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4월 19일 갑인 1/1 기사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
형조 참의 조지겸이 김만채의 소척으로 인해 진소하여 변명하다
국역
형조 참의(刑曹參議) 조지겸(趙持謙)이 김만채(金萬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진소(陳疏)하여서 스스로 변명(辨明)하였으니, 대략 이르기를,
"김익훈이 중하게 감죄(勘罪)되던 날 김만채가 일찍이 일언반구의 송원(訟寃)도 없다가 이제 김익훈이 석방(釋放)되어 나와 다니고 또 다시 서용(敍用)되자, 가론(家論)이 크게 행하여지고 공의(公議)가 이미 사라진 뒤에 자신이 옥서(玉署)027) 에 통하게 되어서 비로소 입을 열어 부르짖었습니다. 그 말이 비록 아비를 위한 것이라고 의탁(依托)하였으나 그 뜻은 오로지 신을 해치는 데 있으니, 신이 이에 대하여 다시 그 대개(大槪)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김익훈의 아방(兒房)028) 의 계품(啓稟)이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았고, 신은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를 듣지 못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외람되게 정원(政院)에 들어가게 되어서 비로소 그 일을 듣고 마음에 저으기 놀랐습니다. 일이 역옥(逆獄)에 관계되어 비록 경솔하고 쉽게 말하기 어려우나, 이같은 일을 만약 색목(色目)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이쪽과 저쪽이 있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매우 공정(公正)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김익훈의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건대, 결코 등단(登壇)의 중임(重任)에 두어서 완급(緩急)할 때 힘을 얻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탑전(榻前)에서 추문(推問)을 청하여,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친히 스스로 밀계(密啓)한 일의 전도(顚倒)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상을 진달(陳達)하였습니다.
이어 성주(聖主)의 시대를 상천(上天)께서 아래에 임(臨)한 것과 같음에 비겨,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어 이를 비추고 비와 이슬로 이를 적시며, 바람과 우레로 이를 진동하여서, 비록 무지개의 부정(不正)의 기운이 그 사이에 범함이 있어도 스스로 소멸(消滅)되니, 조정은 오직 마땅히 정형(政刑)을 밝히고 덕택(德澤)을 펴며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여서 치화(治化)의 융성(隆盛)을 도모하여야 하고, 기찰(譏察)은 쇠퇴하는 말세(末世)의 일로서 하여서는 안됨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신의 말이 비록 오활(迂濶)한 것 같으나 뜻이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 아울러 진술하였으며 성명(聖明)께서도 머리를 끄덕여 옳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 김익훈은 세력을 떨치어 거리낌이 없고 이익을 좋아하여 염치(廉恥)가 없어서 편안히 공사(公事)를 행하고 스스로 처신(處身)하기에 뜻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김익훈은 사제(私第)를 넓게 지었으며 예전의 시위궁(侍衛宮)을 사들여 그 군관청(軍官廳)으로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김익훈의 집은 대문이 여섯이라는 말이 한때에 성행(盛行)하였기 때문에, 신이 또 그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방종(放縱)한 정상을 진달하여 성상(聖上)께서 물리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신은 김익훈과 더불어 서로 안 지 이미 오래이며, 또 그 기염(氣焰)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여 세상 사람들이 곁눈질하여 보고 말을 삼키는 바 되니, 신의 벼슬이 언책(言責)이 아니어서 종적(踪跡)이 외롭고 위태로움을 가지고도 감히 사정(私情)을 돌아보지 않고 강봉(强鋒)을 부딪혀 범하면서 입을 괴롭혀가면서 힘써 다투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매양 전 세상에서 탐오 무뢰(貪汚無賴)한 무리를 써서 삼군(三軍)의 우두머리로 삼아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가 마침내 변란(變亂)에 임하여 분패(僨敗)를 초래한 것을 볼 때마다 일찍이 통한(痛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구(區區)한 간혈(肝血)의 성의(誠意)가 국가 간성(干城)의 임무를 적당하지 않은 자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근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대간(臺諫)에서 거리의 떠도는 말과 나라 안의 비등(沸騰)하는 비방의 소리를 일세(一世)의 공공(公共)의 의논으로 하여서 파출(罷黜)을 청하였습니다. 전익대(全翊戴)와 김환(金煥)이 면질한 뒤에 미쳐, 김환의 유인하고 위협한 정상이 크게 드러나서 가릴 수 없었고, 일이 김익훈에게 관련됨이 또한 분명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이에 대하여 격렬(激烈)해졌습니다. 김환은 국문(鞫問)을 청하고 김익훈은 찬배(竄配)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가 눈으로 보고 말한 것으로서, 대론(臺論)이 이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입니다. 어찌 신이 관여하여서 듣고 관여하여서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게 되어서는 겨우 두 달을 지나서 급작스럽게 석방되었으니, 인심을 만족하게 복종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김익훈이 무슨 죄가 있는지를 하문(下問)하시기에, 신은 곧 화약잠투(火藥潛投) 등의 일을 뭇사람의 마음에 옳지 않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솔직하게 대답을 올렸습니다. 김익훈의 죄가 이것을 가지고 마땅히 더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명(聖明)이 김익훈의 일을 모두 살피지 못하신 듯하여, 지척(咫尺)에서의 물으심에 감히 일찍이 들은 바를 숨기지 못하고 밖에서 말하는 바 뭇사람의 옳지 않게 여기는 점을 들어서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적 허새(許璽)의 문서(文書)가 낭자(狼藉)하여서 모계(謀計)가 지극히 흉악하니, 무릇 역내(域內)에서 보고 듣는 무리가 마음에 놀라고 뼈아프지 않음이 없어서 시체를 반 토막으로 내어 죽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저 허새의 흉적(凶賊)임을 가지고 모반(謀反)의 형적(形跡)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 모아 결탁한 바가 반드시 적지 않아서 응당 다만 고변(告變)한 자 몇 사람과 더불어 꾀한 것만이 아닙니다. 김익훈으로 하여금 염탐을 잘하여서 그 번잡한 무리를 많이 얻게 하였다면, 비록 밀계(密啓)·잠투(潛投) 등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는 일에다가 모토(茅土)029) 를 가지고 그 의망(意望)을 일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김만채의 소(疏)에 기찰(譏察)을 일러 말하기를, ‘상신(相臣)이 실로 비로소 기틀을 세워서 그 아비에게 맡겼으며, 이회(李) 등이 처음에 이미 흉역(凶逆)의 정상(情狀)을 대략 얻어서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한 몸이 되어 기찰(譏察)하여 기회를 틈타서 이대온(李大溫)의 전의 일을 유도(誘導)하여 묻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허새가 한수만(韓壽萬)의 가계(家計)가 조금 부유함을 가지고 그 도당으로 유인하여 들이고, 그 아비가 정절(情節)을 탐지하기 위하여 은화(銀貨)를 내어 주어서 그 모여 농락하는 비용에 이바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에 말미암아 본다면 이회·김환·한수만 등은 처음에 허새가 더불어 함께 역모(逆謀)를 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의도를 고쳐 상변(上變)한 자입니다. 김익훈(金益勳)은 이 무리와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허새를 정찰(偵察)하면서 세월을 보냈으니, 허새의 사정·종적과 거세(巨細)·완급(緩急)이 모두 눈 안에 있어서, 창졸간에 변(變)을 듣고 황급하게 고발하는 자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역적 허새가 유인하여 들인 한 수만을 가지고 역적 허새를 농락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몰래 자금을 주어서 그쪽으로 기울어져 굳게 결탁하게 하였으며, 또 이회·김환 등이 있어서 앞과 뒤가 되게 하였다면, 그 사이의 배치가 물샐 틈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 탐구(探鉤)의 방법에 있어 마땅히 먼저 그 당류(黨類)를 물어 빠짐이 없게 하여서 그 수족(手足)을 모두 캐내고 무기를 샅샅이 찾아낸 뒤에 상변한다면, 그 당류로 하여금 변명(辨明)의 말이 없이 취복(就服)하게 할 것이니, 이는 계책을 다하여서 농락한 실지가 되며 오랜 시일을 두고 형찰을 쌓은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김익훈의 기변(機變)은 헤아림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한편으로 급하게 빈집에 무기를 던져 넣어서 그 증거를 이루는 도구로 만들고 한편으로 적인(賊人)을 군문(軍門)에 유도하여 물어서 마치 변(變)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는 것 같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문(淑問)030) 할 때에 이르러서는 얻은 것이 다만 허새 한 사람뿐이고, 인치(引致)한 바가 모두 그 단서(端緖)가 없어서, 한갓 조정이 크게 놀라고 나라 안이 소요(騷擾)하게 만들었을 뿐으로, 그 과장(誇張)하여 크게 만들었던 것이 마침내 보잘것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의 일의 정상(情狀)은 진실로 다른 사람이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죄를 토벌하고 반역(反逆)을 주륙(誅戮)함이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소홀하고 어긋남이 이같이 심하단 말입니까? 전익대(全翊戴)는 공초(供招)를 받고 구류(拘留)한 것이 여러 번인데도 국청(鞫廳)을 설치한 지 이미 오랜 뒤에야 추후하여 아뢰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일이 이미 비밀에 속하며, 마침내 사실(事實)이 없는 것으로 돌렸으니, 김익훈이 무엇을 가지고 할 말이 있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말하기를, 김익훈이 또한 전익대를 가지고 믿기 어려움이 있다 하여 전익대의 죽음을 면하는 터전을 위하여 아방(兒房)의 계사(啓辭)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계사를 끌어대어서 각 아문(衙門) 제조(提調)의 계사에 예(例)에 비겨 은연 중에 흘러내려오는 옛 법도로서 선배(先輩)가 일찍이 행하던 바임을 가지고 구실로 삼으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갑신년031) 의 역옥(逆獄) 때에 고(故) 상신(相臣)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구(具仁垕)는 호위(扈衛)하는 곳에 있으면서 무릇 아뢸 것이 있으면 모두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올리게 하였습니다. 김익훈이 또한 자신이 대장(大將)이 되어 반드시 친히 들어가 아뢰었으니, 이에 군정(群情)의 의혹(疑惑)하여 이를 가리켜서 공(功)을 탐하고 상(賞)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만채는 말하기를, 그 아비가 계해년032) 에 여러 신하가 도적을 형찰(詗察)한 것을 들음이 매우 상세하나 애석하게도 유독 구인구의 고사(故事)만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김환은 김익훈이 돌아가게 되자 다만 뇌자(牢子)를 반송(伴送)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영기(令旗)를 빌렸으니, 비록 유인하고 위협한 계모(計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다만 깊은 밤의 호행(護行)만으로도 거의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 것에 가깝습니다.
