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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7월 11일 을미 1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인하여 영우원을 천장하기로 결정하다

영우원(永祐園)을 천장(遷葬)할 것을 결정하였다. 상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030) 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또아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에 즉위하신 뒤에 이르기까지 걱정하신 일념이 오직 원소의 안부에 계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이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신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병신년 초에 천장해 모실 것을 연석(筵席)에서 처음으로 발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영종 대왕 7년 신해년에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무신년 이후로 중외(中外)에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혈식 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이끌어 어전으로 가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해서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힘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의 고사(故事)가 있고 보면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 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 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각신(閣臣)·예조 당상과 종친부·의빈부·삼사의 2품 이상을 희정당으로 불러 접견하고서 승지에게 명하여 박명원의 소를 읽게 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들이 한 목소리로 빨리 성명(成命)을 받들기를 청하니, 상이 눈물을 삼키며 목메인 소리로 이르기를,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都尉)의 소를 보고 또 본원(本園)에 대해 언급하는 경들의 아룀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화복(禍福)의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오래된 묘를 옮기는 것이라면 비록 여항(閭巷)의 서인의 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겠는가.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한 도위(都尉)의 소로 인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정상인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맺혀 있는데, 만약 흙이 시신에 가까이 닿아 있다[土親膚]고 말한다면 나의 망극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지하의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렴(五廉)031) 운운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광중(壙中)의 흙은 기운이 없는 죽은 흙이니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염려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들이 항용하는 말로 말하더라도, 나경(羅經)의 내반(內盤)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외반(外盤)으로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술방(辛戌方) 득수(得水)032) 이고 해방(亥方) 득파(得破)033) 이니, 갑·묘·해가 모두 목(木)이다. 신술방의 물은 바로 이른바 황천 득수(黃泉得水)034) 로서 내명당(內明堂)035) 에 물이 없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물만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더구나 을입수(乙入首)036) 로서 용세(龍勢)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갑오년에 성묘(省墓)하고 나서부터 옮겨 모셔야겠다고 계획하였으나 새로 정하는 자리가 지금의 자리보다 천만 배 나은 뒤에야 거의 여한이 없을 수 있을 것인데, 오늘날 행용(行用)하는 지사(地師)로서 누가 땅속의 일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도위도 병신년에 옮겨 모시자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대체로 즉위한 처음부터 간절한 나의 일념이 오직 이 일에 있었다. 그 때에 과연 상하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고, 기유년이란 세 글자를 이미 그 때의 연교(筵敎)에서 언급했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14년 동안에 오직 금년만이 연운(年運)·산운(山運)·원소(園所) 본인의 명운(命運)이 상길(上吉)함이 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더욱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위의 소를 보고 여러 경들의 말을 듣건대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겠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전에 봉표(封標)해 두었던 곳으로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고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아래의 세 곳은 국세(局勢)가 혹은 협소하기도 하고 혹은 힘이 없고 느슨하기도 하다. 광릉(光陵) 좌우 산등성이 중의 한 곳은 바로 달마동(達摩洞)으로서 문의의 자리와 함께 찬양되는 곳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곳은 바로 절터이니,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사(佛寺)의 뒤나 폐가(廢家) 또는 고묘(古廟)에 묘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꺼린 바이다. 용인(龍仁)의 좋다고 운운하는 곳도 역시 그러하다. 이밖에 헌릉(獻陵) 국내의 이수동(梨樹洞)후릉(厚陵) 국내의 두 곳, 강릉(康陵) 백호(白虎) 쪽, 가평(加平)의 여러 곳들도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 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 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의 묏자리에 대한 논의는 기해년 《영릉의궤(寧陵儀軌)》에 실려 있는 윤강(尹絳)·유계(兪棨)·윤선도(尹善道) 등 여러 사람과 홍여박(洪汝博)·반호의(潘好義) 등 술사(術士)들의 말에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말로 말하면 윤강의 장계(狀啓)와 윤선도의 문집 중에 실려 있는 산릉의(山陵議)여총호사서(與摠護使書)보다 자세한 것이 없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여서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살핀 것이 몇 년인지 모른다. 옥룡자의 평(評)이 그 속에 실려 있는데, 그의 말에 ‘반룡 농주의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 혈식 구원(宗廟血食久遠)의 계책이란 것이다.

