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7월 11일 기축 2/7 기사 /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도총관 김한기가 자신의 집안의 모함을 억울해 하는 상소를 내다
국역
도총관(都摠管)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기를,
"신이 문을 닫은 채 들어앉아 피눈물을 흘리면서 허물을 자책한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사가 난 때를 당하여 그 은택이 널리 퍼져서 뽑아 등용하는 성은이 또한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아, 신의 숙질(叔姪)이 말할 수 없는 죄를 입은 것은 인신(人臣)이 있은 이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천고의 대흉이 집중되고 천하의 극악이 모여 이 한몸에 밀려오므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성상의 명철하심이 아니었다면 죽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신의 집안에서 당한 죄명을 논한다면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지만 일의 실상을 말한다면 실로 애매해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명(聖明)께서 어두운 곳도 살피지 않는 데가 없어 갑진년 가을에 전교를 내리기까지 함으로써 그 높은 성은에 감축(感祝)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공론이 격렬함으로 인하여 성교를 선포할 수 없었으니 온 세상이 무엇을 통해 그 이면의 실상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안타까운 마음속을 털어내어 천지와 부모같은 전하의 앞에 통쾌하게 한번 진술할 줄을 모른 것은 아니나, 두려워 조심하면서 꾹 참아온 것은 또한 때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은 병들고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훌쩍 죽어버리면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한을 품게 될까 몹시 걱정되기에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자초지종을 대략 진술하려 하니, 전하께서는 가엾게 여기어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세상에서 신의 집안에 대하여 죄를 성토한 것은 바로 네 가지 큰 죄안이었습니다. 신묘년의 일은 신이 지난 겨울에 올린 한 편의 상소에서 이미 그 대략을 진술하였으나, 비답을 받지 못한 채 끝내 되돌려 받았으므로 구구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이에 다시 그 대략을 진술합니다. 신은 그때 갑자기 호위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몹시 놀랍고 또 문안하기에 바빠서 황급히 달려가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를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표신(標信)이 나온 뒤에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는데, 정후겸(鄭厚謙)이 먼저 문안을 드리고 물러갔습니다. 신은 다시 어영 대장에 특별히 제수하고 훈련 도감의 일을 겸하여 살피게 한다는 명을 받고 즉시 진영으로 나왔다가 이튿날 전교를 받고서야 비로소 입시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함께 본 것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죄로 말하면 있기는 합니다. 신이 진영에 있을 때 신의 조카가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삼가 전하의 하교를 보니 그는 필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사건이 애매하여 그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러 하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모름지기 먼저 호위할 명목이 없다는 것을 진술하고 이어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아 이미 벌어진 일을 명목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이란 곧 신의 조카가 임진년 상소 중에 열거하여 논한 일로 자전(慈殿)께서 신에게 하교하여 진술하게 한 말인데 역시 일반적인 의리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적 후겸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누설될까 염려되어 할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나왔으니, 이것이 곧 신이 선왕을 배신하고 자성(慈聖)을 배신한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을 죄준다면 신이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남김없이 통촉하신 것이며, 갑진년에 죄를 벗겨준 데 대한 하교는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으나 다만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제문(賜祭文)에는 또 ‘지금 여기에 제시하는 것은 역시 그 사실이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교하셨으니, 오직 이 은혜로운 말씀이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신이 비록 스스로 해명한들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온 집안이 감읍하여 그 감격이 유명(幽明)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처럼 해명해준 성상의 뜻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으로 말썽거리를 삼은 것은 오직 사건이 궁중에 관련되어 그 자취를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그림자를 빙자하여 말을 날조하여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구렁에 몰아넣은 것이니, 신이 어찌 성상께서 굽어 통촉하신다 하여 태연히 마음놓고 한마디의 말도 진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신의 형은 거상 중에 있었는데, 마침 궁중에서 내려보낸 어찰(御札)의 회답을 계기로 조신들의 권력 남용을 대략 진술함으로써 성명께서 통찰하여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일을 잘 살피시길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사실이 이에 불과하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윤숙(尹塾)·심낙수(沈樂洙) 등이 계속 성토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 말이 조리가 없어 사실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윤숙의 상소에 이르기를, ‘저 두 역적은 귀주(龜柱)와 결탁하고 계희(啓禧)와 일체가 되어 남몰래 재앙의 조짐을 만들어내고 흉론을 꾸며내어 우리 성상을 핍박함으로써 하마터면 세자의 자리에 편히 앉아 있지 못할 뻔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 말이 어쩌면 그처럼 종잡을 수 없고 음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단서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마디의 말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역적 휘만(翬晩)이 이미 죽었으니, 그가 이른바 신의 조카와 결탁하여 성상을 핍박하여 세자의 자리를 불안하게 하였다는 것이 과연 무슨 말입니까.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가 남을 모함하기에 급급하여 날조를 일삼다가 그 사실과 말의 형세가 자연 허망한 것으로 되는 것을 자신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휘만이 권세를 잡았을 때 신의 조카는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로 일개 어린아이였습니다. 가령 참으로 흉모를 꾸며 핍박을 모의한 것이 그가 이른 말과 같다면, 이것이 과연 어떠한 일인데 나이 어린 일개 선비와 결탁하여 일을 꾸몄겠습니까. 사정으로 참작하나 이치로 따져볼 때 과연 근사하기나 합니까. 더구나 신의 집안이 휘만과는 그 취향과 기미가 본래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 만큼 이처럼 무고하고 날조하는 것은 다만 주위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 뿐이니, 그들의 마음인들 무엇이 그리 시원하겠습니까.