화약(火藥)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김만채가 여러 번 말하기를 그것이 군문(軍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신이 좌상(左相)의 【민정중(閔鼎重)이다.】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서 천위(天威) 밑에 속여 진달(陳達)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의 곡절(曲折)은 그때에 이미 열거하여 아뢰었고 원래의 소(疏)가 아직도 있으니, 이제 다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신이 좌상의 말을 그릇 들어 군문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임금의 앞에서 진달하였지만, 신의 본 뜻은 마땅히 변란을 일으키는 이기(利器)를 도적의 손에 빌려주지 말아야 하며,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남몰래 던져 넣는 것에 이르러서는 극히 어둠침침하여 올바르지 못한 것에 속하는 까닭에 그 소(疏)에 이르기를, ‘세운(世運)은 항상 편안함이 없고 시세(時勢)는 상반(相反)됨이 있으니, 후일에 만일 간인(奸人)이 일을 담당함이 있어 공(功)과 상(賞)을 구하여서 이런 수단을 쓴다면 비록 죄없는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그 조정의 사리(事理)에 있어 한 번 밝게 분별하여서 재화(災禍)의 근원을 막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말하고 생각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군문(軍門)과 사가(私家)에서 나오는 것이 무슨 관긴(關緊)을 달리함이 있기에 반드시 군문의 물건을 내주는 것을 죄로 삼아서 위로 성명(聖明)을 속인단 말입니까? 김만채는 신이 화약(火藥)의 설(說)을 들은 것이 익숙한데도 전후의 계문(啓聞)이 한 번도 이에 미치지 않다가, 그 아비가 석방되는 날에 이르러 비로소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어서 마치 새로 들은 것이 있어 적발(摘發)한 것처럼 하여서, 사람을 무함하는 솜씨가 교묘하고도 참혹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거리에 떠도는 말은 들으나, 국청(鞫廳)의 일은 비밀이 되어 자세히 알지 못하다가 대신(大臣)과 수작(酬酢)하기에 미쳐 바야흐로 그 실정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의 추문(推問)을 청하는 계품(啓稟)에서 아울러 진달하기에 미치지 못하고, 그 후의 환수(還收)의 계청에서 비로소 앙달(仰達)한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이니, 무슨 교묘하고 참혹한 계략(計略)이 김만채의 말한 바와 같음이 있단 말입니까? 그때에 신이 일찍이 대관(臺官)이 되지 않았으니 대계(臺啓)는 신이 알 바가 아닌데도, 계사(啓辭) 안에서 처음에 이에 미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신을 책함은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몇 건(件)의 융물을 구하여 준 것은 다시 정절(情節)을 탐지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김만채의 말은, 역적 허새가 〈자기에게〉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의혹(疑惑)할 듯하여서 준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 정절을 탐지하고자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금방 던져 주고 곧 고발하며, 만약 헤아리기 어려움이 있을까 근심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이기(利器)를 빌린단 말입니까? 이것이 또 여러 사람의 더욱 놀라고 의혹하는 바입니다. 김만채가 비록 그 주고받을 때에 적인(賊人)이 집에 있지 않음은 그 아비가 미리 안 바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김익훈이 이 일을 주관(主管)한 지 오래이고, 지시(指示)와 자급(資給)이 그 손에서 나왔으며, 한수만 등의 하는 바를 알리고 품재(稟裁)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변하는 때에 임(臨)하여서 까맣게 적인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런 이치가 없을 듯하며, 융물을 던져 준 것은 바로 큰 단서가 되는 일인데 또한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김만채가 아비를 위하여 그 말의 허망(虛妄)함을 숨기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족히 괴이할 것 없으니, 일일이 분석(分析)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신을 일러 들어가서는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시험하며 나와서는 당여(黨與)를 지휘한다고 하는데, 무릇 인주(人主)를 탐지하고 시험하는 것은 바로 뜻에 영합(迎合)하고 아첨하며 순종하여서 스스로 꾀하기를 잘하는 자의 일입니다. 이제 신이 김익훈을 논함은 거실(巨室)에 원한을 맺고 권귀(權貴)의 미움을 받아서 스스로 무한한 전패(顚沛)를 취하는 것인데, 무슨 털끝만치라도 몸에 이로움이 있어서 이를 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소인(小人)이 어리석은 군주를 만나면 이와 같이 현혹시키는 술법(術法)을 씁니다만, 위에 명철한 임금이 있는데 밑에 탐지하고 시험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만채가 비록 사람을 무함하기에 급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본래 혈혈(孑孑)한 혼잣몸으로 세상에 고립(孤立)하여서 한유(韓愈)에게 족당(族黨)이 없고 개관요(蓋寬饒)에게 의탁할 데가 없는 것과 같으니, 믿는 것은 오직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 것뿐입니다. 지나간 해에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이 김익훈의 허물을 조금 말하였다가 혹은 여러 해 좌폐(坐廢)되고 혹은 청환(淸宦)의 길이 영구히 막혔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그 형세가 다시 지난날에 비길 바가 아닌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설령 신이 지휘하고자 함이 있다고 한들 누가 즐겨 신의 말에 따라서 앞에 있는 엎어진 수레바퀴의 자국을 밟아서 반드시 떨어지고야 말 위기(危機)를 범한단 말입니까? 김익훈의 일은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공공(公共)의 의논이니, 대각(臺閣)의 여러 신하가 각각 보고 들은 바를 가지고 항론(抗論)하여서 피하지 않음은 몸이 언로(言路)에 있어서 그 직책을 다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남의 지휘를 받는 자이겠습니까? 김만채가 또 한태동(韓泰東)·유득일(兪得一)·박태유(朴泰維)의 이름을 들어서 이르기를, 뒤를 이어 일어나 화응(和應)하여서 제멋대로 죄를 얽는다고 합니다. 이 의논이 일어난 지 이미 해를 넘어서, 전후하여 삼사(三司)에 드나든 사람이 진실로 김익훈의 인아 친속(姻婭親屬)이나 서로 앞을 다투고 죽기를 다투는 사람이 아니면 각각 소차(疏箚)와 계주(啓奏)로써 그 죄를 나열(羅列)하여 힘써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의 지휘를 듣고서 죄를 얽어 만드는 계략을 달갑게 여겨 한 것입니까? 김만채가 단지 세 신하만을 들고 여러 신하에게 두루 미치지 않은 것은, 어찌 성상께서 반드시 그 공론(公論)이 일제히 일어난 데에서 나온 것임을 하촉(下燭)하여 그 말을 의심하여서 믿지 않을 것을 가지고 일부러 생략(省略)하여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외(中外)의 하인[輿儓]같은 천인(賤人)과 여자나 어린아이 같이 미약(微弱)한 자에 이르기까지도 방방곡곡에서 모여 의논하고 길 위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이 김익훈을 가지고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이 집집마다 말하고 깨우쳐서 그런 것입니까? 