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1권, 고종 1년 1월 13일 을묘 1/3 기사 / 1864년 청 동치(同治) 3년
차대를 하니 대신들이 정사를 올바르게 하는 도리와 각종 폐단을 진술하다
국역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정식으로 정사를 보시는 첫날입니다. 근본을 잡고 시작을 바르게 하여 스스로 지혜로운 길로 나가게 되는 것도 오늘부터이고, 덕을 높이고 왕업을 닦아 무궁한 연대를 누리게 되는 것도 오늘부터이며, 대궐 뜰에 가득한 백관들과 온 나라에 가득한 백성들이 손을 모아 축원하는 것도 오늘부터인 것입니다. 신은 걱정스럽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어 감히 권면하는 말씀을 아룁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던 날에 자성(慈聖) 전하께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글을 써서 성상께 주셨고, 성상께서는 일어나시어 공경스럽게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이야말로 순수하고 전일하게 마음을 가지는 방도를 서로 전수하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원칙을 세우고 만대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여는 것입니다.
하늘은 보거나 듣는 일을 오직 백성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인주(人主)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덕을 삼으면 하늘도 기뻐서 상서로운 온갖 복을 다 내리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그를 보좌할 적에, 주공은 자기 임금이 나라를 오랫동안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일반 사람들이 의탁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소공은 자기 임금이 오랜 연대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늘에 빌게 하기 위해서 말하기를, ‘능히 일반 백성들과 화목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공이나 소공과 같이 어진 사람들도 임금을 사랑하여 임금에게 축원하는 말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하늘을 섬기는 근본으로 삼으라.’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실로 후대 임금들의 귀감입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이나 어진 제왕들은 언제나 백성들을 생각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살펴서 한 알의 곡식과 한 조각의 천을 보아도 민간의 어려움을 반드시 생각하고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명령을 내려도 추위와 더위로 인한 민간의 원망을 고려하여 항상 해와 달처럼 비춰주고 봄볕처럼 비추어 주었습니다.
몸소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부역(賦役)과 조세(租稅)를 줄이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을 첫째 가는 정사로 삼아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였습니다. 그 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이 뭇사람의 마음속에 무젖어서 그만 즐거워하는 소리와 조화되는 기운이 위로 치솟아 하늘의 마음에 닿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백성에게 잘하고 사람들에게 잘하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하더라도 만약 옛일을 알고 옛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를 알아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한 초기에 어진 신하가 경계하여 말한 것도 오직 ‘시종 학문에 주력해야 합니다.’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니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노라."
하였다.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지금 막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대궐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거처하므로 머나먼 팔도(八道)에 있는 백성들의 형편이나 사정을 두루 살필 수도 없고 일일이 볼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령(守令)을 두어서 지역을 나누어 대리로 보살피게 하는 것이니, 백성들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진 인물을 신중히 가려 내려보내는 것이 바로 임금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큰 정사입니다.
지금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얼마 남지 않았고 수령에 결원이 많으니, 장차 후임을 선발하여 결원을 보충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요즘처럼 곤란한 적은 없었으니 빈 자리에 따라 사람을 가려 선발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또한 전하로서는 첫 정사가 시작되는 때이므로 사방에서 모두 눈을 비비고 기대하고 있으니 이 일은 전조(銓曹)에서 어떻게 집행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펼치기에 힘써 오직 인재만을 선발한다면 어찌 실효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초사(初仕)는 훗날 출재(出宰)하는 발판이 되니 그 역시 널리 알아보고 선발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따로 전조(銓曹)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수령이나 초사인(初仕人)을 신중히 선발하는 문제를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어느 때인들 신칙하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마는, 매번 형식적인 말로 흘러가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번에는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신칙해서 실효가 있도록 해야겠다."
