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2월 3일 갑인 1/1 기사 /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원임 부제학 김운택의 옥중 졸기
국역
원임 부제학 김운택(金雲澤)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김운택의 자(字)는 중행(仲行)인데,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젊어서 고제(高弟)로 급제했는데, 임금이 시권(試券)을 뜯어보고는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흘렀었다. 아우는 김민택(金民澤)인데, 자(字)가 치중(致仲)이다. 또한 고제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김운택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문예(文藝)를 좋아했다. 김민택은 사람됨이 침심(沈深)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용모가 풍만하고 미목(眉目)이 훤해서 바라보면 엄숙하였다. 그의 아망(雅望)은 김운택만 못하였지만 마음속의 기변(機變)은 더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공보(公輔)248) 의 기국이라고 여겼었다. 경종(景宗)이 병이 있어 저사(儲嗣)가 없고 환관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김운택은 사직(社稷)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알고 이에 김민택과 함께 이정소(李廷熽)에게 소장을 올려 저사를 세우기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공경(公卿)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경(卿)들을 인솔하고 들어와 경종을 뵙고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밤 시각(時刻)이 끝나게 되자 경종이 대전(大殿)에 나와서 대비가 내린 휘지(徽旨)를 내어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았으니, 이는 본디 김운택 형제의 계모에 의한 것이었다. 김운택은 처음 영변부(寧邊府)에 찬배(竄配)되고, 김민택은 선천부(宣川府)에 찬배되었는데, 목호룡(睦虎龍)이 무옥(誣獄)을 크게 일으키자, 김운택이 체포되었다. 최석항(崔錫恒)이 국문(鞫問)하는 일을 위임 받았는데,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일에 대해 신문하니 김운택이 정색하고 최석항을 책망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이 일을 묻는 것은 다만 무함이 선왕에게 미칠 뿐만이 아니다. 천하 후세에서 성상을 어떻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최석항이 기운이 꺾여서 이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김운택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선왕에게 관계되어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도성(都城)을 나갔다. 다시 소장을 올려 극력 영구(營救)하였지만 끝내 구제하지 못하였다. 김운택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50세였다. 그리고 장령 윤회(尹會)가 김민택이 실상 거괴(巨魁)라고 논했기 때문에 드디어 체포되어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고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45세였다. 김민택이 죽음에 임하여 옷소매를 찢어 절명서(絶命書)를 지어 아우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나야 죽은들 무슨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영변(寧邊)의 길이 멀어서 나의 혼백(魂魄)이 꿈에서나마 중씨(仲氏)를 만나고 싶었지만 또한 갈 수가 없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하교(下敎)하기를,
"적신(賊臣)이 천총(天聰)을 속여 가리고 나라의 군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러 선인(善人)과 양사(良士)들을 매우 많이 죽였으니, 그 봉인(鋒刃)의 참독함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들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운택이 비로소 복관되어 이조 판서겸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김민택도 복관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89면
- [註 248] 공보(公輔) : 정승(政丞).
원문
○甲寅/原任副提學金雲澤死於獄中。 雲澤字仲行, 文忠公 萬基孫也。 少登高第, 上拆券, 喜動天顔。 有弟曰民澤, 字致仲, 亦登高第, 入弘文館, 爲修撰。 雲澤爲人端詳, 好文藝。 民澤爲人沈深, 有大志, 容貌豐偉, 踈眉目, 望之凝然。 其雅望, 不及雲澤, 而內心機變過之, 人以爲公輔之器也。 景宗有疾無儲嗣, 宦官用事, 雲澤知社稷必亡, 乃與民澤, 觀李廷熽, 上疏請建儲嗣, 景宗納之, 下公卿議。 忠獻公 金昌集、忠愍公 李健命、忠翼公 趙泰采, 率列卿入見景宗, 請白大妃, 建儲嗣, 夜漏罷, 景宗臨殿, 出大妃所下徽旨冊, 英宗爲王世弟, 本雲澤兄弟之謀也。 雲澤初竄寧邊府, 而民澤竄宣川府。 睦虎龍大起誣獄, 雲澤被逮。 崔錫恒承委鞫事, 問李頤命獨對事, 雲澤正色責錫恒曰: "人臣敢問此事, 不但誣及於先王。 天下後世, 以聖上爲何如也?" 錫恒氣沮, 乃上箚曰: "臣非容護金雲澤也, 事繫先王, 非臣子之所敢問也。" 因出城, 再疏力救, 終不得。 雲澤竟死於獄中, 時年五十。 掌令尹會論民澤, 實爲渠魁, 遂逮捕究問甚酷, 終不服, 死於獄中, 時年四十五。 民澤臨死, 裂衣袂爲絶命書, 遺諸弟曰: "國將亡矣。 吾雖死, 庸何傷乎? 寧邊道遠, 吾魂魄雖欲夢見吾仲氏, 亦不可往, 悲哉悲哉。" 聞者莫不流涕。 英宗元年, 下敎曰: "賊臣欺蔽天聰, 擅弄國柄, 殺善人良士甚衆, 鋒刃慘毒, 予甚愍之。 其皆復官。" 由是, 雲澤始復官爵, 贈吏曹判書兼大提學, 民澤亦復官爵, 贈弘文館副提學。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89면
