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2권, 순조 1년 4월 27일 계유 2/5 기사 /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대신과 금오 당상을 소견하다. 신료들이 은언군 이인과 홍낙임의 처벌을 요청하다
국역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신 등이 바야흐로 진계(陳啓)하였으나, 아직 비지(批旨)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일은 주청(奏請)을 윤허받지 못하면 감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전께서 두세 번 연달아 언교(諺敎)를 내리셔서 속히 물러가라는 뜻으로 명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후의 성비(聖批)가 측은하게 여기시는 뜻이 정녕하였으나, 또한 감히 받들 수 없는 계책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소계(疏啓) 가운데 이미 죄다 나열했으므로, 내가 자세히 알고 있으며, 지난번 하교하였을 때에도 이미 말하였었다. 내가 비록 규중(閨中)의 한낱 부인(婦人)이라 하지만 어찌 국체(國體)와 사면(事面)을 모르겠으며, 또한 어찌 경들이 주청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윤허하지 않은 채 여러 날이 지났는데 이 또한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선조(先朝)께서 이 일 때문에 혼자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면서도 몇 년 동안 곡진히 보전하셨던 것은 곧 평일에 우러러 보았던 바이니 오늘날 군신(君臣) 상하는 마땅히 선왕께서 고심하셨던 성념(聖念)을 실추시키지 말고 선왕의 지극하신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세(國勢)를 진정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경들이 만약 마음을 합쳐 협력해서 부호(扶護)하고 정돈한다면 태산(泰山)·반석(磐石)과 같이 안정된 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 저 한 오라기 머리털 같은 목숨을 잠시 붙여두는 여부(與否)가 어찌 국세에 관계되는 바가 있겠는가? 나는 경들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정청(庭請)하여 부르짖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우선 잠시 법을 굽혀서 선왕께서 당일에 고심하셨던 성념(聖念)을 차마 변개(變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매우 우매하나, 우리 선조를 섬겨온 지 처음부터 끝까지 20여 년이 되었으니 우리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셨던 성심(聖心)을 어찌 전혀 모르겠습니까? 선조께서 심도(沁島)에 대한 일은 한 번 사단(事端)을 겪을 때마다 노심 초사하셔서 문득 천안(天顔)이 옛날만 같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홍낙임의 일에 이르러서는 선조께서 이 때문에 더욱 마음을 쓰셨는데, 외정(外廷)에서 죄다 알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을 애태워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근심하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륜(絲綸)에 드러난 것이 없었지만, 가끔 연교(筵敎)를 받들어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신 등이 진실로 온전히 보전하기 위하여 주선(周旋)하신 성심(聖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사변이 겹쳐 발생하여 한 번 변하고 두 번 변하였는데 그런 후에도 만약 풀을 베면서 뿌리까지 제거하듯이 하지 못한다면, 신 등의 한두 서생(書生)이 비록 마음을 합쳐 협력한다 하더라도 국세를 진정시키는 일에 장차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와 같이 번거롭게 하는 것은 기필코 주청(奏請)을 윤허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매우 불초하나, 또한 일찍이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시고자 하신 성심(聖心)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종사(宗社)와 국가(國家)에 대한 깊은 근심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조 때에도 신 등이 문득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뜻을 우러러 주달(奏達)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전일(前日)과 형세가 달라서 이인(李䄄)의 죄악이 진실로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홍낙임은 모년(某年) 이후부터 을미년186) 이전까지 해묵은 죄악이 이미 가득 찼으니, 진실로 그 이후에 죄를 두려워하고 물러가 몸을 근신하여 다시 별다르게 간범(干犯)한 것이 없었다면, 죄악이 또한 어찌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선조 때에 있어서는 국세가 태산·반석같이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저 무리가 계책을 부릴 수 없었으나, 지금 국세가 고단(孤單)한 때를 당하여 감히 계책을 부릴 마음을 먹고 현저하게 날뛰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이번의 사옥(邪獄)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서울과 양호(兩湖)의 옥사(獄舍)에 갇힌 사교(邪敎)의 무리뿐만 아니라, 이류(異類)와 체결(締結)하고 흉계를 부리고자 꾀하여 반드시 이러한 소굴에 투합하고자 한 것은 이 두 역적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닌 바가 없으며, 부언(浮言)·사설(邪說)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 무리가 지어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단지 대명 천지(大明天地)에 그 흉계를 부릴 수가 없었을 따름입니다. 지금은 저 무리가 이미 허다한 부언(浮言)을 지어내고 또 사교(邪敎)를 주무한 다음 이에 의뢰하고 이에 자중(藉重)하고 있는데, 이러한데도 내버려 둔다면 장차 종사(宗社)와 국가를 어찌 할 것이며, 장차 왕법(王法)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는 종사를 위하는 성덕(盛德)으로 어찌하여 흔쾌히 처분을 내리실 것은 생각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은근하고 간절하신 자교(慈敎)를 거듭 받들었는데, 신 등이 어찌 자전(慈殿)의 마음을 우러러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과 홍낙임 두 역적의 죄악은 곧 신 등이 만세에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 두 역적 때문에 여러 해를 두고 우리 선왕께서 노심 초사하셨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 등은 반 각이나마 한 하늘 아래에서 저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이미 분원(憤冤)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국세(國勢) 때문이라고 하교하셨는데, 작년 6월 이전이 오늘날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작년 이전에는 신 등이 우러러 믿는 바가 있었으므로, 비록 저 역적들이 법으로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 죄가 반드시 징토에 해당하더라도 징토하는 즈음에 온전하게 보전하려 하신 성심을 우러러 본받아 혹 허술하게 넘긴 부분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세(時勢)가 전일에 견주어 크게 다른데, 이 두 역적을 내버려 둔 채 국세를 진정시키려 한다면 실로 행해질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아! 저 두 역적의 죄는 신묘년187) 이후 몇 번을 번복하여 천만 가지 죄악이 위로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는데, 이번 사옥(邪獄)에 이르러서는 난만하게 주무한 진장(眞贓)이 이미 모두 탄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변괴가 장차 반드시 다달이 일어날 것이니 신 등이 만약 일찍이 나라를 위해 흉적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 죄는 장차 만 번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근간한 하교를 받들었으나, 오직 윤허하시는 유음(兪音)을 기다릴 뿐이며, 주청(奏請)을 윤허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거듭 자교(慈敎)를 받들었는데, ‘자심(慈心)을 편안하게 하라’고 하교하셨고, 또 ‘성상께서 양암(諒闇)188) 중에 있으므로 수응(酬應)한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오늘날 하고 많은 만 가지 일에서 진실로 자심이 편안하고 성심(聖心)이 편안한 것보다 중대한 일은 없으니 신 등이 비록 불초하고 무상할 망정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일 때문에 자심이 불안하고 성심이 불안하시니 이는 신 등이 진실로 우려하는 바입니다. 