하니, 답하기를,
"양전(兩銓)에서도 지금 연석(筵席)에 나와 발 안에서 전교하시는 것을 들은 이상 어찌 각성하여 그대로 받들어나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목전의 급선무입니다. 세 도(道)에는 본래 칙사 접대에 필요한 돈을 불려둔 것이 있었으나 해마다 줄어들어 고갈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해서(海西) 지역은 장부를 조사하여 징수하거나 찾아내면 혹 몇 분의 몇쯤은 건져 낼 가망도 있으나, 경기(京畿)와 관서(關西) 지역은 그저 명목만 남아 있어 임시로 주선하는 것은 묘당에서 청하여 얻거나, 혹은 호조의 결(結)을 규정 외에 거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민(富民)에게 억지로 칙사 접대를 돕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재산을 백지로 강탈해 쓰는 것을 응당 할 수 있는 일로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하지만 감사나 수령도 갑작스럽게 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전하께서 첫 정사를 행하시는 시기이기 때문에 일체 군색하고 그릇된 습관을 크게 고치고 새롭게 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우선 포흠(逋欠)한 것을 조사하는 방도를 유리한 편으로 마련하여 세 도의 도신(道臣)과 개성 유수(開城留守)에게 공문으로 물어서, 즉시 사리에 맞게 계문(啓聞)하게 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올해는 전하께서 즉위하신 첫 해이며 오늘은 전하가 첫 정사를 하시는 훌륭한 날입니다. 게다가 간지(干支)로 60년 중의 첫 해인 갑자년(1864)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야말로 왕위를 계승하여 원칙을 세워 만물과 더불어 새로운 계기를 열어 놓아야 할 시기입니다. 천만년의 행운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므로, 오직 전하께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흡족한 복을 생각하시고 자성(慈聖)의 높은 부탁을 받드시어 옛날 중국의 이제(二帝)나 삼왕(三王)의 제1등급의 업적으로써 자임하시기를,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들은 두 손 모아 빌고 있습니다.
그 조목들은 신이 몇 달 전 등대(登對)한 초기에 이미 하늘을 공경하고 선대를 본받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아뢴 적이 있으니, 그것이 요순(堯舜)처럼 되는 큰 도리요 근본입니다. 더구나 자성께서 의리를 세워서 가르치시고 경우에 맞게 깨우쳐 주시니 아침저녁으로 듣는 바를 받들어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불이 타오르고 물이 흐르듯 교화가 펼쳐져 그 교화를 노래하는 소리가 팔도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가 절실하므로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의정부(議政府)와 비변사(備邊司)를 다같이 묘당(廟堂)이라고 부르면서도 문건은 오직 비변사에서만 다루는 것이 극히 이상하니,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다루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조정의 중대한 일을 비변사에서만 관리하고 의정부에서는 관여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자전의 전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온 일이므로 물러가서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은 비변사가 생긴 이후에 의정부(議政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청이 되어버렸다고 여러 번 말하였고, 심지어 상소에서 언급하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지금 자전(慈殿)의 전교를 받았으니, 지당하고도 지당하십니다. 물러가서 여러 모로 상의해 본 다음 다시 품정(稟定)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론(講論)을 권고하는 것은 내각(內閣)에서 맡아 거행할 것입니다. 그 규정은 갑오년(1834)의 전례를 참작한 다음 물러가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간편하게 하여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무신(武臣)으로서 총관(總管)을 지낸 사람들을 정승의 반열로 대접하면서도 경 등이 하대하는 것은 동서반(東西班)의 체제로 보아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이제부터 다시 규정을 정하여 다음번 차대(次對) 때에 품달(稟達)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좌근이 아뢰기를,
"물러가서 의논하여 정하고 의정부에 대한 일도 함께 의논하여 정한 뒤에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오늘의 급선무는 오직 학문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지 않고 많이 듣지 못하고서는 옛일을 거울삼아 정사를 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훌륭하고 명철한 임금들은 반드시 모두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민심(民心)의 향배(向背)도 그 임금이 공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한(漢) 선제(宣帝)가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민간에서 《시경(詩經)》,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읽었으니 종묘(宗廟)를 받들고 모든 백성들을 보살필 만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갈수록 절절하게 받들어 나가고 선제(宣帝)는 민간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며, 지방 관리를 자주 교체하는 것이 폐단으로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 오랜 기간을 맡겨두어 성과를 나타내게 한 결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업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공부를 부지런히 하시면서 지방관들을 잘 선발하여 임명한다면 정사와 교화가 날로 융성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아뢴 바가 좋다. 임금을 돕고 이끄는 데서 경 등은 모름지기 성의를 다해야 한다."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강론(講論)을 권고하는 일은 언제나 길일(吉日)을 택하여 거행하였으니 그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임금이 어린 경우에는 모후(母后)께서 언제나 부지런히 권하였습니다. 명(明) 신종(神宗)이 10세 때에 황태후(皇太后)가 지성으로 공부를 권면하면서 장거정(張居正)을 시켜 공부하는 규정까지 써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신종이 혹시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태후가 침실 밖에 가서 ‘아직 일어나지 못했습니까? 강론할 관리들은 이미 모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후의 성의가 이러하였으니 임금의 공부가 어찌 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공부하는 것을 권고하기 위한 방도로는 자성 전하께서 전심하여 가르치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크게 기대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내가 왜 성의껏 공부를 권하지 않겠는가마는 매사를 바르게 지적하고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경 등은 신료들과 함께 성의를 다하여 부지런히 협조해 주기를 나 역시 기대한다."
