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실록8권, 헌종 7년 8월 20일 신축 1/2 기사 / 1841년 청 도광(道光) 21년
영의정 조인영이 고 김수항의 부조와 고 권율의 사당 건립을 아뢰다
국역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신하를 부조(不祧)하는 예전(禮典)046) 은 본디 국법이 있으므로 명현(名賢)·석보(碩輔)로서 일대에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이 일에 있어서는 본디 격외(格外)로 의의(擬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순절(殉節)하였거나 화(禍)를 입은 사람으로서 특별히 베푼 경우가 많이 있으니, 이를테면 신축년047) ·임인년048) 에 화를 입은 사대신(四大臣)이 곧 그 전례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도학과 훈공은 진실로 거듭 번거롭게 선양(宣揚)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을묘년049) 에 지키고 기사년050) 에 수립한 것은 일신(一身)에 대하여 생사를 분명히 하고 만세에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운 것입니다. 마침내 참혹한 무함에 걸려서 드디어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 그 뒤에 충성을 포숭(褒崇)하는 은전이 지극하고 극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마는, 오직 부조(不祧)의 명이 미처 베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친진(親盡)하여 위패(位牌)를 옮긴 지도 여러 해가 되었는데, 참으로 국가에서 겨를이 없었던 것이나, 사림(士林)에서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치(文治)만 숭상하고 무력(武力)은 좇지 않으므로, 중간에 남구(南寇)·북환(北患)을 겪었는데, 임금을 위해 적대하여 원한을 풀어서 큰 공을 올린 자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고(故)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가장 큰 것인데, 은장(恩奬)이 황조(皇朝)에서도 나왔고, 공렬(功烈)이 국사(國史)에 분명히 실려 있으나, 제사하는 것은 오히려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해는 성조(聖朝)에서 훈공을 감정(勘定)한 해이고, 이 곳은 성상께서 거둥하신 곳이니, 이 해에 이 곳에 특별히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이어서 은액(恩額)을 내리시면 전쟁에 대한 생각과 공신을 기리는 은전에 대해 장려하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영조(營造)하는 비용은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적당히 구획(區劃)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 때에 신작현(新作峴)의 연로(輦路)가 계하(啓下)하여 관문(關文)에 전한 곳에서 벗어나 잘못 경유한 것은 아주 놀랍고 송구한 일입니다. 군대를 정돈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책임은 본병(本兵)에 있으니, 병조 판서 서희순(徐憙淳)을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註 046] 부조(不祧)하는 예전(禮典)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일.
- [註 04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4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04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 [註 05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원문
○辛丑/上御熙政堂, 引見大臣備局堂上。 領議政趙寅永啓言: "人臣不祧之禮, 自有國典, 雖名賢碩輔之表著一代者, 至於此事, 則本不得擬議於格外。 而近來多有殉節被禍人之特施者, 如辛壬被禍之四大臣, 卽其已例也。 故相臣文忠公 金壽恒之道學勳庸, 固不待更煩闡揚, 而若其乙卯之秉執, 己巳之樹立, 判死生於一身, 扶綱常於萬世。 竟罹慘搆, 遂被酷禍, 則伊後褒忠之典, 非不至矣盡矣, 惟不祧之命, 未及有施, 親盡而遷, 亦多年所, 誠朝家之未遑, 士林之齎鬱。 故敢達焉。" 從之。 又啓言: "我朝專尙文治, 武力不競, 故中經南冠北患, 而其能敵王愾而奏膚功者, 無幾。 惟故都元帥臣權慄 幸州之捷, 爲最也, 恩奬至發於皇朝, 功烈昭載於國乘, 然而俎豆芬苾, 尙無一所。 是年, 卽聖朝勘勳之年也, 是地, 卽聖上臨趾之地也, 若於是年是地, 特命建祠, 仍宣恩額, 則恐於鼓鼙之思, 旂常之典, 有所風勵。 而營造之費, 令三軍門, 量宜區劃似好, 故敢達矣。" 從之。 左議政金弘根啓言: "今番幸行時, 新作峴, 輦路之誤由於啓下傳關之外者, 萬萬驚悚。 振旅肅紀, 責在本兵, 請兵曹判書徐憙淳罷職。" 從之。
헌종 7년 (1841) 8월 20일
