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1권, 정조 즉위년 7월 1일 경오 3/3 기사 /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신응현이 김상익을 찬배하도록 상소하나 윤허하지 않다
국역
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상소하기를,
"지난 겨울에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도록 하신 명은, 곧 우리 선대왕께서 요(堯)·순(舜)이 수수(授受)했던 것과 같은 마음이셨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었었다면, 국가에서 오늘날을 보유하게 되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궁(玄宮)의 지장(誌狀)에 진실로 마땅히 표저(表著)해 내어 천양(闡揚)해야 하고, 역적 홍인한이 대책(大策)을 저해하기를 조태구(趙泰耉)나 유봉휘(柳鳳輝)보다도 휠씬 더했으니, 또한 마땅히 필법(筆法)을 준엄하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올리는 대신이 단지 ‘시상이 찬양하게 되지 못했다. [時相不能贊揚]’는 여섯 글자로 흐릿하게 말해 갔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선왕(先王)의 지극한 덕(德)을 찬양하게 될 수 있고, 앞으로의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장 내용에 이 한 단락은 다시 지어야 하고, 대신이 잘못 지은 과실은 바로잡는 경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대사헌 김상익(金相翊)에 있어서는, 홍상간이 공술한 말을 보건대 김상익이 홍지해에게 혼사(婚事)하기를 극력 청했었습니다. 그의 마음 자취를 논한다면 장두(腸肚)가 서로 연결되어진 것인데, 백부(柏府)의 장관이었으니, 역적들을 토죄하기를 주장한 논의는 어찌 이열 치열(以熱治熱)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찬배(竄配)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문(誌文)의 일은 그렇게 지적한 것과 같지는 않았다. 김상익을 어찌 꼭 심하게 벌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지문을 지어 올린 대신은 곧 김양택(金陽澤)이었다.
원문
정조 즉위년 (1776) 7월 1일
국역
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상소하기를,
"지난 겨울에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도록 하신 명은, 곧 우리 선대왕께서 요(堯)·순(舜)이 수수(授受)했던 것과 같은 마음이셨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었었다면, 국가에서 오늘날을 보유하게 되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궁(玄宮)의 지장(誌狀)에 진실로 마땅히 표저(表著)해 내어 천양(闡揚)해야 하고, 역적 홍인한이 대책(大策)을 저해하기를 조태구(趙泰耉)나 유봉휘(柳鳳輝)보다도 휠씬 더했으니, 또한 마땅히 필법(筆法)을 준엄하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올리는 대신이 단지 ‘시상이 찬양하게 되지 못했다. [時相不能贊揚]’는 여섯 글자로 흐릿하게 말해 갔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선왕(先王)의 지극한 덕(德)을 찬양하게 될 수 있고, 앞으로의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장 내용에 이 한 단락은 다시 지어야 하고, 대신이 잘못 지은 과실은 바로잡는 경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대사헌 김상익(金相翊)에 있어서는, 홍상간이 공술한 말을 보건대 김상익이 홍지해에게 혼사(婚事)하기를 극력 청했었습니다. 그의 마음 자취를 논한다면 장두(腸肚)가 서로 연결되어진 것인데, 백부(柏府)의 장관이었으니, 역적들을 토죄하기를 주장한 논의는 어찌 이열 치열(以熱治熱)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찬배(竄配)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문(誌文)의 일은 그렇게 지적한 것과 같지는 않았다. 김상익을 어찌 꼭 심하게 벌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지문을 지어 올린 대신은 곧 김양택(金陽澤)이었다.
원문
원본
정조 즉위년 (1776)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