전해에 유득일·박태유 등이 김익훈의 찬배(竄配)를 청한 계사(啓辭)의 말을 만든 것이 마땅치 않음을 책하여 남쪽의 변지(邊地)에 출보(出補)033) 하였을 때에 대신(大臣)과 정원(政院)·옥당(玉堂)·양사(兩司)가 동시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성지(聖旨)를 환발(渙發)하여 그대로 원직(原職)으로 되돌리셨으니, 그때에 보고 듣는 자가 성상의 도량의 관대(寬大)하심을 흠앙(欽仰)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후 대신이 김익훈의 삭직(削職)을 청하자, 말씀하시기를, ‘다만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의 말만이 아니라, 연소(年少)한 명관(名官)의 의논도 모두 옳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참작하여 처리한 연후에야 그 수습을 바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익훈을 문출(門黜)에서 석방하기에 미쳐 양사(兩司)에서 쟁집(爭執)하니, 대신도 너무 급작스럽다고 여겨 진언(進言)하기를, ‘당초에 석방의 명이 내린 뒤에 신 등이 만약 물의(物議)의 격화(激化)됨이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정지하시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만일 김익훈을 가지고 죄줄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처음에 어찌 이것으로써 무죄한 사람에게 더하며 또 어찌 석방의 너무 급작스러움을 가지고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김만채는 말하기를, ‘제아비의 한 바는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하여 그 지휘를 듣지 않음이 없다.’고 하지만 대신의 김익훈에 대한 것은 더욱 공의(公議)의 있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김만채는 또 신이 망령되고 방자한 말을 하자 그 아비가 듣고서 놀라고 의심하여 친구(親舊) 사이에 말하였는데, 신이 이것을 가지고 크게 원한을 품어 오직 보복할 계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익훈이 신의 무슨 말을 가지고 망령되고 방자하다고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는지, 또 어떤 사람이 신의 크게 원한을 품은 것을 보고 이를 김익훈에게 말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머리를 감추고 하는 말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신이 들어와 벼슬한 이래로 불행하게도 세변(世變)에 간섭함이 또한 많았으며, 타고난 성품이 오활(汚濶)하고 어리석어 세속(世俗)에 조화(調和)되지 못하며, 남의 입에 씹힘을 당하고 글로 인해 죄에 걸린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성상께서 구하여 주시고 풀어 주신 은혜를 입어 몸을 보전하여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에게 털끝만치라도 사심(私心)을 품어 불화(不和)를 해소할 뜻이 있었다면, 김익훈 등이 고한 바 일찍이 신을 함해(陷害)한 사람이 많은데, 어찌 때를 틈타서 이 무리의 환심을 사지 않고 도리어 김익훈을 배척한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또 어찌 그 아비의 일이 여론(輿論)의 같이하는 바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신이 남들이 아직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한 것을 가지고 신을 원수로 삼음이 가장 깊어서 탐지하고 시험하겠다든가, 지휘(指揮)했다는 것을 가지고 죄를 얽고 혐의(嫌疑)를 품어 원한을 보복(報復)함을 가지고 무함(誣陷)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신이 사의(私意)가 있고 사당(私黨)이 있어 손으로 성총(聖聰)을 가리고 턱으로 조정의 의논을 지시하는 것처럼 하여, 신을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빠뜨리고 다시 여러 신하에게까지 미쳐서 그 보복의 계략을 이루고자 합니다. 옛날의 허물을 가리는 자에 비하면 어찌 그다지도 다르단 말입니까? 하물며 그 이른바 허새·허영이 어떤 흉역(凶逆)인데, 이를 형찰(詗察)하여 잡은 사람을 매우 미워하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 참혹합니다. 만일 흉역(凶逆)을 형찰하여 얻은 이유를 가지고 깊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그 계략이 다만 그 아비가 깨끗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김만채가 이미 신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어 분노를 품어 말을 하는 것이니, 진실로 가려서 말해야 함을 책(責)하기는 어려우나, 또한 어찌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전세(前世)의 현인 군자(賢人君子)의 자손이 비록 혹시 노둔(駑鈍)하여 불초(不肖)한 자가 있어도 그 화(禍)를 전가(轉嫁)하여 해독(害毒)을 흘리는 계략을 한 자는 결코 없었습니다. 전날에 옥천(沃川) 사람 조광한(趙匡趙)의 소(疏)가 신(臣) 자신을 무함하여 끝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여도 모골(毛骨)이 모두 송연(竦然)합니다. 어떤 사람의 사주(使嗾)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조광한은 선정(先正)034) 의 후예로서 유택(遺澤)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그 말의 극히 패악(悖惡)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말세의 풍기(風氣)의 변(變)에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정상(正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김만채의 소 안의 뜻이 대개 조광한과 서로 비슷하고 또 더욱 혹독하니, 선정(先正)035) 의 집안에서 또다시 김만채가 말을 함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불안 속에 있으면서 슬픔과 탄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리에 어긋난다고 비답(批答)하여 이를 책(責)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은 청렴한 명망과 곧은 절개로써 사류(士流)의 영수(領袖)가 되고, 청탁(淸濁)을 격심하게 들추어내어서 거듭 훈척(勳戚)의 뜻에 거슬렸으니, 김만채가 그 기세를 믿고 몰래 보복하고자 하여서 〈행동이〉 이미 지극히 옳지 않았다. 조지겸이 대항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진술이 지극히 자세하고 곧으며 정위(情僞)036) 의 비유를 들어 분석하여서 거의 남김이 없으니, 공의(公議)가 모두 통쾌하다고 말하였으며 임금도 심하게 물리치지는 않았다.
- [註 027]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 [註 028] 아방(兒房) : 대궐 안의 장신(將臣)이 머무는 곳.
- [註 029] 모토(茅土) : 천자가 제후를 봉함을 말함. 봉할 때 그 지방의 방위에 속하는 빛깔의 흙을 흰 띠풀에 담아서 내려줌. 여기에서는 공신이 되어 부원군(府院君) 등에 오름을 말함.
- [註 030] 숙문(淑問) : 문초.
- [註 031]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 [註 032]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 [註 033] 출보(出補) : 외직(外職)으로 내보냄.
- [註 034] 선정(先正) : 조헌(趙憲)을 가리킴.
- [註 035] 선정(先正) :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
- [註 036] 정위(情僞) : 진실과 거짓.
원문
益勳被重勘之日, 萬埰曾無一言半辭之訟矣。 今益勳見釋, 行且復用, 家論大行, 公議已泯之後, 身通玉署, 始乃磨礪叫呶, 其言雖托於爲父, 其意專在於害臣。 臣於此, 不得不更及其槪。 當初益勳兒房之啓, 不出於朝報, 而臣非進參於鞫廳之人, 故初未聞之。 未幾忝入政院, 始聞其事, 心竊爲駭以爲, 事係逆獄, 雖難輕易言之, 而如此等事, 若以色目之同異, 有所彼此而喑默, 則殊非公正之道。 且見益勳之行己處事, 決不可置之登壇之重任, 望其得力於緩急之際, 故請推於榻前, 陳其不審虛實。 親自密啓, 顚倒謬戾之狀, 仍言聖主之御世, 比如上天之臨下, 天有日月以照之, 雨露以潤之, 風雷以振之。 雖有虹霓不正之氣, 干於其間, 自就消滅, 朝廷唯當明政刑、敷德澤、肅紀綱, 以圖治化之盛, 譏察是衰季之事, 有不可爲也。 臣言雖似迂闊, 意適如此, 故竝陳之, 而聖明亦賜頷可矣。 其後, 益勳奮勢無忌, 嗜利蔑恥, 晏然行公, 無意自處, 而其時益勳廣營私第, 至買故侍衛宮, 爲其軍官廳。 益勳家六大門之說, 盛行於一時, 故臣又陳其貪侈放縱之狀, 欲望聖上斥退之也。 臣與益勳, 相知旣久。 且其氣焰方熾, 爲世側目而呑舌, 以臣官非言責, 跡其孤危, 不敢顧私, 觸冒强鋒, 而苦口力爭者, 豈有他哉? 每見前世用貪汚無賴之輩, 長三軍而懸國命, 終致臨亂而僨敗者, 未嘗不爲之痛恨。 故區區肝血之誠, 竊以國家干城之托, 付之於匪人, 爲大可憂也。 其後臺諫以街談喧說, 國言沸騰, 一世公共之論, 請罷請黜矣。 及翊戴與金煥面質之後, 金煥誘脅之狀大彰, 昭不可掩, 而事有關涉於益勳者亦明, 故公議於是乎轉激。 煥則請鞫, 益勳則請竄, 此鞫廳諸臣所目見而言之者, 而臺論因之增加焉。 夫豈臣與聞而與知者乎? 至其門黜, 纔過兩月, 遽爾蒙放, 則無以厭服人心矣。 自上下問以益勳有何罪, 臣乃以火藥潛投等事, 爲衆心所不是, 率爾仰對。 非曰益勳之罪, 以是而宜加, 誠恐聖明未盡察益勳之事, 咫尺淸問, 不敢隱其所嘗聞, 而言之於外者, 擧其衆所不是處而陳之也。 逆璽文書狼藉, 謀計至兇, 凡在域內視聽之類, 莫不驚心痛骨, 思欲萬段。 夫以璽之凶賊, 叛形已具, 則其所聚結, 必不少矣, 不應只與告者數人爲謀。 如使益勳善於鉤探, 多得其繁徒, 則雖有密啓潛投, 駭人耳目之事, 加之以茅土, 以稱其意望, 夫誰曰不可? 而萬埰疏言譏察曰: "相臣實始設機, 而托之於其父, 等初已略得凶狀, 而使金煥追入其中, 一體譏察, 以襲誘問李大溫之已事。" 又曰: "逆璽以韓壽萬家計稍饒, 誘入於其黨, 而其父爲探情節, 出給銀貨, 以供其聚會籠絡之費。" 云。 由此見之,