그들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회(晦)와 귀주(龜柱)와 더불어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 흉측한 말과 반역적인 행동을 신은 감히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많은 말로 변명할 것이 못됩니다. 과연 신의 조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이 무슨 일이라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솔직하게 지적하여 진술하지 못하고 그저 우물쭈물하면서 두리뭉술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충의에 격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역적을 징토하는 자가 실로 이와 같습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이 흉도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급급하여 반드시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했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사람을 강제로 위협하여 죄에 몰아넣었지만 사실의 근거가 없어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야 그들도 결국 어찌할 수 없었으니, 그 말은 자연 두리뭉술하게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진상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는 그 논조가 오직 윤숙(尹塾)에게서 물려받은 수법으로 신은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들어갈수록 심각하고 그 내용도 너무나 흉측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말인데 감히 터무니없이 지어내 함부로 전하의 앞에 진술하기를 그처럼 기탄없이 한단 말입니까. 기타 허다한 논의도 대개 모두 난잡하고 혼동되어 전혀 두서가 없습니다. 여러 흉물을 끌어모아다가 한덩어리를 만들어놓고 한 사람을 끌어내어 여러 역적의 편에 붙였으니, 제딴에 교묘히 한다고 한 것은 결국 그들의 속마음만 드러내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슬프기만 할 뿐 족히 변명할 일도 못됩니다.
조성(趙峸)의 일에 관해서는 그가 신의 조카의 막료로 있었는데 곧 동쪽 변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서유대(徐有大)와 윤중연(尹重淵)의 계청으로 그를 데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윤중연은 비록 죽었으나 서유대는 아직 생존하였으니, 막하에 있었던가의 여부는 일단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윤구연(尹九淵)의 죽음은 조성(趙峸)의 독수(毒手)에서 나왔기 때문에 온 세상이 모두 통분해 하였습니다. 신의 조카도 가장 그를 미워하여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내놓고 여지없이 공격하였으며, 그가 혹 집으로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여도 기어코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도 신의 형과 함께 대장으로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그를 장수의 후보자로는 한번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원망하여 말하기를 ‘나의 벼슬길이 막힌 것은 이현(泥峴)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이현은 곧 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이런 사실은 조정에 있는 문무관들이 또한 많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본다면 가령 신의 조카가 참으로 역적 종친과 혼사를 할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리고 몹시 미움을 받는 자를 골라서 그의 편이 되겠습니까. 또 신의 조카가 비록 혼사를 하고싶어도 그 사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성(慈聖)의 후하신 인품이더라도 그를 덮어주고 용서하려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반마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이 나온 것은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흉측한 무리들은 흉악한 말을 지어내 온 세상에 퍼뜨리고 계속하여 또 혼사를 한다는 말을 만들어 자신들의 말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심지어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문 가운데는 역적 찬(禶)을 귀주(龜柱)가 옹립하였고 계능(啓能)이 그 모의를 주장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어맥의 귀추는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 무리들의 거리낌없는 그 패역한 무고와 함부로 넘보는 행위가 어쩌면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더구나 신의 조카는 역적 계능과는 본래 전혀 상관이 없는 처지로서 결국 추대한 역적은 일어날 곳에서 일어났고 역적 계능이 실로 그 모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억지로 신의 조카를 끌어다가 역적 계능에게 붙이는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튼 말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나고 남에게 그 화를 전가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음흉한 심보와 태도는 정말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홍양해(洪量海)·심혁(沈𨩌)의 일에 관해서는, 그는 본래 글공부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선비였는데 당시 충청도 사부치고 그 누구인들 신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집이 전에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신의 조카가 어렸을 때 또한 몇 차례 상면했을 뿐이고 그후 신의 가족이 서울로 옮겨 살게 되면서 소식조차 없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조카가 섬에 귀양갔을 때에는 통제가 너무도 엄하여 집안의 편지도 서로 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호해(湖海)의 천여리 길이겠습니까. 비록 남몰래 흉모를 연락하기 위해 긴밀히 서로 접촉하고 싶더라도 형편상 불가하였습니다. 또 신의 조카가 진정으로 음모를 내통한 사실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당시 신문한 문건이 의금부에 그대로 있으니 조사해보면 당장 밝혀질 것입니다.
신의 조카가 임진년에 올린 한장의 상소문은 실로 우직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나, 타고난 성품이 고지식하고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함으로써 한쪽 사람들의 비위를 많이 거슬렸고 원수진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병신년에 귀양가게 된 후부터는 감정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기회를 놓칠세라 돌을 던졌으니 이는 반드시 닥쳐올 형세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죄악이 한곳으로 모이고 독한 칼날과 뭇 화살이 사면에서 이르게 되었습니다. 10여년간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계책은 한쪽에 던져버린 채, 그저 신의 조카를 죽이고 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을 큰 사업으로 간주하여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간에 은혜를 입었거나 감정을 산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상처럼 명철하신 분이라 해도 어떻게 그늘진 곳의 억울한 사정을 다 살필 수 있겠습니까.
신과 신의 조카는 그 범죄가 똑같은 만큼 생사와 화복도 의당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의 조카는 원한을 품은 채 옥에서 말라 죽었고 신만이 홀로 미련하게도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병세를 보면 생사의 갈림길이 종이 한장 사이에 있습니다. 만약 한가닥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끝내 한번 머리를 쳐들고 폭로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만 불충한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죽어서도 불충한 귀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신의 조카를 만나겠습니까. 신의 심정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또한 궁하고도 슬픕니다.