대체로 그 형국으로 말하면 비록 범인의 안목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에 재혈(裁穴)하고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해서 좌향(坐向)을 놓으면 바로 이른바 구슬을 안대한다는 것이다. 구슬을 안대하려면 두 봉우리 사이 빈 곳으로 안(案)이 가는데, 이것이 또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向)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금(分金)037) 도 이렇게 재혈하고 이렇게 좌향을 놓고 이렇게 안대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지금 경 등을 대하여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음으로 돕고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道詵)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수원산론(水原山論)을 읽게 하니, 연신(筵臣) 모두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논한 바가 이미 이와 같은데 지금에 와서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봉표해 둔 곳이 바로 이른바 유두(乳頭)로서, 아래쪽의 낮은 곳에 비하면 너무 올라오고 드러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오직 달무리처럼 둥그렇게 평탄한 곳이 바로 진정한 복룡 길지(福龍吉地)이다. 길일(吉日)이 머지않았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하고, 이어 경기 관찰사 조정진(趙鼎鎭)수원 부사 김노영(金魯永)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서유방(徐有防)을 경기 관찰사로, 조심태(趙心泰)수원 부사로 삼았다. 그리고 상이 이르기를,

"천장해 모시는 일은 사체가 막중하므로, 본원(本園)의 제사 의식도 태묘(太廟)에 버금가는 것으로 대부(大夫)의 예를 사용해서 제사할 것이니 총호사(摠護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때에는 삼공(三公)을 의당 갖추어야 할 것이다. 총호사의 임무는 으레 영의정이 관장하는 것이니, 좌상과 우상은 복상(卜相)한 뒤에 가서 봉심(奉審)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3면
  • 【분류】
    왕실(王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30]
    감여(堪輿) : 풍수설(風水說).
  • [註 031]
    오렴(五廉) : 5국(局)의 염정방(廉靜方)에서 득(得)이나 파(破)하는 것을 이름. 5국은 금·목·수·화·토이고, 염정방은 사병방(死病方)을 이름. 금국에는 건(乾)·해(亥)·임(壬)·자(子), 목국에는 손(巽)·사(巳)·병(丙)·오(午), 수국에는 계(癸)·축(丑)·간(艮)·인(寅), 화국에는 곤(坤)·신(申)·경(庚)·유(酉)가 염정방이고, 토국은 수국과 같음.
  • [註 032]
    득수(得水) : 풍수지리학에서 묘에서 보아 처음 보이는 물을 이름.
  • [註 033]
    득파(得破) : 묘지에서 가장 나중에 보이는 물을 이름.
  • [註 034]
    황천 득수(黃泉得水) : 임관방 득수(臨官方得水)를 이름. 임관방은, 금국의 경우 곤신방(坤申方), 목국의 경우 간인방(艮寅方), 수국은 건해방(乾亥方), 화국은 손사방(巽巳方)이고, 토국은 수국과 같다.
  • [註 035]
    내명당(內明堂) : 묘 앞의 평평한 곳으로 청룡 백호가 싸고 있는 안을 이름.
  • [註 036]
    을입수(乙入首) : 묘에서 보아 을방(乙方)에서 산맥(山脈)이 들어온 것을 이름.
  • [註 037]
    분금(分金) : 관(棺)을 묻을 때 좌향(坐向)을 정확하게 정하는 것.

○乙未/定永祐園遷奉之禮。 上以園寢形局淺挾, 自御極初, 有移奉之意, 而鄭重荏苒, 且有年。 至是錦城尉 朴明源上疏曰:

園所事體, 顧何如也, 關係亦何如也? 爲今日之臣子, 思萬世之大計, 心無所不用其極, 義有所不敢自隱, 玆敢冒死仰陳崇聽。 臣素昧堪輿, 便同聾瞽, 只以人人易知易見者論之。 一, 莎草枯損也。 二, 靑龍穿鑿也。 三, 後托水勢之衝激也。 四, 後節築石之非天作也。 以此觀之, 則風氣之不順, 土性之不全, 地勢之汚下, 推可知也。 有一於此, 尙爲臣民之至慟, 而況蛇虺之屬, 局內近處, 蟠結成群, 至於丁字閣瓦子, 張張罅欹。 雖與舊長陵穴道侵犯, 差有間焉, 局內旣多有之, 則安知其不犯於至敬至重之地乎? 我聖上自甲午拜園之初, 至丙申御極之後, 憧憧聖念, 惟在園所安否。 晨鍾夜燭, 幾灑深宮之淚, 春雨秋霜, 頻發中朝之歎, 臣之承聆屢矣。 丙申初, 有以遷奉發端於前席者, 伏想聖聰, 亦或記有矣。 嗚呼! 丙午五、九月之變, 尙何言哉? 我聖躬惸惸獨立於上, 海籌漸向晼晩, 瓜瓞尙遲綿蔓。 昔在英宗大王七年辛亥, 長陵遷奉時, 大臣諸宰, 以戊申以後, 中外顒若之情, 引朱文血食久遠之語, 前席建議, 改卜吉地, 國祚靈長, 寔至今賴焉。 旣有先朝之故事, 則尤爲今日之明證矣。 伏願博詢在廷, 廣招地師, 諮諏休咎, 以安神道, 以伸聖孝, 俾爲千萬代遠猷。

