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12월 7일 정미 3/5 기사 / 1729년 청 옹정(雍正) 7년
토역을 청한 민진원의 상소문
국역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기를,
"아! 한 번 지난해의 변란(變亂)이 있은 이후부터는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이면 성상에 대한 무함을 밝히는 한 가지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어떻게 하는지를 들을 수가 없어, 그런 흉악한 말을 논하지 않는 속에 두어 버리고 성상의 덕을 어두컴컴한 데에 돌려버리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나도 시원치 않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을사년774) 봄에 신(臣)이 시골에 머물러 있어 이천해(李天海)의 변이 생겼음을 들었었는데, 신이 조정에 왔을 때에 미쳐 혹자의 말은 ‘이천해는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사람으로서 길거리에 나와 요란하게 떠든 말을 두서(頭緖)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고, 혹자의 말은 ‘이천해가 비록 거짓으로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것처럼 모양을 꾸몄으나 그의 흉악한 음모가 반역을 도모한 정상은 지극히 망측(罔測)하다.’고 했었습니다.
신이 국문(鞫問)한 옥안(獄案)을 보지 못했으므로 의혹(疑惑)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에 감히 연석(筵席)에서 옥사(獄事)의 실정을 하문(下問)해 보시기를 청했었으나, 전하께서 ‘흉악한 말을 무엇하러 입술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놓아두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 분부가 이러하시기에, 신이 감히 다시 제론(提論)하지 못하였었는데, 그 뒤에 신이 약원(藥院)의 도제조(都提調)로 있으면서 우연히 갑진년775) 의 일기(日記)를 펼쳐 본 즉, ‘선왕(先王)께서 그 해 7월 17일부터 두통(頭痛) 증세가 있어 침식(寢食)이 모두 감퇴되고 오한(惡寒)과 열로 번뇌(煩惱)하다가 점차로 침중하게 되셨으며, 8월 20일에 이르러서는 또 가슴속이 번민(煩悶)스러운 증세가 있으셨고, 21일 이후에는 설사가 멎지 않으므로 23,24일에 연속해서 삼차(蔘茶)를 올렸으나 마침내 위독하게 되셨는데, 그 동안에 밤중에도 다급하게 의관(醫官)을 불러 무슨 약을 써야 될지 하문하시기를 여러 차례 하셨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질병이 빌미가 되고 40일을 침중(沈重)하시다가 영구히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이 맺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천해의 흉악한 말은 과연 어디에 의거한 것이며, 그때에 중외(中外)에서 증세(症勢)가 이러하셨음을 전연 듣지 못하게 되었었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신이 이에 있어서 통탄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분개해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곧장 살고 싶지 않게 되어집니다.
정미년776) 에 이르러 신들이 죄를 입고 물러난 뒤에 미쳐 또 듣건대, 서울과 외방(外方)에 잇달아 괘서(掛書)하는 변이 생기었고, 무신년777) 봄에는 과연 역적들이 군사를 일으키며 의거(義擧)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이에 비로소 이천해의 흉악한 말과 경외(京外)의 괘서가 전후에 배포(配布)된 것은 맥락(脈絡)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흉악한 음모를 빚어낸 것이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의 일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청(鞫廳)의 죄수들이 공초(供招)한 것을 들어 보건대, 모두 다 말의 근거를 심유현(沈維賢)에게 돌렸었습니다.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과 척분(戚分)이 있어 소원(疏遠)한 신하와 다르므로 그의 말이면 사방에서 듣는 자들에게 반드시 믿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제적(諸賊)들이 반드시 심유현을 교사(敎唆)하고 유인하여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은 이런 때문일 것입니다.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저들 나라에서 조사(弔使)가 왔을 적에 역관(譯官)을 시켜 신에게 말을 보내 오기를, ‘주상(主上)께서 근심하는 얼굴빛과 서럽게 우는 것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으니, 이는 동국(東國)의 복이기에 감동하여 마음에 기뻐짐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삼가 치하(致賀)하는 말을 대신에게 올립니다.’라고 했었습니다. 대저 전하께서 효도하고 우애하시는 지극한 행실은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존경하여 감복할 줄 알았습니다. 저 심유현은 또한 전하의 신자(臣子)인 한 사람으로서 역시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는데, 어찌 전하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善)을 알지 못하고, 차마 역적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 등과 마음을 같이 하며 호응하여 그러한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난신(亂臣)이나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이 역적들처럼 한없이 흉측하고 극도로 패악한 자가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이 손으로 그의 고기를 뜯어 먹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갑진년 가을에는 성주(星州)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었기에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신 것을 전연 듣지 못하고 있다가, 고을의 아전이 갑자기 승하(昇遐)하신 기별을 알려 왔기에 놀라고 애통해 하느라 어찌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을 성으로 달려갔었지만 무슨 증세로 인해 이처럼 대척(大慽)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다만 스스로 반호(攀號)하며 애통해 할 뿐이었습니다. 신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저 시골의 미미한 선비나 백성들이 어디에서 듣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그들의 마음이 이미 놀래고 의혹하게 되었을 것인데, 이처럼 놀래고 의혹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척완(戚畹)778) 에게서 나와 흉악한 말을 들었을 적에 사세가 진실로 곧이들으며 따르지 않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건저(建儲)를 가리켜 폐립(廢立)이라 하고 참결(參決)을 가리켜 찬탈(簒奪)이라고 한 그 원위(源委)가 나온 데가 있은 것이겠습니까? 저 제도(諸道)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풍문(風聞)만 듣고서 역적들에게 붙게 된 것은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역적들의 군사가 이미 흩어지고 죄수들 국문(鞫問)이 바야흐로 한창임을 듣게 되면서는 생각에 박필몽과 박필현의 무리가 심유현을 종용(慫慂)한 것과 심유현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실정이 거의 모두 드러나게 되리라 여겼었습니다.