아, 온 세상이 기어코 모함하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보전해주려 하였으며, 온 세상이 기어코 죽이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죄를 씻어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신의 아우에게 서쪽 고을을 제수하였고 또 미천한 신을 도총부로 발탁하였으니, 그 은덕은 지극히 크고도 두텁습니다. 두 손을 모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 생각해도 길이 없으니, 본분과 의리로 헤아릴 때 어찌 감히 일각인들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래의 사정이 이상에서 진술한 바와 같고 이 미천한 몸의 병이 생사를 분별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정과 병으로 어떻게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가망이 있겠습니까. 빨리 파면시켜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전에 죄명을 씻어주었는데 경의 형제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가. 신묘년의 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내린 전교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고,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갑자년의 전교가 기주(記注)와 사제문(賜祭文)에 명백히 실려 있다. 대개 이런 하교를 조정 신하들에게 알리는 것은 자전(慈殿)을 위하여 풀어드리려는 것이니, 어찌 경의 상소내용을 기다리겠는가. 조성(趙峸)의 일에 대해서도 갑진년에 내린 전교 중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이는 더욱 많은 해명이 필요없다. 덧붙여 진술한 무술년의 사건도 원래 관청의 문적으로써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경의 집안에서 대신 인책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제수한 것은 자전에게 문안드리는 일이 소중해서이며, 또 갑진년 이후는 역시 자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안드리는 일은 직명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으며 신병 또한 억지로 출사하기 어렵다 하니, 새로 제수한 도총관의 직임을 체직한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갑진년의 전교는 중외에만 반포하고 조지(朝紙)에는 내지 않았으니, 그 집안 사람이 전교의 내용을 가지고 한번 사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소(原疏)에 대해 비록 이미 비답은 내렸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가 옛날 일에 속하는 것으로써 사그라진 재와 다름이 없다. 모든 사건을 뒤에 와서 새삼 제기하는 것이 될법이나 한 말인가. 더구나 본 사건 중에는 또한 금령(禁令)에 관한 부분도 있지 않은가. 이후부터 병신년 이전의 일을 다시 상소문에 언급한 것은 받아들이지 말뿐만 아니라 계판(啓版)에 쓰기 전에 즉시 태워버리고 슬며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7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5면
원문
○都摠管金漢耆上疏曰:
臣杜門蟄伏, 血泣訟愆, 于今十餘年。 不料身逢慶會, 霈澤旁流, 甄收之恩, 亦及於夢想之外。 嗚呼! 臣之叔姪遭罹之罔極, 自有人臣以來, 所未有也。 萃千古之窮凶, 集天下之極惡, 都輸一身, 脫出不得, 非聖上之至明, 湛滅久矣。 臣家所遭, 論其罪名, 則無非罔赦之大憝; 語其事實, 則實是䵝昧而難明。 惟我聖明, 無幽不燭, 至下甲辰秋傳敎, 感祝隆恩, 不知死所。 然時因公議峻發, 旣不得頒下, 則擧世何由, 悉其裏面之實狀乎? 臣非不知剖心瀝血, 一番洞陳於天地父母之前, 而嚴畏隱忍, 蓋亦有待。 今臣疾病癃衰, 去死無日, 深恐一朝溘然, 永抱不瞑之恨, 故冒萬死, 略暴顚末, 伏願哀矜而垂察焉。 嗚呼! 世之所以討罪臣家者, 卽四大案也。 辛卯事, 臣於昨冬一疏, 已陳梗槪, 而旣未承批, 終至還給, 則區區情事, 便同未暴, 故不避煩猥, 更此略陳焉。 臣於其時, 忽聞有扈衛之命, 心甚驚遑, 急於承候, 蒼黃馳進, 見阻作門。 標信出來, 始得入去, 則厚謙已先承候而退矣。 臣則旋承御將特除, 訓局兼察之命, 直出陣上, 翌日因傳敎, 始爲入侍, 萬目所覩, 焉可誣也? 若乃臣之罪則有之, 臣在陣上時, 臣姪以書來曰: "伏見聖敎, 則彼必不免, 而事涉黯昧, 無以服其心。 若至處分之境, 而有下詢之事, 須先陳扈衛之無名, 仍暴其平日蘊結, 使已張之擧, 歸於有名。" 云云, 所謂平日蘊結, 卽臣姪壬辰疏中論列事, 而慈殿所以下敎於臣, 而使之陳達者, 亦一般義理也。 只緣厚賊在傍, 漏洩是懼, 未免泯默而退, 是則臣乃負先朝負慈聖之罪人也。 以此罪臣, 臣何敢辭也? 至於辛巳事, 聖明洞燭無餘, 甲辰昭釋之敎, 詳載記注, 而特以未頒布之故, 臣不得見。 然伊時賜祭文, 又以今此提諭, 亦出於明其事實, 無他之意爲敎, 則惟此恩言, 開釋丁寧。 臣雖自解, 何以加此? 闔門泣祝, 感結幽明。 然彼輩非不知聖意之昭釋如此, 而輒以此把作話柄者, 只以事係宮禁, 跡涉難明, 故憑藉虛影, 捏合爲說, 直驅人於黯黮罔測之科, 臣何以聖明之俯燭, 晏然自恕, 不爲一言陳暴乎? 蓋於此時, 臣兄方在草土, 適因內下御札之仰復, 略陳朝臣之弄權, 以冀聖明之洞察, 審於用舍之際而已, 事實不過如此, 豈有他哉? 至於尹塾、沈樂洙輩, 相斷聲討, 則言之無倫, 誠不足多辨。 然塾之疏曰: "惟彼兩賊, 蚓結龜柱, 蛇蟠啓禧, 暗煽禍機, 譸張凶論, 逼我聖上, 幾乎不安於貳極。" 噫嘻! 何其言之閃倐陰秘, 使人莫測其端倪也? 然此有一言可破者, 我聖上正位貳極之前, 翬賊已死, 則其所謂蚓結臣姪, 謀逼聖上, 不安貳極者, 是果何說也? 卽此一款, 可見其急於陷人, 專事搆捏, 而不暇顧其事實, 語勢之自歸虛妄也。 且當翬晩秉權之時, 臣姪年甫弱冠之一蒙騃也。 假令眞有凶謀譸張, 謀逼如渠所云, 是果何等事, 而乃與蒙騃一布衣, 蚓結綢繆者, 參以事情, 揆諸理勢, 其果近似乎? 況臣家於翬晩, 趨向氣味, 本自燕越, 此乃一世所共知, 則如此誣捏, 只資傍觀之嗤笑而已, 顧何快於其心哉? 其疏又曰: "與晦及龜柱, 潛議者何說, 所營者何事? 其凶言逆節, 臣不敢一一枚陳。" 此亦不在多辨。 果令臣姪, 直有是事, 則其潛議之爲何說, 所營之爲何事, 何憚而不指的直陳, 而徒爲此半吐半呑, 囫圇隱眩之說也? 