헌종실록8권, 헌종 7년 8월 20일 신축 1/2 기사 / 1841년 청 도광(道光) 21년
영의정 조인영이 고 김수항의 부조와 고 권율의 사당 건립을 아뢰다
국역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신하를 부조(不祧)하는 예전(禮典)046) 은 본디 국법이 있으므로 명현(名賢)·석보(碩輔)로서 일대에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이 일에 있어서는 본디 격외(格外)로 의의(擬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순절(殉節)하였거나 화(禍)를 입은 사람으로서 특별히 베푼 경우가 많이 있으니, 이를테면 신축년047) ·임인년048) 에 화를 입은 사대신(四大臣)이 곧 그 전례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도학과 훈공은 진실로 거듭 번거롭게 선양(宣揚)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을묘년049) 에 지키고 기사년050) 에 수립한 것은 일신(一身)에 대하여 생사를 분명히 하고 만세에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운 것입니다. 마침내 참혹한 무함에 걸려서 드디어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 그 뒤에 충성을 포숭(褒崇)하는 은전이 지극하고 극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마는, 오직 부조(不祧)의 명이 미처 베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친진(親盡)하여 위패(位牌)를 옮긴 지도 여러 해가 되었는데, 참으로 국가에서 겨를이 없었던 것이나, 사림(士林)에서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치(文治)만 숭상하고 무력(武力)은 좇지 않으므로, 중간에 남구(南寇)·북환(北患)을 겪었는데, 임금을 위해 적대하여 원한을 풀어서 큰 공을 올린 자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고(故)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가장 큰 것인데, 은장(恩奬)이 황조(皇朝)에서도 나왔고, 공렬(功烈)이 국사(國史)에 분명히 실려 있으나, 제사하는 것은 오히려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해는 성조(聖朝)에서 훈공을 감정(勘定)한 해이고, 이 곳은 성상께서 거둥하신 곳이니, 이 해에 이 곳에 특별히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이어서 은액(恩額)을 내리시면 전쟁에 대한 생각과 공신을 기리는 은전에 대해 장려하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영조(營造)하는 비용은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적당히 구획(區劃)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 때에 신작현(新作峴)의 연로(輦路)가 계하(啓下)하여 관문(關文)에 전한 곳에서 벗어나 잘못 경유한 것은 아주 놀랍고 송구한 일입니다. 군대를 정돈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책임은 본병(本兵)에 있으니, 병조 판서 서희순(徐憙淳)을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註 046] 부조(不祧)하는 예전(禮典)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일.
- [註 04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4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04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 [註 05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원문
○辛丑/上御熙政堂, 引見大臣備局堂上。 領議政趙寅永啓言: "人臣不祧之禮, 自有國典, 雖名賢碩輔之表著一代者, 至於此事, 則本不得擬議於格外。 而近來多有殉節被禍人之特施者, 如辛壬被禍之四大臣, 卽其已例也。 故相臣文忠公 金壽恒之道學勳庸, 固不待更煩闡揚, 而若其乙卯之秉執, 己巳之樹立, 判死生於一身, 扶綱常於萬世。 竟罹慘搆, 遂被酷禍, 則伊後褒忠之典, 非不至矣盡矣, 惟不祧之命, 未及有施, 親盡而遷, 亦多年所, 誠朝家之未遑, 士林之齎鬱。 故敢達焉。" 從之。 又啓言: "我朝專尙文治, 武力不競, 故中經南冠北患, 而其能敵王愾而奏膚功者, 無幾。 惟故都元帥臣權慄 幸州之捷, 爲最也, 恩奬至發於皇朝, 功烈昭載於國乘, 然而俎豆芬苾, 尙無一所。 是年, 卽聖朝勘勳之年也, 是地, 卽聖上臨趾之地也, 若於是年是地, 特命建祠, 仍宣恩額, 則恐於鼓鼙之思, 旂常之典, 有所風勵。 而營造之費, 令三軍門, 量宜區劃似好, 故敢達矣。" 從之。 左議政金弘根啓言: "今番幸行時, 新作峴, 輦路之誤由於啓下傳關之外者, 萬萬驚悚。 振旅肅紀, 責在本兵, 請兵曹判書徐憙淳罷職。" 從之。
원본
헌종 7년 (1841)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