풍문에 듣건대, 전하께서 죄수들을 국문하실 적에 제적(諸賊)들이 성상의 몸을 향하여 그만 흉패(凶悖)한 말을 하게 되므로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다가 더러는 눈물을 흘리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근거를 당초부터 추궁하여 핵실(覈室)하지 않았고, 심유현에 있어서는 또한 무슨 까닭도 없이 앞질러 물고(物故)가 되었습니다. 비록 심상하게 남을 무함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말을 조작해 낸 실정을 사핵(査覈)하여 승관(承款)을 받아내어 결안(結案)을 써 놓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될 것인데, 오늘날의 일은 성상의 몸에 관하여 망측(罔測)하게 무함한 것을 한 해가 다 가도록 신국(訊鞫)했지만, 언제 일찍이 명백하기가 이와 같은 것을 한 장이라도 공초(供招)받아 놓은 것이 있었습니까?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 대저 되도록 너그럽게 완화(緩化)하기에만 주력하여, 베인 것은 대부분 지엽(枝葉)인 사람이 많았고 난만(爛漫)하게 역적을 추종한 사람에 있어서는 허다히 살리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법망(法網)을 벗어나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그 무리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제도(諸道)에 교문(敎文)을 반포하여 제적(諸賊)들의 친척과 인우(姻友)들을 위안해 주셨고, 영남(嶺南) 사람들에 대하여는 해유(解由)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관직을 제수하도록 분부하시게 되었으니, 영남 사람들은 어찌 모두 반역을 했었기에 이러한 비상한 처분을 내림으로써 감동하여 기뻐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대저 처벌이 그 죄에 합당하게 되면 죽게 되는 자도 또한 원망하지 않는 법이고, 은덕이 합당한 은덕이 아니게 되면 받는 자가 도리어 의혹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자신의 일을 변명하는 것을 혐오(嫌惡)하여 끝까지 추궁하지 않으려고 하시고, 또 반측자(反側者)들의 마음을 안정(安定)시켜 은혜에 감복하며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하시니, 성상께서 마음에 생각하고 계시는 바는 어찌 애연(藹然)하게 인후(仁厚)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저 효경(梟獍)779) 과 같은 성질은 마침내 감복시킬 수 없고, 도리어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은 외축(畏縮)에서 나온 약점(弱點)을 드러낸 것으로 여기게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습을 숨기며 베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치 서리맞은 풀과 같이 시들하던 사람들이 현저한 호건(豪健)하게 자득(自得)한 모양이 있어 비록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의욕(意慾)에 찬 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문에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와전(訛傳)되는 말이 파다하므로 민생들이 모두 보따리를 꾸리고 있어 마치 장차 파탕(波蕩)이 일게 될 듯한 사세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계시니, 또한 어떻게 물정(物情)이 이에 이른 것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서리 뒤에는 얼음이 얼게 되는 것과 같은 조짐이 유래(由來)해온 지 오래입니다. 갑진년의 대상(大喪) 이래로 위란(危亂)을 의구(疑懼)하는 조짐과 속이어 현혹(眩惑)하는 사단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는데, 마침내는 칭병(稱兵)하여 난을 일으키매 나라의 절반이 따라서 배반하게 되었었습니다. 그 뿌리가 굳어지고 깊어져 뻗어 나가는 것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진실로 고식적(姑息的)인 인자(仁慈)로는 복종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대저 전하의 한 몸은 곧 종사(宗社)의 주인이시기에 성상의 몸이 무함을 받는 것은 곧 종사가 무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 자신은 비록 가볍게 여기실지라도 종사가 무함받는 것을 돌보지 않으면서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핑계해버리고서 분명하게 변파(辨破)해 갈 바를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옛적의 우리 인묘 성조(仁廟聖祖)께서 훌륭한 공렬과 큰 업적이 마치 청천 백일(晴天百日)과 같으셨는데도 그 때의 흉악한 반역의 무리가 오히려 또 중국에 말을 전파하여 야사(野史)에 기록하게 되었기에, 전하께서 선조(先朝)를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일을 여러 해가 되도록 더욱 부지런히 하셨었습니다. 하물며 이들 심유현의 무리가 으슥한 자리에서 임금에게 후욕을 가하였고 터무니 없는 속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어 대중의 귀를 현란(眩亂)시키고 온 나라 안을 요란하게 했으니, 후세를 위한 염려가 더욱 어떠하기에 오히려 그대로 태연히 있어 변무(辨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선조(先朝)에 대한 무함에 있어서는 변무하고도 당저(當宁)에 대한 무함은 놓아 두며, 딴 나라에 있어서의 변무는 그들에게 달린 것인데도 기청(祈請)했으면서, 본국(本國)에 있어서의 변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도 범연하게 소홀히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의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노(怒)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니,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분부하셨는데, 대저 ‘노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지,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은 곧 정자(程子)가 한 말로서, 대순(大舜)이 사흉(四凶)780) 을 베인 것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지의(旨義)를 추구(推究)해 보건대, 오늘날의 일과는 딱 들어맞지 않는 듯싶습니다. 하물며 또 정자의 말이 ‘요(堯)가 필부(匹夫)들 속에서 순(舜)을 찾아내어 제위(帝位)를 선양(禪讓)했을 적에 그 사흉들이 분노(憤怒)하고 불평하여 악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순이 그들의 행적에 따라 베거나 귀양 보낸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흉들의 죄가 어찌 순 자신에 상관이 없는 것이겠습니까마는, 순이 혐피(嫌避)하지 않고 베이게 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입니다. 