忠憤所激, 挺身討逆者, 固如是乎? 此無他, 其心切於效忠凶徒, 而必欲爲建德報仇, 故雖其脅勒驅人, 無所不至, 而終無奈事實無據, 模捉不得, 則其所爲說, 自不得不囫圇呑吐耳。 此不待智者而後, 覰破其情狀也。 至若沈樂洙之疏, 特一尹塾之傳法沙門, 臣不欲掛諸齒牙, 而其爲說, 一節深於一節, 指意尤極凶慘。 此何等說, 而乃敢白地做出, 肆然陳列於殿下之前, 若是其無忌也? 其他許多論列, 率皆雜亂汨董, 專沒倫脊, 捏萃群凶, 打成一圈, 牽拽一人, 傳之衆逆, 其所自以爲巧密者, 適足以盡露其肝肺也, 可哀不足辨也。 至於峸事, 臣姪率幕之職, 惟是東藩, 其時徐有大、尹重淵以啓請率去。 重淵雖故, 有大尙存, 親幕與否, 一問可辨。 且尹九淵之死, 出於峸之毒手, 故擧世無不痛惋, 而臣姪嫉之最甚, 稠坐顯斥, 不遺餘力, 渠或踵門請見, 亦必拒而不受。 臣與臣兄, 待罪戎垣, 亦多年所, 而將官之望, 一不撿擬。 以是渠常出怨言曰: "吾之見枳, 由於泥峴。" 泥峴卽臣等所居之洞名也。 如此事狀, 在朝文武亦多知之。 據此以觀, 則假令臣姪眞有爲逆宗圖婚之事, 何必擇世所共棄之所深惡者, 以爲彼之羽翼哉? 且臣之姪, 雖欲圖婚, 其勢不能獨辦。 以慈聖盛德, 其肯掩覆容貸乎? 此不待半辭之畢, 而可知其必無也。 噫! 此說之作, 蓋有源委。 自來凶徒, 皷倡凶言, 播之一世, 繼而又唱圖婚之說, 以實其言。 甚至於樂洙疏中, 以逆襸爲龜柱之所擁戴, 而啓能主其謀云, 則其語脈所歸, 昭不可掩矣。 噫嘻痛矣。 此輩之誣悖凌犯, 無所顧忌, 一何至此之甚也? 況臣姪之於能賊, 本是風馬牛之不及, 而畢竟推戴之逆, 起於起處, 能賊實主其謀, 則今乃强援臣姪, 牽合能賊, 是何等白地虛妄之說也? 此不過渠輩自脫其罪犯, 而移禍他人之計也。 其情態之奰慝, 誠不忍正視也。 至於量𨩌事, 渠本自處以讀書之人, 當時湖右士夫, 孰不過從臣家? 曩在湖中臣姪兒時, 亦數次相面而已, 伊後臣家眷居京師, 則聲聞罕及, 不復相接。 及乎臣姪謫居海島, 則防禁至嚴, 家信亦不得相通, 況湖海千餘里之地, 雖欲潛通凶謀, 密勿相關, 其勢末由。 且令臣姪眞有通謀之事, 其時鞫案, 昭在於王府, 一番審覈, 自可立判。 臣姪壬辰一疏, 亶出愚忠, 而賦性狂戇, 嫉惡太過, 積忤一邊, 仇怨溢世。 逮夫丙申被謫之後, 群憾竝起, 乘機下石。 自是理勢之所必至, 於是乎衆罪群惡, 咸歸甌臾, 毒鋒叢鏑, 四面而至。 十餘年來, 民憂國計, 擔却一邊, 惟以殺得臣姪, 湛滅臣家, 看作大事業, 轉輾誣衊, 打成膠漆。 雖無恩怨之人, 擧擬以莫須有, 則雖聖上之明, 亦何由盡燭覆盆之冤哉? 臣與臣姪, 罪負惟均, 生死禍福, 宜無異同, 不幸臣姪瘦死抱冤, 臣獨頑忍, 尙全軀命, 而目今病勢, 死亡隔紙。 若於一縷未絶之前, 終不得仰首一暴, 則不但生爲不忠之人, 死作不忠之鬼, 將何顔面, 歸見臣姪於地下乎? 臣情到此, 其亦窮且慼矣。 嗚呼! 擧世必欲擠陷之, 殿下必欲全保之; 擧世必欲糜粉之, 殿下必欲拂拭之。 旣以臣弟特除西邑, 又以微臣甄拔摠府, 恩至渥也, 德至厚也。 攅手感泣, 報答無階, 揆以分義, 豈敢一刻逡巡, 而自來情勢, 如右所陳, 狗馬之疾, 人鬼未分, 似此情病, 豈有一分承膺之望? 伏願亟許鐫免。
批曰: "年前罪名蕩滌之後, 卿之兄弟, 豈可逡巡乎? 辛卯事, 昨年傳敎已備悉; 辛巳事, 甲辰傳敎, 昭載記注及賜祭文。 大抵誦諭玆敎於廷臣, 出於爲慈殿仰釋, 豈待卿疏云云乎? 趙峸事, 亦詳載於甲辰傳敎中, 此則尤不必多卞。 附陳戊戌事, 元無公家文蹟之見存者, 則非卿家所可替引者。 今番除拜, 爲承候所重, 且甲辰以後, 亦自別焉故耳。 承候不在於職名有無, 病亦難强云, 新除摠管之任許遞。" 仍敎曰: "甲辰傳敎, 只頒於中外, 不出於朝紙。 其家人之以傳敎餘意, 一番伸謝, 不是異事。 原疏雖已賜批, 到今事屬先天, 無異灰冷, 則某事某事之追提, 其成說乎? 況本事中, 亦有關於禁令處。 此後丙申以前事, 更爲追說於章奏者, 不但勿捧, 直於啓版前付丙微稟。"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7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5면
국역
도총관(都摠管)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기를,
"신이 문을 닫은 채 들어앉아 피눈물을 흘리면서 허물을 자책한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사가 난 때를 당하여 그 은택이 널리 퍼져서 뽑아 등용하는 성은이 또한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아, 신의 숙질(叔姪)이 말할 수 없는 죄를 입은 것은 인신(人臣)이 있은 이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천고의 대흉이 집중되고 천하의 극악이 모여 이 한몸에 밀려오므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성상의 명철하심이 아니었다면 죽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신의 집안에서 당한 죄명을 논한다면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지만 일의 실상을 말한다면 실로 애매해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명(聖明)께서 어두운 곳도 살피지 않는 데가 없어 갑진년 가을에 전교를 내리기까지 함으로써 그 높은 성은에 감축(感祝)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공론이 격렬함으로 인하여 성교를 선포할 수 없었으니 온 세상이 무엇을 통해 그 이면의 실상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안타까운 마음속을 털어내어 천지와 부모같은 전하의 앞에 통쾌하게 한번 진술할 줄을 모른 것은 아니나, 두려워 조심하면서 꾹 참아온 것은 또한 때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은 병들고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훌쩍 죽어버리면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한을 품게 될까 몹시 걱정되기에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자초지종을 대략 진술하려 하니, 전하께서는 가엾게 여기어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세상에서 신의 집안에 대하여 죄를 성토한 것은 바로 네 가지 큰 죄안이었습니다. 신묘년의 일은 신이 지난 겨울에 올린 한 편의 상소에서 이미 그 대략을 진술하였으나, 비답을 받지 못한 채 끝내 되돌려 받았으므로 구구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이에 다시 그 대략을 진술합니다. 