하였다.
- 【원본】 5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원문
十三日。 次對。 領議政金左根曰: "今日卽我聖上卽祚之上甲初元也。 端本正始, 自詒哲命, 自今日伊始; 進德修業, 無疆曆服, 自今日伊始。 盈庭百僚、環域群黎之攢手祈祝者, 亦始於今日。 臣不勝惓惓憂愛之忱, 敢陳規勉之辭。 聖上御極之日, 慈聖殿下以敬天、愛民, 書授於聖上, 聖上起而敬受之, 此眞精一心法之相傳, 而爲生民立極, 爲萬世開太平者也。 上天之所視聽, 惟民是從, 故人主以愛民爲德, 則天心悅豫, 降之百祥。 昔周 成王, 沖年嗣位, 周公、召公爲之輔導, 周公欲其君之享國長久, 則曰: ‘則知小人之依’, 召公欲其君之祈天永命, 則曰: ‘丕能諴于小民’。 以周、召之賢, 而愛君祝君之語, 以愛民爲事天之本, 此實後世人主之龜鑑也。 古之哲辟懿主, 一念元元, 保如赤子。 雖一粒一縷, 必思閭閻之艱苦, 雖一言一令, 必念暑寒之怨咨, 常如日月之照臨而陽春之煦噓。 躬行節儉, 而薄其徭斂, 政先撫字, 而恤其窮匱。 好生之德, 浹洽衆心, 歡聲協氣, 上格天心。 故詩曰: ‘宜民宜人, 受祿于天者也。’ 人主雖有愛民之心, 若不監古而師古, 則何以知良法美規而擧斯措彼乎? 殷高宗作位之初, 良弼進戒之辭, 亦惟曰: ‘念終始典于學。’ 伏願殿下, 懋哉懋哉!"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左根曰: "纔以愛民之說仰陳, 而人主居九重之中, 八域遐遠之民情民勢, 無以周察而遍燭, 故設置字牧之官, 以爲分憂共理之責, 小民之苦樂休戚, 專係於司牧之官。 故愼擇循良, 卽人主愛民之大政也。 見今都政不遠, 守令多窠, 將塡代而補闕矣。 民生困瘁, 莫近日若, 隨窠揀選, 最爲急務。 又當初元之時, 八方拭目以待之, 此在銓曹對揚之何如耳。 必務恢張公明, 惟以才器爲取, 則豈無實效之著見者乎? 初仕, 他日出宰之階也。 亦不可不採訪擇擬, 此意另飭兩銓何如?" 允之。 大王大妃曰: "守令初仕愼擇, 何時不筵飭, 而每歸文具, 誠庸慨然。 今番則自廟堂各別申飭, 期有實效可也。" 對曰: "兩銓今旣登筵, 仰承簾敎。 豈不惕念對揚乎?" 又曰: "支勑一事, 爲目下急務, 而三道本有勑需錢滋殖者, 年消歲匱, 其來已久。 海西則按簿徵刷, 容或有幾分可濟, 而畿內 關西則徒存名色, 臨時拮据, 不過是廟堂請得或戶結科外之斂, 不然則富民之勒差勑監矣。 民産之白地豪奪, 看作應行之事, 是豈所忍爲也, 而爲方伯守令者, 亦倉卒無他道理而然矣。 思之及此, 寧欲無言。 今當一初之會, 凡係苟簡陋謬之習, 合有大更張大作新之擧, 爲先以刷逋之方, 從長措辦之略, 請關問三道道臣、開城留守處, 使之劃卽論理啓聞, 以爲稟處何如?" 允之。 左議政趙斗淳曰: "是年者, 殿下踐位之初元也; 今日者, 殿下出治之盛時也。 上元甲子, 統干支而爲之首, 是誠繼天立極與物更始之會也。 於千萬年, 其永啓泰於此, 惟殿下念宗祧熙洽之休, 體慈聖託付之隆, 自任以二帝三王第一等事功, 小大中外, 蚤夜攢祝, 而若其條目, 則臣於月前登對之, 初己以敬天、法祖、勤學、愛民, 仰陳之。 蓋爲堯、爲舜之大經大本也。 伏況慈聖義方之訓, 遇物之誨, 晨夕所以承聆者, 奉以行之; 體以驗之, 聖化所發, 不啻若火然泉達, 而山東父老思見德化之祝, 將徧于八域矣。" 敎曰: "所陳切實, 當體念矣。" 大王大妃曰: "政府籌司, 竝稱廟堂, 而文簿則只自備邊司擧行, 極涉如何? 自今以後。 