、煥、壽萬等, 初非與璽共爲逆謀, 後乃改圖上變者。 而益勳與此輩同心偵璽, 蓋積以歲月, 璽之事情、蹤跡、巨細、緩急, 皆在其目中, 非倉卒聞變, 蒼黃發告者之比也。 以逆璽誘入之壽萬, 俾爲籠絡逆璽之人, 陰爲資給, 傾倒締結, 而又有
、煥等爲之後先, 則這間機關, 可謂費盡。 其在探鉤之方, 宜令先問其黨類, 無所遺漏, 盡發其手脚, 畢摘其角距, 而後上變, 使其黨無辭就服, 斯爲悉計籠絡之實, 乃有積久詗伺之益。 而夫何以益勳之機變, 計不及此, 一邊急投戎物於空家, 爲其證成之具, 一邊鉤問賊人於軍門, 有若變在呼吸。 及至淑問之時, 斯得只是一璽所引, 俱無其緖, 徒令朝廷震驚, 國內騷擾, 其所張大, 終成草草。 其間事狀, 固非他人所可測知, 而討罪誅逆, 是何等事, 而疎謬之甚, 乃若是耶? 至曰翊戴則取供拘留者累累, 而追啓於設鞫已久之後, 旣涉陰秘, 竟歸無實, 則益勳何以有辭? 而萬埰言: "益勳亦以翊戴有難取信, 而爲翊戴免死之地, 乃爲兒房之啓。" 又以其啓, 引而比之於各衙門提調啓辭之例, 隱然諉之以流來古規、先輩之所嘗行, 此果成說乎? 甲申年逆獄時, 故相臣綾川府院君 具仁垕在扈衛之所, 凡有所啓, 皆令郞廳進呈。 益勳亦身爲大將, 而必親入奏啓, 此群情疑惑, 指謂之貪功徼賞者也。 萬埰言其父聞癸亥諸臣詗賊之事甚詳, 而惜乎獨未聞仁垕故事也。 且金煥之見益勳還歸也, 不但伴送牢子, 且假以令旗, 則雖曰不知誘脅之謀, 只護深夜之行, 殆近掩目而捕雀者也。 至於火藥之說, 萬埰縷縷言其非出於軍門, 以臣爲做出左相 【閔鼎重。】 所不言之言, 誣達於天威之下, 此事曲折, 則其時卽已陳列, 原疏尙在, 今不須更辨。 而蓋臣誤聞左相之言, 雖以出自軍門, 陳之於前席, 而臣之本意則以爲, 不當以作變之利器, 假與賊手, 而至於乘虛暗投, 極涉黯黮不正, 故其疏有曰: "世運無常泰, 時勢有相反, 後日如有奸人當事, 希冀功賞, 用此手段, 則雖無罪之人, 無以得免, 其在朝廷事理, 不可不一番明辨, 以塞禍源。" 臣之所言所慮, 乃在於此。 其出於軍門與私家, 有何異同關緊者, 而必以出給軍門之物爲罪, 上誣聖明哉? 萬埰以爲: "臣聞火藥之說稔矣。 前後之啓, 一不及此, 至其父蒙釋之日, 始爲搆成罪案, 有若新有聞而摘發者然, 陷人手段, 巧且慘矣。" 云。 臣雖聞閭巷流傳之言, 鞫廳事秘, 無以詳知, 及與大臣酬酢, 方得其實, 故當初請推之啓, 未及竝陳。 伊後還收之請, 始乃仰達者, 誠以此也。 有何巧慘之計, 如萬埰所言哉? 其時臣未嘗爲臺官, 則臺啓非臣所知, 而乃以啓辭中初不及此責之於臣, 其亦謬矣。 或有云覓給諸件戎物者, 出於更探情節, 而萬埰之言, 則恐逆璽疑惑有難測之事, 而與之云。 若欲探其情節, 則其何以纔投旋告? 若慮有難測, 則其何以假之利器也? 此又群情之尤所駭惑者也。 萬埰雖言其授受之際, 賊人之不在家, 非其父所預知云, 而益勳之主管是事久矣。 指示資給, 出於其手, 壽萬等所爲, 無不告知稟裁, 則臨當上變之時, 漫不知賊人去處, 似無是理。 戎物投授, 乃是大段機關, 則亦豈有不知之理乎? 萬埰欲爲父, 隱其言之架虛, 固無足爲怪, 誠不欲支析節破, 而謂臣入則探試上意; 出則指揮黨與。 凡探試人主, 乃是逢迎阿順, 工於自謀者之事, 而今臣之論益勳, 則搆怨巨室, 見忤權貴, 自取無限顚沛, 有何絲毫所利於身, 而爲之乎? 自古小人遇昏君, 而乃售如此眩幻之術, 未聞上有明哲之辟, 而下有探試之臣也。 萬埰雖急於螫人, 何敢肆然爲此言乎? 臣本孑然一身, 孤立於世, 如韓愈之無族黨; 寬饒之無屬托, 所恃者唯是聖明在上。 昔年一二臺臣, 薄言益勳(勳)之過, 或坐廢累年, 或永枳淸路。 況今其勢, 非復向日之比也。 設令臣欲有所指揮, 誰肯從臣之言, 而蹈在前之覆轍, 犯必中之危機哉? 益勳之事, 卽一國公共之論也。 臺閣諸臣, 各以所見聞, 抗論而不避, 此不過身在言地, 效其職責而已, 夫豈受人指揮者乎? 萬埰雖且擧韓泰東、兪得一、朴泰維之名, 謂之繼起和之, 恣意羅織云, 而此論之發, 旣已經年, 前後出入三司之人, 苟非益勳姻婭親屬, 與其相先相後之人, 則無不各以疏箚啓奏, 羅列其罪, 力爭不已。 此皆聽臣指揮, 甘爲羅織之計乎? 萬埰只擧三臣, 不爲遍及諸臣者, 豈不以自上必下燭, 其出於公論之齊發, 疑其言而不之信, 故略而去之耶? 至於中外輿儓之賤、婦孺之微, 竊議於坊曲, 喧藉於道路, 無不以益勳爲不韙, 此皆臣家道而戶喩之耶? 前歲之責兪得一、朴泰維等以請竄益勳之啓, 措語未瑩, 出補南邊也, 大臣、政院、玉堂、兩司, 同時請對, 聖旨渙發, 還仍原職。 其時, 瞻聆莫不欽仰聖度之寬大矣。 其後大臣之請削益勳也, 有曰: "非但一二臺臣之言年少名官之論, 無不皆然, 必須參酌處置, 然後可望其收殺。" 及益勳門黜放釋, 兩司爭執, 則大臣亦以爲太遽, 而進言曰: "當初放釋命下之後, 臣等若知物議之轉激至此, 則固當請寢之不暇。" 大臣如以益勳爲無可罪之事, 則初何以此, 加之於無罪之人? 又何以放釋太遽, 至有還收之請耶? 萬埰言其父所爲, 無不稟議大臣, 聽其指揮云, 而大臣之處益勳者, 則尤可見公議之所在也。 萬埰又以臣有妄肆之言, 其父聞而驚訝, 言於親舊之間, 臣以此大銜, 惟以逞憾爲計云。 未知益勳以臣何言爲妄肆, 而言之於何人, 又未知何人見臣大銜, 而言之於益勳也? 藏頭下語, 殊甚陰慘。 臣入仕以來, 不幸冒涉世變, 亦已多矣。 素性迂愚, 不能諧俗, 受人齮齕, 罥罹文網者屢矣。 蒙聖上救釋之恩, 獲保至此, 若使臣有一毫懷私修却之意, 則益勳等之所告, 多是曾所陷臣之人, 何不乘時甘心於此輩, 而反斥益勳爲哉? 萬埰亦豈不知其父之事, 發於輿論之所同然, 而以臣先言於人所未言之前, 仇臣最深, 搆之以探試指揮; 誣之以銜嫌逞憾, 有若臣有私意、有私黨, 手蔽聖聰, 頤指廷議者然, 陷臣不測, 延及諸臣, 欲售其報復之計焉。 視古之蓋愆者, 何其異也? 況其所謂璽、瑛何等凶逆, 而深嫉詗得之人, 未詳其意之何居云者, 噫嘻, 慘矣! 如以詗得凶逆之故, 深嫉其人, 則其罪當如何也? 此其計, 不但爲其父白脫地而已也, 萬埰旣有次骨之怨於臣, 懷憤遣辭, 固難責其擇發, 而亦何以至於此極也? 前世賢人君子之子孫, 雖或有駑下不肖者, 其爲嫁禍流毒之計, 絶未之有。 而向者沃川人趙匡漢之疏, 構誣臣身, 罔有紀極, 至今思之, 毛骨俱竦。 未知受嗾於何人, 而匡漢以先正之後, 遺澤未斬, 而其言之絶悖乃如此, 臣嘗以爲, 此係末世風氣之變, 非謂之常。 今者萬埰疏中之意, 蓋與匡漢相似, 而又益酷矣。 不料先正之門, 又復有萬埰之爲言, 臣於危怖之中, 繼之以傷惋也。
上批以謬戾責之。 持謙以淸名直節, 爲士流領袖, 激揚淸濁, 重忤勳戚。 萬埰之挾其氣勢, 陰欲報復, 已極不韙, 而持謙對疏, 詳悉切直, 譬析情僞, 殆無餘蘊。 公議皆稱快, 而上亦不深斥也。
숙종 10년 (1684) 4월 19일
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4월 19일 갑인 1/1 기사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
형조 참의 조지겸이 김만채의 소척으로 인해 진소하여 변명하다
국역
형조 참의(刑曹參議) 조지겸(趙持謙)이 김만채(金萬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진소(陳疏)하여서 스스로 변명(辨明)하였으니, 대략 이르기를,
"김익훈이 중하게 감죄(勘罪)되던 날 김만채가 일찍이 일언반구의 송원(訟寃)도 없다가 이제 김익훈이 석방(釋放)되어 나와 다니고 또 다시 서용(敍用)되자, 가론(家論)이 크게 행하여지고 공의(公議)가 이미 사라진 뒤에 자신이 옥서(玉署)027) 에 통하게 되어서 비로소 입을 열어 부르짖었습니다. 그 말이 비록 아비를 위한 것이라고 의탁(依托)하였으나 그 뜻은 오로지 신을 해치는 데 있으니, 신이 이에 대하여 다시 그 대개(大槪)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김익훈의 아방(兒房)028) 의 계품(啓稟)이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았고, 신은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를 듣지 못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외람되게 정원(政院)에 들어가게 되어서 비로소 그 일을 듣고 마음에 저으기 놀랐습니다. 일이 역옥(逆獄)에 관계되어 비록 경솔하고 쉽게 말하기 어려우나, 이같은 일을 만약 색목(色目)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이쪽과 저쪽이 있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매우 공정(公正)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김익훈의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건대, 결코 등단(登壇)의 중임(重任)에 두어서 완급(緩急)할 때 힘을 얻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탑전(榻前)에서 추문(推問)을 청하여,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친히 스스로 밀계(密啓)한 일의 전도(顚倒)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상을 진달(陳達)하였습니다.
