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3권, 영조 3년 9월 25일 무인 1/10 기사 /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승문원 정자 윤득징 등이 《실록》을 보궐하려는 무리의 사심을 아뢰니 이들을 정배시키다
국역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윤득징(尹得徵)·김약로(金若魯)·이성해(李聖海)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사국(史局)의 제신(諸臣)들이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실록(實錄)》을 보궐(補闕)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거조란 말입니까? 일찍이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다 하면서 당화(黨禍)의 여독(餘毒)이 선조(先朝)703) 의 《실록》에까지 미치게 된단 말입니까? 우리 《숙종실록》은 이미 편마(編藦)가 끝나서 50년 동안의 훌륭한 공과 아름다운 업적이 70여 편(編) 가운데 환히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그 장부(臧否)·여탈(與奪)의 조심한 것과 상략(詳略)·취사(取捨)의 살핌에 있어 각기 권도(權度)가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제 이에 편사(偏私)한 마음으로써 감히 이를 변란(變亂)시킬 계책을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무함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말로 강청(强請)하면서 사체(事體)의 엄중함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만 통쾌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사책(史冊)에 필삭(筆削)을 가하는 것은 그 법이 진실로 엄중한데다가 당대(當代)의 《실록(實錄)》은 기휘(忌諱)하는 말이 많은 법이므로, 문자(文字)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비록 심상한 자구(字句)라도 감히 용이하게 증산(增刪)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령되게 사어(史語)를 전하면서 시비(是非)를 평론하는 자에 대해서는 나라의 상형(常刑)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사적인 호오(好惡) 때문에 멋대로 추의(追議)하여 일에 따라 첨보(添補)하고 편차에 따라 증부(增附)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인용한 선조(先朝)의 구례(舊例)라는 것은 더욱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찬수(纂修)를 맡은 사람이 임무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세월을 보내기만 일삼은 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후세에 전할 전례(典禮)를 거개 재록(載錄)하지 않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연월(年月)과 인명(人名)까지 착오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가지 일 가운데도 전말(顚末)이 빠지거나 끊긴 것이 자주 있었습니다. 특별히 찬술할 것을 품지(稟旨)한 것은 진실로 이에서 나온 조처였던 것이요 좌우(左右)나 피차(彼此)의 말 때문에 감히 논의를 제기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피차(彼此)를 분별하여 상략(詳略)을 헤아렸고 은졸(隱卒)의 기록을 점출(拈出)해 내어 척언(斥言)한 것이 공평하지 못했으며, 아무 해의 기록을 지적하여 진달하였고 아무 양상의 일을 제기하여 말했는데, 이는 다만 사당(私黨)을 위하여 완사(完史)의 개찬을 청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경신년704) 의 전례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더구나 그들이 상략(詳略)이 같지 않다고 하는 말은 또한 절대로 허망한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전후에 찬수(纂修)를 관장했던 사람들이 장주(章奏)의 문자에 대해 언사(言辭)의 선악(善惡)과 사실(事實)의 시비(是非)를 막론하고 모두 아울러 기재하여 후세(後世)의 평론을 기다린다고 했고 사초(史草)가 모두 보관되어 있어 검핵(檢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람(睿覽)을 거치지 않는 서책이기 때문에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마음대로 날조하여 찬술하려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신 등이 지난달 사진(仕進)했을 때 모두 계산해 보니, 사초(史草) 가운데 아직 인출(印出)되지 못한 것은 단지 3백여 판(板)뿐이었는데, 하루에 인출되는 것이 으레 21판(板)이니, 이는 불과 열흘이나 보름 동안이면 충분히 완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한 달이 되도록 아직껏 미루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도청(都廳)의 낭관(郞官)이 몰래 인판(印板)을 집어내어 은밀히 보관하여 두었다는 말이 이수해(李壽海)의 공초(供招)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금당(禁堂)705) 으로 있는 자가 물리치고 까닭없이 봉입(捧入)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다만 그 말이 혹시라도 성총(聖聰)에 알려질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어제 또 교수(校讎)706) 하는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갑자기 청대(請對)를 요구하였고 총재(摠裁) 이하의 관원이 뒤따라 함께 나와 앞뒤에서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면서 거조가 매우 바쁜 것으로 보아 그 속셈은 사심(私心)을 이루려는 데 있으나 겉으로는 보궐(補闕)이라 핑계하면서 기필코 완성된 역사를 괴란(壞亂)시킨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통분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고 그 전대로 속히 완간(完刊)하도록 명하시어 사사(史事)를 엄중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전교를 내려 모두 섬에다 정배(定配)시킬 것을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6면
- [註 703] 선조(先朝) : 숙종(肅宗).