천명(天命)을 받들고서 천토(天討)를 거행한 것이고, 그 사이에 있어서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남들이 자신의 소위를 사심(私心)을 쓰는 것이라고 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천리(天理)의 당연함을 따르지 않는다면 곧 이것이 사사 뜻인 것이니, 대순(大舜)이 어찌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전하께서 하신 전후의 처분은 이미 여러 차례 기의(機宜)를 잃어버려 흉도(凶徒)들을 섭복(懾服)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뒷처리를 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삼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조(東朝) 두 전하(殿下)께서 만일에 성상의 몸이 이처럼 무함받게 되고 국가의 사세가 이처럼 우려스럽게 되어 있음을 듣게 되신다면 반드시 마음에 놀라고 뼈가 아파하시며 두려운 생각이 절박해질 것입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의 증세(症勢)의 시말(始末)을 빠짐없이 들어 명백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흉악한 말들을 부수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게 하며 국가의 명맥(命脈)이 연장되게 하셔야 할 것인데, 아래에서 진품(陳稟)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떻게 외간(外間)의 사세를 내려다보실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백 가지로 애가 타기에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 보다가, 지난해에는 지금의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두 동조(東朝)께 호소하여 하교(下敎)를 받아내어 팔방(八方)에 반포하기를 권했더니, ‘나의 뜻도 바로 그와 같다.’고 답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홍치중이 사람들의 논박을 만나 도성(都城)에서 나가게 되었었다가 다시 도성으로 들어옴에 미쳐 신이 또 서찰을 보내어 권면하자, 홍치중의 답이 또한 지난해와 같았었는데도 지금 여러 달이 되도록 또한 오히려 적연(寂然)하니, 신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 한 가지 일이 또한 점점 시기가 늦어지게 되니, 신이 진실로 통탄하고 절박하게 여깁니다. 대저 선왕(先王)의 병세가 약원(藥院)의 일기(日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마다 모두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거의 변무(辨誣)하는 한 가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두 동조의 고유(誥諭)를 받아내어 분명하게 중외(中外)에 게시(揭示)하게 된다면, 성상의 덕을 밝은 일월(日月)처럼 높이게 되고 국가 형세를 반석(盤石)처럼 굳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이 과연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성상에 대한 무함을 가리기 전에는 자신이 천지 사이에 설 수 없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분명하게 말을 하고 극력 논하여 우리 임금께서 받은 모함을 변명(辨明)하는 자가 있었음을 들어볼 수가 없고 단지 머뭇거리며 그대로 함묵(緘默)하고 있을 뿐이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 뜻이 마치 위로 성상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게 되는 뜻을 체념(體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실지는 우선만 편하기 위한 친애(親愛)입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역적들의 변란이 겨우 진정된 다음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포고(布告)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마땅히 흉악한 말들의 연유한 바를 깊이 구명(究明)하여 명백하게 말을 다하여 중외(中外)의 사람들 마음이 향배(向背)의 기미(機微)에 있어서 미혹(迷惑)되지 않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호하게 말을 하여 핵심(核心)을 깨뜨리지 못했으니, 자못 국가를 위하는 지극한 성의와 측은한 뜻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간사한 싹을 끊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시급히 묘당(廟堂)에 명하여 주밀하게 생각하고 난숙하게 강구(講究)하여 분명하게 팔로(八路)에 포유(布諭)하도록 하시되, 무릇 신이 진달한 이외에도 성상에 대한 무함을 변명하게 되는 것이나 사람의 이륜(彛倫)을 붙들게 되는 것에 있어서는 눈을 밝히고 용기를 내어 지극한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군신(君臣) 사이의 큰 예방(禮防)이 보존되도록 하게 하시고,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도모해 가시되 깊이 지난날의 난(亂)을 불러들이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보시고서 통렬하게 하나의 혐자(嫌字)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무릇 갖가지의 처분에 있어 엄명(嚴明)하고 광대(光大)하게 하여 환히 남아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게 하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히 기뻐하며 복종하게 되고, 화근(禍根)들이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진실로 국가가 만세토록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신의 말이 유망(謬妄)하고 미착(迷錯)한 것이어서 채택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시급히 망령된 말을 한 죄를 가하여 온 세상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오직 바라는 것은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원근(遠近)에 반시(頒示)한다면, 도성(都城) 안의 사민(士民)들도 또한 거의 역신(逆臣)과 순신(順臣)의 분변에 있어서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내일 복주(伏誅)하게 되더라도 뒷날에 있어서 또한 달갑게 여기겠고 다시 남은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감히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뜻을 품었으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왕법(王法)에 걸리는 짓을 한 것인데, 나 자신에 있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물며 제적(諸賊)들은 모두 다 복주(伏誅)하게 되었다. 이미 지난해의 난역(亂逆)을 겪고난 뒤인데 조금이라도 병이(秉彛)781) 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알게 되지 못하겠는가? 지나간 해에는 경(卿)의 마음에 혹 지난해를 염려하게 되기는 했지마는, 지금에 있어서 그런 염려는 곧 병통이 아니겠는가? 이런 데에 있어서 마음에 항시 경을 개탄하고 있다. 인용한 말이 미안스러운 것이고 생각이 주편(周遍)하지 못한 것이기에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경은 지난날과 같은 마음을 조금 덜어버리고 통쾌하게 서로 공경하고 합심할 생각을 하라."
하였다.