이어 성주(聖主)의 시대를 상천(上天)께서 아래에 임(臨)한 것과 같음에 비겨,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어 이를 비추고 비와 이슬로 이를 적시며, 바람과 우레로 이를 진동하여서, 비록 무지개의 부정(不正)의 기운이 그 사이에 범함이 있어도 스스로 소멸(消滅)되니, 조정은 오직 마땅히 정형(政刑)을 밝히고 덕택(德澤)을 펴며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여서 치화(治化)의 융성(隆盛)을 도모하여야 하고, 기찰(譏察)은 쇠퇴하는 말세(末世)의 일로서 하여서는 안됨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신의 말이 비록 오활(迂濶)한 것 같으나 뜻이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 아울러 진술하였으며 성명(聖明)께서도 머리를 끄덕여 옳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 김익훈은 세력을 떨치어 거리낌이 없고 이익을 좋아하여 염치(廉恥)가 없어서 편안히 공사(公事)를 행하고 스스로 처신(處身)하기에 뜻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김익훈은 사제(私第)를 넓게 지었으며 예전의 시위궁(侍衛宮)을 사들여 그 군관청(軍官廳)으로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김익훈의 집은 대문이 여섯이라는 말이 한때에 성행(盛行)하였기 때문에, 신이 또 그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방종(放縱)한 정상을 진달하여 성상(聖上)께서 물리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신은 김익훈과 더불어 서로 안 지 이미 오래이며, 또 그 기염(氣焰)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여 세상 사람들이 곁눈질하여 보고 말을 삼키는 바 되니, 신의 벼슬이 언책(言責)이 아니어서 종적(踪跡)이 외롭고 위태로움을 가지고도 감히 사정(私情)을 돌아보지 않고 강봉(强鋒)을 부딪혀 범하면서 입을 괴롭혀가면서 힘써 다투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매양 전 세상에서 탐오 무뢰(貪汚無賴)한 무리를 써서 삼군(三軍)의 우두머리로 삼아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가 마침내 변란(變亂)에 임하여 분패(僨敗)를 초래한 것을 볼 때마다 일찍이 통한(痛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구(區區)한 간혈(肝血)의 성의(誠意)가 국가 간성(干城)의 임무를 적당하지 않은 자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근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대간(臺諫)에서 거리의 떠도는 말과 나라 안의 비등(沸騰)하는 비방의 소리를 일세(一世)의 공공(公共)의 의논으로 하여서 파출(罷黜)을 청하였습니다. 전익대(全翊戴)와 김환(金煥)이 면질한 뒤에 미쳐, 김환의 유인하고 위협한 정상이 크게 드러나서 가릴 수 없었고, 일이 김익훈에게 관련됨이 또한 분명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이에 대하여 격렬(激烈)해졌습니다. 김환은 국문(鞫問)을 청하고 김익훈은 찬배(竄配)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가 눈으로 보고 말한 것으로서, 대론(臺論)이 이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입니다. 어찌 신이 관여하여서 듣고 관여하여서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게 되어서는 겨우 두 달을 지나서 급작스럽게 석방되었으니, 인심을 만족하게 복종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김익훈이 무슨 죄가 있는지를 하문(下問)하시기에, 신은 곧 화약잠투(火藥潛投) 등의 일을 뭇사람의 마음에 옳지 않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솔직하게 대답을 올렸습니다. 김익훈의 죄가 이것을 가지고 마땅히 더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명(聖明)이 김익훈의 일을 모두 살피지 못하신 듯하여, 지척(咫尺)에서의 물으심에 감히 일찍이 들은 바를 숨기지 못하고 밖에서 말하는 바 뭇사람의 옳지 않게 여기는 점을 들어서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적 허새(許璽)의 문서(文書)가 낭자(狼藉)하여서 모계(謀計)가 지극히 흉악하니, 무릇 역내(域內)에서 보고 듣는 무리가 마음에 놀라고 뼈아프지 않음이 없어서 시체를 반 토막으로 내어 죽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저 허새의 흉적(凶賊)임을 가지고 모반(謀反)의 형적(形跡)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 모아 결탁한 바가 반드시 적지 않아서 응당 다만 고변(告變)한 자 몇 사람과 더불어 꾀한 것만이 아닙니다. 김익훈으로 하여금 염탐을 잘하여서 그 번잡한 무리를 많이 얻게 하였다면, 비록 밀계(密啓)·잠투(潛投) 등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는 일에다가 모토(茅土)029) 를 가지고 그 의망(意望)을 일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김만채의 소(疏)에 기찰(譏察)을 일러 말하기를, ‘상신(相臣)이 실로 비로소 기틀을 세워서 그 아비에게 맡겼으며, 이회(李) 등이 처음에 이미 흉역(凶逆)의 정상(情狀)을 대략 얻어서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한 몸이 되어 기찰(譏察)하여 기회를 틈타서 이대온(李大溫)의 전의 일을 유도(誘導)하여 묻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허새가 한수만(韓壽萬)의 가계(家計)가 조금 부유함을 가지고 그 도당으로 유인하여 들이고, 그 아비가 정절(情節)을 탐지하기 위하여 은화(銀貨)를 내어 주어서 그 모여 농락하는 비용에 이바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에 말미암아 본다면 이회·김환·한수만 등은 처음에 허새가 더불어 함께 역모(逆謀)를 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의도를 고쳐 상변(上變)한 자입니다. 김익훈(金益勳)은 이 무리와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허새를 정찰(偵察)하면서 세월을 보냈으니, 허새의 사정·종적과 거세(巨細)·완급(緩急)이 모두 눈 안에 있어서, 창졸간에 변(變)을 듣고 황급하게 고발하는 자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역적 허새가 유인하여 들인 한 수만을 가지고 역적 허새를 농락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몰래 자금을 주어서 그쪽으로 기울어져 굳게 결탁하게 하였으며, 또 이회·김환 등이 있어서 앞과 뒤가 되게 하였다면, 그 사이의 배치가 물샐 틈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 탐구(探鉤)의 방법에 있어 마땅히 먼저 그 당류(黨類)를 물어 빠짐이 없게 하여서 그 수족(手足)을 모두 캐내고 무기를 샅샅이 찾아낸 뒤에 상변한다면, 그 당류로 하여금 변명(辨明)의 말이 없이 취복(就服)하게 할 것이니, 이는 계책을 다하여서 농락한 실지가 되며 오랜 시일을 두고 형찰을 쌓은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김익훈의 기변(機變)은 헤아림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한편으로 급하게 빈집에 무기를 던져 넣어서 그 증거를 이루는 도구로 만들고 한편으로 적인(賊人)을 군문(軍門)에 유도하여 물어서 마치 변(變)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는 것 같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문(淑問)030) 할 때에 이르러서는 얻은 것이 다만 허새 한 사람뿐이고, 인치(引致)한 바가 모두 그 단서(端緖)가 없어서, 한갓 조정이 크게 놀라고 나라 안이 소요(騷擾)하게 만들었을 뿐으로, 그 과장(誇張)하여 크게 만들었던 것이 마침내 보잘것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의 일의 정상(情狀)은 진실로 다른 사람이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죄를 토벌하고 반역(反逆)을 주륙(誅戮)함이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소홀하고 어긋남이 이같이 심하단 말입니까? 전익대(全翊戴)는 공초(供招)를 받고 구류(拘留)한 것이 여러 번인데도 국청(鞫廳)을 설치한 지 이미 오랜 뒤에야 추후하여 아뢰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일이 이미 비밀에 속하며, 마침내 사실(事實)이 없는 것으로 돌렸으니, 김익훈이 무엇을 가지고 할 말이 있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말하기를, 김익훈이 또한 전익대를 가지고 믿기 어려움이 있다 하여 전익대의 죽음을 면하는 터전을 위하여 아방(兒房)의 계사(啓辭)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계사를 끌어대어서 각 아문(衙門) 제조(提調)의 계사에 예(例)에 비겨 은연 중에 흘러내려오는 옛 법도로서 선배(先輩)가 일찍이 행하던 바임을 가지고 구실로 삼으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갑신년031) 의 역옥(逆獄) 때에 고(故) 상신(相臣)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구(具仁垕)는 호위(扈衛)하는 곳에 있으면서 무릇 아뢸 것이 있으면 모두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올리게 하였습니다. 김익훈이 또한 자신이 대장(大將)이 되어 반드시 친히 들어가 아뢰었으니, 이에 군정(群情)의 의혹(疑惑)하여 이를 가리켜서 공(功)을 탐하고 상(賞)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만채는 말하기를, 그 아비가 계해년032) 에 여러 신하가 도적을 형찰(詗察)한 것을 들음이 매우 상세하나 애석하게도 유독 구인구의 고사(故事)만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김환은 김익훈이 돌아가게 되자 다만 뇌자(牢子)를 반송(伴送)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영기(令旗)를 빌렸으니, 비록 유인하고 위협한 계모(計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다만 깊은 밤의 호행(護行)만으로도 거의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 것에 가깝습니다.