신은 그때 갑자기 호위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몹시 놀랍고 또 문안하기에 바빠서 황급히 달려가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를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표신(標信)이 나온 뒤에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는데, 정후겸(鄭厚謙)이 먼저 문안을 드리고 물러갔습니다. 신은 다시 어영 대장에 특별히 제수하고 훈련 도감의 일을 겸하여 살피게 한다는 명을 받고 즉시 진영으로 나왔다가 이튿날 전교를 받고서야 비로소 입시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함께 본 것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죄로 말하면 있기는 합니다. 신이 진영에 있을 때 신의 조카가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삼가 전하의 하교를 보니 그는 필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사건이 애매하여 그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러 하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모름지기 먼저 호위할 명목이 없다는 것을 진술하고 이어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아 이미 벌어진 일을 명목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이란 곧 신의 조카가 임진년 상소 중에 열거하여 논한 일로 자전(慈殿)께서 신에게 하교하여 진술하게 한 말인데 역시 일반적인 의리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적 후겸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누설될까 염려되어 할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나왔으니, 이것이 곧 신이 선왕을 배신하고 자성(慈聖)을 배신한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을 죄준다면 신이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남김없이 통촉하신 것이며, 갑진년에 죄를 벗겨준 데 대한 하교는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으나 다만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제문(賜祭文)에는 또 ‘지금 여기에 제시하는 것은 역시 그 사실이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교하셨으니, 오직 이 은혜로운 말씀이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신이 비록 스스로 해명한들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온 집안이 감읍하여 그 감격이 유명(幽明)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처럼 해명해준 성상의 뜻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으로 말썽거리를 삼은 것은 오직 사건이 궁중에 관련되어 그 자취를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그림자를 빙자하여 말을 날조하여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구렁에 몰아넣은 것이니, 신이 어찌 성상께서 굽어 통촉하신다 하여 태연히 마음놓고 한마디의 말도 진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신의 형은 거상 중에 있었는데, 마침 궁중에서 내려보낸 어찰(御札)의 회답을 계기로 조신들의 권력 남용을 대략 진술함으로써 성명께서 통찰하여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일을 잘 살피시길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사실이 이에 불과하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윤숙(尹塾)·심낙수(沈樂洙) 등이 계속 성토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 말이 조리가 없어 사실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윤숙의 상소에 이르기를, ‘저 두 역적은 귀주(龜柱)와 결탁하고 계희(啓禧)와 일체가 되어 남몰래 재앙의 조짐을 만들어내고 흉론을 꾸며내어 우리 성상을 핍박함으로써 하마터면 세자의 자리에 편히 앉아 있지 못할 뻔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 말이 어쩌면 그처럼 종잡을 수 없고 음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단서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마디의 말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역적 휘만(翬晩)이 이미 죽었으니, 그가 이른바 신의 조카와 결탁하여 성상을 핍박하여 세자의 자리를 불안하게 하였다는 것이 과연 무슨 말입니까.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가 남을 모함하기에 급급하여 날조를 일삼다가 그 사실과 말의 형세가 자연 허망한 것으로 되는 것을 자신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휘만이 권세를 잡았을 때 신의 조카는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로 일개 어린아이였습니다. 가령 참으로 흉모를 꾸며 핍박을 모의한 것이 그가 이른 말과 같다면, 이것이 과연 어떠한 일인데 나이 어린 일개 선비와 결탁하여 일을 꾸몄겠습니까. 사정으로 참작하나 이치로 따져볼 때 과연 근사하기나 합니까. 더구나 신의 집안이 휘만과는 그 취향과 기미가 본래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 만큼 이처럼 무고하고 날조하는 것은 다만 주위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 뿐이니, 그들의 마음인들 무엇이 그리 시원하겠습니까.