各爲擧行可也。" 左根曰: "朝廷機務之籌司專管, 而政府則獨不與聞, 果如慈敎矣。 然而屢百年流來之事, 筵退後, 謹當相議停當矣。" 斗淳曰: "故相臣崔鳴吉, 屢以籌司設施後, 政府之爲閒司爲言, 至發於章奏矣。 今承慈敎, 至當至當, 筵退後爛商, 更爲稟定矣。" 又曰: "勸講自內閣擧行, 而講規則參酌甲午年例, 筵退後, 當稟達矣。" 大王大妃曰: "以簡便爲之, 易於曉義可也。" 仍敎曰: "武弁若經總管, 則以宰列待之, 而卿等之下對爲東西班, 體格甚不美。 自今更定規式, 後日次對稟達, 可也。" 左根曰: "筵退後議定, 而政府事, 亦一體議定後仰達矣。" 領府事鄭元容曰: "今日急先務, 惟典學是也。 非博學多聞, 則無以鑑古而爲政。 故自古聖哲之君, 必皆好學。 且民心向背, 專由於其君之學不學。 故昔漢 宣帝入承之初, 有曰: ‘在民間, 讀《詩傳》、《孝經》、《論語》, 可以承宗廟、子萬姓矣。’ 民心愈切愛戴, 而宣帝諳知民間疾苦, 以守宰之數遞爲弊, 久任責成, 遂成中興之業。 今殿下勤學而擇任長吏, 則可見治化之日隆矣。" 大王大妃曰: "所奏好矣。 輔導之責, 卿等須盡誠也。" 元容曰: "勸講日字, 每以擇吉擧行矣。 依此擧行何如?" 大王大妃曰: "依此爲之也。" 元容曰: "前代人主沖年之時, 母后每勤勸誡, 皇明神宗十歲時, 皇太后至誠勉學, 使張居正, 書進講規。 神宗或未夙興, 則太后臨寢房外言曰: ‘皇上起未, 講官已會。’ 母后之誠意如此, 則聖學安得不將就乎? 今日講學勸課之道, 深有望於慈聖殿下之一念敎導矣。" 大王大妃曰: "自內豈不誠心勸學, 而隨事啓沃之道, 卿等與臣僚之誠勤協贊, 予亦有至望者矣。"
- 【원본】 5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고종 1년 (1864) 1월 13일
고종실록1권, 고종 1년 1월 13일 을묘 1/3 기사 / 1864년 청 동치(同治) 3년
차대를 하니 대신들이 정사를 올바르게 하는 도리와 각종 폐단을 진술하다
국역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정식으로 정사를 보시는 첫날입니다. 근본을 잡고 시작을 바르게 하여 스스로 지혜로운 길로 나가게 되는 것도 오늘부터이고, 덕을 높이고 왕업을 닦아 무궁한 연대를 누리게 되는 것도 오늘부터이며, 대궐 뜰에 가득한 백관들과 온 나라에 가득한 백성들이 손을 모아 축원하는 것도 오늘부터인 것입니다. 신은 걱정스럽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어 감히 권면하는 말씀을 아룁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던 날에 자성(慈聖) 전하께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글을 써서 성상께 주셨고, 성상께서는 일어나시어 공경스럽게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이야말로 순수하고 전일하게 마음을 가지는 방도를 서로 전수하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원칙을 세우고 만대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여는 것입니다.