화약(火藥)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김만채가 여러 번 말하기를 그것이 군문(軍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신이 좌상(左相)의 【민정중(閔鼎重)이다.】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서 천위(天威) 밑에 속여 진달(陳達)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의 곡절(曲折)은 그때에 이미 열거하여 아뢰었고 원래의 소(疏)가 아직도 있으니, 이제 다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신이 좌상의 말을 그릇 들어 군문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임금의 앞에서 진달하였지만, 신의 본 뜻은 마땅히 변란을 일으키는 이기(利器)를 도적의 손에 빌려주지 말아야 하며,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남몰래 던져 넣는 것에 이르러서는 극히 어둠침침하여 올바르지 못한 것에 속하는 까닭에 그 소(疏)에 이르기를, ‘세운(世運)은 항상 편안함이 없고 시세(時勢)는 상반(相反)됨이 있으니, 후일에 만일 간인(奸人)이 일을 담당함이 있어 공(功)과 상(賞)을 구하여서 이런 수단을 쓴다면 비록 죄없는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그 조정의 사리(事理)에 있어 한 번 밝게 분별하여서 재화(災禍)의 근원을 막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말하고 생각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군문(軍門)과 사가(私家)에서 나오는 것이 무슨 관긴(關緊)을 달리함이 있기에 반드시 군문의 물건을 내주는 것을 죄로 삼아서 위로 성명(聖明)을 속인단 말입니까? 김만채는 신이 화약(火藥)의 설(說)을 들은 것이 익숙한데도 전후의 계문(啓聞)이 한 번도 이에 미치지 않다가, 그 아비가 석방되는 날에 이르러 비로소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어서 마치 새로 들은 것이 있어 적발(摘發)한 것처럼 하여서, 사람을 무함하는 솜씨가 교묘하고도 참혹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거리에 떠도는 말은 들으나, 국청(鞫廳)의 일은 비밀이 되어 자세히 알지 못하다가 대신(大臣)과 수작(酬酢)하기에 미쳐 바야흐로 그 실정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의 추문(推問)을 청하는 계품(啓稟)에서 아울러 진달하기에 미치지 못하고, 그 후의 환수(還收)의 계청에서 비로소 앙달(仰達)한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이니, 무슨 교묘하고 참혹한 계략(計略)이 김만채의 말한 바와 같음이 있단 말입니까? 그때에 신이 일찍이 대관(臺官)이 되지 않았으니 대계(臺啓)는 신이 알 바가 아닌데도, 계사(啓辭) 안에서 처음에 이에 미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신을 책함은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몇 건(件)의 융물을 구하여 준 것은 다시 정절(情節)을 탐지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김만채의 말은, 역적 허새가 〈자기에게〉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의혹(疑惑)할 듯하여서 준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 정절을 탐지하고자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금방 던져 주고 곧 고발하며, 만약 헤아리기 어려움이 있을까 근심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이기(利器)를 빌린단 말입니까? 이것이 또 여러 사람의 더욱 놀라고 의혹하는 바입니다. 김만채가 비록 그 주고받을 때에 적인(賊人)이 집에 있지 않음은 그 아비가 미리 안 바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김익훈이 이 일을 주관(主管)한 지 오래이고, 지시(指示)와 자급(資給)이 그 손에서 나왔으며, 한수만 등의 하는 바를 알리고 품재(稟裁)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변하는 때에 임(臨)하여서 까맣게 적인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런 이치가 없을 듯하며, 융물을 던져 준 것은 바로 큰 단서가 되는 일인데 또한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김만채가 아비를 위하여 그 말의 허망(虛妄)함을 숨기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족히 괴이할 것 없으니, 일일이 분석(分析)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신을 일러 들어가서는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시험하며 나와서는 당여(黨與)를 지휘한다고 하는데, 무릇 인주(人主)를 탐지하고 시험하는 것은 바로 뜻에 영합(迎合)하고 아첨하며 순종하여서 스스로 꾀하기를 잘하는 자의 일입니다. 이제 신이 김익훈을 논함은 거실(巨室)에 원한을 맺고 권귀(權貴)의 미움을 받아서 스스로 무한한 전패(顚沛)를 취하는 것인데, 무슨 털끝만치라도 몸에 이로움이 있어서 이를 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소인(小人)이 어리석은 군주를 만나면 이와 같이 현혹시키는 술법(術法)을 씁니다만, 위에 명철한 임금이 있는데 밑에 탐지하고 시험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만채가 비록 사람을 무함하기에 급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본래 혈혈(孑孑)한 혼잣몸으로 세상에 고립(孤立)하여서 한유(韓愈)에게 족당(族黨)이 없고 개관요(蓋寬饒)에게 의탁할 데가 없는 것과 같으니, 믿는 것은 오직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 것뿐입니다. 지나간 해에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이 김익훈의 허물을 조금 말하였다가 혹은 여러 해 좌폐(坐廢)되고 혹은 청환(淸宦)의 길이 영구히 막혔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그 형세가 다시 지난날에 비길 바가 아닌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설령 신이 지휘하고자 함이 있다고 한들 누가 즐겨 신의 말에 따라서 앞에 있는 엎어진 수레바퀴의 자국을 밟아서 반드시 떨어지고야 말 위기(危機)를 범한단 말입니까? 김익훈의 일은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공공(公共)의 의논이니, 대각(臺閣)의 여러 신하가 각각 보고 들은 바를 가지고 항론(抗論)하여서 피하지 않음은 몸이 언로(言路)에 있어서 그 직책을 다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남의 지휘를 받는 자이겠습니까? 김만채가 또 한태동(韓泰東)·유득일(兪得一)·박태유(朴泰維)의 이름을 들어서 이르기를, 뒤를 이어 일어나 화응(和應)하여서 제멋대로 죄를 얽는다고 합니다. 이 의논이 일어난 지 이미 해를 넘어서, 전후하여 삼사(三司)에 드나든 사람이 진실로 김익훈의 인아 친속(姻婭親屬)이나 서로 앞을 다투고 죽기를 다투는 사람이 아니면 각각 소차(疏箚)와 계주(啓奏)로써 그 죄를 나열(羅列)하여 힘써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의 지휘를 듣고서 죄를 얽어 만드는 계략을 달갑게 여겨 한 것입니까? 