- [註 77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775] 갑진년 : 1724 경종 승하년.
- [註 776] 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77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778] 척완(戚畹) : 임금의 외척(外戚).
- [註 779] 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 [註 780] 사흉(四凶) : 요(堯)임금 때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곧 공공(共工)·환두(驩兜)·삼묘(三苗)·곤(鯀)임.
- [註 781] 병이(秉彛) : 상도(常道)를 굳게 지킴.
원문
○判府事閔鎭遠上疏曰:
嗚呼! 一自昨年變亂以後, 爲 殿下臣子者, 莫急於辨聖誣一事, 而至今未有聞焉, 置凶言於不論之中, 歸聖德於晻昧之地, 可謂痛哭流涕之不足也。 乙巳春, 臣在鄕, 聞有天海之變, 及臣造朝, 或云: "天海, 以狂易之人, 當街亂嚷, 語無倫脊。" 或云: "天海雖詐爲狂易之狀, 其凶謀逆節, 至爲叵測。" 臣未見鞫案, 不勝疑惑, 敢於筵席, 請問獄情, 則殿下敎以凶言, 何可掛齒, 置之不復道可也。 聖敎如此, 臣不敢更提, 其後臣待罪藥院, 偶閱甲辰年日記, 則先王自其年七月十七日, 有頭疼之候, 寢膳俱減, 寒熱煩惱, 漸就沈重, 至八月二十日, 又有膈間煩悶之症, 二十〔一〕 日以後, 水泄不止, 二十三日、四日, 連進蔘茶, 終至大漸。 其間夜中, 急招醫官, 問以當用何藥者, 至於數次矣。" 嗚呼, 痛哉! 天降大割, 疾疢爲祟, 沈淹四旬, 永結臣民之至痛, 則天海之凶言, 果何所憑藉, 而其時中外, 絶未聞症候之若此者, 亦何故也? 臣於此, 不勝痛泣憤惋, 直欲無生也。 及至丁未, 臣等被罪屛退之後, 又聞京外連有掛書之變, 而戊申春賊兵果起, 自稱義擧。 始知天海之凶言、京外之掛書, 首尾排布, 脈胳相連, 凶謀之醞釀, 非一朝一夕之故矣。 及聞鞫囚諸招, 皆以言根, 歸之維賢。 蓋維賢戚連宮掖, 異於踈遠之臣, 其言必將見信於四方之聽聞, 故諸賊之必敎誘維賢, 做出凶言者此也。 噫嘻! 痛矣曾在乙巳, 彼中弔使之來也, 使譯官, 送言於臣曰: "主上顔色之慼, 哭泣之哀, 有不忍瞻望, 此東國之福, 不勝感悅, 謹致賀語於大臣。" 云。 夫殿下孝友之至行, 雖異俗之人, 尙知敬服而嗟歎之。 彼維賢, 亦一殿下臣子, 亦具人形, 豈不知殿下之盛德至善, 而乃忍與逆賊夢、顯等, 同心和應, 做出如此凶言耶? 亂臣賊子, 何代無之, 豈有如此賊之窮凶極惡者乎? 臣實欲手自臠食而不可得也。 臣於甲辰秋, 謫居星州, 全未聞聖候之違豫, 邑吏忽報陟遐之音, 驚痛罔措。 馳入州城, 而未知緣何症候, 致此大戚, 只自攀號痛隕而已。 臣猶如此, 彼鄕曲之下士編戶, 何從而聞之? 其心固已驚惑, 而以驚惑之人心, 聞凶言之出於戚畹, 則其勢固不得不信從。 況指建儲爲廢立, 謂參決以簒奪, 其源委有自者乎? 彼諸道愚氓之望風附賊者, 亦無足怪矣。 及聞賊兵已散, 鞫囚方張, 意謂夢、顯輩, 慫慂維賢、維賢做出凶言之情節, 庶可畢露矣。 流聞殿下, 於鞫囚之際, 諸賊向聖躬, 直發凶悖之說, 則殿下不忍聞, 而或至於垂淚。 凶言做出之根柢則初不窮覈, 如維賢者, 亦且無端徑斃。 雖尋常誣人者, 必覈其造言情節, 得其承款, 書出結案, 人得以見之, 今事關聖躬, 罔測之誣, 而終年訊鞫, 曷嘗有一紙取招, 明白如此者乎? 治獄之際, 大抵務主寬緩, 所誅率多枝葉, 爛漫從賊者, 多傅生議, 漏網自在者, 寔繁其徒。 而殿下又嘗頒敎諸道, 慰安諸賊之親戚姻友, 至有嶺南人不拘解由除職之敎, 嶺人豈盡爲逆, 而有此非常之處分, 欲以感悅之? 夫罪當厥罪, 則死者亦不怨, 恩非其恩, 則受之者反惑矣。 竊覵殿下, 以辨明自己事爲嫌, 而不欲窮竟, 且以反側子自安爲心, 而欲其感恩革心, 聖意所存, 豈不藹然仁厚? 而惟彼梟獍之性, 終難感服, 反意殿下所以如此者, 出於畏縮而示弱。 始之匿影懼誅, 薾然若負霜之草者, 顯有豪健自得之狀, 口雖不敢言, 而其意象則可見矣。 以此人心靡定, 訛言朋興, 民皆荷擔, 若將有波蕩之勢。 仰惟殿下, 深居九重, 亦何以盡燭物情之至此哉? 噫! 氷霜之漸, 所由來久矣。 自甲辰大喪以來, 危疑之兆, 誑惑之端, 不一而足, 卒之稱兵作亂, 半國從叛。 其蒂固根深, 滋蔓難圖, 固非姑息之仁所可服也。 夫殿下一身, 宗社之主也, 聖躬受誣, 卽宗社受誣也。 殿下縱自輕, 其可不恤宗社之受誣, 諉以自己事, 而不思所以昭晣辨破也? 昔我仁廟聖祖, 盛烈大業, 有若靑天白日, 而其時凶逆之輩, 猶且飛語上國, 登之野史, 殿下爲先辨誣之擧, 歷累歲而彌勤。 況此維賢輩, 詬天於幽隱之地, 吠日於虛無之中, 惑亂衆聽, 震撓國中, 則其爲後世之慮, 尤當如何, 而尙可因恬而不之辨乎? 夫誣及先朝, 則辨之, 誣及當宁, 則置之, 在異國則辨之, 在彼而祈請之, 在本國則辨之, 在我而泛忽焉, 古今天下, 安有如此義理耶? 殿下, 又以可怒在彼, 己何與焉爲敎, 夫可怒在彼, 己何與焉, 卽程子之言, 而指大舜之誅四凶也。 究其旨義, 恐不襯合於今日事。 而況程子又曰: "堯擧舜於匹夫之中, 而禪之位, 四人者, 憤怒不平, 而顯其惡, 故舜因其迹而誅竄之也。 以此觀之, 四凶之罪, 豈不關涉於舜之自己, 而舜不以爲嫌而誅之, 所謂己何與焉者。 奉天命行天討, 而無一毫私意於其間也。 大凡恐人之謂我爲私, 而不敢循天理之當然, 則這便是私也, 大舜豈爲是哉? 雖然, 殿下前後處分, 旣已屢失機宜, 不能讋服凶徒, 則誠難以善其後矣。 竊伏念惟我東朝兩殿下, 若聞聖躬之受誣若此, 國勢之可虞若此, 則必當驚心痛骨, 憂遑迫切。 盡將甲辰大喪時症候本末, 明白下敎, 打破凶言, 以定人心, 以延國脈, 而下無陳稟之擧, 則其何以俯燭外間事勢乎? 臣焦憂百端, 反復深念, 昨年移書於今領相臣洪致中, 勸令率百官庭籲於兩東朝, 得下敎頒布八方, 則答以吾意正如此矣。 未幾致中遭人言而出城, 及至復入也, 臣又移書以勖之, 則致中之答, 亦如昨年, 今至屢朔, 尙且寂然, 臣未知其故, 而此一着, 亦漸後時, 臣實爲之痛迫也。 夫先王症候, 詳載藥院之日記矣, 使人人皆得以聞之, 則庶爲辨誣之一資, 而又得兩東朝之誥諭, 昭揭中外, 則可以尊聖德於日月之明, 鞏國勢於磐石之固。 今日之急務, 果有加於此者乎? 今之士大夫, 豈不知聖誣未辨之前, 不可自立於天地之間, 而訖未聞有一人明言極論, 以明吾君之受誣, 而只逡巡循默而已者, 何也? 其意似若仰體聖上不忍聞之意, 而實則姑息之愛也。 殿下亦嘗於逆亂甫定之後, 命詞臣作文播告, 則是宜深究凶言之所由起, 明白說盡, 使中外人心, 不迷於向背之幾。 而含糊爲說, 未能劈破頭腦, 殊無爲國家至誠惻怛之意。 若是而可能折奸萌而服人心乎? 臣實痛之。 伏乞聖明, 亟命廟堂, 使之周思熟講, 明白布諭于八路, 凡臣所陳者外, 有可以辨聖誣扶民彝者, 明目張膽, 靡不用極, 以存君臣之大防, 殿下亦宜自謀, 深惟前日召亂之由, 痛將一箇嫌字, 和根拔去, 凡百處分, 嚴明光大, 洞然無査滓凝滯者, 則人心自然悅服, 禍根自然消絶, 實國家萬世之幸也。 如以臣言爲謬妄迷錯, 不足採施, 則亟加妄言之罪, 以警一世。 而猶望將臣此疏, 頒示遠邇, 則城中士民, 亦庶幾不眩於逆順之辨。 臣雖明日伏誅, 於後亦且甘樂之, 無復餘憾矣。
批曰: "噫! 失志怨國之徒, 敢生誣上不道之意, 此渠輩自速王章者, 於我何有? 況諸賊, 俱皆伏誅。 旣經昨年亂逆之後, 少有秉彝之心者, 其誰不知? 往歲卿心, 或慮昨年, 於今則其慮無乃病痛乎? 此等處, 心常慨歎於卿者也。 引諭之未安, 其思之未周, 予不多言矣。 惟卿, 小損往日之心, 快思協恭之意。"
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12월 7일 정미 3/5 기사 / 1729년 청 옹정(雍正) 7년
토역을 청한 민진원의 상소문
국역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기를,
"아! 한 번 지난해의 변란(變亂)이 있은 이후부터는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이면 성상에 대한 무함을 밝히는 한 가지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어떻게 하는지를 들을 수가 없어, 그런 흉악한 말을 논하지 않는 속에 두어 버리고 성상의 덕을 어두컴컴한 데에 돌려버리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나도 시원치 않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을사년774) 봄에 신(臣)이 시골에 머물러 있어 이천해(李天海)의 변이 생겼음을 들었었는데, 신이 조정에 왔을 때에 미쳐 혹자의 말은 ‘이천해는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사람으로서 길거리에 나와 요란하게 떠든 말을 두서(頭緖)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고, 혹자의 말은 ‘이천해가 비록 거짓으로 미쳐서 제정신이 없는 것처럼 모양을 꾸몄으나 그의 흉악한 음모가 반역을 도모한 정상은 지극히 망측(罔測)하다.’고 했었습니다.