- [註 704]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705] 금당(禁堂) :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
- [註 706] 교수(校讎) : 교정(校正).
원문
日昨因史局諸臣筵請, 有實錄補闕之命。 噫嘻! 此何擧也? 曾謂聖明在上, 而黨禍餘毒, 至及於先朝實錄耶? 惟我《肅廟實錄》, 編摩已訖, 五十年嵬功懿蹟, 昭布森列於七十餘編之中。 其臧否與奪之謹, 詳略取舍之審, 莫不各有權度, 而今乃以偏私之心, 敢生變亂之計, 恣意欺誣, 游辭强請, 不顧事體之嚴重, 務快自己之意, 寧不痛哉? 於乎! 史冊筆削, 其法固重, 而當代實錄, 語多忌諱, 文字旣成之後, 雖尋常字句, 不敢容易增刪, 而妄傳史語, 評論是非者, 邦有常刑, 何嘗有以一二人私好惡, 肆然追議, 隨事添補, 逐編增附, 如今日之爲者哉? 其所引先朝舊例, 尤有大不然者。 蓋其時則纂修之人, 受任累年, 專事玩愒, 軍國重事及典禮傳後者, 率不載錄, 甚至年月人名之錯誤, 一事首末之闕斷者, 比比有之。 稟旨別纂, 亶出於此。 未嘗以左右彼此之說, 敢有提論, 而今其爲說者, 分別彼此, 較量詳略, 拈出書卒, 斥言不公, 指陳某年之紀, 提說某樣之事, 只爲私黨, 請改完史, 此豈庚申之例乎? 放肆無嚴, 莫此之甚。 況其詳略不同之說, 亦有所萬萬虛罔者。 臣等聞前後掌纂修者, 凡於章奏文字, 毋論言之善惡, 事之是非, 一倂該載, 以竢後世。 史草具在, 皆可覈驗, 而此非可經睿覽之書, 故謂天可欺, 惟意捏撰, 乃至於此, 誠可駭也。 臣等於前月仕進之時, 摠計史草之未及印者, 只是三百餘板, 而一日所印, 例爲二十一板, 則此不過費了旬望, 足可完訖, 而今至一朔, 尙此延拖, 其心所在, 已不可測。 且日昨都廳之郞, 暗拈印板, 潛自藏置之說, 至發於李壽海之供, 而爲禁堂者, 旣見還却, 無端不捧, 惟恐其言之或徹於聖聰。 今又校讎一堂上, 卒然求對, 摠裁以下, 隨而竝進, 後先和應, 擧措忙急, 意在濟私, 外托補闕, 必欲壞亂成史而後已。 思之至此, 不覺痛泣。 伏願收還成命, 亟令仍前速完, 以嚴史事。
疏入, 上下嚴敎, 竝命島配。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6면
영조 3년 (1727) 9월 25일
- 승문원 정자 윤득징 등이 《실록》을 보궐하려는 무리의 사심을 아뢰니 이들을 정배시키다
- 역적을 토죄하자던 대신이 지금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개성부 유수 조영복의 상소
- 권익관을 함경 감사로 삼다
- 이태좌가 호남의 흉년에 대해 진달하고 조태억이 박문수를 어사로 천거하니 허락하다
- 조태억의 청으로 선혜청 당상 오명항을 출사하게 하다
- 조태억이 형조 판서에 서명균·이명언 등을 천거하니 조정에서 의망하게 하다
- 50세에 등과한 사람은 분관을 기다리지 않고 출륙하는 것을 정지하다
- 등과한 자는 분관되기 전에는 청직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다
- 우후를 갑산에 머물러 지키게 하는 법을 혁파하도록 명하다
- 사간원에서 임징하의 처형·이의천의 절도 안치 등을 청하다
영조실록13권, 영조 3년 9월 25일 무인 1/10 기사 /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승문원 정자 윤득징 등이 《실록》을 보궐하려는 무리의 사심을 아뢰니 이들을 정배시키다
국역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윤득징(尹得徵)·김약로(金若魯)·이성해(李聖海)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사국(史局)의 제신(諸臣)들이 연석(筵席)에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실록(實錄)》을 보궐(補闕)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거조란 말입니까? 일찍이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다 하면서 당화(黨禍)의 여독(餘毒)이 선조(先朝)703) 의 《실록》에까지 미치게 된단 말입니까? 우리 《숙종실록》은 이미 편마(編藦)가 끝나서 50년 동안의 훌륭한 공과 아름다운 업적이 70여 편(編) 가운데 환히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그 장부(臧否)·여탈(與奪)의 조심한 것과 상략(詳略)·취사(取捨)의 살핌에 있어 각기 권도(權度)가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제 이에 편사(偏私)한 마음으로써 감히 이를 변란(變亂)시킬 계책을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무함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말로 강청(强請)하면서 사체(事體)의 엄중함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만 통쾌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사책(史冊)에 필삭(筆削)을 가하는 것은 그 법이 진실로 엄중한데다가 당대(當代)의 《실록(實錄)》은 기휘(忌諱)하는 말이 많은 법이므로, 