批曰: "冥頑至今, 夙宵結轖于中。 卿請際至, 當問于大臣諸臣決之。"乃召見大臣、閣臣、禮堂、宗親、儀賓、三司、二品以上于熙政堂, 命承旨, 讀明源疏。 大臣、禮堂一辭請亟奉成命。 上飮泣哽咽曰: "予素有膈氣, 今見都尉疏, 又聞卿等之奏語到本園, 自不禁臆塞氣短。 猝難發言, 姑勿繼陳, 以待予氣小降。" 移時, 上曰: "若惑信禍福之說, 遽移久遠之塋域, 則雖閭巷匹庶之家, 尙云不可, 況國家莫重莫大之擧乎? 今予此言, 豈因一都尉之疏而發哉? 予之情事, 不欲以常人自處者, 卿等之所知。 數十年至慟, 結轖胸中, 若言土親膚三字, 則予懷罔極, 當復如何? 地中之不安, 不待五廉云云, 可以決之。 大抵穴星卽無氣死土, 有十分至難言之慮。 且以堪輿家恒用說話言之, 內作甲坐, 外作卯坐, 辛戌得水亥破, 甲卯亥俱木也。 辛戌水, 卽所謂黃泉得水, 內堂無水, 不可但以偏水言。 又況乙入首, 而龍勢尤無可論。 自甲午展省, 經營移奉, 而新卜之地, 千勝萬勝於今日以前, 然後庶可無憾。 以行用地師, 孰能明見地中之事乎? 都尉亦云, 丙申有遷奉之議, 蓋自御極之初, 予之洞屬一念, 惟在此事。 伊時果有上下酬酢, 而己酉年三字, 已發於伊時筵敎。 十四年之間, 惟今年運、山運、園所, 本命運爲上吉, 予心益復憧憧。 今見都尉疏, 聞諸卿言, 宿志可遂, 豈非天意耶? 自來封標之處, 文義 兩星山亥坐之原, 則自古云云, 而離祖終欠太近, 不免有菀弗之氣, 砂水龍勢, 決難議到。 長湍 白鶴山下三處, 則局勢或狹小, 或微緩, 光陵左右岡中一處卽達摩洞, 與文義齊稱之地, 而俱未合意。 其中一處卽寺基, 神前佛後, 廢屋古廟, 古人之所忌, 龍仁云云處亦然。 外此獻陵局內梨樹洞, 厚陵局內二處, 康陵白虎邊, 加平諸處, 無一合意處。 唯水原邑內封標三處, 官家後一處, 多前人明的之證, 況玉龍子所謂盤龍弄珠之形局。 且年運、山運、本命運, 無不沕合, 予所謂天意者此也。 國中陵園封標中, 三處最吉之說, 自古有之, 一則弘濟洞, 卽今寧陵是也, 一則健元陵右岡, 卽今元陵是也, 一則水原邑也。 水原山地之論, 觀於己亥《寧陵儀軌》, 如尹絳兪棨尹善道諸人及洪汝博潘好義等術士之言, 可以知之。 其始末則莫詳於尹絳狀啓、尹善道文集中, 《山陵議》與摠護使書, 而予於水原留意已久, 博考而詳察, 不知爲幾年。 玉龍子所評, 詳載其中, 其言以爲: ‘盤龍弄珠之形, 眞是福龍大地, 而龍穴砂水, 盡善盡美, 誠千里所無, 千載一遇之地。’ 此正朱子所謂: ‘宗廟血食久遠之計也。’ 槪其形局, 雖凡眼可辨, 穴星則乳頭下坦處, 而坐向則案對小阜, 是謂對珠, 而欲對珠, 則兩峰間空處, 此又所謂對珠, 則向空者也。 且分金則以此穴以此坐以此案亦當決之, 予意已定水原。 今對卿等, 喩以蘊中之說, 此非天意之所陰騭, 神明之所默佑乎?" 判中樞府事金熤曰: "今承聖敎, 臣亦怳然。 玉龍子道詵之號, 所論如此, 捨此何求乎?" 上命承旨, 讀《水原山論》。 筵臣僉曰: "古人所論旣如此, 到今豈有他說乎?" 上曰: "己亥封標處, 卽所謂乳頭也。 比諸稍低處, 則不無登露之嫌, 惟坦處圓暈處, 是眞正福龍吉地也。 吉日不遠, 目下急先務, 最宜安接本土之民, 次議移邑之計。 予則曰: ‘人情安然後, 地理亦吉。 民人遷徙, 則予已有多般經紀, 俾各奠安, 而任予宣布撫摩之責者, 道伯及地方官是也。" 仍命京畿觀察使趙鼎鎭水原府使金魯永內移, 以徐有防京畿觀察使, 趙心泰水原府使。 上曰: "遷奉之擧, 事體莫重。 本園祭儀, 皆以亞於太廟, 祭以大夫之禮用之, 摠護使當差出。 此時三公宜備, 而摠護之任, 自是領相例管, 左右相卜相後, 進去奉審。"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3면
  • 【분류】
    왕실(王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