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46권, 숙종 34년 7월 22일 병신 2/2 기사 /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김종직의 시호를 회복하기를 예조에서 상소하자 윤허하다
국역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기사년354) 정월에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이 고(故) 판서(判書) 김종직(金宗直)의 시호(諡號)를 정하고 직위(職位)를 추증(追贈)하는 일로써 진백(陳白)하여 임금으로부터 상고하여 품처(稟處)하라는 일로 명령을 내린 자가 이제 20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는데도, 아직까지 복계(覆啓)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중간의 곡절(曲折)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지마는, 대저 김종직의 처음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는데, 뒤에 문간(文簡)으로써 고치었습니다. 그 연대가 매우 멀어서 또한 상고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으니, 그 중간의 사실(事實)은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지마는, 대신(大臣)이 계달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또한 변별(辨別)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대개 이원(李黿)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의논한 사람으로서, 연산조(燕山朝)에 좌죄(坐罪)되어 곽산(郭山)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355) 에 이르러서는 이원까지 가죄(加罪)를 받게 되었으니, 문충(文忠)을 문간(文簡)으로 고친 일은 그 사이에 있었다고 상상(想像)됩니다. 중종(中宗)께서 정국(靖國)하는 데 미쳐서는 제일 먼저 김종직의 원한(寃恨)을 씻어 이미 그 관직(官職)을 회복시켰으며, 또 그의 아내에게 녹미(祿米)를 주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였으니, 문충(文忠)의 복시(復諡)도 마땅히 그 때에 있었어야 할 것인데도 아들이 어리고 화란(禍亂)이 겨우 진정(鎭定)되자, 원통함을 호소하여서 복시(復諡)를 청할 수 없어 적요(寂寥)하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이제까지 복시(復諡)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충의(忠義)의 선비가 개석(慨惜)하고 억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난날 대신(大臣)의 진청(陳請)에 의하여 그 시호를 회복할 것을 윤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까지 천취(遷就)356) 된 것은 진실로 매우 미안하니 즉시 복시(復諡)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9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원문
○禮曹啓曰: "己巳正月, 領議政金壽興, 以故判書金宗直定諡贈職事, 陳白, 自上詳考稟處事命下, 而今至二十年之久, 尙未覆啓。 雖未知其間曲折之如何, 而蓋金宗直之初諡文忠, 後改以文簡。 其年代綿邈, 亦無可考文字, 其間事實, 雖未詳知, 以大臣所達觀之, 抑不無可辨之端。 蓋李黿以宗直議諡文忠之人, 燕山朝坐謫郭山, 及至甲子, 黿竝被加罪, 以文忠改文簡之事, 想在其間, 而逮至中廟靖國, 首雪宗直之冤, 旣復其官, 又廩其妻, 錄用其子孫, 則文忠之復諡, 宜在其時, 而子在幼沖, 禍亂甫定, 未能訴冤而請復, 寂寥數百年, 至今未復, 此所以忠義之士, 慨惜而抑鬱者也。 請依向日大臣陳請, 許復其諡。" 傳曰: "至今遷就, 實甚未安, 卽爲復諡。"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9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숙종 34년 (1708) 7월 22일
숙종실록46권, 숙종 34년 7월 22일 병신 2/2 기사 /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김종직의 시호를 회복하기를 예조에서 상소하자 윤허하다
국역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기사년354) 정월에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이 고(故) 판서(判書) 김종직(金宗直)의 시호(諡號)를 정하고 직위(職位)를 추증(追贈)하는 일로써 진백(陳白)하여 임금으로부터 상고하여 품처(稟處)하라는 일로 명령을 내린 자가 이제 20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는데도, 아직까지 복계(覆啓)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중간의 곡절(曲折)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지마는, 대저 김종직의 처음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는데, 뒤에 문간(文簡)으로써 고치었습니다. 그 연대가 매우 멀어서 또한 상고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으니, 그 중간의 사실(事實)은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지마는, 대신(大臣)이 계달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또한 변별(辨別)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대개 이원(李黿)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의논한 사람으로서, 연산조(燕山朝)에 좌죄(坐罪)되어 곽산(郭山)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355) 에 이르러서는 이원까지 가죄(加罪)를 받게 되었으니, 문충(文忠)을 문간(文簡)으로 고친 일은 그 사이에 있었다고 상상(想像)됩니다. 중종(中宗)께서 정국(靖國)하는 데 미쳐서는 제일 먼저 김종직의 원한(寃恨)을 씻어 이미 그 관직(官職)을 회복시켰으며, 또 그의 아내에게 녹미(祿米)를 주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였으니, 문충(文忠)의 복시(復諡)도 마땅히 그 때에 있었어야 할 것인데도 아들이 어리고 화란(禍亂)이 겨우 진정(鎭定)되자, 원통함을 호소하여서 복시(復諡)를 청할 수 없어 적요(寂寥)하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이제까지 복시(復諡)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충의(忠義)의 선비가 개석(慨惜)하고 억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난날 대신(大臣)의 진청(陳請)에 의하여 그 시호를 회복할 것을 윤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까지 천취(遷就)356) 된 것은 진실로 매우 미안하니 즉시 복시(復諡)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9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원문
○禮曹啓曰: "己巳正月, 領議政金壽興, 以故判書金宗直定諡贈職事, 陳白, 自上詳考稟處事命下, 而今至二十年之久, 尙未覆啓。 雖未知其間曲折之如何, 而蓋金宗直之初諡文忠, 後改以文簡。 其年代綿邈, 亦無可考文字, 其間事實, 雖未詳知, 以大臣所達觀之, 抑不無可辨之端。 蓋李黿以宗直議諡文忠之人, 燕山朝坐謫郭山, 及至甲子, 黿竝被加罪, 以文忠改文簡之事, 想在其間, 而逮至中廟靖國, 首雪宗直之冤, 旣復其官, 又廩其妻, 錄用其子孫, 則文忠之復諡, 宜在其時, 而子在幼沖, 禍亂甫定, 未能訴冤而請復, 寂寥數百年, 至今未復, 此所以忠義之士, 慨惜而抑鬱者也。 請依向日大臣陳請, 許復其諡。" 傳曰: "至今遷就, 實甚未安, 卽爲復諡。"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9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원본
숙종 34년 (1708) 7월 22일