김만채가 단지 세 신하만을 들고 여러 신하에게 두루 미치지 않은 것은, 어찌 성상께서 반드시 그 공론(公論)이 일제히 일어난 데에서 나온 것임을 하촉(下燭)하여 그 말을 의심하여서 믿지 않을 것을 가지고 일부러 생략(省略)하여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외(中外)의 하인[輿儓]같은 천인(賤人)과 여자나 어린아이 같이 미약(微弱)한 자에 이르기까지도 방방곡곡에서 모여 의논하고 길 위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이 김익훈을 가지고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이 집집마다 말하고 깨우쳐서 그런 것입니까? 전해에 유득일·박태유 등이 김익훈의 찬배(竄配)를 청한 계사(啓辭)의 말을 만든 것이 마땅치 않음을 책하여 남쪽의 변지(邊地)에 출보(出補)033) 하였을 때에 대신(大臣)과 정원(政院)·옥당(玉堂)·양사(兩司)가 동시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성지(聖旨)를 환발(渙發)하여 그대로 원직(原職)으로 되돌리셨으니, 그때에 보고 듣는 자가 성상의 도량의 관대(寬大)하심을 흠앙(欽仰)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후 대신이 김익훈의 삭직(削職)을 청하자, 말씀하시기를, ‘다만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의 말만이 아니라, 연소(年少)한 명관(名官)의 의논도 모두 옳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참작하여 처리한 연후에야 그 수습을 바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익훈을 문출(門黜)에서 석방하기에 미쳐 양사(兩司)에서 쟁집(爭執)하니, 대신도 너무 급작스럽다고 여겨 진언(進言)하기를, ‘당초에 석방의 명이 내린 뒤에 신 등이 만약 물의(物議)의 격화(激化)됨이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정지하시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만일 김익훈을 가지고 죄줄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처음에 어찌 이것으로써 무죄한 사람에게 더하며 또 어찌 석방의 너무 급작스러움을 가지고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김만채는 말하기를, ‘제아비의 한 바는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하여 그 지휘를 듣지 않음이 없다.’고 하지만 대신의 김익훈에 대한 것은 더욱 공의(公議)의 있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김만채는 또 신이 망령되고 방자한 말을 하자 그 아비가 듣고서 놀라고 의심하여 친구(親舊) 사이에 말하였는데, 신이 이것을 가지고 크게 원한을 품어 오직 보복할 계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익훈이 신의 무슨 말을 가지고 망령되고 방자하다고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는지, 또 어떤 사람이 신의 크게 원한을 품은 것을 보고 이를 김익훈에게 말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머리를 감추고 하는 말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신이 들어와 벼슬한 이래로 불행하게도 세변(世變)에 간섭함이 또한 많았으며, 타고난 성품이 오활(汚濶)하고 어리석어 세속(世俗)에 조화(調和)되지 못하며, 남의 입에 씹힘을 당하고 글로 인해 죄에 걸린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성상께서 구하여 주시고 풀어 주신 은혜를 입어 몸을 보전하여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에게 털끝만치라도 사심(私心)을 품어 불화(不和)를 해소할 뜻이 있었다면, 김익훈 등이 고한 바 일찍이 신을 함해(陷害)한 사람이 많은데, 어찌 때를 틈타서 이 무리의 환심을 사지 않고 도리어 김익훈을 배척한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또 어찌 그 아비의 일이 여론(輿論)의 같이하는 바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신이 남들이 아직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한 것을 가지고 신을 원수로 삼음이 가장 깊어서 탐지하고 시험하겠다든가, 지휘(指揮)했다는 것을 가지고 죄를 얽고 혐의(嫌疑)를 품어 원한을 보복(報復)함을 가지고 무함(誣陷)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신이 사의(私意)가 있고 사당(私黨)이 있어 손으로 성총(聖聰)을 가리고 턱으로 조정의 의논을 지시하는 것처럼 하여, 신을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빠뜨리고 다시 여러 신하에게까지 미쳐서 그 보복의 계략을 이루고자 합니다. 옛날의 허물을 가리는 자에 비하면 어찌 그다지도 다르단 말입니까? 하물며 그 이른바 허새·허영이 어떤 흉역(凶逆)인데, 이를 형찰(詗察)하여 잡은 사람을 매우 미워하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 참혹합니다. 만일 흉역(凶逆)을 형찰하여 얻은 이유를 가지고 깊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그 계략이 다만 그 아비가 깨끗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김만채가 이미 신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어 분노를 품어 말을 하는 것이니, 진실로 가려서 말해야 함을 책(責)하기는 어려우나, 또한 어찌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전세(前世)의 현인 군자(賢人君子)의 자손이 비록 혹시 노둔(駑鈍)하여 불초(不肖)한 자가 있어도 그 화(禍)를 전가(轉嫁)하여 해독(害毒)을 흘리는 계략을 한 자는 결코 없었습니다. 전날에 옥천(沃川) 사람 조광한(趙匡趙)의 소(疏)가 신(臣) 자신을 무함하여 끝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여도 모골(毛骨)이 모두 송연(竦然)합니다. 어떤 사람의 사주(使嗾)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조광한은 선정(先正)034) 의 후예로서 유택(遺澤)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그 말의 극히 패악(悖惡)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말세의 풍기(風氣)의 변(變)에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정상(正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김만채의 소 안의 뜻이 대개 조광한과 서로 비슷하고 또 더욱 혹독하니, 선정(先正)035) 의 집안에서 또다시 김만채가 말을 함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불안 속에 있으면서 슬픔과 탄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리에 어긋난다고 비답(批答)하여 이를 책(責)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은 청렴한 명망과 곧은 절개로써 사류(士流)의 영수(領袖)가 되고, 청탁(淸濁)을 격심하게 들추어내어서 거듭 훈척(勳戚)의 뜻에 거슬렸으니, 김만채가 그 기세를 믿고 몰래 보복하고자 하여서 〈행동이〉 이미 지극히 옳지 않았다. 조지겸이 대항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진술이 지극히 자세하고 곧으며 정위(情僞)036) 의 비유를 들어 분석하여서 거의 남김이 없으니, 공의(公議)가 모두 통쾌하다고 말하였으며 임금도 심하게 물리치지는 않았다.
- [註 027]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 [註 028] 아방(兒房) : 대궐 안의 장신(將臣)이 머무는 곳.
- [註 029] 모토(茅土) : 천자가 제후를 봉함을 말함. 봉할 때 그 지방의 방위에 속하는 빛깔의 흙을 흰 띠풀에 담아서 내려줌. 여기에서는 공신이 되어 부원군(府院君) 등에 오름을 말함.
- [註 030] 숙문(淑問) : 문초.