하늘은 보거나 듣는 일을 오직 백성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인주(人主)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덕을 삼으면 하늘도 기뻐서 상서로운 온갖 복을 다 내리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그를 보좌할 적에, 주공은 자기 임금이 나라를 오랫동안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일반 사람들이 의탁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소공은 자기 임금이 오랜 연대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늘에 빌게 하기 위해서 말하기를, ‘능히 일반 백성들과 화목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공이나 소공과 같이 어진 사람들도 임금을 사랑하여 임금에게 축원하는 말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하늘을 섬기는 근본으로 삼으라.’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실로 후대 임금들의 귀감입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이나 어진 제왕들은 언제나 백성들을 생각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살펴서 한 알의 곡식과 한 조각의 천을 보아도 민간의 어려움을 반드시 생각하고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명령을 내려도 추위와 더위로 인한 민간의 원망을 고려하여 항상 해와 달처럼 비춰주고 봄볕처럼 비추어 주었습니다.
몸소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부역(賦役)과 조세(租稅)를 줄이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을 첫째 가는 정사로 삼아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였습니다. 그 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이 뭇사람의 마음속에 무젖어서 그만 즐거워하는 소리와 조화되는 기운이 위로 치솟아 하늘의 마음에 닿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백성에게 잘하고 사람들에게 잘하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하더라도 만약 옛일을 알고 옛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좋은 법과 아름다운 규례를 알아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한 초기에 어진 신하가 경계하여 말한 것도 오직 ‘시종 학문에 주력해야 합니다.’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니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노라."
하였다.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지금 막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대궐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거처하므로 머나먼 팔도(八道)에 있는 백성들의 형편이나 사정을 두루 살필 수도 없고 일일이 볼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령(守令)을 두어서 지역을 나누어 대리로 보살피게 하는 것이니, 백성들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진 인물을 신중히 가려 내려보내는 것이 바로 임금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큰 정사입니다.
지금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얼마 남지 않았고 수령에 결원이 많으니, 장차 후임을 선발하여 결원을 보충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요즘처럼 곤란한 적은 없었으니 빈 자리에 따라 사람을 가려 선발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또한 전하로서는 첫 정사가 시작되는 때이므로 사방에서 모두 눈을 비비고 기대하고 있으니 이 일은 전조(銓曹)에서 어떻게 집행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펼치기에 힘써 오직 인재만을 선발한다면 어찌 실효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초사(初仕)는 훗날 출재(出宰)하는 발판이 되니 그 역시 널리 알아보고 선발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따로 전조(銓曹)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수령이나 초사인(初仕人)을 신중히 선발하는 문제를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어느 때인들 신칙하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마는, 매번 형식적인 말로 흘러가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번에는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신칙해서 실효가 있도록 해야겠다."