문자(文字)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비록 심상한 자구(字句)라도 감히 용이하게 증산(增刪)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령되게 사어(史語)를 전하면서 시비(是非)를 평론하는 자에 대해서는 나라의 상형(常刑)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사적인 호오(好惡) 때문에 멋대로 추의(追議)하여 일에 따라 첨보(添補)하고 편차에 따라 증부(增附)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인용한 선조(先朝)의 구례(舊例)라는 것은 더욱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찬수(纂修)를 맡은 사람이 임무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세월을 보내기만 일삼은 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후세에 전할 전례(典禮)를 거개 재록(載錄)하지 않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연월(年月)과 인명(人名)까지 착오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가지 일 가운데도 전말(顚末)이 빠지거나 끊긴 것이 자주 있었습니다. 특별히 찬술할 것을 품지(稟旨)한 것은 진실로 이에서 나온 조처였던 것이요 좌우(左右)나 피차(彼此)의 말 때문에 감히 논의를 제기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피차(彼此)를 분별하여 상략(詳略)을 헤아렸고 은졸(隱卒)의 기록을 점출(拈出)해 내어 척언(斥言)한 것이 공평하지 못했으며, 아무 해의 기록을 지적하여 진달하였고 아무 양상의 일을 제기하여 말했는데, 이는 다만 사당(私黨)을 위하여 완사(完史)의 개찬을 청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경신년704) 의 전례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더구나 그들이 상략(詳略)이 같지 않다고 하는 말은 또한 절대로 허망한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전후에 찬수(纂修)를 관장했던 사람들이 장주(章奏)의 문자에 대해 언사(言辭)의 선악(善惡)과 사실(事實)의 시비(是非)를 막론하고 모두 아울러 기재하여 후세(後世)의 평론을 기다린다고 했고 사초(史草)가 모두 보관되어 있어 검핵(檢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람(睿覽)을 거치지 않는 서책이기 때문에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마음대로 날조하여 찬술하려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신 등이 지난달 사진(仕進)했을 때 모두 계산해 보니, 사초(史草) 가운데 아직 인출(印出)되지 못한 것은 단지 3백여 판(板)뿐이었는데, 하루에 인출되는 것이 으레 21판(板)이니, 이는 불과 열흘이나 보름 동안이면 충분히 완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한 달이 되도록 아직껏 미루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도청(都廳)의 낭관(郞官)이 몰래 인판(印板)을 집어내어 은밀히 보관하여 두었다는 말이 이수해(李壽海)의 공초(供招)에서 발론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금당(禁堂)705) 으로 있는 자가 물리치고 까닭없이 봉입(捧入)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다만 그 말이 혹시라도 성총(聖聰)에 알려질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어제 또 교수(校讎)706) 하는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갑자기 청대(請對)를 요구하였고 총재(摠裁) 이하의 관원이 뒤따라 함께 나와 앞뒤에서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면서 거조가 매우 바쁜 것으로 보아 그 속셈은 사심(私心)을 이루려는 데 있으나 겉으로는 보궐(補闕)이라 핑계하면서 기필코 완성된 역사를 괴란(壞亂)시킨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통분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하시고 그 전대로 속히 완간(完刊)하도록 명하시어 사사(史事)를 엄중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전교를 내려 모두 섬에다 정배(定配)시킬 것을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6면
- [註 703] 선조(先朝) : 숙종(肅宗).