그들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회(晦)와 귀주(龜柱)와 더불어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 흉측한 말과 반역적인 행동을 신은 감히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많은 말로 변명할 것이 못됩니다. 과연 신의 조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이 무슨 일이라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솔직하게 지적하여 진술하지 못하고 그저 우물쭈물하면서 두리뭉술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충의에 격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역적을 징토하는 자가 실로 이와 같습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이 흉도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급급하여 반드시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했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사람을 강제로 위협하여 죄에 몰아넣었지만 사실의 근거가 없어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야 그들도 결국 어찌할 수 없었으니, 그 말은 자연 두리뭉술하게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진상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는 그 논조가 오직 윤숙(尹塾)에게서 물려받은 수법으로 신은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들어갈수록 심각하고 그 내용도 너무나 흉측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말인데 감히 터무니없이 지어내 함부로 전하의 앞에 진술하기를 그처럼 기탄없이 한단 말입니까. 기타 허다한 논의도 대개 모두 난잡하고 혼동되어 전혀 두서가 없습니다. 여러 흉물을 끌어모아다가 한덩어리를 만들어놓고 한 사람을 끌어내어 여러 역적의 편에 붙였으니, 제딴에 교묘히 한다고 한 것은 결국 그들의 속마음만 드러내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슬프기만 할 뿐 족히 변명할 일도 못됩니다.
조성(趙峸)의 일에 관해서는 그가 신의 조카의 막료로 있었는데 곧 동쪽 변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서유대(徐有大)와 윤중연(尹重淵)의 계청으로 그를 데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윤중연은 비록 죽었으나 서유대는 아직 생존하였으니, 막하에 있었던가의 여부는 일단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윤구연(尹九淵)의 죽음은 조성(趙峸)의 독수(毒手)에서 나왔기 때문에 온 세상이 모두 통분해 하였습니다. 신의 조카도 가장 그를 미워하여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내놓고 여지없이 공격하였으며, 그가 혹 집으로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여도 기어코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도 신의 형과 함께 대장으로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그를 장수의 후보자로는 한번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원망하여 말하기를 ‘나의 벼슬길이 막힌 것은 이현(泥峴)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이현은 곧 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이런 사실은 조정에 있는 문무관들이 또한 많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본다면 가령 신의 조카가 참으로 역적 종친과 혼사를 할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리고 몹시 미움을 받는 자를 골라서 그의 편이 되겠습니까. 또 신의 조카가 비록 혼사를 하고싶어도 그 사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성(慈聖)의 후하신 인품이더라도 그를 덮어주고 용서하려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반마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이 나온 것은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흉측한 무리들은 흉악한 말을 지어내 온 세상에 퍼뜨리고 계속하여 또 혼사를 한다는 말을 만들어 자신들의 말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심지어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문 가운데는 역적 찬(禶)을 귀주(龜柱)가 옹립하였고 계능(啓能)이 그 모의를 주장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어맥의 귀추는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 무리들의 거리낌없는 그 패역한 무고와 함부로 넘보는 행위가 어쩌면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더구나 신의 조카는 역적 계능과는 본래 전혀 상관이 없는 처지로서 결국 추대한 역적은 일어날 곳에서 일어났고 역적 계능이 실로 그 모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억지로 신의 조카를 끌어다가 역적 계능에게 붙이는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튼 말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나고 남에게 그 화를 전가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음흉한 심보와 태도는 정말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홍양해(洪量海)·심혁(沈𨩌)의 일에 관해서는, 그는 본래 글공부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선비였는데 당시 충청도 사부치고 그 누구인들 신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집이 전에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신의 조카가 어렸을 때 또한 몇 차례 상면했을 뿐이고 그후 신의 가족이 서울로 옮겨 살게 되면서 소식조차 없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조카가 섬에 귀양갔을 때에는 통제가 너무도 엄하여 집안의 편지도 서로 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호해(湖海)의 천여리 길이겠습니까. 비록 남몰래 흉모를 연락하기 위해 긴밀히 서로 접촉하고 싶더라도 형편상 불가하였습니다. 또 신의 조카가 진정으로 음모를 내통한 사실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당시 신문한 문건이 의금부에 그대로 있으니 조사해보면 당장 밝혀질 것입니다.
신의 조카가 임진년에 올린 한장의 상소문은 실로 우직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나, 타고난 성품이 고지식하고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함으로써 한쪽 사람들의 비위를 많이 거슬렸고 원수진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병신년에 귀양가게 된 후부터는 감정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기회를 놓칠세라 돌을 던졌으니 이는 반드시 닥쳐올 형세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죄악이 한곳으로 모이고 독한 칼날과 뭇 화살이 사면에서 이르게 되었습니다. 10여년간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계책은 한쪽에 던져버린 채, 그저 신의 조카를 죽이고 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을 큰 사업으로 간주하여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간에 은혜를 입었거나 감정을 산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상처럼 명철하신 분이라 해도 어떻게 그늘진 곳의 억울한 사정을 다 살필 수 있겠습니까.
신과 신의 조카는 그 범죄가 똑같은 만큼 생사와 화복도 의당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의 조카는 원한을 품은 채 옥에서 말라 죽었고 신만이 홀로 미련하게도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병세를 보면 생사의 갈림길이 종이 한장 사이에 있습니다. 만약 한가닥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끝내 한번 머리를 쳐들고 폭로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만 불충한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죽어서도 불충한 귀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신의 조카를 만나겠습니까. 신의 심정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또한 궁하고도 슬픕니다.