하니, 답하기를,
"양전(兩銓)에서도 지금 연석(筵席)에 나와 발 안에서 전교하시는 것을 들은 이상 어찌 각성하여 그대로 받들어나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목전의 급선무입니다. 세 도(道)에는 본래 칙사 접대에 필요한 돈을 불려둔 것이 있었으나 해마다 줄어들어 고갈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해서(海西) 지역은 장부를 조사하여 징수하거나 찾아내면 혹 몇 분의 몇쯤은 건져 낼 가망도 있으나, 경기(京畿)와 관서(關西) 지역은 그저 명목만 남아 있어 임시로 주선하는 것은 묘당에서 청하여 얻거나, 혹은 호조의 결(結)을 규정 외에 거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민(富民)에게 억지로 칙사 접대를 돕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재산을 백지로 강탈해 쓰는 것을 응당 할 수 있는 일로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하지만 감사나 수령도 갑작스럽게 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전하께서 첫 정사를 행하시는 시기이기 때문에 일체 군색하고 그릇된 습관을 크게 고치고 새롭게 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우선 포흠(逋欠)한 것을 조사하는 방도를 유리한 편으로 마련하여 세 도의 도신(道臣)과 개성 유수(開城留守)에게 공문으로 물어서, 즉시 사리에 맞게 계문(啓聞)하게 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올해는 전하께서 즉위하신 첫 해이며 오늘은 전하가 첫 정사를 하시는 훌륭한 날입니다. 게다가 간지(干支)로 60년 중의 첫 해인 갑자년(1864)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야말로 왕위를 계승하여 원칙을 세워 만물과 더불어 새로운 계기를 열어 놓아야 할 시기입니다. 천만년의 행운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므로, 오직 전하께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흡족한 복을 생각하시고 자성(慈聖)의 높은 부탁을 받드시어 옛날 중국의 이제(二帝)나 삼왕(三王)의 제1등급의 업적으로써 자임하시기를,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들은 두 손 모아 빌고 있습니다.
그 조목들은 신이 몇 달 전 등대(登對)한 초기에 이미 하늘을 공경하고 선대를 본받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아뢴 적이 있으니, 그것이 요순(堯舜)처럼 되는 큰 도리요 근본입니다. 더구나 자성께서 의리를 세워서 가르치시고 경우에 맞게 깨우쳐 주시니 아침저녁으로 듣는 바를 받들어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불이 타오르고 물이 흐르듯 교화가 펼쳐져 그 교화를 노래하는 소리가 팔도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가 절실하므로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의정부(議政府)와 비변사(備邊司)를 다같이 묘당(廟堂)이라고 부르면서도 문건은 오직 비변사에서만 다루는 것이 극히 이상하니,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다루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조정의 중대한 일을 비변사에서만 관리하고 의정부에서는 관여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자전의 전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온 일이므로 물러가서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은 비변사가 생긴 이후에 의정부(議政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청이 되어버렸다고 여러 번 말하였고, 심지어 상소에서 언급하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지금 자전(慈殿)의 전교를 받았으니, 지당하고도 지당하십니다. 