단지 삼가 생각하건대, 종사(宗社)가 안정된 후에야 자심이 편안하실 것이니, 만약 종사가 불안하다면 자심도 반드시 불안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심이 편안해지고 성심이 편안해지게 하려고 할 경우 종사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음을 합쳐서 협력하여 국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신 등이 가만히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는데, 관숙과 채숙을 죽이지 않고도 국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면 주공의 성덕(聖德)으로써 어찌 사형(死刑)으로 처치하는 데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대개 관숙과 채숙을 죽이지 않으면, 비록 국세를 진정시키고자 하더라도 진정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묘(養苗)에 비유하면 가라지를 뽑지 않은 채 화곡(禾穀)이 무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며, 병을 치료하는 데 비유하면 비적(痞積)을 제거하지 않은 채 원기(元氣)를 보충하여 양생(養生)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이 역적들을 내버려 둔 채 국세를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국세가 다만 안정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화기(禍機)가 발생하여 어떠한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나라답게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날마다 수응(酬應)하느라 잠자리가 불안하다.’라고 하신 하교를 받들었는데 구구한 이랫사람의 정리에 있어서 어찌 번민과 근심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징토를 행한 후에야 종사가 안정되고, 종사가 안정된 후에야 자심이 편안하며 성심도 또한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유음(兪音)을 받기 전에 어떻게 감히 갑자기 주청(奏請)을 정지하여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들이, ‘국세가 옛날과 다른 까닭에 종사를 부호(扶護)하고자 하여 난역(亂逆)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 말이 옳지만, 나의 뜻은 그렇지가 않다. 단지 선왕께서 곡진히 보전하려 하셨던 성념(聖念)을 준봉(遵奉)하려면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군신(君臣) 상하는 단지 마땅히 국세를 부호해야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수십 년 동안 온전하게 보전한 나머지에 별다르게 시급한 단서가 없는데도 이와 같이 급급하게 처분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국세가 옛날과 다르기 때문에 위축될 염려가 있어 미리 두려워하여 이러한 거조를 행하였다.’라고 할 것인데, 지금 국세를 돌아보건대, 반드시 말할 만한 염려스럽고 위태한 일이 없다. 대전(大殿)께서 비록 충년(沖年)에 있다 하나, 예질(睿質)이 일찌감치 성취되어 정성(鼎盛)한 나이와 다름이 없으니, 이는 수렴 청정하던 첫날에 일찍이 경들에게 언급했던 말이다. 내가 수렴 청정한 것은 단지 사방에서 듣고서 고례(古例)를 준용(遵用)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비록 종사와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 듯하나 실제로는 공고하니 오늘날의 도리는 오직 국세를 진정시키고 법으로 아랫사람을 통솔하기에 힘쓸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매양 두려워하고 위축될 걱정을 품어 몇년 동안 지난(持難)해 왔던 처분(處分)을 갑자기 내려 약한 면을 보이는 데로 돌리려 하는가? 내가 저 무리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 끝내 처분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선왕께서 이 일 때문에 지나치게 성려(聖慮)를 쓰셔서 한 번 사단(事端)이 발생한 후에는 안색이 쇠약해져 피곤함을 문득 깨달았으니, 내가 곁에서 우러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경들도 보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선친(先親)의 도를 3년 동안 고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있었던 말이다. 승하(昇遐)하신 때가 오래 되지 않았고, 이미 현재 시급한 화변(禍變)도 없는데 어찌 반드시 국세가 옛날과 다르다 하는 것인가? 주상(主上)의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지 못한 까닭에 갑자기 이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것인가? 심도(沁島)의 일은 오직 그 방수(防守)를 엄중히 하여 느슨해지지 않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홍낙임에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난처한 것이 있으니, 혜경궁(惠慶宮)이 칠순의 쇠년에 지나치게 근심하여 신기(神氣)가 늠철(凛綴)한데, 주상이 곁에서 우러러보며 지나치게 성려(聖慮)를 쓰고 계시니 내가 차마 처분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와 이러한 일들이 어찌 선조(先朝) 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장차 하교를 내릴 것이니, 경들은 모름지기 나의 말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이는 부인이 인정에 약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정에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누누이 타이르신 자교(慈敎)는 한마디도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말씀이 없으니, 신은 진실로 격앙(激昂)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전하의 춘추가 비록 정성(鼎盛)하지 못하다 하나, 타고나신 예질(睿質)이 영명하고 정령(政令)이 합당하니, 이는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흠송(欽誦)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사와 국가가 위약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자교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주달(奏達)하는 말을 미처 마치지 아니하여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비록 주상께서 충령(沖齡)에 있다 하나, 국세는 애초에 깊이 근심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항상 두려워하여 위축되는 뜻을 품고 매번 외롭고 위태로움으로써 염려하는가? 만약 이와 같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마치 구적(寇賊)이 바야흐로 닥치고 있는 것같이 여긴다면, 오랜 세월 동안 장차 어떻게 지탱해 나갈 수 있겠는가? 여러 날 동안 일제히 정청(庭請)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은 그 거조가 매우 중대한 일이니 사면(事面)으로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매우 민망스럽다. 이는 내가 수응(酬應)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대전(大殿)도 또한 어렵게 여겨 침식(寢食)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보기가 민망스럽다. 사세(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갓 상법(常法)만 지킬 수가 없으며 비록 극법(極法)으로 처단할 수는 없다 하나, 만약 방수(防守)를 엄중히 한다면 어찌 진정시킬 도리가 없겠는가? 내가 법을 굽히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전혀 법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있고 법이 있는데 역도(逆徒)에게 시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단지 일이 시급하지 않은 까닭에 선왕의 뜻을 갑자기 고칠 수가 없어서 우선 잠시 법을 굽히려는 것이다. 경들은 모름지기 이번에 내린 언교(諺敎)를 보고, 금부 당상은 먼저 물러가서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언교를 내리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주청(奏請)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의 공의(公議)이니, 내가 비록 부인(婦人)이라 하나, 어찌 대의(大義)로서 처단할 줄을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선조에서 차마 법으로 처치하지 못하신 채 지금까지 곡진히 보전하신 성의(聖意)는 불쌍히 여기신 성심(聖心)이 지극히 간절하셨던 까닭에 귀신도 족히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오르내리시는 선조의 영령(英靈)이 아득하다고 하여 어떻게 차마 갑자기 옛날의 지극하신 성의를 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청한 지 오래 되어 공의가 격렬해지고 있으니, 한결같이 굳게 거역하기도 어렵다. 