신이 국문(鞫問)한 옥안(獄案)을 보지 못했으므로 의혹(疑惑)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에 감히 연석(筵席)에서 옥사(獄事)의 실정을 하문(下問)해 보시기를 청했었으나, 전하께서 ‘흉악한 말을 무엇하러 입술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놓아두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 분부가 이러하시기에, 신이 감히 다시 제론(提論)하지 못하였었는데, 그 뒤에 신이 약원(藥院)의 도제조(都提調)로 있으면서 우연히 갑진년775) 의 일기(日記)를 펼쳐 본 즉, ‘선왕(先王)께서 그 해 7월 17일부터 두통(頭痛) 증세가 있어 침식(寢食)이 모두 감퇴되고 오한(惡寒)과 열로 번뇌(煩惱)하다가 점차로 침중하게 되셨으며, 8월 20일에 이르러서는 또 가슴속이 번민(煩悶)스러운 증세가 있으셨고, 21일 이후에는 설사가 멎지 않으므로 23,24일에 연속해서 삼차(蔘茶)를 올렸으나 마침내 위독하게 되셨는데, 그 동안에 밤중에도 다급하게 의관(醫官)을 불러 무슨 약을 써야 될지 하문하시기를 여러 차례 하셨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질병이 빌미가 되고 40일을 침중(沈重)하시다가 영구히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이 맺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천해의 흉악한 말은 과연 어디에 의거한 것이며, 그때에 중외(中外)에서 증세(症勢)가 이러하셨음을 전연 듣지 못하게 되었었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신이 이에 있어서 통탄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분개해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곧장 살고 싶지 않게 되어집니다.
정미년776) 에 이르러 신들이 죄를 입고 물러난 뒤에 미쳐 또 듣건대, 서울과 외방(外方)에 잇달아 괘서(掛書)하는 변이 생기었고, 무신년777) 봄에는 과연 역적들이 군사를 일으키며 의거(義擧)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이에 비로소 이천해의 흉악한 말과 경외(京外)의 괘서가 전후에 배포(配布)된 것은 맥락(脈絡)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흉악한 음모를 빚어낸 것이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의 일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청(鞫廳)의 죄수들이 공초(供招)한 것을 들어 보건대, 모두 다 말의 근거를 심유현(沈維賢)에게 돌렸었습니다.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과 척분(戚分)이 있어 소원(疏遠)한 신하와 다르므로 그의 말이면 사방에서 듣는 자들에게 반드시 믿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제적(諸賊)들이 반드시 심유현을 교사(敎唆)하고 유인하여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은 이런 때문일 것입니다.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저들 나라에서 조사(弔使)가 왔을 적에 역관(譯官)을 시켜 신에게 말을 보내 오기를, ‘주상(主上)께서 근심하는 얼굴빛과 서럽게 우는 것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으니, 이는 동국(東國)의 복이기에 감동하여 마음에 기뻐짐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삼가 치하(致賀)하는 말을 대신에게 올립니다.’라고 했었습니다. 대저 전하께서 효도하고 우애하시는 지극한 행실은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존경하여 감복할 줄 알았습니다. 저 심유현은 또한 전하의 신자(臣子)인 한 사람으로서 역시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있는데, 어찌 전하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善)을 알지 못하고, 차마 역적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 등과 마음을 같이 하며 호응하여 그러한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난신(亂臣)이나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이 역적들처럼 한없이 흉측하고 극도로 패악한 자가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이 손으로 그의 고기를 뜯어 먹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갑진년 가을에는 성주(星州)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었기에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신 것을 전연 듣지 못하고 있다가, 고을의 아전이 갑자기 승하(昇遐)하신 기별을 알려 왔기에 놀라고 애통해 하느라 어찌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을 성으로 달려갔었지만 무슨 증세로 인해 이처럼 대척(大慽)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다만 스스로 반호(攀號)하며 애통해 할 뿐이었습니다. 신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저 시골의 미미한 선비나 백성들이 어디에서 듣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그들의 마음이 이미 놀래고 의혹하게 되었을 것인데, 이처럼 놀래고 의혹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척완(戚畹)778) 에게서 나와 흉악한 말을 들었을 적에 사세가 진실로 곧이들으며 따르지 않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건저(建儲)를 가리켜 폐립(廢立)이라 하고 참결(參決)을 가리켜 찬탈(簒奪)이라고 한 그 원위(源委)가 나온 데가 있은 것이겠습니까? 저 제도(諸道)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풍문(風聞)만 듣고서 역적들에게 붙게 된 것은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역적들의 군사가 이미 흩어지고 죄수들 국문(鞫問)이 바야흐로 한창임을 듣게 되면서는 생각에 박필몽과 박필현의 무리가 심유현을 종용(慫慂)한 것과 심유현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실정이 거의 모두 드러나게 되리라 여겼었습니다.