- [註 031]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 [註 032]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 [註 033] 출보(出補) : 외직(外職)으로 내보냄.
- [註 034] 선정(先正) : 조헌(趙憲)을 가리킴.
- [註 035] 선정(先正) :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
- [註 036] 정위(情僞) : 진실과 거짓.
원문
益勳被重勘之日, 萬埰曾無一言半辭之訟矣。 今益勳見釋, 行且復用, 家論大行, 公議已泯之後, 身通玉署, 始乃磨礪叫呶, 其言雖托於爲父, 其意專在於害臣。 臣於此, 不得不更及其槪。 當初益勳兒房之啓, 不出於朝報, 而臣非進參於鞫廳之人, 故初未聞之。 未幾忝入政院, 始聞其事, 心竊爲駭以爲, 事係逆獄, 雖難輕易言之, 而如此等事, 若以色目之同異, 有所彼此而喑默, 則殊非公正之道。 且見益勳之行己處事, 決不可置之登壇之重任, 望其得力於緩急之際, 故請推於榻前, 陳其不審虛實。 親自密啓, 顚倒謬戾之狀, 仍言聖主之御世, 比如上天之臨下, 天有日月以照之, 雨露以潤之, 風雷以振之。 雖有虹霓不正之氣, 干於其間, 自就消滅, 朝廷唯當明政刑、敷德澤、肅紀綱, 以圖治化之盛, 譏察是衰季之事, 有不可爲也。 臣言雖似迂闊, 意適如此, 故竝陳之, 而聖明亦賜頷可矣。 其後, 益勳奮勢無忌, 嗜利蔑恥, 晏然行公, 無意自處, 而其時益勳廣營私第, 至買故侍衛宮, 爲其軍官廳。 益勳家六大門之說, 盛行於一時, 故臣又陳其貪侈放縱之狀, 欲望聖上斥退之也。 臣與益勳, 相知旣久。 且其氣焰方熾, 爲世側目而呑舌, 以臣官非言責, 跡其孤危, 不敢顧私, 觸冒强鋒, 而苦口力爭者, 豈有他哉? 每見前世用貪汚無賴之輩, 長三軍而懸國命, 終致臨亂而僨敗者, 未嘗不爲之痛恨。 故區區肝血之誠, 竊以國家干城之托, 付之於匪人, 爲大可憂也。 其後臺諫以街談喧說, 國言沸騰, 一世公共之論, 請罷請黜矣。 及翊戴與金煥面質之後, 金煥誘脅之狀大彰, 昭不可掩, 而事有關涉於益勳者亦明, 故公議於是乎轉激。 煥則請鞫, 益勳則請竄, 此鞫廳諸臣所目見而言之者, 而臺論因之增加焉。 夫豈臣與聞而與知者乎? 至其門黜, 纔過兩月, 遽爾蒙放, 則無以厭服人心矣。 自上下問以益勳有何罪, 臣乃以火藥潛投等事, 爲衆心所不是, 率爾仰對。 非曰益勳之罪, 以是而宜加, 誠恐聖明未盡察益勳之事, 咫尺淸問, 不敢隱其所嘗聞, 而言之於外者, 擧其衆所不是處而陳之也。 逆璽文書狼藉, 謀計至兇, 凡在域內視聽之類, 莫不驚心痛骨, 思欲萬段。 夫以璽之凶賊, 叛形已具, 則其所聚結, 必不少矣, 不應只與告者數人爲謀。 如使益勳善於鉤探, 多得其繁徒, 則雖有密啓潛投, 駭人耳目之事, 加之以茅土, 以稱其意望, 夫誰曰不可? 而萬埰疏言譏察曰: "相臣實始設機, 而托之於其父, 等初已略得凶狀, 而使金煥追入其中, 一體譏察, 以襲誘問李大溫之已事。" 又曰: "逆璽以韓壽萬家計稍饒, 誘入於其黨, 而其父爲探情節, 出給銀貨, 以供其聚會籠絡之費。" 云。 由此見之,
、煥、壽萬等, 初非與璽共爲逆謀, 後乃改圖上變者。 而益勳與此輩同心偵璽, 蓋積以歲月, 璽之事情、蹤跡、巨細、緩急, 皆在其目中, 非倉卒聞變, 蒼黃發告者之比也。 以逆璽誘入之壽萬, 俾爲籠絡逆璽之人, 陰爲資給, 傾倒締結, 而又有
、煥等爲之後先, 則這間機關, 可謂費盡。 其在探鉤之方, 宜令先問其黨類, 無所遺漏, 盡發其手脚, 畢摘其角距, 而後上變, 使其黨無辭就服, 斯爲悉計籠絡之實, 乃有積久詗伺之益。 而夫何以益勳之機變, 計不及此, 一邊急投戎物於空家, 爲其證成之具, 一邊鉤問賊人於軍門, 有若變在呼吸。 及至淑問之時, 斯得只是一璽所引, 俱無其緖, 徒令朝廷震驚, 國內騷擾, 其所張大, 終成草草。 其間事狀, 固非他人所可測知, 而討罪誅逆, 是何等事, 而疎謬之甚, 乃若是耶? 至曰翊戴則取供拘留者累累, 而追啓於設鞫已久之後, 旣涉陰秘, 竟歸無實, 則益勳何以有辭? 而萬埰言: "益勳亦以翊戴有難取信, 而爲翊戴免死之地, 乃爲兒房之啓。" 又以其啓, 引而比之於各衙門提調啓辭之例, 隱然諉之以流來古規、先輩之所嘗行, 此果成說乎? 甲申年逆獄時, 故相臣綾川府院君 具仁垕在扈衛之所, 凡有所啓, 皆令郞廳進呈。 益勳亦身爲大將, 而必親入奏啓, 此群情疑惑, 指謂之貪功徼賞者也。 萬埰言其父聞癸亥諸臣詗賊之事甚詳, 而惜乎獨未聞仁垕故事也。 且金煥之見益勳還歸也, 不但伴送牢子, 且假以令旗, 則雖曰不知誘脅之謀, 只護深夜之行, 殆近掩目而捕雀者也。 至於火藥之說, 萬埰縷縷言其非出於軍門, 以臣爲做出左相 【閔鼎重。】 所不言之言, 誣達於天威之下, 此事曲折, 則其時卽已陳列, 原疏尙在, 今不須更辨。 而蓋臣誤聞左相之言, 雖以出自軍門, 陳之於前席, 而臣之本意則以爲, 不當以作變之利器, 假與賊手, 而至於乘虛暗投, 極涉黯黮不正, 故其疏有曰: "世運無常泰, 時勢有相反, 後日如有奸人當事, 希冀功賞, 用此手段, 則雖無罪之人, 無以得免, 其在朝廷事理, 不可不一番明辨, 以塞禍源。" 臣之所言所慮, 乃在於此。 其出於軍門與私家, 有何異同關緊者, 而必以出給軍門之物爲罪, 上誣聖明哉? 萬埰以爲: "臣聞火藥之說稔矣。 前後之啓, 一不及此, 至其父蒙釋之日, 始爲搆成罪案, 有若新有聞而摘發者然, 陷人手段, 巧且慘矣。" 云。 臣雖聞閭巷流傳之言, 鞫廳事秘, 無以詳知, 及與大臣酬酢, 方得其實, 故當初請推之啓, 未及竝陳。 伊後還收之請, 始乃仰達者, 誠以此也。 有何巧慘之計, 如萬埰所言哉? 其時臣未嘗爲臺官, 則臺啓非臣所知, 而乃以啓辭中初不及此責之於臣, 其亦謬矣。 或有云覓給諸件戎物者, 出於更探情節, 而萬埰之言, 則恐逆璽疑惑有難測之事, 而與之云。 若欲探其情節, 則其何以纔投旋告? 若慮有難測, 則其何以假之利器也? 此又群情之尤所駭惑者也。 萬埰雖言其授受之際, 賊人之不在家, 非其父所預知云, 而益勳之主管是事久矣。 指示資給, 出於其手, 壽萬等所爲, 無不告知稟裁, 則臨當上變之時, 漫不知賊人去處, 似無是理。 戎物投授, 乃是大段機關, 則亦豈有不知之理乎? 萬埰欲爲父, 隱其言之架虛, 固無足爲怪, 誠不欲支析節破, 而謂臣入則探試上意; 出則指揮黨與。 凡探試人主, 乃是逢迎阿順, 工於自謀者之事, 而今臣之論益勳, 則搆怨巨室, 見忤權貴, 自取無限顚沛, 有何絲毫所利於身, 而爲之乎? 自古小人遇昏君, 而乃售如此眩幻之術, 未聞上有明哲之辟, 而下有探試之臣也。 萬埰雖急於螫人, 何敢肆然爲此言乎? 臣本孑然一身, 孤立於世, 如韓愈之無族黨; 寬饒之無屬托, 所恃者唯是聖明在上。 昔年一二臺臣, 薄言益勳(勳)之過, 或坐廢累年, 或永枳淸路。 況今其勢, 非復向日之比也。 設令臣欲有所指揮, 誰肯從臣之言, 而蹈在前之覆轍, 犯必中之危機哉? 益勳之事, 卽一國公共之論也。 臺閣諸臣, 各以所見聞, 抗論而不避, 此不過身在言地, 效其職責而已, 夫豈受人指揮者乎? 萬埰雖且擧韓泰東、兪得一、朴泰維之名, 謂之繼起和之, 恣意羅織云, 而此論之發, 旣已經年, 前後出入三司之人, 苟非益勳姻婭親屬, 與其相先相後之人, 則無不各以疏箚啓奏, 羅列其罪, 力爭不已。 此皆聽臣指揮, 甘爲羅織之計乎? 萬埰只擧三臣, 不爲遍及諸臣者, 豈不以自上必下燭, 其出於公論之齊發, 疑其言而不之信, 故略而去之耶? 至於中外輿儓之賤、婦孺之微, 竊議於坊曲, 喧藉於道路, 無不以益勳爲不韙, 此皆臣家道而戶喩之耶? 前歲之責兪得一、朴泰維等以請竄益勳之啓, 措語未瑩, 出補南邊也, 大臣、政院、玉堂、兩司, 同時請對, 聖旨渙發, 還仍原職。 其時, 瞻聆莫不欽仰聖度之寬大矣。 其後大臣之請削益勳也, 有曰: "非但一二臺臣之言年少名官之論, 無不皆然, 必須參酌處置, 然後可望其收殺。" 及益勳門黜放釋, 兩司爭執, 則大臣亦以爲太遽, 而進言曰: "當初放釋命下之後, 臣等若知物議之轉激至此, 則固當請寢之不暇。" 大臣如以益勳爲無可罪之事, 則初何以此, 加之於無罪之人? 又何以放釋太遽, 至有還收之請耶? 萬埰言其父所爲, 無不稟議大臣, 聽其指揮云, 而大臣之處益勳者, 則尤可見公議之所在也。 萬埰又以臣有妄肆之言, 其父聞而驚訝, 言於親舊之間, 臣以此大銜, 惟以逞憾爲計云。 未知益勳以臣何言爲妄肆, 而言之於何人, 又未知何人見臣大銜, 而言之於益勳也? 藏頭下語, 殊甚陰慘。 臣入仕以來, 不幸冒涉世變, 亦已多矣。 素性迂愚, 不能諧俗, 受人齮齕, 罥罹文網者屢矣。 蒙聖上救釋之恩, 獲保至此, 若使臣有一毫懷私修却之意, 則益勳等之所告, 多是曾所陷臣之人, 何不乘時甘心於此輩, 而反斥益勳爲哉? 萬埰亦豈不知其父之事, 發於輿論之所同然, 而以臣先言於人所未言之前, 仇臣最深, 搆之以探試指揮; 誣之以銜嫌逞憾, 有若臣有私意、有私黨, 手蔽聖聰, 頤指廷議者然, 陷臣不測, 延及諸臣, 欲售其報復之計焉。 視古之蓋愆者, 何其異也? 況其所謂璽、瑛何等凶逆, 而深嫉詗得之人, 未詳其意之何居云者, 噫嘻, 慘矣! 如以詗得凶逆之故, 深嫉其人, 則其罪當如何也? 此其計, 不但爲其父白脫地而已也, 萬埰旣有次骨之怨於臣, 懷憤遣辭, 固難責其擇發, 而亦何以至於此極也? 前世賢人君子之子孫, 雖或有駑下不肖者, 其爲嫁禍流毒之計, 絶未之有。 而向者沃川人趙匡漢之疏, 構誣臣身, 罔有紀極, 至今思之, 毛骨俱竦。 未知受嗾於何人, 而匡漢以先正之後, 遺澤未斬, 而其言之絶悖乃如此, 臣嘗以爲, 此係末世風氣之變, 非謂之常。 今者萬埰疏中之意, 蓋與匡漢相似, 而又益酷矣。 不料先正之門, 又復有萬埰之爲言, 臣於危怖之中, 繼之以傷惋也。
上批以謬戾責之。 持謙以淸名直節, 爲士流領袖, 激揚淸濁, 重忤勳戚。 萬埰之挾其氣勢, 陰欲報復, 已極不韙, 而持謙對疏, 詳悉切直, 譬析情僞, 殆無餘蘊。 公議皆稱快, 而上亦不深斥也。
원본
숙종 10년 (1684)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