강화부(江華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은 곧 그 지역에서 그 아들과 아울러 다른 집에 이배(移配)하고 천극의 율(律)을 가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 지돈녕 홍낙임은 제주목(濟州牧)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삼가 언교를 보건대, 충정(衷情)이 섬뜻하여 차마 언어로 우러러 진달(陳達)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판의금 서정수(徐鼎修)는 말하기를,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하정(下情)이 억울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우러러 바라는 것은 오로지 두 역적에게 법을 적용하는 데 있었는데, 지금 내리신 처분은 이와 같이 하여 그치는 데 불과하니, 종사와 국가의 근심이 전일보다 줄어짐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신 등은 법관(法官)입니다. 법은 역적을 다스리는 율보다 지나친 것이 없는데 나라에 법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 모양이 되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빨리 성지(聖旨)를 내리셔서 처분을 밝게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며, 심환지는 말하기를,
"누누이 타이르신 자교(慈敎)는 지극한 정성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니, 신 등이 어찌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방헌(邦憲)이 있는 바 의리가 지극히 중요한데, 역적 인을 곧 그 지역에 위리 안치하게 하셨으니, 징토하는 데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불령한 무리가 기회를 엿보는 것은 전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위리(圍籬)는 곧 가율(加律)한 것이다. 유수(留守)로 하여금 마땅히 엄중하게 방수(防守)를 더하게 하고, 우선 한 가닥 목숨을 붙여 두고 선왕의 뜻을 준수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시수가 말하기를,
"작년 6월 이전에 만약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반드시 온전하게 보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번 일은 과연 어떠한 변괴였습니까? 이류(異類)와 교통한 것이 한정이 없었으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면 모골이 모두 송연합니다. 역적을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 어떻게 하루 이틀 미루면서 우선 또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면 실형(失刑)하는 외에 여정(輿情)을 진정시킬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서용보는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반드시 선조에서 처분하셨던 대로 하도록 하교하셨습니다. 신 등은 국사를 처리할 때마다 문득 선왕(先王)께서 처분하셨던 도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 일은 형정(刑政)이 중대한 것이니 더욱 선조(先朝) 때의 일을 가지고 우러러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근일에 새로 발생하고 있는 사단(事端)이니 선조 때에 견주어 다시 한층 심각한데 이러한데도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모양의 근심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여러 날 동안 일제히 정청(庭請)하여 부르짖은 것은 감등(減等)의 율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지의금(知義禁)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신이 번거롭게 주달(奏達)하여 매우 황송합니다마는, 신 또한 여러 해 동안 근밀(近密)의 반열(班列)에 출입했었으니, 우리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려 하셨던 고심을 또한 어찌 우러러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사단(事端)을 겪을 때마다 문득 천안(天顔)이 옛날만 못하다는 탄식이 있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오장(五臟)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였습니다. 두 역적의 죄는 더욱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역적 인이 병오년189) 에 저지른 죄악과 역적 홍낙임이 을미년190) 에 저지른 죄악은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선조께서 관대히 용서하시는 성덕(聖德)을 베푸셨으니 사은(私恩)을 이미 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역절(逆節)이 더욱 드러난 후에 또 어떻게 오로지 사은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국세가 공고하다고 하교하셨는데 바야흐로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시고 태모(太母)께서 수렴 청정하고 계시어 태아(太阿)191) 가 위에 있고 기강이 실추되지 않았으니, 종사와 국가가 반석과 같이 공고하다는 것은 진실로 자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제 이 두 역적을 내버려 둔 채 마음을 합쳐서 국사에 협력하게 하려 한다면, 화란(禍亂)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은 까닭에 근심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비록 마음을 합쳐서 협력하려 하더라도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어서 스스로 전일(專一)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어질지 못한 자는 위태로운 일을 이롭게 여긴다.’라는 것은 어찌 오늘날 경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사직(社稷)이 영장(靈長)하니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마는,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선비로서 국가를 위해 먼 훗날을 염려한다면 어떻게 한갓 이것만 믿고서 영구히 그 근본을 제거할 도리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의 말 또한 그르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은 선조 때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선조께서 종사(宗社)를 위하고 대의(大義)를 위한 마음으로 처분이 오히려 이와 같은 데 그쳤으니, 이는 오늘날 유약함을 보여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가율(加律)한 것이 일률(一律)보다는 못한 듯하지만, 이미 새로 드러난 죄가 있으므로 가율한 것이다. 어찌 반드시 황급하게 갑자기 선조의 처분을 변개할 필요가 있겠는가? 홍낙임의 일에 이르러서는 혜경궁(惠慶宮)이 칠순의 쇠년(衰年)에 지극히 애통해 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겨우 지탱해 가는데 이 때문에 마음을 써서 모든 일에 아무런 경황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전(大殿)께서도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매양 한 번 승후(承候)하면 차마 우러러보지 못했으니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이 저절로 감동되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충년(沖年)의 혈기가 정해지지 않은 때에 이로 인하여 대단히 괴로운 심정을 품고 있는데, 특별히 외인(外人)을 드물게 접견하고 있으므로, 외정(外廷)에서 바라볼 때에는 비록 괴로운 심정을 억제하여 근심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울먹이지 않는 때가 없었고 마음을 애태우지 않는 때가 없었다. 