물러가서 여러 모로 상의해 본 다음 다시 품정(稟定)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론(講論)을 권고하는 것은 내각(內閣)에서 맡아 거행할 것입니다. 그 규정은 갑오년(1834)의 전례를 참작한 다음 물러가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간편하게 하여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무신(武臣)으로서 총관(總管)을 지낸 사람들을 정승의 반열로 대접하면서도 경 등이 하대하는 것은 동서반(東西班)의 체제로 보아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이제부터 다시 규정을 정하여 다음번 차대(次對) 때에 품달(稟達)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좌근이 아뢰기를,
"물러가서 의논하여 정하고 의정부에 대한 일도 함께 의논하여 정한 뒤에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오늘의 급선무는 오직 학문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지 않고 많이 듣지 못하고서는 옛일을 거울삼아 정사를 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훌륭하고 명철한 임금들은 반드시 모두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민심(民心)의 향배(向背)도 그 임금이 공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한(漢) 선제(宣帝)가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민간에서 《시경(詩經)》,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읽었으니 종묘(宗廟)를 받들고 모든 백성들을 보살필 만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갈수록 절절하게 받들어 나가고 선제(宣帝)는 민간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며, 지방 관리를 자주 교체하는 것이 폐단으로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 오랜 기간을 맡겨두어 성과를 나타내게 한 결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업적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공부를 부지런히 하시면서 지방관들을 잘 선발하여 임명한다면 정사와 교화가 날로 융성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아뢴 바가 좋다. 임금을 돕고 이끄는 데서 경 등은 모름지기 성의를 다해야 한다."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강론(講論)을 권고하는 일은 언제나 길일(吉日)을 택하여 거행하였으니 그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임금이 어린 경우에는 모후(母后)께서 언제나 부지런히 권하였습니다. 명(明) 신종(神宗)이 10세 때에 황태후(皇太后)가 지성으로 공부를 권면하면서 장거정(張居正)을 시켜 공부하는 규정까지 써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신종이 혹시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태후가 침실 밖에 가서 ‘아직 일어나지 못했습니까? 강론할 관리들은 이미 모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후의 성의가 이러하였으니 임금의 공부가 어찌 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공부하는 것을 권고하기 위한 방도로는 자성 전하께서 전심하여 가르치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크게 기대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내가 왜 성의껏 공부를 권하지 않겠는가마는 매사를 바르게 지적하고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경 등은 신료들과 함께 성의를 다하여 부지런히 협조해 주기를 나 역시 기대한다."
하였다.
- 【원본】 5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원문
