調用, 快洗屢百年積鬱之冤, 以慰方千里林葱之痛。 則天地位育之功, 於是乎大矣, 神人和應之祥, 於是乎致矣。
批曰: "所陳當留念矣。"
원본
고종 33년 (1896)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