경종 2년 (1722) 12월 3일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2월 3일 갑인 1/1 기사 /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원임 부제학 김운택의 옥중 졸기
국역
원임 부제학 김운택(金雲澤)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김운택의 자(字)는 중행(仲行)인데,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젊어서 고제(高弟)로 급제했는데, 임금이 시권(試券)을 뜯어보고는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흘렀었다. 아우는 김민택(金民澤)인데, 자(字)가 치중(致仲)이다. 또한 고제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김운택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문예(文藝)를 좋아했다. 김민택은 사람됨이 침심(沈深)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용모가 풍만하고 미목(眉目)이 훤해서 바라보면 엄숙하였다. 그의 아망(雅望)은 김운택만 못하였지만 마음속의 기변(機變)은 더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공보(公輔)248) 의 기국이라고 여겼었다. 경종(景宗)이 병이 있어 저사(儲嗣)가 없고 환관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김운택은 사직(社稷)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알고 이에 김민택과 함께 이정소(李廷熽)에게 소장을 올려 저사를 세우기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공경(公卿)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경(卿)들을 인솔하고 들어와 경종을 뵙고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밤 시각(時刻)이 끝나게 되자 경종이 대전(大殿)에 나와서 대비가 내린 휘지(徽旨)를 내어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았으니, 이는 본디 김운택 형제의 계모에 의한 것이었다. 김운택은 처음 영변부(寧邊府)에 찬배(竄配)되고, 김민택은 선천부(宣川府)에 찬배되었는데, 목호룡(睦虎龍)이 무옥(誣獄)을 크게 일으키자, 김운택이 체포되었다. 최석항(崔錫恒)이 국문(鞫問)하는 일을 위임 받았는데,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일에 대해 신문하니 김운택이 정색하고 최석항을 책망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이 일을 묻는 것은 다만 무함이 선왕에게 미칠 뿐만이 아니다. 천하 후세에서 성상을 어떻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최석항이 기운이 꺾여서 이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김운택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선왕에게 관계되어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도성(都城)을 나갔다. 다시 소장을 올려 극력 영구(營救)하였지만 끝내 구제하지 못하였다. 김운택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50세였다. 그리고 장령 윤회(尹會)가 김민택이 실상 거괴(巨魁)라고 논했기 때문에 드디어 체포되어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고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45세였다. 김민택이 죽음에 임하여 옷소매를 찢어 절명서(絶命書)를 지어 아우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나야 죽은들 무슨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영변(寧邊)의 길이 멀어서 나의 혼백(魂魄)이 꿈에서나마 중씨(仲氏)를 만나고 싶었지만 또한 갈 수가 없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하교(下敎)하기를,
"적신(賊臣)이 천총(天聰)을 속여 가리고 나라의 군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러 선인(善人)과 양사(良士)들을 매우 많이 죽였으니, 그 봉인(鋒刃)의 참독함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들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운택이 비로소 복관되어 이조 판서겸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김민택도 복관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89면
- [註 248] 공보(公輔) : 정승(政丞).
원문
○甲寅/原任副提學金雲澤死於獄中。 雲澤字仲行, 文忠公 萬基孫也。 少登高第, 上拆券, 喜動天顔。 有弟曰民澤, 字致仲, 亦登高第, 入弘文館, 爲修撰。 雲澤爲人端詳, 好文藝。 民澤爲人沈深, 有大志, 容貌豐偉, 踈眉目, 望之凝然。 其雅望, 不及雲澤, 而內心機變過之, 人以爲公輔之器也。 景宗有疾無儲嗣, 宦官用事, 雲澤知社稷必亡, 乃與民澤, 觀李廷熽, 上疏請建儲嗣, 景宗納之, 下公卿議。 忠獻公 金昌集、忠愍公 李健命、忠翼公 趙泰采, 率列卿入見景宗, 請白大妃, 建儲嗣, 夜漏罷, 景宗臨殿, 出大妃所下徽旨冊, 英宗爲王世弟, 本雲澤兄弟之謀也。 雲澤初竄寧邊府, 而民澤竄宣川府。 睦虎龍大起誣獄, 雲澤被逮。 崔錫恒承委鞫事, 問李頤命獨對事, 雲澤正色責錫恒曰: "人臣敢問此事, 不但誣及於先王。 天下後世, 以聖上爲何如也?" 錫恒氣沮, 乃上箚曰: "臣非容護金雲澤也, 事繫先王, 非臣子之所敢問也。" 因出城, 再疏力救, 終不得。 雲澤竟死於獄中, 時年五十。 掌令尹會論民澤, 實爲渠魁, 遂逮捕究問甚酷, 終不服, 死於獄中, 時年四十五。 民澤臨死, 裂衣袂爲絶命書, 遺諸弟曰: "國將亡矣。 吾雖死, 庸何傷乎? 寧邊道遠, 吾魂魄雖欲夢見吾仲氏, 亦不可往, 悲哉悲哉。" 聞者莫不流涕。 英宗元年, 下敎曰: "賊臣欺蔽天聰, 擅弄國柄, 殺善人良士甚衆, 鋒刃慘毒, 予甚愍之。 其皆復官。" 由是, 雲澤始復官爵, 贈吏曹判書兼大提學, 民澤亦復官爵, 贈弘文館副提學。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89면
원본
경종 2년 (1722)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