이제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일이 이에 미쳤는데, 여러 신하들이 만약 옥색(玉色)을 우러러 살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울먹이며 하교하였는데, 이병모 등이 우러러보기를 마친 다음 아뢰기를,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니 몹시 우려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이에 이르러 또한 봉승(奉承)할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신 등이 우러러 주청(奏請)한 바도 또한 종사를 위해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역적을 징토할 것을 정청(庭請)하는 것은 거조가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주청을 준허(準許)받지 못한 채 갑자기 물러간다면, 이것이 어찌 도리상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성궁이 이 때문에 근심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보호하는 방도를 어떻게 허술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의리를 편 후에야 종사가 안정될 수 있고, 종사가 안정된 후에야 성심(聖心)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성궁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교하셨으니, 신은 이에 대해 거듭 우러러 주달(奏達)할 만한 말이 없습니다마는, 지금 연석(筵席)에서 주청을 윤허받지 못하고 갑자기 물러간다면, 진실로 나라 사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였다.
- [註 186]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87]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 [註 188] 양암(諒闇) : 임금이 선왕의 거상(居喪) 중에 있음.
- [註 189] 병오년 : 1786 정조 10년.
- [註 190]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91] 태아(太阿) : 제왕의 권한.
원문
○召見時、原任大臣及金吾堂上。 領府事李秉模曰: "臣等方陳啓, 姑未承批旨。 而第念此事不得請, 則不敢止。 故慈殿諺敎, 至再至三, 至命斯速退去之意。 前後聖批, 丁寧懇惻, 而亦不敢爲奉承之計矣。" 大王大妃敎曰: "疏啓中己盡臚列, 予己悉知之矣, 向者下敎, 亦已言之。 予雖閨中一婦人, 豈不知國體與事面, 亦豈不知卿等所請之正當? 而靳允之至於屢日, 亦有意存焉。 先朝以此事, 獨勞聖心, 幾年曲保, 卽平日之所仰覩, 今日之君臣上下, 固當勿墜先王之苦心, 勿負先王之至意。 而至於可以鎭國勢處, 卿等若同心協力, 扶護整頓, 則自可底磐泰之安, 彼一縷之暫貸與否, 有何係於國勢乎? 予非以卿等之言爲不然, 亦非以庭籲爲過也。 無寧姑暫屈法, 不忍變改於先王當日之苦心。 卿等可以諒此意也。" 秉模曰: "臣等雖甚愚迷, 逮事我先朝, 終始二十餘年, 亦豈全昧我先朝曲保之聖心也哉? 先朝於沁島事, 每經一番事端, 勞心焦思, 輒有天顔非昔之歎。 至於樂任事, 則先朝以此尤爲用心, 外廷之所未盡知, 而無日不焦心, 無日不勞思。 雖無發之於絲綸者, 而往往承聆於筵敎者, 非一非再, 臣等固非不知全保彌綸之聖心。 而到令事變層生, 一轉再轉之後, 若不斬草除根, 則臣等之一二書生, 雖欲同心協力, 鎭安國勢, 其將何所措手乎? 所以臣等之如是煩瀆, 期於得請者也。" 領議政沈煥之曰: "臣等雖甚不肖, 亦嘗稔知我先朝必欲曲保之聖心。 苟無宗國之深憂, 則豈敢不奉承? 而昔在先朝時, 臣等則輒以不可奉承之意仰奏。 況今時與勢有異於前日, 䄄之罪惡, 固無可言。 而樂任則某年以後, 乙未以前, 稔惡已盈, 苟於其後, 畏罪屛蹙, 更無別般干犯, 則罪惡亦豈至此之極哉? 在先朝時, 則國勢安如磐泰, 渠輩無所售計, 今當國勢孤孑之時, 敢爾生心, 顯欲跳踉。 雖以今番邪獄論之, 京獄、湖獄, 非特邪敎而已, 締結異類, 圖逞凶計, 必欲投合於此箇窩窟者, 莫非此兩賊尙在之故, 而至於浮言、邪說, 亦莫非此輩之所做出, 特以大明中天, 無以逞其凶耳。 今則渠輩, 旣做許多浮言, 又乃綢繆邪敎, 於此而依賴, 於此而藉重, 此而置之, 將奈宗國何, 將奈王法何? 以我慈聖殿下, 爲宗社之盛德, 豈不思夬降處分乎?" 左議政李時秀曰: "荐承慈敎之勤摰, 臣等豈不仰認? 而䄄、任兩賊之罪惡, 卽臣等萬世不忘之讎。 以此兩賊之故, 仰貽我先王之焦憂, 經年閱歲, 思之及此, 臣等之半刻同戴於一天之下, 已不勝其冤憤矣。 伏承慈敎, 以國勢爲敎, 而昨年六月以前, 比今日何如也? 昨年以前, 臣等有所仰恃也, 故雖彼賊之法所罔赦, 罪在必討, 而懲討之際, 仰體全保之聖心, 或未免有伈泄處。 今則時勢比前日, 大有異焉, 置此兩賊, 而欲以鎭安國勢, 實有行不得處。 噫! 彼兩賊之罪, 自辛卯以後, 幾番翻轉, 千罪萬惡, 上通于天, 至于今番邪獄, 綢繆爛漫之眞贓, 已皆破綻。 來頭如許之變怪, 必將式月斯生, 臣等若早不能爲國除凶, 則其罪將至於萬死而有餘矣。 雖承勤摰之敎, 惟俟允兪之音, 不得請, 則不敢退矣。" 右議政徐龍輔曰: "荐承慈敎, 以安慈心爲敎, 又以聖上諒闇中酬應爲敎。 今日悠悠萬事, 固莫大於安慈心而安聖心, 臣等雖不肖無狀, 日夜之所祈祝, 不出於此。 今以此事, 慈心不安, 聖心不安, 固是臣等之所憂慮。 而第伏念宗柱安然後, 慈心乃安, 宗社若不安, 則慈心必不安矣。 然則欲安慈心, 而安聖心者, 豈若安宗社之爲最急乎? 至於協力同心鎭安國勢之敎, 臣竊有可以仰復者。 周公誅管、蔡也, 不誅管、蔡, 而可以鎭安國勢, 則以周公之聖, 豈至於致辟? 而蓋以管、蔡不誅, 則雖欲鎭國勢, 而不可得焉故耳。 譬之於養苗, 不薅其狼莠, 而欲禾穀之繁茂, 譬之於治病, 不去其痞積, 而欲元氣之充養, 此必無之理也。 今若任置此賊, 而欲以安國勢, 則國勢非徒不安, 不知何樣禍機, 至於何境, 國將何以爲國乎? 又伏承連日酬應寢睡不安之敎, 區區下情, 豈勝悶慮? 而懲討行然後, 宗社安, 宗社安然後, 慈心安, 聖心亦安矣。 未蒙兪音之前, 何敢遽然停撤乎?" 大王大妃敎曰: "卿等以 ‘國勢之異昔, 欲以扶宗社而除亂逆’ 云者, 其言誠是, 而予意則不然。 只欲遵奉先王曲保之聖念, 不敢一毫違越, 而君臣上下, 但當扶護國勢而已。 乃於數十年全保之餘, 無別般時急之端, 而若是汲汲處分, 則人將曰, ‘國勢異於昔日, 故預以畏蹙之慮, 行此擧措’ 云爾。 而顧今國勢, 未必有憂危之可言。 大殿雖在沖年, 睿質之夙就, 無異鼎盛之年, 此則垂簾初日, 所嘗語及於卿等者也。 予之垂簾聽政, 特不過爲四方聽聞, 遵用古例而已。 宗國之勢, 雖似孤危, 實則鞏固, 爲今之道, 唯當務鎭國勢, 以法率下而已。 則奈之何每懷畏蹙之慮, 遽作幾年持難之處分, 以爲示弱之歸乎? 予非以渠輩爲無罪也, 亦非欲來頭終不處分也。 先王以此事, 過用聖慮, 一番事端之後, 頓覺衰憊之容, 非徒予之在傍仰瞻者然, 亦卿等之所覩記也。 三年無改, 古有是語。 禮陟之時, 去今未遠, 而旣無目下時急之變, 則何必以國勢之異昔? 主上春秋未盛之故, 而遽爲此前所未爲之事乎? 沁島事, 惟當嚴其防守, 勿令弛緩而已。 至於樂任事, 尤有難處者, 惠慶宮七旬衰年, 過用心慮, 神氣澟綴, 而主上從傍仰覩, 過用聖慮, 予之不忍處分, 亦以此也。 此時此事, 何可以異於先朝乎? 予將有下敎, 卿等須依予言擧行, 而無曰 ‘此是婦人之情弱而然也。’ 予則自以爲非弱矣。" 秉模曰: "縷縷慈敎, 無一言不合理, 實不勝激仰矣。 我殿下春秋雖未鼎盛, 睿質之天成、政令之合宜, 此是一國臣民之所欽誦。 宗國之不至危弱, 誠如慈敎。" 奏語未畢, 大王大妃敎曰: "主上雖在沖齡, 國勢初無深慮, 何必常帶畏蹙之意, 每以孤危爲慮乎? 若如是畏蹙, 如寇方至, 則許多歲月, 將何以支過乎? 多日齊籲, 擧措甚大, 揆以事面, 亦甚悶然。 非徒予之難於酬應, 大殿亦以爲難, 至於寢食之不便, 所見悶然矣。 事勢至此, 亦不可徒守常法, 雖不得斷之以極法, 若嚴其防守, 則豈無鎭定之道乎? 予非欲屈法也, 亦非欲全不用法也。 有國有法, 不施於逆徒, 將用於何處? 特以事非時急之故, 不能遽改, 姑爲暫屈。 卿等須見此下諺敎, 禁堂先退, 依此擧行也。" 仍下諺敎曰:
今日諸臣之請, 實是國人之公議, 予雖婦人, 豈不知當以大義斷之? 而第思之, 先朝不忍置法, 至今曲保之聖意, 惻怛懇懇, 有足以泣鬼神。 其在今日, 豈忍以陟降冥冥, 遽違昔日之至意也? 然庭籲日久, 公議所激, 有難一味牢拒。 江華府島置罪人䄄, 卽其地幷其子移置他家, 加律荐棘。 前知敦寧洪樂任, 濟州牧圍籬安置。
秉模曰: "伏覩諺敎, 衷情掩抑, 不忍以言語仰達矣。" 判義禁徐鼎修曰: "伏承慈敎, 下情不勝抑菀矣。 臣等今日所仰望, 惟在於兩賊之用法, 而今玆處分, 不過如斯而止, 宗國之憂虞, 未知有減於前日矣。 臣等法官也。 法莫過於治逆之律, 國而無法, 何以爲國乎? 唯願亟降聖旨, 明正處分焉。" 煥之曰: "縷縷慈敎, 至誠惻怛, 臣等豈不欲奉承? 而邦憲所在, 義理至重, 䄄賊之卽其地圍籬, 何益於懲討乎? 不逞之徒, 窺伺則一也。" 大王大妃敎曰: "圍籬, 卽加律也。 留守當嚴加防守, 而姑貸一縷, 以守先王之意, 不亦爲好乎?" 時秀曰: "昨年六月以前, 若有此事, 則先大王, 必不能全保之矣。 今番事果何等變怪也? 交通異類, 罔有紀極, 每一念至, 毛骨俱竦。 治逆之法, 豈可以一日二日, 姑且容貸乎? 如是則失刑之外, 無以鎭輿情矣。" 龍輔曰: "伏承下敎, 必以先朝處分爲敎。 臣等每當國事, 輒思先王所以處之之道, 況此事, 刑政之大者也, 尤當以先朝時事仰推。 而此乃近日新件事端, 比先朝時, 更加一層, 此而不用法, 則不知何樣憂虞, 起於何處。 臣等屢日齊籲, 非有望於減等之律也。" 知義禁李書九曰: "臣之煩奏, 極甚惶悚, 而臣亦多年出入於近密之列, 我先朝曲加全保之苦心, 亦豈不仰認? 而每經一番事端, 輒有天顔非昔之歎, 思之及此, 五內崩迫。 兩賊此罪, 尤是擧國臣民萬世不可忘之讎也。 逆䄄之丙午、樂任之乙未, 罪惡已極, 而先朝寬貸之德, 私恩則已可謂伸矣。 到今逆節益彰之後, 又豈可專主私恩乎? 伏承慈敎, 以國勢之鞏固爲敎, 方今聖明臨御, 太母聽政, 太阿在上, 紀綱不墜, 宗國之磐泰, 誠如慈敎。 而今若置此兩賊, 欲其同心於國事, 則亂本未拔, 憂虞自在, 雖欲同心協贊, 而心有所係, 自不能專一。 孟子所謂, ‘安其危而利其菑’ 者, 豈非今日之所可戒哉? 社稷靈長, 豈有他憂? 而忠志之士, 爲國家遠慮者, 豈可徒恃於此, 而不思所以永拔根本之道乎?" 大王大妃敎曰: "重臣之言, 亦非曰非矣, 而今時與先朝之時無異。 以先朝爲宗社爲大義之心, 處分猶止如此, 此非今日之示弱而然也。 加律似遜於一律, 而旣有新發之罪, 故所以加其律也。 何必遑遑汲汲猝變先朝之處分乎? 至於樂任事, 惠慶宮七旬衰年, 至慟哀疚之中, 僅僅支過, 而以此用心, 凡百澟綴。 大殿不勝焦迫, 每一承候, 輒不忍仰瞻, 出天之睿孝, 自有油然而感發者。 沖年血氣未定之時, 以此大段疚懷, 特以罕接外人之故, 外廷瞻視之時, 雖或强抑睿思, 不露慼容, 而無時不掩抑, 無時不焦迫。 今因言端而及之, 諸臣若仰瞻玉色, 則可以知之矣。" 仍掩抑下敎, 秉模等仰瞻訖, 奏曰: "仰瞻天顔, 不勝憂慮之萬萬。 臣等到此, 亦非不思奉承, 而臣等之所仰請, 亦出於爲宗社迫不得已之擧也。 討逆庭請, 擧措至大, 未準請而遽退, 則是豈道理之所敢出乎?" 大王大妃敎曰: "今日之事, 無如保護聖躬。 聖躬以此用慮, 至於如此, 其所以保護之方, 豈可歇後乎?" 煥之曰: "義理伸然後, 宗社可安, 宗社安然後, 聖心可安。 而伏承慈敎, 以保聖躬爲敎, 臣於此, 更無可達, 而今筵未得準請而遽退, 則實無見國人之顔矣。"