아, 온 세상이 기어코 모함하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보전해주려 하였으며, 온 세상이 기어코 죽이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죄를 씻어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신의 아우에게 서쪽 고을을 제수하였고 또 미천한 신을 도총부로 발탁하였으니, 그 은덕은 지극히 크고도 두텁습니다. 두 손을 모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 생각해도 길이 없으니, 본분과 의리로 헤아릴 때 어찌 감히 일각인들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래의 사정이 이상에서 진술한 바와 같고 이 미천한 몸의 병이 생사를 분별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정과 병으로 어떻게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가망이 있겠습니까. 빨리 파면시켜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전에 죄명을 씻어주었는데 경의 형제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가. 신묘년의 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내린 전교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고,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갑자년의 전교가 기주(記注)와 사제문(賜祭文)에 명백히 실려 있다. 대개 이런 하교를 조정 신하들에게 알리는 것은 자전(慈殿)을 위하여 풀어드리려는 것이니, 어찌 경의 상소내용을 기다리겠는가. 조성(趙峸)의 일에 대해서도 갑진년에 내린 전교 중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이는 더욱 많은 해명이 필요없다. 덧붙여 진술한 무술년의 사건도 원래 관청의 문적으로써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경의 집안에서 대신 인책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제수한 것은 자전에게 문안드리는 일이 소중해서이며, 또 갑진년 이후는 역시 자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안드리는 일은 직명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으며 신병 또한 억지로 출사하기 어렵다 하니, 새로 제수한 도총관의 직임을 체직한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갑진년의 전교는 중외에만 반포하고 조지(朝紙)에는 내지 않았으니, 그 집안 사람이 전교의 내용을 가지고 한번 사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소(原疏)에 대해 비록 이미 비답은 내렸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가 옛날 일에 속하는 것으로써 사그라진 재와 다름이 없다. 모든 사건을 뒤에 와서 새삼 제기하는 것이 될법이나 한 말인가. 더구나 본 사건 중에는 또한 금령(禁令)에 관한 부분도 있지 않은가. 이후부터 병신년 이전의 일을 다시 상소문에 언급한 것은 받아들이지 말뿐만 아니라 계판(啓版)에 쓰기 전에 즉시 태워버리고 슬며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7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5면
원문
○都摠管金漢耆上疏曰:
臣杜門蟄伏, 血泣訟愆, 于今十餘年。 不料身逢慶會, 霈澤旁流, 甄收之恩, 亦及於夢想之外。 嗚呼! 臣之叔姪遭罹之罔極, 自有人臣以來, 所未有也。 萃千古之窮凶, 集天下之極惡, 都輸一身, 脫出不得, 非聖上之至明, 湛滅久矣。 臣家所遭, 論其罪名, 則無非罔赦之大憝; 語其事實, 則實是䵝昧而難明。 惟我聖明, 無幽不燭, 至下甲辰秋傳敎, 感祝隆恩, 不知死所。 然時因公議峻發, 旣不得頒下, 則擧世何由, 悉其裏面之實狀乎? 臣非不知剖心瀝血, 一番洞陳於天地父母之前, 而嚴畏隱忍, 蓋亦有待。 今臣疾病癃衰, 去死無日, 深恐一朝溘然, 永抱不瞑之恨, 故冒萬死, 略暴顚末, 伏願哀矜而垂察焉。 嗚呼! 世之所以討罪臣家者, 卽四大案也。 辛卯事, 臣於昨冬一疏, 已陳梗槪, 而旣未承批, 終至還給, 則區區情事, 便同未暴, 故不避煩猥, 更此略陳焉。 臣於其時, 忽聞有扈衛之命, 心甚驚遑, 急於承候, 蒼黃馳進, 見阻作門。 標信出來, 始得入去, 則厚謙已先承候而退矣。 臣則旋承御將特除, 訓局兼察之命, 直出陣上, 翌日因傳敎, 始爲入侍, 萬目所覩, 焉可誣也? 若乃臣之罪則有之, 臣在陣上時, 臣姪以書來曰: "伏見聖敎, 則彼必不免, 而事涉黯昧, 無以服其心。 若至處分之境, 而有下詢之事, 須先陳扈衛之無名, 仍暴其平日蘊結, 使已張之擧, 歸於有名。" 云云, 所謂平日蘊結, 卽臣姪壬辰疏中論列事, 而慈殿所以下敎於臣, 而使之陳達者, 亦一般義理也。 