- [註 704]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705] 금당(禁堂) :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
- [註 706] 교수(校讎) : 교정(校正).
원문
日昨因史局諸臣筵請, 有實錄補闕之命。 噫嘻! 此何擧也? 曾謂聖明在上, 而黨禍餘毒, 至及於先朝實錄耶? 惟我《肅廟實錄》, 編摩已訖, 五十年嵬功懿蹟, 昭布森列於七十餘編之中。 其臧否與奪之謹, 詳略取舍之審, 莫不各有權度, 而今乃以偏私之心, 敢生變亂之計, 恣意欺誣, 游辭强請, 不顧事體之嚴重, 務快自己之意, 寧不痛哉? 於乎! 史冊筆削, 其法固重, 而當代實錄, 語多忌諱, 文字旣成之後, 雖尋常字句, 不敢容易增刪, 而妄傳史語, 評論是非者, 邦有常刑, 何嘗有以一二人私好惡, 肆然追議, 隨事添補, 逐編增附, 如今日之爲者哉? 其所引先朝舊例, 尤有大不然者。 蓋其時則纂修之人, 受任累年, 專事玩愒, 軍國重事及典禮傳後者, 率不載錄, 甚至年月人名之錯誤, 一事首末之闕斷者, 比比有之。 稟旨別纂, 亶出於此。 未嘗以左右彼此之說, 敢有提論, 而今其爲說者, 分別彼此, 較量詳略, 拈出書卒, 斥言不公, 指陳某年之紀, 提說某樣之事, 只爲私黨, 請改完史, 此豈庚申之例乎? 放肆無嚴, 莫此之甚。 況其詳略不同之說, 亦有所萬萬虛罔者。 臣等聞前後掌纂修者, 凡於章奏文字, 毋論言之善惡, 事之是非, 一倂該載, 以竢後世。 史草具在, 皆可覈驗, 而此非可經睿覽之書, 故謂天可欺, 惟意捏撰, 乃至於此, 誠可駭也。 臣等於前月仕進之時, 摠計史草之未及印者, 只是三百餘板, 而一日所印, 例爲二十一板, 則此不過費了旬望, 足可完訖, 而今至一朔, 尙此延拖, 其心所在, 已不可測。 且日昨都廳之郞, 暗拈印板, 潛自藏置之說, 至發於李壽海之供, 而爲禁堂者, 旣見還却, 無端不捧, 惟恐其言之或徹於聖聰。 今又校讎一堂上, 卒然求對, 摠裁以下, 隨而竝進, 後先和應, 擧措忙急, 意在濟私, 外托補闕, 必欲壞亂成史而後已。 思之至此, 不覺痛泣。 伏願收還成命, 亟令仍前速完, 以嚴史事。
疏入, 上下嚴敎, 竝命島配。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6면
원본
영조 3년 (1727) 9월 25일
- 승문원 정자 윤득징 등이 《실록》을 보궐하려는 무리의 사심을 아뢰니 이들을 정배시키다
- 역적을 토죄하자던 대신이 지금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개성부 유수 조영복의 상소
- 권익관을 함경 감사로 삼다
- 이태좌가 호남의 흉년에 대해 진달하고 조태억이 박문수를 어사로 천거하니 허락하다
- 조태억의 청으로 선혜청 당상 오명항을 출사하게 하다
- 조태억이 형조 판서에 서명균·이명언 등을 천거하니 조정에서 의망하게 하다
- 50세에 등과한 사람은 분관을 기다리지 않고 출륙하는 것을 정지하다
- 등과한 자는 분관되기 전에는 청직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다
- 우후를 갑산에 머물러 지키게 하는 법을 혁파하도록 명하다
- 사간원에서 임징하의 처형·이의천의 절도 안치 등을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