풍문에 듣건대, 전하께서 죄수들을 국문하실 적에 제적(諸賊)들이 성상의 몸을 향하여 그만 흉패(凶悖)한 말을 하게 되므로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다가 더러는 눈물을 흘리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낸 근거를 당초부터 추궁하여 핵실(覈室)하지 않았고, 심유현에 있어서는 또한 무슨 까닭도 없이 앞질러 물고(物故)가 되었습니다. 비록 심상하게 남을 무함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말을 조작해 낸 실정을 사핵(査覈)하여 승관(承款)을 받아내어 결안(結案)을 써 놓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될 것인데, 오늘날의 일은 성상의 몸에 관하여 망측(罔測)하게 무함한 것을 한 해가 다 가도록 신국(訊鞫)했지만, 언제 일찍이 명백하기가 이와 같은 것을 한 장이라도 공초(供招)받아 놓은 것이 있었습니까?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 대저 되도록 너그럽게 완화(緩化)하기에만 주력하여, 베인 것은 대부분 지엽(枝葉)인 사람이 많았고 난만(爛漫)하게 역적을 추종한 사람에 있어서는 허다히 살리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법망(法網)을 벗어나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그 무리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제도(諸道)에 교문(敎文)을 반포하여 제적(諸賊)들의 친척과 인우(姻友)들을 위안해 주셨고, 영남(嶺南) 사람들에 대하여는 해유(解由)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관직을 제수하도록 분부하시게 되었으니, 영남 사람들은 어찌 모두 반역을 했었기에 이러한 비상한 처분을 내림으로써 감동하여 기뻐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대저 처벌이 그 죄에 합당하게 되면 죽게 되는 자도 또한 원망하지 않는 법이고, 은덕이 합당한 은덕이 아니게 되면 받는 자가 도리어 의혹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자신의 일을 변명하는 것을 혐오(嫌惡)하여 끝까지 추궁하지 않으려고 하시고, 또 반측자(反側者)들의 마음을 안정(安定)시켜 은혜에 감복하며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하시니, 성상께서 마음에 생각하고 계시는 바는 어찌 애연(藹然)하게 인후(仁厚)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저 효경(梟獍)779) 과 같은 성질은 마침내 감복시킬 수 없고, 도리어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은 외축(畏縮)에서 나온 약점(弱點)을 드러낸 것으로 여기게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습을 숨기며 베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치 서리맞은 풀과 같이 시들하던 사람들이 현저한 호건(豪健)하게 자득(自得)한 모양이 있어 비록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의욕(意慾)에 찬 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문에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와전(訛傳)되는 말이 파다하므로 민생들이 모두 보따리를 꾸리고 있어 마치 장차 파탕(波蕩)이 일게 될 듯한 사세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계시니, 또한 어떻게 물정(物情)이 이에 이른 것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서리 뒤에는 얼음이 얼게 되는 것과 같은 조짐이 유래(由來)해온 지 오래입니다. 갑진년의 대상(大喪) 이래로 위란(危亂)을 의구(疑懼)하는 조짐과 속이어 현혹(眩惑)하는 사단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는데, 마침내는 칭병(稱兵)하여 난을 일으키매 나라의 절반이 따라서 배반하게 되었었습니다. 그 뿌리가 굳어지고 깊어져 뻗어 나가는 것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진실로 고식적(姑息的)인 인자(仁慈)로는 복종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대저 전하의 한 몸은 곧 종사(宗社)의 주인이시기에 성상의 몸이 무함을 받는 것은 곧 종사가 무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 자신은 비록 가볍게 여기실지라도 종사가 무함받는 것을 돌보지 않으면서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핑계해버리고서 분명하게 변파(辨破)해 갈 바를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옛적의 우리 인묘 성조(仁廟聖祖)께서 훌륭한 공렬과 큰 업적이 마치 청천 백일(晴天百日)과 같으셨는데도 그 때의 흉악한 반역의 무리가 오히려 또 중국에 말을 전파하여 야사(野史)에 기록하게 되었기에, 전하께서 선조(先朝)를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일을 여러 해가 되도록 더욱 부지런히 하셨었습니다. 하물며 이들 심유현의 무리가 으슥한 자리에서 임금에게 후욕을 가하였고 터무니 없는 속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어 대중의 귀를 현란(眩亂)시키고 온 나라 안을 요란하게 했으니, 후세를 위한 염려가 더욱 어떠하기에 오히려 그대로 태연히 있어 변무(辨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선조(先朝)에 대한 무함에 있어서는 변무하고도 당저(當宁)에 대한 무함은 놓아 두며, 딴 나라에 있어서의 변무는 그들에게 달린 것인데도 기청(祈請)했으면서, 본국(本國)에 있어서의 변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도 범연하게 소홀히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의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노(怒)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니,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분부하셨는데, 대저 ‘노하게 됨이 상대의 소위에 달린 것이지,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은 곧 정자(程子)가 한 말로서, 대순(大舜)이 사흉(四凶)780) 을 베인 것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지의(旨義)를 추구(推究)해 보건대, 오늘날의 일과는 딱 들어맞지 않는 듯싶습니다. 하물며 또 정자의 말이 ‘요(堯)가 필부(匹夫)들 속에서 순(舜)을 찾아내어 제위(帝位)를 선양(禪讓)했을 적에 그 사흉들이 분노(憤怒)하고 불평하여 악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순이 그들의 행적에 따라 베거나 귀양 보낸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흉들의 죄가 어찌 순 자신에 상관이 없는 것이겠습니까마는, 순이 혐피(嫌避)하지 않고 베이게 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자기 자신이야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느냐?’ 