只緣厚賊在傍, 漏洩是懼, 未免泯默而退, 是則臣乃負先朝負慈聖之罪人也。 以此罪臣, 臣何敢辭也? 至於辛巳事, 聖明洞燭無餘, 甲辰昭釋之敎, 詳載記注, 而特以未頒布之故, 臣不得見。 然伊時賜祭文, 又以今此提諭, 亦出於明其事實, 無他之意爲敎, 則惟此恩言, 開釋丁寧。 臣雖自解, 何以加此? 闔門泣祝, 感結幽明。 然彼輩非不知聖意之昭釋如此, 而輒以此把作話柄者, 只以事係宮禁, 跡涉難明, 故憑藉虛影, 捏合爲說, 直驅人於黯黮罔測之科, 臣何以聖明之俯燭, 晏然自恕, 不爲一言陳暴乎? 蓋於此時, 臣兄方在草土, 適因內下御札之仰復, 略陳朝臣之弄權, 以冀聖明之洞察, 審於用舍之際而已, 事實不過如此, 豈有他哉? 至於尹塾、沈樂洙輩, 相斷聲討, 則言之無倫, 誠不足多辨。 然塾之疏曰: "惟彼兩賊, 蚓結龜柱, 蛇蟠啓禧, 暗煽禍機, 譸張凶論, 逼我聖上, 幾乎不安於貳極。" 噫嘻! 何其言之閃倐陰秘, 使人莫測其端倪也? 然此有一言可破者, 我聖上正位貳極之前, 翬賊已死, 則其所謂蚓結臣姪, 謀逼聖上, 不安貳極者, 是果何說也? 卽此一款, 可見其急於陷人, 專事搆捏, 而不暇顧其事實, 語勢之自歸虛妄也。 且當翬晩秉權之時, 臣姪年甫弱冠之一蒙騃也。 假令眞有凶謀譸張, 謀逼如渠所云, 是果何等事, 而乃與蒙騃一布衣, 蚓結綢繆者, 參以事情, 揆諸理勢, 其果近似乎? 況臣家於翬晩, 趨向氣味, 本自燕越, 此乃一世所共知, 則如此誣捏, 只資傍觀之嗤笑而已, 顧何快於其心哉? 其疏又曰: "與晦及龜柱, 潛議者何說, 所營者何事? 其凶言逆節, 臣不敢一一枚陳。" 此亦不在多辨。 果令臣姪, 直有是事, 則其潛議之爲何說, 所營之爲何事, 何憚而不指的直陳, 而徒爲此半吐半呑, 囫圇隱眩之說也? 忠憤所激, 挺身討逆者, 固如是乎? 此無他, 其心切於效忠凶徒, 而必欲爲建德報仇, 故雖其脅勒驅人, 無所不至, 而終無奈事實無據, 模捉不得, 則其所爲說, 自不得不囫圇呑吐耳。 此不待智者而後, 覰破其情狀也。 至若沈樂洙之疏, 特一尹塾之傳法沙門, 臣不欲掛諸齒牙, 而其爲說, 一節深於一節, 指意尤極凶慘。 此何等說, 而乃敢白地做出, 肆然陳列於殿下之前, 若是其無忌也? 其他許多論列, 率皆雜亂汨董, 專沒倫脊, 捏萃群凶, 打成一圈, 牽拽一人, 傳之衆逆, 其所自以爲巧密者, 適足以盡露其肝肺也, 可哀不足辨也。 至於峸事, 臣姪率幕之職, 惟是東藩, 其時徐有大、尹重淵以啓請率去。 重淵雖故, 有大尙存, 親幕與否, 一問可辨。 且尹九淵之死, 出於峸之毒手, 故擧世無不痛惋, 而臣姪嫉之最甚, 稠坐顯斥, 不遺餘力, 渠或踵門請見, 亦必拒而不受。 臣與臣兄, 待罪戎垣, 亦多年所, 而將官之望, 一不撿擬。 以是渠常出怨言曰: "吾之見枳, 由於泥峴。" 泥峴卽臣等所居之洞名也。 如此事狀, 在朝文武亦多知之。 據此以觀, 則假令臣姪眞有爲逆宗圖婚之事, 何必擇世所共棄之所深惡者, 以爲彼之羽翼哉? 且臣之姪, 雖欲圖婚, 其勢不能獨辦。 以慈聖盛德, 其肯掩覆容貸乎? 此不待半辭之畢, 而可知其必無也。 噫! 此說之作, 蓋有源委。 自來凶徒, 皷倡凶言, 播之一世, 繼而又唱圖婚之說, 以實其言。 甚至於樂洙疏中, 以逆襸爲龜柱之所擁戴, 而啓能主其謀云, 則其語脈所歸, 昭不可掩矣。 噫嘻痛矣。 此輩之誣悖凌犯, 無所顧忌, 一何至此之甚也? 況臣姪之於能賊, 本是風馬牛之不及, 而畢竟推戴之逆, 起於起處, 能賊實主其謀, 則今乃强援臣姪, 牽合能賊, 是何等白地虛妄之說也? 此不過渠輩自脫其罪犯, 而移禍他人之計也。 其情態之奰慝, 誠不忍正視也。 至於量𨩌事, 渠本自處以讀書之人, 當時湖右士夫, 孰不過從臣家? 曩在湖中臣姪兒時, 亦數次相面而已, 伊後臣家眷居京師, 則聲聞罕及, 不復相接。 及乎臣姪謫居海島, 則防禁至嚴, 家信亦不得相通, 況湖海千餘里之地, 雖欲潛通凶謀, 密勿相關, 其勢末由。 且令臣姪眞有通謀之事, 其時鞫案, 昭在於王府, 一番審覈, 自可立判。 臣姪壬辰一疏, 亶出愚忠, 而賦性狂戇, 嫉惡太過, 積忤一邊, 仇怨溢世。 逮夫丙申被謫之後, 群憾竝起, 乘機下石。 自是理勢之所必至, 於是乎衆罪群惡, 咸歸甌臾, 毒鋒叢鏑, 四面而至。 十餘年來, 民憂國計, 擔却一邊, 惟以殺得臣姪, 湛滅臣家, 看作大事業, 轉輾誣衊, 打成膠漆。 雖無恩怨之人, 擧擬以莫須有, 則雖聖上之明, 亦何由盡燭覆盆之冤哉? 臣與臣姪, 罪負惟均, 生死禍福, 宜無異同, 不幸臣姪瘦死抱冤, 臣獨頑忍, 尙全軀命, 而目今病勢, 死亡隔紙。 若於一縷未絶之前, 終不得仰首一暴, 則不但生爲不忠之人, 死作不忠之鬼, 將何顔面, 歸見臣姪於地下乎? 臣情到此, 其亦窮且慼矣。 嗚呼! 擧世必欲擠陷之, 殿下必欲全保之; 擧世必欲糜粉之, 殿下必欲拂拭之。 旣以臣弟特除西邑, 又以微臣甄拔摠府, 恩至渥也, 德至厚也。 攅手感泣, 報答無階, 揆以分義, 豈敢一刻逡巡, 而自來情勢, 如右所陳, 狗馬之疾, 人鬼未分, 似此情病, 豈有一分承膺之望? 伏願亟許鐫免。
批曰: "年前罪名蕩滌之後, 卿之兄弟, 豈可逡巡乎? 辛卯事, 昨年傳敎已備悉; 辛巳事, 甲辰傳敎, 昭載記注及賜祭文。 大抵誦諭玆敎於廷臣, 出於爲慈殿仰釋, 豈待卿疏云云乎? 趙峸事, 亦詳載於甲辰傳敎中, 此則尤不必多卞。 附陳戊戌事, 元無公家文蹟之見存者, 則非卿家所可替引者。 今番除拜, 爲承候所重, 且甲辰以後, 亦自別焉故耳。 承候不在於職名有無, 病亦難强云, 新除摠管之任許遞。" 仍敎曰: "甲辰傳敎, 只頒於中外, 不出於朝紙。 其家人之以傳敎餘意, 一番伸謝, 不是異事。 原疏雖已賜批, 到今事屬先天, 無異灰冷, 則某事某事之追提, 其成說乎? 況本事中, 亦有關於禁令處。 此後丙申以前事, 更爲追說於章奏者, 不但勿捧, 直於啓版前付丙微稟。"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7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