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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1월 29일 무인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유신을 불러 《자성편》을 읽게 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원량이 오늘 서연(書筵)을 빠뜨렸다 하니 춘방(春坊)의 관원을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고 지극히 현명하시며 국사에 밝고 익숙하시면서도 오히려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셨는데, 어찌하여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 하여 국사에 마음을 놓으실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유년028) 을 회상하니 감회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조금 전에 조용히 누워 조는 듯 마는 듯하다가 갑자기 유신을 부르라 명하였다. 나에게도 뜻이 있으니 어찌 대리 청정한다고 하여 국사를 소홀히 하겠느냐?"

하였다. 어석윤이 말하기를,

"신들이 옥당(玉堂)에서 석양이 비추인 창을 바라보며 슬프게 서로 말하기를, ‘대조(大朝)께 입시하는 것도 이제부터는 드물 것이다.’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부르시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자못 감동하였다. 교리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대신을 인접하시고 신들을 불러 보시어 국사를 의논하시며 고사(故事)를 강론하시면 동궁의 첫 정사에 도움되는 것이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주 유신들을 불러 경사(經史)를 선택하여 읽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였다. 어석윤《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강론을 마치어 상유지공(桑楡之功)029) 을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어제 동궁이 차대(次對)한 거조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승지로 하여금 하나하나 읽어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이와 같은 대간은 논박하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원량에게 대신(臺臣)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열어 놓을까 두렵다. 좌상은 끝내 ‘쾌(快)’ 자 한 글자가 병통이 되었다. 영상이 기영(箕營)030) 의 돈 등에 대한 말을 원량에게 개진한 것도 역시 매우 유감스럽다.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나이 어린 임금에게 반드시 수한 도적(水旱盜賊)031) 으로써 아뢰는 뜻과 같지 않는가? 원량이 말하기를, ‘소민(小民)에게 떨끝만치라도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하였지만 백성이 고통스럽고 고통스럽지 않는 것은 실상 그 자신에 달려 있다."

하며, 이윽고 앞에 놓인 촛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역시 백성의 노고로 된 것인데도 원량은 촛대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백성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원량이 차대할 때 20여 명의 여러 재신(宰臣)들 가운데 진달한 사람이 겨우 두세 사람뿐이며, 그 또한 하찮은 부서(簿書)032) 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생각한 바가 있었으나 날이 저무는 것이 혐의스러워 아무 말없이 물러갔다면 이것은 원량을 보좌하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리 청정의 초기를 맞이하여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홀(笏)에 하고 싶은 말을 써서 임금에게 아뢰는 뜻을 생각하지 않는가? 발언하지 아니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중추하라. 장례원의 일은 비록 부서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것은 백성에 관계되는 일이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파직시키는 것은 오히려 가벼우니 모두 삭직(削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자의 강학(講學)에 양사(兩司)가 비록 입시하지만 이미 승지와 사관이 없으니 전달할 수가 없다. 강학이 끝난 뒤에 대청(臺廳)에 나와 전달하도록 하라. 비록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를 할 때라도 춘방은 홍문관과 다르니 감히 글의 뜻을 인용하여 정치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이 든 사람을 나이 든 사람답게 대접하는 것은 혈구지도(絜矩之道)033) 이니 사서인(士庶人)으로서 90세 이상 되는 사람을 경외(京外)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여 우리 원량으로 하여금 경로(敬老)의 의미를 알게 하고 우리의 부로들로 하여금 원량의 첫 정사를 알게 하라."

하였다. 또 찬선 심육(沈錥)은 즉시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29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註 028]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 [註 029]
    상유지공(桑楡之功) : 석양 무렵의 공부. 해의 그림자가 뽕나무와 느릅나무 끝에 남아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
  • [註 030]
    기영(箕營) : 평양 감영.
  • [註 031]
    수한 도적(水旱盜賊)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이 하남(河南)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화재가 나서 민가 천여 채가 타버린 것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홍수와 가뭄으로 부자 상식(父子相食)한 정경은 볼 수 없어서 임의로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명을 받지 않고 한 것이므로 죄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아뢴 고사에서 나온 말.
  • [註 032]
    부서(簿書) : 전곡(銓穀)의 출납을 적는 장부.
  • [註 033]
    혈구지도(絜矩之道) : 바른 법도에 비추어 행동하는 도리.

○戊寅/上召儒臣, 讀《自省編》, 敎曰: "聞元良今日闕書筵, 春坊官重推。" 修撰魚錫胤曰: "殿下至仁至明, 明習國事, 猶不能挽回世道, 豈可以付托得人, 有所放心於國事哉?" 上曰: "追思丁酉, 感懷何極? 俄者靜臥, 似睡非睡, 忽命召儒臣。 予亦有意, 豈以代理之故, 恝視國事乎?" 錫胤曰: "臣等在玉堂, 見夕陽照窓, 悵然相語曰, ‘大朝入侍, 從此稀闊耶’ 忽聞有召命, 顚倒入來矣。" 上頗感動。 校理尹光紹曰: "引接大臣, 召見臣等, 商議國事, 講論故事, 則有補東宮初政, 不亦多乎?" 上曰: "數召儒臣, 拈經史使讀, 是予志也。" 錫胤請畢講《資治通鑑》, 以收桑楡之功, 上許之。 仍命取入昨日東宮次對擧條, 使承旨一一讀奏。 上曰: "左相所言 ‘如此臺諫不足惜’ 云者, 恐啓元良凌侮臺臣之心。 左相終爲一快字病了。 領相之以箕營錢貨等說, 陳於元良亦甚慨然。 何其與古人必以水旱盜賊, 陳於少主之意不同也? 元良以爲勿使小民一毫苦焉, 而民之苦與不苦, 實係於渠身矣。" 遂指在前燭臺曰: "此雖一物, 亦爲民之苦, 元良則意燭臺自然生出。 豈能知非民則不可得耶?" 遂敎曰: "元良次對, 二十餘員諸宰中所達者只二三人, 而亦不過簿書。 若有懷而嫌其日晩, 默而退, 則此非輔元良之意。 不然, 當代理之初, 何不思古人書笏之義? 不言諸臣竝重推。 隷院事, 雖似簿書, 實是民事。 該堂、郞罷職猶輕, 竝削職。" 又敎曰: "世子講學, 兩司雖入侍, 旣無承、史, 不可傳達。 講畢後, 出詣臺廳傳達。 雖書筵、召對時, 春坊異弘文館, 毋敢引文義論政。" 又敎曰: "老老, 所以絜矩之道, 士庶年九十以上, 令京外題給食物, 使我元良知敬老之義, 使我父老識元良之初政。" 又命贊善沈錥, 卽爲上來。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29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