란 것입니다. 천명(天命)을 받들고서 천토(天討)를 거행한 것이고, 그 사이에 있어서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남들이 자신의 소위를 사심(私心)을 쓰는 것이라고 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천리(天理)의 당연함을 따르지 않는다면 곧 이것이 사사 뜻인 것이니, 대순(大舜)이 어찌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전하께서 하신 전후의 처분은 이미 여러 차례 기의(機宜)를 잃어버려 흉도(凶徒)들을 섭복(懾服)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뒷처리를 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삼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조(東朝) 두 전하(殿下)께서 만일에 성상의 몸이 이처럼 무함받게 되고 국가의 사세가 이처럼 우려스럽게 되어 있음을 듣게 되신다면 반드시 마음에 놀라고 뼈가 아파하시며 두려운 생각이 절박해질 것입니다. 갑진년 대상(大喪) 때의 증세(症勢)의 시말(始末)을 빠짐없이 들어 명백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흉악한 말들을 부수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게 하며 국가의 명맥(命脈)이 연장되게 하셔야 할 것인데, 아래에서 진품(陳稟)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떻게 외간(外間)의 사세를 내려다보실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백 가지로 애가 타기에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 보다가, 지난해에는 지금의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두 동조(東朝)께 호소하여 하교(下敎)를 받아내어 팔방(八方)에 반포하기를 권했더니, ‘나의 뜻도 바로 그와 같다.’고 답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홍치중이 사람들의 논박을 만나 도성(都城)에서 나가게 되었었다가 다시 도성으로 들어옴에 미쳐 신이 또 서찰을 보내어 권면하자, 홍치중의 답이 또한 지난해와 같았었는데도 지금 여러 달이 되도록 또한 오히려 적연(寂然)하니, 신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 한 가지 일이 또한 점점 시기가 늦어지게 되니, 신이 진실로 통탄하고 절박하게 여깁니다. 대저 선왕(先王)의 병세가 약원(藥院)의 일기(日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마다 모두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거의 변무(辨誣)하는 한 가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두 동조의 고유(誥諭)를 받아내어 분명하게 중외(中外)에 게시(揭示)하게 된다면, 성상의 덕을 밝은 일월(日月)처럼 높이게 되고 국가 형세를 반석(盤石)처럼 굳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이 과연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성상에 대한 무함을 가리기 전에는 자신이 천지 사이에 설 수 없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분명하게 말을 하고 극력 논하여 우리 임금께서 받은 모함을 변명(辨明)하는 자가 있었음을 들어볼 수가 없고 단지 머뭇거리며 그대로 함묵(緘默)하고 있을 뿐이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 뜻이 마치 위로 성상께서 차마 듣지 못하시게 되는 뜻을 체념(體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실지는 우선만 편하기 위한 친애(親愛)입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역적들의 변란이 겨우 진정된 다음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포고(布告)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마땅히 흉악한 말들의 연유한 바를 깊이 구명(究明)하여 명백하게 말을 다하여 중외(中外)의 사람들 마음이 향배(向背)의 기미(機微)에 있어서 미혹(迷惑)되지 않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호하게 말을 하여 핵심(核心)을 깨뜨리지 못했으니, 자못 국가를 위하는 지극한 성의와 측은한 뜻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간사한 싹을 끊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시급히 묘당(廟堂)에 명하여 주밀하게 생각하고 난숙하게 강구(講究)하여 분명하게 팔로(八路)에 포유(布諭)하도록 하시되, 무릇 신이 진달한 이외에도 성상에 대한 무함을 변명하게 되는 것이나 사람의 이륜(彛倫)을 붙들게 되는 것에 있어서는 눈을 밝히고 용기를 내어 지극한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군신(君臣) 사이의 큰 예방(禮防)이 보존되도록 하게 하시고,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도모해 가시되 깊이 지난날의 난(亂)을 불러들이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보시고서 통렬하게 하나의 혐자(嫌字)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무릇 갖가지의 처분에 있어 엄명(嚴明)하고 광대(光大)하게 하여 환히 남아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게 하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히 기뻐하며 복종하게 되고, 화근(禍根)들이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진실로 국가가 만세토록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신의 말이 유망(謬妄)하고 미착(迷錯)한 것이어서 채택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시급히 망령된 말을 한 죄를 가하여 온 세상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오직 바라는 것은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원근(遠近)에 반시(頒示)한다면, 도성(都城) 안의 사민(士民)들도 또한 거의 역신(逆臣)과 순신(順臣)의 분변에 있어서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내일 복주(伏誅)하게 되더라도 뒷날에 있어서 또한 달갑게 여기겠고 다시 남은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감히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뜻을 품었으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왕법(王法)에 걸리는 짓을 한 것인데, 나 자신에 있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물며 제적(諸賊)들은 모두 다 복주(伏誅)하게 되었다. 이미 지난해의 난역(亂逆)을 겪고난 뒤인데 조금이라도 병이(秉彛)781) 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알게 되지 못하겠는가? 지나간 해에는 경(卿)의 마음에 혹 지난해를 염려하게 되기는 했지마는, 지금에 있어서 그런 염려는 곧 병통이 아니겠는가? 이런 데에 있어서 마음에 항시 경을 개탄하고 있다. 인용한 말이 미안스러운 것이고 생각이 주편(周遍)하지 못한 것이기에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경은 지난날과 같은 마음을 조금 덜어버리고 통쾌하게 서로 공경하고 합심할 생각을 하라."