순조실록2권, 순조 1년 4월 27일 계유 2/5 기사 /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대신과 금오 당상을 소견하다. 신료들이 은언군 이인과 홍낙임의 처벌을 요청하다
국역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신 등이 바야흐로 진계(陳啓)하였으나, 아직 비지(批旨)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일은 주청(奏請)을 윤허받지 못하면 감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전께서 두세 번 연달아 언교(諺敎)를 내리셔서 속히 물러가라는 뜻으로 명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후의 성비(聖批)가 측은하게 여기시는 뜻이 정녕하였으나, 또한 감히 받들 수 없는 계책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소계(疏啓) 가운데 이미 죄다 나열했으므로, 내가 자세히 알고 있으며, 지난번 하교하였을 때에도 이미 말하였었다. 내가 비록 규중(閨中)의 한낱 부인(婦人)이라 하지만 어찌 국체(國體)와 사면(事面)을 모르겠으며, 또한 어찌 경들이 주청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윤허하지 않은 채 여러 날이 지났는데 이 또한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선조(先朝)께서 이 일 때문에 혼자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면서도 몇 년 동안 곡진히 보전하셨던 것은 곧 평일에 우러러 보았던 바이니 오늘날 군신(君臣) 상하는 마땅히 선왕께서 고심하셨던 성념(聖念)을 실추시키지 말고 선왕의 지극하신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세(國勢)를 진정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경들이 만약 마음을 합쳐 협력해서 부호(扶護)하고 정돈한다면 태산(泰山)·반석(磐石)과 같이 안정된 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 저 한 오라기 머리털 같은 목숨을 잠시 붙여두는 여부(與否)가 어찌 국세에 관계되는 바가 있겠는가? 나는 경들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정청(庭請)하여 부르짖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우선 잠시 법을 굽혀서 선왕께서 당일에 고심하셨던 성념(聖念)을 차마 변개(變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매우 우매하나, 우리 선조를 섬겨온 지 처음부터 끝까지 20여 년이 되었으니 우리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셨던 성심(聖心)을 어찌 전혀 모르겠습니까? 선조께서 심도(沁島)에 대한 일은 한 번 사단(事端)을 겪을 때마다 노심 초사하셔서 문득 천안(天顔)이 옛날만 같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홍낙임의 일에 이르러서는 선조께서 이 때문에 더욱 마음을 쓰셨는데, 외정(外廷)에서 죄다 알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을 애태워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근심하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륜(絲綸)에 드러난 것이 없었지만, 가끔 연교(筵敎)를 받들어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신 등이 진실로 온전히 보전하기 위하여 주선(周旋)하신 성심(聖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사변이 겹쳐 발생하여 한 번 변하고 두 번 변하였는데 그런 후에도 만약 풀을 베면서 뿌리까지 제거하듯이 하지 못한다면, 신 등의 한두 서생(書生)이 비록 마음을 합쳐 협력한다 하더라도 국세를 진정시키는 일에 장차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와 같이 번거롭게 하는 것은 기필코 주청(奏請)을 윤허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매우 불초하나, 또한 일찍이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시고자 하신 성심(聖心)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종사(宗社)와 국가(國家)에 대한 깊은 근심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조 때에도 신 등이 문득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뜻을 우러러 주달(奏達)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전일(前日)과 형세가 달라서 이인(李䄄)의 죄악이 진실로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홍낙임은 모년(某年) 이후부터 을미년186) 이전까지 해묵은 죄악이 이미 가득 찼으니, 진실로 그 이후에 죄를 두려워하고 물러가 몸을 근신하여 다시 별다르게 간범(干犯)한 것이 없었다면, 죄악이 또한 어찌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선조 때에 있어서는 국세가 태산·반석같이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저 무리가 계책을 부릴 수 없었으나, 지금 국세가 고단(孤單)한 때를 당하여 감히 계책을 부릴 마음을 먹고 현저하게 날뛰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이번의 사옥(邪獄)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서울과 양호(兩湖)의 옥사(獄舍)에 갇힌 사교(邪敎)의 무리뿐만 아니라, 이류(異類)와 체결(締結)하고 흉계를 부리고자 꾀하여 반드시 이러한 소굴에 투합하고자 한 것은 이 두 역적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닌 바가 없으며, 부언(浮言)·사설(邪說)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 무리가 지어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단지 대명 천지(大明天地)에 그 흉계를 부릴 수가 없었을 따름입니다. 지금은 저 무리가 이미 허다한 부언(浮言)을 지어내고 또 사교(邪敎)를 주무한 다음 이에 의뢰하고 이에 자중(藉重)하고 있는데, 이러한데도 내버려 둔다면 장차 종사(宗社)와 국가를 어찌 할 것이며, 장차 왕법(王法)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는 종사를 위하는 성덕(盛德)으로 어찌하여 흔쾌히 처분을 내리실 것은 생각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은근하고 간절하신 자교(慈敎)를 거듭 받들었는데, 신 등이 어찌 자전(慈殿)의 마음을 우러러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과 홍낙임 두 역적의 죄악은 곧 신 등이 만세에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 두 역적 때문에 여러 해를 두고 우리 선왕께서 노심 초사하셨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 등은 반 각이나마 한 하늘 아래에서 저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이미 분원(憤冤)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국세(國勢) 때문이라고 하교하셨는데, 작년 6월 이전이 오늘날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작년 이전에는 신 등이 우러러 믿는 바가 있었으므로, 비록 저 역적들이 법으로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 죄가 반드시 징토에 해당하더라도 징토하는 즈음에 온전하게 보전하려 하신 성심을 우러러 본받아 혹 허술하게 넘긴 부분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세(時勢)가 전일에 견주어 크게 다른데, 이 두 역적을 내버려 둔 채 국세를 진정시키려 한다면 실로 행해질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아! 저 두 역적의 죄는 신묘년187) 이후 몇 번을 번복하여 천만 가지 죄악이 위로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는데, 이번 사옥(邪獄)에 이르러서는 난만하게 주무한 진장(眞贓)이 이미 모두 탄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변괴가 장차 반드시 다달이 일어날 것이니 신 등이 만약 일찍이 나라를 위해 흉적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 죄는 장차 만 번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근간한 하교를 받들었으나, 오직 윤허하시는 유음(兪音)을 기다릴 뿐이며, 주청(奏請)을 윤허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거듭 자교(慈敎)를 받들었는데, ‘자심(慈心)을 편안하게 하라’고 하교하셨고, 또 ‘성상께서 양암(諒闇)188) 중에 있으므로 수응(酬應)한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오늘날 하고 많은 만 가지 일에서 진실로 자심이 편안하고 성심(聖心)이 편안한 것보다 중대한 일은 없으니 신 등이 비록 불초하고 무상할 망정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일 때문에 자심이 불안하고 성심이 불안하시니 이는 신 등이 진실로 우려하는 바입니다. 