十三日。 次對。 領議政金左根曰: "今日卽我聖上卽祚之上甲初元也。 端本正始, 自詒哲命, 自今日伊始; 進德修業, 無疆曆服, 自今日伊始。 盈庭百僚、環域群黎之攢手祈祝者, 亦始於今日。 臣不勝惓惓憂愛之忱, 敢陳規勉之辭。 聖上御極之日, 慈聖殿下以敬天、愛民, 書授於聖上, 聖上起而敬受之, 此眞精一心法之相傳, 而爲生民立極, 爲萬世開太平者也。 上天之所視聽, 惟民是從, 故人主以愛民爲德, 則天心悅豫, 降之百祥。 昔周 成王, 沖年嗣位, 周公、召公爲之輔導, 周公欲其君之享國長久, 則曰: ‘則知小人之依’, 召公欲其君之祈天永命, 則曰: ‘丕能諴于小民’。 以周、召之賢, 而愛君祝君之語, 以愛民爲事天之本, 此實後世人主之龜鑑也。 古之哲辟懿主, 一念元元, 保如赤子。 雖一粒一縷, 必思閭閻之艱苦, 雖一言一令, 必念暑寒之怨咨, 常如日月之照臨而陽春之煦噓。 躬行節儉, 而薄其徭斂, 政先撫字, 而恤其窮匱。 好生之德, 浹洽衆心, 歡聲協氣, 上格天心。 故詩曰: ‘宜民宜人, 受祿于天者也。’ 人主雖有愛民之心, 若不監古而師古, 則何以知良法美規而擧斯措彼乎? 殷高宗作位之初, 良弼進戒之辭, 亦惟曰: ‘念終始典于學。’ 伏願殿下, 懋哉懋哉!"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左根曰: "纔以愛民之說仰陳, 而人主居九重之中, 八域遐遠之民情民勢, 無以周察而遍燭, 故設置字牧之官, 以爲分憂共理之責, 小民之苦樂休戚, 專係於司牧之官。 故愼擇循良, 卽人主愛民之大政也。 見今都政不遠, 守令多窠, 將塡代而補闕矣。 民生困瘁, 莫近日若, 隨窠揀選, 最爲急務。 又當初元之時, 八方拭目以待之, 此在銓曹對揚之何如耳。 必務恢張公明, 惟以才器爲取, 則豈無實效之著見者乎? 初仕, 他日出宰之階也。 亦不可不採訪擇擬, 此意另飭兩銓何如?" 允之。 大王大妃曰: "守令初仕愼擇, 何時不筵飭, 而每歸文具, 誠庸慨然。 今番則自廟堂各別申飭, 期有實效可也。" 對曰: "兩銓今旣登筵, 仰承簾敎。 豈不惕念對揚乎?" 又曰: "支勑一事, 爲目下急務, 而三道本有勑需錢滋殖者, 年消歲匱, 其來已久。 海西則按簿徵刷, 容或有幾分可濟, 而畿內 關西則徒存名色, 臨時拮据, 不過是廟堂請得或戶結科外之斂, 不然則富民之勒差勑監矣。 民産之白地豪奪, 看作應行之事, 是豈所忍爲也, 而爲方伯守令者, 亦倉卒無他道理而然矣。 思之及此, 寧欲無言。 今當一初之會, 凡係苟簡陋謬之習, 合有大更張大作新之擧, 爲先以刷逋之方, 從長措辦之略, 請關問三道道臣、開城留守處, 使之劃卽論理啓聞, 以爲稟處何如?" 允之。 左議政趙斗淳曰: "是年者, 殿下踐位之初元也; 今日者, 殿下出治之盛時也。 上元甲子, 統干支而爲之首, 是誠繼天立極與物更始之會也。 於千萬年, 其永啓泰於此, 惟殿下念宗祧熙洽之休, 體慈聖託付之隆, 自任以二帝三王第一等事功, 小大中外, 蚤夜攢祝, 而若其條目, 則臣於月前登對之, 初己以敬天、法祖、勤學、愛民, 仰陳之。 蓋爲堯、爲舜之大經大本也。 伏況慈聖義方之訓, 遇物之誨, 晨夕所以承聆者, 奉以行之; 體以驗之, 聖化所發, 不啻若火然泉達, 而山東父老思見德化之祝, 將徧于八域矣。" 敎曰: "所陳切實, 當體念矣。" 大王大妃曰: "政府籌司, 竝稱廟堂, 而文簿則只自備邊司擧行, 極涉如何? 自今以後。 各爲擧行可也。" 左根曰: "朝廷機務之籌司專管, 而政府則獨不與聞, 果如慈敎矣。 然而屢百年流來之事, 筵退後, 謹當相議停當矣。" 斗淳曰: "故相臣崔鳴吉, 屢以籌司設施後, 政府之爲閒司爲言, 至發於章奏矣。 今承慈敎, 至當至當, 筵退後爛商, 更爲稟定矣。" 又曰: "勸講自內閣擧行, 而講規則參酌甲午年例, 筵退後, 當稟達矣。" 大王大妃曰: "以簡便爲之, 易於曉義可也。" 仍敎曰: "武弁若經總管, 則以宰列待之, 而卿等之下對爲東西班, 體格甚不美。 自今更定規式, 後日次對稟達, 可也。" 左根曰: "筵退後議定, 而政府事, 亦一體議定後仰達矣。" 領府事鄭元容曰: "今日急先務, 惟典學是也。 非博學多聞, 則無以鑑古而爲政。 故自古聖哲之君, 必皆好學。 且民心向背, 專由於其君之學不學。 故昔漢 宣帝入承之初, 有曰: ‘在民間, 讀《詩傳》、《孝經》、《論語》, 可以承宗廟、子萬姓矣。’ 民心愈切愛戴, 而宣帝諳知民間疾苦, 以守宰之數遞爲弊, 久任責成, 遂成中興之業。 今殿下勤學而擇任長吏, 則可見治化之日隆矣。" 大王大妃曰: "所奏好矣。 輔導之責, 卿等須盡誠也。" 元容曰: "勸講日字, 每以擇吉擧行矣。 依此擧行何如?" 大王大妃曰: "依此爲之也。" 元容曰: "前代人主沖年之時, 母后每勤勸誡, 皇明神宗十歲時, 皇太后至誠勉學, 使張居正, 書進講規。 神宗或未夙興, 則太后臨寢房外言曰: ‘皇上起未, 講官已會。’ 母后之誠意如此, 則聖學安得不將就乎? 今日講學勸課之道, 深有望於慈聖殿下之一念敎導矣。" 大王大妃曰: "自內豈不誠心勸學, 而隨事啓沃之道, 卿等與臣僚之誠勤協贊, 予亦有至望者矣。"
- 【원본】 5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원본
고종 1년 (1864)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