하였다.
- [註 77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775] 갑진년 : 1724 경종 승하년.
- [註 776] 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77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778] 척완(戚畹) : 임금의 외척(外戚).
- [註 779] 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 [註 780] 사흉(四凶) : 요(堯)임금 때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곧 공공(共工)·환두(驩兜)·삼묘(三苗)·곤(鯀)임.
- [註 781] 병이(秉彛) : 상도(常道)를 굳게 지킴.
원문
○判府事閔鎭遠上疏曰:
嗚呼! 一自昨年變亂以後, 爲 殿下臣子者, 莫急於辨聖誣一事, 而至今未有聞焉, 置凶言於不論之中, 歸聖德於晻昧之地, 可謂痛哭流涕之不足也。 乙巳春, 臣在鄕, 聞有天海之變, 及臣造朝, 或云: "天海, 以狂易之人, 當街亂嚷, 語無倫脊。" 或云: "天海雖詐爲狂易之狀, 其凶謀逆節, 至爲叵測。" 臣未見鞫案, 不勝疑惑, 敢於筵席, 請問獄情, 則殿下敎以凶言, 何可掛齒, 置之不復道可也。 聖敎如此, 臣不敢更提, 其後臣待罪藥院, 偶閱甲辰年日記, 則先王自其年七月十七日, 有頭疼之候, 寢膳俱減, 寒熱煩惱, 漸就沈重, 至八月二十日, 又有膈間煩悶之症, 二十〔一〕 日以後, 水泄不止, 二十三日、四日, 連進蔘茶, 終至大漸。 其間夜中, 急招醫官, 問以當用何藥者, 至於數次矣。" 嗚呼, 痛哉! 天降大割, 疾疢爲祟, 沈淹四旬, 永結臣民之至痛, 則天海之凶言, 果何所憑藉, 而其時中外, 絶未聞症候之若此者, 亦何故也? 臣於此, 不勝痛泣憤惋, 直欲無生也。 及至丁未, 臣等被罪屛退之後, 又聞京外連有掛書之變, 而戊申春賊兵果起, 自稱義擧。 始知天海之凶言、京外之掛書, 首尾排布, 脈胳相連, 凶謀之醞釀, 非一朝一夕之故矣。 及聞鞫囚諸招, 皆以言根, 歸之維賢。 蓋維賢戚連宮掖, 異於踈遠之臣, 其言必將見信於四方之聽聞, 故諸賊之必敎誘維賢, 做出凶言者此也。 噫嘻! 痛矣曾在乙巳, 彼中弔使之來也, 使譯官, 送言於臣曰: "主上顔色之慼, 哭泣之哀, 有不忍瞻望, 此東國之福, 不勝感悅, 謹致賀語於大臣。" 云。 夫殿下孝友之至行, 雖異俗之人, 尙知敬服而嗟歎之。 彼維賢, 亦一殿下臣子, 亦具人形, 豈不知殿下之盛德至善, 而乃忍與逆賊夢、顯等, 同心和應, 做出如此凶言耶? 亂臣賊子, 何代無之, 豈有如此賊之窮凶極惡者乎? 臣實欲手自臠食而不可得也。 臣於甲辰秋, 謫居星州, 全未聞聖候之違豫, 邑吏忽報陟遐之音, 驚痛罔措。 馳入州城, 而未知緣何症候, 致此大戚, 只自攀號痛隕而已。 臣猶如此, 彼鄕曲之下士編戶, 何從而聞之? 其心固已驚惑, 而以驚惑之人心, 聞凶言之出於戚畹, 則其勢固不得不信從。 況指建儲爲廢立, 謂參決以簒奪, 其源委有自者乎? 彼諸道愚氓之望風附賊者, 亦無足怪矣。 及聞賊兵已散, 鞫囚方張, 意謂夢、顯輩, 慫慂維賢、維賢做出凶言之情節, 庶可畢露矣。 流聞殿下, 於鞫囚之際, 諸賊向聖躬, 直發凶悖之說, 則殿下不忍聞, 而或至於垂淚。 凶言做出之根柢則初不窮覈, 如維賢者, 亦且無端徑斃。 雖尋常誣人者, 必覈其造言情節, 得其承款, 書出結案, 人得以見之, 今事關聖躬, 罔測之誣, 而終年訊鞫, 曷嘗有一紙取招, 明白如此者乎? 治獄之際, 大抵務主寬緩, 所誅率多枝葉, 爛漫從賊者, 多傅生議, 漏網自在者, 寔繁其徒。 而殿下又嘗頒敎諸道, 慰安諸賊之親戚姻友, 至有嶺南人不拘解由除職之敎, 嶺人豈盡爲逆, 而有此非常之處分, 欲以感悅之? 夫罪當厥罪, 則死者亦不怨, 恩非其恩, 則受之者反惑矣。 竊覵殿下, 以辨明自己事爲嫌, 而不欲窮竟, 且以反側子自安爲心, 而欲其感恩革心, 聖意所存, 豈不藹然仁厚? 而惟彼梟獍之性, 終難感服, 反意殿下所以如此者, 出於畏縮而示弱。 始之匿影懼誅, 薾然若負霜之草者, 顯有豪健自得之狀, 口雖不敢言, 而其意象則可見矣。 以此人心靡定, 訛言朋興, 民皆荷擔, 若將有波蕩之勢。 仰惟殿下, 深居九重, 亦何以盡燭物情之至此哉? 噫! 氷霜之漸, 所由來久矣。 自甲辰大喪以來, 危疑之兆, 誑惑之端, 不一而足, 卒之稱兵作亂, 半國從叛。 其蒂固根深, 滋蔓難圖, 固非姑息之仁所可服也。 夫殿下一身, 宗社之主也, 聖躬受誣, 卽宗社受誣也。 殿下縱自輕, 其可不恤宗社之受誣, 諉以自己事, 而不思所以昭晣辨破也? 昔我仁廟聖祖, 盛烈大業, 有若靑天白日, 而其時凶逆之輩, 猶且飛語上國, 登之野史, 殿下爲先辨誣之擧, 歷累歲而彌勤。 況此維賢輩, 詬天於幽隱之地, 吠日於虛無之中, 惑亂衆聽, 震撓國中, 則其爲後世之慮, 尤當如何, 而尙可因恬而不之辨乎? 夫誣及先朝, 則辨之, 誣及當宁, 則置之, 在異國則辨之, 在彼而祈請之, 在本國則辨之, 在我而泛忽焉, 古今天下, 安有如此義理耶? 殿下, 又以可怒在彼, 己何與焉爲敎, 夫可怒在彼, 己何與焉, 卽程子之言, 而指大舜之誅四凶也。 究其旨義, 恐不襯合於今日事。 而況程子又曰: "堯擧舜於匹夫之中, 而禪之位, 四人者, 憤怒不平, 而顯其惡, 故舜因其迹而誅竄之也。 以此觀之, 四凶之罪, 豈不關涉於舜之自己, 而舜不以爲嫌而誅之, 所謂己何與焉者。 奉天命行天討, 而無一毫私意於其間也。 大凡恐人之謂我爲私, 而不敢循天理之當然, 則這便是私也, 大舜豈爲是哉? 雖然, 殿下前後處分, 旣已屢失機宜, 不能讋服凶徒, 則誠難以善其後矣。 竊伏念惟我東朝兩殿下, 若聞聖躬之受誣若此, 國勢之可虞若此, 則必當驚心痛骨, 憂遑迫切。 盡將甲辰大喪時症候本末, 明白下敎, 打破凶言, 以定人心, 以延國脈, 而下無陳稟之擧, 則其何以俯燭外間事勢乎? 臣焦憂百端, 反復深念, 昨年移書於今領相臣洪致中, 勸令率百官庭籲於兩東朝, 得下敎頒布八方, 則答以吾意正如此矣。 未幾致中遭人言而出城, 及至復入也, 臣又移書以勖之, 則致中之答, 亦如昨年, 今至屢朔, 尙且寂然, 臣未知其故, 而此一着, 亦漸後時, 臣實爲之痛迫也。 夫先王症候, 詳載藥院之日記矣, 使人人皆得以聞之, 則庶爲辨誣之一資, 而又得兩東朝之誥諭, 昭揭中外, 則可以尊聖德於日月之明, 鞏國勢於磐石之固。 今日之急務, 果有加於此者乎? 今之士大夫, 豈不知聖誣未辨之前, 不可自立於天地之間, 而訖未聞有一人明言極論, 以明吾君之受誣, 而只逡巡循默而已者, 何也? 其意似若仰體聖上不忍聞之意, 而實則姑息之愛也。 殿下亦嘗於逆亂甫定之後, 命詞臣作文播告, 則是宜深究凶言之所由起, 明白說盡, 使中外人心, 不迷於向背之幾。 而含糊爲說, 未能劈破頭腦, 殊無爲國家至誠惻怛之意。 若是而可能折奸萌而服人心乎? 臣實痛之。 伏乞聖明, 亟命廟堂, 使之周思熟講, 明白布諭于八路, 凡臣所陳者外, 有可以辨聖誣扶民彝者, 明目張膽, 靡不用極, 以存君臣之大防, 殿下亦宜自謀, 深惟前日召亂之由, 痛將一箇嫌字, 和根拔去, 凡百處分, 嚴明光大, 洞然無査滓凝滯者, 則人心自然悅服, 禍根自然消絶, 實國家萬世之幸也。 如以臣言爲謬妄迷錯, 不足採施, 則亟加妄言之罪, 以警一世。 而猶望將臣此疏, 頒示遠邇, 則城中士民, 亦庶幾不眩於逆順之辨。 臣雖明日伏誅, 於後亦且甘樂之, 無復餘憾矣。
批曰: "噫! 失志怨國之徒, 敢生誣上不道之意, 此渠輩自速王章者, 於我何有? 況諸賊, 俱皆伏誅。 旣經昨年亂逆之後, 少有秉彝之心者, 其誰不知? 往歲卿心, 或慮昨年, 於今則其慮無乃病痛乎? 此等處, 心常慨歎於卿者也。 引諭之未安, 其思之未周, 予不多言矣。 惟卿, 小損往日之心, 快思協恭之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