단지 삼가 생각하건대, 종사(宗社)가 안정된 후에야 자심이 편안하실 것이니, 만약 종사가 불안하다면 자심도 반드시 불안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심이 편안해지고 성심이 편안해지게 하려고 할 경우 종사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음을 합쳐서 협력하여 국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신 등이 가만히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는데, 관숙과 채숙을 죽이지 않고도 국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면 주공의 성덕(聖德)으로써 어찌 사형(死刑)으로 처치하는 데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대개 관숙과 채숙을 죽이지 않으면, 비록 국세를 진정시키고자 하더라도 진정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묘(養苗)에 비유하면 가라지를 뽑지 않은 채 화곡(禾穀)이 무성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며, 병을 치료하는 데 비유하면 비적(痞積)을 제거하지 않은 채 원기(元氣)를 보충하여 양생(養生)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이 역적들을 내버려 둔 채 국세를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국세가 다만 안정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화기(禍機)가 발생하여 어떠한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나라답게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날마다 수응(酬應)하느라 잠자리가 불안하다.’라고 하신 하교를 받들었는데 구구한 이랫사람의 정리에 있어서 어찌 번민과 근심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징토를 행한 후에야 종사가 안정되고, 종사가 안정된 후에야 자심이 편안하며 성심도 또한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유음(兪音)을 받기 전에 어떻게 감히 갑자기 주청(奏請)을 정지하여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들이, ‘국세가 옛날과 다른 까닭에 종사를 부호(扶護)하고자 하여 난역(亂逆)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 말이 옳지만, 나의 뜻은 그렇지가 않다. 단지 선왕께서 곡진히 보전하려 하셨던 성념(聖念)을 준봉(遵奉)하려면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군신(君臣) 상하는 단지 마땅히 국세를 부호해야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수십 년 동안 온전하게 보전한 나머지에 별다르게 시급한 단서가 없는데도 이와 같이 급급하게 처분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국세가 옛날과 다르기 때문에 위축될 염려가 있어 미리 두려워하여 이러한 거조를 행하였다.’라고 할 것인데, 지금 국세를 돌아보건대, 반드시 말할 만한 염려스럽고 위태한 일이 없다. 대전(大殿)께서 비록 충년(沖年)에 있다 하나, 예질(睿質)이 일찌감치 성취되어 정성(鼎盛)한 나이와 다름이 없으니, 이는 수렴 청정하던 첫날에 일찍이 경들에게 언급했던 말이다. 내가 수렴 청정한 것은 단지 사방에서 듣고서 고례(古例)를 준용(遵用)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비록 종사와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 듯하나 실제로는 공고하니 오늘날의 도리는 오직 국세를 진정시키고 법으로 아랫사람을 통솔하기에 힘쓸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매양 두려워하고 위축될 걱정을 품어 몇년 동안 지난(持難)해 왔던 처분(處分)을 갑자기 내려 약한 면을 보이는 데로 돌리려 하는가? 내가 저 무리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 끝내 처분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선왕께서 이 일 때문에 지나치게 성려(聖慮)를 쓰셔서 한 번 사단(事端)이 발생한 후에는 안색이 쇠약해져 피곤함을 문득 깨달았으니, 내가 곁에서 우러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경들도 보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선친(先親)의 도를 3년 동안 고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있었던 말이다. 승하(昇遐)하신 때가 오래 되지 않았고, 이미 현재 시급한 화변(禍變)도 없는데 어찌 반드시 국세가 옛날과 다르다 하는 것인가? 주상(主上)의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지 못한 까닭에 갑자기 이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것인가? 심도(沁島)의 일은 오직 그 방수(防守)를 엄중히 하여 느슨해지지 않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홍낙임에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난처한 것이 있으니, 혜경궁(惠慶宮)이 칠순의 쇠년에 지나치게 근심하여 신기(神氣)가 늠철(凛綴)한데, 주상이 곁에서 우러러보며 지나치게 성려(聖慮)를 쓰고 계시니 내가 차마 처분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와 이러한 일들이 어찌 선조(先朝) 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장차 하교를 내릴 것이니, 경들은 모름지기 나의 말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이는 부인이 인정에 약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정에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누누이 타이르신 자교(慈敎)는 한마디도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말씀이 없으니, 신은 진실로 격앙(激昂)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전하의 춘추가 비록 정성(鼎盛)하지 못하다 하나, 타고나신 예질(睿質)이 영명하고 정령(政令)이 합당하니, 이는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흠송(欽誦)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사와 국가가 위약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자교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주달(奏達)하는 말을 미처 마치지 아니하여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비록 주상께서 충령(沖齡)에 있다 하나, 국세는 애초에 깊이 근심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항상 두려워하여 위축되는 뜻을 품고 매번 외롭고 위태로움으로써 염려하는가? 만약 이와 같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마치 구적(寇賊)이 바야흐로 닥치고 있는 것같이 여긴다면, 오랜 세월 동안 장차 어떻게 지탱해 나갈 수 있겠는가? 여러 날 동안 일제히 정청(庭請)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은 그 거조가 매우 중대한 일이니 사면(事面)으로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매우 민망스럽다. 이는 내가 수응(酬應)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대전(大殿)도 또한 어렵게 여겨 침식(寢食)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보기가 민망스럽다. 사세(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갓 상법(常法)만 지킬 수가 없으며 비록 극법(極法)으로 처단할 수는 없다 하나, 만약 방수(防守)를 엄중히 한다면 어찌 진정시킬 도리가 없겠는가? 내가 법을 굽히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전혀 법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있고 법이 있는데 역도(逆徒)에게 시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단지 일이 시급하지 않은 까닭에 선왕의 뜻을 갑자기 고칠 수가 없어서 우선 잠시 법을 굽히려는 것이다. 경들은 모름지기 이번에 내린 언교(諺敎)를 보고, 금부 당상은 먼저 물러가서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언교를 내리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주청(奏請)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의 공의(公議)이니, 내가 비록 부인(婦人)이라 하나, 어찌 대의(大義)로서 처단할 줄을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선조에서 차마 법으로 처치하지 못하신 채 지금까지 곡진히 보전하신 성의(聖意)는 불쌍히 여기신 성심(聖心)이 지극히 간절하셨던 까닭에 귀신도 족히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오르내리시는 선조의 영령(英靈)이 아득하다고 하여 어떻게 차마 갑자기 옛날의 지극하신 성의를 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청한 지 오래 되어 공의가 격렬해지고 있으니, 한결같이 굳게 거역하기도 어렵다. 강화부(江華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은 곧 그 지역에서 그 아들과 아울러 다른 집에 이배(移配)하고 천극의 율(律)을 가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 지돈녕 홍낙임은 제주목(濟州牧)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삼가 언교를 보건대, 충정(衷情)이 섬뜻하여 차마 언어로 우러러 진달(陳達)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판의금 서정수(徐鼎修)는 말하기를,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하정(下情)이 억울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우러러 바라는 것은 오로지 두 역적에게 법을 적용하는 데 있었는데, 지금 내리신 처분은 이와 같이 하여 그치는 데 불과하니, 종사와 국가의 근심이 전일보다 줄어짐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신 등은 법관(法官)입니다. 법은 역적을 다스리는 율보다 지나친 것이 없는데 나라에 법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 모양이 되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빨리 성지(聖旨)를 내리셔서 처분을 밝게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며, 심환지는 말하기를,
"누누이 타이르신 자교(慈敎)는 지극한 정성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니, 신 등이 어찌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방헌(邦憲)이 있는 바 의리가 지극히 중요한데, 역적 인을 곧 그 지역에 위리 안치하게 하셨으니, 징토하는 데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불령한 무리가 기회를 엿보는 것은 전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위리(圍籬)는 곧 가율(加律)한 것이다. 유수(留守)로 하여금 마땅히 엄중하게 방수(防守)를 더하게 하고, 우선 한 가닥 목숨을 붙여 두고 선왕의 뜻을 준수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시수가 말하기를,
"작년 6월 이전에 만약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반드시 온전하게 보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번 일은 과연 어떠한 변괴였습니까? 이류(異類)와 교통한 것이 한정이 없었으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면 모골이 모두 송연합니다. 역적을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 어떻게 하루 이틀 미루면서 우선 또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면 실형(失刑)하는 외에 여정(輿情)을 진정시킬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서용보는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반드시 선조에서 처분하셨던 대로 하도록 하교하셨습니다. 신 등은 국사를 처리할 때마다 문득 선왕(先王)께서 처분하셨던 도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 일은 형정(刑政)이 중대한 것이니 더욱 선조(先朝) 때의 일을 가지고 우러러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근일에 새로 발생하고 있는 사단(事端)이니 선조 때에 견주어 다시 한층 심각한데 이러한데도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모양의 근심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여러 날 동안 일제히 정청(庭請)하여 부르짖은 것은 감등(減等)의 율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지의금(知義禁)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신이 번거롭게 주달(奏達)하여 매우 황송합니다마는, 신 또한 여러 해 동안 근밀(近密)의 반열(班列)에 출입했었으니, 우리 선조께서 곡진히 보전하려 하셨던 고심을 또한 어찌 우러러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사단(事端)을 겪을 때마다 문득 천안(天顔)이 옛날만 못하다는 탄식이 있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오장(五臟)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였습니다. 두 역적의 죄는 더욱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역적 인이 병오년189) 에 저지른 죄악과 역적 홍낙임이 을미년190) 에 저지른 죄악은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선조께서 관대히 용서하시는 성덕(聖德)을 베푸셨으니 사은(私恩)을 이미 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역절(逆節)이 더욱 드러난 후에 또 어떻게 오로지 사은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국세가 공고하다고 하교하셨는데 바야흐로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시고 태모(太母)께서 수렴 청정하고 계시어 태아(太阿)191) 가 위에 있고 기강이 실추되지 않았으니, 종사와 국가가 반석과 같이 공고하다는 것은 진실로 자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제 이 두 역적을 내버려 둔 채 마음을 합쳐서 국사에 협력하게 하려 한다면, 화란(禍亂)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은 까닭에 근심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비록 마음을 합쳐서 협력하려 하더라도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어서 스스로 전일(專一)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어질지 못한 자는 위태로운 일을 이롭게 여긴다.’라는 것은 어찌 오늘날 경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사직(社稷)이 영장(靈長)하니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마는,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선비로서 국가를 위해 먼 훗날을 염려한다면 어떻게 한갓 이것만 믿고서 영구히 그 근본을 제거할 도리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의 말 또한 그르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은 선조 때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선조께서 종사(宗社)를 위하고 대의(大義)를 위한 마음으로 처분이 오히려 이와 같은 데 그쳤으니, 이는 오늘날 유약함을 보여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가율(加律)한 것이 일률(一律)보다는 못한 듯하지만, 이미 새로 드러난 죄가 있으므로 가율한 것이다. 어찌 반드시 황급하게 갑자기 선조의 처분을 변개할 필요가 있겠는가? 홍낙임의 일에 이르러서는 혜경궁(惠慶宮)이 칠순의 쇠년(衰年)에 지극히 애통해 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겨우 지탱해 가는데 이 때문에 마음을 써서 모든 일에 아무런 경황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전(大殿)께서도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매양 한 번 승후(承候)하면 차마 우러러보지 못했으니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이 저절로 감동되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충년(沖年)의 혈기가 정해지지 않은 때에 이로 인하여 대단히 괴로운 심정을 품고 있는데, 특별히 외인(外人)을 드물게 접견하고 있으므로, 외정(外廷)에서 바라볼 때에는 비록 괴로운 심정을 억제하여 근심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울먹이지 않는 때가 없었고 마음을 애태우지 않는 때가 없었다. 이제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일이 이에 미쳤는데, 여러 신하들이 만약 옥색(玉色)을 우러러 살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울먹이며 하교하였는데, 이병모 등이 우러러보기를 마친 다음 아뢰기를,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니 몹시 우려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이에 이르러 또한 봉승(奉承)할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신 등이 우러러 주청(奏請)한 바도 또한 종사를 위해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역적을 징토할 것을 정청(庭請)하는 것은 거조가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주청을 준허(準許)받지 못한 채 갑자기 물러간다면, 이것이 어찌 도리상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성궁이 이 때문에 근심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보호하는 방도를 어떻게 허술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의리를 편 후에야 종사가 안정될 수 있고, 종사가 안정된 후에야 성심(聖心)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삼가 자교(慈敎)를 받들건대, 성궁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교하셨으니, 신은 이에 대해 거듭 우러러 주달(奏達)할 만한 말이 없습니다마는, 지금 연석(筵席)에서 주청을 윤허받지 못하고 갑자기 물러간다면, 진실로 나라 사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였다.
- [註 186]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87]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 [註 188] 양암(諒闇) : 임금이 선왕의 거상(居喪) 중에 있음.
- [註 189] 병오년 : 1786 정조 10년.
- [註 190]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91] 태아(太阿) : 제왕의 권한.
원문
○召見時、原任大臣及金吾堂上。 領府事李秉模曰: "臣等方陳啓, 姑未承批旨。 而第念此事不得請, 則不敢止。 故慈殿諺敎, 至再至三, 至命斯速退去之意。 前後聖批, 丁寧懇惻, 而亦不敢爲奉承之計矣。" 大王大妃敎曰: "疏啓中己盡臚列, 予己悉知之矣, 向者下敎, 亦已言之。 予雖閨中一婦人, 豈不知國體與事面, 亦豈不知卿等所請之正當? 而靳允之至於屢日, 亦有意存焉。 先朝以此事, 獨勞聖心, 幾年曲保, 卽平日之所仰覩, 今日之君臣上下, 固當勿墜先王之苦心, 勿負先王之至意。 而至於可以鎭國勢處, 卿等若同心協力, 扶護整頓, 則自可底磐泰之安, 彼一縷之暫貸與否, 有何係於國勢乎? 予非以卿等之言爲不然, 亦非以庭籲爲過也。 無寧姑暫屈法, 不忍變改於先王當日之苦心。 卿等可以諒此意也。" 秉模曰: "臣等雖甚愚迷, 逮事我先朝, 終始二十餘年, 亦豈全昧我先朝曲保之聖心也哉? 先朝於沁島事, 每經一番事端, 勞心焦思, 輒有天顔非昔之歎。 至於樂任事, 則先朝以此尤爲用心, 外廷之所未盡知, 而無日不焦心, 無日不勞思。 雖無發之於絲綸者, 而往往承聆於筵敎者, 非一非再, 臣等固非不知全保彌綸之聖心。 而到令事變層生, 一轉再轉之後, 若不斬草除根, 則臣等之一二書生, 雖欲同心協力, 鎭安國勢, 其將何所措手乎? 所以臣等之如是煩瀆, 期於得請者也。" 領議政沈煥之曰: "臣等雖甚不肖, 亦嘗稔知我先朝必欲曲保之聖心。 苟無宗國之深憂, 則豈敢不奉承? 而昔在先朝時, 臣等則輒以不可奉承之意仰奏。 況今時與勢有異於前日, 䄄之罪惡, 固無可言。 而樂任則某年以後, 乙未以前, 稔惡已盈, 苟於其後, 畏罪屛蹙, 更無別般干犯, 則罪惡亦豈至此之極哉? 在先朝時, 則國勢安如磐泰, 渠輩無所售計, 今當國勢孤孑之時, 敢爾生心, 顯欲跳踉。 雖以今番邪獄論之, 京獄、湖獄, 非特邪敎而已, 締結異類, 圖逞凶計, 必欲投合於此箇窩窟者, 莫非此兩賊尙在之故, 而至於浮言、邪說, 亦莫非此輩之所做出, 特以大明中天, 無以逞其凶耳。 今則渠輩, 旣做許多浮言, 又乃綢繆邪敎, 於此而依賴, 於此而藉重, 此而置之, 將奈宗國何, 將奈王法何? 以我慈聖殿下, 爲宗社之盛德, 豈不思夬降處分乎?" 左議政李時秀曰: "荐承慈敎之勤摰, 臣等豈不仰認? 而䄄、任兩賊之罪惡, 卽臣等萬世不忘之讎。 以此兩賊之故, 仰貽我先王之焦憂, 經年閱歲, 思之及此, 臣等之半刻同戴於一天之下, 已不勝其冤憤矣。 伏承慈敎, 以國勢爲敎, 而昨年六月以前, 比今日何如也? 昨年以前, 臣等有所仰恃也, 故雖彼賊之法所罔赦, 罪在必討, 而懲討之際, 仰體全保之聖心, 或未免有伈泄處。 今則時勢比前日, 大有異焉, 置此兩賊, 而欲以鎭安國勢, 實有行不得處。 噫! 彼兩賊之罪, 自辛卯以後, 幾番翻轉, 千罪萬惡, 上通于天, 至于今番邪獄, 綢繆爛漫之眞贓, 已皆破綻。 來頭如許之變怪, 必將式月斯生, 臣等若早不能爲國除凶, 則其罪將至於萬死而有餘矣。 雖承勤摰之敎, 惟俟允兪之音, 不得請, 則不敢退矣。" 右議政徐龍輔曰: "荐承慈敎, 以安慈心爲敎, 又以聖上諒闇中酬應爲敎。 今日悠悠萬事, 固莫大於安慈心而安聖心, 臣等雖不肖無狀, 日夜之所祈祝, 不出於此。 今以此事, 慈心不安, 聖心不安, 固是臣等之所憂慮。 而第伏念宗柱安然後, 慈心乃安, 宗社若不安, 則慈心必不安矣。 然則欲安慈心, 而安聖心者, 豈若安宗社之爲最急乎? 至於協力同心鎭安國勢之敎, 臣竊有可以仰復者。 周公誅管、蔡也, 不誅管、蔡, 而可以鎭安國勢, 則以周公之聖, 豈至於致辟? 而蓋以管、蔡不誅, 則雖欲鎭國勢, 而不可得焉故耳。 譬之於養苗, 不薅其狼莠, 而欲禾穀之繁茂, 譬之於治病, 不去其痞積, 而欲元氣之充養, 此必無之理也。 今若任置此賊, 而欲以安國勢, 則國勢非徒不安, 不知何樣禍機, 至於何境, 國將何以爲國乎? 又伏承連日酬應寢睡不安之敎, 區區下情, 豈勝悶慮? 而懲討行然後, 宗社安, 宗社安然後, 慈心安, 聖心亦安矣。 未蒙兪音之前, 何敢遽然停撤乎?" 大王大妃敎曰: "卿等以 ‘國勢之異昔, 欲以扶宗社而除亂逆’ 云者, 其言誠是, 而予意則不然。 只欲遵奉先王曲保之聖念, 不敢一毫違越, 而君臣上下, 但當扶護國勢而已。 乃於數十年全保之餘, 無別般時急之端, 而若是汲汲處分, 則人將曰, ‘國勢異於昔日, 故預以畏蹙之慮, 行此擧措’ 云爾。 而顧今國勢, 未必有憂危之可言。 大殿雖在沖年, 睿質之夙就, 無異鼎盛之年, 此則垂簾初日, 所嘗語及於卿等者也。 予之垂簾聽政, 特不過爲四方聽聞, 遵用古例而已。 宗國之勢, 雖似孤危, 實則鞏固, 爲今之道, 唯當務鎭國勢, 以法率下而已。 則奈之何每懷畏蹙之慮, 遽作幾年持難之處分, 以爲示弱之歸乎? 予非以渠輩爲無罪也, 亦非欲來頭終不處分也。 先王以此事, 過用聖慮, 一番事端之後, 頓覺衰憊之容, 非徒予之在傍仰瞻者然, 亦卿等之所覩記也。 三年無改, 古有是語。 禮陟之時, 去今未遠, 而旣無目下時急之變, 則何必以國勢之異昔? 主上春秋未盛之故, 而遽爲此前所未爲之事乎? 沁島事, 惟當嚴其防守, 勿令弛緩而已。 至於樂任事, 尤有難處者, 惠慶宮七旬衰年, 過用心慮, 神氣澟綴, 而主上從傍仰覩, 過用聖慮, 予之不忍處分, 亦以此也。 此時此事, 何可以異於先朝乎? 予將有下敎, 卿等須依予言擧行, 而無曰 ‘此是婦人之情弱而然也。’ 予則自以爲非弱矣。" 秉模曰: "縷縷慈敎, 無一言不合理, 實不勝激仰矣。 我殿下春秋雖未鼎盛, 睿質之天成、政令之合宜, 此是一國臣民之所欽誦。 宗國之不至危弱, 誠如慈敎。" 奏語未畢, 大王大妃敎曰: "主上雖在沖齡, 國勢初無深慮, 何必常帶畏蹙之意, 每以孤危爲慮乎? 若如是畏蹙, 如寇方至, 則許多歲月, 將何以支過乎? 多日齊籲, 擧措甚大, 揆以事面, 亦甚悶然。 非徒予之難於酬應, 大殿亦以爲難, 至於寢食之不便, 所見悶然矣。 事勢至此, 亦不可徒守常法, 雖不得斷之以極法, 若嚴其防守, 則豈無鎭定之道乎? 予非欲屈法也, 亦非欲全不用法也。 有國有法, 不施於逆徒, 將用於何處? 特以事非時急之故, 不能遽改, 姑爲暫屈。 卿等須見此下諺敎, 禁堂先退, 依此擧行也。" 仍下諺敎曰:
今日諸臣之請, 實是國人之公議, 予雖婦人, 豈不知當以大義斷之? 而第思之, 先朝不忍置法, 至今曲保之聖意, 惻怛懇懇, 有足以泣鬼神。 其在今日, 豈忍以陟降冥冥, 遽違昔日之至意也? 然庭籲日久, 公議所激, 有難一味牢拒。 江華府島置罪人䄄, 卽其地幷其子移置他家, 加律荐棘。 前知敦寧洪樂任, 濟州牧圍籬安置。
秉模曰: "伏覩諺敎, 衷情掩抑, 不忍以言語仰達矣。" 判義禁徐鼎修曰: "伏承慈敎, 下情不勝抑菀矣。 臣等今日所仰望, 惟在於兩賊之用法, 而今玆處分, 不過如斯而止, 宗國之憂虞, 未知有減於前日矣。 臣等法官也。 法莫過於治逆之律, 國而無法, 何以爲國乎? 唯願亟降聖旨, 明正處分焉。" 煥之曰: "縷縷慈敎, 至誠惻怛, 臣等豈不欲奉承? 而邦憲所在, 義理至重, 䄄賊之卽其地圍籬, 何益於懲討乎? 不逞之徒, 窺伺則一也。" 大王大妃敎曰: "圍籬, 卽加律也。 留守當嚴加防守, 而姑貸一縷, 以守先王之意, 不亦爲好乎?" 時秀曰: "昨年六月以前, 若有此事, 則先大王, 必不能全保之矣。 今番事果何等變怪也? 交通異類, 罔有紀極, 每一念至, 毛骨俱竦。 治逆之法, 豈可以一日二日, 姑且容貸乎? 如是則失刑之外, 無以鎭輿情矣。" 龍輔曰: "伏承下敎, 必以先朝處分爲敎。 臣等每當國事, 輒思先王所以處之之道, 況此事, 刑政之大者也, 尤當以先朝時事仰推。 而此乃近日新件事端, 比先朝時, 更加一層, 此而不用法, 則不知何樣憂虞, 起於何處。 臣等屢日齊籲, 非有望於減等之律也。" 知義禁李書九曰: "臣之煩奏, 極甚惶悚, 而臣亦多年出入於近密之列, 我先朝曲加全保之苦心, 亦豈不仰認? 而每經一番事端, 輒有天顔非昔之歎, 思之及此, 五內崩迫。 兩賊此罪, 尤是擧國臣民萬世不可忘之讎也。 逆䄄之丙午、樂任之乙未, 罪惡已極, 而先朝寬貸之德, 私恩則已可謂伸矣。 到今逆節益彰之後, 又豈可專主私恩乎? 伏承慈敎, 以國勢之鞏固爲敎, 方今聖明臨御, 太母聽政, 太阿在上, 紀綱不墜, 宗國之磐泰, 誠如慈敎。 而今若置此兩賊, 欲其同心於國事, 則亂本未拔, 憂虞自在, 雖欲同心協贊, 而心有所係, 自不能專一。 孟子所謂, ‘安其危而利其菑’ 者, 豈非今日之所可戒哉? 社稷靈長, 豈有他憂? 而忠志之士, 爲國家遠慮者, 豈可徒恃於此, 而不思所以永拔根本之道乎?" 大王大妃敎曰: "重臣之言, 亦非曰非矣, 而今時與先朝之時無異。 以先朝爲宗社爲大義之心, 處分猶止如此, 此非今日之示弱而然也。 加律似遜於一律, 而旣有新發之罪, 故所以加其律也。 何必遑遑汲汲猝變先朝之處分乎? 至於樂任事, 惠慶宮七旬衰年, 至慟哀疚之中, 僅僅支過, 而以此用心, 凡百澟綴。 大殿不勝焦迫, 每一承候, 輒不忍仰瞻, 出天之睿孝, 自有油然而感發者。 沖年血氣未定之時, 以此大段疚懷, 特以罕接外人之故, 外廷瞻視之時, 雖或强抑睿思, 不露慼容, 而無時不掩抑, 無時不焦迫。 今因言端而及之, 諸臣若仰瞻玉色, 則可以知之矣。" 仍掩抑下敎, 秉模等仰瞻訖, 奏曰: "仰瞻天顔, 不勝憂慮之萬萬。 臣等到此, 亦非不思奉承, 而臣等之所仰請, 亦出於爲宗社迫不得已之擧也。 討逆庭請, 擧措至大, 未準請而遽退, 則是豈道理之所敢出乎?" 大王大妃敎曰: "今日之事, 無如保護聖躬。 聖躬以此用慮, 至於如此, 其所以保護之方, 豈可歇後乎?" 煥之曰: "義理伸然後, 宗社可安, 宗社安然後, 聖心可安。 而伏承慈敎, 以保聖躬爲敎, 臣於此, 更無可達, 而今筵未得準請而遽退, 則實無見國人之顔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